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오래된 정원 1,2,3,4 (1,4,3,3)

카지모도 2019. 9. 25. 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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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오래된 정원> -1-

-황석영 作-

 

***동우***

2014.02.22.

 

황석영의 장편소설 ‘'오래된 정원’ 연재 시작합니다.

20회 남짓으로 나누어 질 듯 합니다.

한회분 읽거리 분량이 좀 많은듯 하지만 저자의 에스프리와 입담과 문학적 기교, 그리고 감동을 동반한 재미로 수월하게 읽히리라 생각합니다.

더불어 작가가 천착하는 시대상의 속살과 역사 문화 사상적 지식.

함께 느끼면서 삶과 시대에 대한 생각의 외연 확장을 꾀함직도 하구요.

 

작가 황석영의 5년여 옥살이.

[나는 아직도 이 넓고 큰 공간을 막힘없이 걷는데 자신이 없었다.]

18년 감옥에서 풀려나는 오현우의 심리묘사는 거기에서 우러나온 리얼리즘일겝니다.

그리고 서정성.

아이스크림 맛에 대한 묘사.

[입 안에서 차가운 액체로 녹아 내리면서 무슨 그림같이 열린 창가에 나부끼는 작은 꽃이 프린트 된 포플린 커튼이며, 창 넘어로 불어 들어오는 아카시아 꽃의 향내며, 잉잉거리며 유리창을 오르내리는 꿀벌의 나른한 날개짓 소리며, 하는 것들이 지나갔다.]

어머니가 지니고있게 한 부적.

[과학하는 자가 부적이 무엇이냐고 차마 짜증내며 버리지 못한 것은 어머니는 논리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래 이제는 그것들을 버릴까부다.]

 

그러나 18년, 옥에서 풀려난 오현우에게 어머니도 한윤희도 없습니다.

18년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닙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저 동지와 저 깃발은...

 

함께 읽으면서 차츰 지껄이지요.

 

***홍애(虹厓)***

2014.02.24.

 

감옥 부분 꼼꼼히 읽고 ㅎㅎㅎ

그 후는 잘 못 읽습니다 (컴에서 긴 글 읽기 힘든 부실한..ㅎㅎㅎ, 눈)

책으로 볼 거 찜해 둡니다 ^^

 

***jamie***

2014.03.20

 

영화로 보았는데...책과는 전혀 다른 작품이었군요.

황석영님의 글 맛이 참 좋습니다.

아이스크림 맛의 묘사, 산뜻하네요.

그래서 좋은 작가분은 다른가 봅니다...

한가지, 머리 속에 자꾸 드는 생각... 소설 속 조카 정근이가 다섯 살 무렵 감옥에 갔고, 지금은 스물 셋일 그가 군대도 마치고 벌써 출근을 하나...대학을 가지 않았나...

이렇게 궁금해하며 1 장을 읽었습니다. ㅋㅋ.

 

노루님, 이 글들을 타이프해서 올리시는 건 아니시죠? 저...이런 것도 쓸데없이 궁금해요,ㅎㅎ. 덕분에 좋은 글 읽게되어 고맙습니다!

 

***동우***

2014.03.20.

 

오랜만입니다, 제이미님.

꽃샘 강설(降雪).

제이미님 댁에서 훔쳐본 설경의 버지니아의 봄 숲, 색다른 아름다움이더군요.

 

황석영의 글맛을 느끼시는 제이미님.

제이미님의 예리한 분석의 눈.

글맛에만 속지 않으시고 서사의 디테일한 사실의 모순을 간과하지 않으시는군요.

그리고, 제이미님.

독수리 타법 겨우 면한 타이핑솜씨에 이걸 어떻게 자판 두드리겠어요? (제이미님의 오타. 노루님....ㅎㅎ)

copy and paste, 텍스트 파일 복사하여 붙여넣기.

오로지 손가락 놀림이지요.ㅎㅎ

 

읽어주셔 고맙습니다.

 

***jamie***

2014.03.20.

 

어머 어째요, 이런 실레를~

ㅎㅎ 죄송합니다, <동우>님.

<동우>님과 노루님...

<동우>님은 문학에 관한 좋은 글을 올려주시고, 미국에 사시는 노루님도 독서를 많이 하는 교수님이셔서, 두 분이 제게 지적인 자극과 배움을 주시죠.

두 분의 이미지가 제게는 아주 비슷하게 각인되어 있어서 제가 이렇게 이름을 바꿔쓰는 실례를 천연덕스럽게 저지르는군요.

언젠가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 또한 착각일까요, ㅎㅎ.

이 겨울 블로그를 멀리하다가 오랜만에 <동우>님 올려주신 글을 읽으며...무의식적으로, 노루님도 찾아뵈야지...생각했던 것 같아요.

앞으로는, <동우>님이라 쓸때 각별히 더 신경쓰도록 주의하겠습니다~

(근데요...제가 요즘 건망증도 심해져서요, 코르도바란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대신 코펜하겐을 붙들고 마음 속에서 한나절을 서성이기도 하고...좀 수상하긴 해요. 오래된 정원의 주인공처럼, 언어 기호가 이따금 뒤섞이는 걸 깨닫고 있답니다....문제예요, ㅎㅎ)

 

***동우***

2014.03.21.

 

무슨 죄송까지나.

그건 건망증도 아니고 순간의 착각.

나도 자주 그랬어요.

캘리포니아의 티팟님께 몇번인가 은비님이라고 칭하였지요.

서로 하하 웃었어요.

노루님과 동렬로 생각하셨다니 오히려 영광이랍니다.ㅎ

 

***동우***

2014.02.23.

 

로자 룩셈부르크..런던..맑스..레닌.. 볼세비키.. 지바고.. 피델과 체.. 태백산맥.. 지리산.. 빨치산.. 시장과 전장.. 기훈이..지영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로베르토.. 마리아.. 사르트르.. 벽..

 

옆길로.

물들인 군복..군화.. 까치집 머리.. 빈 강의실의 잠자리.. 얻어 떼우는 끼니.. 캠퍼스의 배가본드.. 지지리 가난뱅이.. 요상무쌍한 철학적 폼잡기..

그 헛폼에 자칫 껍벅 빠져버리는 여학생.

있을까, 요즘도.

그때는 있었다.

허긴 그 시절에는 개천에서도 흔히 용이 났으니까.

으흠, 요즘에사 어디, ㅎㅎ

 

***홍애(虹厓)***

2014.02.24.

 

요즘이야, 성형, 복근, 억대 연봉. 성희롱이 있지요

 

***노루***

2014.03.01.

 

얼마 전에 동우님께서 eunbee님 블로그에서 제게 '오래된 정원'을 추천해주셨는데 여기서 이렇게 읽을 수 있으니 너무 좋습니다.

벌써 (1), (2)는 다 읽고 지금 이 포스팅을 반쯤 읽다가 나갑니다.

재미있네요. 평소 생각이 안 나던 (자동차의) '앞등'이나 처음 보는 것 같은 '창경,' 우리 말 단어 공부도 되고요.

 

동우님 고맙습니다.

끝까지 다 읽을 생각입니다.

덕분에, 이렇게 즐길 시간들이 앞에서 기다리고 있네요. ㅎ

 

***동우***

2014.03.01.

 

반갑습니다, 노루님.

어줍잖게 올리는 소설.

즐겨 읽어주신다니 실로 보람을 느낍니다.

 

새삼 느끼건대, 인터넷은 기적입니다.

태평양 건너 멀리 상거한 미국과 한국 땅에서 거의 실시간으로 이렇게 교유할수 있다는 사실.

(교수님께서는 나보다 다소 연배이실런지..) 옛날을 떠올리면 실로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수 없습니다.

단편적인 외마디 안부정도로 만족해야했던 그 비싼 국제전화라던가 전보를 생각하면.. 마음 담긴 긴 사연의 글월을 받으려면 얼마나 긴 날을 기다려야 했던지.

 

인문을 천착하시고 테니스와 산을 즐기시는 교수님의 면모는 진작 뵈었지만, 앞으로 자주 들르겠습니다.

교수님의 자취, 기뻤습니다.

 

***노루***

2014.03.01.

 

반가워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사실 타자도 너무 느리고 해서, 좋은 블로그가 가까이에도 많은 걸 알면서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가만히 있곤 한 때가 많습니다. ㅎ

전에 한두 번 들어와서 목록을 보곤 놀라워했지요.

책 읽기를 좋아하다 보니 읽은 작품들도 꽤 있었지만, 그런 것들은 또 그래서 반갑더군요.

은희경의 '아내의 상자'니, 마침 그 무렵 원문을 읽었던, 찰스 램의 '정년 퇴직자' 같은 제목들이 지금 떠오르네요. ('정년 퇴직자'는 좋은 번역이었는데 제목은, 원제가 'The Superannuated Man'(퇴직 당한 사람)이니, '퇴직자'가 더 좋았을텐데, 했던 기억도요. ㅎ)

 

하여튼, 해외에서 쉽게 접하기 어려운 우리 책들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굉장히 고마운 일이지요.

동우님께서 큰 봉사를 하십니다.

 

ㅎ ㅎ 연배는, eunbee 님이며, 다 비슷하네요. 동우님보다 두어해 연배랄까.

그리고 아직까지 '교수'라고 불러주시지만, 은퇴한 지도 4년이 지났고, 그냥 별명이 편하고 좋은데요. 노루라고 불러주세요. ㅎ

 

***동우***

2014.03.02.

 

노루님.

은비님 댁에서 역량 훔쳐보아 익히 느끼는 바.

은퇴하셨으니 이제 미국의 좋은 책들 번역하여 우리나라에 소개하시는데 역량 기울이신다면 어떨까..

여쭈어 권하는 바입니다.ㅎ

 

***jamie***

2014.03.20.

 

동우님과 노루님, 두 분이 여기서 만나셨네요.^^

제게 자극과 배움을 주시는 분들.

 

***동우***

2014.03.21.

 

하하, 제이미님.

어줍잖은 글들.

혹여 자극은 모르겠으되 배움을 드린다라니, 지나친 상찬 아니우? ㅎ

 

***홍애(虹厓)***

2014.02.24.

 

책으로 읽겠습니다.

읽었다고 생각하는데 안 읽은 책들

동우님 포스팅 덕분에 알게 됩니다. 분명히 ㅎㅎㅎ

 

***동우***

2014.02.25.

 

시력이 부실하신(ㅎㅎ 실례) 홍애님으로서는 긴 글은 종이 활자로 읽으셔야지요.

조박사님 내외분의 기승하신 책욕심으로도 당연히. (내가 홍애님께 명명해 드린 '멜라니아 지수' 기억하시지요? 가계비에서 차지하는 책구입비용의 비율. ㅎㅎ)

 

근데 홍애님.

요즘 내 글읽기는 7:3 정도로 P/C 화면의 글읽기가 종이책 읽기보다 압도적으로 우세합니다.

내 시력은 결코 홍애님보다 좋은 편 아닙니다만, 시력에 관하여는 포기해 버렸으니까요. (더 나빠져 봐야, 이제 나이도 있으려니와..)

눈이 피곤하지만 않으면 오케이, 선글라스 비슷한 덧안경 (전자파를 막아준다고 하는데 글쎄..)을 끼고서.

만성이 되서 그런지 별로 눈 피곤한줄도 몰라요. 나는. ㅎㅎ

 

***홍애(虹厓)***

2014.02.25.

 

그런 안경도 있나요?

저는 노안이 시작되면서 더 힘들군요

레이져 수술로 근시 수술을 한 눈이라, 이제야 되고 보니 수술해서 10년 안경없이 좀 편리했지, 돋보기는 더 빨리 끼게 되는 것 같아요.

이번에 감기 앓아 보니 제일 힘든 것도 눈이었고..

친정어머니가 망막 터져 시력 잃어버린 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 조심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동우님 눈 보호장치는 귀가 솔깃합니다

눈 쓰는 일 없이는 뭐 할 게 없는 저로서는 눈을 보호한다고 안 읽고 컴퓨터 안 하고 할 수도 없는--- 이건 감옥 ㅎㅎ-

사람이니.

 

우리집, 이번에도 책 짐으로 이삿짐이 무척이나 큽니다

이 책 다 가져가 놓을 장소도 없는데요

매일 고서점에서 책이 배달되고.. 남편에게 절대, 건드리지 않는 저만의 룰이라면 책 사는 거 뭐라고 안 하는 것인데요.

서로 그러다 보니, 집이 책창고 되면서 아늑한 서재는 저 멀리 달아나버리네요

 

요즘, 새벽에 일어나는 습관으로 바꾸고 있어요

몸이 좋아지면 그렇게 되고, 아침에 늦게 일어날 때는 역시 몸이 안 좋을 때.

아침형 인간이 맞네요. ㅎㅎㅎ 이게 나이들어 그런 것일수도 있겠죠?

 

***동우***

2014.02.26.

 

내 P/C용 덧안경.

광학적으루다 무슨 특별한 효험있는 물건은 아닌 것 같고 기만원짜리 코닥제품 색안경(안경에 덧씌우는 클립형)이에요.

 

책창고.

학자들이야 본시 책 속에 파묻혀 책냄새 맡는게 그리 좋다하니.

아늑한 서재 아니면 어떠리오.

조교수님께는 오히려 책창고가 행복하시면 되지요.

그 많은 장서 분류하는 것만 해도 홍애님 사서 공부 따로 하셔야 할듯. ㅎ

 

***동우***

2014.02.25.

 

한윤희가 오현우에게 들려주는 자신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

 

저 무렵 남한 쪽의 긴박한 분위기.

한윤희의 얘기 속에서도 등장하지만 나 태어난 1947년은 좌우 대립이 가장 첨예하였던 해였을겁니다.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는 결정적 계기를 이룬 역사가 요동쳤던 한 해였지요.

건준.. 군정.. 3.1절 좌우익 충돌.. 우익의 민청(대한민주청년동맹).. 좌익의 국대안(서울대학교 설립안) 반대.. 북조 인민위원회 결성.. 노동당 당대회.. 조공(조선인민공화국)..오르그.. 환자트..(이병주의 지리산, 이태의 남부군, 조정래의 태백산맥, 지리산 사람들 등등을 통하여 귀에 익은 어휘들)

 

그리고 몇권의 책이 등장하는군요. (어떤 식으로든 저자가 유념한 책들이었을..)

이와나미 문고(보생의원 다락에 굴러다닌 문고본들..)

엥겔스의 '가족과 사유재산과 국가의 기원' (도서관에서 빌려다 본 적 있는데 내 수준으로 정독은 무리였고..)

괴테의 '젊은 벨텔의 슬픔' (이미 포스팅하였지요, 그런데 이 책이 커뮤니스트가 애독할만한 책이었는지..)

체홉의 '골짜기' (이것 끝내고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월북시인 이용악의 '낡은 집' (아래 댓글란에 이용악의 시 몇편 올립니다.)

 

불쌍한 사람들, 고향을 버린 사랍들, 유랑하는 사람들...

짙은 연민과 사랑과 슬픔은 인간성 본연에 깃든 감성일겁니다.

이념의 근본은 감정이지요.

그와 같은 감성이 차츰 증오로 무장된 단호한 이데올로기로 화(化)합니다.

생각건대, 그 계기는 집단화입니다.

개별이 이윽고 집단에 함몰되어 가는 감정모체의 변화 과정이 나는 늘 궁금합니다.

그건 인간성의 승화(昇華)일까요, 아니면 타락(墮落)일까요.

 

이용악의 아래 시(詩)에 이미 목표로 삼는 적(敵)이 내재되어 있습니까?

나는 별로 느껴지지 않습니다만.

 

내게는 한윤희처럼 내 아버지에 관한 단서의 꼬투리조차 없습니다.

할아버지 이종석과 할머니 손갑술, 그 슬하 장남인 아버지를 비롯하여 열명 가까운 자녀들.

그중 아버지 한사람만이 왼편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6.25 직전 아버지의 월북.

그것은 바로 우리 모두와의 영결(永訣)이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아버지를 더듬으려 예제 뒤적였지요.

그러나 아버지의 흔적 남아있는것은 극히 드물었고 (사진 몇장 정도) 어머니와 삼촌 고모들이 가지고 있을 기억들은 죄 입을 굳게 다문 조가비들이었지요.

필경 그 무렵 살벌하게 당했던 연좌 트라우마가 만든 일종의 방어기제였을 겁니다.

아버지라는 존재는 우리에게 있어서 금기(禁忌)의 영역으로 숨어버린 이름이었습니다.

 

어제 금강산에서 통곡하면서 부둥켜 안는 사람들.

그들을 보니 아지못할 서러움이 북받쳐 올랐습니다.

그들에게는 긴 세월 동안 증발되고 희석되어 추상이 되어 버리지 않았더군요.

내 아버지는 이런저런 책과 글과 풍문을 통해서 상상이 그려 낼수 밖에는 없는 추상의 아버지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내 상상 속의 당신께서는 그러나 강철같은 이념가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아아, 아니라면 용서하소서. 아버지.)

그리하여 자식놈은 그 추상의 아버지가 더욱 아프고 가여운가 봅니다.

 

***동우***

2014.02.25.

 

++++

낡은 집

- 이용악-

 

날로 밤으로

왕거미 줄치기에 분주한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이 집에 살았다는 백성들은

대대손손에 물려줄

은동곳도 산호관자도 갖지 못했느니라.

 

재를 넘어 무곡(貿穀 : 장사할 곡식을 사들임)을 다니던 당나귀

항구로 가는 콩실이에 늙은 둥글소(황소)

모두 없어진 지 오래

외양간엔 아직 초라한 내음새 그윽하다만

털보네 간 곳은 아모도 모른다.

 

찻길이 뇌이기 전

노루 멧돼지 쪽제비 이런 것들이

앞뒤 산을 마음 놓고 뛰어다니던 시절

털보의 세째아들은

나의 싸리말(싸리빗자루) 동무는

이 집 안방 짓두광주리(바느질 고리) 옆에서

첫울음을 울었다고 한다.

 

“털보네는 또 아들을 봤다우

송아지래도 불었으면 팔아나 먹지.”

마을 아낙네들은 무심코

차그운 이야기를 가을 냇물에 실어보냈다는

그날 밤

저릎등(등잔?)이 시름시름 타들어가고

소주에 취한 털보의 눈도 한층 붉더란다.

 

갓주지(갓쓴 주지라네요) 이야기와

무서운 절 가운데서 가난 속에서

나의 동무는 늘 마음졸이며 자랐다.

당나귀 몰고 간 애비 돌아오지 않는 밤.

노랑고양이 울어 울어

종시 잠 이루지 못한 밤이면

어미 분주히 일하는 방앗간 한 구석에서

나의 동무는

도토리의 꿈을 키웠다.

 

그가 아홉살 되던 해

사냥개 꿩을 쫓아다니는 겨울

이 집에 살던 일곱 식솔이

어데론지 사라지고 이튿날 아침

북쪽을 향한 발자옥만 눈 우에 떨고 있었다.

 

더러는 오랑캐령쪽으로 갔으리라고

더러는 아라사로 갔으리라고

이웃 늙은이들은

모두 무서운 곳을 짚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제철마다 먹음직한 열매

탐스럽게 열던 살구

살구나무도 글거리(그루터기)만 남았길래

꽃피는 철이 와도 가도 뒤울 안에

꿀벌 하나 날아들지 않는다.

(시집 '낡은 집' 1938)

++++

 

++++

전라도 가시내

-이용악-

 

알룩조개에 입맞추며 자랐나

눈이 바다처럼 푸를 뿐더러 까무스레한 네 얼골

가시내야

나는 발을 얼구며

무쇠다리를 건너온 함경도 사내

 

바람소리도 호개(胡歌)도 인전 무섭지 않다만

어드운 등불 밑 안개처럼 자욱한 시름을 달게 마시련다만

어디서 흉참한 기별이 뛰어들 것만 같애

두터운 벽도 이웃도 못미더운 북간도 술막

 

온갖 방자의 말을 품고 왔다

눈포래를 뚫고 왔다

가시내야

너의 가슴 그늘진 숲속을 기어간 오솔길을 나는 헤매이자

술을 부어 남실남실 술을 따르어

가난한 이야기에 고이 잠거다오

 

네 두만강을 건너왔다는 석 달 전이면

단풍이 물들어 천리 천리 또 천리 산마다 불탔을 겐데

그래두 외로워서 슬퍼서 초마폭으로 얼굴을 가렸더냐

두 낮 두 밤을 두루미처럼 울어 울어

불술기 구름 속을 달리는 양 유리창이 흐리더냐

 

차알삭 부서지는 파도소리에 취한 듯

때로 싸늘한 웃음이 소리없이 새기는 보조개

가시내야

울 듯 울 듯 울지 않는 전라도 가시내야

두어 마디 너의 사투리로 때아닌 봄을 불러줄께

손때 수집은 분홍댕기 휘 휘 날리며

잠깐 너의 나라로 돌아가거라

 

이윽고 얼음길이 맑으면

나는 눈포래 휘감아치는 벌판에 우줄우줄 나설 게다

노래도 없이 사라질 게다

자욱도 없이 사라질 게다

(시학, 1940.8)

++++

 

-계속-

 

 

 

<오래된 정원> -2-

 

***동우***

2014.02.26.

 

권력과 금력이 작금의 세상 거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는듯 하다.

그러나 그거ᅟᅡᆺ들은 교묘하게 위장되고 은폐되어 착한 표정을 짓고있다.

뉘라 쉽게 그 내막을 간파할수 있으랴.

집단자본과 집단권력의 시치메 뗀 저 불편 부당함을.

신자유주의는 법률과 정책과 제도를 버무려 우리의 인간성을 오도(誤導)하여 옳고그름의 잣대를 우리는 잃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 눈 앞의 소소한 것들에 대하여 우리의 잣대는 아직 유효하다.

힘센것 가진것들로 인하여 삶이 가난하고 인생이 서러운 사람들.

그들을 내 이웃처럼 연민하는 마음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부당한 것에 분노하고 억울한 것을 동정한다.

확신컨대 우리는 대부분 도덕적 인간형이다.

 

축적된 분노가 어떤 커다란 부당함에 맞닥뜨리게 되면 분노는 분연(奮然)하게 폭발한다.

그 분연함이 혁명아를 낳는다.

도덕적 인간형을 혁명적 인간형으로 변모케하는 동인(動因)은 분노다.

 

저들, 광주의 분노.

그 분노는 부당한 권력의 금압(禁壓) 앞에서 더욱 절절하게 끓고 있었다.

그렇지만 암담하였을 것이다.

분노만이 무기일뿐 오현우의 집단은 고독한 혁명집단이었다.

기댈 곳도 도움을 청할 곳도 없었다.

혁명의 방법론은 서툴기만 하고 가는 길은 깜깜하였지만, 비추이는 등불도 손을 잡아 끌어줄 인도자도 없었다.

 

저들은 거대사적 집단, 맑스와 레닌을 꿈꾸었을 것이다.

피델(카스트로)과 체(게바라)의 성공한 혁명을 그리워 하였을 것이다.

더불어 같은 민족인 북한을 들여다보아 학습하고자 했다고 해서 그게 그리 이상할 것 없다.

 

자연스레 발아하는 종북 좌파, 그 뿌리를 예서 본다. ('NL'이다 'PD'다 이석기다 RO다하는 것은 훗날 얘기다.)

종북 좌파의 모태.

나이브하게 말한다면 그것은 아마추어 혁명집단의 순정한 외로움이었다.

 

혁명적 인간형이 성장하여 성숙한 것이 그렇다면 사회주의적 인간형일까.

아닐 것이다.

혁명적 인간형에서 '순결'을 제거하면 혹 모를까..

혁명적 인간형과 사회주의적 인간형은 종자가 틀리는 것으로 나는 느껴진다.

 

사회주의적 인간들이 사회주의적 형식으로 사는 곳은 결코 샹글리라가 아니다.

오래된 정원은 오현우 혁명의 순결함이 꿈꾸는 곳에 있다.

갈뫼의 한윤희의 사랑, 그와 같은 곳에.

 

***동우***

2014.02.27.

 

한윤희는 떠나려는 남자의 머리카락을 잘라줍니다.

 

[음 솜씨가 괜찮은데.하면서 거울을 들고 머리를 이리저리 둘러보던 당신이 말했어요. 그런데 이건 뭐야. 반짝 반짝 하는게…. 면도날로 자르면 그래요. 보기 좋잖아. 머리에 별이 내려앉은 거 같애. 나는 당신의 등뒤에 무릎을 굽히고 반쯤 주저앉은 자세였고 당신은 내 앞에서 거울을 들고 보다 낮은 자세로 앉아 있어서 거울 속에는 우리의 얼굴이 위 아래로 떠올라 있었어요. 당신은 잠깐 말없이 거울을 들여다 보았어요. 어쩌면, 그건 내가 먼 훗날에 완성하게 될 우리 두 사람의 초상과도 같은 구도였지만. 당신이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누구나 머리가 단정하게 깔끔해지면 그건 변화를 의미해요. 일상도 그렇고 무엇보다도 복장이 바뀌게 되거든요. 당신은 슬그머니 거울을 내리고 이번에는 등뒤에 사실적으로 있던 나를 돌아다 보았어요. 나 곧 떠날게…. 가슴이 철렁했지요. 내가 먼저 이야기할 줄 알았는데. 우리 둘을 여기에 남겨두고 얼른 다녀오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요. 언제요? 모레나 글피쯤? 나는 신문지 위에 흐트러진 당신의 머리카락들을 손가락을 갈퀴처럼 펴서 그러모았어요. 앞과 뒤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모으니까 보기보다는 한 줌도 채 못되었지요. 내가 그걸 움켜쥐고 어떻게 했는지 알아요? 글쎄 아무 생각두 없이 밖으로 나가 아궁이의 양철판을 들치고 벌겋게 숯이 되어 남은 불 속에 조금씩 집어 던졌어요. 작은 불길이 확 오르면서 지지직 하고는 동물성이 타는 냄새가 났어요.]

 

두 사람의 시점을 교차적으로 교직하여 전개해 나가는 소설 서사의 서술방식.

암울하고 애틋한 갈뫼의 정경은 참 아름답습니다.

암울하고 어두운 감옥(시대상)의 정경은 참 스산합니다.

 

무릇 소설가들이 그렇지만, 황석영에게는 이야기를 끌고가는 근원적인 힘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황석영은 '황구라'로도 유명합니다. (입담이 좋다는 '구라'라는 속어, 다른 시쳇말로는 이빨이 쎄다고도 하지요. 소설가로서 축복받은 자질이 아닐수 없습니다.)

황구라와 함께 백기완 선생도 대한민국 3大 구라중 한분으로 꼽히지요. (또 한사람은 누구던가..)

얘기 난 김에 백기완 선생의 글 한편 올립니다. (작년인가 통진당 이정희 뒤에 후줄근하게 앉은 모습, 많이 늙으셨더군요. 선생의 순결한 기상과 기개, 정치꾼들은 이용할 생각들 말고 좀 내버려두면 좋겠습니다.)

 

++++

매 한마리

-백기완-

 

부러진 창끝을 부릅뜨고

죽어간 옛 장수의 여한

 

한아름 때리며 눈이 내린다

 

삭쟁이 울음은

이미 서산을 넘고

깡추위와 맞서다

참나무 얼어 터지는 새벽

 

천고의 신비를 자락마다

눈발은 여기서 저기서

천군 만마처럼 휘몰아치며

모든 날개짓을 거부할 때

모진 바람을 거슬러

치켜 뜬 매 한마리

둥지를 깬다

 

나아가자

모두를 매질하는

저 채찍을 헤쳐

거대한 무명의 치마폭인양

감겨오는 서러운 역사

 

한치 앞이 캄캄해도

천리안은 번뜩이고

마파람이 어기찰수록

외로히 어디로 가는가

매 한마리여

 

굽어보는 계곡을

가로질러

십이 선녀가

옥체를 씻었다는

선녀탕은 꽁꽁 얼어붙고

 

산을 등지고 물을 끼어

살터라던 화전민 오막살이

마실꾼 기침소리도

모두 잠들었는가

날짐승 들짐승마저

꿈쩍 않는

저∼ 매몰찬 눈보라속을

 

오,

장엄한 자여

사나운 부리는

굳게 다문채

우주의 양극을

틀어쥔 발톱

 

어깨짓 한사위로

모진 바람에 멀미진

지구를 데불고

서둘러 가는 곳은

그 어느메드냐

 

오, 장엄한 자여

세상의 속배들은

너를 다만

고독으로 불리우는

너의 자태

 

모두가 지쳤는테

침몰하는 하늘을 다스려

평화를 날개짖는

그곳은 도대체

어드메드냐

-80년ق월-

++++

 

++++

<매 한마리에 얽힌 이야기>

-백기완-

 

이 비나리는 감옥 안에서 죽음이 다가옴을 앞두고 내 인간적 기상을 을러댄 대표적인 것의 하나라고 자부해본다.

그때 윗층에 있던 시인 김지하는 운동을 나가다말고 몰래 내 방 철창을 붙잡고 말하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절대 안죽는다. 죽어서도 안된다. 이 분단의 수렁, 통일의 과제를 놓고 어찌 죽습니까"하고 격려를 하다가 자기 방으로 쫓겨 올라간 한 밤엔 통증이 왔다.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못견딜 다친 상처가 유독 눈이 내리고 우중충한 날이면 영락없이 드세진다. 꼭 죽을 것만 같았다.

이때 쓴 비나리가 대표적으로 두 편이 있는데 하나는 '달', 즉 뻔대머리라는 비나리로써 내 감상이 가냘프게 드러남으로써 내 인간적 약점을 폭로하고 있는 것이라면 내 혁명적 기상을 을러댄 것이 이 '매 한마리'가 아닌가 한다.

'부러진 창끝을 부릅뜨고/ 죽어간 옛장수의 여한처럼// 한 아름 때리며 눈이 내린다'라는 첫 대목을 살펴보자.

장수는 싸우다 죽어도 그 뿌러진 창끝은 영원히 죽지 않고 부릅뜨고 있거늘 몰아치는 눈보라 그에 맞서는 눈매는 바로 그 장수의 한, 천추에 맺힌 원한으로 보였던 것이 그때 내 심정이다.

날은 춥다. 그 추위가 영하 삼십도로만 내려가면 그 깡추위와 맞섰던 참나무는 얼어 터지는 법, 그리하여 눈보라는 천군 만마처럼 휘몰아치며 모든 날개짓(비상)을 거부할 때, 그 눈보라치는 방향을 거슬러 준매를 치켜뜬 매 한마리는 바로 그때 자기 둥지를 깨는 것이다.

왜, 모든 비상을 거부하는 저 폭풍은 바로 반역의 맞파람이라, 그것을 다스리지 않고 어찌 장수매가 등지에 쪼구리고 있을손가.

이리하여 매가 하늘에 떠 내려다보면 태백대간(태백산맥은 왜식이다. 대간은 산줄기란 우리말) 금강산, 십이선녀가 옥체를 씻었다는 선녀탕은 꽁꽁 얼어붙고 화전민 오막살이도 불이 꺼지고 모든 날짐승 들짐승이 추워 꼼짝 못하는 속을 흘로 고고히 높이 뜬 매 한마리.

그 사나운 부리는 굳게 다문채 억센 발톱으로는 우주의 양극을 틀어쥐었다. 그리고 어깨짓 한사위로는 모진 바람 제국주의 바람에 정신을 잃고 허우적대는 지구를 데불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 아, 그가 지금 가는 곳은 도대체가 어드메드냐. 해방의 나라가 아니겠는가.

이것을 모르고 세상의 소시민적 속물아치들은 그러한 매를 다만 외롭다 하지만 그는 지금 높이 떠 침몰하는 하늘, 즉 압제의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 것이다.그리하여 세상의 평화통일의 세계로 날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매 장산곶의 매도 이렇게 사는네 내가 감옥에서 죽을 수야 없지 않는가 해서 달군 나의 비나리란 말이다. 그러나 이 비나리도 사실은 까맣게 잊었었다. 그런데 한양대 김이영 박사가 내 입원중 어찌 보관했다가 내주었으니 그 고마움 잊지 못한다.

나는 이 비나리를 오늘의 삶에 시달리는 모든 고통받는 사람에게 주고 싶다. 매처럼 장산곶 매처럼 살라고. 그리고 그 매를 그림으로 빚기 위하여 애쓰는 이기연, 최병수 좀더 분발해 주기 바란다.

내 딸 미담이도 매일 장산곶매를 그리고 있는데 이 비나리는 그러한 젊은이들에게 격려는 안될까.

오, 이땅의 사람들이여 우리 장산곶 매처럼 우리 사십년 분단의 수렁을 박차고 저 매몰찬 반역의 폭풍을 거슬러 제국주의 역사를 다스려야 하지 않을까.

++++

 

***동우***

2014.02.28.

 

줄기차게 비 쏟아지는 밤입니다.

여자는 꼼꼼하게 남자의 짐을 챙겨 가방에 정돈해 담습니다.

그리고 물에 만 밥, 햇감자와 호박과 풋고추를 썰어넣은 된장찌개. 간고등어 무조림과 열무김치로 밥상차려 이별의 만찬을 나눕니다.

그 밤에 오현우는 한윤희를 남겨놓고 떠납니다.

바람에 펄럭이는 꽃무늬 포플린 치마와 빗물에 잠긴 맨발에 고무신 신은 여자의 모습이 차창너머로 점점 멀어집니다.

 

비오는 날이면 무기수 오현우는 감방의 창너머 저멀리 감나무 아래의 공간에 한윤희의 그 모습을 세워 놓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감옥속의 남자는 꿈 속에서 여자와 해후합니다.

 

[볼따구에 살두 봉봉히 붙구 눈매가 아주 부드러워졌는데. 너 무슨…연애 같은 거 하냐? 쓸데없는 소리 집어쳐.하고 그를 윽박질러서 입을 막았지만 나는 속으로 조금 놀랐다. 환쟁이들은 사람의 표정을 살피는게 버릇인 모양이다. 나는 그에게 갈뫼에서의 나날을 말해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고 애를 썼다.]

 

분노의 코드는 복수심이고, 복수심은 눈매를 날카롭게 하지요.

오래된 정원을 염원하는 눈매는 날카롭지 않습니다. 부드럽습니다.

생각건대, 갈뫼는 광주의 분노가 꿈꾸는 곳이 아니라 저 밥상과 꽃무늬 포플린 치마가 꿈꾸는 곳입니다.

 

비 퍼붓는 밤의 이별 장면.

“숨겨 줘. 재워 줘. 먹여 줘. 몸 줘... 왜 가니? 니가. 잘가라 이 바보야.”

반어적 표현의 이 세리프, 영화에서 한윤희(염정아)는 제법 쿨하였지요.

영화에서보다 소설속 한윤희는 다소곳하고 여성스럽습니다. (기는 좀 센 편이지만)

 

황석영은 왕년에 쌈꾼이기도 하였답니다.

그의 면모에서 나는 어딘가 마초적 기질같은걸 쬐끔 엿볼수 있지요. ㅎ

 

***홍애(虹厓)***

2014.02.28

 

황석영은 쌈꾼이기도 했고

여자도 좋아했고 (제주도에는 그가 한 때 연애하다가 버리고 간 여자 이야기도 있어서... 나쁜 남자로 소문나기도 하였지요)

황석영은 음식에도 각별한 취향이 있었던듯 합니다

그는 맛보고 느끼고 하는 것에 특별한 에너지를 발산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어느 책에서 그를 읽고 확 싫어졌던 기억이..

그의 음식 에세이를 보고 그랬을 겁니다.

가까이 하기 싫은 남자로서 ㅎㅎㅎ

 

***동우***

2014.03.01.

 

홍애님.

황석영의 음식기행인가, 그 책 나도 읽어보았습니다.

기억 흐릿하지만 김일성과의 식탁에 차려졌던 음식들....

 

얼마전 티브이 보니까 황석영 일흔쯤 되는 나이일텐데 장년처럼 보여요.

남자다운 생김생김, 여자들 많이 울렸을거예요.

홍애님. 그의 문학만 좋아합시다그려, ㅎㅎ

 

그리고 서승님의 '옥중 19년' 번역연재 시도하신 것.

아주 아주 잘 하신..

서승 서준식 서경식 삼형제...

함께 시대를 살았던 나를 부끄럽게 하는 전설같은 사람들.

얼마전 서승님이 홍애님댁 방문하여 ف박하면서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지요?

치열하게 한시대를 견디면서 화상으로 일그러진 그 분 속에 간직되어 있는 연한 아름다움에 감동하시고..

조교수님 부부와 서승님과의 돈독한 교유도 홍애님을 친구로 갖고 있는 나의 자랑이지요.

사회학자 조교수님과 '감옥사회학'의 서승님은 학문적 소통하는 바도 남다르리라고 생각됩니다.

정말 기대하면서 홍애님의 번역 '옥중19년' 읽으렵니다.

거듭 그 번역 기획은 정말 잘 하신 겁니다.

 

***동우***

2014.03.01.

 

[어미와 새끼는 왜 그런지 애처로워요. 자연은 이들을 그렇게 묶어 두었어요. 냉혹하지만 무심한 것이 하늘의 뜻이기도 하고. 그런데 이들도 때가 되면 가차없이 헤어지고 말지요. 사자 이야기를 했지만 사냥감인 들소 어미는 눈 앞에서 새끼가 물려 죽는 꼴을 멀찍이서 바라보다가 마지막 순간에 허공으로 쳐들린 다리의 경련이 멈추고나서 먹히기 시작하면 푸르륵 콧바람 소리를 내고는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떠나가요. 아아, 나는 그런 어미가 된 거예요.]

 

어미와 새끼.

어린 시절 길거리에서 흔히 광녀(狂女)를 만났습니다.

아이들 우우 따라다니면서 놀려대다가 미친여자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혼비백산 달아났어요.

그런데 길거리에서 미친 남자를 만난 기억은 전혀 없으니 참 이상도 하지요.

난리통의 참혹함 속에서는 왜 여자만 미쳐야 했을까요.

남자들은 전쟁통에 이래저래 죽어나갔고, 살다살다 못살겠으면 제 한 목숨 끊는 결단은 여자보다는 수월했을겁니다.

그렇지만 새끼 딸린 여자야 어디 쉽게 죽을수나 있나요.

그러니 새끼두고 차마 죽을수 없어 그만 미쳐버렸을겁니다. (이 얘기 전에 길게 지껄인적 있어 사설 그칩니다만..)

 

새끼와 하나로 묶인 어미는 세상에서 가장 늠름하지만, 그러면서도 어미와 새끼는 세상에서 가장 애긍(哀矜)한 존재론적 관계입니다. (새끼가 성장하면 필경 다른 개체로 분리될테지만 말입니다)

자본주의의 물적토대가 두 영역(경제영역과 자연영역)으로 분리(일과 생할의 분리)된 것의 근원은 바로 이것일겝니다.

 

[구치소에서의 그 칸막이. 시멘트의 상자 안에서도 미물들의 아름다움이 빛나고 나는 차츰 단단해졌다.]

무기수 오현우가 차츰 단단해 지는 것, 그것은 이념도 아니고 사유도 아닙니다.

기인 세월동안 오로지 살아내야 하는 그 방법론일겁니다.

아, 감옥은 교화(敎化)가 아니라 생존(生存)이 순치(馴致)되는 곳입니다.

홍애님은 '서승'님의 '옥중19년'을 번역 연재중인데, 서승님의 감옥은 이 소설의 감옥과 오버랩됩니다.

 

7,80년대 우리나라의 감옥은 파놉티콘의 합리적 요소보다는 관료적이고 감정적인 요소가 더 기승을 부린 곳이었습니다.

벤덤의 '파놉티콘'은 효율적이고 공리적인 감시시설의 건축개념을 말하는 것이라는데, 이 개념은 철학적 고찰의 대상으로 무한 확장되지요.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 (대충의 이해로)

북한의 인적 강압체계로 얽어맨.. 원시적 감시와 통제..

번호부여, 카메라의 눈, 인터넷 망, 정보화, 코드화... 세련된 감시와 통제.

어딘가에서 빈틈없이 번득이는 권력의 눈...

 

하하, 모자란 생각은 씨잘데기 없는 연상을 불러일으킵니다그려.

좋은 연휴를.

 

***홍애(虹厓)***

2014.03.02.

 

지금 깨어 있는 시간, 컴 앞에서 우리들의 공간인 블로그에서 함께 있습니다

흔치 않은 새벽의 데이트입니다 ^^

 

시멘트의 상자 안에서도 미물들의 아름다움을 빛나게 보는 눈, 이라는 문장을 보면서

시멘트 상자 안에서 죽어가는 생명을 단단하게 키우는 힘이야말로 문학적인 눈, 마음이 있을 때 만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스스로이든 동료이든, 마당에서 올라오는 잡초이든 그것을 어떻게 보는가에서 글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이 되니까요.

 

서승 선생님의 기록을 읽으며, 이 분 안에 깃든 문학적 힘이 이후 20년이 지나고서 그 시간을 글로 만들어낼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다는 그 분이 드셨던 봄날의 채소 된장국이 맛있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옥중 19년은, 보다 더 일찍 시작한 다른 책보다 읽기가 수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이 번역해 놓은 것으로 재빨리 읽는 것보다는 글자 하나하나 읽고 싶어져 시작해 보았습니다

당장은 일본어 책 밖에 없구요

 

서승선생님, 오셔서 하신 이야기 중에, 처음에 친척을 만났을 때 나중에 교사를 하게 된 사촌 동생 이야기도 흥미 있었습니다

집에 찾아갔더니 고등학교 학생 방에 교과서 밖에 없더랍니다

공부를 잘하던 친척이었는데도 교과서 만으로 만족하는 동생이 너무 충격이었답니다

두 번째 방문할 때는 삼성출판사 세계문학을 전집인가를 들고 갔다고 해요.

동생분도 그의 글에서 굉장한 독서의 향기가 묻어나오는데

선생님도 독서를 많이 하셨지요. 특히 감옥안에서는 ...

지금은 생산의 시기라서 ㅎㅎ 책을 꼼꼼히 읽기 어렵다며 그게 좀 안타까운 일이라 하셨어요

올해 말에는 딸애가 이곳에 오고, 함께 그 가족을 만나러 가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 번역은 무척이나 믿을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참고하시고 읽어주세요 ㅎㅎ

그리고 또, 친구에게만 공개하고 있는 <나와 닮은 사람>도 읽어 주세요 벌써 20회를 넘었습니다, ㅎㅎ

 

오늘은 이곳에 비가 옵니다

어제 하루는 이삿짐을 상자에 담았는데, 올 때 30킬로 짜리 10개 상자에 담아왔던 짐이

세 배쯤 늘었습니다

그 중 20 상자 이상이 책입니다. 남편의 연구용 자료와 새로 장만한 책만17 상자인가 16인가...

한 재산 가지고 갑니다만...ㅎㅎ

뭔가 막바지에 와서 버리고 갈 것, 버리고 갈 것 정리하려니 욕심이 너무 많게 사는 것 같습니다.

 

***동우***

2014.03.02.

 

30킬로 짜리 스무상자의 책.

학자에게 책보따리는 짊어지고 다녀야 하는 무슨 업(業)인가 봅니다.

일본서 그 한재산 마련하여 제주로 이사하는 홍애님 내외.. 그것도 욕심이라면 욕심이겠지요.ㅎㅎ

 

내 딸아이 세모녀도 어제 제주로 이사하였습니다.

부산의 아파트 팔리지 않아 빈집으로 문 잠궈 놓은채, 이제 제주주민이 된 것이지요.

큰녀석 비니는 송당초등학교 입학하여 제주의 생도가 되고.

내게 제주는 홍애님도 더불어, 이제 아주 가까운 곳이 되었어요.

 

-계속-

 

 

 

<오래된 정원> -3-

 

***동우***

2014.03.02.

 

아, 문득 깨닫는다.

시간의 덧없음이 곧 시간의 힘이라는걸.

그렇구나, 감옥이란 죄값을 시간의 힘에 의탁하는 곳이다.

 

춘란, 수박, 참새, 송장메뚜기, 쥐며느리, 사마귀, 귀뚜라미, 개구리, 쥐, 들고양이, 비둘기..

수인(囚人)의 시간 속에는 주변의 온갖 미물들이 수인의 무상함과 더불어 함께 산다.

 

[구치소에서의 그 칸막이. 시멘트의 상자 안에서도 미물들의 아름다움이 빛나고 나는 차츰 단단해졌다.]

 

홍애님은 또한 스스로 단단해지는 그 시간을 나중에 글로 만들어낼수 있는 문학적 힘을 말씀하시고...

감옥 밖이라고 다르랴, 이것도 시간의 힘이다.

 

[어떤 이는 초라하게 일상의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거나 욕망에 휩쓸렸고 당신 말대로 그맘때 남한 자본주의는 이미 재생산 구조를 갖추었어요. 통제는 받겠지만 내버려두어도 자기 깜냥대로 굴러가게끔 되었어요. 우리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어떻게 싸울 것인가를 놓고 교과서를 펼치며 입씨름 하다가 남들이 겪은 한 세기를 단 몇 년 동안에 거덜을 내버리고 말았답니다. 이것이 밖에서 진행된 나의 삶이었지요. 미안해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연하잖아요? 우리는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었는데 모두들 무대를 떠나 퇴장해버린 거예요.]

 

***jamie***

2014.03.21.

 

정붙일 곳이 필요하다...사람이건 동물이건, 나름 정을 붙이고 살아가지요.

그 결과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가장 엄살이 심하고요.

삼년을 사나 팔십년을 사나, 우주적 시간으로는 아무 차이가 없는데도 말입니다.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노력, 참으로 무모하기만 한 것 같지만, 그런 노력을 한 분들 덕분에

개미 눈꼽만큼씩만 바위를 벗겨내어도 결국 역사는 바뀌어 흘러가구요.

그런데 그 노력 속에 희생되어간 많은 사람들의 인생에는 얼마나 기막힌 소설들이 숨어있겠는지요...

재미나게 읽고 있습니다, 이 소설.

 

***동우***

2014.03.22.

 

그렇지요. 제이미님.

근세사 속에는 얼마나 많은, 소설 보다 기막힌 이야기들이 점철되어 있을까요.

역사 속에 맺힌 엄청난 피와 희생, 그것이 허망한 것들로 묻혀버린다면 인류는 한줌 희망도 없는 죄악의 호모 사피엔스일겁니다.

나는 비교적 역사적 낙관주의를 갖고 있는 편입니다.

근세의 비극은 엄청난 것이었지만 인류는 성숙하여 역사는 좀 더 단단해지지 않았을까하는. 내 손주들의 세상은 적어도 지금보다는 한결 성숙해질거라는 그런..

 

제이미님 재미나게 읽어주신다니, 기쁩니다.

 

***동우***

2014.03.03.

 

엉뚱한 끄적거림.

광장에 모여 깃발을 휘날리는 민중의 핏발선 눈이 역사를 발전케 하는가.

으흠, 진부한 명제다.

 

생각건대, 순정한 분노가 이념이라는 이름으로 군집하면 대체로 관료주의가 된다.

뿐더러 어떤 계기에서는 이념 속에서 계몽과 이성은 사라지고 곧잘 조급한 파토스적 광기가 집단을 지배한다,

명분과 효율과 성과에 매몰되어 그에 역행하는 모든 개별을 말살하려 하는 심리적 기제가 작동한다.

 

자코뱅, 스탈린, 킬링필드, 문화혁명, 북한...

집단과 개별의 조화.

좌와 우의 조화.

 

이성이 작용하는 힘.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jamie***

2014.03.21.

 

2008년 미국 월스트리트의 폭락 이후 미국 경제가 휘청이는 걸 피부로 느꼈지요. 저들은 항상 일반 대중의 머리 꼭대기 위에서 일을 꾸미며 돈을 긁어모으고 있더라구요.

그에 비하면 김씨가 군림하는 북한은 그야말로 부족사회죠.

양심과 도덕이 대우받는 사회를 만들어야 대부분의 구성원이 행복하게 살텐데...

역시 모든 일은 통일이 우선 돼야 해요.

이 소설 읽으며 잘 안 하던 생각들이 머리속에 궁시렁대네요.

책과는 달리 동우님이 끊어놓으신 챕터마다 계단참이 있어 숨고르며 책 읽으니 더 좋은데요~. 동우님 달아놓으신 주석 읽는 재미도 상당하구요.

 

***동우***

2014.03.22.

 

제이미님.

사회주의 블록 몰락후, 자본주의는 승리를 구가하였던 걸까요?

레이거노믹스 대처리즘의 신자유주의의 발호.

분명한 것은 자유방임 시장만능의 자본주의가 승리한 것은 아닙니다.

새로운 모색이 있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하하, 제이미님.

북한을 부족사회에 비유하셨는데. 동의할수 없습니다.

부족사회를 지배하는 가치는 혈연으로 뭉쳐진 개별적 결속의 안정감입니다.

북한사회는 전혀 아니지요.

경직된 이념이 정착한 관료주의에는 개별적 인간이 보이지 않습니다.

집체적인 집단만 보일뿐이지요.

강압적으로 뭉쳐진 덩어리,

그렇습니다.

통일은 북녘 동포의 개별적 해방입니다.

이루어져야지요.

 

진지하게 읽어주시는 제이미님께 감사를.

 

***동우***

2014.03.04.

 

한윤희는 사랑의 절망으로 별빛조차 암담하다.

오현우는 방송구에 재갈물린채 푸르던 날의 먹거리를 꿈꾼다.

그리고 은결이는 새롭다.

 

++++

별을 쫓아 주렴

이웃 개야,

별은 저렇게 까닭없이 조소하잖아,

개말이나 한 마디 해 주렴!

별에게 욕이라도 해 주고

날짐승처럼 쫓아 주렴,

별 자리 그림은 내게는 쓸데없는 것.

 

넌 이제 나의 개 별이야!

그만하면 이제는 충분하잖아

이 어두운 마을에 대해?

이 마음 눈감고 고통을 찾아

짓메어지도록 고통을 먹고…

 

배고프지 개야?

가라, 그리고 별을 물어 뜯어라!

별은 저 멀리 떠나가는데

까닭없이 이제는 울고 있는 나,

 

-크리스티네 롸반트-

++++

 

++++

새라면 좋겠네

물이라면 혹시나 바람이라면

 

여윈 알몸을 가둔 옷

푸른 빛이며 바다라면

바다의 한때나마 꿈일 수나마 있다면

 

가슴에 꽂히어 아프게 피 흐른다

굳어 버린 네모의 붉은 표지여 네가 없다면

네가 없다면

아아 죽어도 좋겠네

재 되어 흩날리는 운명이라도 나는 좋겠네

 

캄캄한 밤에 그토록

새벽이 오길 애가 타도록

기다리던 눈들에 흘러 넘치는 맑은 눈물들에

영롱한 나팔꽃 한 번이나마 어릴 수 있다면

햇살이 빛날 수만 있다면

 

꿈마다 먹구름 뚫고 열리던 새 푸른 하늘

쏟아지는 햇살 아래 잠시나마 서 있을 수만 있다면

좋겠네 푸른 옷에 갇힌 채 죽더라도 좋겠네

그것이 생시라면

그것이 지금이라면

그것이 끝끝내 끝끝내

가리어지지만 않는다면

 

-김지하 '푸른 옷'-

++++

 

***동우***

2014.03.05.

 

[내가 빨갱이인지 퍼랭이인지는 나도 잘 몰랐다.]

 

빨갱이 색갈 한줌없는 사람더러 무슨 전향이란 말인가.

엉터리 사상놀음, 전향서라는 종이쪼가리에 도장 한방 쾅 박아주면 신상이 한결 편할터인데 그냥 찍어 던져 주지.

애시당초 가지고 있지도 않은 사상, 도장 한방이 결코 변절은 아닐텐데.

그런데 한사코 거부하는 까닭.

그것은 신념 따위의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그걸 강요하는 돌대가리들의 폭력성과 부당함과 비열함에 저항하는 자존(自尊)의 문제라는걸 어디선가 읽었다.

 

[마음 속으로 몇번이나 중얼거린다. 나는 비도덕적인 국가권력에 대들었을 뿐 죄인이 아니다. 나는 쫓겨난 자가 아니다. 거부하고 스스로 나온 자다. 그러나 그것은 중얼거림일 뿐, 무심한 사람들의 시선에 의해서 스스로 객체가 되고 만다. 나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갈아입은 호송복에는 아무런 표지도 붙어 있지 않아서 천사백 사십사번으로마저도 나는 인식되지 않는다. 나를 인식해줄 대상에 의해서 부정된 나는 여기에 없다. 그야말로 말살되었다. 세속의 길은 이제 내 등뒤에서 끊기고 닫혔다.]

 

자신이 저질렀다는 죄라는 것에 대하여 죄의식이야 갖고있건 없건 감옥에 갇힌 사람은 죄인이다.

세상과 격리되어 갇힌 자의 죄의식은 다른 까닭에 근거한다.

세속으로 부터 스스로 존재하지 않게 되어 스스로 객체가 되고마는 자의식....바로 그것.

 

풍기문란 죄목으로ك년쯤이던가 감옥생활을 하였던 오스카 와일드는 형편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의 감옥은 '빛나던 사랑은 짓밟히고 모든 신뢰와 아름다움이 산산히 부서진 자리'였다. (감옥 밖의 배신과 모멸..)

 

그러나 확신범은 다르다.

만델라의 27년, 서승의 19년, 서준식의 17년, 황석영의 5년...

 

감옥은 시간이 갇힌 공간이다.

감옥의 시간은 세속의 시간처럼 산만하지 않다.

그들에게 감옥에서 얻는 힘이란 바로 시간의 힘이다.

지엽의 부당함에 대한 저항은 인류사적으로 거대해졌고, 좁은 래디컬의 시야는 훨씬 지평을 드넓혔다.

역사와 인류에 대한 이해는 깊어졌고, 인간성은 한결 성숙해 졌다.

 

[나의 17년 감옥살이 후반부는 피를 말리는 고뇌로 점철되어 있었다. 세상과 인간이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강한 느낌이 나의 가슴 깊이 박혀 옴에 따라 분명히 자각한 사실이 있었다. 그것은 내가 20대 초반에 큰 감동으로 학습했고 나의 삶의지주가 되어 온 사회과학 이론이 나에게는 만능의 처방전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나의 처절한 고뇌와 멜랑콜리가 시작되었다, '도식'과 집단적 정열에 몸을 내맡기는 나의 안일한 '진보'의 계절은 떠나버리고, 현실의 복잡함을 리얼하게 직시하면서도 '진보' 편에 확고히 서야 하는 고난의 길이 서서히 눈 앞에 열리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생'에의 정령이오, 금욕의 아픔이었다. 참다운 래디컬은 체제내화(體制內化)되지 않는다. 그리고 참다운 래디컬은 '민족'이나 '정치'를 넘어선 지점에 있다.] -서준식님의 '옥중서한'-

 

'참다운 래디컬은 체제내화되지 않는다.'

작금 이 땅의 자칭 래디컬들.

강남이 편하고 캐비어에 맛들인...

 

***노루***

2014.03.06.

 

지금 여기까지 읽은 이 소설의 느낌은, 작가가 좀 가볍게 썼지 않았나 싶어요. 줄거리에다 기본적인 글 솜씨로 적당히 살을 붙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좀 심하게 말하면,

그러면 한편 소설이 된다고 작가가 생각한 게 아닌가 할 정도로요. 작가에 대해서 조금 기대를 하고 있었던가 봐요.

아마 내가 지금은, 위 <동우>님의 글에 인용된 서준식님의 글에 대응되는 것들을 소설에서 읽고 싶은 마음이 앞서서, 조급히 잘못 생각하고 있기도 쉽겠지요.

물론, 소설에서 드러나는 바로 '그런' 오현우를 그린 것이랄 수도 있겠지요.

하여튼, 아지막 두세 포스트에서 감옥 생활 이야기는 대강 건너 뛰면서 읽게 돼요. 그러니 안 놓쳤어야 할 부분을 놓친 것도 있을지 모르겠고요.

후반부는 다르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내 생각이 달라지거나, 우선 다 읽고 나서 또 생각해봐야겠어요. ㅎ

 

***동우***

2014.03.06.

 

노루님의 말씀에 공감하는 바 없지 않습니다.

회상과 감회와 편지와 비망록과 쪽지글을 교차적으로 전개하여 이야기를 꾸려나가는 방식.

그러하니 문맥과 논리의 비약과 등장인물 정서의 기복이 심한듯 하고, 많은 주제를 건드려서 곳곳에 가벼움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허지만 이해하기로 합시다, 노루님.

 

1980년대 이후는 한국사뿐 아니라 세계사적으로 매우 격동적인 시대였지요.

그 시대적 상황을 광주와 서울과 평양과 유럽과 감옥에서 겪은 황석영으로서는 어떤 성급함이 앞섰을겁니다.

시대에 관한 사유를 깊게 천착하기보다는 문학적 그로키로 개괄하는듯한 느낌도 듭니다만. 등장인물 심층의 정서라던가 의식같은 건 썩 괜잖게 느껴집니다. ㅎㅎ

 

그리고 이 소설은 신문의 연재소설로 발표되었지요.

갈뫼의 짧은 시기와 감옥과 감옥 밖에서의 긴 세월.

나는 한윤희와 오현우라는 캐릭터의 저 사랑은 가슴이 시립니다.

작가 감성이 작동한 시발은 시대의 서사보다는 아마 거기에서 비롯되었을겁니다.

 

권컨대, 교수님.

연애소설로 읽어보시면 어떠하실지. ㅎㅎ (영화를 권해 드립니다)

 

언젠가 주제를 좁혀서 쓴 황석영의 다른 작품으로 기대해 보기로 합시다.

이 소설후 몇편 소설을 발표하였는데 난 '개밥바라기 별'과 '바리데기' 밖에 읽어보지 못하여.

 

***동우***

2014.03.06.

 

나도 좀 겪었던 바, 70~80년대의 노동현장은 열악하다 못해 실로 참혹한 지경이었습니다.

개발독재 치하, 우리나라 노동자들은 세상이 그러려니 하고 직수굿이 순치되어 있는 순박하고 무지한 노동자들이었습니다. (소위 관리직이라고 하는 치들도 그다지 다를바 없었어요)

휴일은 커녕 날밤없는 격무(경기가 좋아 일년 내내 거의 잔업 특근)로 수당 좀 두둑하면 늦은밤 퇴근후 회사 근처 막걸리집에서 히히낙낙.

집안에 칼라 티브이(80년대 중반즈음 칼라티브이 시대가 열렸을겁니다)라도 들여좋으면 상류층이라도 된양 흐뭇한 가장이 되었지요.

80년의 광주라거나 80년대말 호헌철폐 독재타도의 구호는 사실 일반 노동자들에게는 아랑곳 없었습니다.

 

1987년 노태우의 6. 29 선언.

저 송경태와 같은 운동권의 열정과 피와 땀으로 이끌어 낸 것이지만, 6.29는 노동자에게는 노동현실을 자각하게 된 하나의 기폭제였습니다.

 

[모두들 자신의 생존권을 되찾으려는 결의로 차있고 개중에는 조합주의를 넘어 노동자의 참정권을 확보해야 한다는 정치의식으로 무장한 이들도 많이 생겨났어요. 학출들은 과거처럼 의식화 작업에 긴 시간을 보낼 필요가 없답니다. 우리가 전태일의 삶을 얼마나 감동 깊게 공부했어요? 그런데 여기 와서 나는 수많은 전태일을 만나게 되는 거예요. 지난 유월은 찬란했지만 우리들에게는 장마철에 잠깐 개인 날에 불과했답니다. 그러나 시민항쟁의 힘이 우리들 싸움의 든든한 토대가 되었던 것만은 분명해요.]

 

선도자의 아지프로로 봇물처럼 터져나오는 노동의 함성은 천지를 진동하였지요.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수시로 터져나오는 노사분규의 현장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습니다. (나는 언제나 사(社)측의 개?였습니다만)

 

고전경제학파의 가치의 기본은 노동(노동가치론)이라거나, 맑스의 잉여가치론과 계급투쟁이라거나라는 이론을 귓등으로는 들었습니다만, 생산요소의 두축인 자본에 대응하는 노동은 갈수록 강해져서 노동귀족이라는게 생겨나고 정치화되고 경직되어 갔습니다.

학출(學出)의 노동자 이른바 노학연대(勞學連帶)는 그러하다지만 어떨 적에는 사주(社主)에 목이 매인 화이트 칼라(관리직)는 블루칼라를 진정으로 부러워 하기도 하였지요.

 

[군부는 친위 쿠데타 직전에 한 걸음 물러나 직선제를 공표하는 선에서 전국적인 항쟁을 잠재웠고 그때부터 우리의 실패가 시작 되었다. 항쟁이 만들어 놓았던 공간 안에서 이제 눌려만 살아왔던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이 시작되었지만 시민들은 그들과 하나가 되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직선제로 선거에 의하여 정권을 바꾸는 길만이 유일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렇습니다.

운동권의 시각.

분명히 6..29선언과 그 후의 사태진전으로 민중이 권력을 잡지는 못하였습니다.

이를테면 민중혁명은 실패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6..29선언은 하나의 사기였고 저 노동만만세의 시기는 말하자면 반동적 과도기였던 것입니다.

이른바𧊂세대의 정치의식이라거나 작금의 정치지형도에 있어서 시사하는 바가 없지 않다고 생각됩니다만, 이건 또 뭡니까.

 

새정치 새정치 노래부르는 저 꾀꼬리는..

내게는 그게 그 가락 진부하게만 들리는데.ㅎㅎㅎ

 

***청청***

2014.03.06.

 

동우,,,좀,,나대지말고 조용히..좀 침묵하고 있으라우

 

***동우***

2014.03.06.

 

못난 침묵 깨고 좀 잘난척 나대라고 생긴게 블로그 아닌가?

한글은 읽고 쓸 줄은 아는 것 같으니, 글의 맥락을 짚어서 청청님도 좀 나대면 어떨까.

말투를 보아하니 뉘신지 좀 알듯도 하오만.

 

***홍애(虹厓)***

2014.03.06.

 

잠시 만나본 따님과 두 손녀님.

미인이고 이쁜이들~

 

***동우***

2014.03.06

 

전화받고 깜짝 놀랐습니다.

어쨌거나 신입 제주주민, 잘 부탁합니다.

 

***동우***

2014.03.07

 

[아무런 예상도 못했고 간절히 원하거나 지울 수도 없이 은결이의 출생은 뜻밖의 것이기도 했다. 뜻밖의 일이 인생 도처에 있을 터인데. 프리다 칼로의 중절 수술로 찢겨진 상흔 투성이의 몸이 생각났다. 그네의 모성을 누가 앗아가 버렸는지. 그건 리베라도 아니고 또 다른 남자도 아닐 거야. 그건 바로 우리 세기의 문명이 그랬다. 나는 아직도 엄마가 아니야. 모성 같은 걸 가질 겨를이 없었다.]

 

프리다 칼로 데 리베라 (Frida Kahlo De Rivera, 1907~1954)

부서진 척추, 불구, 중절수술, 상처투성이 몸뚱아리, 처연한 고통, 존재론적 여자, 리베라, 빼앗긴 모성, 우리 세기의 문명...

 

[그 벽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내다보아도 끝이 보이질 않았어요. 가슴을 콱 떠미는 듯한 답답한 느낌과 무력감이 잊혀지지가 않아요. 서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현상 세계에 물건으로 구체화된 것이었어요.]

 

[베를린은 내가 당신을 면회 가서 먼발치에서 검은 창과 빨래만 바라보고 돌아왔을 적에 가졌던 인상처럼 잊혀진 장소였어요. 나는 끼리꼬의 그림에 나오는 인적없는 골목 같은 여기서 유폐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답니다.]

 

조르조 데 키리코 (Giorgio De Chrrico, 1888~1978)

시간의 수수께끼, 장벽, 무력감, 무감각, 착시, 정지된 시간, 디아스포라, 고독, 정적, 불안, 유적(流謫), 우수...

 

베를린, 춥고 스산한 그곳의 겨울, 가로막힌 장벽, 회색의 돌덩이, 답답함과 무력감..

오리와 백조가 무심하게 유영하는 란트베어 운하,,..

살해되어 그곳에 처박혀 버려진, 맑스 이후 최고의 두뇌, 혁명의 독수리, 붉은 로자(로자 룩셈부르크), 그리고 라이프크네히트..

 

비인간화된 인간의 힘. 역사 그리고 우리 세기, 문명이라는 것..

 

-계속-

 

 

 

<오래된 정원> -4-

 

***동우***

2014.03.08.

 

인간이라는 종(種)만이 온 세상의 주인인가요.

아득한 미래까지 인간이 존재하여 우주를 완전하게 해석하고 정복하여 지배하는 날이 과연 올까요.

묻건대, 시인 '류시화'를 현실도피의 한낱 신비주의라고 폄훼하시는 편입니까. 당신은?

으흠, 나로서는 백년에도 미치지 못하는 인간 존재는 파스칼적 아득한 신비일 뿐입니다.

하나의 실존을 mass적 일관성으로 해석하는건 타당하지도 정당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개별적 실존을 하나의 집단적 시스템 속에 우겨넣고자 하는 태도가 이를테면 이 시대의 특징적 징후가 아닐까요.

 

유물론자의 공격적 욕망이고 망상이라고 생각합니다만, 현대인 대부분의 감정모체에는 유믈론이 떡하니 자리잡고 있으니. (이른바 돈독한 신앙인 안에도 여지없이..)

 

["세계를 단순히 해석하는 건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에요." "그걸 누가 해석하는데. 사람들은 자기 사는 동안의 생을 통해서 계절에 의미를 붙이고 그러지요. 세상은 그 누구와 상관없이 저 혼자 있는 거요." "세계를 변화 시켜야죠." 나는 내 친구들의 말투로 그에게 얘기했어요. 조용한 그가 눈을 크게 뜨고 어딘가 분개한 표정으로 내게 되물었지요. "변화? 무엇을 위한 변화. 잔물결 같은 거요. 매개 사람의 일생은 아주 짧아요. 왜 사람이 세계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지."]

 

나는 일사불란한 집단(mass)을 보면 소름이 돋습니다. (북한의 거대한 매스게임과 열병식... 10여년전 붉은 악마의 대~한민국에서도 때로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만.)

 

팽창은 집단의 속성입니다.

팽창에 있어서는 사회주의와 이른바 신자유주의 모두 한통속. '규모의 경제'(개념적으로)는 제한(규모의 불경제, plottage)이 없습니다.

어떻거든 규모를 키우고 어떻거든 그것을 다스리는 시스템을 만들어 냅니다.

우짜든둥 시스템 속으로 뭉뚱그려 개별을 함몰시킵니다.

하지만 개별을 염두에 두고 개별에 기반하지 않은 집단은 언제나 나쁜 집단입니다.

집단사고에 근거하여 무조건적으루다 개별을 재단하는 놈들은 죄 나쁜 놈들입니다. (공리주의를 부정하는게 아니라)

 

[이 나쁜 놈들아, 내 식구 내놔라.]

여기 등장하는 인물은 오길남씨를 묘사한게 분명해 보입니다. (윤이상의 권유로 가족과 함께 입북하였다가 아내와 두 딸을 남겨두고 혼자 빠져나온, '통영의 딸' 바로 그 사람..)

 

그러나 베를린에서의 한윤희의 사랑은 따스하군요.

이게 바로 개별이 살아가는 방식이지요.

 

베를린의 한윤희, 전혜린의 뮌헨이 오버랩되어 아련합니다.

술처럼 사랑에는 남다른 향기가 있습니다.

한윤희의 사랑.

감옥속 오현우가 추상(抽象)으로 사무친 투명한 쐬주맛이라면 저리도 자상한 이희수는 콧끝에 따사롭고 향그로운 뱅쇼맛일까요.. ㅎㅎㅎ

 

***동우***

2014.03.09.

 

1989년 11월.

어느날 홀연히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징후는 있었겠으나 아무도 그것을 예측하지는 못하였다.

그를 기점으로 이념에 의하여 집단관리되던 나라들은 시나브로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였다.

변증의 역사실험은 실패한 것이다.

대안도 없이.

반동(反動)만이 온전히 살아 남았다.

그 현장에서 이방인 한윤희는 울었다.

왜 울었을까.

허망해서? 아버지가 생각나서? 오현우 때문에?

필경 세계사의 파고(波高)에 부동(浮動)하는 자신의 팔자가 허망해서 울었을 것이다.

역사의 산물인 삶의 양태, 결코 역사와 무관할수 없는 무수한 운명과 운명들이 겨워서 울었을 것이다,

 

내 생전에 한반도의 휴전선이 무너진다면 틀림없이 나도 흐느껴 울 것이다.

더 낳은 내 팔자 더 좋은 나의 삶이었을까마는.

'통일은 대박'은 이제 우리 비니미니의 몫이다.

모쪼록 대박나거라 너희가 겪는 역사의 팔자에는.

 

***eunbee***

2014.03.09.

 

뿔이 없네요. ㅠ 우리 어릴적 북한 사람들을 뿔달린 도깨비인줄로 여기기도 했지요.

내 나라가 싫기도, 또는 받아주지 않아 제3국으로 떠나야하기도 했던 우리의 역사.

우리에게 특별히 새겨진 제3국,이란 어휘가 나는 참으로 슬퍼요. 제3세계라는 말보다 더 절절한 슬픔이 있어요.

제3세계라는 말도 서글픈데 말예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때, 내아들의 오랜 펜팔 서독 본의 여학생은 그 장벽의 쪼가리 시멘트 한 개를

봉투에 넣어 아들에게 쓴 편지와 함께 보내왔지요. 그것을 아들은 잊었는지...내가 간직하고 있답니다.

그 팬팔친구와는 여적도 연락을 하고, 틈나는대로 카톡을 하고... 결혼여행으로 떠난 길에 독일에서 만나고...

그런 추억이 깃든 베르린 장벽이에요.ㅎㅎㅎ

동우님의 이 말,

'술처럼 사랑에는 남다른 향기가 있습니다' 감동스런 표현이에요.

한 윤희의 사랑 . 아무리 자상한 이희수의 '콧끝에 따사롭고 향그로운 뱅쇼맛' 같다해도

'추상(抽象)으로 사무친 투명한 쐬주맛'의 오현수에 대한 사랑에 비할 수 있을라구요.

사랑은 아련할수록, 그리울수록, 안타까울수록, 그 애련함이 크고 간절함이 깊은 것이 아닐까요.

비오던 어느날, 그렇게 홀연히, 무망히..떠나 보낸 윤희의 더는 만질 수 없는 실체적 사랑의 이별.

그러나 사랑은 손끝으로 이루어지는,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요. 그래서 슬프지만 애틋하게 긴~사랑.

어느 사랑의 이야기를 듣는 가벼운 기분으로 읽고 있는 이소설,

영화를 먼저 보아서 더 그럴거예요. 아마도. ㅎ

고맙습니다.

 

***동우***

2014.03.10.

 

제3세계라 하시니 생각나는데.

바르샤바 동맹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었던, 미소 양대 블록의 냉전시절.

그 시절 비동맹이 떠오릅니다.

미소의 세력권에서 벗어나려는 제3 세계, 유고의 '비토'와 더불어 '김일성'의 존재는 뚜렷했습니다.

역설적으로 북한 사람들 뿔이 있었을 때가 그래도 이상적인 나라였어요.

그 뿔은 꼿꼿한 이념의 표징이었지요.

 

은비님.

'술처럼 사랑에는 남다른 향기가 있다'는 내 표현이 아니라 본문 속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뱅쇼맛은 내 입맛보다 은비님의 분위기로서 차용하여 익숙한 향기이고. ㅎㅎㅎ

 

은비님 파리로 돌아가실날(돌아간다는 표현을 씁니다그려) 얼마 남지 않았군요.

파리의 봄, 덕분에 나도 느낄...

 

***동우***

2014.03.10.

 

내 아버지, 그리고 한윤희의 아버지와 오현우가 꿈꾸었고 한윤희가 마음 깊이 찬동했던 (그리고 내 속물 어떤 아이디얼한 구석이 동경하였을) 그 소망은 허무하게 스러졌다.

실패한 역사는 출발점으로 되돌아와 또다시 새로운 꿈을 꾸고 새로운 소망을 가져야 한다.

 

[그 뒤로 동유럽은 급속도로 변해 갔어요. 아프리카나 남미의 비동맹권은 더했지요. 헝가리에서 사회당이 폴란드에서는 연대회의가 체코에서는 시민포럼이 정권을 잡았고 불가리아 루마니아 유고 알바니아 크로아티아가 뒤를 이었습니다. 드디어 유럽에서 시작했던 현실 사회주의는 실패한 것으로 드러났어요. 이른바 국가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이행되어 갈 수 밖에 없었지요. 천 구백 팔십구 년을 기점으로 세계사의 반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명백하게 실패해버린 역사를 부둥켜 안고 지지리궁상으로 버팅기고있는 북녘 체제.

아니, 저들이 부둥켜 안고 있는 것은 역사가 꿈꾸었던 그런 것이 아니다.

오염되고 변질된 꿈, 야만의 스탈린이다.

평양을 다녀 온 송영태는'감동과 절망'이 반반이라고 하였는데, 그 감동이란게 궁색하기 짝이 없다.

어렵지만 버티며 살아낸 인민의 생활력이 눈물겨워 감동이라니.

 

나는 가끔 채널A의 이만갑(이제 만나러 갑니다)이라는 프로를 보는데, 탈북하여 남한 땅에 정착하여 살아가는 북쪽 미녀들의 미모와 발랄함이 놀라웠다.

그러나 방송에 나오는 겉모습처럼 그녀들은 마냥 자본주의를 찬미하고 진정 행복해 하는걸까.

연전, 탈북한 장년남자와 교유한적 있는데 그는 남한을 행복해 하지 않았다.

 

결코 자본주의가 승리한 것이 아니다.

 

[이제 현재의 삶의 방식이 잘못 되었다는 걸 잘 알면서도 어쨌든 이 변화된 세계 속에서 수많은 힘없고 가난한 이들과 더불어 다시 실천해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한윤희는 죽고 오현우는 늙었고, 나의 속물 또한 늙었다.

그러나 역사는 언제나 젋은 래디컬을 품는다.

역사는 꿈꾸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eunbee***

2014.03.10.

 

갈뫼에서 그리던 당신의 젊은날의 모습

내 유년의 자운영 꽃반지

프레드리히스트라세

이희수의 목숨을 앗아간 아우토반

시베리아 횡단 열차 예매권 .....

한윤희 앞에 놓여진 길들

스트라세 아우토반 중앙역 ...

독일에 가면 정다워지는 단어들 ㅎㅎㅎ

 

***동우***

2014.03.11.

 

좀 전 '오래된 정원 마지막분 올렸습니다.

 

너희들은 어디로 날아가느냐

아무 곳도 아닌 곳으로

누구로부터 떠나왔느냐

모든 것들로부터

그들이 함께 있은지 얼마나 되었느냐고

조금 아까부터

그러면 언제 그들은 헤어질 것이냐고

이제 곧

 

이 소설 종장의 시는 좀 쓸쓸합니다만, 은비님.

행복에 잠겨서, 옛 사진들 정리는 마치셨나요?

 

***eunbee***

2014.03.12.

 

추억에 잠겨서, 옛사진들(아들네 것) 정리 잘 마쳤어요. 그제.(이제 새날 새벽이니 ㅋ)

동우님 덕분에 <오래된 정원> 잘 읽었어요. 한회분을 놓치면 따라가기 힘들까봐

선글래스 쓰고서라도 읽었답니다. 더러 엉터리로 읽었을망정.ㅋㅋ

고맙습니다. 친절한 동우씨!! ^*^

 

***동우***

2014.03.11.

 

오래된 정원.

노루님도 지적하신바 있는데, 읽는 이에 따라서는 좀 산만한 느낌 없지 않을듯도 싶습니다.

주제의 천착이라던가, 드라마 구성에 있어서 짜임새가 완벽한 소설은 분명 아닙니다.

황석영다운 치열한 작가정신이 부족해 보이는 부분도 없지 아니합니다.

도바리 운동권과 시골 여선생의 짧은 사랑, 그리고 기나긴 이별.

그 뼈대에 살을 붙여 편지 비망록 쪽지글 회억과 감회의 단편적인 글을 교직하여 씌여졌습니다.

그러므로 서사의 비약과 감성의 기복이 심하다고 여겨지는 부분도 없지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황석영은 1980년대 이후 격동의 시대를 온 몸으로 겪었습니다.

생각건대 작가는 자신이 경험하였던 여러 시대적 상황과 그로부터의 사유를 끄집어 내어 토로하고 싶었을 겁니다.

하나의 소설로서 여러 주제의 이야기를 담으려니 어떤 조급함과 주제에 따라서는 정제(精製)되지 않은 작가의 사변(思辨)이 거칠게 만져지기도 합니다.

 

작가가 들려주는 많은 것들.

부당함과 부정의한 권력에 처절하게 저항하는 모습들.. 그들의 내면.. 의식과 갈등과 소회.. 감옥 안팎의 정경과 한시절의 풍속사.. 베를린과 러시아와 시베리아.. 1980년대 이후를 관통하는 세계사적 격동의 현장의 모습.. 사회주의 몰락의 세계사적 의의.. 미래를 향한 생각들..

파시스트와 자신의 아버지를 비롯한 부르주아를 증오하는 송영태에게서는 기질적으로 캐비어좌파의 면모도 보입니다.

오현우와 자신의 아버지에서 비롯한 한윤희의 시대적 성찰같은게 좀 어설퍼 보이기도 합니다.

 

작가는 큰 화폭에다 크로키하듯 시대를 그렸습니다.

느끼건대 스케치하는 작가의 손길은 사상과 논리의 치밀함이 아니라 지극히 감상적인 손놀림이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그것이 좋았습니다.

 

내 천학(淺學)의 지식 담긴 머리보다 가슴으로 전달되는 그 로맨티시즘은 오히려 절실하게 전달되었음을 고백합니다.

논리와 분석의 난해함으로 그와 같은 명제를 천착하였더라면 내게는 이해가 힘들어 별로 재미가 없었을겁니다.

한윤희와 오현우의 아름답고 애틋한 사랑과 더불어 그것이 나로 하여금 이 소설을 감동적으로 읽게 하였습니다..

 

데카브리스트의 순결함은 자작나무의 고결한 숲을 이루었을까요.

그 너머 시베리아 광활한 지평선에는 피빛 놀이 집니다.

이념의 종언(終焉)으로서 그 풍경은 장엄한가요.

갈뫼의 부엉이와 산비둘기의 울음은 옛과 같은가요.

한세기를 뒤흔들었던 역사의 실험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광주의 분노 또한 혁명으로 승화하지 못하였습니다.

시대에 헌신하였던 무릇 정신들은 핏빛 놀을 바라보는 애상에 젖습니다.

그리고 오롯이 홀로 온전한 자본주의는 의기양양한가요.

난무하는 맘모니즘과 헤도니즘의 미친 춤바람은 어찌하나요.

 

[친구들끼리 뿐만 아니라 가족과 부모형제 사이에서도 재물은 가장 중요한 친소의 기준이지요. 갑자기 가난해지거나 물질의 바탕을 상실하면 어쩌려고들 그러는지. 이제 저러다가 큰코 다칠텐데. 타성에 빠진 대중, 이상주의가 없어지고 쾌락만 남은 젊음, 위선과 기회주의가 가장 빠르게 이길 수 있는 덕목이 되어버린 정치, 여론의 노골적인 조작과 왜곡, 대중이 타락되는 것은 과거의 폭력적인 지배의 상처 때문일 거예요. 오랫동안 자유가 제한된 사회에서 살다보면 창조적인 힘이나 정신적 풍요로움 자체를 두려워 하고 변화를 싫어하게 된다지요. 아직도 길은 멀고 당신은 그대로 제자리에 있는데 모든 가치가 뒤범벅이 되고 먼저 가졌던 자들의 힘은 여전히 막강하답니다. 그래두 나는 여기를 사랑하고 자랑스러워 하겠어요. 요만큼이라두 이루어낸 사람들과 같은 시대에 살았으니까요. 이 초라하고 남루한 누더기 더미 속에서 보석 같은 알맹이들을 골라내어 다시 빛나는 옷으로 지어낼 테니까요.]

 

소설의 종장.

혁명은 모성으로 귀결됩니다.

작가의 안일한 결말, 어쩌면 작가는 무책임합니다.

미완의 역사를 어머니에 미루고 끝을 맺다니.

 

그러나 어머니는 추상이 아닙니다.

결코 죽을수 없는 어머니.

로자의 마음, 혁명의 근거가 그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한윤희처럼 케테 슈미트 콜비츠(Käthe Schmidt Kollwitz, 1867~1945)의 그림을 들여다 보아요.

그림 속에 오래된 정원, 갈뫼가 뵈입니까?

 

함께 읽어주어 고맙습니다.

벗이여.

다스비다니아.

 

***홍애(虹厓)***

2014.03.12.

 

드디어 오래된 정원을 마치셨군요.

마지막을 알리는 고백이 새벽에 읽는 친구의 편지 같습니다.

책을 덮으며(리딩북이라 덮지는 못하지만) 적어 놓은 동우님 댓글을 그 편지로 읽는 새벽입니다 ^^

5월에 부산서 꼭 뵈요.

조선생도 동우님 만난지 하도 오래되어 꼭 뵙고 싶어합니다.

 

***동우***

2014.03.12.

 

조박사님 만난게 벌써 6년전이로군요.

광안리의 밤이 생각납니다.

나도 뵙고 싶습니다.

세미나에 늘상 붙어다니는 잉꼬부부... 부럽습니다. ㅎㅎ

 

***eunbee***

2014.03.11.

 

아침에 마지막 편(ㅋㅋ)을 읽으며,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고요한 돈강의 어느 페이지를 읽는 듯한 감상이 스치기도 했어요.

내가 마치 가문비나무 숲을 지나가는 것 같기도 하구요. 배료자나무(자작나무를 그곳에서는 그렇게 부른다는데 여행중에 들은 말이라 확실한지는 몰라요)가 빼곡한 숲을 지날 때의 그 아름다움이 눈에 선하기도 했구요.

돌아올 수 없는 어느 두메산골로 숨어버린 송영태의 마음을 한참이나 헤아려봤구요.

이렇게 나는 이소설을 아름다운 구절들에 취해서 그렇게만 읽었어요. 사상이든, 이념이든, 내조국의 현실까지 접어 두고요.ㅎ

 

귀한(프리다 칼로만 제외하고 내가 처음보는 ㅋ)그림을 곁들이며, 긴 소설 옮겨주신 <동우>님의 열정과 세심한 배려에 감사드리는 의미와 한 작가의 소설을 고맙게 읽었다는 뜻으로, 아침에 이글 다 읽고, 전날 소금에 재워두었던 이면수 한마리 구워서 자줏빛 술 곁들여 인사 드렸어요.

감사의 잔을 높이 들었지요. 사실은 아침에 배가 고프기도 했거든요. ㅋㅋ

지금 다시, 인상적인 판화, 콜비츠의 그림을 한참이나 들여다 봅니다.

어머니,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

한윤희, 그대의 사랑이여, 다스비다냐~

 

***동우***

2014.03.12.

 

은비님.

케테를 검색하여 보아요.

대단한 미술가랍니다.

우리나라 운동권 그림쟁이들에게는 하나의 교본이지요.

걸개그림, 내 눈에는 죄 케테로 보인답니다. ㅎㅎㅎ

그러나㻐년대 운동권의 그림처럼 케테의 저 그림은 상투적인게 아닙니다.

 

어머니라는 의미, 실존을 생존을 역사를 지탱하는 힘,

시베리아의 놀에서 다음날 떠오르는 태양을 그리는, 황석영의 사설을 하나의 이미지로 압축한.

여성성에 있어 프리다 칼로는 하나의 아픈 사적 자각이라고 느껴지고...

미술을 공부한 따님들의 느낌은 어떠하실지.ㅎㅎ

이 소설에 대한 은비님의 감상.

한윤희와 오현우, 은비님는 내 꼬임때문에 영화를 먼저 보아 그럴거예요.

개별적 감성의 문제와는 다른 측면, 미국 노루 교수님의 지적은 옳을겁니다.

이 소설, 객관적 평가로 어쩌면 황석영 소설중 가장 엉성한 것인지도 몰라요. ㅎㅎ

 

***노루***

2014.03.13.

 

동우님 고맙습니다. 본문에 언급된 그림들까지도 올려주시고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덕분에 케테 콜비츠도 알게 되어서 온라인에서 그녀의 다른 작품을 하나 베껴놓기까지 했지요.

세 분의 댓글을 읽는 맛이 또 특별해서 한 번은 더 읽어야 겠어요. ㅎ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오래 지나고서도 한윤희의 베를린 아파트는, 앞 집 할머니와 함께, 생각날 것 같아요. 러시아 횡단 여행(했다는 것)도요. (어렸을 적 읽은 이광수의 ‘유정’에서도 ‘나’가 바이칼호로 떠난 것 정도만 생각나요. 영화 ‘유정’을 못 봐서도 그렇겠지만요.)

 

이 소설에서 –북한 유학생을 포함하는 여러 등장 인물들을 통해서 드러낸 것과 안 드러낸 그 구성에서 --䵼년대 이후 격동의 시대를 온 몸으로 겪”은 작가 황석영의 지금 생각은 어떤지, 어렴픗한 느낌은 갖게 됩니다. 해외에 있었던ه, 80년대의 한국을 그의 글에서 읽을 수 있겠다는 것도 이 소설에 대한 한 기대였는데, 당시의 운동권에 대해서도 조금 더 알게 됐고요.

한윤희도 "과거의 폭력적인 지배의 상처"에 대해 말하지만, 군사독재가 한국 사회를 도덕적으로 타락시킨 것은, 상처라기보다는 변형 수준이라는 게 한편의 내 소회이기도 합니다.

"민주적 원칙은 수백년 이래로 가장 생명력 있는 유산으로 확인되었다"는 오현우의 말을 읽으면서는, 10년 전쯤 일인데, 다수결로 결정할 사항과 그렇지 않은 사항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게 하던 어느 젊은 교수가 생각나네요.

 

***동우***

2014.03.14.

 

'오래된 정원'

먼 곳 노루님께서 진지하게 읽어주셔서 이 포스팅의 보람은 더욱 컸습니다.

고맙습니다.

 

황석영은 2000년대 말쯤 이명박의 중도노선 지지운운 하였다가 이른바 386에게 변절자로 매도되어 혼줄이 났었지요.

앗 뜨거라! 하고 이내 철회하였는데, 나는 황석영의 그 눈치보는 작가정신에 실망하여 혀를 찼습니다.

그 후 티브이의 오락프로 같은데 부지런히 얼굴을 팔더군요.

행여 김지하 짝 날까보아, 진보로부터 낙오되어 버림받을까봐 초초한듯 그답지 않게 못나보여서 나는 안타까웠습니다.

느끼건대 노벨상감은 되지 못할 작가정신입니다. ㅎㅎㅎ

이 소설에서 노루님도 작가의 생각의 변화를 느끼신다고 하였는데 옳습니다.

근데 그게 변절입니까?

세월따라 생각은 변화하고 변화하는 사유가 어느 시점에 귀결되는 지점이 바로 시대정신아닐까요..

80년대 운동권의 시대정신이라는게 무슨 교조적 금과옥조라도 되는가 봅니다.

사유가 귀결된 생각들을 도그마에 사로잡힌 무리들은 어느 시점에 고착된 시대정신의 훼손이라고 게거품을 뭅니다.

북녘처럼.

 

노루님의 말씀, 동감하는바 있습니다.

<한윤희도 "과거의 폭력적인 지배의 상처"에 대해 말하지만, 군사독재가 한국 사회를 도덕적으로 타락시킨 것은, 상처라기보다는 변형수준...>

386의 정신속에는 하나의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그게 트라우마라고 생각합니다.

거듭 고맙습니다. 교수님.

 

***jamie***

2014.03.30.

 

덕분에 오래된 정원을 읽고... 저는 외국의 뉴스처럼 접했던و,90 년대의 아픈 한국의 역사를 실감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히나 민주화 운동이 노동권과 결탁하는 이야기는, 사실 전태일씨의 희생조차도 분명치않게 기억하는 제게는 아주 새롭더군요.

단발머리 여학생의 분신자살 설정이 이 소설 속에서는 설명부족인 느낌이지만, 어차피 작가가 여러 주제를 한꺼번에 다루다가 이곳 저곳 소홀히 된 것 같아요.

차라리 오현우와 한윤희의 사랑 이야기로 더 애틋한 소설이었지 싶기도.

암튼 한국 민주화 역사의 한 시대를 재구성해 보여주어서 제게는 참 좋은 기회였습니다.

동우님께 감사드려요.

 

***동우***

2014.03.30.

 

'오래된 정원' 영화를 보신 제이미님은 그 장면을 기억하실겁니다.

건물 옥상에서 전투경찰에 몰리다 몸에 불붙여 투신하는 미경이.

80년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었지요.

 

오현우와 한윤희의 사랑.

소설보다 영화에서 참 애틋하였다는 느낌입니다.

지진희와 염정아.

소설에서는 아직 오현우와 은결이, 부녀 상봉은 이루어지지 않지만, 은결이의 등장은 참 신선했지요.

 

진지하게 읽어주신 제이미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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