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소크라테스의 변명>
-플라톤 作-
***동우***
2014.07.12.
책부족 텍스트, '소크라테스의 변명'
오늘 새벽 처음 읽었습니다.
귀에만 익었던 글, 지적허영의 강박도 없지 않았을겁니다.
어려운 글이겠거니 하였는데, 뜻밖에 수월하게 읽혔습니다.
고대 아테네 사회를 들여다보는 흥미도 예사롭지 않았고, 소크라테스라는 인류사 위대한 인물의 면모를 느낄수 있는 기회의 독서였습니다.
분량도 많지 않아요.
함께 읽어요.
두번으로 나누어 올립니다.
소크라테스(BC469~BC399)로 부터 출발하여 플라톤(BC427~BC347) 아리스토텔레스(BC384년~BC322)로 이어지는 서양 철학계보의 시원(始原).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BC399년, 부당한 죄상으로 피소되어 사형 당한 소크라테스의 법정(法廷) 변론인데 재판 받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이 쓴 것입니다. ('크리톤' '파이돈' '향연'과 함께 이른바 플라톤의 4복음서라 일컬어진다지요.)
소크라테스에 대한 부당한 죄상의 중요한 원인이 된 것은 무지(無知)에 대한 지(知)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는 자기는 모르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과 같으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그만큼 다른 사람에 비하여 얼마간은 지자(知者)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공자님(BC551~BC479)도 말씀하셨다지요?
아래는 검색한 문장입니다.
<子曰 由아 誨女知之乎인저 知之爲知之오 不知爲不知이 是知也니라
"유야! 내 너에게 안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주겠다. 아는 것을 안다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는 것, 이것이 곧 아는 것이다.">
우리가 상투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라는 명제도 대충 이런 뚯인가 봅니다만.
감히 나 따위의 蛇足운....
입을 다물고 다른 이의 글을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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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BC469~ BC399)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테네 출생.
아버지 소프로니스코스는 석조가였다고는 하나 확실하지 않으며, 어머니 파이나레테는 산파술에 능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어린 시절부터 '다이몬의 소리'를 듣고, 자주 깊은 몰아상태를 경험하는 신들린 사람이었다고 한다.
만년에는 후대에 악처로 유명했던 크산티페와 결혼하였다.
펠로폰네소스전쟁 때에 중장(重裝)보병으로 북그리스로 2회, 보이오티아로 1회 종군했으며, 이때 훌륭한 인내심과 침착한 용기를 보여주었다.
그는 종군 때 이외에는 아테네를 떠난 적이 없었는데 젊은 시절에는 자연에 대한 연구도 하였으나 그 뒤에는 인간문제에 관해서만 관심을 기울여, 아테네의 거리와 시장, 체육관 등에서 대화와 문답을 하면서 지냈다.
그의 인격과 유머가 있는 날카로운 논법에 공감하는 젊은이들이 '소크라테스의 동아리'를 형성하였고, 플라톤도 그 모임에 들어 큰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펠로폰네소스전쟁 종결 5년 뒤인 기원전 399년 신에 대한 불경죄라는 죄목으로 고발을 당해 재판에서 사형을 받아 일생을 마쳤다.
그는 저서를 남기지 않아 플라톤의 대화편(주로 초기)와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 관계 저서를 통해 그의 생애와 사상을 알수 있을 뿐이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이 주장하는 '덕'과 세상의 이른바 지자(知者)라는 사람들의 '지'에 대해 근본적으로 묻거나 밝혀내려 했다.
덕은 지와 동일시되며 혼의 비합리적인 부분 및 감정 등을 배제한 지의 추구만이 참으로 행복하게 사는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원래 결코 실수하는 일이 없는 절대 확실한 것이라면 참된 지자는 신뿐이며, 우리 인간은 선과 미의 사항을 어느 한 가지도 확실히 알지 못하는 존재라고 하였다.
이런 자각을 하게 된 것은 '소크라테스 이상의 지자는 없다'고 한 델포이의 신탁이었다.
소크라테스는 그 뜻을 해명하기 위하여 세상에서 지자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사람들을 음미하며 편력한 결과, 그 사람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는데도 알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자신만은 무지를 자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신탁의 참뜻은 소크라테스의 이름을 빌려 모든 인간의 무지를 깨닫게 하는 데에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덕이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항을 음미, 논박하며 무지를 깨닫게 하는 활동을 '신명(神命)'으로 알고 그 스스로에게 부과한 것이었다.
이 문답의 과정에서 제시된 지의 기준의 엄격성, 논리와 방법에 대한 명확한 의식, '무엇인가'라고 하는 물음에 담겨진 본질에 대한 지향 등은 그의 생사에 대한 본연의 자세와 함께 철학에 커다란 전환과 비약을 가져다주는 원동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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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우***
2014.07.13.
[생각컨대 죽음이란 인간에게 있어 복의 최상의 것이 아닌지 어떤지를 그 누구도 알고 있지 못하다. 그런데 사람은 그것이 악의 최대의 것임을 확지(確知)하고 있는 듯이 이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것이야말로 그 악평 높은 무지, 즉 스스로 모르는 것을 안다고 믿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여러분, 나는 필경 이 점에 있어 스스로 타인보다도 현명하다는 사실이 허용된다면, 그것은 바로 다음 같은 점, 즉 나는 명부의 일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제대로 모르는 대신에 또한 알고 있다고 망신(妄信)하고 있지도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부정을 행하는 것과 그것이 신이건 사람이건 무릇 뛰어난 자에게 따르지 않는 것이 악이며 치욕임을 나는 알고 있다. 그리하여 나는 그것이 악임을 알고 있는 악 대신에 그것이 혹시 복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결코 두려워하거나 피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여러분은 아뉴토스의 말에 따라도 좋고, 따르지 않아도 좋으며, 또한 나를 방면해도, 방면을 안 해도 좋다고, 어쨌거나 나는 절대로 나의 행동을 바꾸지는 않으리니, 설령 거듭 죽음의 운명에 위협 당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죽음 앞에서 의연한 소크라테스, 자신의 죄상의 논고에 대한 신랄한 질타는 논리적이면서도 시니컬한 유모어가 배어 있습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이성과 양심의 배후.
난 그곳에 신의식(神意識)이랄까.. 일종의 불가지영역에 대한 신비주의가 자리잡고 있었던듯 생각되어 집니다.
필경 2500년전 아테네인의 보편적 세계관이 그러했을테지만, 소크라테스에게서는 더욱 뚜렷하게 그에 기반한 일종의 선민의식과 소명의식이 짙게 느껴집니다.
일찌기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보다 지혜로운 사람은 없다."는 델포이의 신탁이 있었는데, 그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겸손합니다만.
아래, 이 책의 저자 '플라톤'에 관한 짦은 소개 베껴 올립니다. (글쓴이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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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Πλάτων BC 427~ BC 347)
인류사에 큰 영향력을 가진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철학적 대화편의 저자이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공부하였던 아테나이에 있는 아카데메이아를 세운 장본인이다.
플라톤은 아카데메이아에서 폭넓은 주제로 강의하였으며, 특히 정치학, 윤리학, 형이상학, 인식론 등 많은 철학적 논점들에 대해 저술하였다.
플라톤의 저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대화편이다.
비록 일부 편지들은 단지 그의 이름을 붙여서 내려오고 있기는 하지만, 플라톤에 의한 진짜 대화편은 모두 온전하게 전해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현재 학자들의 합의에 따라, 그리스인들이 플라톤의 것으로 생각하는 '알키비아데스 I'과 '클레이토폰' 등과 같은 대화편들은 의심스럽거나 또는 '데모도코스'와 '알키비아데스 II' 등과 같은 대화편들은 대개는 위조된 것으로 여겨진다. 편지들은 대개 거의 모두 위조된 것으로 여겨지며, 일곱번째 편지만이 예외로서 위조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대화편에 자주 등장하는 주요 등장인물이었다.
이는 플라톤의 대화편에 있는 내용과 주장 중 어디까지가 소크라테스의 견해이고, 어디까지가 플라톤의 견해인지에 대한 많은 논쟁을 불러왔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어떠한 것도 글로서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종종 "소크라테스의 문제" 이라 부른다.
그러나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따라서 플라톤의 많은 아이디어들, 적어도 그의 초기 연구들은 아마도 소크라테스의 것을 빌려오거나 발전시켰을 것이다.
그가 이성 우위의 전통을 가진 서양 철학에 미친 영향은 더할 수 없이 크다.
영국의 철학자인 화이트헤드는 "서양의 2000년 철학은 모두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 라고 말했으며, 시인 에머슨은 "철학은 플라톤이고, 플라톤은 철학" 이라 평하였다.
소크라테스의 변명(고대 그리스어: Άπολογία Σωκράτους)은 플라톤의 저작 가운데 대화록이 아닌 유일한 작품이다.
작품의 주제는 이미 제목이 예시하듯이 소크라테스가 법정에서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면서, 당시의 그리고 일반적으로 인간 생활에서 관찰하게 되는 사회적, 윤리적 문제점에 대한 토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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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우***
2014.07.15.
개별적 자각과 성찰.
그것이 전제되지 않은 집단의 힘...
아래, 책부족 김주일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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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99년, 30인 과두정치의 독재로부터 해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그리스 아테네의 법정에 한 남자가 섰다.
그는 아테네의 알로페케 출신이었고, 그의 아버지는 석공으로 알려진 소프로니스코스였다.
그의 이름은 소크라테스. 70의 나이에 그는 아테네의 법정에 섰고, 재판정에서는 플라톤이 스승의 재판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날의 기억들은 평생 플라톤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고, 그가 글로 옮긴 그 기억들은 <소크라테스의 변론(Apologia tou Sōkratikou)>(박종현 옮김, 서광사 펴냄)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았다.
그는 무엇을 잘못했기에 아테네의 법정에 서게 되었을까?
또는 사람들은 그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했기에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끝내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일까?
기원후 3세기 경 쯤에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의 철학사가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기원후 2세기에 활동한 파보리누스의 말을 통해 소크라테스 재판의 선서 진술서 내용을 전한다.
"피토스 구민(區民) 멜레토스의 아들 멜레토스가 알로페케 구민(區民) 소프로니스코스의 아들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맹서와 함께 다음과 같은 논고를 내렸다. 소크라테스는 나라가 인정하는 신들을 인정하지 않고, 새로운 다른 신령들을 들여오는 죄를 범했다. 그리고 그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죄도 범했다. 형벌은 사형에 해당된다."
뭔가 이상하다.
우리가 아는 상식에 비추어 볼 때, 이게 죄라도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라고는 선뜻 생각되지 않는다.
나라가 인정하는 신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가 알기로 그리스의 종교는 다신교로서 다양한 신들을 인정하는 데 상당히 관용적인 것으로 알고 있다. 서양 중세의 마녀 사냥도 아니고, 이건 뭔가?
마찬가지 이유에서 새로운 신령들을 들여오는 게 범죄인가? 신흥 종교를 들여왔다는 소리인가?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
타락이라는 말도 애매하지만, 누구를 어떻게 타락시켰는지 분명히 나와 있지 않다. 사람을 어떻게 타락시키면 사형을 받을 수 있는 걸까?
소크라테스 재판의 진실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진실을 알기 위해 우리가 의지할 만한 자료는 많지 않다. 적어도 사실의 측면에서는 그렇다.
소크라테스라는 사람이 있었고, 그가 아테네 법정 앞에서 이야기한 죄목으로 재판을 받아 기원전 399년에 사형을 언도받고 얼마 후에 독배를 마시고 죽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인정되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정확히 어떤 이유로 사형 선고를 받았고, 또 그가 그에게 주어진 독배를 마다하지 않고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논란이 있다.
소크라테스가 죽은 후 그의 제자를 자처하는 사람들과 그의 친구들이 그의 죽음에 대해서 많은 글을 남겼다.
그중 대부분은 역사 속에서 사라져갔지만 소크라테스의 제자로서 둘 다 비슷한 연배의 플라톤과 크세노폰의 글은 남았다.
그들은 비슷한 시기에 소크라테스의 배움을 받았고 <소크라테스의 변론>이라는 같은 제목의 책을 쓰기도 했고, 소크라테스를 대화의 주인공으로 삼은 '소크라테스적 대화편'들을 다수 저술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이 정작 책에서 보여주는 소크라테스는 꽤나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역사적 기록의 문제였을 소크라테스의 재판에 대해서도 두 사람은 상당 부분 다른 이야기를 전해준다.
물론 크세노폰은 재판 당시 아테네에 없었기 때문에 당시 재판을 참관했던 헤르모게네스가 전해준 말을 토대로 글을 재구성하였다고 하지만, 플라톤은 자신이 쓴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이름을 거명하게 하여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음을 밝히고 있는데도 소크라테스가 재판정에서 했다고 헤르모게네스가 전하는 내용이 플라톤의 글에 없거나 다른 맥락에서 전달되고 있다.
따라서 완전히 일치하는 증언이 없다는 점으로 볼 때, 사실의 차원에서 소크라테스와 관련된 객관적 진실을 알 길은 원리적으로 차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이라는 사건의 진실을 전혀 다른 차원에서 접근한 사람의 기록을 갖고 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죽어가는 과정을 직접 목격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일곱째 편지>에 썼듯이 소크라테스의 죽음으로 인해 플라톤은 본격적으로 철학자의 길을 가게 된다.
정치적으로 전도유망한 명문가 출신이었던 젊은 플라톤이 정치의 길을 접고 철학을 통해서만 인류의 구원이 가능하다는 깨달음을 얻는 사건이 바로 소크라테스의 죽음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에게는 소크라테스가 그저 한 사람 아니라 문제적 인간이었고, 그의 삶 자체가 플라톤에게는 철학적 해석의 대상이 되는 철학적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평생에 걸친 플라톤의 소크라테스 해석의 출발점에 <소크라테스의 변론>이 놓여 있는 것이다.
플라톤으로서는 소크라테스가 왜 죽었고, 죽을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해야만 자신이 구하고자 한 그리스와 이 세상의 현실이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해의 차원은 단지 어떤 말을 실제로 했는지 안 했는지 하는 사실적 기록의 차원이 아니라 사건의 철학적 의미를 드러내는 언어로 구성되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플라톤에게는 소크라테스가 실제로 했던 말이 아니라 했어야 했던, 또는 실제의 말이 실질적으로 의미하고자 했던 말을 그의 글로 옮기려 했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그가 글로 옮긴 소크라테스의 재판은 해석을 거친 재판이고, 사법적 사건으로서의 재판이 아니라 철학적 사건으로서의 재판이었다는 말이다.
사건의 진실 : 소크라테스의 죄목과 플라톤의 해석
이제는 이미 많이 알려진 일이지만, 우리가 소크라테스의 말로 기억했던 "악법도 법이다"란 말은 플라톤의 책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그런 취지로 했을 법한 말은 플라톤의 <크리톤>에서 찾아볼 수 있다.
탈옥을 권유하는 자신의 친구 크리톤을 설득하면서 소크라테스가 했던 말을 그렇게 해석해 볼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국법을 의인화시켜서 말을 하게 하면서 국법의 혜택을 받으며 살아온 자가 이제 와서 국법을 어기고 탈옥을 하는 것이 정의롭지 못하다는 결론에 이르는 대목이 그렇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는 이와 반대되는 취지의 말을 소크라테스가 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만약에 재판관들이 철학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에서 자신을 풀어주더라도 자신은 이에 응하지 않겠다는 소크라테스의 말이 그것이다.
학자들은 <크리톤>에서 한 말과 여기서 한 말이 맞지 않아 일관된 해석을 하기 위해 논란을 벌인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보다는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철학을 계속하겠다는 소크라테스의 이 말을 통해 플라톤이 소크라테스가 왜 죽을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찾는 실마리로 이해해보고자 한다.
소크라테스가 철학을 계속 고집하는 이유는 그것이 신이 자신에게 준 사명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지혜와 덕에 대한 주제를 놓고 서로 대화를 나눠 무지를 일깨우고 자신의 혼을 돌보게 하는 것, 그것이 철학이고 그 철학을 통해 아테네인들을 오만의 미몽으로부터 깨어나게 하라는 것이 신이 자신에게 준 사명이라고 소크라테스는 믿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들의 법정보다 우선한다.
이런 소크라테스의 신념은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소크라테스의 신앙심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논의들이 가능하지만 적어도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 그는 두 가지 형태의 종교적 믿음을 갖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하나는 자신이 어릴 적부터 들어온 신령스런 목소리 또는 징후, 또 하나는 델피에 있는 아폴론 신전의 신탁이다.
플라톤이 해석한 신령스런 목소리는 소크라테스에게 가끔 나타나 그가 막 하려고 하는 어떤 일을 하지 말라고 명령한다.
그는 재판 당일 재판을 받으러 오는 길 내내 그 신령스런 징후가 나타나지 않아, 그것이 곧 자신이 재판에서 하게 될 말 전부에 대한 신령스런 존재의 허가라고 이해한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친구 카이레폰이 아폴론 신전의 무녀에게서 받아온 신탁이다.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보다 지혜로운 사람은 없다."
그는 이 말의 진실 여부를 자타공인 지혜롭다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확인해본 결과, 자신은 무지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무지하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점에서 자신이 지혜로운 것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플라톤이 이런 이야기들을 이 책에서 하는 이유는 우선 소크라테스가 신앙심이 없어 아테네가 인정한 신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죄목에 대해 반대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반론이 성공적이었다면 소크라테스는 죽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반론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아니,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에게 주어진 죄목에 대해 직접적인 반론을 할 생각이 없었다.
그건 그들이 제시한, 또는 재판정이 인정한 죄목이 진정한 죄목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크세노폰의 반론은 이와 달랐다.
소크라테스를 다룬 또 다른 크세노폰의 책인 <소크라테스 회상>에서 그는 소크라테스가 전통적인 믿음의 관례들을 고수하며, 사람들이 잘 아는 그의 신령스런 존재도 아테네의 다른 신앙과 마찬가지로 길흉화복을 점쳐주고 소크라테스도 그것을 믿었으므로 그는 무죄라고 말한다.
하지만 플라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신령스런 존재가 아테네인들의 신들과 달리 적극적인 예언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고, 아폴론의 신탁은 다른 경우에 주어지는 신탁처럼 전쟁에서 이길지 질지, 언제 큰돈을 벌지를 일러주지 않았다.
소크라테스의 신들은 그에게 옳지 않은 일을 하지 말라고 했고, 옳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반성하여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라고 명했다.
이 점에서 그는 아테네가 인정한 기복의 종교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는 유죄판결을 받았다.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는 것에 대해서도 그렇다.
사실 이 재판이 성립되게 된 배경에는 소크라테스를 따라다니던 인물들 중 일부가 30인 과두정의 폭압 정치에 가담했거나 아테네를 배신했었기 때문일 수 있다.
하지만 30인 과두정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민주파 정권은 시민들이 30인 과두정에 부역했던 과거의 행적을 묻지 않는다는 대사면령을 내렸고, 이에 따라 과두정 관련 혐의는 기소 사항이 될 수 없었다.
그렇지만, 크세노폰은 이것을 재판 배후의 중요한 사안이라고 보고 이에 대해서 변론한다.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은 소크라테스에게 가르침을 받아 아테네를 배신한 것이 아니라 소크라테스의 곁을 떠남으로써 그렇게 된 것이라고.
그러나 플라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는 먼저 소크라테스가 누구를 가르친 적이 없고, 따라서 제자들도 없다고 말하게 한다.
무지자를 자처하는 소크라테스가 누군들 가르칠 수 있었겠느냐고 말한다.
다만 소크라테스는 자타공인 지혜로운 자들을 찾아다녔고, 그들의 지혜로움과 자신의 무지를 확인하고자 하는 마음에 그들에게 질문을 한 적은 있다.
하지만 그들은 번번이 제대로 답하지 못했고, 끝내 자신들의 무지를 고백하게 되었다.
그 과정을 지켜보던 젊은이들이 소크라테스의 문답하는 법을 흉내 내 다른 어른들에게 해봄으로써 어른들을 불쾌하게 했으며, 그들은 이것을 곧 소크라테스의 소행이라 여겨 소크라테스를 괘씸하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무지는 지혜에 대한 무지를 말한다.
무지자를 자처했던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에서 가장 지혜롭다는 말은 누구도 지혜에 대해서 자신할 수 없고 가르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철학은 지식으로서 누구에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철학을 함으로써 깨닫는 것이고, 그것은 대화를 통해 자신의 무지를 깨우치는 것을 전제할 것이다.
하지만 버릇없는 젊은이들은 기성세대의 권위에 소크라테스의 무기를 들고 저항했으며, 그 결과는 뭣도 모르고 나대는 젊은 애들을 버릇없게 만든 소크라테스라는 판단이었다.
개인과 사회의 대립 : 옳고 그름과 다수의 문제
소크라테스는 옳고 그름이 기준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옳다고 여기는지가 기준이 되는 집단적 민주주의의 시대에서 올바름을 찾는 삶을 산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이 올바름 자체를 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다만 올바름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옳지 않다고 판단되는 것을 하지 않으려고 했고, 옳다고 판단되는 것을 하려고 했다.
그것은 정치적인 행동이 아니라 자신의 개인적인 신념이었다.
하지만 그의 신념은 다른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불편하게 했다.
개인이 개인으로서 자신의 행위에 신념과 책임을 갖지 않고, 패거리가 되어 개인에 대한 비판이 집단에 대한 비판이 되고, 집단에 대한 비판이 개인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여지는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의 시대에서 소크라테스는 개인으로서 사형을 언도받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내세우려는 오만한 개인이었을까?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읽다보면 그런 불편한 감정이 감지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 사람은 도대체 뭐가 그렇게 잘나서 재판관들을 무시하고 사람들을 깔보는 걸까?
하지만 책을 다시 읽어가다 보면 나의 불편한 감정의 실체를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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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과 함께 위의 김주일님의 글을 씹어가면서 읽으니 나와 같은 둔재에게도 뭔가 집히는바 있습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사회적 예의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심지어 철학적 진실의 논쟁에서도 우리는 너무 모난 말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의 도덕적 기준이 탁월하며 명민한 정신을 갖고 있는데, 다만 그는 말을 삼갈 생각이 없고 겸손을 떨 생각도 없으며 자신과 타인의 삶을 따져 묻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반응은 어떨까요?
혼자 잘났어. 지는 얼마나 잘났다고. 어디 얼마나 잘났는지 두고 보자.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이 어디 있어. 아직 세상 무서운 걸 모르는군. 등등….
집단의 힘은 큰일을 이루어냅니다.
소박하게 보면 세상의 혁명들은 이름 모를 사람들이 집단으로 실체를 드러냈을 때 이루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 자각이 전제되지 않는 집단의 힘은 무서운겁니다.
큰일을 이루어내지만 그것이 좋은 일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한편에서는 자유를 끊임없이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요?
자유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 자체로 누려야 할 지상 최대의 가치인가요?
집단 지성을 이야기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비판할 때가 아니라 뭉칠 때라는 이야기들도 끊임없이 나돕니다.
하지만 집단의 똘똘 뭉친 틈서리에 소크라테스와 같은 꼬장꼬장하게 옳고 그름을 따지고, 모르는 걸 모른다고 말하는 인물 한 둘을 포용할 수 없다면, 21세기 최첨단 정보와 개성의 시대에도 집단의 광기로부터 우리는 여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그려.
집단의 이름으로 큰일을 낼 것 같은 사람들을 보면서 요즘 드는 생각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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