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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3권 (11)

카지모도 2024. 2. 29. 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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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모는 차라리 고개를 하늘로 젖히고 눈을 맞는다.

눈발은 점점 굵어진다. 어느덧 길바닥에는 발자국이 날 만큼 눈이 쌓였다. 꽃

잎을 밟듯 눈을 밟는 강모의 발밑에는 검은 발자국이 웅덩이처럼 패인다. 그 발

자국의 어둠 위에 다시 흰 눈이 날아내려 어둠을 어루 만지며 녹는다.

강모가 다가정의 골목 어귀까지 왔을 때는 이미 골목이나 지붕이나 동네까지

도 소복한 흰 눈을 머리 위에 덮고 있었다. 천지가 조용하다. 처마 밑의 네모진

창문들에서 주홍의 불빛이 아슴하게 비쳐나와 골목에 내리는 눈발을 물들이고

있다. 강모의 발자국 소리에 놀란, 건너편 관사의 개가 귀를 세우며 짖는 소리가

커겅, 컹, 컹, 컹, 터져나온다. 뒤따라 몇 집에서 개가 짖는다.

강모는 집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외투와 머리에 덮인 눈을 털어 낸다. 어느

새 그의 어깨에는 눈이 무겁게 쌓여 있었던 것이다. 대문을 막 두드리려는데 정

거장 쪽에서 상행 열차의 기적이 들려온다.

상행 열차.

이 시간에 지나가는 것은 북쪽으로 가는 기차다. 그 열차의 기적이 강모의 가

슴을 설레게 하면서 우렁 우렁, 흔들리게 한다.

“오유끼.”

강모는 자기 자신이 급류에 휩쓸린 듯 갑자기 출렁거리는 것을 억제 하지 못하

고, 주먹으로 대문을 두드린다.

그는 마치 자기 몸이 연처럼 둥실 허공으로 떠오르는 것을 느낀다.

하늘 아득한 곳에서 아득한 곳으로 날고 있는, 흰 점점의 눈발들은 형형색색

의 연으로 보인다.

웃죽지, 아랫죽지, 치마연, 수박등, 홍꼭지...청꼭지에 먹꼭지...세눈백이 네귀발

톱...채반연...나찰귀...장군연.

그 연들은 천공을 주름잡을 독수리처럼 바람을 타고 날아오른다.

거칠 것이 무엇인가.

맹렬함의 아름다움이라니.

칠을 먹여 윤태를 내고 매끄럽게 손질한 오동나무 연자새에서 실이 풀려 나간

다. 사금파리 유리가루로 갬치를 먹인, 손을 베일 것 같은 기세의 명주실이 날카

롭게 빛을 반짝인다.

마침 적중하게 웃바람마저 불어 준다.

연은 천공에 요요하게 떠다니는 한 송이 꽃이었다.

그 꽃송이는 아스라한 하늘 저편으로 날아간다.

연.

고려 말엽 최영 장군이 휘하 군사들에게 군령으로 연을 만들에 하여 그것에

기름을 먹인 다음, 일제히 불을 붙여 적진인 지자성에 날려 보냈다는 것이 바로

연 아닌가.

불을 당긴 연은 지자성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강모는 설움에 가까운 희열로 뜨겁게 떨고 있었다.

“오유끼.”

그는 오유끼의 이름을 불렀다. 눈 내리는 빈 골목에 목소리가 울린다. 이윽고

마당에 신발 끄는 소리가 들린다.

평소와는 다르게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선 강모는, 두려움에 미

리 질려 있는 듯한 그네에게 짤막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봉천으로 간다.”

오유끼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입술이 보랏빛이다.

“나는 떠난다.”

강모는 그런 오유끼를 비스듬히 피하며 젖은 겉저고리의 안주머니에서 무엇인

가를 꺼내 오유끼의 손에 쥐어 주었다.

“?”

오유끼는 받은 것을 펴 보려고 하지도 않고 벌써 눈에 눈물이 돌아 고개를 떨

어뜨린다.

“너는...”

그녀는 강모의 다음 말을 듣기도 전에 앞으로 고꾸라지며 울음을 터뜨린다.

마치 예감이라도 했던 것처럼.

“그 돈이, 어떤 돈인지, 알 리가 없을 것이다만, 가지고 가거라.”

강모는 한 마디 한 마디를 끊어서 말하였다.

그는 자기의 품 속에 지니고 있던 할머니의 명주 수건을 오유끼에게 건네준

것이다.

“어디로든지...가거라.”

그것은 오유끼한테 한 말이 아니라, 그 자신에게 다짐하는 말과도 같았다. 그

리고 명주 수건이 들어 있던 가슴이 헐렁하게 비어 버리는 그 공허에다가 대신

채워 넣는 말이기도 하였다.

빈 자리에 찬 바람이 일었다. 그것은 허전한 공간으로 변하였다. 가슴속에 겨

울의 하늘을 가르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스미었다.

강모는 그곳에 연을 띄워 올린다. 하늘로 치솟는 연은 그의 가슴에 끝없는 동

경과 서글픈 연민을 느끼게 해 주었다. 솟구쳐 오르며 나는 그것은 비극적인 방

랑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방랑. 이 서글픈 유혹, 강모는 가슴의 복판에서 아득한 곳으로 날아오르는 연

을 팽팽하게 당기는 실의 날카로운 긴장에 아픔을 느낀다.

마치 살을 베어내 버릴 것 같은 서슬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살이 아니라 이름들이었다.

아마도 이 겨울의 문턱을 못 넘기고 말 것만 같은 할머니 청암부인의 얼굴,

그리고...차마 입 밖에 내어 말도 할 수 없으면서,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었던 사

람, 강실이의 이름이었다.

내 어쩌다 너를 만났을꼬...그러고 너는 무엇 하러 나 같은 것을 만났단 말이

냐. 원수를 지어도 헤어질 수 없는 지극한 인연으로, 친동기 못지않게 태어났건

만, 내가 어리석어서 인연 건사를 잘못하였다. 가만히 있었다면 아무것도 잃지

않았을 것을. 내가 너를 애착하여 평생에 다시 못 볼 원을 너한테 남기고 말다

니. 내, 일이 이리 되리글 원치 않았건만, 어찌하랴...아아, 어찌하랴.

강모는 무너지듯이 주저앉아 버린다. 창문을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아

득하다. 그의 발치에서 울고 있는 오유끼의 구부린 어깨를 그는 물끄러미 바라

본다.

“울지 마라.”

내가 울게 한 사람이 너 하나만이 아니로다. 너는 차라리 내 보는 앞에서 마

음 놓고 울고나 있다마는, 돌아앉아 눈물로 세월을 메우는 이, 하나 둘이 아니

다. 그 각기 손톱 티끌만치도 그릇되지 않았는데도 까닭없이 서러운 나날을 보

내고 있다. 내가 어찌 그것을 모르리. 오로지 못난 이 몸뚱이 하나로 인하여 부

챗살 모양으로 뻗친 설움이리라. 너와 관련된 사람이면 누구라도 한 많다. 그것

은 어인 연고일까. 서슬이 퍼런 할머니도, 대쪽 같은 아버지도, 그늘에 가려 사

는 어머니도, 태산 같은 안사람도...나를 아비라 부르는 어린 자식도...이제 너는

또 다른 주인을 만나 떠나가겠지만, 울고 있는 너 우유끼도...그리고...그리고...강

실아.

내 어쩌다 이승의 길목에서 너를 만났던고. 어찌하여 너를 바라보기만 하지

않았던고. 진실의 허망함이 연기만도 못한 것을 왜 진작 깨닫지 못했던고.

나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으며, 내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길 없는데, 하물

며 나를 에워싼 사람들이야 말하여 무엇하리. 안개를 잡으려고 허공을 움켜쥐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나는 나를 살지 못하였으므로, 그 어느 누구에게 그 무

엇도 되어 주지 못하는 것이다. 차라리 이름 없는 가문에 산지기 아들로 났더라

면, 나뭇짐이나 등에 지고 새소리 벗하면서 다정하게 살았으련만.

그는 자신의 탄생부터가 하나의 망집이었던 것만 같아진다.

나는, 한 아낙의 자식이 아니라 할머니의 응어리가 낳은 헛된 이름에 불과했

다. 애초부터 뼈 있고 살 있는 육신으로 태어난 것은 아니었으니.

허명.

그 헛되고 실속 없는 찬란한 명예를 등짐으로 지고, 살아 보기도 전에 허옇게

늙어 버린 자신의 모습이 사위어 떠오른다.

어쩌면, 내가 살아 있다고 하는 것도 한낱 저잣거리의 소문에 불과한것이지도

모른다. 허물 하나가 그림자처럼 떠도는, 나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 역시 어찌 어

리석은 미신이 아니리요.

그러 내가 한 여인을 취하여 작배하였으니, 유령을 지아비로 맞은 그네의 나

머지 생애가 어떻게 산 사람의 것이겠는가. 종잇장에 화상을 그려 붙여 놓으니

만도 못한 사람을 두고, 자신의 한 생애를 경영하려 하는 것이 어이 부질없는

일이 아니랴.

내 그 기상에 짓눌리어 감히 맞서 볼 굳건함을 지니지 못한 것이 두려웠으나,

이제 생각해 보니 당신이 만일 일세지웅을 만나 그의 배필이 되었더라면 여한없

이 한세상을 풍미하고도 남았을 것을. 앉은 자리에서 소리 한 번 못 지르고 삭

아드는 청춘은 당신의 업인가, 나의 죄인가.

강모는 처음으로 효원이 측은하게 여겨졌다.

이제 여기서 떠나가면 언제 다시 돌아올는지 아무도 짐작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돌아오지 않으리라.

고 속으로 다짐하며 바라보는 마지막 모습이라 그렇게 여겨지는 것일는지도 몰

랐다. 그리고 그것은 효원에 대한 연민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육신은 떠나가 버렸

는데도 지울 수 없는 지문처럼 효원에게 남아 있을 강모의 허명에 대한 부채를

무겁게 느낀 탓인 것도 같았다.

허나, 허명도 이름이라면 당신에게는 그나마 그것이라도 주어졌지만...

강모는 눈을 내리감은 채 떠오르는 한 얼굴을 지우려 애쓴다.

밝은 등물 아래서는 희미하던 그 모습이 눈을 감으니 선연하게 드러난다. 무

성한 얼굴들 저 뒤쪽에 웅크린 듯 돌아설 듯 금방이라도 지워질 듯 보이는 얼굴

이었다.

강실아... 차라리 네가 죽어라. 네가 죽어서 나를 놓아다오. 네가 바람과 더불

어 흐레하였으니, 네가 낳는 세월 또한 한 자락의 부질없는 바람 아니겠느냐.

마음은 아무리 깊어도 죄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살로 이루어진 몸은 한 번만

지나가도 자국이 패인다. 그 하찮은 자국 위에 서러운 빗물이 고이고, 고인 빗물

이 둠벙을 이룬다. 제 한 몸을 다 헐어서 메워도 메워지지 않는 둠벙은 늪이 되

어, 한 사람의 한세상을 능히 삼키고 마는 수도 있거늘.

바람이 지나가는 자리처럼 흔적 없이 지워질 수도 있다고 믿은 것은 아니었는

데. 네가 눈 뜨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는 한, 나 또한 언제까지나 진흙 바

닥에 빠져 헤어 나오지는 못하리라.

생각해 보면 그가 오유끼를 들어앉혀 함께 살고 있는 것은, 무엇으로든지 패

어져 나간 자국을 메우려는 몸짓이 아니었던가 싶었다. 밤이면 밤마다 강실이를

무너뜨려 패인 자리에 흙을 들이붓듯이, 그는 오유끼를 향하여 무너졌던 것이다.

오유끼는 강실이를 대신하고 있었다고나 해야 할는지.

죽어라. 강실아...제발.

언제였던가.

“오라버니 등 좀 잡어 줘라.”하던 오류골댁의 말끝에 소리도 없이 등롱을

들고 마당으로 내려서던 강실이.

그때 강실이가 비추는 등롱의 불빛 때문에 강모의 그림자가 먼저 사립문을 나

섰었다.

“가시지요.”

강실이는 강모 곁으로 다가서서 한참 만에야 거의 들리지도 않는 잦아드는 소

리로 그렇게 말했었다. 그네가 들고 서 있는 둥롱의 창호지 안쪽에서 붉은 불빛

이 은은하게 비쳐 나왔었다. 이상하게 그것은 불빛인데도 젖어 보였었다.

“...길이 어두워서...밤길이라...발밑을 잘 보고 가시어요.”

그때 그 강실이의 목소리가 지금도 이렇게 귀에 젖는다.

그네의 어깨가 금방이라도 손안에 잡힐 듯 하였었지.

초승달이 하늘 한 귀퉁이에 걸려 있었으련만 어둠을 비추기에는 너무나 가냘

펐던가. 찬 별빛만 몇 개 보였었다. 사립문간에 서서 올려다 본 겨울밤 하늘의

별빛들은 영롱하게 부서지며 찬바람에 씻기고 있었건만. 그때의 삭막한 밤하늘

과, 쓰라리게 영롱하던 별빛은 꿈에 본 것이었던가 싶다.

아아, 강실아, 둥글고 이쁜 사람아, 네가 없다면...네가 없다면, 나의 심정이 연

두로 물들은들 어디에 쓰겠느냐.

어쩌면 강실이는 없는 것인지도 몰라. 목소리만 나를 젖게 하고, 옷자락 빛깔

만 나부끼면서, 강실이는 정말로는 없는 것인지도 몰라.

야기처럼 서늘하게 스며들어 고개를 흔들케 하던 그 생각은, 그후로도 오래

지워지지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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