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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 亂中日記 (14) -李舜臣-

카지모도 2021. 1. 28. 0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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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기록에없음

 

계사년 5월 (1953년 5월)

 

 

5월 초1일 [양력 5월 30일] <甲寅>

맑다. 새벽에 망궐례를 하였다.

 

5월 초2일 [양력 5월 31일] <乙卯>

맑다. 선전관 이춘영이 임금의 분부(유지)를 가지고 왔다.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적을 섬멸하라"는 것이었다. 이 날 보성군수 (김득광)·발포만호(황정록) 두 장수가 와서 모이고, 나머지 여러 장수들은 정한 기일을 물렸기 때문에 모이지 못하였다.

 

5월 초3일 [양력 6월 1일] <丙辰>

맑다. 우수사(이억기)가 수군을 거느리고 왔는데, 수군들이 많이 뒤떨어져 한탄스럽다. 선전관 이 춘영이 돌아가고, 이순일도 왔다.

 

5월 초4일 [양력 6월 2일] <丁巳>

맑다. 오늘이 곧 어머니 생신날이건만 이런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축수의 잔을 올리지 못하니, 평생 한이 되겠다. 우수사 및 군관들과 함께 진해루에서 활을 쏘았다. 순천부사도 모여서 약속 하였다.

 

5월 초5일 [양력 6월 3일] <戊午>

맑다. 선전관 이순일이 영남에서 돌아왔다. 아침밥을 대접하였다. 명나라에서 내게 은청금자광록대부(명나라의 직품)를 주었다고 한다. 아마 잘못 들은 것이리라. 저녁나절에 우수사·순천· 광양·낙안의 영감들과 함께 같이 앉아 술을 마시며 이야기했다. 또 군관들을 편을 갈라 활을 쏘게 하였다.

 

5월 초6일 [양력 6월 4일] <己未>

(흐린 뒤에 비가 내렸다.) 아침에 친척 신정과 조카 봉이 게바우개(해포)에서 왔다. 저녁나절에 퍼붓 듯 내리는 비가 온 종일 그치지 않았다. 내와 개울물이 넘쳐 흘러 농민들에게 희망을 주니 참으로 다행이다. 저녁 내내 친척 신씨와 같이 이야기했다.

 

5월 초7일 [양력 6월 5일] <庚申>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우수사(이억기)와 함께 아침밥을 먹고 진해루로 옮겨 앉아 공무를 돈 뒤에 배를 타고 떠나려는데, 발포의 도망간 수군을 처형 했다. 순천의 이방에게는 입대에 관한 일을 태만히 한 죄를 처형하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미조항에 이르자, 샛바람이 세게 불어 파도가 산같아 간신히 이르러 대고 잤다.

 

5월 초8일 [양력 6월 6일] <辛酉>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새벽에 출항하여 사량 바다가운데에 이르니, 만호(이여염)가 나오므로 우수사가 있는 곳을 물었더니, 지금 창신도(남해군 창선도) 에 있다고 하며, 군사들이 모이지 않아 미쳐 배를 타지 못했다고 했다. 곧바로 당포에 이르니, 이영남이 와서 보고, 수사(원균)의 망녕된 짓이 많음을 자세히 말했다. 잤다.

 

5월 초9일 [양력 6월 7일] <壬戌>

흐리다. 아침에 출항하여 걸망포(거을망포)에 이르니, 바람이 불순했다. 수사(이억기)· 가리포첨사(구사직)과 한 자리에 앉아서 이야기하며 의논했다. 저녁에 수사 원균이 배 두 척을 거느리고 왔다.

 

5월 초10일 [양력 6월 8일] <癸亥>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아침에 출항하여 견내량에 이르러 저녁나절에 작은 마루위로 올라가 앉았다. 흥양(고흥)의 군사를 점검했다. 기약한 날짜를 어긴 여러 장수들의 죄를 처벌하였다. 우수사· 가리포첨사도 모이어 같이 이야기했다. 조금 뒤에 선전관 고세충이 임금의 분부(유지)를 받들고 와서 전하였는데 보니, "부산으로 후퇴하여 돌아가는 왜적을 무찌르라."는 것이었다. 부찰사의 군관 민종의가 공문을 가지고 왔다. 저녁에 영남우후 이의득 이영남이 와서 봤다. 앉아서 이야기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헤어져 돌아갔다. 봉사 윤제현이 본영에 이르렀다는 편지가 왔다. 곧 답장을 보냈다. 그것은 본영에서 좀 기다리라는 내용이다. 거제도 견내량 진중에는 전라우대장·경상중위장 김승룡(김승룡)·경상우대장 전위장 기효근· 좌중위장 권준.·우중위장 구사직 좌좌부장 신호·전부장 이순신·중부장 어영담·척후장 김완·김인영·유군장 황정록우부장 김득광·후부장 가안책·대장 송여종·참퇴장 이응화

 

5월 11일 [양력 6월 9일] <甲子>

맑다. 선전관이 돌아갔다. 저녁나절에 우수사의 진중으로 갔더니, 이홍명과 가리포첨사도 와었다. 바둑을 두기도 했다. 순천부 사가 또 오고, 광양현감이 이어서 왔다. 가리포첨사가 술과 고기를 내었다. 조금 있다가 영등포(거제시 장목면 구영리)로 적정을 탐지하러 갔던 사람들이 돌아와 보고하여 말하기를, "가덕도 앞바다에 적선이 무려 이백 여 척이나 머물면서 드나들며 웅천에는 전일과 같다."고 했다. 선전관이 돌아갈 때 임금의 분부를 집행하는데 관해서 도원수·체찰사에게 삼도의 공문을 한 서류로 만들어, 그걸 가지고 가는 사람도 함께 떠나 보냈다. 이 날 남해현감도 와서 봤다.

 

5월 12일 [양력 6월 10일] <乙丑>

맑다. 본영 탐후선이 들어왔다. 그 편에 순찰사의 공문과 시랑 송응창이 패문을 가지고 왔다. 사복시(사복사)의 말 다섯 필을 중국에 보낼려고 올려 보내라는 공문도 왔다. 그래서 병방 진무를 띄워 보냈다. 저녁나절에 영남에서 온 선전관 성문개가 와서 봤다. 피란 중에 계신 임금의 사정을 자세히 전하였다. 통곡 통곡함을 가누지 못했다. 새로 만든 정철총통을 비변사로 보내면서 흑각궁·과녁·화살을 넉넉하게 보냈다. 앞의 성이라는 사람(성문개)은 순변사 이일의 사위이라고 한 때문이다. 저녁에 이영남·윤동구가 와서 봤다. 고성현령 조응도도 와서 봤다. 이 날 새벽에 좌·우도 체탐인을 정하여 영등포 등지로 보냈다.

 

5월 13일 [양력 6월 11일] <丙寅>

맑다. 식사를 하고나서 작은 산봉우리에 과녁을 쳐 메달아 놓고, 순천부사· 광양현감· 방답첨사· 사도첨사 및 우후·발포만호가 편을 갈라 활을 쏘아 자웅을 겨루다가 날이 저물어 배로 내려왔다. 밤에 소문에 영남우수사에게 선전관 도언량이 와 있다고 한다. 이 날 저녁 달빛은 배에 가득 차고, 홀로 앉아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니 온갗 근심이 가슴을 치민다. 자려해도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닭이 울때에야 풋잠이 들었다.

 

5월 14일 [양력 6월 12일] <丁卯>

맑다. 선전관 박진종이 왔다. 같은 시각에 선전관 영산령 예윤이 또 임금의 분부(유지)를 받들고 왔다. 그들에게서 명나라 군사들의 하는 짓을 들으니, 참으로 통탄스럽다. 나는 우수사(이억기)의 배에 옮겨 타고 선전관과 이야기하며, 술을 두어 순 배 돌리자, 영남우수사 원균이 나타나서 술을 함부로 마시고 못할 말이 없으니, 배안의 모든 장병들이 분개하지 않는 이가 없다. 그럴 듯이 속이는 것을 말할 수 없다. 영산 영감이 취하여 엎어져 인사불성이 되었으니 우습다. 이 날 저녁에 두 선전관이 돌아갔다.

 

5월 15일 [양력 6월 13일] <戊辰>

맑다. 아침에 낙안군수(신호)가 와서 봤다. 조금 뒤에 윤동구가 그의 대장이 장계한 초본을 가지고 와서 보이는데, 그럴 듯이 속이는 것이라 말할 수 없다. 순천부사· 광양현감이 와서 봤다. 늦은 아침에 조카 해와 아들 울(울)이 봉사 윤제현과 함께 왔다. 마침 정오에 활쏘는 곳에 이르러 순천·광양·사도·방답 등과 자웅을 겨루는데, 나도 쏘았다. 저녁에 배로 돌아와 봉사 윤제현과 자세히 이야기했다.

 

5월 16일 [양력 6월 14일] <己巳>

맑다. 아침에 적량만호 고여우·감목관 이효가·이응화·강응표 등이 와서 봤다. 각 고을에 공문과 솟장(소지)을 써 보냈다. 조카 해와 아들 회가 돌아갔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베개를 베고 신음하다가, 명나라 장수가 중도에서 늦추며, 머무르는 것은 무슨 교묘한 술책이 없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들으니, 나라를 위해 걱정이 많은 중에 일일이 이러하니, 더욱 더 한심스러워 눈물이 쏟아졌다. 점심을 먹을 때 윤동구에게서 서울 관동(관동: 서울)의 숙모가 양주의 천천(양주 천천: 양주군 회천읍 회천)으로 피난갔다가 거기에서 작고하셨다 는 말을 듣고 통곡함을 참지 못했다. 그러나 언제부터 세상사가 이토록 가혹한가! 장사 지내는 일은 누가 맡아서 지내는지! 대진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들으니, 더욱 애통하다.

 

5월 17일 [양력 6월 15일] <庚午>

맑다. 새벽에 바람이 세게 불었다. 아침에 순천부사·광양현감·보성 군수·발포만호 및 이응화

가 와서 봤다. 변존서가 병으로 돌아갔다. 영남수사(원균)가 군관을 보내어 진양의 보고서를 가지고 왔다. 보았더니, 제독 이여송은 지금 충주에 있다 하고, 적도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분탕질하며 약탈을 일삼고 있다고 한다. 통분하고도 통분하다. 종일 바람이 세게 부니, 마음이 어지럽다. 고성현령이 군관을 보내어 문안하고, 또 추로수(추로수: 약술이름)와 소고기 요리한 꼬치와 꿀통을 가져 왔다고 한다. 복중이라 받자니 미안하고, 그렇다해서 정으로 보낸 것을 의리상 돌려 보낼 수도 없으므로 군관들에게 주었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일찍 선실로 들어갔다.

 

5월 18일 [양력 6월 16일] <辛未>

맑다. 이른 아침에 몸이 무척 불편하여 온백원(위장약) 네 알을 먹었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우수사와 가리포첨사가 와서 봤다. 조금 있다가 시원하게 설사가 나오니 좀 편안해진다. 종 목년이 게바우개(해포: 아산시 염치읍 해암리 해포)에서 왔는데,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고 한다. 곧 답장을 써 돌려 보내며 미역 다섯 동을 함께 보냈다. 이 날 접반사에게 적세에 관한 공문을 삼도에 한 서류로 만들어 보냈다. 전주부윤(권율)이 공문을 보냈는데, 지금 겸순찰사 절제사를 맡게 되었다고 하면서 도장은 찍지 않았으니, 까닭을 모르겠다. 방답첨사가 와서 봤다. 대금산과 영등포 등지의 척후병이 돌어와 보고하기를, 왜적들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그리 큰 음흉한 꾀는 없다고 했다. 새로 협선 두 척을 만드는데 못이 없다고 한다.

 

5월 19일 [양력 6월 17일] <壬申>

맑다. 아침밥을 봉사 윤제현과 같이 먹는데, 여러 장수들이 몹시 권하고, 몸이 불편해도 억지로 입맛을 내게 하니 더욱 더 비통하다. 순찰사의 공문에는 명나라 장수(유원외)의 패문에 의하여 부산바다 어귀는 벌써 끊어 막았다고 한다. 곧 공문을 받았다는 확인서를 써 보내고 또 공무에 관한 보고를 써서 보성 사람이 지니고 가게 했다. 순천부사가 소고기 등 일곱 가지를 보내 왔다. 방 답첨사 및 이홍명이 와서 봤다. 기숙흠도 와서 봤다. 영등포 척후병이 와서 다른 변고는 없다고 했다.

 

5월 20일 [양력 6월 18일] <癸酉>

맑다. 새벽에 대금산 척후병이 와서 보고하는데 역시 영등포의 척후병과 같았다. 저녁나절에 순천부사가 오고 소비포권관도 왔다. 오후에 척후병이 와서 보고하여 말하기를, 왜선은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본영군관 등에게 왜놈의 물건을 실어올 일에 관한 편지를 썼다. 흥양 사람이 지니고 가게 일러서 보냈다.

 

5월 21일 [양력 6월 19일] <甲戌>

새벽에 출항하여 거제 유자도(통영시 한산면 유자도. 한산도와 서좌도 사이) 가운데 바다에 이르니, 대금산 척후병이 와서 왜적의 출몰이 여전하다고 한다. 우수사와 같이 저녁내내 이야기했다. 이홍명도 왔다. 오후 두시쯤에 비가 왔다. 농민이 바라던 것을 조금이나마 생기가 돌게 했다. 이영남이 와서 봤다. 수사 원균이 거짓 내용으로 공문을 보내어 대군을 동요케 했다. 군중에서 조차 속임이 이러하니, 그 흉측함을 말할 수 없다. 마침내 밤에 미친듯이 비바람이 일었다. 먼동틀 무렵 거제 도 선창에 배를 대니 곧 22일이다.

 

5월 22일 [양력 6월 20일] <乙亥>

비가 내렸다. 사람들이 바라던 차에 아주 흡족하게 왔다. 늦은 아침에 나대용이 본영에서 명나라 시랑(송응창)의 패문을 가지고 왔는 데, 파견원과 본도 도사 행(낮은 직책으로 높은 품계를 맡은 것) 상호군 선전관 한 사람이 먼저 기별을 가지고 왔다. 그건 송시랑이 파견한 사람이 전선을 시찰하러 온다고 했다. 곧 우후로 하여금 영접하도록 내보내고, 오후에 칠천량으로 옮겨 대었다. 나대용으로 하여금 문안하는 일로 내어 보냈다. 저녁에 방답이 와서 명나라 사람 접대할 일을 말했다. 영남우수사의 군관 김준계가 와서 저희 장수의 뜻을 전했다. 비가 종일 그치지 않는다. 흥양군관 이호가 죽었다고 들었다.

 

5월 23일 [양력 6월 21일] <丙子>

새벽에 흐리고 비는 오지 않더니, 저녁나절에 비가 오락가락하다. 우수사가 오고 이홍명도 왔다. 영남우병사의 군관이 와서 적의 소식을 전했다. 본도(전라도)의 병마사(선거이)의 편지 및 공문이 왔는데,. "창원에 있는 적을 치고 싶으나, 적의 형세가 거세기 때문에 경솔히 나아갈 수 없다."고 한다. 저녁에 아들 회가 와서, "명나라 관원이 영문에 와서 배를 타고 떠나온다"고 전했다. 어두울 무렵 영남수사(원균)도 명나라 관원을 접대하는 일로 와서 의논하였다.

 

5월 24일 [양력 6월 22일] <丁丑>

비가 오락가락했다. 아침에 거제 앞 칠천량 바다 어귀로 진을 옮겼다. 나대용이 명나라 관원을 사량 뒷바다에서 발견하고 먼저 와서 전하되, "명나라 관원과 통역 표헌과 선전관 목광흠이 함께 온다."고 했다. 오후 두 시쯤에 명나라 관원 양보가 진문에 이르므로, 우별도위 이설을 배웅하고 마중하게 하여 배로 안내하여 오니, 매우 기뻐하는 기색이었다. 우리 배로 청하여 오르게 하고, 황제의 은혜를 재삼 사례하며 마주 앉기를 청하니 굳이 사양하였다. 그는 앉지 않고 선 채로 한 시간이 지나도록 이야기하며 수군이 장하다고 매우 칭찬하였다. 예물 명단을 올리니, 처음에는 굳이 사양하는 듯하더니, 마침내 받고는 매우 기뻐 하며 두번 세번 감사하다고 했다. 선전관이 표신을 평상에 놓은 뒤에 조용히 이야기했다. 아들 회가 밤에 본영으로 돌아갔다.

 

5월 25일 [양력 6월 23일] <戊寅>

맑다. 명나라 관원과 선전관은 숙취로 술이 깨지 않았다. 아침에 통역 표헌을 다시 청하여 맞아들여 명나라 장수가 하는 일을 물었더니, 명나라 장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왜적을 쫓아 보내려고만 할 따름이다."고만 하였다. 또 말하기를, 송시랑이 수군이 허실을 알고자 하여, 자기가 데리고 온 군중탐정(야불수) 양보를 보낸 것인데, 수군의 위세가 이렇게도 장하니 기쁘기 한이 없다고 했다. 늦게야 명나라 관원이 본영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증명서를 준것도 있다. 오정에 거제현 앞 유자도 앞 바다가운데에 진을 옮기고서 우수사(이억기)와 작전을 토의하였다. 광양현감이 오고, 최천보·이홍명이 와서 바둑을 두고 헤어졌다. 저녁에 조붕이 와서 보고 이야기하고 보냈다. 초저녁이 지나서 영남에서 오는 명나라 사람 두 명과 우도관찰사의 영리 한 사람과, 접반사 군관 한 사람이 진문에 이르렀으나, 밤이 깊어 들이지 아니 하였다.

 

5월 26일 [양력 6월 24일] <己卯>

비가 내렸다. 아침에 명나라 사람을 만나 보니, 절강성의 포수 왕경득 인데, 문자는 좀 안다. 한참 동안이나 이야기했지만 알아들을 수 가 없으니, 답답했다. 순천부사가 집에다 노루고기를 차려 놓았다. 광양현감도 왔다. 우수사 영감이 와서 함께 이야기했다. 가리포는 불렀으나 오지 않았다. 비가 저녁내 그치지 않고 밤새도록 퍼부었다. 밤 열 시쯤부터 바람이 세게 불어 각 배가 가만히 있지 못했다. 처음에는 우수사의 배와 맞부딪치는 것을 겨우 구해 놓았더니, 또 발포만호(황정록)가 탄 배와 맞부딪쳐 거의 부서질뻔하다가 겨우 면하고, 내 군관 송한련이 탄 협선은 발포 배에 부딪쳐 많이 다쳤다고 한다. 늦은 아침에 영남우수사(원균)가 와서 보고는 돌아갔다. 순변사 이빈이 공문을 보냈는데, 허튼소리가 많으니 가소롭다.

 

5월 27일 [양력 6월 25일] <庚辰>

비바람에 부딪친 까닭에 진을 유자도로 옮겼다. 협선 세 척이 간 곳이 없더니, 저녁나절이 되자 돌아왔다. 순천부사와 광양현감이 와서 노루고기를 차려 놓았다. 영남병마사(최경회) 의 답장이 오고, 그걸 보니 수사 원균은 경략 송응창이 보낸 화전을 혼자서 쓰려고 꾀를 내었다. 우습고도 우습다. 전라병마사(선거이)의 편지도 왔는데, "창원의 적들은 오늘 토벌하려 했다가 비가 오고 개이지 않아 아직 나가 치지 못 했다"고 했다.

 

5월 28일 [양력 6월 26일] <辛巳>

종일 비가 내렸다. 순천부사와 이홍명이 와서 이야기했다. 광양사람이 장계를 가지고 왔다. 독운어사 임발영을 위에서도 몹시 좋지 않게 여겨 아울러 조사하여 처벌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수군으로 한 가족을 징발하는 일에 대해서도 전에 내린 명령대로 하라고 했다. 비변사에서 공문이 왔다. 광양현감은 그대로 유임시킨다는 것이었다. 승정원의 관보를 가져왔기에 이를 대강 보았더니 얼마나 통분한지 알수가 없다. 의병 용호장 성응지에게 그 배를 바꿔 달 수 있도록 명령서를 써서 본영으로 내 보냈다.

 

5월 29일 [양력 6월 26일] <壬午>

비가 내렸다. 방답첨사와 영등포만호 우치적이 와서 봤다. 공문을 만들어 접반사(김수)· 도원수(김명원)· 순변사(이빈)·순찰사(권율)· 병마사(선거이)·방어사(이복남) 등에게 보냈다. 밤 열 시에 변유헌과 이수 등이 왔다.

 

5월 30일 [양력 6월 28일] <癸未>

종일 비가 내렸다. 오후 네 시쯤에 잠깐 개다가 도로 비가 왔다. 아침에 봉사 윤제현·변유헌에게 왜적에 관한 일을 물었다. 이홍명이 와서 봤다. 수사 원균은 경략 송응창이 보낸 화전을 혼자만 쓰려고 꾀하다가 병사의 공문에 나누어 보내라는고 하니까, 그는 공문도 내려고 하지 않고 무리한 말만 자꾸 지껄였다고 한다. 우습다. 명나라의 고관이 보낸 화공무기인 화전 천오백서른 개를 나누어 보내지 않고 독차지하여 쓰려고 한다니 그 꾀부리는 꼴을 말로 할 수 없는 일이다. 저녁에 조붕이 와서 이야기하였다. 남해현령 기효근의 배가 내 배 곁에 대이었는데, 그 배 안에 어린 계집을 태우고 남이 알까봐 두려워한다. 가소롭다. 이 나라가 위급한 때를 맞았는데도 미인을 태우고 놀아나니 그 마음 씀씀이야 무엇이라고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 대장 원균 수사부터 역시 그러하니 어찌하랴! 봉사 윤제현이 일이 있어 본영으로 돌아갔다. 군량미 열넉 섬을 실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