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에 떠 있는 강모의 마음을 붙들어매 두는 것이 겨우 장롱이라고 생각했단
말인가.
어느 날부터인가 오유끼는 정신 없이 가구를 사들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오유
끼는 여염집 안방의 가구 집기를, 텅 빈 방의 한쪽에서부터 채워 넣었다. 그리고
어떻게 하든지 사람의 손때가 묻은 집안의 흉내를 내보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늘 반짇고리를 가까이 두었다.
강모는 그녀가 사 달라고 하는 대로 모든 것을 다 사 주었다.
돈을 구하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강모에게 돈을 빌려 주었다.
그의 뒤에는 청암부인이 있었고, 이기채가 있었고, 들판 같은 논이 있었다. 이자
는 이자대로 복리로 쌓여갔다.
오유끼는 점점 살림과 가구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방안의 세간이 하나씩 늘어갈 때마다 강모의 마음은 점점 죄어들었다. 그리고
발목을 잡힌 자신의 모습에서 자기가 쳐놓은 덫에 스스로 걸려든 짐승을 보고,
그 어리석은 후회에 진저리가 났다.
방안은 날이 갈수록 효원의 건넌방을 닮아갔고, 청암부인의 큰방 흉내를 내고
있었다.
그는 탄식하며 한숨지었다.
그가 추구하던 것은 쾌락이 아니요 해방이었다.
그리고 욕망이 아니라 탈피였었다.
어찌하여 그것은 이다지도 어렵단 말인가.
강모가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일 때, 오유끼는 돌아누워 훌쩌이며 울었다. 강모
의 한숨은 골짜기의 어둠처럼 음습하였다.
그리고 오유끼는 조금씩 여위어갔다.
오유끼. 나를 붙잡으려 하지 마라. 나는 그저 허공에 불과하다. 내 처음부터 그
러지 않더냐. 너는 희롱의 죄를 묻지 않는 여자. 너를 위한 계산은 족할 만큼 해
주었건만, 너는 아직도 무엇이 모자라느냐.
“당신은 나 때문에 빚을 지고, 나 때문에 파면되었어요. 내가 무엇이라고, 그
렇게도 진정으로 당신 가진 모든 것을 다 주시는가 싶어서, 나는...머리털을 베어
서 짚신을 삼어 드리리라고...나는.”
오유끼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며 흐느낀다.
이미 지나간 일. 내 지은 빚은 할머니가 이렇게, 몇 곱 이자 붙여서 평생에 갚
을 길도 없이 나한테 무겁게 짐지우셨다.
그런 명주 수건에 싸인 삼백 원은 지금 오유끼의 손에 쥐어져 있다.
그런데 오유끼는 그것마저 내팽개치며 울고 있는 것이다.
“따라가겠어요. 나는 노리개가 아니라 사람이에요. 사람끼리 만나서 정들고
헤어지는 것이 냇물에 발 씨는 것마냥 쉬운 줄 아셨단 말인가요? 천한 년 마음
속에 고인 정은, 구정물 한가지로 더러운 것인 줄 아시는가요...?”
강모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다. 그리고 물끄러미 방안을 둘러본다. 아랫목에
는 솜과 짐승의 털, 그리고 보드랍게 자란 짚을 섞어 만든 탄탄한 보료가 깔려
있고, 보료 위에는 ‘희’자를 수놓은 안석이 벽에 기대어 세워져 있다. 문갑,
사방탁자 들도 모두 제자리에 서 있고 놓여 있었으며, 화각 삼층장, 피농, 의걸
이장, 반닫이, 자장궤, 갑게수리 들도 제각기 태깔을 내고 있다.
그것들은 붉은 바탕에 노랑과 파랑으로 아로새겨져 현란한 모란과 구름, 학을
무늬 놓고 있기도 하였으며, 가지가 우거진 노송에 백로가 한 쌍 앉아 있기도
하고, 매화나무와 대나무 그늘에도, 물결이 일고 있는 수초 사이에도 이름 노를
새들이 한 쌍씩 노닐고 있었다. 흑칠 바탕에 번쩍이는 자개의 모란당초문이 꽃
봉오리와 더불어 활짝 핀 꽃송이를 희롱하기도 한다.
그 색상은 영롱하기까지 하다.
이 가구와 집기들로만 보면 어느 한다 하는 대갓집의 안방과 견주어 조금도
뒤질 바가 없다. 오히려 턱없이 으리으리한 편이었다. 그것들은 등잔불 아닌 전
등의 주황빛을 받아 더욱 휘황하게 어우러져 있다.
다만 눈여겨 살펴본다면 사방탁자 아래칸에 놓여 있어야 할 함이 빠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함이란, 혼인 때 신랑 집에서 예물을 넣어 보내는 것으로, 새
각시가 신행 올 때 그대로 가지고 오는 소중한 물건이었다. 그리고 이 함 속에
는 반드시 혼서지가 곱게 들어 있어 일생 동안 소중하게 간직되다가, 훗날, 부인
된 여인이 죽어 명부로 떠날때, 저승의 강물을 건너서 낯선 길 아득히 홀로 가
는 발에, 종이 신발로 만들어 신고 가는 것이다.
그래서 안방의 세간살이에 이것이 빠져 버리면, 가구 집기가 아무리 호화로워
도 첩이라 할 수밖에 없었다.
강모는 냉수 한 대접을 청한다.
오유끼는 울다 말고 얼른 일어나 미닫이를 소리 없이 열고 나간다. 갑자기 그
의 전신에 끈적이는 피로와 컴컴한 공허가 엄습해 온다. 방안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장롱과 문갑, 탁자 들이 거기에 뿌리라도 질기게 박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강모의 이뿌리가 저르르 저린다.
그것들은 마분지로 만들어 세워 놓은 울긋불긋한 각종이와도 같다. 그것은 숨
만 크게 쉬면 우르르 무너져 그를 덮어 버리고 말 것 같다.
마치 거미처럼 발닿는 곳마다 끈끈한 실을 뽑아 내리며 집을 짓는, 사람들의
애착이 그는 두려웠다.
나는 떠나리라. 비록 연이 하늘 높이 날더라도, 실 달린 연자새의 손아귀를 벗
어나지는 못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날아가리라. 이 줄을 어찌하든 끊어 버리고
말리라. 광활하고 외로운 저 불안한 하늘로, 나는 다만 벗어나니라.
그러나 강모의 머리 속에는 까마득한 하늘의 구름 너머로 날아오르던 연이,
툭, 줄이 끊어진 채 점으로 떠도는 모습이 떠오르며 어지러이 맴을 돈다.
그 끊어진 실은, 바로 자신의 넋을 잡아 맨 핏줄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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