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어둠 속의 댄서 (Dancer in the Dark) (1,4,3,3)

카지모도 2019. 9. 25. 0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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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잡설-

 

<어둠 속의 댄서 (Dancer in the Dark)>

2005년 12월 1일

 

 

제작년도 : 2000년

감독 : 라스 폰 트리에

출연 : 비요크, 까뜨린느 드뇌브, 데이비드 모스

 

영화의 마지막 시퀜스, 형장(刑場).

두건은 벗겨졌지만 올가미는 벌써부터 목에 감겨 있다.

“진! 진!”

셀마는 절규하며 아들의 이름을 부른다.

곧 처형 당할 여인의 돌연한 몸부림에 술렁거리는 사형장.

참관인석의 캐시, 그 광경을 보다 못하여 간수를 뿌리치고 형장으로 달려 들어간다.

진이 쓰고 있던 안경을 사형수의 손에 쥐어 주며 숨가쁘게 속삭인다.

“진이 담 밖에 있어”

셀마는 깨닫는다.

아들은 이제 장님이 되지 않는다.

수술은 성공하였고 지금 가까운 곳에 아들은 있다.

두렵지 않다. 이제 두렵지 않다.

셀마의 얼굴에 천진한 표정이 되살아난다.

이윽고.

조그마한 입술이 노래를 부른다.

영혼을 쥐어짜듯 절창이다.

“얘야, 이게 마지막이 아니란다. . 빵은 종이에 싸 보관하고..엄마 말을 명심하거라..”

노래는 끝나지 아니하였는데.

덜컹!

발판이 곧장 아래로 내리 꽂히듯 떨어진다.

목숨의 끊어짐이란 순식간.

늘어져 죽은 자그마한 몸뚱이.

간수가 커텐을 쳐 죽은 여인을 가린다.

카메라는 PAN하여 서서히 위로 올라가면서 엔딩 크레딧이 떠오른다.

 

그렇다.

카메라가 서서히 올라가 차츰 조감(鳥瞰)의 구도가 되면 이제 뮤지컬은 종장에 접어 든 것이다.

영화의 끝을 보는 것이 두렵고 싫은 셀마.

고향 체코에서 뮤지컬의 종장을 맞지 않는 방법을 그녀는 알고 있었지.

카메라가 Pan하여 서서히 올라갈 때 좌석에서 일어나 극장문을 나서 버리면 돼. 그러면 뮤지컬의 노래는 영원히 계속되거든.

목에 올가미를 건채 부르는 셀마의 노래는 마지막 레파토리가 아니다.

셀마가 극장문을 밀고 이미 나가 버렸으므로.

셀마의 노래는, 뮤지컬은 아직 끝나지 아니하였다.

속절없이 내 가슴 속에서만 남아 사무치도록 맴돌고 있다. 

 

셀마 제스코바.

어여쁘고 애잔한 그 캐릭터는 놀랍도록 인상적이다.

주인공 비요크는 영화 출연이 처음인 아이슬란드의 가수라는데 셀마라는 캐릭터를 선연하게 부각시켰다.

자그마한 체구, 두터운 렌즈 속 영리하고 착하게 웃는 눈의 표정.

작은 코와 작은 입술.

그 아래의 턱 선은 단아하여 동양적이다.

열살짜리 아들을 두고 있는 젊은 엄마라지만 혀를 낼름 내밀며 웃는다.

그 표정과 모습은 솜털 보송보송한 소녀의 면모 약여하여 달콤한 유취(乳臭)를 맡을 것만 같다.

목소리와 말투 또한 천진하고 낙천적이다. (영어해독이 형편없는 내게도 그것은 느껴지더라)

나긋나긋하다. 단정하다. 착하고 긍정적이다. 

무구한 캐릭터, 셀마.

 

그토록 힘든 삶의 일상 속에서 셀마는 오히려 캐시의 우울한 표정을 향하여 묻는다.

“왜 웃는 표정이 아니에요?”

(참, 캐시역의 까뜨린느 드뇌브는 이 영화의 부록이었다. 옛날 나의 아프로디테는 나이 먹어 나타났지만 그녀는 여적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녀는 비록 절망적 순간에서라도 다른 사람 앞에서는 절망의 표정을 짓지 않는다.

유일한 수입원인 공장에서 해고되었을 때에도. 심지어 목숨같이 모은 2천달라가 없어진 것을 알았을 때에도.

스스로에게는 그토록 엄격하고 단호하면서도.

외유내강.

누구라 셀마 제스코바를 좋아하지 않을수 있겠는가?  

 

뮤지컬 파트에서 비로소.

그녀는 고통을 드러내고 기쁨을 드러내고 즐거움을 드러낸다.

그녀는 고음의 갈라지는 음색으로 노래하며 지저귀고 또는 신음하고 혹은 절규한다.

뮤지컬에 이르러서야 화면의 자유분방한 흔들림은 멎는다.

카메라는 비로소 안정적인 시선을 갖지만 쇼트의 전환은 눈부시게 빠르고 기교적이다.

그리고 춤추고 노래하는 비요크는 매력적이다.

헐리웃 뮤지컬과는 어딘가 다르다.

다큐멘터리 촬영기법으로 핸드헬드 카메라에 의하여 묘사되는 비극성의 액츄얼리티.

고정된 시선으로 묘사되는 뮤지컬파트.

그 두 컨트라스트의 대비감.

셀마의 현실은 뮤지컬에서 위로받고 치유되고 구원된다.

 

공장 작업장의 뮤지컬.

금형 압착기는 철커덕 거리는 괴물, 까딱 잘못하다간 손이 잘려 나간다.

뮤지컬에서 셀마에게는 공장안 온갖 소음은 리듬이 된다.

두 팔을 번갈아 이쪽 저쪽의 기계들을 가르키면서 꽈르릉, 철컥, 하며 기계가 내는 의성어의 가사로 노래하는 그녀의 목소리와 춤에서 나는 잠시 자지러졌다. 비요크의 매력에.

남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보이지 않는 눈으로 일하는 셀마, 남보다 몇배나 고통스러운 노동의 괴로움은 위로 받는다.

 

철로에서의 뮤지컬.

볼게 무어 있어요? 난 모든걸 보았어요. 과거는 이미 보았고 미래의 모습도 알고 있지요..물을 보았으니 나이아가라는 보지 않아도 돼요...나는 이대로 행복해요.

해고되어 미래가 아득한 현실 속에서 눈이 점점 보이지 않는 육체적 고통을 스스로 치유하는 셀마.

 

빌을 살해하고 연이어지는 뮤지컬.

눈물 한방울 떨어지는 시간..뱀이 허물 벗는 시간..나를 용서하는데 그 시간이면 될까요..

살인을 저지른 그녀의 죄의식은 용서받아 치유된다.

살해된 빌로 부터도, 그의 아내 린다로 부터도, 아들 진으로부터도.

 

독방의 고요가 너무나 견디기 힘든 셀마.

"Sound of Music"의 유명한 뮤지컬넘버 "My Favorite Thing"을 부른다.

처연한 음색, 반주도 없다.

이 장면에서 동경의 내 친구는 손수건을 눈에 대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도 울었다.

 

대드맨 워킹이라고 하던가.

형장으로 가는 107걸음의 행진.

여간수가 발을 굴려 들려주는 행진곡 풍의 리듬속에서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고 다른 죄수들의 위로가 되며 형장에 이르는 셀마.

이 뮤지컬파트에서도 나는 울었다.

 

그런데.

셀마에게 살해 당한 빌의 캐릭터는 참 모호하다.

셀마의 목숨같은 돈을 훔치고, 그것을 찾아가려는 그녀에게서 다시 뺏으려 하고, 빼앗기지 않으려는 그녀로 하여금 스스로를 죽이도록 만든다.

내용은 자살이고 형식이 피살일 뿐이다.

파산한 경찰관, 아내를 사랑하여 그 사실이 알려지는게 무엇보다 두려운 인물이라는 당위를 설정하여 끝내 셀마에게 누명을 씌어가며 죽어간다. 

장황한 이 시퀜스에서 감독은 빌은 악인이 아니노라고 억지로 강변하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의 내러티브는 지극히 단순하여 보기에 따라서는 신파적이다.

복선을 만들어 정교한 극적 장치를 마련하는 따위가 이 영화에서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빌을 악인으로 단순화 시켜버리지 않은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그러고보니 이 드라마에 진짜배기 악역이란 아무도 등장하지 않는다.

빌이 그렇거니와 셀마를 해고하는 공장의 감독도, 2천달러를 챙기는 의사도, 경찰에 신고하는 빌의 아내 린다도, 악역이 어울릴법한 여간수의 역할은 오히려 감동적이었지.

 

비극적 드라마 트루기에서는 악역의 존재가 반드시 장치되어야 하는가.

비극은 타인에 의하여 그 씨앗이 잉태되는 것인가.

아니다.

유전적으로 눈이 멀어가는 셀마의 질병과 가난은 운명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의 근본적인 비극성이란 셀마 스스로에 의하여 창조된 것이다.

 

사형집행전 그녀를 사랑하는 제프의 마지막 면회.

눈꼬리에 눈물을 달고 제프는 묻는다.

“왜 진을 낳았나요? 당신처럼 될줄 알면서”

해맑은 표정으로 셀마는 대답한다.

“안아 보고 싶었어요... 내 품에”

고통을 조건으로 선택한 기쁨의 아들.

선택의 대가로서 수렴해야 할 그 비극성은 말할수 없는 단호함과 엄격함으로 끌어 안아야 할 셀마만의 몫이다.

 

그러므로 빌을 미워하는 따위에 마음을 기울이지 말라. 산만해진다.

셀마의 몫인 셀마의 그 비극만을 보아라.

그리하여 울어라.

“감옥에서 썩을 눈먼 여인(셀마 자신)에게 왜 그 돈을 써야해요?”

아들 눈의 광명과 바꿔야 하는 단돈 2천달러의 변호사 비용.

그 때문에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는 모성의 당위성이나 현실적인 논리구조의 결함 따위는 는 적어도 이 영화에서는 논할 대상이 아니다.

2천달러를 변호사에게 지불하여 형집행이 유예되는 것과 그 돈이 변호사에게 지불된다면 아들의 눈은 멀게 된다는, 그 양자택일만이 셀마의 실존적 선택이고 그것이 고통을 조건으로 선택한 ‘진’의 어머니 ‘셀마’라는 어머니의 캐릭터인 것이다.

영화에 있어서 이른바 신파적 통속성이란 어떤 영상적 논리성의 결함을 극복해 내지 못하여 감정과잉에 의존하는 역부족의 공간에서 드러나는 것이지, 내러티브의 논리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

 

화면은 잠시도 멈춰져 있지 않는다. 끊임없이 움직인다. 한 시퀀스의 쇼트는 줌(zoom)을 자유로이 구사한 클로즈업을 주로 사용한 짧고 역동적인 것이어서 신(scene)의 구분도 모호하다.

거칠고 현장성있는 다큐멘터리적 사실감을 지향한다.

진부할 틈이 없다.

비극의 카타르시스는 그것을 만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몫이다.

 

라스 폰 트리에.

무척이나 머리를 굴리고 심혈을 기울여, 장치를 마련하고 특유의 스타일을 구사하여 ‘어둠 속의 댄서’, 셀마의 영화, 비요크의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는 내게 말한다.

영화 속 셀마를 봐라, 느껴라, 겪어라.

그녀에게서 정서적 충격을 받으라.

그리고 울어라.

가여움에 가슴이 답답하여 울거라. 

이는 단순하고 순결한 슬픔일지니, 필경 눈물을 쏟아 낼지어다.

내러티브의 논리를 더듬고, 극적 당위성을 대입시키느라 왼쪽 뇌를 가동하여, 울지 않으려고 깨무는 아랫 입술의 똥폼은 정색을 하고 내 비웃어 주마.

울거라.

그래서 나는 울었다. 많이.

 

이제 내게.

나스타샤 킨스키의 ‘테스’(로만 폴란스키 감독)와 더불어 비요크의 ‘셀마’는 잊혀지지 않는 아름답고 가여운 연민의 연인이 되었다. 

영국 워섹스 장대한 풍광속에 원경의 롱쇼트로 잡은 테스는 서정의 애잔함으로, 고정되지 않고 거친 핸드헬드 카메라가 잡은 짧은 쇼트의 클로즈업으로 이루어진 셀마는 리얼리틱한 아린 애잔함으로.

들 다 어여쁘고 가여워 가슴이 답답하고 아프다, 눈물이 흐른다.

 

이 영화를 적극 권하여 준 동경의 친구여.

고맙네.

모처럼 나 또한 울었다네.

그리고 나 역시 비요크에 숨이 막혀 한동안 서성였다네.

 

셀마여.

그대의 아들 진은 이제 밝은 눈으로 아메리카의 행복을 맘껏 누리고 있나니, 모쪼록 그대가 주인공 마리아인 Sound of Music 뮤지컬에서 노래하고 춤추라.

 

셀마 제스코바.

편히 잠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