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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1권 (37)

카지모도 2023. 12. 11. 0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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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암부인은 손에 든 유서를 그대로 움켜쥔 채 체읍을 하고 만다. 부인의 낙루

는 하염없이 옷의 앞섶을 적신다. 한 여인의 심정이 이다지도 사무쳐 애절 원통

하게, 그러나 일목요연하게 씌어진 글월의 한 점 한 획이 어찌 그냥 먹빛으로만

보이리, 그것은 응어리 진 피먹이 삭은 빛깔로 여겨진다. 그러나... 하고, 청암부

인은 이마에 손을 받친다. 그렇게 떠나가실 수 있는 당신은 차라리 복인이십니

다. 같은 운수를 타고나서 혼인한 지 일 년 안에 낭군을 잃은 일은 우리 서로

닮았으나 나는 그리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홀홀히 떠나는 것으로 할 일을 다

하셨습니다. 먼저 가신 망부 한 어른의 뒤를 따르는 것으로 충분히 칭송을 들으

실 일이었습니다. 그뿐이리요. 망혼을 위한 양자를 세워 찬물이라도 떠 놓을 수

잇게 하시었으니, 지하에 돌아가셔도 얼마나 떳떳하시겠습니까.

헌데, 나는 그리하지 못하였습니다. 나는 그리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이렇게 명

을 보존하며 살아 있습니다... . 이것이 단순히, 구차한 잔명을 보존하기 위한 방

편으로 들릴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책임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올시다. 종부,

나는 그저 그 한 사람의 아낙이 아니고 청상과부 한 사람이 아니라, 흘러내려오

는 핏줄과 흘러가야 할 핏줄의 중허리를 받치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까. 목숨 하

나 던지는 일이 살아 남는 일보다 쉬운 일은 결코 아니겠으나 남아서 할 일이

있어, 나는 할머님, 당신처럼 그리 죽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오늘에 이르렀

습니다... . 청암부인은 유서를 방바닥에 떨어뜨린다. 빛 바랜 유서의 먹빛 위에

그네의 목메인 눈물이 떨어진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는, 내가 무엇 하러 이날까

지 죽지 않고 살아 남았는가, 새삼스러운 회한에 청암부인은 가슴이 무너진다.

이미 성씨조차도 쓸 수 없게 되어 버린 이 마당에 그네로서 할 수 있는 일이라

면 그나마 단 한 가지, 혈손의 맥을 이어놓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그네

는 어린 손부 효원이 그렇게도 애틋한 것이었다. 청암부인은 효원에게 그다지

각별하지는 않았다. 본디 부인은 어느 누구에게나 곰살갑고 잔정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효원은 그것이 조금도 서운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보다는 오히

려 별로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항상 꺼끄러운 사람이라면 율촌댁, 시어머니였다.

지난 겨울일만 해도 그렇다. 본디 침선을 즐기지도 않는 효원이거니와 잠이 안

오는 그 많은 밤을 두고 마땅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시집올 때 가지고

온 여사서와 명심보감, 시가집이며 다른 이야기들의 필사본을 읽으면서 날을 새

웠다. 때때로는 한 수의 시 때문에 들던 잠을 설치기도 했다.

 

일대창파우안추

풍취세우쇄귀단

야래박근강변죽

엽엽한성총시수

칠언절구로 된 이인로의 송적팔경도 중에서 '소상야우'를 읽으며, 그만 귀속에

서 빗줄기 흩뿌리는 대실 대숲의 스산한 바람 소리가 성성하여 가슴을 진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새파란 물결에 가을 어리고

가랑비 휘몰려 널배 부린다

밤이라 저 건너 강가 대나무

잎마다 찬 소리 시름뿐이네

 

효원이 등불을 끄고 누워도 빗소리는 대이파리를 때리며 효원의 가슴을 적시

는 것이었다. 그러면 누웠다가도 홀연 다시 일어나 앉아 불을 밝혔다.

"그렇게도 잠이 오지 않느냐?"

하루 아침에 율촌댁은 효원을 안방으로 불렀다. 효원은 대답 대신 묵묵히 앉

아 있을 뿐, 일변 당황하기도 하고 일변 야속하기도 하였다.

(잠을 자고 깨는 시각까지도 일일이 간섭하려 하시는가?)

"내 이런 말가지 하기는 안되었다만, 글 읽는 서방님의 방도 아니고 젊은 새각

시, 시집오자마자 그날부터 밤마다 불이 안 꺼지고, 석 달 열흘이 넘어가도 깜박

깜박 불빛이 새어 나가면, 동네에 쓸데없는 말난다. 사람들이란 남의 말을 좋아

하는 것 모르느냐? 이후로는 잠이 좀 안오더라도 일찍 자리에 들어라."

(시집이 무엇인가 하였더니,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등불을 끄라시면 못 끌 것

도 없지마는, 불을 밝히고 앉아 있어도 동아줄같이 질긴 밤이 구렝이마냥 목에

치잉칭 감기는데, 거기다가 등촉마저 꺼 버리면 어찌하란 말씀인가. 천만 가지

근심에다 먹장 같은 어둠마저 하나 더 늘어 나를 캄캄하게 하리라. 여보시오, 어

머님. 내 잠 못 드는 것이 어제 오늘 일도 아니요. 사정이 그리된 것을 남의 말

이 무서워서 내 몸에 병을 사란 말씀이시오?)

"물론 네가 밤이면 서책을 가까이 하는 줄도 내 안다만 그것도 그렇다 일단

출가하였으면 그에 응분한 책임이 있는지라, 아녀자의 할 일이 따로 있을 게야.

꼭 그런 걸 일일이 말로 해야 알겠느냐? 너는 네 아버님께 군자의 도리만 배우

고, 친정의 어머님한테서 아낙의 할 일은 배울 겨를이 없었더냐?"

(이것은 또 무슨 말씀이오? 아무리 내가 부덕하고 배운 것이 없었다기로, 이리

수모를 주실 수가 있소? 일단 출가하여 이씨 문중으로 시집을 왔으면 친정과는

발을 끊고 무관하여지는 것을... 책망을 들어도 내 잘못으로 내가 들어야지, 난데

없이 친정 부모님은 왜 끄집어 들추는 것이오? 대관절 무슨 말씀이 하고 싶어

이러시는 것입니까?)

"예로부터 여자란 여필종부라, 남자를 하늘같이 알고, 남편에게 순종하며

사는 것이 그 도리야. 우선 남편에게 공손해야 한다. 여자가 성품이 드세고 강청

같은 사람은 자기 남편 앞길에 운수를 가로막는 법이다. 여자 성품 때문에 남자

의 기가 눌려서야 어디 집안이 제대로 되겠느냐?"

율촌댁의 목소리는 작고 낮았으나, 조근조근 따지듯이 말하는 품이 무엇인가

단단히 벼르고 있는 사람 같았다.

"내가 시에미라고 너를 공연히 들볶으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나대로 짚이는

바가 있어서 몇 번이나 생각다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니, 절대 명심해라. 너도

내 말을 들으면서 짐작하는 일이 있을 게 아니냐?"

효원은 후욱 얼굴이 달아올랐다. 가슴속도 후끈 치밀며 더워진다.

(그래서요? 그러니 절더러 어찌하란 말씀이시오?)

율촌댁은 강모가 건넌방에 들지 않는 것을 그렇게 말하였고, 효원은 치욕스러

운 심정이 순간 들어, 시어머니의 앞인데도 그만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버리

고 만 것이다. 율촌댁은 율촌댁대로 자기보다 우람하게 커다란 몸집의 며느리가

자기의 말에 차마 대꾸는 못하고, 눈꼬리가 가늘게 좁혀지면서 온 얼굴이 벌개

지는 것을 보며 내심 기가 질렸다. 며느리의 입술은 활처럼 휘어져 있었다. 신행

오던 날 이 며느리의 곁에, 손아래 동생처럼 서 있던 아들 강모의 단아하고 조

그만 모습이 떠오른다. 그때 강모는 어쩐지 며느리를 어려워하면서도 눈치를 살

피는 것 같았다. 율촌댁은 그 모습을 지워 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반짇고리를 효

원 앞으로 밀어 놓았다.

"자."

밀어 놓은 반짇고리에는 자주 회장과 자주 고름이 달린 녹두색 명주 저고리

한 벌이 담겨 있었다. 효원이 폐백을 드릴 때, 남색 치마에 받쳐 입었던 저고리

다. 아직 풀냄새도 덜 빠진 옷이었다.

"나도 새며느리를 보았으니 며느리 손에 저고리를 얻어 입어야겠다. 뜯어서 새

로 푸새하여 곱게 지어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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