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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3권 (19)

카지모도 2024. 3. 9.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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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 무슨 말씀 하시려고요?”

율촌댁이 청암부인의 귀에 대고 소리를 지르듯이 물었다.

청암부인은, 다급히 목 메이어 묻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머니.”

이번에는 이기채가 청암부인의 팔을 잡고, 깊은 잠을 깨우는 사람처럼 불렀다.

그러자 그네의 입 모양이 둥그런 시늉을 했다.

“어머님이 혹시 강모 찾으시는 거 아닐까요?”

율촌댁이 이기채를 돌아보았다.

“어머니이, 강모 찾으십니까?”

이기채가 청암부인의 귀에 대고 소리를 쳤다.

그제서야 그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끄덕이는 시늉이라고 해야 옳았다.

이기채는 잠시 망연하여 율촌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다음 순간, 청암부인에

게로 눈길을 돌렸을 때는 그네가 이미 의식을 잃어버리고 만 뒤였다. 사람의

형체라 하는 것은 그야말로 빈 껍데기에 불과하였다. 의식이 없는데, 모습이 눈

에 보인다 한들 그것이 무엇이리오. 한낱 나무토막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 의식의 마지막 실낱을 붙들고 있었던 것이 바로 강모였었다.

그 강모가 지금은 여기에 없다. 한 문중의 종가에 종손으로 나서 가문의 부형

이 되어야 할 그가, 헐렁하게 비워 놓고 떠나 버린 자리에,

만주 봉천 어딘가에 있다더라.

는 허망한 소문만 돌아왔었다.

그 말을 들은 이기채는 놋재떨이를 새되게 두드리며 말했었다.

“그놈 말 다시는 내 앞에서 하지 마라.”

탁, 타닥.

촛불의 심지가 튄다. 심지가 부실한 것인가, 아니면 허공을 가르면 우는, 지월

의 바람이 들어오는 때문인가. 그러나, 그래서가 아닐 것이다. 미동도 하지 않는

청암부인의 바튼 숨결을 대신하여 그렇게 심지가 타는 것이리라. 촛불이 숨결

같고, 숨결이 촛불 같다. 끊어질 듯 잦아들다가, 멈추었던 숨을 한 번에 몰아쉬

면서 가파르게 터져 나오는 숨소리 끝에 촛불의 길고 검은 그을음이 묻어 있다.

청암부인의 발치에 그림자처럼 앉아 있는 인월댁은, 지난번 청암부인이 혼곤

한 잠에서 깨어난 듯 잠깐 의식이 돌아왔을 때, 지금처럼 이렇게 발치에 앉아

있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불쌍헌...사람...”

입 속으로 숨소리처럼 남긴 한 마디가 그대로 가슴에 얹혀, 그만 어깨를 꺽으

면서 거꾸러져, 체읍을 참지 못하던 날을 떠올린다.

그날따라 집안도 조용하고, 청암부인도 숨이 차서 쉬엄쉬엄 몹시 힘들어 하며

말하는 것만이 다를 뿐, 정신이 맑은 것 같았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이 살던

이승의 자리를 그래도 한 번 둘러보고 떠나려는 혼백의 마지막 기운이었을 줄이

야.

하지만 그 마지막 기운을 함께 나눈 것이, 속절 없이 살아온 인월댁의 한세상

차디 찬 시름을 다 쓰다듬어 주고도 남았던 것이다.

오래 속내 말을 나눈 끝에, 인월댁과 청암부인의 눈이 서로 고요히 마주친 그

순간이 이승에서의 마지막이었다.

그날 일이 바로 지금인 것처럼 눈앞에 떠오르는 인월댁은, 숨이 고르지 않은

촛불 자위에서 멍울멍울 녹으며 흘러내리는 촛농이 부인의 눈물인 것만 같다.

그 뜨거운 촛농이 인월댁의 가슴 한복판을 가르며 미끄러져 내려간다.

후읍.

그 순간 청암부인은 깊은 숨을 들이쉰다. 방안에 둘러앉은 사람들도 따라서

숨을 들이쉰다. 그러나, 그네의 메마른 몸 속으로 한번 빨리어 들어간 숨은 다시

새어 나오지 않았다.

율천댁이 황급히 몸을 기울여 청암부인의 숨소리를 들어본다. 아무런 기척이

없다. 옆에 앉은 효원이 백지에 싼 햇솜 한 조각을 청암부인의 인중 위에 송구

스러운 기색으로 얹어 놓는다.

이 무슨 참람한 일이냐, 내가 할머님 절명을 확인하다니, 잠시 숨을 멈추신 것

일 뿐, 아직 살아 계시어 정신이 있으시면, 내 이 못할 짓을 어찌 용서받으리.

효원은, 새어 나오는 흐느낌을 누르지 못한다. 방안의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솜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깃털보다 가벼워 스러질 것 같은 햇솜은 움직이지 않

았다. 이미 부인은 숨을 거둔 것이다.

아직도, 내쉬지 않은 숨이 몸 속에 살아 있을 것이언만, 그네는 아무런 말 한

마디 따로이 남기지 않고 눈을 감았다.

아이고오, 아이고오오.

이기채가 곡성을 터뜨렸다. 율촌댁은 머리에서 비녀를 뽑았다. 머리를 풀고 곡

을 하는 율촌댁 옆에서 효원이 호곡한다.

창자가 끊어지는 울음이다.

방안에 낭자한 곡성이 마당으로 흘러 넘치면 기둥을 적시고, 캄캄한 밤하늘을

이고 있는 지붕을 잠기게 하면서 굽이굽이 온 마을을 휘감는다. 닥쳐오는 두려

움을 피하려고 어둠 속에 엎드리어 몸을 숨기고 있던 불빛들이, 먹물 같은 밤의

기슭에서 하나씩 떠올랐다.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뒤척이던 사람들은, 한밤중의

허리를 가르는 곡성에 소스라쳐 일어나 부싯돌을 찾는다. 마을의 이 집 저 집이

수런거리는 기색에 컹, 커겅, 개들이 짖는다. 그 소리에 꼬리를 물고 중뜸에서도

불빛이 돋아난다. 창호지 문짝이 불그스럼 물든다. 그 네모로 젖은 불빛은 눈물

을 머금은 밤의 눈 같다.

봉화의 신호이기나 한 것처럼 그 불빛을 받은 아랫몰의 지붕아래 문짝에도 등

잔 불빛이 눈을 뜬다. 그 불빛이 검은 바닷속 같은 어둠 속에서 붉은 연이 되어

떠오르고, 공중으로 침통하게 떠오른 그 연은, 아랫몰에서도 한참이나 논과 밭의

두렁을 지나 이만큼 와서 흐르는 개울을 건너 부복하고 있는 민촌 거뭉굴에까지

날아간다.

가셨고나.

거멍굴 사람들도, 어둠을 밀어내며 일어나 앉는다. 쑥대강이 같은 머리를 더듬

어 다듬고는 황망히 지겟문을 열고 나와 벌써 봉당으로 내려서는 사람도 있다.

매안과 거멍굴이 서로 반상을 가리지 않고 불빛들로 비보를 나눌 대, 원뜸의

안마당 한가운데 화롯불이 피워졌다. 그 이글거리는 화로의 불덩어리가 어둠의

복판에서 어둠을 삼키며 타오른다. 초상이 있으면, 우선 바로 시신을 모신 방의

아궁이에 불을 끄고, 그 대신 이렇게 화롯불을 마당에 피우는 것이다.

처마끝과 마루 기둥과 중문, 대문, 그리고 안채와 사랑채의 방문 앞이며, 정지,

헛간, 고방의 기둥마다 등불이 걸렸다. 집안의 구석구석뿐만이 아니라 고샅에까

지 내다 걸은 등불은 구슬프게 휘황하여, 무너져 덮쳐 오던 어둠을 저만큼 물러

서게 하였다.

마당 한쪽에서는 장작을 수복하게 고여 화톳불을 지핀다.

큰방과 건넌방과 큰사랑, 작은사랑에 모여 앉은 사람들의 손길이 너나없이 분

주하고, 정지에서는 아궁이마다 불을 지피고 있었다. 음식을 차려야 하기 때문이

다. 문중의 부인들은 큰방과 건넌방, 그리고 정지에서 소리내지 않고, 공손하면

서도 빠른 손으로 일을 진행하였다.

호제와 비복, 그리고 거멍굴에서 올라온 사람들도 물건을 나르고, 심부름을 하

고, 불을 때고 하면서 부지런히 오갔다.

동녘골댁이 새로 지어 막 퍼 올린 흰 밥 세 그릇을 동그란 소반 위에 올려 놓

고, 그 옆에 짚신 세 켤레를 나란히 놓았다. 저승에서 망자를 데려가려고 찾아온

사자들을 대접하는 사자밥이다.

그 밥 옆에 동전 세 개를 놓는다.

대문간에 걸린 장명등이 어두운 고샅길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다.

살아 생전 언제나 들고 나던 이 대문간을 이제는 신발 신고 나가지 못하고,

다시는 그 모습을 뵈올 길이 없으려니, 싶은 동녘골댁은 휘젓한 심정을 가누기

어려웠다.

집안이 불빛으로 휘황한 것에 비해서 대문간은 고적하다. 사자밥에서 피어 오

르는 김이, 걸어 놓은 등불 아래 한없이 적막한 기운으로 흩어진다. 거칠거칠한

짚신 켤레들은 갈 길이 먼 나그네의 발을 기다리며 그림자를 머금고 있다.

아직 나이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읜 동녘골댁은, 그것이, 아버지가 신고 가시

는 짚신인줄 알았었다.

저승이 얼마나 먼 곳인지는 알 수 없지만, 흰 옷을 입은 아버지가 홀로 사자

들의 뒤를 따라서, 짚신을 어깨에 메고 걸어가는 모습이 가슴을 밟아 흐느꼈었

다. 아무 말도 없이, 낯설고 머나먼 길을 터벅터벅 걸어 가다가, 짚신이 다 닳으

면 다시 바꿔 신고, 또 그렇게 가고 가다가 어느 산 말랭이 고개 위에서 잠깐,

낡은 신발을 갈아 신는 그 모습이 어찌 그리 선하게 눈에 밟히었던지.

얼마나 남었는고.

아버지는 한 손을 이마 위에 대고 앞으로 가야 하는 더 먼 길, 저승의 어느

길목을 어림하며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 같았다.

자, 또 가자.

그러면서 아버지는, 빛도 없고, 소리도 없는 적막한 길을 아득히 혼자서 걸어

가는 것이었다.

그곳이 얼마나 멀고 멀어서 저 짚신이 다 닳도록 가고 또 가야 하는가. 동녘

골댁은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발이 담길 짚신이어서 다시 한번 눈물 어린 눈으로 그것을

어루만지듯 바라 보았었다.

“그거이 아버지 신발이간디, 아니다. 저승의 사자들이 신고 가는 것이란다.”

나중에, 동녘골댁 어머니는 한숨을 쉬며 그렇게 말했었다.

그런데도 웬일인지 쉽사리 그 말을 믿지 못하여, 여전히 그네의 마음속에서는

거칠거칠한 그 짚신을 어깨에 메고, 저승 길을 가는 아버지의 모습이 생시인 듯

문득 떠오르곤 하였다.

동녘골댁은 청암부인의 사자밥을 오래도록 내려다보면서 얼른 돌아서지 못하

였다. 그 사이 문중의 숙항과 동항 몇이서 대문간의 동녘골댁에게 눈빛으로 인

사를 하며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무겁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들어가는 그

들의 뒷등에 그림자가 발을 내려 컴컴하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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