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장 이교리의 안신
1
그 처녀는 분홍 모시 적삼에 청베 치마를 입었는데 적삼은 낡아서 군데군데
미어졌고 치마는 승새가 굵어서 어레미집 같으니 구차한 집 처자인 것이 분명
하고, 또 빨래하는 손을 보더라도 살이 희기는 희나 결이 곱지 못하고 마디가
굵으니 험한 일을 하는 표적이 드러난다. ‘저런 처자에게 장가를 들고 시골 구
석에 묻히어 지냈더면 이런 죽을 고생도 아니할 것이지.’ 이교리는 팔자 한탄
하다가 자기의 한숨 소리에 처녀가 혹 돌아볼까 생각하여 방망이 소리가 그칠
때에는 한숨을 땅이 꺼지도록 크게 쉬었다. 그 처녀는 방망이질을 그치면 비비
고 쥐어짜고 또다시 방망이질을 시작하고 한숨 쉬는 사람이 가까이 있는 것은
아는것 같지도 아니하였다.
이교리가 처녀에게 말을 불이고 싶으나 혹 무악을 볼지 몰라서 할까말까 주저
하다가 방망이가 쉬는 틈에 처녀에게로 고개를 내밀며 “날 좀 보아.” 하고 반
말을 붙이니 그 쳐녀가 돌아본다. 시원한 눈 속에는 총명이 가득하고 천연스러
운 얼굴에는 웃도 모양도 없고 성내는 기색도 없다. “버들잎은 무어야?” 이교
리는 할 말이 없는 것보다도 그 버들잎이 종시 알고 싶었던 것이다. 처녀는 웃
는 듯 마는 듯하게 웃고 말이 없이 다시 방망이를 잡는다. 이교리가 처녀의 대
답을 듣지 못하고 또 지싯지싯 말을 붙이다가는 견모가 될 뿐이라고 생각하며
입을 다물고, 앉았던 자리에 드러누워서 아까 허둥지둥 쫓겨오던 모양과 지금의
방망이 소리를 들으며 누워 있는 모양을 함께 머릿속에 그리어 보고 지금 같이
다리가 아프고 몸이 무거워서는 곧 잡힌다 하여도 도망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
하였다.
어느 틈에 해는 너웃너웃 지게 되고 빨래도 끝이 났다. 처녀는 빨랫가지를 자
배기에 주워담고 밥 담았던 바가지를 그 위에 놓고나서 머리 위에 또아리를 얹
고 자배기를 들어 이려는데, 종일 빨래질에 팔에 알이 배었든지 자배기를 드는
모양이 남보기에도 거북하다. 처녀의 거동을 보고 있던 이교리가 언덕에서 쫓아
내려와서 자배기 드는 것을 부축하여 머리 위에 얹어주니 처녀는 또 웃는 듯 마
는 듯 웃고 말이 없이 돌아서 간다. 시내에서 활 한 바탕이 착실히 되느 곳에
외딴집이 있다. 멀찍이 처녀의 뒤를 따라온 이교리는 그 집 삽작 밖에 와서 “
주인 좀 보입시다.” 주인을 찾으니 나이 사오십 되어 보이는 사나이가 안에서
나오며 “무슨 일로 찾소?” 하고 이교리의 아래위를 훑어본다. 이교리가 “집
없는 고객으로 하룻밤 자자고 왔소.” 온 뜻을 말하니 그 사나이가 곧 대답을
아니하고 안을 향하여 “과객이 와서 하룻밤 재워 달라는데 어찌할까?” 물어
서, 거센 여인의 목소리로 “어디 재울 데 있소?” 하는 것을 듣고 그제야 “잘 데 없소, 다른 데로 가오.” 하고 쫓는다. “하룻밤 자고 갑시다.” “잘 데 없다니까 그래.” “좀 자고 갑시다.” “아따 잔소리 말고 가오.” “사람의 집에서 사람이 못 잔단 말이오? ” “사람의 집이면 다 당신의 집이오?”
삽작 밖에서 ‘자자’‘못잔다’시비판이 벌어졌을 때, 안에서 얼굴이 둥글고 넓적한 심술스러운 여인 하나와 빨래하던 어여쁜 처녀가 내다보고서 그 처녀가 고운 목소리로 “어머니!” 불러가지고 그 여인에게 ‘무어라 무어라’말을 하더니 그 여인이
“여보, 저렇게 염치 없이 모리악 쓰는 이는 처음 보겠구려. 말하기 귀찮거든
아무데서나 하룻밤 재워 보내오.” 사나이에게 말하니 그 사나이는 “그럴 테면
진작 재워 보내자지.” 혀를 툭툭 차고 나서 이교려를 보며 “과객질을 유년 해
보았구려. 들어오.” 볼멘 소리를 하였다.
2
그 집 주인은 아랫방이 불 안 때는 방이라 덥지가 않다고 과객을 인도하여,
이교리가 그 아랫방에 들어와서 보니, 이구석 저구석에 버들 일거리가 늘어놓였
다. 다 만든 모코리,동고리도 있고 날개를 꾸미지 아니한 키바탕도 있다. 이교리
는 선뜻 ‘백정의 집이구나.’ 짐작하고 자기가 삼한갑족의 양반으로 백정의 집
에 와서 자는 것은 창피하게 여기거나 또는 옥당 문관의 신분으로 백정의 집에
와서 자게 된 것을 한심하게 생각하느니보다도 ‘그 처자가 백정의 딸이라니 개
천에서 용 나는 격이다.’ 처녀의 본색이 미천한 것을 의외일로 생각하며 ‘그
처자의 그 버들잎이 본색을 가리키는 군호이었구나.’ 처녀의 의사를 자기 마음
대로 추측하고 그 총명을 기특하게 생각하였다.
그날 밤에 이교리가 자는지마는지 하게 한잠을 자고 나니 골치가 패는 듯 아
프고 몸이 오그라들도록 오한이 나서 큰 키를 한줌만하게 뭉치고 머리를 부둥키
고 누웠다가 외기가 싫은 까닥에 억지로 일어나서 초저녁에 덥다고 열어놓았던
창문을 간신히 닫고, 그리하고 다시 누운 뒤에는 한기가 돌다 신열이 났다하는
통에 어디가 아픈지도 모르고 정신없이 앓으며 반밤을 지내었다.
이튿날 식전이다. 그 집 식구들이 모두 일어났을 때, 아랫방의 창문이 닫기고
과객의 기척이 없는 것을 괴상히 생각하여 안여인이 그 사나이더러 “여보, 과
객 좀 깨우. 과객질하는 신세에 늦잠은 다 무어야.” 그 사살을 끝내자마자, 집
뒤에 있는 가죽나무에서 여러 까마귀들이 야단스럽게 우는 것을 듣고 아래윗니
를 탁탁 맞히며 침을 세번 뱉으니 그 사나이도 여인을 따라서 침을 튀튀 배앝고
아랫방 창문 밖으로 와서 “여보!” 소리를 지르며 문을 왈칵 열고 보더니 바로
여인 있는 편으로 고개를 돌리고 “큰일났소! 과객 죽었소!” 소리를 친다. 여인
은 “죽다니?” 처녀는 “죽다니요?” 하고 모두 창문 밖으로 와서 ‘참말 죽었
나’하고 들여다를 보니 과객은 그 큰 엄장에 네활개를 벌리고 가슴을 풀어젖히
고 눈을 감고 누웠는데 죽은 사람 같기도 하나, 이따금 ‘응응’하는 앓는 소리
가 들린다. 여인이 사나이더러 불러보라고 하여 “여보 여보!” 여러 번 불러보
았으나 대답은 없고 ‘응응’소리만 들릴 뿐이다. 과객이 죽은 것이 아니라 앓
는 것인 줄은 알았으나 큰일은 일반이라 내외간 공론이 시작되었다. “저걸 어
떻게 하오?” “길에 내다버립시다.” “누가 드나?” “당신이 들지 누가 들
어? 내가 부축해 주리다.” 참말로 내다버릴 거조를 차리려고 하니 옆에 있던
처녀는 “인정에 차마 어떻게 그렇게 해요.” 그 부모의 하는 말을 딱하게 여긴
다. 그 여인이 딸에게 손으로 삿대질을 하면서 “요년아, 네가 어제 공연히 불쌍
해 보이느니 무어니 해서 재운 까닭에 큰일을 내고도 또 무슨 소리냐!” 화를
내니 사나이가 “그 애야 무슨 죄가 있소.” 여인의 심사를 거스르지 않을 만큼
두둔하고 “화는 고만 내고 우리 얼른 저 반송장이나 처치합시다.” 안해의 비
위를 맞추려고 한다. 여인은 그가 딸 역성 들려는데 비위가 틀리어 화를 더 내
며 “여보, 당신은 말도 마오. 죽지도 않은 것을 왜 죽었다고 소리 질렀어. 나는
놀라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었소.” 사나이에게로 돌려붙는 것을 사나이가 “
아따, 잘못했소.” 피하니까 다시 딸에게로 화를 돌리어
“너는 집에서 궂은일이 나도 좋겠니?” 야단한다. 처녀는 부드럽게‘어머니’
불러가지고
“그럴 것이 무어 있어요? 아랫말 작은아버지더러 좀 와보라고 하시지요. 약 몇
첩 써서 나을 병 같으면 고쳐주는 것도 적덕 아니에요?” 여인은 ‘적덕’이란
딸의 말을 뇌면서도 나중에 사나이더러 “어떻게 하겠소?” 물으니 그 사나이가
딸의 말이 근리하다 하여 내외간에 공론을 다시 하고 의약 묘리 잘 아는 그 아
우를 불러다 보인 뒤에 병이 할 수 없다거든 그때 내다버리기로 하였다. “아랫
말 네가 갔다오너라.” 그 딸을 보내면서도 여인은 “요년,팔자에 없는 송장만
치게 돼봐라.” 딸을 벼르고 그 사나이는 “내괴, 식전부터 까마귀가 야단이야.
” 하고 또 침을 퉤퉤 배앝았다.
3
처녀가 간 뒤 한식경이 지났다. 그 내외가 번갈아 가며 “그만하면 올 터인데.
” “그만하면 올 터인데.” 하고 기다리던 차에 처녀가 혼자 돌아왔다. 처녀의
입이 미처 떨어지기도 전에 그 여인이 “너 어째 혼자왔니?” 혼자 온 것을 나
무라는 듯이 물으니 “작은아버지가 집에 아니 계십디다. 그래서 고원댁 오빠를
가보고 좀 찾아서 뫼시고 오라고 했지요. 나는 어머니 아버지가 기다리실까 봐
먼제 왔세요.” 처녀는 청하러 갔던 삼촌과 같이 오지 못한 것을 발명하이 대답
하였다.
아랫방 병자는 앓는 소리조차 없어지고 시각이 위태할 것 같은데, 의원 아우
는 좀처럼 오지 아니하여 주인 사나이가 여러 번 삽작 밖을 내다보았다. 그가
나중번에 내다보다가 들어오며 “저기 돌이하고 같이 오는군.” 선성을 놓으니
그 여인은 안방문 앞에 놓인 들마루에 앉았다가 일어서며 “돌이란 놈은 왜 오
나? 저의 집에 나무나 해주지 않고.”
하고 혀를 찼다. 조금 있다가 주인의 아우와 돌이라는 떠꺼머리 총각이 앞서거
니 뒤서거니 들어오더니 주인의 아우는 바로 사나이에게로 와서 인사하며 “어
떤 손이 와서 앓는다지요?” 묻고 총각은 처녀를 보고 “너의 작은아버지를 뫼
셔 왔으니 인제 상급이 있어야지. 염낭이나 하나 지어다고.” 조롱한다. 여인은
먼저 자기를 아는 체하지 않는 데 심술이 나서 돌이를 불러세우고 “며칠 만에
들 보면서 인사 한마디가 없단 말이냐! 아지미 대접은 알뜰히 한다. 그리하고 실
없는 소리만 하면 제일이란 말이냐! 너도 나이 이십이니 지각 좀 차려라!” 꾸짖
는데 시동생까지도 껴잡이 넣으니 돌이가 “고모님,잘못 되었소이다. 차후에는
지각을 차리겠소이다.” 사과하고 주인의 아우도 빙그레 웃으며 “아주머니, 날
새 안녕하십니까?” 인사한 까닭에 여인의 심술은 즉시 풀리었다. 주인의 아우
가 아랫방에 와서 병자의 모양을 살펴보고 그 다음에 또 맥을 짚어보더니 하마
터면 탈이 날 뻔하였다고 하며, 약낭 끈을 끄르고 우황청심환 한 개를 내어 동
변이 없으면 온수라도 좋다고 온수에 개어서 병자의 입을 어기고 흘려넣었다.
아랫방 문을 닫아 두고 나와서 식구들이 아침을 먹으려고 할 제 여인이 “아
침 좀 잡수.” 시동생에게 밥을 권하니 주인의 아우는 “먹고 왔습니다. 어서들
잡수세요.” 하고
“봉단아!” 처녀를 불러서 “나 물이나 한그릇 떠다 다오.” 하여 물그릇을 막
받아들자, 아랫방에서 “애구애구 물 좀 주십시오.” 하는 병자의 갈라진 목소리
가 들리니까 주인의 아우가 그 물을 먹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일어선다.
봉단이가 “작은아버지 잡수세요. 다시 떠다 주지요.” 무심히 말하는 것을 그
삼촌이 물끄러미 보며 “네가 갖다 먹이려느냐?” 하고 물그릇을 내주려는 체하
니 봉단이는 “아니에요, 작은 아버지도.” 하고 얼굴을 붉힌다.
주인의 아우가 그 물그릇을 가지고 가더니 병자를 먹이고 와서 “물그릇을 뺏
어가다시피 받아가지고 한숨에 다 키어버리던걸.” 여럿에게 휘뚜루 들으라고
말하고 특별히 형수에게 대하여 말을 붙인다. “아주머니, 앓는 손의 얼굴을 잘
보셨소?” “잘 보고 말고요.” “얼굴이 사내답지요? 천정이 번듯하고 코도 좋
고 입도 좋고 눈이 또 썩 좋아. 아까 물 받아먹을때 눈을 뜨는데 앓던 사람이라
열기가 없을 뿐이지 눈만 보아도 초초한 인물이 아닌 표가 납니다. 그렇지 않아
요? 그 골격도 사내답지요?” “상판대기가 과객질할 사람 같지는 않습니다만
그래도 과객질이나 하고 돌아다니니.” “일시 과객질이야 무슨 상관이 있겠세
요?” 수숙간에 왕래하는 말을 듣고 있던 그 형이 일시 과객질이란 말을 타내서
“아니다. 과객질은 유년 해본 사람이더라. 일시가 다 무어냐.” 말하니까 지각
차리느라고 이때껏 잠자코 있던 돌이가 참례를 들어 “나 보기엔 과객질보다 한
량질 해먹는 사람 같든데요.” 저의 고모부의 말이 당치 않은 듯이 말한다.
주인의 아우는 형의 말이나 돌이의 말이나 모두 접어놓고 조카딸더러 “너 보
기엔 어떻더냐?” 묻다가 그 얼굴 붉히는 것을 보고 무슨 의미가 있는 듯이
‘허허허’웃으니 봉단이 부모와 돌이는 아무 의미도 없이 모두 그 웃음에 끄리
어 웃었다.봉단이의 얼굴은 더 붉었졌다.
'Reading Books > Reading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임꺽정 1권 (6) (0) | 2022.09.09 |
---|---|
임꺽정 1권 (5) (0) | 2022.09.08 |
임꺽정 1권 (3) (0) | 2022.09.06 |
임꺽정 1권 (2) (0) | 2022.09.05 |
임꺽정 1권 (1) (1) | 2022.09.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