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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3권 (18)

카지모도 2024. 3. 8. 0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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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돌아오라, 혼백이여

 

밤이 깊어 고비에 이르렀다.

달빛 없는 반공으로 치솟은 노적봉의 검은 날개가, 무너지게 캄캄한 어둠을

쓸어 안으며, 금방 마을의 뒷등으로 고꾸라질 듯 위태하게 보인다. 깍아지른 바

위 벼랑과 숨은 골짜기, 검푸르게 우거진 소나무 수풀도 짙은 먹빛으로 무겁다.

마치 거대한 낟가리를 쌓아 놓은것 같은 형국이어도 노적봉이라고 부르는 산마

루의 드높은 능선이, 우줄 우줄 오늘따라 봉두처럼 어수선하다. 어둠이 한 치만

더 목에 차면 곧 난발을 할 기세다. 쌓여 있던 낟가리들이 검은 짚북더미 머리를

풀어 헤치며 우우우 한꺼번에 쏟아져 내릴 것만 같다. 그 허물어진 어둠이 거센

물살로 마을을 휨쓰는 소리가 공중을 가른다. 바람 소리다. 소스라쳐 다시 보면

산마루는 시커멓게 솟구쳐 오른 파도 꼭대기인가도 싶다. 한순간에, 천지를 울리

는 굉음을 토하며 마을을 뒤덮어 삼킬 듯한 위용이 아슬아슬하다.

그 서슬에 질린 바람이 낮은 소리로 운다. 삼키는 울음이다.

울음에 얹힌 바람은 어둡게 엎드린 마을의 지붕과 지붕 위를 지향없이 휘돌다

가, 사람 자취 끊어진 고샅으로 곤두박질을 치는가 싶더니, 이윽고, 잎사귀 하나

남아 있지 않은 감나무의 앙상한 가지 끝에 가슴을 박고 흐느끼며 호곡한다. 그

소리에, 잠 못 드는 마을 사람들의 귀가 허옇게 일어선다.

일이 났는가.

돌아누워 뒤척이던 사람들은 아예 일어나 앉고, 하릴없이 마음을 조이며 등잔

불 아래 앉아 있던 사람은 방문을 비긋이 열고 바깥을 내다본다. 풍지가 더르르

우는데, 바깥은 오직 캄캄할 뿐이다. 일년 중에 밤이 제일 길다는 동지를 바로

앞둔 하늘에는 숨은 달빛조차 비치지 않는다. 어둠과 합세한 두터운 구름이 금

방 내려앉을 것처럼 무겁게 웅크리며 하늘 한 자락을 물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것은 뭉친 구름 덩어리가 아니라, 두리 기둥이 받치고

있는 덩실한 골기와 지붕이었다. 이 매안 마을의 입구 평평한 지형인 아랫몰에

서는 물론이거니와, 거기서도 한참이나 올라가는 중뜸에 이르러서도 저만큼 아

득하게 보이는 곳, 원뜸. 노적봉의 엄연한 기상이 벋어 내리면서 또아리를 튼 그

곳에 높다랗게 솟아오른 검은 지붕은, 매안의 이씨 문중 종가의 것이다. 이 지붕

은, 순식간에 밀려와 덮치려는 어둠의 기세와, 기어이 떠받치며 버티려는 기둥의

안간힘이 서로 상충하여 뒤엉킨 형상을 하고 있다. 어둠의 기세가 자못 사납다.

짓눌리어 신음하는 용마루가 하늘을 향하여 머리를 든다.

캄캄하신 하늘이여.

그러나, 하늘은 대답이 없다.

간절한 머리를 둘어 하늘을 우러르는 것을 두 눈을 부릅뜬 막새 기왓장, 망와

이다. 잡귀를 물리치고 집안을 지켜 달라고 기와에 도깨비 얼굴을 새겨 지붕마

루 높은 곳에, 하늘을 바라보게 얹어 놓은 망와의 귀면이 애소로 일그러진다. 어

쩌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우는 것처럼 보인다.

바람이 옆에서 그 소리를 대신하여 운다.

가슴을 가르며 우는 소리다.

문풍지를 두드리며 우는 바람 소리에 촛불이 놀란 듯 까무러들더니, 이윽고

불꽃을 너훌거리며 길게 펄럭인다.

탁, 타닥, 타악.

촛불 심지 타는 소리가 크게 울린다.

춧불 아래 누운 청암부인의 누렇게 바랜 노안에, 흔들리는 불 그림자가 일룽

거린다. 그래서 두드러져 뼈가 솟은 곳은 적막한 골짜기 같았다. 사람의 얼굴을

두고 이마와 코, 그리고 턱이며 양쪽 광대뼈를 일러 오악이라 한 말이 참으로

옳은 것을 알겠다. 이미 오래전에 살을 다 벗어 버리고 개결한 뼈로만 남은 듯

한 청암부인의 얼굴은 말 그대로 산악처럼 느껴진다.

그런가 하면 그네의 얼굴은 노근처럼도 보인다. 대저 뿌리란 그 몸을 땅 속

에 숨기어 묻는 것이 이치이다. 그러나 노근은 지상으로 솟아오른 뿌리이다. 제

뿌리를 뻗고 있는 산의 지질이 비옥하여 흙이 두터운 곳에 사는 나무는 그럴 리

가 없지마는, 천인단애 까마득한 낭떠러지나 만중철벽 척박한 땅에 서서, 그 뿌

리가 암석의 틈바구니에 끼이고, 흙을 깎는 물살에 씻기어 제 둥치를 지탱하기

어려운 나무는, 처절한 젊은 날을 보내고 노목이 되면, 이제 그 뿌리의 뼈가 땅

위로 울툭 불툭 불거져 드러나니.

그 모습은 모질고 끈덕진 세월을 다 육탈하고, 세상을 벗어 버린 초연한 기상

을 느끼게 한다.

어머님의 한세상이 이에서 무엇이 다르리오.

이기채는 청암부인의 머리맡에 여윈 무릎을 꿇고 앉아, 속으로, 터지려는 곡읍

을 삼킨다. 방안에 둘러앉은 사람들도 손으로 입을 막아 울음을 참으며, 하염없

는 눈으로 청암부인을 지켜본다.

그러나 부인은 고요히 감은 눈을 뜨지 않은채. 다만 몇 모금의 숨을 쉬고 있

을 뿐이다.

이기채의 처 율촌댁이 청암부인 머리맡에 흰 백지를 폈다.

그리고 그 위에 색실로 맺은 혼백 매듭을 조심스럽게 내려 놓았다.

그것은 다홍과 청람빛이 선연한 명주실 매듭이었다.

이제 곧 이승을 하직하고 떠나려는 사람의 머리맡에 정성스럽게 서서, 남은

사람은 매듭을 맺는다. 두 가닥의 색실을 한데 섞어 꼬아서 한 가닥으로 만들고

는, 뒤쪽은 열 십자가 되고, 앞쪽은 우물 정자가 되게 맺은 것의 이 가닥 저 가

닥을 둥글게 뽑아 내, 세 개의 고를 지으면, 그것은 서럽고 아름다운 꽃잎 모양

으로 피어난다. 아무리 조여도 꼭 조여지지 않고, 고가 어느 쪽으로나 마음대로

움직이게 맺어야 하는 혼백 매듭은, 죽은 후에 넋이나마 막힌 데 없이, 걸린 데

없이, 천지를 자유로이 날아다니라는 뜻이리라.

아직은 살아 있는 망인의 마지막 숨결을 이 실 매듭에 받아 모신 다음, 청.홍

의 색실에 어린 그 혼백은, 이윽고 초상이 나면, 신주를 만들기 전에 흰 비단 천

을 접어서 만든 혼백 속에 끼워 넣는다. 색실에 스며든 혼백이 넋이라면, 신주

대신 접은 흰 비단은 넋을 담은 집이라고 할 것인가.

임종을 맞이하는 절차는 소리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것이 오직 가슴을 미

어지게 하는 슬픔뿐일 때는 먼 곳의 일 같던 죽음이, 이렇게 구체적인 형상을

띄우고 모양을 드러내니 가슴이 내려앉으면서,

닥쳐오고 말았구나.

저리게 절감이 되었다.

어둠을 머금어서 더 휘황하게 일룽이는 촛불 아래, 꽃 같은 다홍과 깊은 물빛

청람의 색실 매듭이 요요하다.

그 처연하게 고운 색실 매듭은, 이제는 그냥 실이 아닌 것이다.

어머니, 이 실에 혼백을 모시겠습니다.

부디, 맑으신 당신 넋이 이곳으로 드소서.

하얀 백지 위에 고요히 떠 있는 동심결에 눈이 멎은 이기채는 속에서 치미는

설움을 참지 못하고, 흐윽, 울음을 토한다.

그러나 곧 울음 끝을 자른다. 지금은 울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렇게 임종이

임박하면, 둘러앉은 사람들은 울음을 멈추고, 조용히, 가시는 분의 마지막을 배

웅해야 하기 때문이다. 임종의 자리에서 자손들이 너무나 애통하게 울부짖으면,

떠나는 망인의 넋을 소란스럽게 괴롭히는 일이 되고, 또 망인의 발이 눈물에 젖

어 무거운 탓에 가볍고 좋은 곳으로 못 간다고 하였다.

아아, 하오나.

이기채는 어금니를 힘주어 문다. 잇사이로 눈물이 배어난다.

원통하여 어찌 그냥 가시게 할 수 있으리.

그의 머리 속에, 아들 강모의 얼굴이 떠오른다.

어머니, 아직은 가지 마십시오. 조금만 더 머무르시어, 강모란 놈, 그놈 보고

가셔야지요.

이기채는 침음 하였다.

언제였던가. 유명을 달리하면 어제도 전생이려니.

기동은 제대로 하지 못하였으나 그래도 의식은 희미하게 남아 있던 청암부인

은, 한동안 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깊은 절망에 무거웠다. 그러

더니 미간을 오랫동안 모으고 있었다. 마치 온몸의 남은 기력을 기어이 눈으로

모아 보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힘이 드는 듯 미간을 풀어 버

리면서 입시울을 몇 번 움직였다. 무슨 말인가 하려는 것이 분명하였다. 숨소리

로라도 대강 짐작하여 알아들을 수 있었던 그네의 말을, 그때는 짐작조차도 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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