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갈라네.”
한 걸음을 떼며 목에서 밀어내듯 강모는 말했었다.
“조심해서...”
“응”
대답 소리가 목에 잠긴 채 갈라졌지. 사립문간에 강실이를 남겨 두고 집으로
올라가는 발걸음에 , 뒤에서 비춰 주는 등롱의 불빛이 걸려 긴그림자를 만들어
주었었다.
마치 그림자가 자기를 이끌고 가는것 같았었다.
그렇게 몇 걸음을 가다가 뒤돌아 보며
“들어가아.”
하고 강모가 손을 들어 보였을 때, 그의 눈에는 등롱의 불빛만 어둠 속에서 주
황으로 번지고 있을 뿐, 강실이의 모습은 어둠에 먹히어 보이지 않았었다.
컴컴하게 솟아 있는 솟을대문에까지 와서 돌아보았을 때도 등롱은 그렇게 아
슴하게 비치고 있었다.
강모는, 보이지도 않겠지만, 강실이를 향하여 다시 한번 손을 흔들었다. 그러
면서 속으로...지금 강실이도 나한테 이렇게 손짓을 하고 있는지도 몰라...하고 생
각하였었다.
자박 자박 자박.
오류골 숙부와 마주앉아 있을 때, 정지에서 헛간 쪽으로 가는 발짝 소리가 들
리었었다.
문풍지가 더르르 울리더니 등잔불이 흔들렸지, 바깥에 잔바람이 지나갔던가.
그러나 그 바짝 소리가 불꼬리를 밟는 것을, 강실이가 지나간 자리에서 일어난
바람이 문틈으로 스며들어 그렇게 불꽃이 흔들리는 것을, 역력히 나는 느끼었다.
그때 검은 그을음을 뱉으며 잦아들던 작은 불이파리가 지금인 듯 강모의 가슴
을 핥는다. 속살을 덴 강모는 가슴을 오그리며
아아, 강실아, 내 너를 어찌하랴.
그만 바람벽에 등을 부려 버리고 만다.
이제 강실이가 들고 있는 것은, 젖은 불빛이 아슴하던 등롱이 아니었다. 컴컴
한 어둠의 음습한 한기를 강모의 등뒤에 비춰 주고 있는 것이다. 그네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추운 어둠이었다.
나는 비겁하여 도망이라도 가지만, 너는 어찌할 것이냐.
그는 어깻죽지를 장작으로 후려치는 아픔에 소스라치던, 첫날밤의 꿈이 생생
하게 떠오르자 자기도 모르게 소름을 털어냈다.
한 번만이 아니라 정신 없이 내리치던 그 매는, 그것도 한 사람이 아니라 뭇
사람이 한꺼번에 때리는 몰매였다.
강모는 꿈 속에서 앞으로 고꾸라졌다.
“덕석에 말어라.”
쉬어 갈라진 그 목소리리는 오류골 숙부의 것이 분명하였다.
“이놈, 이 인륜 도덕이 무언지도 모르는 천하에 못된 놈, 이노옴.”
“짐승 같은 놈, 네 이노옴.”
“가문에 먹칠을 하고 상피붙은 네 놈이 그래 사람이란 말이냐.”
몰매가 쏟아지고 강모는 비명도 없이 매를 맞았다. 돌팔매가 정수리를 때렸다.
찢어지고 깨진 강모의 피투성이가 된 몸을 누가 뒤에서 순식간에 덕석으로 덮으
며 두르르 말아 버렸다.
허억.
강모는 숨이 막혀 두 손으로 덕석을 밀어내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그것이 꿈인 것을 알고는 비로소 긴 숨을 내뿜었었다.
그때 그의 등에 축축하게 배어나던 식은땀이 지금 새로 돋아, 그를 써늘하게
한다.
나는 꿈에서 깨어나 생시로 돌아왔다만, 강실아, 너는 내가 꾼 꿈을 이제부터
살아야 할 것이니, 무슨 사람의 한평생이 남의 악몽을 대신 살아야 한단 말이냐.
멍에로다. 희롱이로다.
하늘 아래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란 없는 법. 이윽고 드러나게 될 상피의 죄가,
덕석말이, 몰매로만 끝나지 않고 파문에 이르리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강모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파문이라든지 그다음의 모욕과 형
벌, 또는 쫓겨난 처지의 유리표박이 아니었다.
차라리 그렇게 되는 지경은 처참할 것이 분명하되, 그가 바라는 자유와도 흡
사한 쾌감이 있을는지도 몰랐다. 그것은 아직 닥쳐오지 않은 일인지라 막연히
떠오르는 공상의 두려움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
나는 사실에 부딪치는 그 순간이 무섭다.
그보다는 맨 처음으로 누군가와 맞닥뜨려 토설해야 하는, 이 얼굴을 무엇으로
도 가리지 못한 채 다른 사람의 얼굴 앞에 정면으로 맞서서, 붉은 살을 있는 그
대로 드러내고 낱낱이 밝혀야 하는 그 참담한 순간을 생각하면, 그는 자지러들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제 강모는 강태를 따라 낯선 곳으로 떠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강
태가 무슨 목적으로, 무슨 사상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하러 가는지는, 물을 것도
없고 알 바도 아니었다.
다만 그는 강태가 가는 길목만 따라가면 그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국경을
넘으면 거기서는 어떻게든 또 다른 일을 할 수 있으리라.
어쨌든 떠나기만 하면 된다.
매안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좋은 것이다. 어디든지 더 먼 곳으로, 세상
의 막바지까지라도.
그렇게 달아나 버리면 그가 두려워하는 모든 것으로부터도 멀어질수 있을 것
만 같았다.
허나, 너를 어쩌랴. 내가 비겁하여 샛길로 피해 버린 자리에 오두마니 앉아서
혼자 뒤집어쓸 처참한 좌목과 혹독한 매를 너 혼자 어찌 당하리. 아아, 강실아,
차라리 죽어 버려라. 차라리 죽어서 놓여 나거라.
강모의 가슴에서 비늘처럼 푸른 빛을 번뜩이며 살의가 일었다.
그것은 날카롭게 강모를 사로잡아 저도 모르게 몸을 떨게 하였다.
어쩌면 그 생각은 지금 일어난 것이 아니라, 맨 처음 강실이의 둥근 어깨를
보고 사무치던 순간부터 그의 가슴 밑바닥에 숨어 돋은 비밀의 대가리였는지도
모른다.
비단 그것은 강실이에 대한 살의만은 아니었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뻗쳐 오
르는 증오로 종가의 용마루와 서까래, 대들보까지도 무너뜨려 버리고 싶었다. 검
은 기운이 서려 있는 것 같은 솟을대문도, 칼로 자른 것처럼 네 귀퉁이 반듯한
중마당, 안마당도, 거기 각 방마다 뿌리를 서리 틀고 앉아 있는 사람들의 중허리
도, 그는 마구 뒤흔들어 무너뜨려 버리고 싶었다.
귀밑을 스치고 날아가 차탁자를 후려치던 퇴침과, 퇴침에 맞아 쏟아지던 다기
들의 굉음이 귀를 때린다. 의침도 불끈 들어 내던진다.
쏟아지는 그 소리는 기왓장 무너지는 소리로 들린다. 강모는 진저리를 친다.
그리고 보잘것없는 그의 몸뚱이조차 그속에 파묻혀, 산채로 매장되는 것을 절감
한다.
그는 짓눌린 숨통을 터뜨리듯 몸을 솟구친다.
비명을 지르고 싶다. 덕석에 말린 것처럼 숨이 막힌다.
그것을 대신하듯 오유끼가 울부짖으며 대들었다.
“당신 마음은 허공에 있어요, 아무곳에도 붙들어 두지를 못해요. 처음부터 당
신은 내게 마음이 없없던 거예요. 그런데 왜 나를 데리고 자는 건가요? 내가. 하
잘것없는 가랑잎 같은 여자라서 그러시나요?”
오유끼는 울음에 체하여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한다.
“당신은 남의 생각을 하나도 안해요. 모든 것에서 떠나려고만 하지요. 처음
에 나는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고 고마워했어요. 속으로...은혜를 입은 만큼 갚
아야 한다고 다짐을 했지요. 그렇지만 사람한테서 은혜를 입는 것은 그 사람의
노예가 되는 일인 것을...
결국 모찌즈끼의 주인은 나를 돈으로 사서 돈벌이에 이용했고, 당신은 나를
돈으로 사서 노리개로 이용했어요. 나는 조금도 나아진 게 없어요. 나는 당신한
테 팔려온 물건에 불과했던 거예요. 강아지 한 마리나 다름없어요. 아니, 그만도
못해. 정도 없이 데리고 살다니.“
그녀는 슬프게 울었다. 그러더니 별안간 반짇고리를 번쩍 쳐들어 장롱에 내다
붙이는 것이었다. 강모는 놀란 얼굴로 패어나간 장롱 귀퉁이를 바라보았다. 반짇
고리의 가위가 튀어 나와 찍은 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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