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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1권 (39)

카지모도 2023. 12. 15. 0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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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촌댁의 머리 속에는 벌겋게 달아오르는 효원의 얼굴과 활처럼 휘어지던 그

네의 입술이, 때때로 가슴 밑바닥에서 주먹이 치밀 듯 떠올랐다. 율촌댁이 새파

랗게 노하여 내동댕이친 저고리를 줍던 침착하고 냉정한 모습, 그리고 낯색도

변하지 않고 두말없이 심상치 않은 것이다. 일찍 등잔불을 끄라고 말한 그날 밤

에 하필이면 반발이라도 하듯이 장 등을 하길래, 그것도 몹시 못마땅하였고, 밤

새껏 지었다는 저고리의 깃궁둥이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바느질 솜씨가 남달리

좋은 율촌댁은 특별히 날렵하면서도 부드럽게 돌아가는 깃을 잘 달았다. 그래서

율촌댁의 저고리는 우아하였다. 그런데 며느리가 내미는 저고리의 깃궁둥이를

보라지. 안반짝같이 펴져 가지고 넙적한 것이, 발로 바느질을 해도 이만 못할까?

이것이 사람을 업수히 여기는가?

설령 본디 솜씨가 없어서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흉거리일 뿐만 아니라 어

차피 이 옷은 다시 지어야지 못 입을 것, 마침 어머님도 안 계시니 내 저 기를

꺾어 놓으리라. 네가 타고난 성격을 쉽사리 고칠 수 없을 것이나 그렇다고 그냥

두고 볼 수도 없는 일이다. 네가 그 성질 순하게 고치지 않으면, 네 평생도 고달

프거니와 온 집안이 평안치 못하리라. 거기다가 강모의 성격이나 좀 강단이 있

어 주었으면 좋으련만, 그는 순하기 노루 같고 어여쁘기 꽃 같으니, 차라리 내외

가 바뀌어 만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으리. 강모는 확실히 혼인하고서는 다른 사람

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져, 모습은 소년이로되 겉늙은 사

람처럼 보인다. 그것이 율촌댁의 가슴을 못으로 치듯이 저리고 애달프다. 강모가

그렇게 이상하게 그늘지고 시들어가는 까닭을, 율촌댁은 효원에게 있다고 짐작

하였다. 내 짐작이 맞고말고, 여자 대가 저렇게 드세니 어찌하랴. 이번 일을 기

회로 생트집을 잡아서라도 단단히 눌러 주리라. 그래서 율촌댁은 저고리를 움켜

쥐고, 눈 녹은 마당의 진흙탕에 동댕이를 채 버렸던 것이다. 그렇게 효원과는 마

주앉으려고도 않던 강모가 이번 여름방학을 맞아 매안에 왔을 때, 청암부인은

강모를 붙들고, 얼마나 간곡하게 사정하고 타이르고 애원하였는지.

"강모야, 할미 좀 봐라. 인제는 다 늙었다. 인제 모든 게 전 같지가 않어. 밥

먹는 것도 움직이는 것도 다 힘들다. 이러다가 곧 죽을 게야. 그런데 내가 왜 못

죽고 있는 줄 아느냐? 강모야, 증손자 안아 보고, 이 할미가 그놈 얼굴 좀 보고

갈라고 이렇게 지체하는 게다. 아, 그래야 구천으로 돌아가서도 조상님을 뵈옵고

는, 증손자 소식을 전해 드릴 게 아니겠느냐? 아무 소식도 못 가지고 빈 손으로

간다면, 내, 면목이 없어서 그런다. 이 할미 심정을 알겠지... ? 할미가 머리 알아

서 날받이도 다 해놨단다."

청암부인의 목소리에서는 끈끈한 침이 묻어났다. 그 끈끈함이 마주앉은 강모

와 건너편에서 소리를 죽이고 있는 율촌댁의 목 언저리에 엉기어 마치 실타래를

감듯 감겨들었다. 강모가 꾸르륵 침을 삼켰다.

"너는 이 종가의 손을 이어 놓아야 할 귀중한 사람이다. 사람마다 일이 있고

몫이 있는 법인데, 어찌 너는 네 할 도리에 대해서 그리 등한하냐? 어디 속 시

원히 할미한테 다 털어 놓아 보아라. 속에다가 담어두지만 말고. 할미가 들어 주

마."

청암부인은 강모 쪽으로 윗몸을 구부리며 무픕까지도 기울여 이야기하고 있었

건만, 강모는 오히려 한 걸음 뒤쪽으로 물러나기라도 하는 것같은 몸짓을 하였

다. 강모의 숙인 이마 위에 잔 그물 주름이 지는 것을 율촌댁은 보았다. 그리고

한참 동안, 다시 침묵이 방안에 고였다.

"강모야. 왜 아무 말이 없어? 할머님이 저렇게 말씀허시는고만... . 어른 말씀에

는 얼른 대답을 사뢰어야지."

침묵이 저울추보다 무겁게 처지자, 보다 못한 율촌댁이 낮은 소리로 강모를

채근하였다. 자기 속으로 낳은 자식인 까닭에 공연히 청암부인께 자신이 면구스

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면구스러움은 율촌양반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쩟, 혀를 차기만 해도, 그것이 강모의 일일 때는 가슴이 철렁하면서 곧 민망해졌

다. 그 혀 차는 소리 속에는

"도대체 에미라고 집안에서 자식한테 무엇을 가르쳤는고."

하는 책망이 들어 있는 것만 같았다.

"어미 탓이다."

라고 직접 대 놓고 말하지 않는다손 치더라도 스스로 그렇게 자책하였다. 율

촌댁이 채근하는 말에도 강모는 ㅇ번히 장판만을 내려다보고 묵묵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양이 고집을 양보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할머니."

그런데 결국 그가 입을 열었다.

"오냐. 어서 말하거라."

청암부인은 반가운 낯빛으로 웃는다. 강모가 침을 꾸르륵 삼킨다.

"저, 동경으로 갈랍니다. 저번에도 말씀드렸지요. 제가 아직 나이 어리고 학업

에 전념할 때라, 아무래도 뜻한 대로 공부를 좀 해 보고 싶습니다. 또 동경이 멀

다 하나 강호형도 있고 요즘은 너나없이 다니는 사람이 많아서 낯선 곳만은 아

닙니다."

청암부인의 어깨가 뜻밖의 말에 부딪쳐 툭, 소리라도 낼 듯이 꺾이며 한숨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율촌댁은 자신도 모르게 입이 반이나 벌어져 휘둥그레 강

모를 바라보았다. 그런 두 부인과는 상관없이 요지부동 앉아 있는 강모에게, 드

디어 청암부인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아들만 낳아라. 그러고 떠나거라."

그리고는 한참 후에 다시 덧붙여 말했다.

"오늘이 아주 좋은 날이니라. 생기복덕일로 천자만손이 대문 앞에 모이는 그런

날이다. 부디 이 할미의 당부를 저버리지 말아다오. 내 오늘 밤에는 문 앞에서

지키고 앉었을란다."

청암부인은 이미 효원에게 흡월정까지도 시켜 놓았었다. 흡월정이란, 음력으로

초열흘부터 보름까지 닷새 동안 달이 만삭처럼 둥그렇게 부풀어오를 때, 갓 떠

오르는 달을 맞바라보고 서서 숨을 크게 들이마셔, 우주의 음기를 생성해 주는

달의 기운을 몸 속으로 빨아들이는 일을 말했다. 그렇게 하면 여인의 몸에 달의

음기가 흡수되어 혈력이 차 오른다는 것이다. 저 무궁한 우주를 한 점 달에 응

축시켜 몸 속으로 흡인하는 힘. 그 혈력으로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사람들은

믿었다. 언뜻 생각하면 그저 큰 숨이나 들이쉬고 내뱉는 정도라고 여기기 쉽지

만, 그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하고, 주변을

깨끗이 쓸어 잡인들이 근접하지 못하게 한다. 부정을 타서는 안되기 때문이었다.

그 자리는 어른이 감시하였다. 그러다가 막 달이 떠오르면, 입을 아 벌리고, 온

정성을 다하여 있는 힘껏, 구곡간장과 살 속 뼛속 실핏줄 끝끝과 머리꼬지 정수

리까지 달이 가득 차 오르도록 달을 들이마신 뒤, 머리가 아찔하여질 만큼 참을

수 있는 데까지 숨을 참았다가, 숨결의 터럭도 흔들리지 않게 고요히 배앝는다.

이미 마신 달의 정이 새어 나가면 안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한 숨통이다. 한 숨

통마다 안서방네가 손뼉을 딱, 치며 박자를 맞추어 수를 세어 주었다. 그리고 청

암부인이 옆에서 지켜보았다. 달빛 아래 서 있는 부인의 모습은 더할 수 없이

엄숙하고 경건하였다. 마치 신불 앞에선 듯했다. 효원은 온몸에 정신을 모아 티

끌만치도 달빛이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흡월하여, 아홉 숨통을 마시었다. 그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이 흡기는 짝수로 마쳐서는 안되므로, 보통 세 숨통, 다섯 숨

통, 일곱 숨통식으로 마셔야 하는데, 우선 본인의 기운이 부치고 어지러워서도

한 숨통을 넘긴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물며 아홉 숨통을 채우는

일이랴. 웬만한 사람도 다섯을 넘기기가 어려운 것을, 효원은 기어이 끈기를 가

지고 아홉 번까지 해내고 말았다. 그러더니 그네의 얼굴빛이 달빛처럼 파랗게

바래면서, 그 자리에 허물어지듯 주저앉아 버렸다. 전에 어떤 여인은, 머리카락

손톱 끝 모세혈관까지 만원처럼 부풀도록 흡월정을 하고 나서, 곁에 있는 나무

둥치를 쓸어 안고 그만 엉엉 울었다니, 이 일이 얼마나 고되고 힘든 일인가를

알 수 있으리라. 청암부인은 주저앉은 효원의 등을 부드럽게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그 손길이 하도 간절하여 영령이 어리는 것 같았다. 효원은 정수리까지

차 오른 달빛에 멀미를 일으키며 고꾸라졌다. 그때 율촌댁이 달빛을 마시는 효

원에게서 느낀 것은, 무서운 집념과, 오기와, 범접할 수 없는 기상이었다. 왈칵,

겁이 났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리고 며느리가 두려워졌다. 그런 다음이니, 청암

부인이 강모를 어떻게든지 달래고 설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강모를 몸소

데리고 가 건넌방으로 들여보낸 청암부인은, 대청마루에서 건넌방을 향하여 몸

을 바르게 하고 섰다. 마치 예배를 드리려는 사람처럼 이윽고 부인은, 두 팔을

반공중에 커다랗게 벌리어 원을 그리면서 손을 모아 합장했다. 합장한 손을 가

슴에 붙이고 한동안 서 있던 그네는 간절하게 엎드리면서 방문 앞에다 큰절을

하였다.

... 부디 아들 하나 태워 주소서. 엎드린 부인은 일어날 줄을 몰랐다. 천만 마

디 말보다도 더욱 아픈 심정 한 토막이, 밤의 가슴에 옹이로 박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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