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넙치>
-귄터 그라스 作-
***동우***
2009.10.02.
‘귄터 그라스 (Günter Grass, 1927~2015)’가 1979년에 발표한 장편 소설 ‘넙치(Der Butt)’
1.
나는 광어회를 좋아하지만 이번에 맛본 ‘넙치’는 그다지 맛이 없었다.
천 페이지에 이르는 귄터 그라스의 소설 ‘넙치’.
작가의 상상력이 종횡무진 점철되어 곳곳에 잔재미가 없지는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반복이 심하고 장황하여 솔직히 읽어내기가 힘이 들었다.
반쯤으로 압축하였더라면 더 농밀하고 긴장감있는 소설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건 나의 모자란 생각일테고.
민음사 책의 뒷표지에 ‘넙치’는 “독일의 ‘백년의 고독’이라고 하였는데 마르케스의 이른바 ‘환상적 리얼리즘’에 비견될만한 작품이란 뜻인듯 하다
환상과 리얼리즘.
이 배리(背理)되는 두 의미가 동의(同意)로서 어울리기 위하여는 작가의 환상이 독자에게 리얼리즘으로 접수되어야 할 터이다.
이를테면 작가의 환상에 동참하여 주체적으로 내면적 감동을 유발할수 있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
<“모든 작가의 가장 혁명적이 임무는 글을 잘 쓰는데에 있고, 이상적 소설이란 그 소설 속에 담긴 정치 사회적인 내용이 아니라 현실 속으로 독자들을 침투 끌어 들일수 있는 힘을 통해서 독자들을 감동시키는데 있다.”-마르케스->
나는 ‘넙치’를 이와 같은 감동으로 읽지는 못했기 때문에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오래 전, 귄터 그라스의 소설중 유일하게 읽었던 ‘양철북’은 재미도 있었거니와 지극히 어브노멀한 꼬마 오스카의 알레고리를 음미하는 맛도 상당하였었는데.
‘넙치’는 우뇌를 그다지 자극하지 못하여 오로지 좌뇌로서만 읽어 내려니 힘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전제가 붙어야 한다.
우선 가공할 입담으로 종횡무진 풀어내는 귄터 그라스의 ‘북구적’ 상상력을 접하는 나의 유모어 감각의 허술함과 비좁음, 그리고 유럽사 특히 발틱해 주변 지역의 역사와 갖가지 역사적 에피소드에 관한 나의 형편없는 지식, 단치히(그단스크)라는 지역의 지정학적 의미에 대한 나의 부박한 이해.
그러니까 그라스의 노작(勞作)일 터일 ‘넙치’를 그 모냥으로 읽었던 것은 순전히 나의 소양 탓이라는 혐의를 부정할수 없다는 점을 전제하여야 한다.
어쨌든 내게 ‘넙치’는 난삽(難澁)하였다.
우선 무수한 독일어의 인명(누가 역사적 실존인물이고 가공의 인물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지레 포기하였지만)과 지명들이 혼란스러웠고, 아홉명(또는 열한명)의 여자 요리사를 등장시키고, 아홉달로 단락을 구분하여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지만 등장인물의 서사적 연대기의 순이기는 한데 무수한 역할을 담당하는 화자(話者)인 ‘나;와 혹은 ’넙치‘의 발언에 따라 시공을 넘나들며 중구난방으로 인류학적 문화사적 문명사적 사변을 뿜어 댄다.
다만 모든 것을 여성과 남성의 대립되는 개념으로 일도양단, 명확한 가름으로 전개해 나간 플롯은 심플하였었지만.
그러니까 문명 비평적인 차원의 의미로서 읽기는 읽었다.
모계사회로 부터 부계사회로 넘어오면서 완고하고 폭력적이고 경직된 사회가 되었으며 결국 오늘과 같은 뒤죽박죽의 사회로 전락되었다는.
그렇지만 여성해방론이나 페미니즘과는 거리가 멀었다.
괴테적 여성성의 어떤 의미(여성성이 구원이라는)를 천착하는 것은 더욱 아니었고 한편의 성(性) 속에 내재된 아니마 또는 아니무스의 어떤 것도 아니었다.
귄터 그라스는 모두(冒頭)에 시를 통하여 ‘넙치’에 대한 것을 선언적으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는 무엇에 대해서 쓰는가 / 잉여에 대하여 / 유방에 대하여 / 굶주림에 대하여 / 생선에 대해서 / 가득찬 접시 앞에서 느끼는 구역질에 대하여 / 순무와 석탄과 감자의 승리에 대하여 / 금식에 대하여 / 부잣집 시탁 쇠고기 영양가에 대하여 / 기름과 똥과 소금과 궁핍에 대하여 / 정신은 어떻게 쓸개즙처럼 쓴맛이 되었으며 배는 어쩌다가 정신병에 걸렸는지 산더미같은 기장더미 속에서 교훈적으로 서술하련다”>
<“탐식가들이 왜 금식을 만들었는가에 대하여 / 임신한 일제빌에 대하여 / 물어뜯는 마지막 빵조각에 대하여 / 빵,치즈,호두,포도를 먹고마시면서 친구와 함께 보낸 시간에 대해서 / 하느님과 세계에 대해서 / 늘 걱정거리인 먹는 일에 대해서 / 어떻게 서술되고 어떻게 문자를 통하여 유포되었는지에 대해서 / 날 것과 조리한 것 / 탄넨베르크, 비트슈토크, 콜린전투에 대해서 / 뼈와 껍데기, 내장, 소시지에 대해서 / 축 늘어진 것, 흐무러진 것, 오므라든 것,사그라진 것,매일 먹는 죽에 대해서 / 그 밖에 먹기 좋게 썰어 놓은 것, 날짜가 확실한 역사에 대해서 / 훌륭한 맛에 대하여 / 우유에 대하여 / 달걀에 대해서 / 걱정과 베이컨, 불사르는 사랑, 못과 밧줄에 대해서 / 수프 속의 너무 많은 머리카락과 말 때문에 생긴 싸움에 대해서 / 식탁에 둘러앉은 우리 모두에 대하여 / 너와 나 그리고 목에 걸린 생선 가시에 대해서도.”>
호오, 그러나 나는 귄터 그라스의 저 시가 내포한 모든 것을 맛보고 소화 하지는 않으련다. 아니, 못할 것이다.
책부족의 과제가 아니었다면 아마 ‘넙치’를 끝까지 읽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러함에도 일독(一讀)을 마치고 다시 한번 대충이나마 훑어 보았으니.
어쨌든 읽었고 나의 좌뇌는 비록 소화불량일 망정 매우 포만하였다.
나름의 독후감으로 반추하여, 배설을 시도해 보는 것도 좌뇌의 건강을 위하여 무익하지는 않을 듯 싶고, 그리하여 책부족의 진지함에 부응하는 한편 ‘넙치’의 독서경험은 힘들었을지언정 내게 유익한 것이 될터이다.
그러나 넙치 한마리를 통째로 먹어치워 소화하기에 나의 능력은 너무나 부친다.
고작 부분부분 맛을 보곤 지엽적인 내 입맛에 그칠 뿐이다.
발트해 연안, 특히 단치히 (현 폴란드의 그다니스크)
‘넙치’의 등장인물은 근본적으로 지정학(地政學)적 카테고리의 사람들이다.
소설 속 ‘나’(무슨 역할의 나였는지?)는 읊는다.
<“나의 기오테샨트스, 기다니, 그단칙, 단칙, 단취히, 단치히, 그단스크...(단치히의 여러 地名). 너는 애당초부터 분쟁의 근원이었다.”>
그러고 보니 ‘양철북’의 무대 역시 단치히였었다.
책을 읽는중 세계지도를 펼쳐 보고 인터넷을 뒤져 단치히(지금은 폴란드의 그단스크)를 조금 엿보았다.
바익셀강 어귀, 표르드대제 나폴레옹 히틀러가 들렀던 분쟁의 중심지.
동쪽에는 프로이센인, 북쪽에는 스칸디나비아의 슬라브계 노르만인, 남쪽에는 슬라브계 폴란드인.
자유도시였다가 독일땅이었다가 폴란드영토가 된 도시.
그곳 사람들을 칭하는 ‘포메라니아인’, 또는 ‘카슈비아인’.
석기시대.
여자 요리사 아우아.
세 개의 유방을 가진 석기시대 여인들은 젖먹이가 없을 때도 젖을 펑펑 쏟았다
사내들을 젖가슴으로 품어 젖을 먹였다.
세 개의 젖을 가진 부드러운 아우아의 통치 아래서 사내들은 근심걱정이 없었다.
둘이 아니라 셋.
‘이것’ 아니면 ‘저것’이 아니라 ‘그것’까지 있는 세상.
양자택일의 갈림길에서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유방을 세개 가진 여성이 지배하는 넘치는 잉여가 있는 사회.
가끔 불안과 호기심은 있지만 아우아는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뿐이라고 말하면서 젖을 물려주면 그만이다
그 무렵 한 남자의 어살에 넙치가 잡혔다.
전지(全知)한 물고기 넙치.
넙치는 돌도끼시대의 종말을 예견하며 남자를 충동질한다.
“용기를 내라. 탯줄을 끊어라. 자연의 제약에 저항하고 질서의 원칙을 만들고 근친상간이 난무하는 무질서한 모계사회를 책임있는 부계사회로 대치하라.
남자가 역사를 만들어라.
아폴론적 이성을 존중하고 유토피아를 머릿속에 그려라.“
넙치가 권하는 남성상이란
<“가죽모자와 투구를 쓰고 무엇인가를 꿰뚫어 보는듯한 눈초리 / 좌우를 살피며 지평선을 굽어 보는 / 우산버섯처럼 생긴 남근을 탑처럼 우뚝 세우고 어뢰나 우주로켓처럼 발사하려는 생식욕에 불타는 남자 / 위계를 갖춘 남성결사에 모인 사나이들 / 강렬한 언변을 토하는 주도면밀한 사나이 / 자신도 모르는 미지의 세계의 탐험가 / 결코 침대에서 죽지는 않겠다고 우기는 영웅들 / 준엄하게 자유를 말하는 사나이 / 끝까지 견디며 스스로를 이기며 의연하며 굽히지 않으며 언제나 할말은 다하며 자기 힘으로 적을 찾아내며 / 웅대한 사고를 하며 오로지 명예를 위하여 명예를 구하며 / 원칙적이며 항상 핵심을 찌르며 스스로를 반어적으로 비추어보며 / 비극과 절망을 넘어서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 사나이.>
이건 작금에도 유효한, 참으로 그럴듯한 남성의 이미지가 아닐수 없다.
모름지기 터프한 남성적 캐릭터의 스타들은 저 이미지를 연기할지어다.
넙치는 ‘불은 남성적인 행위이자 이념’이라고 하면서 ‘불에서 진보와 분리와 결단과 남성 특유의 의미를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지만, 실은 지상에 불을 가져온 것은 프로메테우스가 아니라 바로 아우아였음을 아는가.
어느 날 썩은 나무가 가르쳐 주었다.
몸에 주머니가 달린 사람이 하늘에 올라가야 늑대의 불을 가져 올수 있다고.
무지개를 타고 올라간 아우아는 늑대와 동침하여 늑대를 넉아웃 시키고서 태초의 불에서 세개의 숯을 빼내 주머니에 숨겼다.
자궁 속에 있던 늑대의 정액은 뿌지직 타버렸다.
그런데 입구 쪽을 지져 흔적을 하나 남겼는데 이것이 바로 클리스토스로서 가렵고 긁어주기를 바라는 여자의 은밀한 곳이 되었다.
아우아는 오줌으로 태초의 불을 꺼버렸고 그로부터 늑대는 인간의 적이 되어 버렸다.
아우아의 전설.
이 대목에서 케이프타운 심샛별님의 독중감(讀中感)은 “귄터 그라스, 변태영감같으니라구!”라며 혀를 찼을 것 같고, 시애틀의 쟁님의 독중감(讀中感)은 멸치와 곰과 호랑이의 우화로 패러디하여 여성권력의 탄생을 멋지게 상상하셨을 듯 싶다.
그리고 넙치는 하나의 방법론을 사내들에게 가르쳤다. (넷째 달의 재판정)
<“넙치는 온갖 감언이설로 남자들에게 사랑을 권유하였다. 아우아 시절, 비가시대, 메스트비나 시대에도 사랑 때문에 우리의 얼굴빛이 변하는 경우는 없었다. 당시 특별한 아우아는 없었다. 사랑도 증오의 감정도 없었다. 개인은 없었다. 우두머리 아우아가 죽었을때 우리는 그녀의 몸을 나누어 먹었지만 그것은 사랑때문이 아니었다. 당시 굶주린 우리들에게 내린 아우아의 명령때문이었다. 여자들의 지배에 종지부를 찍을 수단으로서의 사랑을 권유한 것이다. 넙치는 남성들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사랑이란 것은 여자들로 하여금 타고난 우월한 위치를 버리게 하지. 때로 사랑은 광포한 살인을 불러오기도 하지. 스스로를 낮추고 기꺼이 예속되고 싶어 하며 굽실거리며 다가오지. 사랑은 탄식의 언어를 만들어내고 시가 되지. 그리하여 사랑은 모든 일제빌들의 한없는 탄식의 동기가 될 것이다. 아달베르트 주교를 국자로 때려죽인 메스트비나는 주교를 사랑하여 때려 죽인거야. 그가 그녀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고 하나님만을 사랑했기 때문이야. 그녀는 대답없는 사랑에 몸부림을 쳤던거야”>
야아, 사랑에 예속 시킴으로 여성권력을 무너 뜨리다니. 그러나 이것은 남성권력에 대입하여도 마찬가지일터인데.
가정사뿐이랴, 세계사 곳곳에 남성권력이 그 하찮은 사랑이라는 것 때문에 무너지게 된 것이 무릇 기하일까.
오늘은 안녕.
<넙치> (2)
2.
일제빌은 어부의 아내.
자기를 놓아주면 소원을 이루어 주겠다는, 어부에게 포획된 넙치의 제안.
그 제안에 일제빌의 욕심은 끝이 없다.
부자, 왕, 교황으로까지.
그 욕심 때문에 결국 다시 ‘요강’과 같은 오두막으로 되돌아 오고 말았다는 그림형제의 동화.
이 소설의 모티프가 된 ‘어부와 그의 아내’
어부의 아내 일제빌은 역대 요리사의 메타포이고 모든 여성의 데포르마숑된 캐릭터이며, 현대에서는 ‘나’의 아내이다.
영원히 만족할줄 모르는 욕심덩어리 여인의 전형.
소비의 하이에나... 모피코트를 향한 여자들의 절규...
남자를 잡아 먹는 흡혈귀.
쓴물 단물 다 빨린 남자들의 불쌍한 모습.
남성 권력이 오도하여 퍼뜨린 동화의 내용에는 넙치의 음험한 손길이 숨어 있었다.
이번에는, 현대의 넙치가 여성에게 포획되었다.
아니, 스스로 여성해방론자이며 레즈비언인 세 여자에게 잡혀 주었던 것이다.
넙치는 이제 남성이 지배하는 역사에 신물이 나 버린 것이다.
“너희 남자란 녀석들한테는 이제 더이상 기대할게 없어. 너희는 계략과 음모만 일삼아. 이제 일제빌들을 위하여 힘을 쓸테야.“
그러나 그녀들에게 넙치는 ‘남성지배원리의 화신’으로서 간파되고 만다.
넙치는 기소되었다.
재판정인 극장 안으로 찾아간 '나'를 호젓이 만난 넙치는 말한다.
“네게 부여해준 모든 권력을 너는 오용했어 / 자애롭게 행사하지 않았어 / 너의 지배는 압제가 되어 버렸어 / 수세기 동안 나는 정말 노력했어 / 너의 패배를 숨기고 너의 비참한 실패를 진보라고 해석하고 / 이제는 백일하에 드러난 너의 파멸을 거대한 건축물로 가리고 교향악을 울려 들리지 않게 하고 금빛 바탕의 판화로 미화하고 그리고 여러 책에서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때로는 구슬프게 재치있게 떠들어서 넘기려고 말야 / 심지어 유용한 여러 신들까지 만들어 냈어 / 제우스로부터 마르크스에 이르기 까지 / 그러나 너의 계좌는 이미 잔고를 넘어섰어 / 이제부터 서서히 나는 내 딸들을 찾아나설 작정이다.”
이리하여.
바야흐로 소설의 초장부터 지리한 공방(攻防)은 시작되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2대 요리사 비가는 철기시대쯤의 여인이다.
이 시대 갑자기 세번째 유방이 없어졌다.
당시 남성적인 신에 대한 욕구가 에테크(소설속 남성을 이르는 보통명사)들에게는 있었고 여차저차 어쩌구저쩌구 유방 세개의 아우아가 넙치와 동침한 다음날 아우아에게 가운데 유방은 없어졌다.
마침내 비가의 철기시대에 이르러 세 유방의 사기극(?)은 끝났고 남자들의 순진함은 상실되었다.
계몽의 빛이 신화의 어둠을 벗겨냈던 것이다.
남자들은 마침내 모든 걸 깨달았지만 젖도 먹지 못한채 허공만 더듬는 남자들의 손길의 허무함을 어이하랴.
막연하게 엄습하는 불안과 새롭게 싹트는 불만.
그러나 그 어느 시대에도 그 어디에도 세 번째의 젖은 없었다.
아, 장구한 역사가 흐르는 동안 에테크(남성)들은 어떻게 그 허무함을 극복해 내었을까.
현대에 이르러서는 허무를 극복하기 위하여 젖의 대용물로 차(車)에 흠취되고, 스피드에 몸을 던지고, 섹스에 탐닉하고, 환각제와 마약을 찾고..
이것 아니면 저것, 양자택일의 갈림길.
생각건대 우리는 언제나 기회비용의 개념 속에서 일상을 영위하고 있지 않은가.
기회비용이란 포기한 대안중 최선의 것.
버스를 탈까 택시를 탈까. 택시를 선택하였다면 버스가 기회비용이었던 셈이다.
배우자의 선택, 투자의 선택, 짜장면을 먹을까 짬뽕을 먹을까하는 점심메뉴의 선택까지...
전쟁과 평화, 사랑과 증오...
세 번째 젖의 은유.
작가가 의도한 메시지와는 다른 나의 견강부회(牽强附會)일지라도 나는 세 번째 젖이 그립다.
이 시대 게르만민족의 대이동이 있었다.
그러나 역사를 감당할만큼 강하지 못한 포메라니아인.
지들이 가면 어딜 가. 하릴없이 비가의 품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거듭 느끼는바, 나는 북유럽의 그 오랜 미개성(未開性)이 참으로 신기하다.
청동기시대를 오래전 지난 이짚트 문화, 그리스 로마의 소크라테스, 플라톤, 세네카등이 등장한지 언제인데 아직 철기시대에 머물고 있는 북유럽.
몇세기 후에 등장한 영국의 아더왕은 여직 전설의 이야기 속 인물일 뿐이고.
아, 긴 눈으로 보는 역사의 부침이란 이토록 무상하구나.
세번째 요리사는 메스트비나.
시대는 10세기경이고 메스트비나는 요리사이며 넙치신의 사제이기도 하였다.
프라하의 아달베르트 주교가 기독교(가톨릭) 포교를 위하여 찾아왔다.
그런데 메스트비나는 아달베스크에게 홀딱 반해 버리고 말았다.
순진한 아달베르트 역시 비나에 빠져 버린다.
그에게 요리를 해주다가 목에 두른 호박목걸이의 줄이 끊어져 호박이 우르르 생선수프 속에 떨어져 녹아 버리고 말았다.
기독교의 맛에 이단의 양념이 들어간 것.
결국 이교도적인 것에 기독교적인 것을 넣고 푹 삶아서 결국 가톨릭적인 세례를 베풀게 되었다
이교적인 것에 분노를 터뜨리는 주교.
비나는 술에 취하여 쇠로 만든 국자로 주교의 머리통을 내리쳐 죽여 버리고 만다.
‘나’는 그 국자를 땅에 파묻어 숨겼고 그 국자는 1889년 발굴되어 박물관에 보관되었다. (문화적 가치가 있는 국자가 실제로 발굴되기는 하였던 모양인지)
메스트비나는 결국 사형선고를 받고 참수형을 당한다.
네 번째 요리사는 14세기의 몬타우의 도로테아.
기독교가 정착된 전성기의 고딕시대.
검(劍)제조공 알브레히트 슬리히팅이 그녀의 남편이다.
그를 처음 만난 도로테아의 질문은 “예수님이 당신을 내게 보냈나요?”
아홉명의 자식들을 출산하였지만 아이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는 여인.
그녀가 미소를 지으면 아이들 콧등에 매달린 콧물까지도 얼어 붙게 만드는 차가운 여자.
그녀의 소원은 예수를 위한 봉사와 헌신뿐이고 미사중에는 황홀경에 빠진다.
육체적 쾌락과 정신적 즐거움 사이의 모호한 경계.
편타고행자(鞭打苦行者)의 마약적 쾌락.
그것은 차라리 음탕하기까지 하다.
“당신의 창(槍)은 내게 얼마나 환희에 찬 고통을 주는지요. 사랑하는 예수여.”
어느날 남편인 ‘나’는 넙치에게서 배운 스콜라철학으로 그녀를 논리적으로 공격하였다.
“그 개같은 논리는 어디서 배웠어요? 그 돌대가리에서는 도저히 나올수 없는 생각인데."
따져 묻는 그녀에게 ‘나’는 별수없이 넙치를 팔아 넘긴다.
발트해의 파도에서 넙치를 만나는 도로테아.
넙치가 뛰어 올라 왔을때 방귀를 뀐 그녀.
키스를 하자 그녀의 입도 비뚤어졌다.
“넙치야 키스는 실컷 했지만, 너의 쟁기는 어디에 달렸지.”
넙치와 도로테아는 함께 바닷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나중 그녀는 성당에 유폐되어 마침내 원하는 자유를 얻고 사망하자 성녀로 추대되었으나 결국 성녀는 되지 못하였다.
넙치는 증언한다.
“의지가 강한 여성들은 나를 미치게 만듭니다 / 산이라도 옮겨놓을만한 결연한 의지력과 그 용기 / 엄격한 도덕심의 소유자 / 중세의 가부장적 폭력에 항거했던 최초의 여자 도로테아 / 결혼이란 감옥으로부터의 자유 / 성생활의무로 부터의 자유 / 집안일로부터의 자유 / 하나님을 위한 자유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자유 / 고딕전성기 시절의 도로테아는 잠시도 그치지 않고 자유를 열망했으며 마침내 자신이 만든 승방에 칩거하면서 / 세상과 세계의 모순으로부터 벗어나 그녀 나름대로 자유의 개념을 발견해 냈습니다”
여성 재판부는 준엄하게 넙치를 꾸짖는다.
“당신의 가장 큰 죄는 도로테아 때부터 남자들은 자유를 향한 여자들의 의지를 터무니없이 신성시하거나 아니면 여자들에게만 나타나는 광기의 일종으로 일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넙치도, 여성 재판부도 타당한가.
도로테아가 가정이라는 폭력(남편의 폭력이 아니라 가정이라는 제도적 폭력)을 견딜수 있는 당위는 기독교에 있었고 기독교의 도움을 통해서만 모든 절대주의를 종식시킬수 있었다고 하는 해석이 있다면 그것은 참 우습다.
방귀를 뀌며 넙치에 매달리는 도로테아.
나는 오히려 도로테아에게서 도착적(倒錯的) 쾌락의 미학을 보았다.
사디즘, 매조히즘.
광신(狂信)은 혹 성도착의 변형일수도 있겠다는.
드라크로와의 그림, 젖가슴을 노출한채 깃발을 휘날리며 민중을 이끄는 여인.
그 젖가슴이 에로틱하면 아니 되는가.
언젠가 읽었던 듯 한 싯귀.
“모든 혁명은 섹스다.”
오늘은 안녕
<넙치> (3)
3.
다섯 번째는 요리하는 수녀원장 마르가레테 루시.
기독교가 슬슬 맨너리즘에 겨워 몸부림치던, 루터의 종교개혁이 있은후 유럽대륙이 신구교로 갈려 피바람이 불고 어쩌고 하던 그 즈음.
처음에는 교황과 루터가 대립하더니 나중에는 칼빈파와 메노파와 대립하는둥, 예수께서는 의연하게 오소독스하시건만 하찮은 도그마들 끼리 짓고 까불고 난리 블루스다.
루시 (뚱보 그레트)는 어린시절 수녀원의 부엌데기로 들어가 어찌어찌 수녀원의 원장이 되었다.
그녀는 수다스럽고 웃음이 헤프고 당시 가톨릭이 그랬던 것처럼 자유분방한 여자였다.
덩치가 큰 루시는 부엌에서 일하는 사동들을 침대로 끌어 들일뿐 아니라 수많은 남자들을 그 품 속에서 녹여 버렸다.
그리고 광적으로 후추를 좋아하였다.
이 대목에서 작가는 바스코다가마를 등장시켜 장대한 후추의 역정, 인도에 대한 사회과학적 고찰을 펼치지만 무슨 의미인지 나는 하나도 모르겠어라. 흐음.
구교(가톨릭)세력이 신교세력을 가차없이 없애 버리던 시절인지라, 그녀의 아버지인 대장장이 페터 루시도 사형선고를 받고 감방에서 최후를 기다리는 처지.
아버지가 사면되도록 하지는 못하여도 최후의 만찬을 구교의 인사들과 함께 아버지의 감방에서 벌일 끝발 쯤은 딸인 루시에게 있었던가 보았다.
감방의 만찬에는 아버지의 목을 처 날릴 사형집행인도 함께 하였다.
좌우지간 루시는 실용주의자. 실학파 정약용이다.
루시의 일장연설.
“신세계를 차지하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보라./ 그리고 그들과 경쟁하는 영국과 네델란드를 보라./ 그러나 발트해 연안의 한자동맹 상인들은 근시안적으로 연안무역에만 의존하고 덴마크인들과 분쟁만 일으키고 후추시장에는 파고들 염을 먹지도 않는다./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주는 후추시장에 우리도 끼어들자./ 인도로 가는 배에 나도 동행하여 가톨릭 교리를 전파하겠다.”
루시의 아버지는 만찬 다음날 목이 잘려 처형되었지만 루시가 누구인가.
만찬에 참석한 사람들을 하나하나 죽여 복수를 한다.
200파운드 몸무게로 시장 페르버를 침대에서 어찌어찌 죽였고, 수도원장 예쉬케는 자꾸 먹여서 살을 찌워 내장요리 단지위에 엎어져 죽게 만들었다.
그녀는 가톨릭의 베일을 쓰고 신교를 위해서 일하였다.
기실 그녀에게는 가톨릭이고 신교고 그런 것은 아무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
파벌이나 조장하여 종교분쟁만 일삼는, 성찬식 식탁의 음식배치를 어떻게 하여야 한다는둥 실로 아무것도 아닌 것들로 아웅다웅하여 살육을 일삼는 그들.
그녀는 뿡뿡 방귀를 뀌어댄다.
이것은 성적 욕망의 방귀이기도 할테지만, 실사구시의 열망으로 터져 나오는 방귀일법 하다.
실사구시(實事求是)라면 새 생명 잉태 시키는 것 이상의 웃길 있으랴.
어느날 루터파의 종복인 전도사 헤게는 여자 치마를 입고 낑낑대며 성벽을 넘어 도망가려고 매달려 있었다
루시는 헤게의 치마밑으로 들어가 아무리 밀고 받쳐 주어도 안되겠길래 그녀는 한쪽 고환을 물어 뜯었다.
그러자 매끄럽게 담을 넘어 헤게는 목숨을 건졌고, 루시수녀는 그 고환을 삼켜 버렸다.
루시 수녀는 임신을 하여 그레트라는 딸을 낳았고 나중에 그 딸은 후추상인에게 시집갔다.
그 때 쯤 후추전쟁에서 패한 스페인은 무적함대를 잃었다.
지금은 출석하지 않는데, 내가 세례받은 동삼교회의 교파는 장로교, 바로 칼빈이 창설한 교단이다.
대관절 지엽적(내 느끼기에는)인 일개의 교의(敎義-도그마)가 무엇이관대, 칼빈은 세루베투스를 불 태워 죽였을까.
그런 생각이 떠오를작시면 아무리 예배중이라도 특유의 뾰죽수염 저승사자 형용인 칼뱅(칼빈)의 모습이 떠올라 오싹하곤 하였었다.
어쨌거나 내게는 귄터 그라스의 요리사중 마르가레테 루시가 두 번째로 기분에 맞는 인물이다.
어쩌면 루시는 이 무렵 이미 씨앗이 뿌려졌을 법한 자본주의의 태동을 은유하는 것인듯도 하다.
넷째달 쯤에서 귄터 그라스는 똥의 문화론을 설파하였는데.
흐음, 이 대목은 그럴듯 하였다.
일제빌은 임신 4개월째의 어느 날, 자신의 금니를 삼켰는데 다음날 자기 대변을 자세히 살펴보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불결하고 낯설다는 이유.
‘나’는 일제빌에게(혹은 넙치에게?) 말한다.
“대변은 낯선 남의 것이 아니라 나의 체온이 들어 있는 것이다 / 과거의 일제빌들은 배설물을 검사하여 앞으로 닥칠 일을 점쳤다 / 이민족의 싸놓은 아직 김이 모락모락 나는 똥무더기를 살펴보고는 비가는 곧 민족대이동을 시작할 것을 예측하였고 또는 전쟁을 예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시절에는 모두 함게 원을 그리며 둘러 쪼그리고 앉아 똥을 누었다 / 아우아 시대에는 배설물 검사가 하나의 종교적 제의였다./ 아우아는 정해진 순서없이 원을 따라 걸으며 대변을 검사하고 평가의 말을 한마디씩 해주었다. / 대변 냄새를 맡으며 우리의 냄새를 맡았다 / 식사가 필수적인 일이고 맛을 느끼게 하라는 것이라면 영양분으로 이용되고 남은 음식물을 배설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일이었다”
넙치인가 일제빌인가는 ‘나’의 이러한 얘기에 “이런 야만인들!”하고 소리쳤지만.
그러나 ‘나’는 일제빌에게 진정을 담아 다시 말한다.
“일제빌 내가 나의 냄새를 맡는걸 좋아 하듯이 당신도 당신의 냄새를 맡는걸 좋아하고 있어. 그리고 내가 즐거이 당신의 냄새를 맡고 싶어하고 당신이 기꺼이 나의 냄새를 맡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사랑이야.”
귄터 그라스는 시를 지어 읊는다.
“설사 / 나는 내 자신의 소리를 듣는다 / 이천오백년의 역사 / 지난날의 인식과 최근의 사고가 / 서로 핥고, 상쇄된다 / 그토록 많은 속비움은 / 이미 기쁨이다 / 변기 위에 혼자서 / 나만의 엉덩이와 더불어/ 신 국가 사회 가족 정당 / 꺼져라 모두 꺼져 버려라 / 냄새를 풍기는 것은 바로 나다 / 바로 나다 / 차라리 이제 울수 있다면”
아스팔트킨트인 내게 농촌은 언제나 냄새로서 다가온다.
향그로운 거름냄새.
예전 천승세의 소설에서 읽었던 기억.
기분 맞는 사람이라면, 낯선 사내끼리 아침에 일어나 똥이 마려우면 “우리 합분(合糞)합시다”하고 얼굴 마주하고 세로대에 쪼그리고 앉아 합분하고 나면 그로서 친구가 되었다는.(정확하지 않을수도 있지만 대략의 기억..)
지금은 모르겠으나 얼마전까지만 하여도 중국은 중인환시리(까지는 안되었어도 변을 보는 사람끼리는)에 변을 보기도 하였다지만.
작금 우리의 똥눔의 현장.
언제부터였을까.
나의 분신이었을 나의 싱그러운 현물(現物).
그 색감과 량감(量感)을 눈에서 보이지 않게 하고, 그 냄새가 사라져 버린 공간으로 은밀하게 잠입하여 바지춤을 내리고 지극히 고독한 모습으로 걸터앉게 되었을까.
작금 우리의 똥은 실로 실존적인 똥일세 그랴..
기십년전 뉜가와 합분하였을 나의 똥이 그립다.
다시 그 현장으로 돌아 가란다면 독(獨)과 무(無)에 순치된 나의 똥꼬는 한사코 마다할 것이지만.
어쩌랴. 하하하.
여섯 번째 요리사 아그네스.
시인이며 외교관인 오피츠(인터넷검색 하여보니 실존한 독일최초의 문예이론가이며 상당히 유명한 인물).
화가인 묄러(실존인물일 듯 하지만 인터넷 검색은 안되었다).
두 사람을 위하여 요리해주는 아그네스.
말하자면 그들의 정부이고 시인과 화가 두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는 여자.
귄터 그라스의 표현(어떤 이미지인지)으로는 ‘감자의 아름다움을 지닌 여자’.
헌신적인, 희생적인, 말없이 겸손한, 넘쳐 흐르는 마음으로, 죽음을 초월하여, 자신을 버리는, 의심을 하지 않는, 불평하지 않는 사랑을 예술가에게 베푼 여자.
사랑을 받은 적은 한번도 없고 오로지 이용만 당했을 뿐이지만 아그네스는 사랑의 응답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한순간도 괴로워 하지 않았다
오직 베풂의 사랑.
아그네스는 묄러를 위하여 육년동안이나 그의 똥 싼 바지를 코 한번 찡그리지 않고 갈아 입혀 주었고 페스트가 오피츠의 목숨을 앗아갈때 임종시 누워있던 돗자리와 땀에 흠뻑 젖은침대 시트를 움켜 쥐고 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목숨을 바쳐 그들을 사랑했던 것이다.
넙치의 남성권력을 위한 전략 ‘사랑’이라는 미끼에 고스란히 걸린 여자, 아그네스.
그러나 그녀는 티없는 기쁨을 발산하였다.
넙치의 술책은 오히려 순수한 감정으로 변환시켜 결국엔 여성의 사랑의 힘이 승리를 거두게 하였고 오히려 남자들을 왜소하게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아그네스는 남성권력의 그 세속적인 부분을 압도하였던 것이다.
넙치는 여성 재판부의 모든 혁명자문위원들에게 아그네스처럼 다시 사랑으로 돌아가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면서 강변한다.
“그것만이 여러분이 갖고 있는 진정한 힘입니다 / 남성들은 그것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 나를 발가벗겨 유죄를 증명하고 논박한 당신들의 총명함이 아니라 바로 당신들이 갖고있는 사랑의 힘이 언젠가 이 세상을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 사랑이 없다면 인간의 삶은 짐승보다 못할 것입니다 / 그 빛나는 광채가 온 세상을 밝게 비추일 것입니다 / 여성은 남성이 창조하는 예술의 샘물입니다”
그러나 여성재판부는 이와 같은 추상적 논증에는 이미 단련이 되어 있었다.
“뮤즈를 직업으로 갖는 여자가 있다면 남자도 그럴수 있나요? / 다시말해 어떤 남자들이 여류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간접적으로 예술 진흥에 이바지했나요? / 피고 넙치는 예술에서 여자의 역할은 기껏해야 거름이나 주고 봉사하는 수동적 매개역할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건가요? / 헨델의 음악, 칸트의 저술, 괴테의 파우스트, 로댕의 조각품, 피카소의 게르니카 같은 예술의 최고봉은 여자들의 손길이 닿지 못하는 곳에 있다는거죠?”
아아, 어설픈 넙치의 법정 반론.
“물론 아그네스는 예술을 창작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모든 예술의 근원이었습니다 / 아그네스는 생산하거나 창조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완벽한 피조물이었으니까요”
괴테의 파우스트 종장의 대사를 구현한 여성미의 본래적인 예술성.
그에서 비롯된 천의무봉의 영감.
연인들이 모두 죽고 난 다음. 늙은 아그네스는 신비주의 이단 교단의 영매가 되어 미쳐버린 딸과 함께 마녀로 몰려 러시아에서 화형 당하였다.
늙은 괴테는,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어린 소녀를 사랑하였다.
아아, 아그네스여. 로리타여.
비둘기같은 나의 소녀들이여.
오늘은 안녕.
<넙치> (4)
프로이센 왕국의 국유지 농장 추카우의 요리사 ‘아만다 보이케’가 일곱 번째 요리사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독일에 감자는 없었다.
그녀는 프로이센 뿐 아니라 바이에른까지도 감자를 보급하는데 결정적 영향을 끼쳤고 여러가지 감자요리를 창안하였다.
절대적인 감자예찬론자, 페스트가 유럽을 휩쓸었을 때 감자가 만병통치로 여겨 피부에 감자가루를 바르고 부적처럼 문지방에 달아 놓기도 하였다.
그리고 얘기 늘어놓기를 좋아하는 그녀, 감자 껍질을 벗기면서 하염없이 늘어놓는 아만다의 사설(辭說)은 유명하다.
심지어 바이에른의 왕(프리드리히 2세)까지도 어느날 그녀가 풀어놓는 썰을 듣기 위하여 그녀의 부엌을 방문하였다.
왕은 그녀에게 감자 껍질 까는 일을 계속하라고 명하고 자신은 감자 바구니 옆에 놓여있는 의자에 가서 앉았다
아만다는 그 옛날 굶주림에 대하여, 자기의 어린 자식들이 굶어 죽은 일에 대하여, 호박을 파묻어서 감자 딱정벌레를 없애는 방법에 대하여, 감자 가루를 몸에 문지르면 콜레라를 쫓는데 효과가 있다는 이야기하며, 경작하지 않고 버려두는 황무지에 감자를 재배하자는 제안을 하기도 하였다.
왕은 눈물을 흘렸다.
한편 럼포드 백작(럼포드 백작은 계몽군주의 인민복지사업의 실천자인데 그 정체가 수상쩍다)과 아만다 보이케는 대중적 문화운동과 모든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는 대량 급식에 대한 유토피아적 사고를 가지고 서로 교류하였다.
그는 아만다의 조언으로 여러 판을 벌였으며, 아만다 역시 그의 설계에 따라 대형부엌을 만들어 요리와 급식의 비약적 효율을 꾀하였다.
넙치는 말한다.
“아만다 보이케라는 한 여성의 생애, 그것을 우리는 여성해방운동의 모범으로 삼아야 합니다. 아만다 보이케는 우리가 감자를 맛있게 먹을수 있도록 해주었고, 그녀의 대규모 농장 식당을 통하여 세계 식량 해결 방안을 미리 예시해 주었습니다.”
넙치의 이 발언은 재판정에 모인 여성 마르크주의자들을 열광시켰다.
넙치당이 생기기까지하여 여성 맑시스트들이 넙치당에 가입하였고, 이를테면 온건한 맑시스트인 그들을 향해 혹자는 ‘오버하는 헤겔’이라고 불렀다.
보이케는 죽어 하늘나라에 갔는데 그곳에 굶어 죽은 세 딸이 하늘나라의 밀가루 통 속에 밀가루 벌레가 되어 있었다.
식사에 있어서도 집단화와 효율.
후일 모택동주의의 모델로서 귄터 그라스는 언급하였는데 모택동주의라는게 이런 것이었구나. (장예모 감독의 영화 ‘인생’에 마을공동식당의 한 시퀜스가 나온다)
백의민족의 어느 마나님.
배추를 다듬거나 빨래감을 주무르거나 무슨 집안잡사를 손질하면서 누에실처럼 끊임없이 이어저 나오는, 주저리주저리 읊는 만리장성의 사설.
내 할머니는 12명의 자식들을 생산하셨다.
내 기억 속에는 늙마의 비대한 모습만이 남아있지만 열두 새끼들 거느려 키우신 그 치마폭은 얼마나 넓었을까.
‘양철북’, 오스카의 외할머니는 도망꾼 사나이를 넓은 치마 속에 숨겨주고 오스카의 어머니를 낳았다.
오스카도 때때로 숨어 들었던 겹겹의 치맛폭.
그 안에는 무슨 냄새가 가득할까.
가슴 깊은 곳 숨어 있는 다락방.
삐걱이는 층계를 밟고 그곳을 오르면, 오래 된 먼지의 냄새.
달콤하고 편안한 냄새.
여자의 치마폭 속에서 맡아지는 냄새다.
프랑스 대혁명은 1789년 일어났다.
이 부르주아 혁명으로 자유 평등 박애라는 이념은 유럽 곳곳에 스며 들었고, 연이어 나폴레옹이 등장하였다.
여덟번째 요리사는 조피 로트졸.
조피는 숲 속의 버섯에 관하여는 모르는 것이 없는 버섯박사였고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킬줄 아는 여인이었다.
열 네살의 조피는 열일곱 살의 김나지움 학생 프리드리히(프리츠) 바르톨디에게 홀딱 빠져 버리고 말았다.
프리츠는 자코뱅당을 결성한 급진적 사회주의자로서, 조피의 눈에 비친 프리츠는 바로 자유의 선언이었고 자유를 대변하는 입이었으며 어쩌면 자유 그 자체였다.
프리츠는 사형선고를 받고, 나중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감옥에 앉아 프로이센의 패망을 꿈꾸고 있었는데 조피는 오로지 그를 위하여 헌신 하였다.
일편단심 민들레였다.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어 단치히에 왔을때 조피는 이 조그만 덩치의 정복자에게 프리츠 석방을 탄원하였으며, 황제는 단치히 공화국의 총독 라프장군에게 검토 처리를 지시하였으나 총독은 프리츠를 쉽게 풀어 주지 않았다.
조피에게 흑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라프 장군은 그녀에게 총독 관저의 주방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하였고 그녀는 승낙하여 라프장군의 요리사가 되었다.
그녀를 어찌어찌 해보려 하였지만 일편단심 민들레인 조피가 쉽사리 그녀의 처녀를 열어 줄리 없다.
라프는 버섯요리를 즐겨했고, 라프의 식탁을 위하여 숲으로 가 버섯을 따는 조피.
프리츠를 풀어주지 않는 총독에게 치명타를 먹이는 조피.
송아지 머리에 가득 채운(그라스는 무슨 짐승 몸뚱이 부위에다 무언가 채운 요리를 즐겨 소개하는데, 이 레시피는 입맛을 돋우기는커녕 구역질이 나게 한다) 버섯 요리.
버섯박사 조피는 강력한 흥분제 성분이 있는 독버섯으로 요리를 한 것이다.
만찬에 참석하였던 사람들은 알 수 없는 공격성에 사로잡혀 칼을 뽑아 서로 죽이고 죽임을 당하였다.
프리츠는 늙은이가 되어 38년 동안 수감되었던 감옥에서 풀려났다.
처녀로 늙은 조피 로트졸이 그를 맞았다.
아홉번째 요리사 레나 슈투베.
드디어 진정한 프롤레타리아의 면모가 전면으로 등장한 것이다.
성실한 사회주의자.
공정하고 참을성있는 믿음직한 여자.
1849년 출생, 프롤레타리아의 역사적 계급의식을 각성한 것은 나중일터.
두번 결혼하였는데 슈투베는 두 남편으로부터 늘 매맞는 여자였다.
넙치가 재판정에서 증언하였다.
“슈투베가 살던 시대의 여성들은 극심한 학대를 당했습니다. 귀족과 시민계급도 마찬가지. 노동자계급의 아낙들은 아예 정기적으로 구타를 당했습니다. 매주 금요일 얻어 맞아야 했지요. 임금을 받는 날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보잘것 없는 자존심을 그런 식으로 확인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슈투베는 구타 당할때 조차도 남편보다 강했다.
서글프지만 구타를 감수하는 그녀, 그러나 한바탕 구타가 끝나면 남자들은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고 깊이 뉘우쳐 심지어는 울먹이기까지하는 가련한 남자가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그녀였기 때문이었다.
1885년 비스마르크의 사회주의자 진압법 시행되던중.
조선소 노동자 파업중 만삭의 몸임에도 조선소 식당과 파업기금을 관리하던 레나 슈투베였는데, 남편 오토가 파업기금에 손을 댔다.
호텔의 화장실 청소를 하며 그 빚을 갚아 나가는 레나.
그녀는 프롤레타리아식 요리책을 썼다.
아우구스트 베벨 (로베르트 미헬스, 소렐, 로자 룩셈부르크등, 이 부분부터 역사적 실존인물은 좀 귀에 익다)도 어느날 슈투베의 부엌을 방문하여 칭찬하였다.
‘넙치’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캐릭터의 매력이 없다.
아니, 애시당초 정형화된 캐릭터의 모습을 드러 낼수 없도록, 귄터 그라스의 입담은 종횡무진 깽판을 쳐 버린 탓이다.
기중 레나 슈투베가 내게는 가장 그럴듯한 모습으로 인상에 남아 있다.
프롤레타리아의 어머니.
생각이 깊지만 강인하고 뚜렷한, 참을성이 많고 포용력이 넓으며 관용에 넘친 여인.
돌아가신 내 어머니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내 관념 속 만들어 진 어떤 어머니 상.
고리끼의 어머니, 어쩌면 펄벅 대지의 ‘오란’.
다음 여자들은 소설의 장을 이루지만 넙치의 법정에서는 언급되지 않는다.
1963년 6월, 아버지 날.
남성이라는 종족들은 남자임을 자축하기 위하여 숱을 찾아 먹고 마시며 하루를 즐긴다.
넙치 재판정의 논고를 담당한 검사를 비롯하여 레즈비안인 네명의 여자들도 남장을 하고 의식상(意識上) 남자의 자격으로 그 날을 즐기려고 나선 참이다.
남성으로부터 받은 성적학대의 기억이 있으나 성적으로 지극히 정상적인 생리(生理)와 성벽(性癖)을 지니고 있지만, 멍청하고 재미없는 남자들을 지겹도록 접하고는 마침내 의식적으로 동성애 쪽으로 도망친 여자들이었다.
“우리 넷은 아버지날 수십만명의 남자들 틈바구니에 끼어 자발적이고 뚜렷한 의식을 가지고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길을 나선 것이다. 우리는 밑에서 덜렁대는 물건 없이도 아무 문제없이 잘 해낸다. 우리는 그러한 물건에 의존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유로운 새로운 성이다.”
호숫가 숲속에서 아궁이를 만들고 불을 지펴 야외의 만찬을 즐기고 맥주와 소주를 마신다.
그리고 기구를 사용하여 남자처럼 다리를 쫙 벌리고 서서 오줌을 갈긴다.
“이제 페니스 선망같은건 없다. 쪼그리고 오줌을 누는 굴욕적인 일은 안한다.”
그런데 종장에 한 여자는 강간 당하고 살해되었다.
남자와 여자.
이 칼로 자른듯한 분리가 이 소설만큼 불쾌하게 등장한 소설도 없을 것이다.
남성과 여성.
조물주의 섭리를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 분리의 끔찍함이란 혀를 차게 한다.
킹목사의 ‘나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류를 헛소리로 비웃는 흑백분리주의자 말콤엑스.
그가 떠오르지만, 아아, 남자와 여자도 그러해야 하는가.
정말 여자는 금성민족이고 남자는 화성민족이란 말가.
마지막 등장인물 마리아 쿠츠초.
1969년폴란드 그단스크 레닌 조선소 구내식당 요리사.
공산주의 국가 폴란드에서 1970년 노동자의 자유를 외치는 파업이 일어났다.
마리아의 애인 얀은 그때 피살되었다.
공산주의 국가에서, 그것도 당사 앞에 모여 인터내셔널을 노래하며 프로레타리아의 데모를 벌이고 있는 삼만명의 노동자에게 국가권력이 총을 발사한 것이다.
“이 무슨 이데올로기적 모순이며 변증법적으로 얼마나 우스꽝 스러운 일인가” (그라스의 말)
이 소설 ‘넙치’가 발간된 후인 1980년 바로 그 조선소 (그단스크 레닌조선소)에서 바웬사의 자유노조 저항이 있었고, 얼마후 공산 블록은 붕괴되었다.
귄터 그라스,
맛대가리 없는 ‘넙치’.
징그럽게 커서 맛이 없었다.
딱 반만한 크기였다면 그나마 다소 입맛을 다셨을까.
속을 채워 놓은 양념이 이것도 저것도 너무 혀에 생경스러워 그냥 꿀꺽 삼키려니 때 아닌 목구멍이 고생하였다.
당연히 날 것으로 삼켰으니 소화가 될리도 없으렷다.
어휴, 책부족의 숙제는 부담, 나름대로 회를 쳐서 억지로 입맛을 다시기는 다셨다.
아전인수(我田引水), 견강부회 (牽强附會)질펀하지만 이만큼이라도 배설하였으니 아랫배 조금쯤 시원하려는지.
힘에 부쳐 그만 쓰련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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