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잡설-
<반딧불의 무덤>
2009년 3월 15일
두달전, 가여운 어떤 오누이를 만났다
노사카 아키유키 원작 다카하다 이사오 감독의 ‘반딧불의 무덤’ (Grave of the Fireflies, 火垂るの墓)이라는 일본 애니메이션.
동경에서 일하고 있는 아들놈이 아비에게 십여편의 옛 영화들을 구해 주었는데 그 중 한 편이었다.
1988년 제작된 영화인데 나는 두달전에야 비로소 감상하게 된 것이고 휴일인지라 영화를 오늘 다시 보았다.
집단(集團)과 개별(個別)이라는 주제에 나는 민감하다.
내게, 집단과 대비되는 개별은 언제나 가여운 모습을 하고 있다.
'반딧불의 무덤'은 집단으로부터 소외된 가여운 두 남매의 모습을 아름다운 서정(抒情)으로 채색(彩色)한 비극적인 서사(敍事)였다.
나는 오누이라는 우리말의 어감(語感)을 참 좋아 한다.
오누이... 오라비와 누이.
‘오뉘’ ‘오누이’라고 중얼거리면 공연히 마음밭이 촉촉해 지면서 무언가 애틋함이 밀려온다.
내게는 세 살 터울의 형이 있고 연년생인 누이동생이 있는데, '오누이'에 무슨 특별한 사연이 녹아 있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햇님 달님의 동화, 어린 시절 본 황해 이경애가 주연한 ‘두남매’라는 영화, 혹은 오래전 KBS 이산가족 찾기에서 몇십년 만에 상봉한 어느 남매의 정경에 느껴 울었던 기억의 영향 때문인지.
반딧불의 무덤.
부드러운 화선(畵線), 풍부한 색감(色感), 동화(動畵)의 아름다움은 실사영화에서는 맛볼수 없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영화적 미장센을 연출하였다.
그래서 오히려 그 안에 녹아있는 내러티브는 더욱 강렬한 컨트라스트로 오누이의 비극성을 배가(倍加)시켰다.
한편의 다큐멘타리를 찍듯 과장이나 감정의 과잉없이 시종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는 화면이었지만 그 냉정한 수법이 사람의 가슴을 더욱 저미게 하였다.
재차 보는 영상인데도 다시금 가슴이 먹먹하여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진다.
소이탄의 무시무시한 불덩어리와 반딧불의 가냘픈 불빛.
어머니를 죽이고 집을 잿더미로 만들어 졸지에 어린 오누이를 집도 절도 없는 천애고아(天涯孤兒)로 만든, 미군 폭격기에서 떨구는 소이탄의 무시무시한 불덩어리.
그리고 한마리 두마리 차츰 수십마리 무리지어 오누이 주위를 떠도는 반딧불의 작디작은 빛의 너울거림.
소이탄의 불덩어리가 광기의 군무(群舞)라면, 반딧불은 그 광기 속에서 짧은 생을 살다죽은 지극히 개별적인 목숨들의 은유(隱喩)일 것이다.
태평양전쟁 종장 무렵인 1945년 6월부터 종전직후인 9월사이, 그 3개월간 어느 오누이의 행적(行蹟)이 영화의 전부다.
“소화 28년 9월 21일 밤, 나는 죽었다”
일본의 어느 도시 역사(驛舍)의 기둥에 기대어 죽은 오라비 세이타의 독백에 이끌려 플래쉬백 기법의 화면은 3개월 전으로 돌아간다.
전쟁중이었지만 오누이는 행복하였을 것이다.
해군장교인 아버지가 멋진 제복을 입고 펼쳐지는 화려한 관함식, 자상한 어머니, 집.
그러나 소식없는 아버지는 필경 전사하였을 것이고, 폭격으로 어머니는 죽었고, 집은 불타 없어졌다.
세상에 단둘만이 남겨진 열네살짜리 오라비와 네 살짜리 누이, 세이타와 세츠코.
어린 누이에게 엄마의 죽음을 차마 알리지 못하는 열네살짜리 오라비... 친척집에 얹혀 사는 생활... 불타버린 집터의 땅속에 묻어놓았던 먹거리들... 어머니의 유품들...차츰 그것들이 떨어지자 친척의 눈매는 곱지 아니하여 진다... 엄마의 기모노를 팔아 쌀을 바꾼다는데 울부짖는 세츠코...기모노와 쌀... 쌀의 리얼리즘을 알리 없는 모르는 네 살짜리 세츠코의 어린 마음이 가엾어 눈물짖는 오라비...
노력봉사를 외면하고 오로지 누이만 챙기려 드는 세이타와 한밤중 엄마를 부르며 울부짖는 세츠코가 슬슬 미워지는 친척 아줌마.
그것은 국가적 위난 앞에서 오누이들만의 개별적 끈끈함이 견딜수 없는 친척아줌마의 집단적 이데올로기의 심사였을 게고 그 집단적 심사(心事)를 견뎌낼 재간은 오누이의 개별(個別)에게는 있을 리가 없다.
세짱. 우리끼리만 살자. 집단으로부터 도망가 우리끼리만 개별으로 살자꾸나.
집단으로부터 결별하여 그 집을 벗어나기로 오라비는 결심한다.
리어카를 끌며 작별인사를 하는 오누이에게 던지는 친척아줌마의 일본어 한마디의 그 억양이라니.
“사·요·나·라”
집단을 거부하는 개별에게 선언하는, 다소의 미안함과 단호한 거부와 후련함이 함축된, 집단의 이데올로기가 내뱉는 금속성(金屬聲)의 그 써늘한 인토네이션의 사·요·나·라.
폐광인지, 냇가의 동굴... 불탄 집터에서 가재도구를 주어다 동굴 속에 살림을 차리는 오누이...개선장군처럼 개별의 성(城)으로 입주하는 오누이.
그 장면에서 나는 연상한다.
세짱(세츠코), 비로소 우리는 자유라고 오래비는 외쳤을 것이고, 니짱(오빠), 비로소 나는 행복하다고 누이는 깔깔 웃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하늘은 푸르고 여름 신록은 무르익었고 오누이 개별의 자유는 엄청나게 행복하였을 것이다.
어느날 세츠코는 동굴 앞에 죽은 반딧불들을 파묻으며 작은 무덤을 만들고 있다.
“니짱, 엄마도 죽어 무덤에 있어. 아줌마가 얘기해 줬어.”
오라비는 흐느낀다.
저 쬐그만게 엄마가 죽은걸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저토록 시치미 떼고 있어야 하는 현실.
그 끔찍함이 사무쳐 오래비의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넘치고 주루룩 흘러 내린다.
반딧불의 무덤.
아, 하루 반짝 생명을 빛내다가 가뭇없이 사라지는 빛, 그 목숨들.
그러나 목숨이란 먹어야 사는 것.
식량은 차츰 바닥이 난다... 그리고 한여름 동굴 속은 사람이 살 곳이 아니다...해충은 창궐하여 작은 몸뚱이는 짓물러 터진다...전쟁의 정점에서 식량은 배급제...먹을 것이 급선무, 식량을 구하려 백방으로 뛰는 오라비...
안면이 있는 어느 농부아저씨가 충고한다.
“마을조직에 속해 있지 않으면 배급을 받을수 없어. 그 친척에게 용서를 구하고 다시 신세를 지게나”
그러나, 세이타는 추호도 집단으로 되돌아갈 생각은 없다.
집단을 살아갈 이데올로기의 훈련이 안된 누이, 세짱은 집단 속에서는 결코 행복할수 없음을 오라비는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이타는 남이 흘린걸 줍는다... 급기야 도둑질도 마다하지 않는다... 공습경보가 울리면 오래비는 거꾸로 주택가 쪽으로 냅다 뛴다...빈집에서 먹거리 입거리를 훔친다...누이에게 먹일수 있으므로 오라비는 환호한다...
그러나 점점 여위어 가는 세츠코.
어렵게 찾아간 의사도 고개를 젖는다.
영양섭취만이 약이라는 의사의 말에 세이타는 울부짖는다.
“어디에 영양이 있는데요!”
길가에 떨어진 얼음조각을 세츠코의 입에 대어주는 오래비...니짱. 배고파.헛소리하는 세츠코... 오뎅,초밥,초콜릿,아이스크림,사탕. 그래 사줄게 오빠가...
돌연 세츠코의 눈이 빛난다.
“아무것도 필요없어! 니짱! 아무데도 가지마! 아무데도!”
“아무데도 안가, 세짱. 약속할게.”
비로소 세츠코의 창백한 표정이 희미하게 웃는다
네 살짜리 세츠코의 연기(?)는 기가 막히게 훌륭하다.
더빙된 목소리 연기 또한.
네 살짜리의 귀여움과 천진함이 뚝뚝 흐르고 네 살짜리의 슬픔이 뚝뚝 흐른다.
실사영화에서의 배우는 연기를 하겠지만 애니메이션의 배우는 연기가 아니라 움직임 자체가 액츄어리티일수 밖에는 없어 가능한 연기일 것이다.
드디어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은 끝났다.
대일본제국은 패전하였고 연합함대 아버지의 순양함은 진작에 침몰하였음이 알려진다.
그리고 동굴 속에서 세츠코는 죽어간다
헛소리... 사탕통의 유리구슬을 밥이라고 빠는 굶주린 세츠코,.. 오래비는 울면서 수박 한조각을 입에 물려준다,... 누이는 맛있어.. 오래비는 곧 죽 쑤어 줄게....
“니짱, 고마워”
세츠코 입에서 흘러나온 마지막 말이다.
그리고 세츠코는 죽었다.
전쟁은 끝나고 여름은 무르익는다.
포탄을 피해 살아남은 사람들은 옛집으로 돌아온다.
어느 집 낡은 축음기에서 흘러 나오는 ‘홈 스위트홈’의 노래가 화면 가득 울린다.
오누이의 동굴에도 울리고 세츠코의 까르르하는 웃음소리에도 묻혀 흐르고 여름하늘에도 울린다.
동굴속 오래비는 죽은 누이 곁에 눕는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 뿐이리...
낡은 축음기에서 울려나오는 매끄럽지 않은 '홈 스위트홈' 사운드와 동굴 속 굶어죽은 죽은 누이와 그 곁에 누운 오라비...
얼마나 기막힌 파라독스인지...
가슴이 먹먹하여 도무지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세이타는 석유를 구하고 절 한켠을 빌려 장작을 쌓아 누이를 태운다.
조그만 몸뚱이가 탄다
불티가 나른다.
소이탄의 무시무시한 불꽃이 아니라 반딧불의 가냘프고 부드러운 빛이 너울거린다.
세츠코의 뻣조각을 늘 누이가 좋아하였던 사탕 통에다 담는다.
오라비의 눈에 세짱이 저 편에서 뛰어온다.
어깨를 감싼 파란 무늬의 세모꼴 모자(아마 일본의 방폭용 의상인지)를 쓴 세츠코.
벤치에 앉은 오래비 무릎을 메고 눕는다.
무릎을 베고 잠이 드는 누이.
오누이.
열네살짜리 중학교 3년생인 오빠 세이타와 네살짜리 누이동생 세츠코.
세상 천지에 전적인 사랑과 신뢰는 오로지 오누이 사이에서만 존재하였었는데 그 세짱은 죽고 이제 오라비만 남겨진 것이다.
누이가 죽었으니 세상은 무너졌고 이제 오라비는 세상에 살아있을 근거가 없다.
역사(驛舍)의 기둥에 기대어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세이타.
역사에는 그 외에도 여럿의 남루한 소년 세이타들이 있다.
역무원은 무슨 곤충을 찔러보듯 죽었나 살았나 걸렛대로 쿡쿡 찔러본다.
사람들은 그들을 피하여 지나가면서 창피해 한다.
“곧 미군이 올텐데, 이런 꼴이라니. 쯧쯧”
그들은 불과 두어달 전에 폭격의 불바다 속에서 “덴노 헤이카 반자이!”를 외쳤던 바로 그 광기의 집단과 동일한 집단이다.
전후(戰後), 그 집단은 죽어가는 세이타들을 위하여 사회적장치를 마련해야 할터이지만 그러한 의도조차 있지 아니 하였던 것이다.
집단의 거짓과 형식과 위선과·이기와 비정과 광기.
그 집단에 순응하지 않고서는 살아낼수 없는 지극히 개별적인 목숨들, 그들은 죽어야 한다.
집단에서 벗어난 가여운 개별들은 살 여지가 없다.
전쟁 속에서 그 개별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는 사회적 장치란 어디에도 없다.
아아, 오싹 소름이 돋는다.
이 영화에 대하여 혹자(或者)는 불쌍한 고아남매를 내세워, 우리도 전쟁의 피해자라고 전쟁 책임을 회피하려는 교활한 일본의 음모가 숨겨져 있다고 공격한다고 한다.
참으로 가슴이 없는 사람들이다.
바로 눈 앞에서 펼쳐지는 저 오누이의 비극 너머 배후에서 몽롱한 목적과 이념을 찾아내려는 그들의 영혼.
그것은 그들이 공격하고자 하는 바로 그 극우적 이데올로기가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영혼이다.
일제 36년, 독립(獨立)의 개념없이 그 시절을 살아냈다고 친일(親日)로 폄훼하는 반일주의자도 마찬가지다.
모두 백범처럼 이봉창처럼 윤봉길처럼 시대를 살아내야 했었단 말가.
그들에게는 개별적인 목숨이 한 시대를 사는 그 ‘삶의 자리’를 들여다 볼수 있는 가슴이 없다.
집단의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어 있을 뿐이다.
수년전 김선일씨가 이라크의 테러집단에게 살해당했을 때.
테러집단이 공개한 영상에서 살려 달라는 취지의 서툰 영어의 부르짖음에 대하여 어떤 목사가 쯧쯧 혀를 차면서 설교하였다고 한다.
“얼마나 귀중한 기회인데 저렇게 비굴한 크리스찬의 모습운운.. 스태판처럼 당당하게 순교하고 천당가지... 나같으면... 어쩌구저쩌구..”
나는 분노 때문에 몸이 떨렸다.
그 목사는 종교적 도그마에 매몰된 집단 이데올로기의 사람이지, 결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은 아니다.
그 때문에 그 목사와 아무 상관없는 교회라지만, 교회는 내게서 더욱 멀어졌다.
니짱! 니짱!
두 발을 동동 구르며 오라비를 부르는 세짱의 모습과 목소리가 눈에 선하고 귀에 선하다.
반딧불의 무덤.
또 가슴이 에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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