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돌이는 게으름뱅이 김서방이 이급제 나리로 변한 데 대하여 공연히 심정이 사
나웠다. 엊그제까지 여보 저보 하던 사람에게 갑자기 나리 마님이니 나리 아씨
니 말하기가 맘에 창피하였다. 저의 고모가 비루먹은 개같이 구박하던 김서방을
칙사같이 대접하는 것도 맘에 우스웠다. 이급제가 오던 때는 수선한 틈에 슬그
머니 나갔었고 저녁밥은 들어와 먹었으나 먹고 난 뒤 또 슬그머니 나갔다가 밤
늦게 들어왔다. 그리하여 이때껏 이급제와 대면하지 아니하였다.
주팔이가 아침밥을 먹은 뒤에 돌이를 보고 “나리 매부가 대접 잘 하디?” 하
고 웃으며 물으니 돌이는 “대접이고 주발이고 누가 보기나 했습디까?” 하고
아랫입술을 내밀었다. 옆에 있던 주삼이가 “그러면 네가 생전에 아니 볼 터이
냐? 친남매같이 지내는 봉단이가 섭섭타고 아니하겠느냐?” 하고 몇 마디 나무
라니 돌이는 봉단이가 섭섭히 아는 것은 맘에 좋지 아니하여 “가보지요.” 말
하고 주팔을 향하여 “가보고 무어라고 말할까요?” 묻는 것을 주팔이가 웃으면
서 “방 밖에 가서 소인 돌이 문안드립니다, 말하려무나.” 대답하니 돌이는 고
개를 야단스럽게 흔들며 “나는 싫소. 아니 가볼라오.” 하고 아니꼽고 비위 상
하는 듯이 입맛을 다시었다. 주팔이가 돌이의 하는 꼴을 보고 웃다가 “여보게
노총각, 거정 말고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말하게. 나리 매부가 사람이 소탈
해서 역정은 아니 낼 것일세.” 실없은 어조로 말하고 나중에 “이애 나하고 같
이 가보자.” 말하여 주팔이가 돌이를 데리고 윗방으로 올라왔다.
처음에는 돌이가 주저주저하며 말을 잘 아니하였지만 “어서 방으로 들어오너
라.” “너 저리 앉아라.” “돌이가 줏으라고 기생이 혹 떨어졌을지 모르지.”
이와 같이 이급제가 정답게 웃음의 말까지 붙이는 바람에 돌이는 말문이 열리어
서 “기생은 왜? 내가 장가들러 서울 갈께 이쁜 색시 하나 중매해주시오.” 하
고 너털웃음까지 웃게 되었다.
이급제가 주팔이와 이야기로 낮을 보내고 봉단이와 웃음으로 밤을 보내는 동
안에 두 가지 새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 가지는 주팔이가 술수를 짐작하는 것
이니, 주팔이와 같이 앉아서 말을 하다가 “내가 풍파를 당한 뒤로는 조복 입고
나설 생각보다도 농의 입고 숨을 생각이 많아진 까닭에 이번에 서울 가서는 형
편을 보아 조정에 나서지 아니할 생각일세.” 말하니 주팔이는 빙그레 웃으면서
“생각만으로는 되지 않지요. 환수가 터지는 것을 억지로 막지 못하리다. 앞으로
한참 동안은 환로가 험하다 하더라도 별 풍파없이 나가게 되시리다.” 무슨 짐
작이 있는 것같이 말하고 “자네가 음양술까지 짐작하나?” 다그쳐 물어야 “짐
작은 무슨 짐작이에요.” 하고 웃을 뿐이었다. 그러나 평일에 지망지망히 말하지
않는 주팔이라 짐작하는 것이 없이 그렇게 말할 리 없을 것을 알았고, 또 한가
지는 봉단이가 태기 있는 것이니 봉단이와 같이 누워서 이 이야기 저 이야기 하
다가 봉단이가 “요사이는 가끔가끔 헛구역이 나서 못견디겠세요.” 하는 말이
고동이 되어 “무어 체했남?” “모르겠세요.” 문답이 있은 뒤에 입을 귀에다
가까이 대고 가만히 “구실하오?” 물으니 봉단이는 처음에 못 알아듣고 “구실
이라니요?” 하다가 “경도 말이야.”
해석을 듣고는 한참 아무 말이 없더니 “서너 달째 없세요.” 하고 컴컴한 속에
서도 얼굴이 보일까 부끄러운 듯이 살짝 돌아누웠다. 평일에 봉단이가 말이 적
고 몸을 잘 간직하는 까닭에 아직 그 어머니까지도 눈치채지 못한 것을 알았다.
이급제가 주삼의 집에 나온 지 벌써 삼사 일이 되었다. 그 동안에 이급제에게
는 사위 나리라는 별명이 생겼다. 처음에 주삼의 안해가 사위 나리라고 말하기
시작한 것이 주팔이와 돌이까지도 사위 나리라고 말하게 되고 나중에는 동네 사
람들까지도 사위 나리 사위 나리 하게 되었다. 게으름뱅이 사위라는 별명이 곧
사위 나리로 변한 것이다.
11
사위 나리가 서울로 떠나게 될 날도 가깝고 하니 집안 식구가 한 자리에 모이
어 조석을 같이 먹자고 주장하는 윗방이 조석 먹는 방이 되었는데, 구미 잃은
봉단이가 험한 밥 먹는 것을 사위 나리가 딱하게 여기어서 자기의 입 쌀밥을 주
고 싶으나 여러 사람 보는 곳에 유난스러워서 주삼의 안해를 보고 “혼자서 좋
은 밥을 먹자니 첫째 염치가 없어. 이 밥 좀 나눠들 자시지.” 하고 위만 헐다가
만 밥그릇을 내어주니 주삼의 안해가 “고만두고 더 잡수시오.” 하고 권하다가
사위 나리가 정히 고만 먹겠다고 하니까 “네나 먹어라.” 하고 봉단을 내주었
다. 사위 나리 맘에는 봉단이가 “네.” 하고 받아 먹었으면 좋겠는데 봉단이는
남의 맘도 모르고 “아버지 잡수세요.” 하고 주삼을 주고 주삼은 “나는 조밥
이 좋아. 당신 자시오.” 하고 안해를 주고 주삼의 안해는 “아재 자시오.” 하
고 주팔을 주고 또 주팔은 “나도 조밥이 좋아. 너 먹어라.” 하고 돌이를 주었
다. 입쌀밥 담은 밥그릇이 한 차례 식구 앞에 조리를 돌아 돌이에게 간 뒤에 돌
이가 “다 싫다면 내나 먹지.” 하고 처치하게 되니 사위 나리의 소료와는 틀리
었다. 사위 나리가 쌀을 얻어다가라도 다같이 입쌀밥을 지어 먹어야 하겠다고
발론하고 원에게 편지를 썼다. 그 편지 사연에는 찬으로 고기는 있으되 반에 백
옥이 귀하니 한이라고 하였다. 그 편지는 돌이가 가지고 가게 되었다.
원이 이급제의 편지를 받아보고 이방을 불러 쌀을 보내게 하라고 지휘하려다
가 이급제가 도집강에게 동고리 값으로 쌀을 달라다가 매를 맞았다는 이야기가
생각이 나서 이방을 내다보고 “향곳말에 도집강이란 자가 있다지. 그자가 견디
느냐?” 물으니 이방은 원님이 이때껏 아니하던 홀태질을 시작하려는가 생각하
며 “부자로 사옵니다.”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자를 지금 좀 들어오라고 불러
라.” 하고 원이 이방에게 이르더니 얼마 뒤에 도집강이 관가로 들어왔다. 도집
강이 원에게 절하고 꿇어앉은 뒤에 원이 대번에 정색하고
“향곡에서 무단하는 기습은 인민의 부모된 나로서 알고 그대로 둘 수 없는 일
이야.” 호령기 있게 말하니 도집강은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민이 득죄하온
일이 없사온데...” 하고 벌벌 떨며 발명도 채 다하지 못하여서 원이 눈을 부릅
뜨며 “무슨 잔소린고. 양주삼의 동고리를 빼앗은 일이 없는가?” 호령하였다.
도집강이 주삼의 사위가 전날 이교리란 소문을 듣고 알아보니 주삼의 사위는
외사위로 자기에게 매맞은 사람이 적실히 이교리라. 이교리를 가서 보고 사과를
하여 볼까? 사과를 하러갔다가 봉변하지 아니할까? 망상거리고 지내던 차라 지
금 원의 호령이 이교리의 청으로 대신 분풀이하여 주려는 거조인 줄로 알고 얼
굴빛이 채수염빛같이 하얘지며 “민이 무지하오나 주삼의 사위가 이교리이신 줄
알았더면 언감 생심이옵지요만, 그때 백정의 사위로 언어 행동이 완만하옵기에
모르고 작죄하였사오니 성주 덕택을 입어지이다.” 채수염이 마루청에 서리도록
고개를 숙이고 손바닥을 맞대어 치어들고 비니 원이 속으로 웃으면서 “동고리
몇 벌을 빼앗았던고?” 대답이 거의 우는 소리와 같다.
원이 도집강에게 고개를 들라하고 평탄한 말소리로 지나간 일이기에 과히 추
구하지 아니하나 속죄는 하여야 할 것인즉 동고리 한 벌에 쌀 한 섬씩 석 섬을
주삼에게로 실려 보내되, 보내는 것을 내가 보아야 할 터이니 지금 나가 곧 실
려서 관가로 들여보내라 이르고, 또 이후에는 반명이라고 행패하지 말라고 일러
서 보냈다. 도집강이 형문 께나 좋이 맞을 줄 알았다가 쌀 석 섬에 타첩된 것이
도리어 다행하여 집에 나오며 곧 소 세 바리에 쌀을 실렸다. 돌이가 원의 답장
을 받고 쌀바리를 영거하여 가지고 나왔다. 사위 나리가 원의 답장을 뜯어보니
그 사연에 이 쌀은 내가 보내는 것이 아니요, 형의 매품을 도집강에게서 추징한
것이라고 하였었다. 사위 나리는 “원이 실없은 사람이로군. 도집강은 내가 애자
지원을 갖는 사람으로 알았으렷다.” 하고 편지를 주팔에게 보인 뒤에 서로 바
라보고 웃었다. 주삼의 안해는 이것을 알고 몇 번이나 시원하다 고소하다 외치
고, 또 입쌀밥을 지어서 식구가 돌아앉아 먹을 때에 이 밥은 별달리 맛나다고
떠들었다.
제 8장 상경
1
며칠 뒤에 사위 나리가 속이 거북하다고 아침밥을 설친 일이 있었다. 주삼의
안해는 사위 나리가 시장하겠다고 부지런히 이른 저녁을 지었다. 식구들이 윗방
에 모이어 밥을 먹을 때에 홀저에 삽작 밖에 떠들썩하는 소리가 나며 여러 관
하인이 웅긋쭝긋 마당에 들어섰다. 내다보고 알은 체하는 이급제에게 여러 사람
이 함께 문안을 드린 뒤에, 그중의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서서 허리를 구부리고 "
조명이 내리셨으니 지금 급히 읍으로 들어오십시사고 하인들을 보냅니다." 하고
원의 전갈을 전하였다. 사위 나리가 몇 술 뜨지 아니한 밥상을 그대로 치우게
하고 총총히 서울길을 떠나게 되었다.
"진지나 더 좀 잡숫고 떠나시지요." 주팔이가 자기 뿐 아니라 집안 식구들의
대리 격으로 말한즉 사위 나리는 "속이 편치도 않고 또 속이 덜렁해서 먹을 수
가 없어." 대답하고 "전에도 말해 두었지만 뒷일은 믿네." 일변 말하며 일변 윗
옷을 입으니 주팔이도 풀어놓았던 수건으로 다시 머리를 동이며 "나도 읍에까지
가서 떠나시는 것이나 보입지요." 하고 일어섰다. 주삼이는 아우와 같이 읍에까
지 가기로 하고 주삼의 안해도 간다고 하는 것을 주팔이가 "아주머니는 고만두
시지요." 말리어서 중지하게 되었다.
사위 나리가 주삼의 안해를 보고 작별인사하고 돌이를 보고 작별 인사하는 동
안에도 눈은 자주 봉단에게로 가더니 나중에 방에서 나가려고 할 때, 봉단의 옆
에 잠깐 발을 멈추고 “몸을 조심하오. 곧 만나게 될 것이니 너무 섭섭해하지
마오.” 넌지시 당부하고 나와서 마당에 놓인 가마 속에 들어앉았다. 이때 해는
서산을 넘어갔고 어둠빛은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봉단이가 그의 어머니와 같이
삽작문 밖에 나서서 가는 가마 뒤를 바라보다가 저녁 안개와 연기 속에 가마가
보이지 않게 되니 “어머니, 가마도 보이지 않네.” 하고 머리를 그 어머니의 팔
에 의지하였다. 주삼의 안해가 “이애, 고만 들어가자. 바람이 선선하구나.” 말
하여 봉단을 데리고 윗방으로 들어왔다.
돌이는 혼자 앉아서 먹던 밥을 마저 먹다가 “혼자서라도 먹어치우려고 먼저
먹습니다. 아주머니는 누이하고 같이 잡수시오.” 하고 고모에게 말한 뒤에 “누
이는 첫이별이라 섭섭할걸.” 하고 봉단의 얼굴을 치어다보니 봉단은 치워놓은
사위 나리 밥상을 바라보는데 눈에 눈물이 어리었다. “저런, 우네.” 돌이의 조
롱에 봉단이가 “밥이나 먹우.” 대답하는데 전에 없이 말소리가 날카로웠다. 나
중에 주삼의 안해는 밥을 먹고 봉단은 그 어머니의 권에 못이겨 먹는 체하다가
말았다.
이튿날 아침때가 지난 뒤에 주삼의 형제가 읍에서 돌아왔다. 주삼이가 방에
들어와 앉으며 “기구가 장하더라.” 밑도끝도 없이 말하니 그 안해가 “무슨
기구요?” 묻다가“무슨 기구라니, 사위 나리 행차가 떠나는 기구 말이지.” 퉁
명스럽게 말하는 것을 듣고도 골을 내지 않고 “이야기를 좀 자세히 하시구려.
” 청하였다. 주삼이는 “원님이 나오고 육방 관속이 쏟아져 나오고 말머리에
사람이 들어엉기어서 우리 형제는 작별인지만지 하게 간신히 작별하였어.” 말
하고는 다른 이야기가 없으니 주삼의 안해가 갑갑하여 주팔을 돌아보고 “아재
가 좀 처음부터 이야기하시오.” 말하여 주팔이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사위 나리 구명도생하였다는 소식이 조정에서 알게 되어 홍문관 교리 지제
교 겸 예문관 응교라는 벼슬을 특별히 제수하고 역마를 주어 올라오게 하라고
조명이 내리었답니다. 그래서 오늘 식전에 역마를 타고 떠났어요. 이야기는 고만
이지요. 무슨 다른 이야기가 있나요? 아차, 참 우스운 이야기 하나 들은 것이 있
어요. 사위 나리 발이 어떻게 엄청나게 큰지 원님이 함흥바닥을 덜어서 그중 큰
신을 구해놓은 것이 발에 마치어서 할 수 없이 버선의 솜을 빼고야 신었답디다.
그전에 함흥으로 도망올 때 장교에게 잡힐 뻔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발 큰 것
이 양반 아니라고 장교가 놓고 간 일까지 있었답디다. 지금 읍에서는 이교리 이
야기가 나면 발 크다는 이야기도 따라서 나는데 말에 말이 보태어서 별로 허풍
치지 않는 사람이 이교리의 발은 한 자 몇치라고 말한답디다. 발이 한 자 몇 치
면 병신이지, 허허허.” 주삼의 안해는 고사하고 경황이 없어 하던 봉단이까지도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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