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서부전선 이상없다 (1,4,3,3)

카지모도 2019. 9. 25. 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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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2014년 10월 30일 포스팅

 

<서부전선 이상없다>

-레마르크 作-

 

이번달 책부족 텍스트.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Erich Maria Remarque,1898~1970)’의 장편소설 ‘서부전선 이상없다 (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 英語題目 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

 

<이 책은 고발도 아니고 또 고백도 아니다. 비록 포탄은 피했다 할지라도 역시 전쟁에 의해서 파괴된 어느 시대를 보고하는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책의 서문->

<우리는 누구를 위해 싸우는 거죠? 조국(Fatherland)을 위해 싸우는 거지. 그럼 프랑스놈들은 누구를 위해 싸우는 거죠? 모국(Motherland)을 위해 싸우는 거지. 그럼 누가 옳은 거죠? 그야 이긴 놈이 옳은 거지. -책 속의 대목->

 

레마르크의 첫 장편소설.

1929년 출판되자 18개월 동안 25개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350만부 이상 팔려나간 책, 레마르크를 세계적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한 그의 출세작이다.

휴머니즘과 반전(反戰)의식이 강하게 표출된 진실한 기록문학의 정수(精髓)라는 호평이 있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황폐화된 세대의 증오감을 너무 드러낸 소설이라는 혹자(或者)의 비평도 없지 않았던 모양이다.

 

1933년 독일정권을 손아귀에 틀어 쥔 나치는 이 소설을 금서(禁書)로 지정하여 분서(焚書)하였고 레마르크는 독일 시민권이 박탈되었다.

1939년에 작가는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1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한 이 유명한 이 전쟁소설을 나는 이제서야 읽었고 최근에야 영화를 보았다.

장편소설 치고는 길지 않는 240여 페이지 분량.

소설의 구성과 문체 또한 매우 간결하여 지난달 텍스트 '아들과 연인'에 비하면 읽기에 여간 수월하지 않았다.

평이한 어휘를 구사하여 복문(複文)보다는 거의 단문(短文)으로 씌어졌고, 동사(動詞)의 시제(時制)는 대부분 현재형을 사용하였다.

플롯에 있어서도 연결되는 내러티브의 서사구조가 아니라 독립된 다큐멘터리를 한편씩 보여주듯, 에피소드 별로 장(章)을 나누어 씌여진 매우 단순한 구조였다.

소설의 형식도 그러하였지만, 작가의 주제의식 또한 과도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역사와 전쟁과 같은 거대담론으로 독자에게 사유(思惟)의 깊이를 귀찮게 강요하지 않는다.

전쟁의 비정함을 고발하는 작가의 분노는 느껴졌으나 그 목소리에 웅변이 실려있지는 않았다.

작가는 상황에 따른 에피소드를 담담한 톤의 내러티브로 들려주고 그 현장을 보여줄 뿐이다.

한마디로 매우 심플한 형식과 언어로 씌어진 소설이었다.

 

레마르크는 1차 대전에 병사로 참전하여 서부전선을 몸소 겪었던 사람이었다. (히틀러 역시 상병이란 계급의 쫄병으로 참전하였지..)

그 전장(戰場), 작가에게는 젊음을 뿌리째 뒤흔든 가장 충격적인 경험이었을 것이고, 한편의 문학으로써 승화시켜 세상에다 소구(所求)하고 싶은 어떤 강렬한 욕구가 꿈틀거렸을 것이다.

어떻게 쓸까..., 독자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될 방법론에 대하여 고심하였을터이다.

해설을 보니까, 당시 독일에서는 리얼리즘계열에 있어서 자연주의와는 좀 다른 신즉물주의(新卽物主義)라는가 하는 문예사조(文藝思潮)가 유행하였던 모양이다. <신즉물주의는 자아의 주장이나 감정의 표현을 억제하고, 사실에 바탕을 두고 사실자체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기법이라고 하더만...>

그러나 작가가 그와 같은 사조에 편승하였다기보다 ‘서부전선 이상없다’의 가장 효율적인 소설형식은 오로지 ‘심플함’에 있어야 함을 진작 간파하였을 것이라 생각된다.

리얼리즘의 핵심은 명료한 사실에 기반한 단순함이고, 액추어리티를 경험한 자는 중언부언하지 않는다.

생각건대 그러한 형식의 심플함은 레마르크의 탁월한 선택이었다.

 

전쟁터, 생명이 소모(消耗)되는 병사(兵士)들의 현장.

그것도 어린 나이에 자원입대한 졸병들의 이야기.

그들은 장군이나 정치가처럼 전쟁을 관리하는 입장에 선 자들이 아니다.

'서부전선 이상없다'는 피동적으로 참전하여 무력하게 죽어 나간 그런 짧았던 목숨들의 이야기였다.

 

최전선(最戰線).

군대생활중 당시 한창이었던 월남전에 나는 참전하지 못(안)하였다. (십자성부대의 춘기 맞춰 지원했는데 전투부대로 잘못걸려 앗 뜨거라하고 돈쓰고 빠졌음을 고백한다.)

전쟁을 체득(體得)하지도 못한 내가 최전선의 리얼리티를 감득(感得)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명색 한마리 군바리인데 예제서 접하고 보고 들은 것 있는데 상상으로 닿는 느낌 한줌 없으리.

매복, 정찰, 크레모아, 식스틴, 정글복, 아파치 헬리콥터, 부비트랩..

총탄이 귓가를 스치고 포탄이 작열하고 전우가 쓰러지는 현장.

전투현장에서의 순간순간, 병사에게는 자율신경계의 조건반사만이 지배할 뿐 생각의 겨를은 없을 것이다.

당장의 목숨을 장담할수 없는 상황속의 인간들.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의식은 어떤 색감의 것들일까?

 

월남전에서의 따이한(한국군) 전사자 비율은 0.04% 라고 하는데 우선 생각보다 적어 다행이라는 마음이 든다.

전사(戰死) 강박.

적어도 40여년전 월남 정글의 어느 ‘김상병’은 100 여년전 유럽 서부전선의 ‘폴 하이머’(이 소설의 주인공)만큼 절박한 의식은 아니었을거라는 점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검색하여 본다.

제2차 세계대전, 4700 만여명이 사망하였는데 그중 군인의 비율은 33%.

제1차 세계대전, 950 만여명이 사망하였는데 군인의 비율은 95% 이상.

1차 대전은 오로지 군인들만이 죽어나가는 전쟁이었구나.

 

1차 대전은 그떄까지의 전쟁양상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고 한다.

기관총 독가스 전차 비행기의 폭탄투하등 대량살상무기가 발명되었고, 전략의 핵심은 적군의 대규모 살상전술에 있었다.

더구나 교착상태 서부전선의 참호전은 그야말로 소모전이었다고 한다.

전장의 군인들은 매일매일 죽음과 직면하는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날마다 죽어나가는 병사들.

전투경험 없는 신병들은 공포에 질려서 총한방 쏘지 못한채 전전긍긍하다가 죽어버리고 전투기능을 상실한 군인은 야전병원에서 폐기된다.

아, 그때 그들은 무슨 정신으로들 하루하루 살 수 있었을까.

생각을 없애는 것이 급선무, 단순한 의식으로 자신을 똘똘 무장하지 않으면 나같은 놈은 금새 공황에 빠져버릴 것이다.

 

<"과거는 없다. 교양도 교육도.. 그 차이는 거의 사라진다.. 그것은 장애 극복요소일 뿐.. 예전 여러나라의 동전과 같았던 우리들..한데 섞이고 녹아 똑같은 모양의 생각들.. 우리는 군인이며, 그런 다음에야 특별하고도 부끄러운 방식으로 개별적 인간이 된다.">

<"전선에서의 긴장감과 불안감, 아무도 지켜주지 않는다는 외로움, 익숙해버린 포탄소리 총탄소리, 이미 일상이 돼버린 배고픔과 전우의 죽음, 이런 것들을 겪는 이들에게 술 한잔, 담배 한대, 통조림 하나에 웃을 수 있지만 그 웃음은 진실도 즐거움도 아니다.">

<"..집중포격, 저지포격, 연박포격, 지뢰, 독가스, 탱크, 기관총, 수류탄... 세상의 온갖 공포를 다 담고 있는 단어들...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리의 삶으로부터 도피하고 있다... 우리는 열여덟살이었을 때 세상과 현 존재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에 대고 총을 쏘지 않을수 없었다...다음으로 터진 유탄은 바로 우리의 심장에 명중했다... 우리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오직 전쟁 밖에 없는 것이다... 청춘과 추억과 청춘의 풍경이 다시 주어진다해도 어떻게 해야 할지 속수무책일 것이다... 청춘이 우리에게 부여한 저 부드럽고 은밀한 힘이 다시는 살아날수 없을 것이다... 어제 죽은 전우만이 추억일 뿐이다...">

 

전우의 죽음이 슬프기도 전에 당장 배식되는 먹거리가 늘어난 것을 행복해 한다.

먹물의 폼잡는 헛소리는 개소리, 소화와 배설의 농담과 음담패설의 천박성만이 즐겁다.

죽은 전우의 군화를 차지하게 되어 그 횡재가 기쁠 뿐이다.

병상의 전우가 죽자 자신은 지금 살고 있다는 환희로 야전병원 밖 가도를 달린다.

 

어린 병사, 포울 바이머는 증얼거린다.

<"우리가 삶에 대해서 아는 거라곤 죽음 밖에 없어.">

고향의 가족이나 친지들, 그들은 추상이 되어버린다.

'파울 하이머'의 고향집 휴가중, 빨리 전선으로 도망가버리고 싶은 그 소회(所懷)를 나는 충분히 이해할수 있었다.

사랑하는 가족 친지들이지만 그들은 군인의 리얼리즘에는 결코 동참할수 없는 것이다.

의식구조가 그렇게 상이한 것이다.

그 옛날 내 할랑한 후방군인의 휴가마저도 그러하였을진대, 죽음이 언제나 주변에 어슬렁거리는 전방에서 잠시 돌아온 포울이야 오죽 했으랴.

후방(後方)의 가족들은 '상투성과 피상성'의 생경함일 뿐이다.

그들은 군인 안으로 들어올수 없다.

그렇게 건강하고 무사한 피상으로 존재하고 있는 그들을 그저 만족해 할 뿐이다.

 

반면, 병사에게 있어서 전우(戰友)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전쟁터의 친구는 후방에 아스라하게 포진하고 있는 가족이나 친지처럼 피상(皮相)도 아니고 상투성(常套性)도 아니다.

두려움과 외로움에 사로잡힌 정서가 현실속에서 상호 투사되는 가장 실체적 관계이다.

불확실성의 절망을 함께 지니고 있는 운명적 동류의식(同類意識).

가장 실질적인 안식(安息)의 대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작가는 그것을 '사형선고를 받은 자들 간의 절망적인 협조정신'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유치찬란한 패설(悖說)을 지껄이며 낄낄거린다.

무슨 폼잡는 재치나 잘난척 사변 한 방울 섞을 필요가 있겠는가.

이미 한 올의 명분도 잃어버린 사람들, 2년전 그토록 격앙되어 군대로 내몰았던 애국심따위는 개나 먹으라지.

자신의 생존을 찰라적으로 안도(安堵)할수 있는 누구보다 가까운 사람.

그들끼리는 죽음까지도 낄낄거릴수 있어야 한다.

 

'서부전선 이상없다'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나 기성세대(旣成世代)를 향한 분노, 또는 후방(後方)의 상투성에 대한 시니시즘, 그런 부분에서 다소 애상(哀想)의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하였지만 이 소설의 허무주의는 내게 몹시 황량하고 건조하였다.

 

역시 레마르크다운 간결한 문체(文體)로 씌어진 소설 그의 또다른 장편소설 '개선문'.

'서부전선 이상없다'는 '개선문'의 허무와는 색감이 달랐다.

그 옛날, 나는 개선문의 문학적 분위기에 흠뻑 매혹되었었다.

인간성을 장식(裝飾)하고 인생을 수사(修辭)하는 작가의 문학적 감성과 문학적 감동에 나는 속절없이 빠져들었던 것이다.

'개선문'은 젊어 우울했던 내 정서와 그리 궁합이 맞았던 모양이다.

세기말의 도시 파리의 밤거리,

몽마르트 언덕 디아스포라들의 여인숙 앵테르나시오날,

지하술집 카타콤.

시뮬라크르(허깨비)로 살아가는 부서진 인간인 '라비크'

나른한 퇴폐미의 '조앙 마듀'

'살루트'

남자와 여자는 잔을 부딪는다.

사랑과 허무의 잔, 독한 능금술 칼바도스.

'개선문'은 절망이 아름다운, 어두운 색조로 농염하고 난만(爛漫)한 꽃이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마. 그리고 아무것도 묻지 말고. 저기 가로등의 불빛과 갖가지 빛깔의 네온이 보이지? 우리는 죽어가는 시대에 살고 있는거야. 그리고 이 도시는 생활이 무서워서 떨고 있지. 우리들은 모든 것에서 격리되어 있어, 우리에겐 이제 우리의 마음밖에 남은 것이 없어.">

 

레마르크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모두 어둠 저 쪽으로 스며들듯 사라진다.

책들을 꺼내 종장의 대목을 베껴 쓴다.

 

<에뜨와르 광장은 어둠만이 짙게 깔려 있었고, 너무 어두워서 개선문조차 볼 수 없었다. -개선문->

<다만 그의 시야에 잡초가 들어왔을 뿐이다. 밟혀서 짓이겨진 한 포기의 풀이 점점 키가 커지고 있었다. 그는 전에도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있었다. 그것이 언제였을까? 그는 도저히 기억해 낼 수 가 없었다. 마침내 풀이 무럭무럭 자라나 온 하늘을 가리게 되었다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 -사랑할 때와 죽을 때->

<온 전선이 쥐 죽은듯 조용하고 평온하던1918년 10월 어느 날 우리의 파울 보이머는 전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사령부 보고서에는 이 날 '서부전선 이상 없음'이라고 적혀있을 따름이었다. -서부전선 이상없다->

 

“죽은 사람에게는 누가 전쟁에 이기느냐 하는 건 쥐뿔만 한 의미도 없어.”

이 대사는 전쟁풍자소설 ‘캐치22’에 나오는 대사다.

 

서부전선 이상없다.

감상적으로 마무리하려니 무언가 미진하다.

집단광기에 대하여 한마디 얘기해야겠다.

 

<어른이 나은 것은 상투어를 사용하고 그에 맞게 능숙하게 일을 처리하는 능력뿐이다. 국가에 대한 충성이 최고라고 지껄이는 동안 우리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이제 깨닫는다.... 우리는 어느새 끔찍할 정도로 고독해 졌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그 고독과 싸워나가야 했다. 우리더러 강철같은 청춘이라구? 스무살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어리다고? 청춘이라고? 그건 다 오래전의 일이다. 우리는 어느새 노인이 되어 있는 것이다.>

 

허황한 애국심에 들뜬 헛소리로 아이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담임선생 칸토레크.

저 선생짜리의 집단사고에서 우러난 파토스를 나는 야만(野蠻)으로서 경멸한다.

집단적 파토스가 무서운 것이다.

격앙된 감정으로 외치는 붉은 함성, 그 프로파간다를 경계하여야 한다.

전쟁을 관리하는 기술자(정치가, 장군, 관료)보다도 경계해야 할 것은 그런 것들이다,

좌우지간 그것은(전쟁 관리자), '이성의 모습을 띈 영역'에서 계획되고 통제된 것들이니까 말이다,

집단적 파토스.

그것은 스스로 속아 넘어가는, 스스로가 만든 데마고기(Demagogy,허위선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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