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설-
<인사동 단상>
***동우***
2007년 12월 25일
지금은 옮겨 갔으나 종로구 견지동에 있었던 중동중학 3년을 다녔으니 1960년대초 인사동은 나의 나와바리였다.
교문을 나서면 골목 바로 코 앞에 조계사가 있고. 오른 쪽으로 돌아 걸으면 담쟁이넝쿨로 덮인 숙명여고교사, 단골 만화가게 서넛이 어깨 잇댄 청진동 골목어귀가 나온다.
북으로 큰길을 조금 걸으면 기마경찰대가 나오고 간선도로로 나서면 5.16 혁명정부청사 (후에 경제기획원 청사로 되었던가), 그 어름에서 외국에서 초청하여 공연하였던 아이스쑈의 판타지도 떠오른다.
이순신장군의 동상도 없었고 세종문화회관도 없었던 그 일원이 당시 세종로에서 중앙청에 이르는 광화문통이다.
이번에는 교문에서 왼쪽으로 돌아 좁은 골목을 조금 걸으면 훤한 간선도로로 나서 왼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지척에 한국일보사가 있고 건너편 저쪽에 경무대 오르는 어귀에 있는 동십자각이 보인다.
오른 쪽으로 고개를 틀면 민영환 동상이 버티고 서있는 안국동 네거리.
안국동 네거리에서 발걸음을 종로통으로 돌아 틀면 그 일대가 바로 인사동이었다.
한옥이 밀집한 곳이었으나 유별날 것 하나 없었던 인사동.
서울의 중심가로서 6.25의 전화(戰火)를 겪었다지만, 한옥골목은 인사동뿐 아니라 내수동 내자동 적선동 삼청동 일원에 온전하게 남아 있기도 하였다.
골동품을 늘어놓고 서화 따위를 걸어 놓은 가게들이 곳곳에 있었던 듯 기억되는 바도 없지 않지만 그보다 내 아슴한 기억 속의 인사동은 그저 곳곳에 헌책방이 널려있었던 그런 후줄그레한 거리였다.
고서(古書)도 취급하였을 것이지만, 주로 교과서 참고서를 사고팔아 풀칠을 하던 허름한 헌책방들이 나의 영화비(映畵費) 벌기의 주무대였기 때문에 기억에 생생하다.
학년 올라가면서 지난 책, 주운 책 (파고다 공원에서 책가방을 통째로 주워 팔아먹은 적도 있었다), 때론 훔친 책 (고백컨대 급우들 것을 쌔비하기도 하였다)들을 팔아 충당하였던 영화비.
인사동.
당시 어느 구석 전화의 황량함 속에 향유할수 있는 문화적 공간 넉넉하였으랴마는 내 기억 속 인사동은 문화적인 분위기가 있는 그런 고급스런 공간은 아니었던 것이다.
학교를 땡땡이치고서 파고다 공원을 어슬렁거리다가 시간 맞추어 들어서는 우미관, 평화극장, 문화극장, 세기극장, 동보극장, 동도극장, 미도극장..
문화적 마스터베이션이랄 것은 차라리, 소년의 도피성(逃避城)인 극장의 어둠 속 잠겨 그렇게 음습하게 신음하며 꿈틀거렸을 것이다.
중학교를 졸업하자 서울 시민으로부터 떨구어져 몇십년.
그동안 서울 왕래는 제법 있었건만, 인사동에는 올 늦가을 처음으로 가보았고, 그것도 무슨 문화적 달콤한 향취를 맡기는 커녕 밤중에 누군가의 안내로 그곳에 가 술만 마시다 돌아왔었다.
그러다 지난 일요일인 2007년 12월 16일 초겨울 오전, 전날 토요일 부평에서 벗들과 어울려 밤을 지샌 나는 부평역에서 1호선 전철에 올라 종각역에 내려 인사동에 들어서게 되었다.
아, 그런데 인사동은 너무나 변하였다.
마흔 다섯해전 사춘기 소년의 겨울, 그 녹슨 흔적은 그 어디에도 도무지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서울의 사대문 밖이야 어차피 상전벽해, 동서남북 가리사니 잡을수 없는게 당연하겠으나, 그래도 사대문 안에 들어서면 옛기억 더듬어 골목길 길눈이 어느 정도 살아나곤 하였는데. 인사동 일원에서는 눈을 씻고 살펴 보아도 옛 기억의 편린 떠올릴만한 구석은 없었다.
북편 저만치 중앙청이라도 우람한 자태로 버티고 있었더라면 그나마 조금쯤은 낯이 익었을까?
그 중앙청마저 헐리고 없었으니.
담쟁이 넝쿨 벽을 감싼 목인(木人)갤러리 문을 밀고 들어서니 한 삼십여평 공간에 꽃이 만개하였다.
그러나 꽃은 꽃인데 흐드러져 자욱한 화향(花香)은 맡을수가 없다.
종이꽃인 까닭이다.
굿청에 장식되는 종이꽃.
이해경의 지화전(紙花展)이 열리는 곳이다.
황해도 굿의 이해경 만신.
전통의 맥이 끊긴 종이꽃을 그녀는 자르고 오리고 염색하고 붙이고 하여 전수없이 홀로 터득하여 사용해 오다가 이번에 전시회를 연 것이다.
생화를 그대로 본떠 만든 플라스틱류의 조화는 생화가 아니라서 조야할 수밖에 없다.
그런 조화와는 차원이 다른 꽃, 지화.
한지로 만든 지화는 우리 문화 전통이 연연한 꽃이며 신명께 바치는 의미의 꽃이며 예술적으로 데포르마숑된 추상의 꽃이다.
나이롱일 망정 크리스찬이며 별로 꽃을 좋아하지 않는 나이지만 무당 이해경의 꽃에서는 느껴진다.
굿청에서 울리는 그레고리안 성가같은...
단정한 아름다움 깃든 경건함.
지화뿐 아니라 굿청을 장식하는 여러 기물도 함께 전시되어 있었고, 무당의 신빨 가득한 내면(소프트웨어)이야 내 더듬을 길 없겠으나 굿청의 제의적 형식미로서 하드웨어에 천착하는 그녀의 그 집착이 또한 아름답다
한지를 긴 길이로 이어 채색하고 신령의 이름, 발원문등을 써 신령이 하림하는 통로로 사용한다는 장발은 서예가인 내 친구 송현의 글씨라서 더욱 반갑다.
소리꾼 장사익이 지화전 첫날 무반주로 미발표곡 ‘꽃구경’을 불렀고, 소설가 이외수는 ‘이해경은 세상을 조금이라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자신이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모색하며 살고있는 무당이다’라는 축사를 하였는데 정말 그러하다.
김금화 만신의 신딸로서, 무대예술가이며, 영화 ‘사이에서’의 주인공이며, 유명대학의 특강강사이며 등등...
그녀의 다이나미즘은 대단하다.
1시 부산행 KTX 예약되어 송현에게는 연락도 못하고 이해경이 붙잡은 소매뿌리를 뿌리칠 수밖에 없었다.
이해경의 따뜻한 배웅을 뒤로 목인갤러리를 나선다.
초겨울 종로(鐘路) 일원의 대기는 그다지 찹지 아니하다.
심호흡을 한다.
휴일 오전의 인사동은 그즈넉하기까지 하였다.
낯선 그곳을 한 삼십여분 이리저리 천천히 걷는다.
즐비한 화랑, 갤러리, 카페...
밥집들, 보도블록 까지도 어딘가 의고적(擬古的) 풍취가 배어있는듯, 문화의 숨결 가득하여 그 향취 달콤하다.
참으로 마음이 좋아 진다.
그동안 얼마나 저자거리에서 허위적 거렸는지 확연히 깨닫게 된다.
그러고 보니 음악회가본지 몇해런가, 연극 한편 본지도 아득하다.
아, 경제가치에 깔려 숨죽여 있던 나의 생명가치가 문화적 분위기에서 비로소 살아 숨쉬는 듯.
나는 그러하였구나.
지나치게 저자거리문화, 그 키치문화에 길들여져 있었던 것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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