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밤열차 (4)

카지모도 2022. 3. 21.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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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중3

중동 중학교 교지 中東게재(揭載)

 

 

<밤열차>

이상헌

 

粉伊는 초조하게 P시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골역 대합실의 밤2시는 고즈넉하게 쓸쓸하기만 하였다.

좁은 대합실 안에는 粉伊 외에 아무도 눈에 뜨이지 않는다.

粉伊는 말할수 없이 불안하다.

두렵다.

기차를 타 보는 것 자체가 처음이다.

기차를 탄다....도회지로 간다... 이것은 여태 산골짝을 한발자욱 벗어나 본적이 없는 粉伊로서는 실로 커다란 모험이 아닐수 없었다.

粉伊는 두려움을 잊기 위하여 자꾸만 6개월전 산골을 떠난 남편을 생각하려고 애를 썼다.

남편의 모습이 떠 오른다.

앗따! 예편네 좀 보소. 돈 벌라고 도회지 가는 서방한테 와 이래 질질 짜쌓노? 짜지 마라. 고마. . 돌아 아부지 돈 많이 벌어 오꾸마.”

남편은 세 살짜리 아들 돌이를 어르고 있었다.

굶주림에 지쳐서 눈만 빠꼼한 粉伊와 남편의 하나뿐인 보람덩어리...

허지만 粉伊는 이 어린 것과 이 산골에서 그저 그렇게 살자고 하였다.

두마지기 시커먼 밭과 2칸짜리 움막집이 이들의 전재산이었고 하루에 두끼 시꺼먼 수수밥이라도 고마울 뿐 허연 이밥은 아예 꿈도 꿀수없는 산골짜기 화전민의 가난한 삶.

그 징그런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남편은 도회지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서울에는 순사가 사람잡아간다 캅디더. 긴 칼차고 댕기는 왜정때 순사 안봤소? 고마 이대로 삽시더. 돌이아배요.”

왜정 때인 어린 시절 粉伊는 검은 제복을 입은 일본순사가 긴 칼로 사람을 베던 광경을 목격한 적이 있었는데 그래서 粉伊는 이 세상에서 순사가 가장 무서운 것이다.

그렇게 남편은 떠났다.

도회지 P시로 간다고 산골을 나서고는 어느새 6개월.. 그러나 남편은 소식이 없었다.

남편을 찾아 나서자....

粉伊는 돌이를 들처 업었다. 수수떡과 찐감자가 든 보따리를 들었다.

한 잎 돈이 있을리 없었다. 그저 남편이 있을 꿈속같은 도회지 P시로만 갈 요량으로 집을 나선 것이다.

기차만 타면 P시에 갈 것이고 기차를 타려면 돈을 주고 차표를 끊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으나, 또한 S읍의 한밤중 정거장에서는 차장이 없기 때문에 그저 기차에 올라탈수 있다는 사실도 어찌어찌 들어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 기차에 타고나면 (그 큰 기차 안에서 내 하나 차표 안끊은 줄을 우예 알겠노?) 하는 생각이 粉伊가 믿는 구석이었던 것이다.

얼마를 발을 구르며 기다렸을까.

드디어 덜커덩거리며 시커먼 완행열차가 홈안으로 들어선다.

그토록 불안하였는데도 기차에 오르는데 粉伊를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粉伊는 기차에 올라 객실 안으로 들어선다.

너무나 안심이 된다.

가슴을 쓸어 내리고 크게 한 숨을 쉰다.

(이제 P시로 가서 남편을 만날 생각만 하면 되겠고나....)

야간열차의 객실 안은 듬성듬성 자리가 비어 있다.

승객들은 대부분 길게 앉아서 잠을 자고 있었으나 잡담을 하는 몇몇 패들도 눈에 띈다.

粉伊는 출입문 바로 곁의 빈좌석에 돌이를 눞이고 자기도 맞은 편에 좌석에 앉는다.

통로를 사이에 두고 옆자리에 중년의 남자가 잠들어 있다. 그 앞에는 늙은 노친네 둘이 역시 입을 벌리며 잠자고 있다. 또 저쪽에는 군인, 그리고 저쪽에는 젊은 사람들...

전깃불이 밝게 켜져 있다.

등이 높은 걸상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객차 창문의 두꺼운 유리가 빛나고 있다.

(- 희안하다.)

다시 남편을 생각한다.

(돌이 아배도 이거 타고 갔겠지.. P시까지 가서 못찾으면 우야꼬? 주재소 순사한테 물어보믄....)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갑자기 검은 제복입고 긴 칼 찬 왜정 때의 순사가 떠오른다.

오싹 무서웁다.

(내사 죄진거 없는데 뭘.... 도회지가 아무리 넓다해도 이름알고 얼굴아는데 찾지 못할까. 설마...)

돌이 잠을 깨어 칭얼댄다.

보따리에서 수수떡을 꺼내 손에 쥐어 준다.

거무티티한 먹을 것이 그래도 반가운지 돌의 칭얼거림은 금새 멈춘다.

어린 것을 바라보자니 불현듯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돌이 아배요. 돌이캉 내캉 갑니더. 인자 우리가 갑니더.)

. 남편을 이제 만나는 것이다.

어느 정거장에 도착했는지 기차는 서서히 속도를 줄이다가 이윽고 정차한다.

기차가 멈추자마자 열살쯤 된듯한 웬 아이가 찐계란과 사과등속이 든 바구니를 들고 급히 뛰어 객실안으로 들어선다.

그 아이가 들어서자 갑자기 객차안이 소란스러워진다.

계란있습니다! 사과사이소!”

옆자리의 중년 남자가 찐계란을 사려는지 값을 묻더니 그 아이에게 돈을 건내 주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는지 커단 손이 아이의 뒷덜미를 잡아 챈다.

옆에서 지켜보는 粉伊는 깜찍 놀랐으나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돈을 도로 집어 넣고 있다.

검정모자, 검정제복을 입은 순사차림의 그 사람은 그 아이의 뺨을 갈긴다.

이 자식아. 여기가 무슨 장턴줄 알아? 그렇게 열차안에서 팔지 말라고 해도.”

그리고는 아이의 뒷덜미를 잡고 객실 출입문밖 승강구쪽으로 끌고 간다.

그리고는 기차 밖으로 밀어 떨어뜨리는 기척이 들린다.

(! 순사다!)

粉伊의 심장이 콩당콩당 뛰기 시작한다.

가슴이 후들후들 떨린다.

자기가 이토록 손쉽게 기차를 탈수 있었다는 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저 아이도 잠시 차표없이 기차에 올랐다고 저라는데.. 쪼맨 아를 저래 패니 내 같은 건 고마 칼로 쓱 베뿌겠다. 아이고 우짜노. 우짜노...)

어서 기차에서 내리고 싶을 뿐이다.

돌이를 황급히 들처 안는다.

그러나 이미 기차는 출발하고 있었다.

粉伊는 자리에 도로 털썩 앉아 버린다.

차창 밖으로 눈송이가 희끗거리며 날리는 것이 보인다.

눈이 오는 모양이다.

초조한 심정으로 어서 다음 정거장에 기차가 도착하기를 빌어본다.

눈이 어느새 하얗게 창가 모서리에 덮힌다.

갑자기 울고 싶다.

무서움이 심장으로부터 퍼져나와 이제 온 몸이 떨리기 시작한다.

지금쯤 하얗게 눈이 덮였을 산골집이 그리워진다.

그 산골아닌 모든 곳이 무섭다.

돌이가 粉伊의 젖가슴으로 파고든다.

(. 돌아!)

비로소 粉伊는 절실한 모정으로 돌아 와 돌이를 힘껏 끌어 안는다.

(돌아. 느그 아배는 바보다 그자? 우리를 두고... !)

두려움은 차츰 서러움과 겹처서 마침내 흐느낌이 새어 나온다.

남편이 한없이 원망스럽다.

기차가 달려가는 그 목적지에는 말못할 무서움이 자기와 돌이를 기다리고 있을것만 같다.

아이를 때리던 그 순사차림의 사람을 생각하니 점점 더 무서움이 엄습한다.

아까 그 중년 남자의 모습이 더욱 차갑게 느껴진다.

전깃불은 도무지 등잔불처럼 따뜻하지 않다.

차창의 유리가 그 전깃불빛을 싸늘하게 반사하고 있다.

무섭다. 무섭다.

그 때 맞은 편의 출입문이 확하고 열린다.

粉伊는 후딱 고개를 들어 그 쪽을 바라본다.

그곳에는 아까와 같은 제복을 입은 순사차림의 두사람이 집게같은걸 들고서 들어서고 있다.

차표 검사합니다.!”

粉伊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이기 무슨 소리고? 기차 안에서도 차표를 검사한단 말이가! 아이고!)

가슴은 이제 터질 듯 두근거린다.

(우짜노.. 우짜노...)

오줌보가 터질 것 같다.

승객들이 내미는 차표에다 집게로 구멍을 내주며 두 순사들은그 한칸 두칸 다가오고 있다.

粉伊는 보따리는 팽개처 둔채 돌이를 덜렁 들처 안는다.

바로 옆 가까이 있는 출입문을 열고 승강구 칸으로 나선다.

열려있는 승강구의 문으로 밀려들어오는 찬 바람과 눈보라가 세차게 얼굴을 덮친다.

그것이 차갑다고 느낄수도 없다.

점점 다가올 순사들을 생각하니 등줄기에서는 식은 땀이 흐른다.

승강구의 서너 칸 계단을 밟고 내려 서 본다.

승강구의 맨 밑의 계단까지 내려선다.

그리고 승강구 밖에 세로로 붙어있는 쇠붙이 난간을 꼭 잡는다.

돌이의 두 팔은 엄마의 목을 꼭 끌어안는다.

돌아.. 엄마 목을 놓지마라! 순사들 지나갈때까지만 꼭 매달려 있거라! 손을 풀면 안된다! 돌아!”

오른 손으로는 손잡이를 잡고 기차 밖으로 몸을 내밀어 왼손으로 객차 바깥 쪽 창문의 모서리를 잡는다.

그리고 오른 발은 승강구에 얹고 왼발은 기차밖에 붙어있는 조그만 쇠붙이에 얹는다.

기차 밖의 몸체에 매미처럼 붙어있는 형상으로 기차 내부에서는 눈에 띄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돌이를 자기의 몸과 기차 몸체 사이에 밀착시켜 떨어지지 않도록 두 팔 두 다리에 힘을 준다.

기차는 맹렬한 속도로 달리고 있다.

돌이가 울부짖는다.

찬바람에 섞인 눈보라가 뺨을 때린다.

아우성치는 바람소리와 덜컹덜컹대는 소리가 귀를 때린다.

돌이가 마구 울부짖는다.

놓지마라! 죽는다! 놓지마라!

-! -! 덜커덩! 덜커덩! 으앙! 으앙!

놓지마라! 죽는다! 놓지마라!

어떤 생각이라는 것도 粉伊의 머릿속에는 남아 있지 않다.

그저 손에 손에 발에 발에 힘을 주며 매달려 있을 뿐이다.

아무 것도 생각할수 없다.

손에 손에 발에 발에 있는껏 힘을 주며 그저 매달리고 있을 뿐이다.

-! -! 덜커덩! 덜커덩! 으앙! 으앙!

놓지마라! 죽는다! 놓지마라!

粉伊는 멍한 표정으로 승강구의 계단을 올라선다.

그리고 초점없는 눈을 들어 출입문을 밀친다.

한줄기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후처럼 모든 것은 한없이 고요할 뿐이다.

남편도 순사도 그 어떤 존재도 지금 머리 속에 남아 있지 않다.

무언가 큰 덩어리 속을 휘적휘적 걷고 있는데 그 덩어리가 무엇인지 도무지 의식할수가 없다.

좌석에 털썩 주저앉는다.

그리고는 가만히 목을 어루 만져 본다.

가슴을 더듬어 본다.

허전하다.

불현듯 粉伊의 의식이 어느 곳에 미친다.

갑자기 외마디 소리를 내지른다.

돌아!”

옆의 남자가 흘낏 처다본다.

별안간 粉伊는 미친듯 승강구 쪽으로 내닫는다.

순식간에 승강구의 계단을 내려서 난간을 잡고 몸을 바깥으로 내민다.

돌아아앗!”

몇몇 사람들이 승강구 쪽으로 몰려 나온다.

기차는 이제 턴널로 돌진하고 있는 중이다.

이 때 갑자기 전기라도 나가버렸는지 열차안이 깜깜해저 버린다.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절규와 같은 외마디의 소리만을 들을수 있을 뿐이다.

돌아아아앗!”

돌아아아앗!”

곧 전기불이 들어 왔으나 여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밤열차는 이제 막 터널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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