김훈 강연
<당파성 있는 글을 버릴 때>
글쓰기에 대한 얘기를 해 달라고 하는데, 요즘 보고 있는 고려역사부터 얘기하죠.
고려에서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쓰죠.
그의 글쓰기의 태도와 내용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가 살던 시기는 고려가 몽고의 침략을 받아 항쟁하던 시대와 일치하죠.
강화도에서 항쟁한 것은 육지에 사는 백성의 삶을 포기한 것입니다.
고려의 작전은 백성들을 산이나 섬으로 이주시키는 것이었죠. 청야(淸野) 전략입니다. 들을 비운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것은 지극히 어려웠습니다.
몽고는 고려인 포로를 앞세워 고려를 공격했습니다. 고려인민의 피와 기름을 불쏘시개로 만들어 고려의 성을 공격한 것이죠.
이때 일연은 전국을 유랑했습니다.
일연이 경주에 갔을 때 경주는 모두 잿더미였습니다. 폐허의 경주를 본 것이죠.
하지만 일연은 삼국유사를 쓰면서 폐허가 된 경주에 대해서는 일언반구가 없었습니다.
삼국유사는 일연이 전국을 다니며 자료를 수집해서 쓴 것인데, 권력이 있었던 김부식과는 달리 매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일연은 황룡사가 불타버린 경주를 보면서, 산천에 유랑하는 백성에게 남아있는 노래, 그들의 구전, 민담을 모아서 삼국유사를 쓴 것이죠.
황룡사가 가지고 있는 꿈, 이룩하려했던 인간다운 가치와 자유의 꿈이 어떠했는가를 써놓은 것입니다.
그가 고려에 대해 쓰지 않은 것은 잿더미에 관한 것이 아무런 전망을 달성하지 못할 것이었기에 그랬던 것이죠.
나는 일연이 자료를 수집하면서 전국을 유랑하고, 불타버린 경주를 목도하고, 말년에 집필하는 모습을 눈물 없이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일연은 현실의 황폐함을 쓴 것이 아니고, 그 배후의 인간이 도달해야 할 가치를 쓴 것이죠. 인간의 본질의 세계는 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신념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황룡사편, 만파식적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고려시대 글쟁이였던 일연의 태도이죠.
하지만 그런 글쓰기가 그 시대에 많았던 것은 아닙니다.
고려의 귀족 이인로, 이규보, 최자는 파한집, 보한집, 그리고 엄청난 시와 가사를 남긴 최고의 엘리트지식인들입니다. 다섯손가락에 꼽히는 명문가 출신이죠.
죽림고회란 것을 만듭니다.
그들은 자기의 애첩의 미묘와 교양을 친구들에게 자랑했죠. 자기가 시를 얼마나 잘쓰느냐, 사는 집, 주변 환경이 얼마나 빼어나냐는 것이 그들의 자존심이었습니다.
보한집은 매우 우아하고 귀족문화를 완성하는 것이었죠.
이인로는 고려 최대의 문장가입니다. 어묘(語妙)를 얘기했죠.
다시 말해서 표현이 기발하고 우수하고 놀라운 것이 좋은 글이다, 라는 것이죠.
반면 이규보나 최자는 표현이 아니고, 뜻이 중요하다고 했죠.
사유와 의식의 체계, 뜻의 훌륭함이 담겨 있는 것이 좋은 글이다. 최자는 문장은 유기체라 했습니다. 표현, 뜻 등이 다 들어있어야 한다고 했죠. 어느 한 쪽이 빠져있는 것은 문장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최자는 좋은 문장을 이렇게 표현했죠.
우선 기(奇), 신기할 기. 남이 미처 생각못한 놀라운 것이죠.
그리고 장(壯), 웅장하고 힘찬 것.
화(華), 화려하고 표현이 풍부한 것이죠.
신(新), 새로운 것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경(驚), 남을 놀라게 한다는 것이고,
고(高), 고매해야 한다는 것이죠.
화(和), 너그러워야 한다,
유(幽), 그윽하고,
호(浩), 넓고 호탕해야 한다는 것이죠.
반면 나쁜 문장은,
생(生), 익지 않은 날것이란 뜻이죠.
병(病) 병들거나,
소(疎) 엉성하고 사유가 치밀하지 못한 걸 얘기하죠. 사유와 사유 사이에 공간이 있는 걸 말합니다.
야(野) 세련되지 못한 것, 야만스러운 것이죠.
졸(拙) 졸렬하다는 것입니다. 치졸하고 쭉쭉 뻗어나가지 못하는 것이죠.
또 천(賤) 생각이 비천하고 고상하지 못한 것.
척(尺), 잣대가 없는 것이죠.
비(鄙) 비루한 세계관의 표현이라는 것이죠.
일연의 글쓰기와 고려 귀족들의 글쓰기가 한 시대에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한 그 문화는 매우 불안전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귀족의 글쓰기는 백성의 삶과는 하등 관련이 없었어요.
하지만 어느 한 쪽의 글쓰기가 옳은 것 아닙니다. 문화의 완성 면에서는 다 있어야 되는거죠.
매우 위태로운 생각일 수도 있는데, 글쓰기는 현실과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해석하느냐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 시대의 풍경을 반영하거나 그 일부분이 되는 것이죠.
훈민정음을 만들 때, 최만리의 반대상소는 매우 웅장했습니다.
그의 주장은 글자는 포네틱 (phonetic) 심벌이 아니다, 글자에는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글자의 본질은 의미에 있기 때문에, 표음문자를 반대했죠.
한자를 빌려서 조선이 세계 최고의 수준의 문장을 이뤘기 때문에, 우리가 바로 중앙이란 얘기죠. 따라서 한자는 우리의 글이란 것입니다.
보수적 지식인의 문화적 자존심에 가득찬 것이죠.
그는 이어서 한글을 발표하면 후세에 우리 백성들이 문맹이 될 것이라고 했어요.
우리 나라의 고전을 우리가 읽을 수 없다면 문맹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한글반포에 대한 판단은 꿩을 쏘느냐 매를 쏘느냐와는 다른 매우 심각한 것이라고 했죠.
훈민정음은 일종의 뉴미디어입니다.
최만리가 있었던 것은 훈민정음의 반포를 문화적으로 보강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미비점을 보강한 것이죠.
훈민정음으로 글쓰기를 한다고 해도 최만리가 지적한 점을 우리가 극복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최만리를 비난하는 것은 야만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일연처럼 글을 쓰고 있습니다.
지금 강화의 귀족지식인처럼 글을 쓸 수도 없는 것입니다.
최만리처럼 표의문자의 장중함에 매달릴 수도 없는 것이죠.
나는 이문제에 대해 삶의 구체성에 입각한 글을 쓸 수 밖에 없겠구나, 란 생각을 합니다.
고려 귀족의 글은 지나간 시대의 아름다움으로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시대는 삶에 뿌리 박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시대의 언어는 삶의 구체성에 의지하기 보다는 당파성에 의지하고 있어요.
당파성에 매몰된 자들의 눈에는 현실의 올바른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당파성을 선(善)이라고 주장하는 한 현실을 올바로 볼 수 없죠.
당파성에 매몰된 언어의 특징은 의견과 사실을 구별못하는 것입니다.
그 둘이 섞이면 인간의 언어는 소통되지 않습니다.
당파성에 매몰된 글의 특징은 뻔뻔스러움입니다.
자신의 당파성을 정의라고 말하는 뻔뻔스러움이죠.
소통을 가로막고 말을 하면 할수록, 글을 쓰면 쓸수록 단절에 기여하는 것이죠.
현재 단절이 거의 완성되었습니다.
모든 언어는 팔부능선의 고지에서 당파성의 이름으로 시대의 들판에 소총을 쏘아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시대 지배적 언어의 풍경이죠.
난 해답은 없습니다. 다만 해결할 수 없는 고뇌를 함께 할 수 있는거죠.
그럼, 왜 이러나.
왜 현실이 아닌 당파성에 기대고 있는가.
이것은 언어 문제뿐 아니라 역사성의 문제입니다.
내가 자주 가는 곳 중 하나는 남한산성입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한 번씩 갑니다.
그곳은 병자호란 때 참혹한 수치가 벌어졌던 곳이죠.
인조임금이 40일 저항하다 투항했습니다. 그 40일간 뭘 했느냐, 주전파와 주화파가 논쟁을 했습니다.
청나라 군대와 단 한번의 교전이 없었죠.
주전파 주화파 어느쪽 명분도 다 옳고 어느쪽 명분도 다 틀린 것입니다.
끔찍한 논쟁이 벌어진 것이죠.
청나라에서 최후 통첩을 보냈습니다.
그 글은 청태종이 보낸 것이죠.
“너희가 살기를 원하면 성문을 열고 나와서 투항하라.
너희가 죽기를 원하면 성문을 열고 나와서 붙자.”
인조는 강한자에게 빌어서 사는 길을 택했습니다.
10여개에 달하는 굴욕적 강화조약이 체결됐고, 청에 대한 사대가 시작됐습니다.
이것이 구한말 일본이 이기고 청이 질때까지 계속된 거죠.
인조는 빌어서 국토와 백성을 보존한 것입니다.
인조는 서쪽문 곧 개구멍으로 나가서 투항한 것이죠.
이것은 자랑이나 수치가 아닌 생존술입니다.
이 자체가 경건하고 위대하고 감동적인 것이죠.
삼전도에서 땅에 이마를 아홉 번 대고 빌고, 청태종에게 술을 따라서 치욕을 감당하고 삶의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 폄하되거나 비난되거나 과소평가되어선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삼전도비는 우리 역사의 치욕입니다.
청태종의 은혜를 기리는 투항기념비죠.
삼전도비는 이경석이라는 지식인이 글을 썼고, 글씨는 당대 최고 명필인 오준이 썼습니다. 이경석은 기력이 웅장하고 광활해서 정묘호란 때 모든 지방으로 보내는 격문을 쓰기도 했던 사람입니다.
병자호란이 났을 때는 임금을 모시고 남한산성에 들어왔습니다. 너무 오래산 거죠.
삼전도비에는 웅장하고 광활한 기상이 들어있습니다.
청나라에서는 이경석을 유용하게 보게 됩니다.
전후 문제를 논의할 때 이경석이 중재를 많이 합니다.
효종이 나중에 북벌정책을 세웁니다.
그게 밀고에 의해 청에 알려지고, 청나라 사신이 조선의 영의정, 우의정, 좌의정을 때려잡으려고 옵니다.
청은 당시의 영의정 이경석을 사형시키라고 합니다.
임금이 빌어서 이경석은 귀향가는데 그치죠. 거기서 죽습니다.
오준은 당대 최고의 명필, 지식인인데, 삼전도비의 글씨를 쓴 것이 한이 되어 홧병으로 죽었습니다.
이경석 같은 지식인의 삶을 보면, 비극과 치욕을 총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한 역사를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상황을 두고, 선악과 미추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야만적인 것이죠.
나는 조선 사육신의 역사를 읽어 봐도, 신숙주나 최항 등 세조의 편에 섰던 지식인을 생각합니다.
사육신을 배반하고 세조와 더불어 조선이라는 나라를 만들어가죠.
경국대전을 만들고, 변방을 튼튼히 하고 제도와 나라를 튼튼히 합니다.
사육신은 대단히 찬란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국가의 정통성, 규범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가르쳐 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죽었죠.
그들이 죽음으로써 그들은 이미 보상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길이 충신으로 기억되고 도학적 명분의 아름다움을 후대에 전한 거죠.
나는 나라를 경영하기 위해서 그런 지식인들만 필요했던가를 돌이켜 봅니다.
교과서를 보니, 사육신을 추켜세우고, 세조편을 깎아내리고 있더군요.
이는 우리 아이들을 돌대가리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 때는 선악미추를 적용할 수 없는 절박함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념이나 당파성보다는 역사적 삶의 구체성이 모든 판단과 글쓰기의 잣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정당하고 올바르고 찬란하고 비분강개하는 글은 병자호란과 같은 상황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삼전도비를 보고 한 지식인이 쓴 시가 기억납니다.
“군사를 움직일 길은 전혀 없고, 가엾은 문장에는 시비만이 걸려있다.”
역사가 계속되는 한 시비가 계속되는 것을 한탄하는 거죠.
다시 글쓰기의 문제로 돌아오겠습니다.
선악미추의 잣대로 들여다보고 글을 쓴다면, 현실과 과거 역사를 보는 우리의 안목과 우리의 포용력이 현실의 구체성을 배반하는 결과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매우 명석하고 매우 뚜렷한 글을 쓸 수 있지만, 삶의 구체성을 배반한 것이죠.
당파적 진실이 글의 진실을 담보해내지 못합니다.
구체성이란 무엇인가는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그 언어적 장치로 6하원칙을 말하죠.
하지만 6하를 모두 꿰어 맞추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보통 3개나 4개를 쓰죠.
사건 현장에 가면, ‘누가’를 모르는데, ‘왜’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언제’는 범인을 잡아봐야 아는 것이고. 요행히 다 알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사건의 진실을 말하는 것과는 아닙니다.
내가 대안은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단지 불신을 갖고 있죠. 6하가 진실을 전하는 충분한 수단이 아니라는 것 말입니다.
난 포도주를 마실 때마다 다양한 맛에 대응하는 인간의 언어가 없다는 것에 대해 무력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프랑스어 교수에게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프랑스인들은 포도주의 맛을 표현하는 독특한 언어가 있었어요.
“구조가 튼튼하다, 미끈거린다, 뒤뚱거려서 불안하다”는 표현을 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없는 어휘죠.
포도주를 마실 때도 어휘의 무력감을 느끼는데, 그러면 술맛 다 떨어집니다.
하물며, 이 시대의 복잡하게 얽힌 전체를 들여다보면 무력감을 느끼죠.
새로운 언어적 장치가 개발되지 않는 한, 우리의 글쓰기는 새로운 미래를 지향하기 어렵습니다.
6하원칙에 매달려서는 이미지를 앞세우는 새로운 매체를 따라가기는 어렵습니다.
집에서 조선일보·국민일보를 보는데, 6하원칙을 보강하는 새로운 시도가 있을까, 그걸 넘어서는 새로운 장치의 실험, 그 결과가 있을까 하는 기대를 있는데, 아직 그런것들을 볼 수 없더군요.
한국어를 쓴다는 것은 조사를 쓴다는 것입니다.
한국어를 읽는다는 것은 조사를 읽는다는 것이죠.
한국어는 조사에 의지합니다. 조사를 읽지 않고는 문장을 이해할 수 없어요.
형법에 보면, “타인(他人)을 기만(欺瞞)하여 재물(財物)을 편취(便取)하는 자를 사기(詐欺)라 한다”란 표현이 있는데, 한국어는 조사 뿐입니다.
남을 속여서 돈을 뺏어먹는 자를 사기라 한다고 하면, 의미 규정력이 떨어집니다.
조사 얘기를 더 하겠습니다. 흔히 “재벌 총수 아무개씨가 몇 월 몇 일 어디에서 자살했다”고 씁니다.
이때 “아무개씨는” 이라고는 쓰지 않습니다.
정책을 발표할 때는 “재벌총수 아무개씨는 ...” 이라고 씁니다.
“는”과 “가”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
국문법 책들을 뒤져봤는데, 설명이 없었습니다.
신문은 주격조사를 뒤죽박죽해서 씁니다.
황지우 시인은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라고 했습니다. 시적이죠.
나라면 “새들이 세상을 뜨는구나” 라고 했을 것입니다.
“새들도”에는 인간의 감성이 들어가 있는 것이죠. “새들이” 라고 하면 훨씬 잔혹한 문장이 되었을 것입니다.
“새들은”은 “새들이”보다도 더 비정하고 냉혹하죠.
“새들은”에서는 인간이 빠진 것입니다.
“새들이”에는 그걸 바라보는 인간이 관여된 것이죠.
인간은 한 관찰자로 옆에 있습니다.
“새들은”에서는 인간이 실종됐죠.
“새들도”에는 의견과 사실이 뒤섞여 있는 것입니다.
“새들이”에는 의견이 빠집니다.
의견과 사실을 구별한다는 것은 조사를 골라쓰는 것이죠.
그걸 골라서 쓰는 것은 괴로운 것입니다.
칼의 노래의 첫문장은 이렇습니다.
처음에는 “버려진 섬마다 꽃은 피었다”고 썼죠. 그런데 읽어보니 뽕짝냄새가 나는 거예요. 며칠 고생해서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는 걸로 바꿨습니다. 한 글자 바꾼거죠.
“내가 너를 불러도 대답은 없다” 와 “내가 너를 불러도 대답이 없다”는 다릅니다.
언어라는 것은 포도주를 마실때도 괴롭듯이 매일 무력감 속에서 해결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신문에서 “정부는”을 주어로 하는 기사는 재미가 없습니다.
아마 “정부는”이라고 쓰는 기사에는 별로 독자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 기사는 전망과 목표를 먼저 얘기하고 사실은 두 번째 문단이나 나중에 나옵니다.
내 생각에는 정책목표는 맨나중에 나오는 것이 맞을 터인데 말이죠.
그래서 정부가 나오면 기사가 재미 없습니다.
게다가 때때로 의견과 사실이 한 문장안에 뒤죽박죽입니다.
논리적으로 명백하지 못하고, 가독률이 떨어지고, 글의 신빙성이 낮아집니다.
당파성에 매몰된 시각이나 언어를 가지고는 복잡한 현상을 기술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 언어가 시대 소통을 단절시킵니다.
의견과 사실을 구별해서 말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6하를 넘어서고 보강하는 새로운 글쓰기의 틀을 도입해야만 이미지를 앞세우는 미디어에 더 이상 밀리지 않을 것입니다.
조사와 같은 글쓰기의 문제에서도 의견과 사실이 착잡하게 뒤범벅되어 우리앞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나는 결론이 없는 것을 전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나는 일호정연(一毫整然)한 말을 하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끝-
강연이 끝난 뒤 문답시간의 대화록.
** 허무적이 아니냐는 비난에 대한 저의 입장은 이렇습니다.
나는 이념적 당파성의 편은 아닙니다.
난 인간은 개별적 존재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죠.
어떤 작가는 인간은 집단적이고 계급적이고 공동체적인 것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어요. 아마 황석영, 조정래 등 내가 존경하는 분들은 그런 듯 합니다.
난 임진왜란을 쓰더라도 이순신을 씁니다. 편협하죠.
인간은 계급적이고 공동체적인 존재라는 전제가 인류 보편에 적용될 수 있는 진실이라 하더라도 인간은 개별적 존재라는 전제를 충족하지 않는 한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내 문체는 처음에는 긴문장을 썼어요.
한 문장이 원고지 5-6매에 해당했습니다.
한 센텐스가 완벽한 세계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칼의 노래에는 짧은 중중모리를 썼습니다.
나중엔 힘이 빠져서 중모리밖에 안됐죠.
진양조로는 어림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휘모리나 자진모리로 나가자는 전략을 썼어요.
난 한문이 가지는 언어적 긴장을 매우 좋아합니다.
모국어의 문화적 능력을 별로 신뢰하지 않아요. 나는 내가 내 모국어를 사랑하기 때문에, 내 모국어가 얼마나 불안정하고 빈약하고 형성과정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철학을 우리 모국어의 언어적 질서로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모국어는 서정시를 쓰기 좋은 것입니다. 가시리 가시리잇고 처럼.
그 외에는 신뢰하기 어려운 글자라고 생각합니다.
틀린 생각이었으면 좋겠는데, 틀린말이 아닐 것입니다.
나는 한자의 긴장감을 좋아합니다. “최근접 거리”란 말이 갖는 긴장감은 “가장 가까운 거리”라는 말과는 다릅니다.
나의 편견은 올바른 것이 아니길 바라는데, 나는 그렇게 씁니다.
“칼이 들어가 적을 살(殺)하였다” 라고 쓰지 “칼이 들어가 적을 죽였다”고 쓰지 않습니다.
“죽였다”고 말할 때는 연민이라든지 죽임의 과정에서 벌어지는 지저분한 인간의 정서가 느껴집니다.
조선시대 병법은 다 “살(殺)”이라고 나옵니다.
살(殺)하는 것은 전문적이고 객관적인 동작을 의미하는 기술용어입니다.
이걸 비난하더라도 그걸 쓸 수 밖에 없는 내적 필연성을 가지는 것이죠.
*** 문장에 대해서는 데스크가 하는 일이기 때문에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그래도, 사진 설명을 들어 조금 얘기하죠.
사진은 그 자체로 최고의 설명입니다.
설명이 필요없는 사진에도 설명이 붙어 있는 경우가 있어요.
반면 설명이 좀 더 많았으면 하고 생각되는 것도 있었습니다.
북한의 선군8경 우표의 경우 설명이 더 자세할 필요가 있는 듯 합니다.
다만, 최근에 조선일보의 사진설명이 바뀌고 있더군요. 더 서정적으로 느껴집니다.
언론이 사실과 객관에 입각한 정통적인 저널리즘이기를 포기하고 하나의 세력으로 존재하는가, 라는 두려움이 나에게 있습니다.
무서운 질문이죠. 나는 거기에 직면해 있는 거예요. 의견과 사실을 구별하는 문제가 이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죠.
나는 우리시대의 언론은 하나의 세력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말의 순결성을 위해서는 매우 비극적인 사태가 아닌가 싶은데, 의견을 말함으로써, 세력화될 수도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 의견은 반드시 정확한 사실에 입각해야 합니다.
객관적 사실에 입각하지 않고 말하는 의견은 욕망이죠.
사회적 의견이 되려면 객관적 사실에 입각해야 합니다.
모든 욕망이 동등하고 보호받을 가치가 있다고 전제하고 있는 사회죠.
나의 욕망과 너의 욕망이 연대되어 다수의 욕망을 형성하고, 다수의 욕망은 이념적 명분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이데올로기의 탈을 쓰게 되고, 그것은 정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정의들끼리 연합해 세력을 이루는 것인데, 욕망에 바탕하기에 허구이고, 시대의 앞날을 말하기에 위태로움입니다.
*** 한국일보 기자시절 지치고 피곤하고 불화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89년 12월 31일에 회사를 떠났죠.
치욕을 밥먹듯이 장복을 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90년대가 시작되니까 굶어죽더라도 떠나자 했다가 1년 후 쌀이 떨어져서 다른데 들어갔습니다.
밥 벌어 먹으려고 소설을 쓰는 건 아니지만, 써서 밥을 먹을 수 없다면 안 썼을 것입니다.
*** 우리 집 옆에 여고생들이 3백명 오고 갑니다.
난 얘들이 그렇게 이쁠 수 없어요.
한 두 명이 아니라 다 이뻐요. 얘들을 보면 인간은 확실히 의심할 바 없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난 체육시간 때 학생들이 뛰는 것을 교문틈으로 봅니다.
젊은 여자의 생명은 얼마나 찬란하고 아름다운 것이냐를 치열하고 객관적이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묘사하자는 전략입니다.
그런데 내가 그린 여자들은 인간의 성격이나 기능이 없는 여자였어요.
여성성이라는 생명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데는 어느 정도로 글이 된 듯한데, 기능, 성격, 인품까지는 못 간 것입니다.
다음 작품에서는 포부와 전망까지 그려보려 합니다.
요즘은 여자의 생리에 관한 글을 쓰려고 합니다.
여자의 생명현상이 여자의 생식기관 안에서 내분비 작용을 거쳐서 출혈로 나타나는 무섭고도 신비하고 놀라운 과정이죠.
의대에서 보는 생리학 책을 보고, 패드를 몇 개씩 사서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의 미숙성의 결과로 아직도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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