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사년 7월 (1593년 7월)
7월 초1일 [양력 7월 28일] <癸丑>
맑다. 인종의 제삿날이다. 밤기운이 몹시 서늘하여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조금도 놓이지 않아 홀로 봉창 아래에 앉아 있으니, 온갖 생각이 다 일어난다. 선전관이 내려 왔다고 들었는데. 초저녁에 임금의 분부(유지)를 가지고 왔다.
7월 초2일 [양력 7월 29일] <甲寅>
맑다. 날이 늦어서야 우수사(이억기)가 와서 배를 타고 선전관(류형)을 함께 대접하였다. 점심을 먹고나서 헤어져 돌아갔다. 해질 무렵에 김득룡이 와서 진양이 불리하다고 전했다. 놀라고 염려됨을 이길 길 없다. 그러나 그럴리 만무하다. 이건 반드시 어떤 미친 놈이 잘못 전한 말일 것이다. 초저녁에 원연·원식이 와서 군사에 관한 극단적인 말을 하니, 참으로 우습다.
7월 3일 [양력 7월 30일] <乙卯>
맑다. 적선 몇 척이 견내량을 넘어오고, 한편으론 뭍으로도 나오고 있으니 통분하다. 우리 배들이 바다로 나가 이들을 쫓으니, (적 들은) 도망쳐 버려 도로 물러나와 잤다.
7월 4일 [양력 7월 31일] <丙辰>
맑다. 흉악한 적 수만여 명이 죽 벌여 서서 기세를 올리니 참으로 통분하다. 저녁에 걸망포(거을망포)로 물러나 진을 치고 잤다.
7월 5일 [양력 8월 1일] <丁巳>
맑다. 새벽에 척후병이 와서 보고하는 내용에, "적선 열 여 척이 견내량을 넘어온다"고 했다. 그래서 여러 배들이 한꺼번에 출항 하여 견내량에 이르니, 적선은 허겁지겁 달아났다. 거제땅 적도에는 말만 있고 사람은 없으므로 싣고 왔다. 저녁나절에 변존서가 본영으로 갔다. 또 진양이 함락되었다는 보고가 광양에서 왔다. 두치의 복병한 곳에서 성응지와 이승서가 보낸 것이다. 저녁에 도로 걸망포(거을망 포)에 이르러 진을 치고 밤을 지냈다.
7월 6일 [양력 8월 2일] <戊午>
맑다. 아침에 방답첨사(이순신)이 와서 보고, 소비포권관(이영남)도 와서 봤다. 한산도에서 배를 끌고 오는 일로 중위장이 여러 장수들 을 데리고 나갔다. 공방 곽언수가 행재소에서 들어 왔는데, 도승지 심희수와 지사 윤자신과 좌의정 윤두수의 답장도 왔고, 윤기헌도 안부를 보내어 왔고, 승정원 소식도 아울러 왔다. 이들을 보니, 탄식할 일들만 많다. 흥양현감이 군량을 싣고 왔다.
7월 7일 [양력 8월 3일] <己未>
맑다. 순천부사·가리포첨사·광양현감이 와서 보고는 군사일을 의논했다. 각각 가볍고 날랜 배 열다섯 척을 뽑아 견내량 등지로 가서 탐색하러 위장이 거느리고 나갔더니, 왜적의 종적이 없다고 했다. 거제에서 사로잡혔던 한 사람을 얻어 와서 왜적의 소행을 꼼꼼히 물으니, "흉적들이 우리 수군의 위세를 보고 달아 나려고 하였다"고 하고, 또 "진양이 이미 함락되었으니, 전라도까지 넘어 것이다"라고 했다. 이 말은 속인 것이다. 우수사(이억기)가 내 배로 왔기에 같이 이야기하였다.
7월 8일 [양력 8월 4일] <庚申>
맑다. 남해로 왕래하는 사람 조붕에게서 듣건대, "적이 광양을 친다"하여, "광양 사람들이 벌써 고을 관청과 창고를 불질렀다"고 한다. 해괴함을 이길 길 없다. 순천부사(권준)·광양현감(어영담) 을 곧 보내려고 하다가, 길가다가 들은 소문을 믿을 수 없으므로, 이들을 머무르게 하고, 사도군관 김붕만을 알아 오도록 보냈다.
7월 9일 [양력 8월 5일] <辛酉>
맑다. 남해현령이 또 와서 전하기를, "광양·순천이 이미 다 타버렸다"고 했다. 그래서 광양현감(어영담)·순천부사(권준)와 송희립·김득룡·정사립 등을 떠나 보내 놓고, 이설은 어제 먼저 보냈다. 듣자하니, 뼈속까지 아파 와 말을 못하겠다. 우수사(이억기) 및 경상우수사(원균)과 함께 일을 논의했다. 이 날 밤 바다에 달은 밝고, 잔 물결하나 일지 않네. 물과 하늘이 한 빛인데, 서늘한 바람이 건듯 불구나. 홀로 뱃전에 앉았으니, 온갖 근심이 가슴을 치민다. 밤 한시에 본영 탐후선이 들어와서 적정을 알리는데, "실은 왜적 들이 아니고, 영남 피난민들이 왜놈옷으로 가장하고 광양으로 마구 들어가서 여염집을 불질렀다"고 했다. 그러니 이건 기쁘고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진양이 함락되었다는 것도 헛소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진양의 일만은 이럴리 만무하다. 닭이 벌써 운다.
7월 10일 [양력 8월 6일] <壬戌>
맑다. 김붕만이 두치에서 와서 하는 말이, "광양의 왜적들은 사실이다"고 했다. 다만, 왜적 백 여 명이 도탄에서 건너와 이미 광양을 침범하였다고 했다. 놈들의 한 짓을 보면 총통도 한발 쏜 일이 없다"고 했다. 왜놈이 포를 한 발도 쏘지 않을리가 전혀 없다. 경상우수사와 본도 우수사가 왔다. 원연도 왔다. 저녁에 오수가 거제의 가삼도(가조도)에서 와서 하는 말이, "적선이 안팎에서도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또 말하기를, "사로잡혔다가 도망쳐 나온 사람이 말하기를,적도들이 무수히 창원 등지로 가더라"고 했다. 그러나 남들이 하는 말이라 믿을 것이 못된다. 초저녁에 한산도 끝에 있는 세포로 진을 옮겼다.
7월 11일 [양력 8월 7일] <癸亥>
맑다. 아침에 이상록은 명령을 어긴 일로 먼저 나가고, 여러 장수들은 전령내릴 일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보고하여 말하기를, "적선 열 여 척이 견내량에서 내려온다"고 하므로, 닻을 올려 바다로 나가니, 적선 대여섯 척이 벌써 진 앞에 이르기에, 그대로 추격하니 달아나 재빨리 도로 넘어가버렸다. 오후 네 시쯤에 걸망포(거을망포)로 돌아와서 물을 길었다. 사도첨사(김완)가 되돌아 와서 하는 말이, "두치 나루의 적의 일은 헛소문이요, 광양 사람들이 왜놈옷으로 갈아 입고 저희들끼리 서로 장난한 짓이다"고 하니, 순천과 낙안은 벌써 결딴 다났다고 했다. 이토록 통분함을 이길길 없다. 어두울 무렵 오수성이 광양에서 와서 보고하는데, "광양 의 적변은 모두 진주와 그 고을 사람들이 흉계를 짜낸 것이었다. 고을의 곳간은 쓸쓸하고 마을은 텅 비어 종일 돌아 다녀봐야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한다고 한다. 순천이 가장 심하고, 낙안이 그 다음 간다"고 했다. 새벽에 우수사의 배로 갔더니 수사 원균과 직장 원연 등이 벌써 먼저 와 있었다. 군사 일을 의논하다가 헤어졌다.
7월 12일 [양력 8월 8일] <甲子>
맑다. 식사하기도 전에 울과 송두남과 오수성이 돌 아갔다. 저녁나절에 가리포첨사·낙안을 청해 와서 일을 의논하고 같이 점심을 먹고나서 돌아 갔다. 가리포의 군량 진무가 와서 전하는 말이,"사량 앞바다에 와서 묵을 때, 왜적들이 우리나라 옷으로 변장하고, 우리 나라의 작은 배를 타고 마구 들어와 포를 쏘며, 약탈해 가고자 한다."고 했다. 그래서 곧장 각각 가볍고 날랜 배 세 척을 합하여 아홉 척을 보내어 달려가 잡아 오도록 단단히 명령하여 보냈다. 또 각각 배 세 척씩을 정하여 착량으로 보내어 요새를 방어하고 오라고 했다. 고목이 왔다. 또 광양 일은 헛소문이라고 했다.
7월 13일 [양력 8월 9일] <乙丑>
맑다. 저녁나절에 본영 탐후선이 들어와서, "광양·두치 등에는 적의 꼬라지가 없다"고 했다. 흥양 현감이 들어오고 우수사 영감도 들어왔다. 순천 거북함의 격군으로서 경상도 사람인 종 태수가 달아나다가 잡혀 사형에 처했다. 저녁나절에 가리포첨사가 와서 보고 흥양현감(배흥립)이 들어 와서, "두치의 잘못된 거짓 보고와 장흥부사 류희선의 겁 내던 일을 전했다. 또 말하기를, 그 고을(고흥군 남양면) 창고의 곡식을 남김없이 나누어 주고, 게포(해포)에 흰콩과 중간콩을 아울러 마흔(되)을 보냈다고 한다. 또 행주대첩을 전했다. 초저녁에 우수사가 청하기에 그의 배로 가 봤더니, 가리포 영감이 몇 가지 먹음직한 음식물을 차려 놓았다. 밤 세시나 되어서야 헤어 졌다.
7월 14일 [양력 8월 10일] <丙寅>
맑더니 저녁나절에 비가 조금 내렸다. 진을 한산도 둘포(두을포:통영시 한산면 두억리 개미목)로 옮겼다. 비는 땅의 먼지를 적실 뿐이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온종일 신음했다. 순천부사(권준)가 들어와서 본부의 일을 말로 나타내지를 못하였다. 같이 점심을 먹고 그대로 머물렀다. 진을 한산도 둘포(두을포)로 옮겼다.
7월 15일 [양력 8월 11일] <丁未>
맑게 개었다. 저녁나절에 사량의 수색선·여도만호 김인영·순천의 김대복이 들어왔다. 가을 기운이 바다로 들어오니, 나그네 회포가 어지럽고. 홀로 봉창 아래에 앉았으니, 마음이 몹시도 번거롭네. 달이 뱃전을 비치니, 정신이 맑아져 잠 못이루는데, 어느 덧 닭이 우는구나.
7월 16일 [양력 8월 12일] <戊辰>
아침에 맑다가 저녁나절에 구름이 끼었다. 저녁에 소나기가 와서 농사에 흡족하다. 몸이 몹시 불편하다.
7월 17일 [양력 8월 13일] <己巳>
비가 내렸다. 몸이 대단히 불편하다. 광양현감(어영담)이 왔다.
7월 18일 [양력 8월 14일] <庚午>
맑다. 몸이 불편하여 앉았다 누웠다 했다. 정사립이 돌아왔다. 우수사(이억기)가 와서 봤다. 신경황이 두치에서 와서 적의 헛소문임을 전하였다.
7월 19일 [양력 8월 15일] <辛未>
맑다. 이경복이 병마사에게 갈 편지를 가지고 나갔다. 순천부사와 이영남이 와서, "진주·하동·사천·고성 등지의 적 들이 이미 도망해 버리고 없다"고 전했다. 저녁에 진주에서 피살된 장병들의 명부를 광양현감(어영담)이, 보내왔는데, 이를 보니, 참으로 비참하고 통탄함을 이길 길이 없다.
7월 20일 [양력 8월 16일] <壬申>
맑다. 탐후선이 본영에서 들어왔는데, 병마사의 편지 및 공문과 명나라 장수의 통첩이 왔다. 그 통첩의 사연을 보니, 참으로 괴상하다. 두치의 적이 명나라 군사에게 몰리어 달아났다고 하니, 터무니 없는 거짓말이다. 명나라 사람들이 이와 같으니 다른 사람들이야 말해 본들 무엇하랴! 통탄할 일이다. 충청수사(정걸)·순천부사(권준) ·방답첨사(이순신)· 광양현감(어영담)· 발포만호(황정 록)· 남해현령(기효근) 등이 와서 봤다. 조카 이해와 윤소인이 본영으로 돌아갔다.
7월 21일 [양력 8월 17일] <癸酉>
맑다. 경상우수사(원균)와 충청수사 정걸이 함께 와서 적을 토벌하는 일을 의논하는데, 원수사의 하는 말은 극히 흉칙하고 말할 수 없는 흉계이다. 이러하고서도 일을 같이 하고 있으니, 뒷걱정이 없을까? 그의 아우 원연도 뒤따라 와서 군량을 얻어서 갔다. 저녁에 흥양도 왔다. 땅거미질 때에 돌아왔다. 초저녁에 오수 등이 거제 망보는 곳에서 와서 보고하기를, "영등포의 적선이 아직도 머물면서 제 맘대로 횡포를 부린다"고 했다.
7월 22일 [양력 8월 18일] <甲戌>
맑다. 오수가 사로잡혔다가 도망쳐 온 사람을 싣고 올 일로 나갔다. 아들 울이 들어와서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고 자세히 말한다. 아들 염의 병이 차도가 있다.
7월 23일 [양력 8월 19일] <乙亥>
맑다. 울이 돌아갔다. 충청수사 정걸을 불러 와서 점심을 같이 먹었다.
7월 24일 [양력 8월 20일] <丙子>
맑다. 순천부사·광양현감·흥양현감이 왔다. 저녁에 방답첨사와 이응화가 와서 봤다. 초저녁에 오수가 되돌아 와서 "적이 물러갔다"고 했는데, 장문포(거제시 장목면 장목리) 적들은 여전하다. 아들녀석 울이 본영에 들어갔다고 했다.
7월 25일 [양력 8월 21일] <丁丑>
맑다. 우수사(이억기)가 와서 이야기했다. 조붕도 와서 체찰사의 공문이 영남수사(원균)에게 왔는데, 문책하는 말이 많이 있더라고 했다.
7월 26일 [양력 22일] <戊寅>
맑다. 순천부사·광양현감·방답첨사가 왔다. 우수사도 같이 이야기하고, 가리포첨사도 왔다.
7월 27일 [양력 8월 23일] <己卯>
맑다. 우수사의 우후(이정충)가 본영에서 와서 우도의 사정을 전하는데, 놀랄만한 일들이 많았다. 체찰사에게 갈 편지와 공문을 썼다. 경상우수사의 영리가 체찰사에게 갈 서류 초안을 가지고 와서 보고 했다.
7월 28일 [양력 8월 24일] <庚辰>
맑다. 아침에 체찰사에게 가는 편지를 고쳤다. 경상우수사(원균) 및 충청수사(정걸)과 본도우수사(이억기)가 함께 와서 약속했다. 그러니 수사 원균(원균)의 나쁜 마음과 간악한 속임수는 아주 형편이 없다. 정여흥이 공문과 편지를 가지고 체찰사 앞으로 갔다. 순천부사·광양현감이 와서 보고 곧 돌아갔다. 사도 첨사(김완)가 복병했을 때에 잡은 보자기 열 명이 왜놈옷으로 변장하고 하는 짓거리가 매우 꼼꼼하다 하여 잡아다가 추궁을 하니, "경상우수사(원균)가 시킨 일이다."고 했다. 곤장만 쳐서 놓아 줬다.
7월 29일 [양력 8월 25일] <辛巳>
맑다. 새벽 꿈에 사내 아이를 얻었다. 사로잡혔던 사내 아이를 얻을 꿈이다. 순천부사· 광양현감· 사도첨사·흥양현감·방답첨사를 불러 와서 이야기했다. 흥양현감은 학질을 앓아서 곧 돌아가고, 남은 사람들은 조용히 앉아 있었다. 방답첨사는 복병할 일로 돌아 갔다. 본영 탐후인이 와서 아들 염의 병이 차도가 없다고 하니 몹시 걱정이다. 저녁에 보성군수(김득광)· 소비포권관(이영남) 낙안군수(신호)가 들어왔다고 했다.
'Reading Books > Reading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R/B> 亂中日記 (18) -李舜臣- (0) | 2021.02.03 |
---|---|
<R/B> 亂中日記 (17) -李舜臣- (0) | 2021.02.02 |
<R/B> 亂中日記 (15) -李舜臣- (0) | 2021.01.29 |
<R/B> 亂中日記 (14) -李舜臣- (0) | 2021.01.28 |
<R/B> 亂中日記 (13) -李舜臣- (0) | 2021.0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