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에 담지 못할 이 충격적인 말에 강실이가 아연한다.
옹구네는 바로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이 내 몸 누가 가지 갈라먼 가지 가시요오, 허고 외장을 치능 거이나 마
찬가지지요. 이런 세상에, 일본놈 순사들이 쫘악 깔려서 드글드글헌디, 질
도 모르고, 누가 데리다 줄 사람도 없음서, 머리꼬랭이 늘어띠리고 무작정
배짱 하나 믿고 질을 떠난다는 것보톰이."
강실이는 무슨 말을 그렇게까지 하느냐는 소리조차도 못하였다.
"작은아씨가 몰라서 그렇제, 저 오수장이나 남원장이나 간에, 요런 흰옷도
없고 못 댕게요. 상주 아니라 벨거이라도. 요렁 거 깨깟이 진솔로 입고 나
가지요? 그러먼 아조 어느 귀영텡이에 쪽제비 시양쥐맹이로 숨었다가는,
왜놈 순사들 말이여라우, 먹물 든 물총을 딱 슁케 갖꼬 들고 있다가는, 흰
옷 입은 사램이 지나가먼 기양 짜악, 쏘아 부러요오. 그러먼 어쩔 거이여
어. 쌔애까먼 먹물을 기양 문어 대가리 밟은 것맹이로 팍 뒤집어써야제에."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일 아닌가.
"왜 그러냐고 물었다가 코 뀌여서 맞어 죽은 사람도 있답디다."
"그럴 리가..."
"여러 말씀을 허시들 말으겨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지 모른다고 안헙디
여? 물정 모르먼 있든 디 가만히 있어야제, 무단히 조께 꺼그럽다고 호랭
이 아가리로 덤퍽 뛰어드는 짓은 말어야요오. 더 죽을 꼴을 봉게로. 차라리
죽으먼 낫게요? 죽도 못헐람서 당허기만 허제."
"황아장수는, 언제 온다 하고 갔소?"
"온단 날이사 벌쎄 지났지라우. 그 예펜네도 아매 오다가다 무신 봉벤이나
당해서 못 오능 거인지도 몰르지요잉. 요새는 질바닥뿐 아니라 집안으끄장
딜이닥쳐서 막, 젊은 처자를 끄집어내 어디로 막 데꼬 간다든디. 하이간에
날짜 한나는 벤통없이 잘 맞추든 사램이 꿩 꾸어먹은 소식이니, 먼 곡절이
있어도 있을 거이요. 아무 일 없다먼, 천만다행인디, 올 때 되먼 오겄지맹."
"그래도 나는 길을 나서 볼테요."
마음을 굽히려 하지 않는 강실이한테 옹구네는 좀더 살가운 기색으로 낯바
닥을 들이밀며 다가앉아 묻는다.
"긍게, 갈라고 허는 디는 아시오?"
강실이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었다.
"어디간디?"
"득량."
"득량?"
"그렇다대요."
"득량만 가먼 그 담에는 아시오?"
이번에도 그네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었다.
"어디간디요? 아니, 정 그렇게 꼭 가세야겄으먼 지가라도 뫼시고 갈라고요.
그래야 안허겄능기요?"
강실이 눈 속을 빠안히 들여다보며 옹구네가 물었다.
"안행사라든데..."
"든데, 갖고 되야요? 딱 안행사라야제."
"옹구네, 내가 부탁이 하나 있어요. 좀 들어 주시오."
"아이, 작은아씨, 참말로 가실라능게비요? 그렇게 말씀을 디려도?"
"내 말을 흘리지 말고 꼭 들어 주어요."
뒤로 물러앉으려는 옹구네의 두 손을 부여잡으려 하며, 강실이는 애원하다
시피 사정한다.
"머이간디요?"
"나 차표 하나만 사다 주시오."
"차표요?"
"득량 가는 것 아니라도."
강실이 음성이 후드르르 떨린다.
그네는 생전에 지금까지 정거장에도 가 본 일이 없거니와 기차표를 사 본
일도 없었으나, 정거장에 멋모르고 나갔다가는 이 골 저 골에서 기차 타러
나온 삼동네 사람들을 다 만날 수 있다는 것쯤은, 그간에 문견으로 들어서
알았다. 그러니 만일에 청청한 대낮의 정거장에서 매안의 문중 사람들이라
든지, 머슴이나 종, 호제를 만나지 말라는 법이 없었던 것이다.
꿈속에도 살기를 바라는 마음 없으니, 옹구네가 말하는 온갖 흉사가 하나
도 무섭지 않았으나, 오로지 어머니와 아버지의 마지막 얼굴에 끝까지 먹
칠하는 일만큼은, 자식의 염치로서 삼가고 싶었으며, 남의 동네와 남의 문
중 사람들에게 이 추접스러운 몰골을 드러내어, 매안 이씨, 이 몸에 뼈를
주고 살을 주신 조상들과 문중 어른들께, 돌이킬 수 없는 누를 끼치고 싶
지는 않았다.
죽으려 한 사람이 무엇이 두려우랴.
이곳을 벗어나서 떠나기만 한다면 나는 개가 물어가도 상관없다.
이 자리 거멍굴, 여기에서라고 기어이 죽으려면 어찌 방법이 없으리오만,
그것은 결코 옳지 않은 일이었다.
무엇보다 매안이 지척이며, 거멍굴은 매안의 발바닥이니, 만일에 어느 날
자신이 목숨을 끊는다면 그날 그 시로 매안에 득달같이 안 알릴 수 없는
일이고. 그리 되면 정거장에서 백주에 아는 사람 만나는 것과는 비교도 되
지 않을 사태가 엄청나게 벌어질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매안이야 나를 버리셔도 나의 집안 혈족이매, 차라리 더러운 내 죽음을 썩
혀서 삼키시겠지만, 어이한 연고로 오류골댁 강실이가 거멍굴의 옹구네 문
지방에다 목을 배고 자결하여 죽었더라, 하면. 그 소문이 거멍굴에서만 맴
돌 리 있으리오. 무섭게 날아가서 이웃과 동제간은 물론이요. 남원군을 뒤
덮고 말 것이다.
나 죽거든 우리 부모에게도 알리지 말고, 오로지 쥐도 새도모르게, 나를 그
대의 뒷마당이나 후미진 산기슭 밭두둑에 파묻어 주시려오. 내, 그 은혜는
저승에 가서라도 잊지 않고, 머리카락을 베어 짚신을 삼어 드리리다.
만약 그럴 수만 있었다면, 아아, 얼마나 좋았을 것인가.
강실이는 옹구네를 망연히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당치않은 일.
다른 것은 그만두고, 저 아낙이 무슨 죄 있어 나 때문에 참혹한 봉변을 당
할 것이냐. 일찍이 서방을 잃고, 어린 자식과 함께 하천인의 모진 삶을 꾸
려가는, 그나마의 보금자리인 남의 집에서 생사람 제 목숨을 끊어, 죽은 몸
뚱이를 널브러지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쓰러지는 나를 부축하여 돌본 죄밖에 없는 아낙한테, 베푼 것 하나도 없이,
오히려 죽은 송장을 치우게 하는 번거로움을 끼치고 가서는 결코 안된다.
더구나 이 아낙은 상것이라, 내가 여기 이 집에서 죽은 뒤끝을 차마 감당
할 수 없을 터. 어쩌면 물고가 날는지도 모른다.
이 아낙이 매안으로 잡혀가면 형틀에 매이어 무슨 말을 하게 될지 알수 없
는 일 아닌가.
그러니 여기서 나가야만 한다.
...죽으려면, 나가야만 한다.
강실이는 어쩌면 기차를, 검은 강물 검은 하늘 건너서 저승으로 갈 때 타
는 배 반야용선이라고 생각하였는도 모른다.
차표를 부탁하고는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네가, 옹구네의 대답을
듣지 않고, 제 봇짐 묶인 주둥이를 찬찬히 풀었다.
옹구네는 잔뜩 의아한 눈길로 강실이 손끝을 따라 동자를 굴린다.
저걸 멋 헐라고 풀으까잉.
어루만지듯 풀어 열친 보퉁이 속을 보고 옹구네는 그만
"하앗따아, 참말로오."
하는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눈이 부시게 흰 모시 한 필과 아른아른 얼비치는 숙고사 연분홍 저고리에
옥색 치맛감, 그리고 진홍 비단 섬 할 만큼 붉은 치마에 진노랑 꾀꼬리색
저고리감이 개켜져 들어 있는 것이, 질리게 고운 탓이었다.
그것을 스르륵 쓸어내리는 강실이 손바닥에 효원의 얼굴이 가리워졌다.
"긴요하게 쓰시랍니다."
라고 안서방네는 효원의 뜻을 전하였지.
그리고 안서방네는 또 다른 비단 보자기에 싼 것을 오류골댁 앞에 내밀었다.
그것은 금가락지 한 쌍과 백옥 세공 투각 향갑 노리개가 백지에 다시 한
겹 싸여진 보자기였다. 향갑은 머리카락같이 섬세하게 투각된 백옥의 문양
사이로, 곽 속에 곱게 바른 다홍 갑사 빛깔이 비쳐, 보는 이의 마음을 빨아
들이며 사로잡았는데, 매듭 머리에 금사를 감은 청옥색 봉술이 하르르 드
리워져 있었다.
강실이는 한동안 그것을 펼치어만 놓고,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소리없이 그
대로 앉아 있을 뿐, 입을 열지 않았다.
멀 저렇게 생각허고 있으까아.
꾸루루룩, 옹구네 목을 깎으며 침이 넘어간다.
"옹구네가 그 동안 나 때문에 고생도 많었고, 또 차표도 끊어 주어야하니,
이걸 정표로 받으시오."
강실이는 금가락지 한 쌍을 옹구네 손에 쥐어 주었다.
피마자 등잔 불빛이 겨우겨우 어둠을 달래며 붉은 주홍의 불잎을 밝히고
있는 음습한 방안에, 효원이 혼수로 가지고 와 아직 한번도 쓰지 않은 채
지심으로 골라서, 강실이 가는 길에 긴요하게 쓰라고 준 금가락지 한 쌍이
뿜어내는 광채는, 불길하고 요기롭게 찬란하였다.
그것은 옹구네 손아귀를 황홀하게 가득 채웠다.
하이고오, 하이고매, 아이고.
벙글어지는 입시울을 가누지 못하고 자꾸만 실룩거리며, 가슴이 벅차 어쩔
줄 모르는 옹구네가, 터질 것만 같은 제 손가락에다 가락지를 막 끼워 보
려는데.
"자능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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