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그날 밤 초저녁에 주인이 관솔과 불씨를 가지고 이교리의 방문 앞으로 와서
봉당 위에 화톳불을 놓으며 “여보시오, 어두운 방에서 혼자 무얼 하시오?” 봉
당으로 내다보며 “이리 들어오게. 내가 머리가 아파서 일어나기가 싫네.” 목소
리가지 전같이 웅장하게 들리지 아니한다. 주인은 “대단히 불편하신가 보오.”
하면서 불 붙은 관솔 한 가지를 손에 들고 방안으로 들어와서 등잔에 불을 당기
고 관솔을 든 채로 이교리에게 가까이 와서 그 얼굴에 불을 비추고 들여다보니
상기된 것이 환하게 보인다. “병환이 나셨소그려.” “아니 감기 기운이 좀 있
는 것 같이. 이 사람 관솔을 끄고 거기 좀 앉게. 할 말이 있네.” “나도 할 말
이 있소. 그러나 말할 기운이 있겠소?” “그럼, 감기쯤 들었다고 말할 기운까지
없겠나.” 하고 이교리가 벌떡 일어 앉았다.
주인은 관솔불을 꺼서 놓고 한참 이교리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왜 무슨 까닭
으로 절벽에서 뛰엄질을 하려 하였소?” 이교리는 말이 없다. “애놈의 거짓말
은 아니겠지요?” 이교리는 역시 말이 없으나 이번에는 머리를 조금 끄덕끄덕하
였다. “그것이 무슨 일이오. 사람이 한번 죽으면 두번 살지 못하는 것이오. 진
정이 만리 같은 당신이 왜 죽는단 말이오?” 이교리를 시비하고 나중에 고개를
이교리에게로 기울이며 “도망하실 생각이 되거든 나오라고 하더라지 않았소?
그 말이 옳지 않소? 그래 생각이 없소?” 하고 은근히 물었다.
이교리는 “내가 그러지 않아도 좀 의논하려고.” 말을 중간에 그치고 두 손
바닥을 마주 비비면서 “섬 속에서 가면 어디로 가나?” 수단이 없는 것을 한탄
하니 주인은 “배가 없소?” 이교리의 미처 생각 못하는 것을 개도하여 주듯이
말하였다. 그리하여 이교리는 도망할 생각이 있는 것을 토설하고 배 한 척을 얻
어 달라고 부탁하고 주인이 어디까지 가든지 자기가 데려다 주겠다고 장담하는
것을 “그렇지 아니해. 자네가 나를 데리고 도망한 것이 발각되는 날에는 자네
집이 망할 것일세. 설사 자네는 죄책을 감심한다손 잡더라도 자네 처자가 있지
아니한가? 집에 있던 손 한목숨을 구하려고 사랑하는 처자 두 목숨을 죽이는 것
이 무슨 의리란 말인가. 자네가 같이 간다면 내가 아니 갈 터일세. 나를 구하여
줄 생각이거든 튼튼한 배 한 척만 얻어주게. 자네 배도 좋을 것일세. 내가 장난
이라도 부리어 보던 것이라 다른 배보다 나을지도 모르지.” 중언부언 달래다시
피 하여 간신히 그리 한다는 대답을 받았다.
주인은 몸이 불편한 이교리가 너무 오래 앉아 이야기하는 것을 미안히 생각하
여 “내일부터라도 내가 슬금슬금 준비하여 둘 것이니 그 동안 몸조리나 잘하시
오.” 하고 일어설 때, 이교리는 준비하는 것을 남의 눈에 뜨이지 않게 하라고
신신당부하였다.
그 이튿날 이교리가 마침 방안에 누웠을 때, 이교리를 부르러 읍에서 사령이
나왔다. 주인은 나온 사령에게 술대접을 잘한 뒤에 이교리가 일전부터 병이 나
서 지금 누웠으니 앓는 사람을 어떻게 데려가느냐고 걱정하니 그 사령이 제풀로
“앓는 것이야 데리고 갈 수 있나. 그대로 들어가서 원님인가 원놈인가한테 그
사연을 말하지. 원놈으로 말해도 쓸개가 빠졌지그려. 이때껏 인정을 써오다가 서
울 궐자의 말 한마디에 곧 붙잡아다가 객사의 쓰레질을 시키려고 하니 말이 되
나.” 하고 이교리 앓는 것은 보자는 말도 없이 그대로 돌아갔다.
사령이 간 뒤에 이교리는 주인을 청하여 “한번 읍내로 잡혀가는 날이면 일은
다 틀리는 것이요, 먼 바다로 나가려고 준비하고 있다가는 잡혀가기가 쉬울 것
이니 오늘 밤에 자네가 나를 고성땅에까지 건네놓아 주겠나? 그러면 거기서부터
걸어서 어디로든지 도망할 터일세.” 의논을 고치었다.
그날 밤중에 이교리가 주인집을 떠나는데 이웃 사람이 혹시 알까 꺼리어서 주
인과 단 두 사람이 어두운 속에 가만가만히 바다로 나왔다. 침침한 밤중에 거제
해변에서 배 한 척이 떠나갔다. 도망하는 이교리와 도망시키는 집주인이 그 배
에 탄 것이다. 때마침 불어오는 남풍에 그 배는 돛을 높이 달고 동방을 향하여
살같이 달아나니 희미한 별빛 아래에 갈라지는 흰 물결이 띠와 같이 보이었다.
주인은 이교리를 위하여 한참 배질이라도 더하여 줄 작정으로 서편에 있는 고
성을 버리고 동북으로 뱃머리를 틀어서 이튿날 새별에 웅천땅에 배를 대고 이교
리를 내려놓았다. 이교리는 정한림이 써준 ‘북방길’ 세 글자가 머리에 박힌
까닭에 북도로 도망할 것을 미리부터 마음속에 작정하였지만, 남방 한 끝에서
북도를 생각하니 아득하기가 짝이 없을 뿐 아니라 하루 양식의 준비도 없이 도
망하는 몸으로 몇천리 길을 무사히 가게 될지 몰라서 걱정스러운 생각이 머리속
에 가득하였다.
그러나 자기의 기골이 남보다 유달리 튼튼한 것을 믿고 하루이틀 한데서 잠을
자고 굶으면서라도 어디까지든지 가보겠다고 결심하고 북쪽으로 올라오는데, 길
이 돌더라도 촌에서 촌으로 길을 잡아서 될 수 있는 데까지 읍길을 피하였다.
이교리가 촌 농가에서도 자고 절간 판도방에서도 자고 서당에서도 자고 들판이
나 덤불에서 밤을 새우기도 하며, 논둑에서 기승밥도 먹고 절에서 잿밥도 먹고
서당에서 훈생의 대궁도 먹도 한 끼 두 끼 굶기도 하면서 하여간 무사히 강원도
땅을 지나 함경도 땅을 잡아들었다. 이교리 생각에는 ‘인제는 북도를 왔다. 북
방길이란 것이 어떻게 맞으려나.’ 하고 얼른 안신할 곳이 나서기를 마음으로
조이면서 여전히 북쪽으로 올라온다.
이때 이교리가 거제 배소에서 도망한 지 달포가 넘었었다. 처음 이교리의 도
망한 것이 탄로되었을 때, 거제현령은 집주인을 잡아들여 중장으로 신문하였으
나 칭병하고 있다가 모야무야에 도망하였다는 것 외에는 별 말이 나오지 아니하
였고, 거제현령의 치보가 경상감영으로 올라가고 경상감사의 장계가 서울로 올
라와서 왕이 화도 나고 겁도 나서 일변으로 거제현령은 파직 후에 논죄하고 경
상감사는 추고하라고 명하고 일변으로 엄중히 기찰하여 기어코 체포하되 체포하
는 자에게는 중상이 있으리라고 팔도에 영을 내리었다.
이장곤이 북도로 도망한 형적이 있다고 하여 북도의 수령 방백은 이 소식을
듣고 중상에 탐을 내어 포교와 장교를 길에 늘어놓은 중에 이교리는 ‘북방길’
을 믿으면서 북도로 올라오던 것이다.
이교리가 함경도 땅을 밟은 뒤에도 요행히 안변.덕원.문천.고원. 몇 고을을 무
사히 지나서 영흥 땅에 들어섰다. 한 달 나머지 갖추갖추 고생한 사람으로 오뉴
월 폭양이 내리쪼이는 한낮에 논틀밭틀 길을 걸어가기가 쉬운 일이 아니라, 이교
리는 어느 동리 어귀에 선 정자나무 밑에 마침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이 정
자나무 그늘에서 낮잠이나 한잠 자자.” 혼자서 말을 하며 누워서 막 잠이 들랴
말랴 할 때, 사람의 말소리가 귀에 들리었다. “이 동리에도 수상한 사람이 온
일이 없다니 이제는 어디로 갈까?” “글쎄, 고만 읍으로 들어가세.” 그말이 수
상한데 놀라서 이교리는 잠이 달아났다. 이교리가 눈을 반쯤 뜨고 보니 기찰
다니는 장교 두 사람이 정자나무에서 몇 간 아니 되는 밭모퉁이로 돌아나온다.
일어나서 도망하려다가는 도리어 수상하게 보일 뿐이라 반눈을 도로 감고 자는
체하고 누워 있었다.
“여보게. 저기 누운 것이 이 동리 사람은 아닌 모양인데.” “자네 눈에는 낯
선 사람은 다 이장곤이로 보이는 것일세. 패랭이 쓰고 베옷 입은 것이 교리 다
니던 양반은 아닐세.” 목소리가 차차 가깝게 들리더니 두 사람이 앞에 와서 선
모양이다. “변복은 말란 법이 있나?” “그는 그렇지.” 이교리는 인제 잡히는
것이다 생각하여 가슴이 두근거리는데 “여보게, 이 발 좀 보게.” 하고 한 사람
이 자기의 발을 가리키고 “아이구 기막히게 크다.” 하고 다른 한 사람이 발
큰 데 놀라서 입을 벌린 모양이다. “이것이 소도적놈의 발일세. 양반치고 이 따
위 큰 발 가진 것을 본 일이 있나?” “양반이 발 같지는 아니해도 그래도 누가
아나?” “아닐세, 이런 발을 가지고 과거를 하고 교리를 하여? 없는 일일세. 낯
바대기도 시커멓고 우락부락하지 않은가. 소도적인지는 몰라도 이장곤이는 아닐
세.” “아닌지 겐지 어찌 알아?” 두 사람의 수작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 사이
에 이교리의 살은 한 점 한 점 말라드는 것 같았다.
7
그 장교들이 자는 체하는 이교리 앞에서 한참 동안 저희들의 마음대로 지껄이
다가 필경은 발 큰 것이 양반 아닌 표적이라고 의논이 일치하여 “그만 가세.”
“아무려나 하세.” 가기로 작성하고 “그 자식 낮잠 잘 잔다.” “그 자식 코빼
기에 똥이나 발라 줄까.” 욕설을 남기고서 다른 데로 가버렸다.
이교리가 한변 이 곡경을 치른 뒤에는 촌이라고 염려 놓기가 어려워서 산길로
들어섰다. 나무꾼의 자욱길을 좇아서 산을 타고 골을 넘어 나가다가 나중에 길
을 잃고서 헤매는 중에 해가 저물었다.
이교리는 갈길없이 무인지경인 산골에서 그날 밤을 지내는데 배고픈 것도 견
디기가 어렵거니와 들짐승의 우는 소리에 간을 졸이느라고 잠 한숨을 이루지 못
하였다.
이튿날 이교리가 인가를 찾아나오려고 골을 따라 내려온즉 멀지 아니한 곳에
한 동리가 나섰다. 그가 동리를 찾아가면 자연 요기할 수 있으려니 생각하고 주
린 배를 움켜쥐고 차츰차츰 내려오는데, 붉은 상모 달린 벙거지가 그 동리로 가
는 것이 언뜻 그의 눈에 뜨이었다. ‘사령이다. 부질없다. 다른 동리를 찾아가자.
’ 이교리는 그 동리를 옆에 두고 그대로 지나서 다른 곳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남은 기운이 갑자기 일시에 빠졌는지 칠팝십 노인같이 지척지척 걸어간
다. 그는 다른 동리를 찾으려고 사방을 둘러보나 그 동리가 외딴 동리라 다시는
동리가 없다. 그는 기운이 시진하여 귀는 울고 눈에는 보이는 것이 없었다. 한두
걸음 더 걸어나 가려고 하다가 그대로 길에 엎드렸다.
이교리 정신이 돌아나며 눈을 뜨고 주위를 살펴보려고 애를썼다. 그러나 일식
하는 날 같아서 보이는 물건이 모두 똑똑치 아니하였다. 멀지 아니한 곳에 흘러
가는 물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그 편으로 기어갔다. 얼마 아니 가서 물컹하고
손에 집히는 것이 있었다. “밥이다!” 그가 먹으려고 자세자세 들여다보니 똥이
다. 보리밥이 채 다 삭지 아니한 똥이다. 그는 낙심하고 시냇가로 기어와서 물을
움켜 마시었다. 이교리는 정신이 깨끗하여지며 ‘길송장이 되는 것이다’ 염려도
생기고 ‘북방길이 뒤쪽으로 맞는 것이 아닌가’ 의심도 나섰다. 물을 마신 까닭
에 목은 타지 아니하나 오장이 당기기는 일반이라 그는 아까 밥으로 속던 것을
다시 한번 가보려고 간신히 일어서서 비척거리며 걸어갔다. 가서 보니 똥은 똥
이나 보리쌀알이 많이 그대로 있다. 그는 이것저것을 생각할 것도 없이 손으로
움키어 가지고 도로 시냇가로 나와서 보리쌀알을 물에 일어 골라서 입에 넣어
목으로 넘기었다. 그 뒤에야 눈에 보이는 물건이 똑똑하여질 뿐이 아니라 마음
에는 길이라도 걸을 것 같았다. 그러나 다리가 천근같이 무거워서 시냇가에 있
는 풀밭에 누워서 넘어졌을 때, 가죽이 벗겨진 이마와 코에 비름나물 잎을 뚜드
려 붙였다.
이교리는 얼마 동안 누워 있다가 천행으로 나무꾼 하나를 만나서 찬밥 한술을
얻어먹고 다시 길을 걷기 시작하여 무사히 용흉강을 건너서 어느 농가 봉당에서
하룻밤을 편히 자고, 이튿날 정평을 지나 함훙 땅에 들어섰다. 함흥 감영이 가까
운 까닭에 더욱 조심이 되어서 멀리멀리 둘러보며 가는 중에, 저 건녀편에서 장
교들이 떼를 지어 나오는 것을 보고 소로에서 소로로 도망하여 어느 시냇가에
오기까지 달음질을 쉬지 아니하였다. 숨은 턱에 닿고 목은 말랐다.
개버드나무 아래서 처녀 하나가 빨래를 하는데 그 옆에 바가지가 놓인 것을
보고 염치를 돌아볼 사이가 없이 물을 한 바가지 떠달라고 청하였다. 그 처녀는
헐떡거리는 나그네를 한번 흘끗 돌아보더니 바가지에 물을 떠서 한 손이 들고
한 손으로 머리 위에 늘어진 버들가지에서 잎사귀를 따서 물바가지에 띄운 뒤에
외면하여 바가지 든 팔을 내어미었다.
이교리가 처음에는 버들잎 띄운 것을 괴상히 생각할 여가도 없이 덥석 받아서
버들잎을 불어가며 물을 다 마시고 바가지를 도로 줄 때, 처녀의 얼굴을 잠깐
보니 달덩이 같은 얼굴이 복성스럽기도 하거니와 태도가 의젓하여 재상가의 딸
이나 다름이 없다. 이교리는 언덕 위에 다리를 뻗고 앉아서 ‘왜 물바가지에 버
들잎을 띄워 줄까?’ 처녀의 의사를 추측하여 생각하며 처녀의 곁태도를 바라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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