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ing Books/Reading Books

혼불 3권 (14)

카지모도 2024. 3. 4. 07:05
728x90

 

3. 젖은 옷소매

 

청암부인은 혼곤한 잠에서 깨어난 듯 잠깐 의식이 돌아왔을 때, 그네의 발치

에 허연 그림자처럼 앉아 있는 인월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불쌍헌...사람...”

입 속으로 숨소리처럼 남긴 한 마디는 그대로 인월댁의 가슴에 얹혀, 인월댁

은 그만 어깨를 꺾으면서 거꾸러져 체읍을 참지 못하였다.

청암부인은 쓰다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울지 말게...나만 허면 한세상...자알 살다가 가는 것이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허시는가요. 오래 살으셔야지요...오래...오래...살으...”

“오래 살었네.”

“인제부터 좋은 세상도 보고 복록도 누리셔야지요. 아짐...아짐이 이렇게 허망

하게 가셔 버리면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으라고요...”

“좋은 세상은 지금까지 다 살어 버렸어...더 산대도 덧없는 일이지. 나는 다

살었네...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는, 그저 한 세월 손님같이 살다 가는 과객인가

싶으데...그런 것을 모르고...이날까지 질기게도 살었어...인제는 목숨도 나를 풀어

주겄지...”

그날따라 집안도 조용하고, 청암부인도 쉬엄 쉬엄 숨이 차서 몹시 힘들어 하

며 말하는 것만이 다를 뿐, 정신이 맑은 것 같았다.

그네의 목에서는 쉰 바람 소리가 적막하게 새어 나왔다.

 

한번 눈에 나거드면

독수공방 찬 자리에

뉘를 위지하잔 말고

죽은 사람 생각하면

꿈속에나 반기련만

생사람 불화하면

백년이 원수로다

 

일월댁은 속으로 ‘괴똥에미전’의 일절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쓴웃음을 머금는다.

“아짐, 책함에다가 이고 지고 온, 내칙 수수십권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

까...큰애기 시절부터 글씨 공부 삼아서 베끼고, 읽고, 이렇게 속절없이 쓸 곳

없는 것을 귀한 보물인 양 간직을 했지요. 아녀자한테는 보패 배단보다, 아름답

고 올바른 행실이 더 귀한 것이라고 부모님은 가르치시고, 필사한 책마다 씌워

있지만, 여고, 명감, 여사서가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괴똥에미 탄식 할 줄

만도 못한 것을.”

“그것도 업일세...자네가 무슨 허물이 있어서가 아니라, 기서 그사람 역마살

이, 자네 한평생을 그르치게 한 셈이지.”

“모진 세상은 이제 다 지나갔어요. 저도 인제는 나이 많이 먹어서 지나간 세

월이 꿈만 같습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처음에 인월댁은 신혼의 첫날밤에 자기를 버리고 가 버린 남편을 조금도 원망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네는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오직 기다리기 위하여 사는 사람처럼, 그네는 자고 새는 것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가슴속의 갈피 한쪽에 숨겨져 있던 그 기다림이, 마치 씨앗이

어둠 속에서 저절로 눈을 뜨듯 나와 자라기 시작하는 것을 그네는 느끼었다.

조금씩 조금씩 눈치를 보며 자리를 넓혀 가던 그것은, 이윽고 어느 날인가 도

저히 그네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성해져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이미 그 무성한 줄기와 가지는 자신을, 우로와 햇빛으로부터 차단시켜

그늘이 지도록 가리웠던 것이다.

그네는 그늘 속에서 말라갔다.

햇살이 닿지 않는 그늘 밑은 음습하고 추웠다.

그것뿐이랴. 천지를 둘러보아도 사람의 그림자 하나 없는 적막함은 또 어지할

것인가.

 

'Reading Books > Reading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혼불 3권 (16)  (0) 2024.03.06
혼불 3권 (15)  (0) 2024.03.05
혼불 3권 (13)  (0) 2024.03.02
혼불 3권 (12)  (0) 2024.03.01
혼불 3권 (11)  (0) 2024.0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