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토마스 하디]] (1,4,3,3,1)

카지모도 2020. 8. 13.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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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토마스 하디]]

<양심 때문에> <환상을 쫓는 여인> <아내를 위하여> <세 사나이>

 

 

<양심 때문에>

-토마스 하디 作-

 

***동우***

2013.05.08 05:26

 

토마스 하디(Thomas Hardy, 1840~1928)의 단편 '양심 때문에'

 

'양심'이란 삶에 있어서 보편적 덕목으로만 작용하지는 않는가 보다.

그것을 코에 걸면 ‘독선’이 되기도 하고 ‘이기(利己)’를 위장한 도구이기도 한 것이다.

 

흐음, 필경 토마스 하디는 팔자론자(運命論者)일시 분명하렷다.

‘하디’의 '테스'도 그러하더니 이 소설도 상당히 비관적인 톤의 소설이다.

‘양심 때문에’

재미있지만 읽고나니 좀 헛헛하구나.

세상살이라는 게..

 

 

<환상을 쫓는 여인>

-토마스 하디 作-

 

***동우***

2014.11.09 04:59

 

영(靈)과 육(肉)이라거나 정신과 물질이라거나 겉궁합과 속궁합이라거나...

두루두루.

안성맞춤으루다 딱 들어맞는 천생배필의 부부어디 있으랴.

금성에서 온 여자의 감성과 화성에서 온 남자의 기질인데, 어찌 한치 어긋남없이 완벽하런가.

 

'토마스 하디'의 팔자론.

에인절 이라는 어줍잖은 이상주의자와 사랑에 빠졌다가 교수대의 이슬로 스러진 '테스'의 비극처럼.

 

환상을 좇는 ‘엘라’.

단한번의 상면(相面)도 없는 사람을 향한 환상.

불같은 격정도 아니었건만, 멀쩡한 제자식을 사생아로 만드는구나.

 

<어쩐지 그럴 것 같더라니까. 마치밀은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그놈하고 하숙집에서 놀아났었군! 어디 보자! 날짜가 8월 둘째주고 태어난 것이 5월 세 번째주니...그래...그랬었군. 저리 가라! 이 못된 놈아. 넌 나와는 상관없는 놈이다!>

 

아래는 이문열의 해설.

 

++++

<외날개의 새>

-이문열-

 

사랑은 그 자체와 지극히 혼동하기 쉬운 두 개의 유사물을 가지고 있다. 육욕과 환상이 그러하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또한 사랑의 두 날개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사랑은 그 두 날개 중 어느 것이 없어도 온전하게 날지 못한다.

[환상을 쫓는 여인]은 바로 그런 불구한 사랑과 그것이 집어내는 엉뚱한 비극이다. 여주인공 엘라는 겉보기로는 유복하면서도 별 특징 없는 유부녀지만 내면으로는 엄청난 열정과 욕구를 지닌 여인이다. 남편은 현실적으로는 유능하고 합리적인 사람일지 몰라도 시심을 숭앙하는 엘라에게는 다만 물질적이고 둔감한 속인으로만 느껴진다. 요컨대 육욕은 채워줄 수 있어도 환상을 품게 할 수는 없는 인간이었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시인 트리위를 향한 엘라의 사랑은 어쩌면 남편과의 사랑이 달아주지 못한 환상의 날개를 갖추기 위한 엘라 나름의 절실한 노력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상을 달리하다 보니 결국 두 사랑은 모두 불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오직 환상만으로 사랑을 꿈꾸다 절망한 트리위가 끝내 엘라의 사랑을 알아채지 못하고 자살하자 비극은 차례로 전염된다.

먼저 비탄으로 쇠약해진 엘라가 아이를 낳다 죽고 육체 없는 사랑이었기에 오히려 과장되어 남겨진 그 사랑의 유물들은 남편까지 불행으로 몰아넣는다. 뒤늦은 배신감과 분노로 정신을 잃은 남편은 멀쩡한 제 자식을 죽은 아내의 부정이 끌어들인 남의 핏줄로 단정하는 지경에 이른다.

작가 토마스 하디는 19세기 후반의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원래는 건축을 공부하다가 당시의 인기소설가인 메레디스에게 인정받아 문단에 나왔다. 우리에게는 그의 대표작인 [테스]와 [귀향]으로 잘 알려져 있고 그밖에 [케스브리지의 시장] [미천한 사람 주드] 그리고 만년에 쓴 3부작 [패왕]등이 있다.

하디는 비극주의적 정명론을 자신의 철학으로 신봉했는데 그 흔적은 [환상을 쫓는 여인]에도 엿보인다. 엘라와 그 남편, 그리고 시인 트리위가 겪게 되는 불행은 개인의 능동적 선택이라기보다는 그가 말한 내재의지 에 의해 결정된 불변의 인간형을 바탕으로 설명되고 있다.

++++

 

골분(骨粉)마저 산야에 스며 자취 한점없는... 

인연의 슬픔이여.

삶과 죽음의 경계 그리 명확하건만, 떠나보낸 자의 빈자리는 자못 몽롱합니다그려.

 

리딩북, 빙모상으로 며칠 쉬었습니다.

 

 

<아내를 위하여>

-토마스 하디 作-

 

***동우***

2017.01.24 04:21

 

'토마스 하디(Thomas Hardy,1840~1928)'의 '아내를 위하여(To please his wife)'

우유부단한 숫보기 사내 ‘졸리프’.

소극적이고 착한 마음씨의 ‘에밀리’.

질투심 많고 욕심꾸러기인 ‘조안나

 

사랑과 질투.

역전(逆轉)과 파국(破局).

멜로드라마적인 요소가 모두 녹아있는 소설.

그렇지만 문호(文豪)의 작품인지라 품격이 있습니다.

 

끊임없는 비교의식과 불만족, 상대적 박탈감.

나의 현실 속 무수한 ‘조안나’를 봅니다.

그리고 내 안에 있는 ‘졸리프’도 봅니다.

 

사람은 저마다 팔자라는게 진짜 있는걸까요?

(옛날 내 어머니는 점집을 가끔 찾아다녔는데) 나는 무당이나 점 같은걸 절대로 믿지 않습니다만 때로 사유나 의지가 무위롭다고 느낄 때가 없지 않습니다그려.

 

토마스 하디의 비관주의적 세계관.

성격과 환경이라는 ‘내재적 힘(Immortal Will)’에 의한 팔자주의.

토마스 하디의 ‘테스’도 슬프고 ‘주드’도 슬프고 ‘조안나’도 슬픕니다

 

따지고보면 기독교적 세계관도 일종의 팔자주의가 아닐런지요.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 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 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바울->

 

***momo***

2017.01.25 16:57

 

역시 비운의 소설이네요...

하아디에게 즐거운 현실은 없었을까요?ㅠㅠ

동우님의 서평을 매일 읽지 못해서 아깝습니다.

이렇게 좋은 블로그를...

많은 사람들이 오지 않는 혹은 눈팅만 하고 간다는 게 아깝습니다.

 

떡국과 함께 구정 잘 보내세요!

 

***┗동우***

2017.01.26 04:26

 

이렇게 좋은 블로그... 

문향님의 상찬의 말씀에 입을 헤벌립니다.ㅎ

모모님 같은 독자야말로 나의 보람이랍니다.

 

눈팅으로 가끔 모모님댁 행복한 가족 모습 엿봅니다.

모쪼록 복되고 즐거운 설 명절 쇠십시오.

 

 

<세 사나이>

-토마스 하디 作-

 

***동우***

2017.03.21 04:30

 

토마스 하디(Thomas Hardy, 1840~1928)의 '세 사나이'

예전에 청소년소설로 읽으신 기억 있을런지도.

오늘 내일 두번으로 나누어 올립니다.

 

빅토리아 조(朝) 후기, 찬란한 대영제국 이면(裏面)의 풍경화.

영국 어느 황량한 지방의 외딴집.

세례 축하 파티가 벌어지고 있는 .

 

밖에서는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습니다.

그 외딴집에 찾아온 세 사람의 불청객.

무언가 드라마틱한 분위기 가득합니다만, 글쎄요.

 

내일, 마저.

 

***동우***

2017.03.22 03:45

 

양치기 집의 이름, ‘까마귀의 보금자리’

작가가 묘사하는 그 고장의 풍광과 기후.

척박한 환경이지만 술과 음악과 춤이 있고 인정이 있습니다.

 

둘째 딸의 세례축하잔치.

청하지 않은 손님이 빈객(貧客)일지라도 자못 빈객(賓客) 접대도 가당한 즐거운 날입니다.

세사람의 불청객.

탈옥한 사형수와 그를 목매달려고 온 사형집행인.

그리고 형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려고 온 사형수의 동생.

 

비바람 몰아치는 밤.

잔치가 한창인 양치기의 집(까마귀의 보금자리)에서 세사람이 조우(遭遇)하여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을 죽일 사람을 대하는 탈옥수의 태연자약함.

여유만만하게 그는 도망치는데 성공합니다.

50년전 일어난 일인데, 그의 배짱과 용감한 행각은 그 지방사람들에게는 로빈훗처럼 존경을 받았던가 봅니다.

 

양한마리 훔쳤다고 사형이라...

당시 가혹한 형벌에 대한 민중들의 소극적 반발이었을테지요.

어쩌면 영국 어느 지방에 이 비슷한 사건이 실제로 있었던지도 모르겠습니다.

 

영국에 인권이라는 개념이 자리답기 시작한 것은 근세에 들어와서였지요.

빅토리아조의 영광, 그리고 산업혁명의 뒤안길에는 참혹한 인권적 현실이 있었습니다.

그 무렵, 조선왕조였던 우리나라보다도 더욱.

사형에 처할 수 있는 죄목이 무려 300종, 이를테면 1실링을 넘는 현금이나 5실링을 넘는 가치의 물건을 훔친 자, 말이나 양을 훔친 자, 귀족의 사유지에서 토끼를 밀렵한 자는 교수형에 처해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어린이'라는 개념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올리버 트위스트’를 읽어보면 알쪼 아닙니까?

10살도 아니된 아이들이 열악하기 그지없는 환경 속에서 하루 15시간 공장에서의 노동을 강요 당하였습니다.

아이들의 인간성은 완전 기계화 노예화되어 무감각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런던에서 자본론을 집필하였던 마르크스에게 그런 현실은 강력한 동기부여가 되었지 싶습니다.

 

여권(女權)이라는 것도 역시.

‘팽크허스트’가 감옥을 들락거리고 ‘에밀리 데이비슨’이 질주하는 경주마에 뛰어들어 죽고 하는등 파란만장한 사건을 겪고 1차세계대전이 끝나고나서야 겨우 여성참정권이 허용되었던 나라가 바로 영국이었습니다.

그것도 서른살 넘은 여성에게만.

 

박상익 교수의 '나의 서양사 편력' 책장을 다시 펼쳐 서양사의 여러 장면들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그 장면 장면들이 축적된 그들의 힘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작금 겪고 있는 우리의 여러가지 불편한 장면들,

그러나 땅은 비온 뒤 더욱 굳는다지 않습니까.

이 장면들이 영화관을 나서면 잊어버리는 헛된 영상이 되어서는 안되겠지요.

 

'토마스 하디'의 '세 사나이'

소설과 별 상관없는 엉뚱한 객설이었습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