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원유회> <가을소나타> <나의오이디푸스콤플렉스> <타베티>
<원유회>
-캐더린 맨스필드 作-
***동우***
2013.10.03 05:05
캐더린 맨스필드 (Katherine Mansfield, 1888-1923)의 ‘원유회’.
원유회.
어여쁜 로라
이 소설을 읽을 적마다 나는 로라가 숨막히도록 어여쁘다.
“너의 행복의 넘침에는 언제나 남의 몫이 들어가 있다”
위고의 말이었던가.
예전, 지인 한 사람은 육교나 지하도의 지름길을 놔두고 늘 몇블록이나 돌아서 다니고는 하였다.
하도 이상하여, 결국 그 연유를 알아냈는데, 육교나 지하도에 엎드린 걸인(노인이거나 어린아이)를 피해 가려고 그랬던 것이다.
그 시절에는 엎드려 구걸하는 노인이나 어린아이가 거리에는 흔하였다.
입고있던 제 낡은 점퍼를 휙 벗어 던져주고는 무슨 도둑질이라도 한 놈마냥 냅다 뛰어 도망가는 그를 딱 한번 목격한 적이 있었는데, 그토록 불쌍한 사람들을 못견뎌 하고 미안해 하는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세상에는 혹간 그런 사람들이 있다.
그 반대 극에 사이코 패스가 있듯이.
내 손주들 비니미니, 애니메이션을 보다가 가엾은 주인공에게 눈이 촉촉해 질 적에는 숨막히게 어여쁜 모습으로 할비 심금에 끼쳐온다.
그런때면 콧등이 싸해진다.
<로라는 어린애처럼 큰소리로 흐느껴 울었다. "이런 모자를 쓰고 와서 미안해요.">
캐더린 맨스필드의 ‘원유회’
몇 번이나 읽었던 소설인데 이 대목에 이르면 나는 언제나 목이 멘다.
아래는 이문열의 해설
++++
<소유가 연출하는 세상의 양면성>
-이문열-
이 작품에 나오는 세리단 일가의 사람들은 특별히 악하거나 무정하지는 않다. 다만 그들의 소유가 결정한 삶의 조건에 길들여져 가난한 이들에 대한 이해나 관심이 적을 뿐이다. 주인공 로라도 그런 일가의 한 구성원이었다.
가든 파티, 쾌청한 날씨, 잘 가꾸어진 넓은 정원에 쳐지는 천막, 집안을 꾸미고 있는 꽃들, 배달되어 오는 파티용 물품들- 모든 것은 아직 충분히 철들지 않은 로라를 들뜨게 하기에 충분했다. 사람은 대개 자신이 몸담고 있는 것이 세상의 전부인 양 착각하는 법이다. 그날 로라에게도 세상은 잘 가꾸어진 정원에서 열리는 즐거운 파티 준비로 시작되었다.
그런데 파티 준비가 다 되어갈 무렵 우연히 엿듣게 된 불행한 소식이 로라의 관심을 그녀가 알지 못하는 세계로 이끌었다. 길 아래편 가난한 이들이 사는 마을의 한 마부가 사고로 죽은 일이 그랬다. 그 마부는 아직 젊은 데다 한 집안의 가장이었는데 특히 로라를 가슴 아프게 한 것은 그가 남긴 미망인과 다섯이나 되는 아이들이었다.
하지만 다른 가족들에게는 그 사건이 별 것 아니거나 거의 무의미했다. 가까운 곳에서 사람이 죽었으니 파티를 연기하자는 로라의 제의는 한 마디로 거부되고 파티는 예정대로 진행된다. 그러다가 파티가 끝나고 손도 안댄 음식이 남게 되자, 버리가 아까운 여분이 생겨서야 이는 가진 자의 자선심이랄까, 다른 가족들도 비로소 이웃의 불행을 떠올린다.
로라는 그들 나름의 자선심이 담긴 음식바구니를 죽은 마부의 집에 전달하는 역할을 맡는데 거기서 자신이 익숙해져 있는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보게 된다. 우아함, 교양, 예의같이 자신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나 삶의 양식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삶이 있고 파티에서 남은 케이크 따위로는 전혀 위로가 될 수 없는 불행이 거기 있었다.
그런 낯선 세계와의 접촉은 로라에게 충격을 주어 삶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만든다. 아직 어려서 세계와 인생의 전모를 다 볼 수 없지만 적어도 밝게만 보아온 그뒤에는 자신이 모르고 있었던 어두운 진상이 감쳐져 있다는 자각 정도는 얻은 듯하다. 머지않아 그녀는 못다맺은 마지막 말 "인생이란..." 의 뒤를 마저 채우게 될 것이다.
나는 이 '원유회'를 분류하면서 '성장과 눈뜸'편에 넣어야 할지 '삶의 어두운 진상'편에 놓아야 할지 망설였다. 그만큼 이 작품에는 그 두 측면이 고루 갖추어져 있다.
지은이 케더린 맨스필드는 뉴질랜드에서 출생해 주로 영국에서 활동한 여류작가이다. 외롭고 고통스레 살다가 지병인 폐결핵으로 서른다섯의 젊은 나이에 죽었는데 일기와 서간집 평론집 약간이 있고 소설 작품은 모두 단편뿐이다. 체홉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녀를 현대 영미 최고의 단편작가로 평하는 사람도 있을 만큼 사후의 평가는 대단하다.
++++
<가을 소나타>
-잉그마르 베르히만 作-
***동우***
2013.10.05 06:42
횡재.
영화도 연극도 소문으로만 들었던 '가을 소나타' 를 오늘 새벽 주워 읽었다.
영화 <1978년도 영화- 어머니 샬로트역의 잉그릿 버그만(마지막 출연 작품) 딸 에바역의 '리브 울만'>가 찾아질런지 모르겠지만, 이 시나리오를 읽는 것으로도 족하다.
스웨덴의 영화작가 '잉그마르 베르히만' (1918~2007)
잉그마르 베르히만 감독의 영화를 너덧편쯤 보았을 것이다. <제7의 봉인, 침묵, 산딸기가 떠오른다-모두 직접 시나리오를 썼을 것이다>
깊이있는 흑백영상으로 인생과 종교와 죽음을 천착하는 그의 철학적 사유를 확연히 이해할수는 없었지만 그의 영화는 언제나 내게 어둡고 우울하지만 진지한 무게감을 실어주었다.
영상 철학가로만 기억하였는데, 그가 이런 섬세한 작품을 썼다니.
고집스러운 예술가적 자긍심과 이기주의와 위선, 어머니로서의 부끄러움과 죄의식...딸의 강박과 모정에 대한 허기의 기억, 원망과 미움....
한세상의 쓸쓸함이여, 저물녘이라야 화해와 용서의 아름다움이 보이는가.
아, 가을에 이르러 이윽고 사랑이 스미는가.
가을 소나타.
나의 어떤 페르소나.
여름처럼 헐떡이다가 가을처럼 투명하고 쓸쓸하게 무언가 내 자아에다 속삭인다.
아, 음악.
근래 본 가장 좋은 영화, 마지막4중주가 오버랩된다. <그 리뷰도 써야 하는데>
현악사중주의 앙상블에 헌신하는 어머니, 알렉스는 어머니를 비올라에게 빼앗겨 버렸다.
여름 겪느라 아직 팔팔한 세 멤버에게 말하였던 것은 자신의 세월이 저물어가는 피터였었지..
<“너희는 음악에 대한 존경심이 없어......제발 우리의 앙상블, 사중주단 푸가를 멈추지 마.”>
사랑이란 여름의 오르가즘을 보내고 가을에사 얻어지는 삶의 앙상블.
욕망과 허영과 허위와 열정의 계절에는 앙상블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가을 소나타.
아아, 가을이다.
***꿈쟁이***
2013.12.24 13:55
잉글리드 버그만이 이기적인 엄마로 나오지요.
옛날에 봤을때는 지루하기만 했었는데 얼마전에 다시 봤더니 장면 하나나가 되살아 나면서 오래 여운이 남더라고요.
각자 지닌 사랑의 뒷모습을 느끼면서 깊은 공감을 했더랬지요..
***동우***
2013.12.25 09:17
꿈쟁이님.
'잉글릿 버그만'하면 카사블랑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아나스타샤등등 이쁘고 고아한 모습만 떠올려지는데 저 내면적 섬세한 심리의 샬로트역을 어떻게 연기하였을까 궁금하네요.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오리엔트 특급'에서도 후줄근한 역을 맡았던데.ㅎㅎ
<나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프랭크 오코너 作-
***동우***
2013.08.13 04:57
'유아성욕' '무의식'과 더불어 프로이트가 설파하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남자아이가 갖는 어머니를 향한 성애적 사랑과 아버지를 향한 강한 반항심과 살해욕망. <여자아이에게도 어머니를 향한 사랑은 남자아이와 동일하지만 자신에게는 남근이 없다는, 즉 거세된 것을 인식하는 순간부터 아버지를 추구한다는 '일렉트라 컴플렉스'라는 것도 있었지.... 칼 융이었던가>
참으로 이론(異論)과 이론(理論)과 이론(利論)과 이론(易論)이 분분난만(紛紛爛漫)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햄릿을 두고서 논하는 현대 정신분석적 철학적 논고를 슬쩍 읽은 적 있었는데...
어휴 그 난해함, 골치 아파라.
그나저나 아버지가 없었던 나의 유아(乳兒)에게도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라는게 있었을까.
어쩌면 그래서 카인콤플렉스(형제간의..) 전이된 바는 없었을까.
분명한 것은 남자들에게는 영원히 유아적 기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점이 있음이다.
여성에 대하여 오로지 자신만을 인정(認定)하여 주고 사랑하여 주고 보살펴 주고 헌신하여 줄것을 바라는 남자들의 로망...
무릇 아내들이여.
남편이란 존재는 어디선가 데려 온 또 하나의 자식이니라.
그러하노니 자식처럼 키울찌니라. 하
다음은 이문열의 해설.
++++
<정신분석의 명쾌하고 재치있는 형상화>
-이문열-
부성을 부인하거나 극복하려는 의지는 신화비평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고 다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오코너의 '나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신화적이기보다는 다분히 정신분석적이다.
부친살해와 근친상간의 원형을 신화적으로 충실하게 답습한 토마스 만의 '선택된 인간'은 신비감과 장중함의 후광을 두르고 있지만 또한 억압을 느낄 만큼 침울하고 비극적이다.
다분히 그리스의 비극성은 그 패배와 타락에서만 끝나지 않는다.
근원적으로 책임 없으면서도 인식해야만 하는 죄와 그 참담한 정화과정, 그리고 궁극적인 승화마저 우리 의식을 억압하는 데가 있다.
거기에 비해 오코너의 접근은 그 신화적 원형을 의식 밑바닥에 살아 작동하는 정신분석상의 복합심리로 잘 형상화하고 있다.
'나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도 위기가 있고 윤리적인 부정이 있으며 패배와 좌절이 있다.
그러나 그 비극성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이 아니라 설득력 있는 희극으로 우리 가슴에 다가온다.
그리고 어이없을 만큼 간명한 화해의 대단원은 우리 삶이 험상궂은 비극과 가벼운 희극으로 양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분명찮은 혼재 속에 진행되는 어떤 것임을 쓴웃음 속에 깨닫게 해준다.
문학이 사회과학이나 역사과학의 중요한 성취에 의지해 세상을 해석하기 시작한 지는 오래되었다.
그러나 그때조차도 작가된 자가 잊어서는 안될 것은 거기서 얻어진 관념이나 원형을 문학의 고삐로 얽어 끌고 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이다.
거꾸로 그 관념이나 원형에 코가 꿰어 끌려가는 것도 작가로서도 볼썽사나울 뿐만 아니라 문학의 자기부정이 될 우려가 있다.
소화되지 못한 생경한 관념들로 작가의 인생관을 대신하거나 한 번 주어진 세계의 원형을 미련스럽게 유지하는 것만이 사상의 확고함이나 순정성을 드러내는 것인줄 아는 설익은 작가들에게 '나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틀림없이 좋은 참고가 될 것이다.
프랭크 오코너는 아일랜드 혁명전쟁의 비참함을 사실적으로 그린 소설집 '국민의 손님'으로 유명해진 아일랜드 출신의 작가이다.
미국으로 이주하여 하버드대 등에서 객원교수를 하며 발표한 작품들은 아일랜드의 소박한 생활을 풍부한 유머와 세련된 필치로 그렸다는 평을 들었으며, 예이츠에게서 '체홉이 러시아에서 해낸 일을 오코너는 아일랜드에서 해냈다'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
***고향***
2013.08.13 08:48
귀엽고 재미있는 내용이군요. 첫째 손주가 동생을 안으면 그 아가에게 달라붙어 얼마나 비비대는지,
뒤늦게 눈치채고 자기도 안아주면 웃으면서 동생을 놓아주는 모습이 너무 이쁘답니다.
그런데 딸 애도 딸아이가 하나 있어야지않을까 은근히 걱정이 됩니다.
동우님 두 손녀들이 너무 이쁘군요.
***동우***
2013.08.14 06:09
전에 '심리학이 어린 시절을 말한다'에서 지껄인 적 있는데. 유아심리 결정론에 대하여는 공감되는 바 적지 않습니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가 누구나 갖게되는 심리적 현상인줄은 모르겠지만. ㅎ
고향님의 준수하신 손자님.
좀 전 보았습니다.
그래도 손녀가 그리운 할머님. ㅎㅎ
***teapot***
2013.08.14 14:00
재미있었습니다!
***동우***
2013.08.15 05:29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감사했습니다!
<타베티>
-프랑스 E 실란패 作-
***동우***
2013.08.15 05:04
오륙년전 쯤이었나.
홍애님이 어느 주탁에서 내 손을 보고서는 '노동을 모르는 손' (함께 있었던 부군 조교수님의 손도 싸잡아..ㅎ)이라고 하였을때 나는 몹시 부끄러웠다.
'타베티'
굳센 정신으로 육체의 힘을 신뢰하고 노동의 가치를 숭앙하는 사나이.
저런 사내에게 나는 늘 열등감을 느낀다. <내가 세상살이에서 구사하는 것이란 건강한 삶의 근원에 기반한 것이 아닐거라는 자의식...>
옛날 직장생활.
현장 리더들인 직장 반장들은 오랜 노동으로 체득한 노련한 기술자들로 나보다는 훨씬 연장자들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들은 얼마나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하였던가.
목청이나 높이던 관리자 따위의 허장성세보다 노동으로 단련된 그들이야말로 훨씬 웃길의 내실있는 건강함을 갖추고 있었다.
이제야 진정으로 그들에게 존경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타베티, 강인하기 그지없지만 여린 것 앞에서는 한없이 말랑말랑해 지는 사나이.
곁가지.
조선소 현장, 그 무렵의 어떤 장면이 떠오른다.
술을 먹고 땡깡을 부리는 개망나니 근로자가 있었다.
외근에서 돌아오던중 대낮부터 술에 엉망으로 취한 그를 멀리서 발견하였다.
경비가 지키는 현장에는 들어오지 못하고 회사 근처를 미친듯 비틀거리며 돌아다니고 아무한테나 찍자를 놓는 그.
자신의 배에다 자해를 하여 피범벅으로 고함을 쳐대면서.
그가 다가오면 사람들은 으악! 비명을 지르면서 도망간다.
그러나 대여섯쯤 보이는 여자아이 하나는 너무나 무서움에 질려 버렸다.
그자리 꼼짝하지 못하고 못박혀 감히 울음도 터뜨리지 못하고 입을 크게 벌린채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보았다.
벌겋게 충혈되어 광기로 날뛰던 그 녀석의 눈매가 홀연 유순하여 지는 것을.
아, 그리고 이내. 녀석은 그 아이로부터 벗어나려고 도망치듯 냅다 저 쪽으로 뛰기 시작하였다.
어쩐 일인지 그 장면이 떠올랐다.
그런 개차반을 어찌 저 '타베티의 새둥우리'에 빗댈수 있을까마는. ㅎ
다음은 이문열의 해설입니다.
++++
<무엇이 위대하고 무엇이 비소한 것인가>
-이문열-
사내들이라고 언제나 거칠고 끔찍한 일만 저지르고 다니지는 않는다. 공격성과 폭력과 고집만이 그들이 연출할 수 있는 미학의 근원은 아니다.
또한 남 앞에서 힘을 자랑하고 큰 돈을 거머쥐며 거들먹거리고 여자들을 줄줄이 후리는 것만이 모든 사내가 꾸는 꿈일 수는 없다.
<타베티>는 소품이란 느낌은 들지만 바로 그런 통념에서 벗어난 남성미를 감동적으로 형상화했다는 데서 흔치 않은 작품이 된다.
말할 것도 없이타베티는 건강하고 꿋꿋한 사내다.
이 사내 타베티의 삶을 보라. 거친 자연앞에서도 꺾일 줄 모르는 그의 용기와 참을성을 보라.
그러나 이 작품이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그런 사내의 강건함에 바탕한 미덕만은 아니다.
우리가 느끼는 감동의 실체는 오히려 더할 나위 없이단순화된 그의 욕망과 사랑이 주는 충격이며 거기서 우러난 소박함과 부드러움에의 찬탄이다.
우리의 삶은 그런 것들에서 얼마나 멀어졌는가. 복잡하게 얽힌 욕망의 미로를 허둥대며 헤매는 게 현대적인 삶의 보편적인 모습이 아니던가.
얼핏 보면 타베티가 연출하는 소박함과 부드러움은 남성적인 위대함과는 거리가 멀다.
작품 끄트머리의 새둥우리에 대한 그의 배려에서는 여성적인 섬세함마저 느껴진다.
그러나 굵고 단순한 선으로 처리되다가 갑자기 덧붙인듯한 그 가는 선의 극사실적 삽화는 그 때문에 오히려 우리에게 더 큰 충격이 된다.
작품의 첫 구절이 새삼스런 질문으로 우리에게 다가드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무엇이 위대하며 무엇이 하찮고 비소한 것일까.'
작가 실란패는 1939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핀란드의 국민적 우상이다. 논자에 따라서는 그의 노벨상 수상에 대해 스칸디나비아3국 태생의 이득을 말하는 이도 있으나 다소 가혹한 데가 있다.
1888년 핀란드 헤멘퀴뢰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처음 자연과학을 공부했으나 스물다섯 살이 되던 해에 낙향하여 집필활동을 시작했다. 1915년 잡지에 단편소설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고 이듬해인 1916년, 한여름 고향에 돌아와 사랑에 빠지는 한 청년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첫 장편소설 <삶과 태양>을 써서 문단의 이목을 끌었다.
핀란드 내란이 발발하자 이에 충격을 받은 그는 한 순박한 오두막지기가 이데올로기의 의미를 분명히 깨닫지도 못한 상태에서 적위군에 가담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 <온순한 유산>을 발표해 좌충우돌하던 당대의 국민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포르보의 한 출판사에 근무하면서 틈틈이 중, 단편소설들을 발표하던 그가 새로운 창작의 계기를 맞이한 것은 1931년 <젊었을 때 잠들다>를 출간하면서부터였다. 한 늙은 농부가족의 삶을 그린 이 작품은 그의 출세작이며 대표작이다.
이후 서정적 요소가 짙게 깔린 작품 <남자의 길>과 시적인 문체의 <여름밤의 사람들> 등을 발표하며 핀란드 최고의 작가의 반열에 올랐으며 조국이 소련과 전쟁을 치르던 해인 1939년 노벨상을 수상하기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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