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잡설-
<포르노>
2007년 5월 6일
濤夏 오채환 교수님.
‘현실은 포르노를 모방한다’
스페인의 영화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와 스페인의 포르노 슈퍼스타라는 패티 디푸사와의 대담을 소개해 주셨군요.
허구를 실제처럼 컬트화 하려는 편만한듯한 현대의 욕망에 대하여 우려 섞인 교수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포르노 스타의 원하는 바 그것은 의외로군요.
“휴식과 우울, 반성, 금욕, 권태로운 니힐리즘, 훌륭한 예의범절, 스케줄에 따라 행동하기, 조심성, 우수, 가족 및 친지방문, 일반상식, 금지사항 준수, 전통과 뿌리찾기, 음유시인의 나직한 음성 ”이라니.
예사 사람들보다 더욱 지성인, 낭만인, 질서인, 도덕인, 교양인으로서의 면모를 가진 사람의 생각이 아닙니까.
심지어 어느 퓨리턴의 얘기를 듣는듯 합니다.
그에 대하여 감독은 말합니다.
“그래요. 고통 받으며 좌절할지언정, 절대 생을 포기하진 맙시다.”
아, 포르노스타를 지배하고 있는 삶의 본질은 그러니까 적어도 포르노적인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나로서는 패티 디푸사, 이 여배우는 초면입니다 (섭렵한 숱한 포르노 영상 어디선가 안면이 있을런지도.)
알모도바르의 영화도 비디오로 두어편인가 보았을 뿐이니 영화를 좋아한다는 나의 자부도 실없습니다.
같은 스페인감독 비가스루나의 영화는 몇편 보았습니다 (동화적인 내러티브의 독특한 에로티시즘으로 꽤 성의식을 자극하는 영상이었다고 느꼈습니다만.)
그러나 오교수님.
‘현실은 포르노를 모방한다’
과연 그럴까요?
포르노 배우가 고통받으며 좌절한다는 게 무얼 의미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현실은 포르노를 모방하지 않습니다.
나는 포르노라는 장르는 현실이 모방할수 없는 영역에 속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포르노의 희소성에 대한 상업성 문제를 말씀하셨는데, 생각건대 포르노에서의 희소성이란 전혀 다른 성질의 것입니다.
희소성과 그에 따른 유효수요는 상업주의의 절대요건이긴 하지만 포르노라는 상품의 희소성은 현실이 흉내낼수 없는 영역에 속한게 아닐까요?
이를테면 서커스의 희소성과 같은.
상상력의 옷을 입힌 은유로서의 희소성이 아닌 몬도가네적 기괴스러움의 희소성.
이것이 포르노의 한계라고 생각합니다.
나도 숫컷인지라 에로물이나 웬만한 포르노 대표작들은 상당히 섭렵했을 겝니다.
그러나 나는 포르노를 보면서 인문적(?)으로는 그다지 꼴리지 (저급한 표현이라지만 그냥 씁니다) 않았습니다.
동물적 적나라한 코이터스(coitus)는 강렬한 자극이기는 한데, 적어도 인문적 성애(性愛)를 촉발하는데 있어서는 역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라는 동물이 생식적 섹스와 분리하여 배설적 섹스라는 장르를 탐닉한지는 오래 되었습니다.
유전자 보존 욕구(생식)와는 별도로 섹스를 쾌락으로 승화시킨 것은 호모 에로티쿠스(성애적 인간)의 위대한 성취가 아닐수 없습니다.
코이터스의 쾌락은 물론 인간 아닌 동물에게도 있습니다만, 그건 생식에 게으를까봐 미끼를 심어 놓은 유전자의 조작일 뿐이지 인간처럼 생식과 완전 독립되어 심화시킨 쾌락은 아닙니다.
동물의 쾌락과 호모 에로티쿠스의 쾌락은 근본적으로 다른겁니다.
호랑이 우리에 호랑이 교미 장면의 필름을 틀어주었더니 호랑이의 교접능력이 뛰어나게 높아지더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진시황의 어머니 '조희'는 말 암수의 교미 광경을 보고는 성욕을 주체못하여 숨을 헐떡이며 정부 '노애'에게 달려갔다고 합니다.
바로 그것까지가 포르노 효용가치의 한계입니다.
새는 날면서 똥을 싸지만 인간은 그럴수 없지요.
포르노 생산자는 너무나도 인간성에 대하여 무지한 족속들입니다.
호모 에로티쿠스의 성애적 감성에 천착하고 그것에 아부하여 소구점을 거기에 맞추어야 하건만. 소비자는 생각하지도 않는데 하염없이 모자란 상상력을 흔들어댑니다.
동물과 교접하는 상황도 예사로 등장합니다.
베버의 법칙이라고 하나요?
끊임없이 자극을 만들어내야하는 순환의 법칙.
세련된 호모 에로티쿠스에게는 역부족일터이고 혈기방장한 청소년들의 성적 호기심에 빌붙기야 하겠지만, 거기까지입니다.
우리 사춘기시절, 플레이보이와 팬트하우스의 찢어진 한 페이지의 그림들은 은밀한 밀교의 경전처럼 책상 밑을 돌아다녔지요.
뒤에 허슬러라는 잡지가 나왔는데 더욱 적나라한, 심하게 말하면 여체 은밀한 부위의 해부학적인 영상들...
돌이켜보면 아이들이 열광한 것은 외국여자들의 거대한 젓퉁이나 성기 따위, 섹슈얼 몬도가네적인 것에 대한 것이지, 진정한 성적 판타지를 촉발한 바는 거기에 없었습니다그려.
그 그림들에도 역시 호모 에로티쿠스적 은유는 없었던겁니다.
섹스는 암나사 숫나사의 피스톤 운동만으로 이루어지는건 아닙니다.
생각건대. 인간 존재의 본질은 알레고리입니다
호모 에로티쿠스 뿐 아니라, 호모 뒤에 어떤 어휘를 붙이건 인간이 은유(隱喩)의 존재라는 데 변함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꼴리게 하는 건 은유입니다.
최종적으로 촉발되는 것은 육체일 터이지만,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의 상상력입니다.
오교수님.
내 생각으로는 진짜배기 포르노는 정작 일반 극영화에 편만하게 범람하고 있습니다.
진짜 꼴리게하는, 성적 판타지는 죄 유명 극영화 속에 녹아 있다는 말씀이지요.
내게 진정한 성적 엑스터시를 느끼게 했던 영화들은 포르노가 아니라 죄 유명한 극영화였지요.
제목이 기억되지 않는 미국영화 한편.
젊은 부부의 농가에 우연히 기식하게 된 청년...남편과 식사를 마치고 방을 나간 청년이 벗어 놓은 땀에 절은 셔츠...그 셔츠에 코를 묻고 불타는 눈으로 창 밖으로 그 청년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농부의 아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격렬한 부부싸움. 클라크케이블은 앙탈하는 비비안리를 두팔로 안고 침실 방문을 걷어 차고 들어갑니다.
다음날 새가 지저귀는 찬란한 아침....침대에서 기지개를 켜는 비비안 리의 그 행복한 표정에서 나는 간 밤 두사람 격렬한 섹스의 현장을 고스란히 떠올려 불끈하였지요.
우리나라 옛 영화에서도...이예춘의 아내 도금봉, 허장강과 춤추다 안방으로 자연스레 들어가 불이 꺼지는 장면이라던가. 빨치산주제의 영화 피아골에서 계곡에 떠내려가는 무명 빤쓰라던가...
얼마전 비디오로 본 영화 한편...“아름다운 청춘” 중년의 여교사와 생도....자료실에서 키스를 나눈후의 교실. 교탁의 여선생과 생도들 사이에 앉아 수업을 듣는 남학생... 서로의 싸인... 자신들의 입술을 만지면서 은밀한 상상의 쾌락을 나누는 장면이라던가.
퍼뜩 떠오르지 않지만 모두 열거하기도 힘들만큼 정말 무수히 많습니다.
오교수님.
포르노는 현실을 모방할수 없습니다
호모 에로티쿠스를 자극할만한 은유를 차용하자니 일반영화와는 도무지 게임이 되지 않아 그러면 장사가 안되지요.
그러므로 자꾸만 몬도가네적 희소성으로 치달아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현실은 당연히 포르노를 모방할수 없습니다. (고작 동작 자세 같은 것에 있어서나)
진정한 포르노란 은유의 영역, 상상의 영역에 있습니다.
우리 삶 속에 현실과 진정한 포르노 간의 인터페이스는 늘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권력과 억압에의 저항 코드로서 포르노.
페미니즘으로서의 코드.
갖다 붙이기 좋아하는 작금의 지식인들.
포르노를 실제처럼 컬트화 하려는 현대의 욕망.
그런게 과연 있을까요?
있다면, 그런 포르노는 그들만의 것이고 진정한 포르노는 우리들의 것입니다.
무수하게 우리는 진정한 포르노를 구현하는 삶을 실제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객설이 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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