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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3권 (17)

카지모도 2024. 3. 7.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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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막한 겨울의 밤하늘이 에이게 푸르다.

사람의 육신에서 그렇게 혼불이 나가면 바로 사흘 안에, 아니면 오래가야 석

달 안에 초상이 난다고 사람들은 말하였다. 그러니 불이 나가고도 석 달까지는

살 수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석 달을 더 넘길 수는 없다는 말이기도 하

였다. 그런데,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은 그말이 영락없이 맞아 떨어진다는 점이었

다.

운명하기 전에, 저와 더불어 살던 집이라고 할 육신을 가볍게 내버리고 홀연

히 떠오르는 혼불은 크기가 종발만 하며, 살 없는 빛으로 별 색깔이 맑고 포르

스름한데, 다름 사람들의 눈에도 선히 보이는 것이었다. 그것도 남자와 여자는

그 모양이 다른데, 여자의 것은 둥글고 남자의 것은 꼬리가 있다. 그것은 장닭의

꼬리처럼 생겼다 한다. 어쩌면 남자의 불이 좀더 크다고 하던가.

비명에 횡사를 한 원통한 사람의 넋은, 미처 몸 속에서 빠져 나가지 못한 채

거리 중천에서 방황하게 된다.

그래서 혼불도 흩어져 버린다.

하지만 제 목숨을 다 채우고 고종명하여, 제 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가는 사람

의 혼불은, 그처럼 미리 나가 들판 너머로 강 건너로 어디 더 먼 산 너머로 날

아간다. 그렇게 날아서 다음에 태어날 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것이라고도 하였

다. 아니면 저승으로 너훌너훌 날아가는 것이라고도 했다.

인월댁은 마당에 서서 지붕을 항하여 침읍하였다.

(...아짐...인제...가시는가요...부디 부디 모든 일은 다아 잊어 버리시고...평안히

가십시다...뒤돌아보지 말고 가십시다. 한 많은 한세상...바늘 같은 몸에다가 황소

같은 짐을 지고...일어나다 쓰러지고...일어나다 쓰러지고...이 서러운 세상, 못 잊

힐 게 무엇이라고 가던 발걸음을 돌리시겄소. 훨훨 벗어 버리고...입은 옷도, 무

거운 육신도 다아 벗어 버리고...부디 좋은 데로 가십시다...아짐, 인제 후제...저승

에서 다시 마나거든...눈물 많이 흘리노라도 걸음 마다 발이 젖던 이승 이야기도,

옛이야기마냥 나누십시다...이렇게 먼저 가시니...후제, 제가 저승에 가거든...마중

이라도 어디만큼 나와 주실라는가요...그러면 저승이라도 그렇게 낯설고 적막하

지는 않을란지요.)

그네는 홀로 혼불을 울러르며, 마음속으로 하직의 소매를 들어올린다. 그네의

들어올린 소매자락 너머로는 허공이 아득한데, 인월댁의 젖은 넋도 두웅 따라서

떠오른다.

어디선가, 무녀 당골네가 금방이라도 낭랑하게 길닦음을 하는 소리가 들릴 것

만 같다. 그것은 바람 소리인가도 싶었다.

 

망제님 극락 세계루 가시라구 시왕질로 가시라구

질을 닦어 가옵소사 질을 닦어 가옵소사

원퉁허구 설운 마음 다 불배허시구

시왕질로 밝혀 가오 극락질이 꽃밭 소리 사수계루 가옵소사

시왕질을 밝혀 가오 염불 받도 예정 받고 인정 받고 노수 받고

극락 세계루 가옵소사 극락 세계루 가옵소사

법화 소리루 가옵소사 나무아미타불이오

원퉁이 생각 설우니 생각 마옵시고 다아 잊어 버리고

극락 세계루 가옵소사 극락 세계루 가옵소사

법화 소리루 가옵소사 나무아미타불이오

원퉁이 생각 설우니 생각 마옵시고 다아 잊어 버리고

극락 세계루 가옵소사

가다 가다가 저물거든 질에도 앉지마오 질신이 아니 놓소

또 가시다 저물거든 산에도 앉지 마오 산신이 아니 놓소

또 가시다 저물거든 못가에도 앉지 마오 용신이 아니 놓소

또 가시다 저물거든 독에도 앉지 마오 독신이 아니 놓네

또 가시다 저물거든 모래서도 자고 가소

나무 나무 저물거든 모래서도 자고 가소

극락 세계로 가옵소사 시왕질로 가옵소사

예정 받고 인정 받고 노수 받어 갖꼬 극락 세계로 가실 적

걸린 고도 풀으시고 맺힌 고도 풀으시고

극락 세계 법화 소리에 상소리로 편안히 가옵소사

 

당골네의 잠든 꿈길을 지나 청암부인의 푸른 혼불은 하늘의 아득한 저 너머

들녘 쪽으로 날아간다.

한번 가면 다시는 올 수 없는 멀고 먼 길을 이렇게 홀연히 떠나는 그 불덩어

리를 올려다보는 또 한 사람의 그림자가 있었으니.

그네는 효원이었다.

무심코 마당으로 내려서던 그네에게 가슴속이 시릴 만큼 투명한 빛으로 쏟아

지는 마지막 넋에, 효원에 아찔한 어지럼증을 느꼈다.

할머님.

그네는 무망간에 큰방 쪽으로 눈길을 돌린다. 부인이 누워 있는 큰방에서는

희미한 불빛이 번져 나오고 있었다. 순간 효원은, 이미 넋이 빠져 나가 버린 저

방안에서 아직도 저렇게 불빛이 번지고 있는 것이 이상하게도 사무쳐 왔다.

저기 저 방안에 남아 있는 불빛은, 다만 등잔의 불빛이 아니라, 이제 막 육신

을 벗고 허공으로 떠오른 부인의 혼불 그림자가, 저다지도 눈물겹게 어려 있는

것이려니 싶어지는 것이었다.

“나 아직 여기 있다. 아가, 이 방은 빈 방이 아니다. 나는 오래오래 여기 있

을 것이니라.”

창호지의 불빛은 그렇게 나직이 말하고 있었다. 청암부인의 목소리는 효원의

살 속으로 배어든다. 목소리는 불빛을 머금은 채 그네의 살을 푸르게 물들인다.

그네의 몸에서 인광이 돋는다. 저절로 투명하게 비늘을 일으키는 불꽃이 그네의

전신을 휩싸며 타오른다. 그것은 물결처럼 굽이를 치는 눈물이었다.

(할머님 가신 한 생애를, 내 또 그대로 살게 될 것이다. 정처없이 떠나가 버린

그 사람은 언제나 돌아올는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 내 홀로 내 뼈를 일으키리

라, 하시던 할머님. 그 뼈를 다 태우시고 이렇게 한 점 푸른 불꽃으로 떠올라 이

승을 하직하시면서...나한테 점화하고 가시는 것을.)

효원은 언제까지나 마당에 선 채로 빈 하늘을 우러른다.

저 총총한 별들의 그 어떤 별빛이, 금방이라도 가던 걸음을 멈추고는 뒤돌아

보며

“아가.”

하고 그네를 불러 줄 것인가.

효원은 사라지는 불꼬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온몸을 조이면 숨을 죽인다. 마치

흡월정을 하던 때와도 같은 무서운 정성으로 그네는 청암부인의 혼불을 빨아들

인다. 한번 들이마신그 기운이 행여 세어나갈까 하여 그네는 죽은 듯이 고요히

숨을 참는다.

드디어 그네의 온몸에, 실핏줄의 끄트머리에서까지 청암부인의 넋이 파도 물

마루보다 아찔하고 아득한 기운으로 차 오르며, 그네는 숨이 가빠져, 그만 둥실

허공으로 떠오르고만다.

이제 그네는 청암부인을 낳을 것이었다.

그리고, 내일 아침 날이 채 새기도 전에 온 마을과 문중, 그리고 거멍굴에도

이 소문은 번질 것이었다.

소문이 은밀하게 차 오르고 있는 한밤중의 허리가 검푸르게 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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