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등촉이 휘황한 함흥 동헌에 관원 두 사람이 나란히 같이 앉았다. 한 사람은
원인 줄 알려니와 한 사람은 누구인가 묻지 않아도 문 밖에서 어리대던 김서방
이다. 원이 ‘전 교리 이장곤이 밖에서 기다린다’ 고 쓰인 종이쪽을 보고 일변
의관을 정돈하며 일변 이교리 나으리를 인도하라고 수통인을 내보냈었다. 수통
인이 나갔다 들어와서 “이교리 나으리가 아니 계십디다.” 말하니까 원이 괴상
히 생각하여 사령을 불러서 종이쪽의 출처를 묻고 이교리 나으리가 어디 계신가
알아들이라고 분부하였었다. 사령이 나와서 쪼그리고 앉았던 김서방을 보고 “
이교리 나으리가 어디 계시어?” 뻣뻣하게 묻다가 내가 이교리노라고 나서는 김
서방을 보고 사령은 어찌 놀랐던지 한참 동안 말구멍이 막히도록 기가 질렸다.
나중에 잠깐만 기다리시라고 공손히 말하고 들어가더니 통인이 문간으로 나오고
책방이 문안에서 인도하여 들이고 원이 뜰 아래서 맞아올려서 김서방이던 이교
리가 동헌에 앉게 되었었다.
이교리가 원과 수인사하고 조정 소식을 대강 들은 연후에 그 동안의 소경력을
대강대강 이야기하니, 원도 놀라고 책방도 놀라고 통인도 놀라고 이야기 듣던
사람으로 놀라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었엇다. 원이 우선 의관을 바꿀 일이 급하
다고 자기의 입을 의복과 자기의 여벌 관망을 내어다가 이교리를 주었었다. 이
교리가 다시 세수하고 관망을 바꾸어 쓰고 의복을 갈아입고 나니 신수 좋은 관
원이라, 옆에 있던 사람들은 아까 보던 폐포파립 속에 저러한 인물이 감추어 있
었던가 자기의 눈을 의심하지 아니할 이 없었었다.
이교리가 처음 도망하던 때 벌써 삭탈관직을 당하였을 것은 미리 짐작하고 있
었지만, 원에게 사실을 들어 알고는 자기의 교리 칭호를 가지는 것이 외람한 일
이라고 말하여 원은 이급제라고 부르고 통인 등속은 이급제 나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급제가 지금 원과 같이 앉아서 담화하는 중이다. 원이 자기의 들은 대
로 반정 이후 서울 소식을 자세히 이야기하는데 “주상 전하께옵서는 진성대군
으로 잠저에 계실 때부터 성덕이 드러나신 터이지만, 우선 폐주 연산군을 처치
하옵신 것만 보더라도 요순의 자품이 백왕에 탁월하옵신 것을 알겠습디다. 정국
공신들 중에 그 중에도 더욱이 폐주에게 총애를 받다가 반정 당일에 반연으로
돌아붙은 공신들이 폐주에게 사약하자고 주장했더라는데 위에서 말씀이 의로는
군신이요, 정으로는 형제라, 그리할 수 없다고 하옵셔서 교동에 안치하게 되었답
디다. 서울 안에 그 많던 기생들을 더러는 공신에게 나눠 주시고 나머지는 모두
고향을 내려쫓으셨답디다. 선성위패를 다시 성균관에 봉안하시고 또 언문금법과
삼년상 금법 같은 부당한 금법을 모두 폐지하셨답디다. 무오년과 갑자년에 화를
당한 사람들은 대개 다 신원이 되었다는데 노형도 지금 무사히 생존한 것을 위
에서 아시게 되면 특별한 은전이 계실 것이오.”
이급제가 원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다가 말 틈을 타서 알던 친구의 일을 묻기
시작한다.
“정희량 정한림이 살았나요, 죽었나요?” 물으니 원은 “정한림 일이야 괴상하
지요.” 하고 “죽기는 풍덕서 강에 빠져 죽었다는데 시체를 못 찾은 까닭인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소문이 낭자하지요. 죽지 않았으면 노형같이 나올는지
모르지요.” 하고 허허 웃는다.
이급제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정희량이 죽지 않았을 터이지. 친구에게 피신할
것을 가르쳐 준 사람이 자기가 얼뜨게 죽었을 리 없지.’ 하고 자기가 거제 바
다에서 자살하려던 광경과 북방길이란 정한림의 적어 준 것을 믿고 북도로 도망
할 때, 도중에서 고생하던 경상이 꿈같이 생각이 나서 말이 없이 앉았다.
“무얼 그렇게 생각하시오?” 하는 원의 말에 비로소 생각을 그치고 저으기
웃으면서
“아니오.” 하고 “권달수 권교리는 어찌 되었나요?” 물으니 “응, 권교리? 죽
었지요. 참혹히 맞아죽었지요. 박수찬 같은 아까운 젊은 친구도 참혹히 맞아죽었
으니까.” 하고 원은 박은이와 서로 친하여서 풍월까지 같이 지어 본일이 있다
고 말을 한다. “그러면 이행이도 아시겠구려.” “이응교 말씀이오? 좌상안면은
있지요.” “그 사람은 어찌 되었나?” “이응교는 운수 좋은 사람이라 지금 살
았지요. 처음에 충주로 귀양 갔다가 박수찬 옥사에 연루로 잡혀 올라가서 죽을
뻔하고 살았지요. 그 뒤에 관노로 박혀 함안가서 있다가 또다시 잡혀 올라가서
노형이 가셨던 거제로 귀양을 가셨지요. 근일 소식은 못 들었지만 그 동안 벌써
풀렸겠지요. 그 사람의 팔자가 기구하다면 기구하지만 구경 말하자면 운수 좋은
사람이지요.” 잠깐 수작이 동안이 그치었다가 이급제가 갑자기 생각나는 듯이
“그 유명한 김처선이 증직되었답디까?” 물으니 원은 “아아, 내시 김지사 말
씀이지? 증직되었단 말 못 들었소.” 대답한다. 이와 같이 두 사람의 묻고 대답
하는 이야기는 그쳤다 이었다 끝이 없이 나가고 밤은 들어 퇴등때가 지났다.
5
그날 밤 이급제의 사처는 책실의 방으로 정하였었다. 이급제가 원에게 잘 자
라고 인사하고 일어설 때, 원이 내아에 들어가려고 같이 일어서며 “오늘 곤하
시지 않겠소?” 물으니 이급제는 머리를 흔들며 “곤하다니요. 곤할 까닭이 있
어야지요. 그렇지만 영감이 너무 오래 앉아 계시게 되면 미안하여서 일어섭니다.
” 하고 이야기를 더하면 좋을 듯한 의사를 보이었다. 그리한즉 원이 “내가 조
금 있다 사처방으로 가리다.” 하고 등불을 켜들고 있는 통인과 책방을 시켜서
이급제를 사처로 인도하게 하였다.
원이 이급제의 사처에 와서 좌정한 후에 내아에서 주안상이 나왔다. 두 사람
은 상을 앞에 놓고 앉고 상머리에는 그날 밤 이급제에게 수청들 기생이 앉았다.
이급제가 오래간만에 기생의 부어주는 술을 마시며 백정의 집에서 사위 노릇하
는 동안에 받은 박대와 천대를 자세히 이야기하고 나중에 “내가 고리 백정의
식구가 되어서 갖은 천대를 받고 지내는 동안에 천대받는 사람의 억울한 것을
잘 알았소이다. 이렇게 말하면 어폐가 있을지 모르나 천대하는 사람이 사람으
로는 천대받는 사람보다 나으란 법이 없습디다. 백정에도 초초치 아니한 인물이
있다뿐이겠소? 영감도 이것만은 알아두시오. 천인도 사람입니다. 도연명이 종을
사서 아들에게 보내며 이것도 사람의 아들이니 잘 대접하라고 했다더니 천인도
사람의 아들이니까 우리가 절 대접할 것입니다.” 하고 옆에 있는 기생을 돌아
보며 술을 쳐라 하니 원이 술 치는 기생을 보고 “너는 사람의 아들이 아니지만
사람의 딸이니까 오늘 밤에 이급제 나으리께 잘 대접을 받아라.”하고 한바탕
웃고 나서 “여보, 백정에 인물이 있다니 그 인물을 무엇하오?”하고 이급제를
돌아보니 이급제는 거나한 술기운에 “할 것이 없으면 도적질이라도 하지요. 백
정의 집에 기걸한 인물이 난다면 대적 노릇을 할밖에 수 없을 것이오. 내가 억
울한 설움을 당할 때에 참말 백정으로 태어났다고 하고 억울한 것을 풀자고 하
면 무슨 짓을 하게 될까 생각해 본 일이 여러번 있었소이다.”
이급제의 말이 여기 미쳤을 때, 영창문 밖에서 고양이가 ‘야웅야웅’ 소리를
하니 기생이 일어서 영창문을 열치고 “이 괴 이 괴.” 하고 쫓는다. 이급제가
다시 말을 이어 “괴가 쥐를 잡지요. 그렇지만 큰 쥐가 괴를 잡는 데도 있답디
다. 사람도 쥐에게 물리는 일이 있지 않소? ‘이 괴’한마디면 괴가 무서워 피
하는 사람을 쥐가 무니 쥐라고 우습게만 볼 것이 아닙니다.” 원이 빙글빙글 웃
는 것을 보고 이급제는 “웃으실 말이 아닙니다.”
하니 원은 갑자기 웃음을 거두며 “아니요, 나는 노형 말씀을 웃은 것이 아니오.
괴 말이 나니까 장순손의 일이 생각이 나서 혼자 웃었소.” “장순손이라니 과
거한 성주사람 말씀이오? 그 사람의 얼굴이 도야지와는 근사하지만 괴와야 같기
나 한가요.” 원은 ‘아니오’ 하고 일전에 서울 친구에게 편지로 알았다고 장
순손의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연산군이 총애하던 성주 기생이 있었는데 종묘 제향의 준여로 궐내에 들어
온 도야지 머리를 그 기생이 보고 웃었더라는구려. 연산군이 그 웃는 데 의심
을 내어 가지고 웃는 까닭을 대라고 종주먹을 대니까 그 기생의 말이 저의 골
사람 장순손의 얼굴이 도야지 머리와 같아서 장도야지라는 별명이 있는데, 연산
이 장가가 너의 머리를 보고 우연히 생각이 나서 웃었다고 했더니, 연산이 장가
가 너의 애부로구나하고 화를 내서 장순손을 잡아오리라고 도사를 보냈었다오.
장순손이가 그 집에서 잡혀 올라오다가 함창 공갈못을 지날 때에 괴 한 마리가
지름길로 건너가는 것을 보고 압상하는 도사더러 내가 과거 보러 가는 길에 괴
가 길을 건너더니 등과하게 되었는데, 지금 괴가 저 길로 건너가고 또 저 길이
마침 질러가는 길이니 저리 가자고 해서 지름길로 조령까지 왔을 때 반정이 되
어서 죽지 않게 되었다오. 그런데 잡아오지 말고 목을 베어 올리라는 명을 받아
가지고 뒤미처 도사가 또 내려갔었는데, 그 도사는 큰길을 좇아 상주로 들어가
서 서로 만나지 않게 되었다니 구경 괴의 덕을 본 것이 아니오?” 이야기를 끝
마치고 “장순손이가 반정된 뒤에 춤을 덩실덩실 추었다고 시비하는 사람이 있
답디다. 그렇지만 일이 춤이라도 추게 되지 않았소?” 장순손의 이야기 끝에 운
수 이야기가 나오고 운수 이야기 끝에 술수 이야기가 나왔다. 이야기가 이와 같
이 변하여 나가는 중에 밤이 깊어 졌다. 원이 술상을 치우게하고 이급제에게 그
만취침하라고 말을 하고 동헌으로 돌아갔다.
6
이튿날이다. 원의 대접이 융숭한 까닭에 이급제는 자리에서 일어나며부터 먹
는 빛이다. 사처방에서 자리 조반으로 양즙을 먹고 늦은 조반으로 깨죽을 먹었
고 동헌에 가서 열두 접시 쌍조치의 갖은 반상으로 아침밥을 먹고 국수장국 떡
실과를 늘어놓은 다담상으로 점심을 먹었다. 점심이 끝난 뒤에 이급제가 원을
보고 관아에서 오래 묵는 것은 공사의 방해라 나가겠노라 말하니 원의 말이 오
늘 보장을 감영으로 올려보냈은즉 감사가 곧 서울로 장계할 것이나, 조명이 내
려오기까지는 한동안 기다려야 할 것인데 아중에서 묵는 것이 비편하면 읍중에
사처를 정하여 주마고 하고 뜰 위와 뜰 아래에 섰는 아전들을 내다보며“이급제
나으리의 사처를 정하여 드릴 터인데 깨끗한 집이 있겠느냐?” 물었다. 아전들
이 ‘뉘 집이 좋을꼬’ 하며 서로 돌아볼 때, 늙은 호방이 앞으로 나와 엎드리
며 “소인의 집이 누추하오나 사처로 쓰신다면 치우겠습니다. 하니 이 호방은
곧 김서방이 원에게 통기하여 달라고 청할 때 ‘이사람 저리 비키소’ 하고 거
절하던 아전이다. “네 집에서 지공을 잘하겠느냐?” 원이 물으니 “지성껏 하
옵지요.” 하고 벌써부터 지성스러운 모양을 보이었다.
이때 이급제가 원을 향하여 “여보, 영감. 사처는 좀 생각하여 보십시다. 그
전 있던 데로 도로 나가서 며칠 지내는 것이 좋을 것 같소이다.” 말하니 원이
웃으면서 “백정의 사위 김서방은 촌백정의 집에 가 있어도 좋지만, 함흥군수의
손님 이급제는 촌백정의 집에 가지 못할 것이오.” 이급제가 원의 말을 듣고 역
시 웃으며 “김서방이 이급제요, 이급제가 김서방이니까 가지 않아도 좋고 가도
좋지요.” 웃음의 말로 대답하고 나서“아무렇든지 만나야 할 사람들이니까 내
가 나가는 것이 여러 가지로 편할 것 같소이다.” 말하였다. 나중에 원이 생각대
로 하라고 주삼의 집에 나가기로 작정되었다. 호방은 자원하는 사처를 이급제가
싫다 하는 것이 어제 일을 치부하는 것으로 알고 틈을 타서 이급제 앞에 나가
눈이 무딘 까닭으로 죽을 죄를 지었다고 사과하니, 이급제는 사과까지 할 것이
없는 일이라고 웃고 용서하였다.
얼마 뒤에 이급제가 관 교군을 타고 관 하인을 데리고 고생
으로 들어갔던 삼문을 호강으로 나왔다. 주삼의 집에서는 김서방이 읍에 들어간
뒤에 종일 기다려도 나오지 아니하니까 저녁밥을 먹으며 여러 사람이 모여 앉아
서 공론이 분분하였다. 주삼이는 “감사를 본다고 바로 간 게로군.” 하고 주삼
의 안해는 “읍에서 원님을 보려고 덤비다가 주리경을 쳤는지 모르지.” 하고
돌이는 “사람이 경치기 꼭 알맞지라오.” 하고 모두 봉단이의 얼굴을 돌아보니
봉단이는 천연스럽게 앉았는데 조금도 근심하는 빛이 보이지 아니하였다. 봉단
이가 남에게 근심하는 빛이 보이지 아니하였으나, 그날 밤에 혼자서 고시랑고시랑하여 밤을 새우고 이튿
날 식전에 돌이를 꾀어서 김서방의 소식을 알아 달라고 하니 돌이는 어디 가서
알아보나, 김서방을 알사람이 있나 하고 나가지 아니하려다가 봉단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거절할 힘을 잃어서 ‘갔다 오지’하고 읍으로 들어갔다.
백정 양가의 사이 김서방이 전날 이교리요, 오늘날 이급제로 지금 원님의 우
대를 받는다는 소문이 이때 읍중에 자자하였다. 돌이가 읍에서 이 소문을 듣고
뛰어나오다시피 하여 발을 집에 들여놓기가 급하게 “누이 어디 있나? 큰일났
네. 김서방이 아니라데.” 하고 소리를 질렀다. 주삼의 안해는 돌이를 붙잡고 “
이애, 그게 무슨 소리냐? 김서방이 아니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놀라는데 봉
단이는 방에 있다가 쫓아나와서 김서방이 아니라는 것은 캐어묻지 않고 “그가
지금 어디 있습디까?” 있는 데만 알고자 한다. 돌이가 읍내에 자자한 소문을
이야기하니 주삼의 내외는 놀라서 말이 없고 봉단이는 그리 놀라는 빛도 없이
“그러면 그가 지금 읍에 있겠구려.”말하고 돌이의 얼굴을 치어다본다. 주삼의
집 식구들이 일이 손에 붙지 아니하여 모여 앉아서 김서방 이야기로 판을 짜던
때, 동네가 시끄러워지며 “에라, 비켜라!” 소리가 연하여 들리며 관 하인들이
앞뒤에 옹위한 교군 한 채가 주삼의 집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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