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김동리 前,後 (1,4,3,3)

카지모도 2020. 2. 13. 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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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김동리]]

<역마. 무녀도. 바위. 황토기>

 

 

<역마(驛馬)>

-김동리 作-

 

***저녁산책***

2012.12.03 21:46

 

거역할 수 없는 운명에 체념하고 순응해 나가는 주인공들..

남도의 구수한 언어와 문화가 아름답고 세밀히 짜여진 한 폭의 그림같습니다.

우리말 소설이 정말 아릅답네요.

이런 글을 접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동우님^^

 

***┗동우***

2012.12.04 05:18

 

저녁산책님.

옛과 요즘, 문학적 표정이나 이미지는 현격한 차이가 있을테지만 근원적 감성이야 무에 그리 다를런지요?

오래 전 오른 2박3일의 지리산 종주길. 구례와 화갯길..

별당아씨와 구천이의 슬픈 사랑도..

섬진강 끼고 도는 남도의 아름다운 산천..

소설이 아니더라도 거기에는 희비가 설킨 유장한 사연들이 배어 있을거에요..

나는 김동리 단편중에서는 역마가 가장 좋답니다.

요즘 옛 단편들 만지작거리면서 감회에 젖곤 합니다.

매일 한편씩 읽고 한편씩 올리려구요.

저녁산책님을 비롯하여 익명으로 읽어주시는 분들 제법있어 기분이 좋다오. ㅎ

 

 

<무녀도(巫女圖)>

-김동리 作-

 

***동우***

2013.02.20 05:25

 

무녀도.

들판과 산하(山河)를 배경으로 어느 굿판을 그린 그림.

별빛 쏟아지는 이슥한 밤중의 무당의 시나위 가락.

 

개화기, 외래문화(기독교)의 대두(擡頭)로 인한 토속문화(샤머니즘)의 마지막 불꽃같은 몰락(沒落)의 그림인가.

그렇게도 보자.

혹, 어떤 눈으로는 향토(鄕土)에 깃든 이 땅 살이들의 울굿불굿 청승스러운 색깔도 뵈인다.

파리하게 선연한, 아름다운 수국꽃의 화신 처녀 낭이와 퍼어런 낯빛으로 취한 그 어미 무당 모화. 그녀들에게서 묘하게 느껴지는 에로티시즘의 색감도 있다.

 

한 세상살이.

세상천지 모든 것이 목숨이고 인연일지라..

만물(萬物)과 처처(處處)의 눈에 뵈이지 않는 인연에 따른 팔자소관으로 살아가는 목숨.

범신론(汎神論)은 아름답고 슬프다.

자연을 향한 탐미(耽美)의 세계관, 그건 필경 운명론적 슬픔이다.

 

무엇이 남았는가, 살다 떠난 빈 자리.

<그네들이 떠난 뒤엔 아무도 그 집을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고, 밤이면 그 무성한 잡풀 속에서 모기들만이 떼를 지어 울었다.>

 

***송현***

2013.02.20 16:51

 

동우님

김동리 무녀도는 참으로 명작입니다

정초에 사설을 읽고 들으니 사라지는 것이 슬픔이라는 관점에서 아림니다

이해경님의 화천 굿당은 거의 거의 되어가고 있다네요

봄날에 화천 골짜기에서 굿판이 벌어지면

멜론도 부르고 그때 동우님께서도 함께 하시지요.

초청장 갈거에요.

 

***동우***

2013.02.21 05:31

 

그렇지요? 송현님.

김동리의 무녀도, 참으로 훌륭한 소설입니다.

리듬감있는 을화의 사설에도 무언가 조선적 정조가 함빡 담겨있는듯.

 

무당 이해경님의 굿당.

준공이 되면 거창한 굿판이 벌어지겠군요.

하하, 갈수야 없겠지만 축하할 경사...

 

***동우***

2013.02.21 05:33

 

근데 송현님.

화천 (다목리?) 소설가 이외수씨의 감성마을인가 있는 곳 아니예요?

이외수씨와 친한 미꼬님. 어떤 식으로 연계가 있을듯 싶은데...아닌가?

 

하하, 송현님 아시다시피 난 이외수라는 작가를 별로 좋아하지도 평가하지도 않는답니다.

전에 받아 본 이외수씨의 '하악하악'이라는 책.

그것도 책이라고.

몹시 실망한 그 이의 문학성과 품격과 감성...

내 보기에, 오로지 젊은 세대의 시의에 아부하는듯한 상투적인 교훈들과 유치한 감성 넘실대는 아포리즘...

하하,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 소회일 뿐입니다.

그 이의 가치를 평가하는 사람들과 나의 취향이 몹시 다른가 봅니다.

 

***송현***

2013.02.21 09:12

 

동우님 저도 동우님 생각입니다

세상 살아내기 집약 천착된 약삭빠름이랄까

그러고보면 일종의 메피스토. ㅎㅎ

속세에 회자되는 인간들이 모두가 와서 굽실대는 것을 보면...

세상은 그들 부정적인 쪽의 편인가 봅니다

동우님 저는 이들을 관망하면서

순수를 잃지않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이 대도라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해경 역시 이들을 미워하면서도 또 그 편을 타는 무당이지요

인기먹이의 사슬 금메끼 무당 예술가

저는 이해경, 마음에서 비웠습니다

그냥 인사로 동우님과 함께하자는 말입니다

모를 때가 더 좋았던 것 같아요

가난한 무당으로만 여겼더니 그렇게 돈이 많은 줄 몰랐습니다

이외수 그 부인은 이제 측천 무후라네요

문학이고 예술이고 그 사람을 보게 됩니다

순수가 생명이라면 죽은 사람들이지요

동우님 그런 면에서 바보는 대단한거죠~? ㅎㅎ

백치 아다다가 돈은 불더미에 넣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teapot***

2013.02.23 00:51

 

잘 읽고 갑니다.

요즈음 재미있게 하나씩 하나씩 읽고 있어요.

 

시골에서 살아 본 적이 없건만 옛날 시골 우리 동네 같은 느낌이 드네요~ㅎㅎㅎ

 

***동우***

2013.02.23 05:50

 

티팟님.

어쩌면 우리 한민족 원형질 속에 토속적 샤먼적인 어떤 에토스가 남아 있는 까닭일런지. ㅎ

 

 

<바위>

-김동리 作-

 

***동우***

2013.09.22 04:13

 

어머니, 아내일지라... 문둥이도 살아야 한다.

문둥일지라 모성은 바위에다 토혈(吐血)한다.

바위는 아들이고 바위는 하나님이다.

바위에 투사하는 나모(癩母, 문둥이엄마)의 비원(悲願).

그것은 고통스러운 제의(祭儀)이고 찰나적 치유의 황홀함이다.

 

++++

인연(人煙)이 끝인 황사만리(荒砂萬里) 절역(絶域)에

엉 엉

천한(千恨) 절통(切痛)의 울음으로 흐흐 느낀다.

-문둥이 시인 '한하운'의 '인골적(人骨笛)' 부분-

++++

 

불치의 천형 문둥이는 내게도 있다.

그런데 절통의 울음 흐흐 느낄 바위가 없고나.

 

***고향***

2013.09.23 08:07

 

아주 어린 시절 동네에 뭉그러진 팔뚝을 앞으로 내밀며 돌아다니던 그 모습이 생각나는군요.

천형을 왜 자신이 받아야하는지 그 이유없는 불운에 평생 휘둘리며 비참히 죽어간...

 

가슴 속의 어느 곳에는 깊은 동굴이 자리하고 있어 각자의 슬픔이 웅크리고 있는가봐요.

더 진하고 덜하고의 차이일 뿐 육신을 가진 자들은 누구라도 피해갈 수 없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자들의 숙명일까요.

 

***동우***

2013.09.24 05:58

 

고향님의 기억은 나와 겹칩니다.

옛날 구걸하는 문둥이 흔하였습니다.

나병도 그 시절 훨씬 흔하였던듯.

어떤 소녀가 피아노 독주회 드레스를 입고 연주회중, 노출된 어깨에 반점이 발견되어 나병이라고 진단받아...

그런 얘기도 들었는데, 지금 나병은 불치가 아니라지요?

 

문둥이...

하고 불러보면 괜히 슬퍼요.

그래요, 문둥이는 누구나 지니고 있는 어떤 천형의 슬픔같은건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한계, 천형의 카르마.

 

황톳길, 전라도 땅. (내가 걸었던 전라도 땅은 정말 몹시도 붉었었습니다)

시방 나는 유형(流刑)의 길을 걷고 있어요.

나는 문둥이랍니다.

<하하하. 이 새벽 내 너스레는 느닷없고 맥락도 없이 이렇습니다그려.>

 

++++

전라도 길 (소록도 가는 길에)

-한하운-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는 길...... .

 

신을 벗으면

....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全羅道) 길.

++++

 

 

<황토기>

-김동리 作-

 

***동우***

2013.10.14 05:36

 

황토기를 처음 읽었을 때.

엄습하는 이상스런 엑스터시(?)가 내게는 있었다.

 

[이때부터 싸움은 시작되는 것이다. 그와 동시 두 사람의 얼굴에는 무어라고 형언할 수 없는 어떤 긴장이 서린다. 득보는 주먹을 꺼떡 들어 억쇠의 얼굴을 겨누며 "얼씨구 저절씨구 가엾어라, 이 늙은 놈아 내 한 주먹 번쩍하면......" 아주 노래 조(調)로 목청을 뽑으며, 껑충껑충 억쇠에게로 뛰어들어왔다, 물러갔다, 하는 것이다. "네 이놈, 새뼈 같은 주먹으로 멋대로 한 번 때려 봐라." 억쇠는 그를 아주 멸시하듯이 태연자약하게 버티고 서 있다. "내 한 주먹 번뜩하면...... 네놈 대가리가 박살이라......" 순간, 득보는 주먹으로 억쇠의 왼쪽 눈과 콧잔등을 훌쳤다. 그 자리에 금시 퍼렁덩이가 들며 눈 안에는 핏물이 돌기 시작하였다. "네 이놈. 새뼈 같은 주먹으로 많이 쳐라…… 실컷…… 자아. " 할 때 득보의 두번째 주먹이 또 억쇠의 오른쪽 광대뼈를 쥐어 질렀다. 세번째 주먹이 또 먼저 때린 눈을 훌쳤다. 억쇠는 저만큼 물러가 있는 득보를 바라보고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허연 이를 드러내며 큰 소리로 껄껄껄 웃어 대었다. 득보는 저만큼 물러선 채 아까와 마찬가지 노래 조로 목청을 뽑으며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다. 네번째 주먹이 오른쪽 눈 위를 그리고, 다섯 번째 주먹이 또다시 콧잔등을 때렸을 때, 그러나 억쇠는 역시 먼저와 같이 큰 소리로 껄껄껄 웃어만 주었다. "네 이놈, 그 새뼈 같은 주먹으로 저 산을 한번 물려 세워 봐라." 여섯번, 일곱번 득보는 몇 번이든지 늘 마찬가지 내 한 주먹 번뜩 하면을 되풀이하며 뛰어들어서 억쇠의 면상과 목과 가슴과 옆구리를 힘껏 지르는 것이었으나, 그때마다 억쇠는 간단한 몸짓으로 그것을 받아 내었을 뿐 적극적으로 득보에게 주먹질을 시작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렇게 득보에게 같이 주먹질을 하지 않고 그냥 얻어 맞기만 하는 것이 그지없이 즐겁고 만족한 모양으로 상반신이 거진 피투성이가 되도록 종시 큰 소리로 껄껄껄 홍소(洪笑)만을 터뜨리고 서 있는 것이었다. 득보는 더욱 힘이 솟아오르는 듯 주먹질과 함께 발길질도 시작하는 것이었다. 득보의 발길이 번번히 억쇠의 아랫배와 넓적다리 즈음에 와 닿는 것으로 보아 그 겨냥이 무엇이라는 것은 억쇠도 곧 짐작하였고, 그래서 그의 발길만은 늘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옛날도 그 옛날에 붕새란 새가 있었나니, 수격 삼천리, 니일 니일 얼씨구야 지화자자 저절씨구." 득보는 입에 하나 가득 찬 피거품을 문 채 이렇게 목청을 뽑으며 덩실거리고 춤을 추는 것이었다. 억쇠는 피로 물든 장승처럼 뻣뻣이 서서 뛰어들어 오는 득보의 주먹질과 발길질을 받아 낼 뿐이었다. 득보의 네번째 발길이 억쇠의 국부를 건드렸을 때 그는 한 순간 그 자리에 척 끊어질 뻔하다가 겨우 한쪽 팔로 득보의 목을 후려 안으며 어깨를 솟굴 수 있었다. "이놈아 !" 산골이 찌르렁 울리는 억쇠의 목소리였다. 이리하여 한덩어리로 어우러진 그들의 입에서는 어느덧 노래 소리도 웃음 소리도 동시에 뚝 끊어지고 다만 씨근거리는 숨소리와 뿌득뿌득 밀려 나갔다 들어왔다 하며 근육(筋肉)과 근육 부딪는 소리만이 났다. 두 사람의 코에서는 거의 동시에 피가 주르르 쏟아져 내렸다. 눈에도 핏물이 돌고 목으로도 피가 터져 나왔다. 그 차에 땀으로 번질번질하던 두 사람의 낯과 어깨와 가슴은 어느덧 아주 피투성이로 변해져 버렸다. 득보가 억쇠의 아래턱을 치지르며 막 옆으로 빼뜨리려는 순간이었다. 억쇠의 힘을 다한 바른펀 주먹이 득보의 왼쪽 갈비뼈 밑에 벼락을 쳤다. 갈비뼈 밑에 억쇠의 모진 주먹을 맞은 득보는 갑자기 얼굴이 아 주 잿빛이 되어 뒤로 비실비실 몇 걸음 물러나다가 그대로 모래 위에 고꾸라져 버린다. 억쇠의 목과 입과 코에서도 다시 피가 쏟아졌다. 그는 정신나간 사람처럼 두 손으로 아래턱을 받쳐 피를 받으며 우두커니 앉아 있다 말고 돌연히 미친 것처럼 뛰어 일어나는 길로 또 한 번 와락 득보에게로 달려들어 쓰러져 있는 그의 바른편 어깨를 물어 떼었다. 어깨의 살이 떨어지며 시뻘건 피가 팔꿈치까지 주르르 흘러 내리자 득보는 몸을 좀 꿈 직이었으나, 역시 일어나지 못하는 채 그대로 뻗어져 누워있는 것이었다. 억쇠는 입에 든 득보의 어깨살을 질겅질겅 씹다 벌건 핏덩어리를 입에서 뱉어내고, 그리고는 또 다시 술 항아리를 기울여 술을 몇 사발 마시고는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누구의 입에서 항복이 나온 것도 아니요, 어느 쪽에서 쉬기를 청한 것도 아니었다. 두 사람이 다 같이 죽은 듯이 늘어지고 잠든 듯이 자빠졌으나, 아주 숨통이 멎은 것도 아니요, 정말 평온한 잠이 든 것도 아니다. 흐르는 냇물에서 저녁 바람이 일고 높은 소나무 가지에서 매미 소리가 서슬질 무렵이 되면, 그들은 마치 오랜 마주(魔酒)에서나 깨어나는 것처럼 떨고 일어나 아침에 먹다 남겨둔 술 항아리를 기울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저녁 때의 싸움은 대개 억쇠가 먼저 거는 편이었다. 이번에는 처음부터 억쇠가 먼저 주먹질로 시작하였다. 두 사람의 몸뚱이는 그러나 몇 번 모질게 부딪고 할 새도 없이 이내 피투성이가 되어 버리는 것이었고 득보는 되도록이면 억쇠의 주먹을 피하려는 듯이 저만큼 물러선 채 춤만 덩실덩실 추고 있는 것이었다 "새야 새야 봉조새야 북명 바다 붕조새야 치칭 치칭 치칭 지화자자 저절씨구." "얘 이놈 득보야 ! " 억쇠는 또 한번 산골이 찌르렁 하도록 소리를 질렀다.

"간다 훨훨 날아 간다 수격 삼천 리...... 내 한 주먹 번뜩하면 네놈 대가리가 박살이라. 치칭 치칭 치칭 지화자자 저절씨구." 득보는 이렇게 목청을 뽑으며 점점 억쇠에게로 가까이 다가들어 왔다. 웬일인지 싸울 태세를 갖추려하지 않고 그냥 춤만 덩실덩실 추며 억쇠의 턱 앞까지 다가들어 왔다. 억쇠는 뛰어들어 그의 목을 안았다. 득보도 억쇠와 같이 하였다. 두 사람은 큰 나무가 넘어가듯 쿵 하고 한꺼번에 자빠져 버렸다. 득보의 목을 안고 한참 동안 엎치락뒤치락 하던 억쇠는 갑자기 큰 소리로 껄껄껄 웃어 대었다. 그의 왼쪽 귀가 붙어있을 자리엔 찢긴 살과 피가 있을 따름 귀는 절반이나 득보의 입에 들어가 있고 득보는 아끼는 듯 그것을 얼른 뱉어 내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해가 지고 어두운 산 그늘이 내려 오도록 이 커다란 피투성이들은 일어날 생각도 없이 연방 서로 피를 뿜으며 엎치락뒤치락 하고 있는 것이다.]

++++

 

상룡 쌍룡 절맥같은 풍수지리적 설화의 상징성이거나 억쇠 득보 분이 설희등 등장인물의 갈등이나 서사구조같은 것 은 뒷전.

피가 철철 흐르고 살점이 뭉텅뭉텅 떨어져 나가는 저 무위로운 싸움의 현장만이 내게 강렬하게 어필하였던 것이다.

 

저 강렬한 허무주의.

소진해야 하는 생명의 힘.

그걸 풀 길 없어 필경은 자학에 이르게 되는 궁극의 쾌락인가.

 

[아침 햇살이 청동검에서 반짝거렸다. 이미 피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테세우스가 말했다. “아리아드네, 믿을 수 있겠어? 그 괴물은 방어도 안 했어.” -보르헤스 ‘아스테리온의 집’-]

보르헤스의 '아스테리온의 집'과 김동리의 '황토기'

내 의식의 흐름...

두 이미저리의 연결고리는 어떤 색감이었길래.

 

 

 

 

-독서 리뷰-

 

[[김동리]]

<밀다원시대. 까치소리. 화랑의후예. 늪. 산화. 저승새. 형제>

 

 

<밀다원 시대>

-김동리 作-

 

***동우***

2014.02.10 05:14

 

김동리의 '밀다원 시대'

등장인물들은 가명을 썼지만 이 소설은 거의 넌픽션일 겁니다.

물밀듯 밀고 내려오는 중공군.

그로 인한 1951년의 1.4후퇴.

서울에 버려두고 온 병든 노모, 흩어진 아내와 자식들..

이범선의 '오발탄'처럼 깜깜하게 어둡고 습하지는 않지만 전쟁의 두려움과 허무함이 짙게 배어있는 소설입니다.

 

보수동 남포동 광복동...

자갈치 선창가에서 건너보이는 영도와 오른편 저멀리 송도...

당시 너덧살짜리 나도 부산 범일동 어름에 있었을 테고, 십오륙년후의 저 거리들은 내게 참으로 정답고 낯익은 곳들입니다.

그러나 전쟁의 막바지 그때, 이중구(김동리)의 의식(意識) 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부산은 더 물러설 곳없는 막다른 벼랑끝, 뿌리잃은 허무함이 넘실대는 절망 가득한 도시일 뿐이었습니다.

남녘 끝 부산까지 쫓겨와, 그곳에는 아무런 정처(定處)가 없는 소위 문화인들.

밀다원은 그들이 동병상련(同病相憐)으로 비비대는 곳, 그곳만이 그들의 정서적 안식처이고 도피성(逃避城)이었나 봅니다.

 

["그러지 말고 한잔 취하이소." 오정수는 중구의 빈 잔에 또다시 술을 쳐주었다. 중구는 취기로 인하여 이미 얼얼한 손으로 그 술잔을 잡으려 했다. 그 때, 갑자기 그의 두 눈에서는 취한 얼굴로서도 열도(熱度)를 깨달을 만한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쏟아지며 뜻하지 못했던 울음이 북받쳐 오르는 것이었다. 그 순간, 취한 가운데서도, 이건 파렴치다, 언어 도단의 추태다, 하는 생각을 하며, 곧 일어나 방문을 열고 뛰어나갔다.]

 

오정수(실제 인물은 누구였을까) 범일동 집의 안온한 환경과 그의 따뜻한 인정을 견뎌낼수가 없는 이중구(김동리)의 심리상태를 나는 내것처럼 들여다 볼수 있을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는 바다로 부터 남포동 광복동을 끼고 상거(相距)한 보수동에까지 뱃고동 소리가 들렸다니.

피난지의 북새통이었을텐데. .

아, 옛날은 그래도 지금 보다는 고즈넉하였던가 봅니다.

폭풍우 거센 바닷가에 나 홀로 바람 속에 서있었던 그 날, 기억 속 정지된 그림처럼.

 

***eunbee***

2014.02.11 11:01

 

어머니 사진 한 장은 그래도 들고 피난 왔네요. 참으로 독한 성정의 글쟁이입니다.ㅎ

글을 쓰는 사람들, 그림을 하는, 음악을 하는.. 소위 일컬어 예술가라는 사람들이 모여든 밀다원.

그곳은 '막다른 끝'에서도 그런대로 안도하며 머물러 서로를 나눌 수 있는 오아시스였네요.

그시절의 모든 상황으로 본다면, 그곳에 모여든 사람들은 그래도 선택받은 사람들이 아닐까요.

천오백 명의 그 피난민(? 기차로 함께 내려온)은 중구가 의아해 했던 것처럼 모두 갈 곳이 있었을까요.

밀다원 보다 나은 곳의....

 

나는 중구라는 작중 인물이 참으로 냉혈한이란 생각이 들어요.

삐딱한 시선인가요? 어머니와 이불 쓰고 그냥 서울 어머니 곁에 있을 것이지.

아내와 딸도 다른 곳으로 보내고...(한국전쟁 때는 왜 그리들 가족이 흩어져서 피난을 해야만 했는지요.ㅠ)

오정수의 집이 주는 호사스럼?을 대하니, 일말의 괴로움(불편과 고독?)이 일어나는 것은

어머니에 대한 죄의식일까요.

 

이렇게 투정을 부리며 쓰다보니, 내 엄마가 생각나요. 울엄마도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께 우리집을 맡겨두고

문경세재넘어 일사후퇴 피난길에 올랐거든요.ㅎㅎㅎㅎ

그리고 또한 이렇답니다. 내 아들이 나 때문에 포화속에 머무른다고 때를 쓰면, 얼마나 기막힌 마음에 사로잡힐까, 아들의 안위를 위해 떠나는 것이 곧 엄마를 위한 효도라고 굳게 믿고, 떠나주는 아들에게 한없는 사랑과 고마운 마음을 보낼 거라는...

 

어제밤(아니 새벽?)에 읽기를 마치고는 스르르 눈 감겨오는 졸음에, 지금 씁니다.

그래서 헛소리일지도 몰라요.ㅎㅎㅎ

나는 어제가 전생처럼 아득하니까요. 하하핫

 

소설 속 이 시 좋아요, 동우님

 

'먼 바다 저쪽

흰 옷의 신부(新婦)는

등대(燈臺) 같이 섰는데

나는 나를 사르어

불을 켜는가.'

 

***동우***

2014.02.12 05:18

 

그러게요, 은비님.

어머니랑 이불 뒤집어쓰고 함께 당할 내기지, 병든 노모를 내팽겨치고 저 혼자 살겠다고.. 쯧쯧.

그러나 은비님. 인공치하에서는 살수 없었던 그 상황을 이해해줍시다그려.

김동리(이중구가 김동리라 치고)는 당시 프로문학가들과 치열한 논쟁을 벌였던 우익문단의 선봉이었지요,

그렇게 절박했을겁니다.

 

박완서의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인공치하에서는 대한민국에 조금이라도 봉사한 흔적이 있으면 살 수 없었고, 수복 후에는 한강건너 피난간 흔적이 없으면 또한 곤혹을 겪어야 했던.

6.25는 못나빠진 광기 가득한 사상의 전쟁이기도 했으니까...

 

오정수 집의 그 단란하고 안온한 환경.

술한잔에 맥없이 울음을 터뜨리고 뛰쳐 나오는 이중구.

죄의식과 부러움과 자의식이 혼합된 감정.

지금 자신의 처지로서는 아득한 꿈과 같은 그런 분위기에 맞닥뜨린 자의 불편함과 곤혹스러움.

그에게는 동병상련의 비비댐이 있는 밀다원이 가장 편하였겠지요.

 

그런데 은비님.

나는 엉뚱한 것에 마음을 빼앗깁니다그려.

보수동에서 들리는 뱃고동소리.

보수동이라면 바다와는 상당히 멀리 떨어진 동네거든요.

자갈치 바다가 지척인 남포동에서도 들을수 없는 뱃고동소리가 보수동에서도 들을수 있었다니.

전쟁통의 피난지, 북새통일 부산이었을텐데 그 고즈넉한 정경이 아주 생경스러워요.

나 고등학교시절만 하여도 부산거리에는 냉냉거리면서 전차가 다녔어요.

 

영도 지금 나 사는 태종대 부근의 동네만 하더라도 그 때에는 아주 산골, 옛 시청 앞에서 한시간 한대꼴로 ‘시외버스’를 타야만 갈수 있었거든요.

하하, 상전벽해가 어디 이뿐이리오.

은비님 사시는 분당만 하더라도 그 때에는 허허벌판 황무지...

 

저 어둡고 우울한 상황 속에서의 뜬금없는 감상이랍니다.

은비님은 어제조차도 전생처럼 아득하다시는데 말입니다. 하하

 

***eunbee***

2014.02.12 23:03

 

그렇다해도 병든 어머님을 들쳐업고라도, 싣고라도, 함께 떠나올 것이지. 으이구~ 남자라는 생각없는 인사들은.ㅋㅋㅋ

김동리의 아내가 서영은이었나요? (모르는 것 천지 ㅠㅠ) 그렇다면 그사람들의 스토리가 좀...떠들썩.ㅎ

 

법정스님 책을 읽다가, 스님을 길러주신 외할머니의 부음을 듣고도 수행하는 신분이기에

장례에도 가지 않았다는(못한 것이 아니라, 나는 안간것이라고 생각하였지요)내용을 읽고는

그때부터 그 스님은 중생을 향해 그 무어라고 교훈되는 말씀을 할 자격이 없다고 이야기했어요. 내가.

당신의 할머니나 어머니의 장례에도 못가는 사람이 수행은 해서 뭣하겠냐면서요.ㅋㅋ

 

동우님,

보수동에서도 들려오는 뱃고동 소리.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그 시절.

피난지 북새통이라도, 사람소리는 그리 시끄럽지 않을 것 같아요.

지금 소음으로 울려대고, 공기에 섞이는 그 수많은 가지가지의 기계음들

도대체 몇 데시벨이 되겠어요. 엄청나게 크겠지요. 중독된 귀를 가진 우리네가 느끼지 못하는...

그 기계음들 때문에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게 된 보수동까지의 뱃고동.

많은 인총보다, 웅웅거리며 괴물들이 되어 우리의 귀와 정신을 잠식하는 그것 문명의 이기들 때문에

보수동엔 뱃고동이 없는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싶어요.ㅎ

 

(보수동 뿐만아니라 부산의 그시절, 고즈넉함이 생경스럽다는 동우님. 현재 부산사람으로 사시는 동우님의 그 마음이 느껴져요. 상전벽해 분당 사는 나도..ㅎ)**소치 경기 쉬는 시간, 사족 달고 갑네당~

 

그리고 내 전생은, 재현될 수 없는, 이어질 수 없는, 볼 수 없는...것은 모두 전생이라고 하는 거랍니다.

어제들에 대한 아쉬움이나 그리움이 너무도 사무치니, 그렇게 잊으려 억지를 쓰는 것이기도 할테구요.

 

소치,

남자 1000m 경기 볼 거예요. 지금부터.

자정 넘겨 1시에는 이상화의 금메달 수여식이 있다니...또 함께 감격해 해야죠?

이상화는 참으로 예뻤어요. 다른 나라 선수들은 완전 남자몸매던데...그녀의 매뉴큐어까지 예쁘던걸요.ㅎㅎ

 

***동우***

2014.02.13 05:49

 

은비님.

김동리의 아내는 소설가 손소희였었지요. (손소희도 첫째 부인은 아니었을겁니다)

어느 날, '심심한데 우리 뽀뽀나 한번 할까' 하는 분위기로 서영은은 스승 김동리와 얽히게되었답니다.

'당신은 아버지의 요강이었어'

서영은은 김동리 죽은 후 김동리의 자식들에게 말할수 없는 모욕을 당했답니다.

 

내 느끼건대 그 후 서영은의 소설들은 깊이를 더해진듯 해요.

그녀가 던진 화두는 내게 하나의 명제로 자리잡기도 하였지요.

'요강'과 '사막'의 은유에 대하여.

이를테면 삶에 대한 사유에 있어서 미시와 거시의 시각이랄까.

 

그리고 은비님.

예전에 박순녀의 소설인가에서 읽었던 구절이 있어요.

희미한 기억이라 정확핮는 않은데..

전쟁의 모진 참상을 겪고 피난 온 어떤 중년 남자에게 어떤 젊은 여자가 '난 ‘절대로’ 돼지고기(이를테면) 먹지 못해요'라고 말합니다.

남자가 여자에게 말하지요.

"아무개씨, ‘절대로’ 못해요라는 말 그리 쉽게 하는게 아니라오."라고.

 

당자가 당하는 삶의 디테일.

그에 대한 것을 자신의 생각을 빗대어 쉽게 재단하지 말라는 뜻일테지요.

하하, 은비님의 법정스님께 대한 지극한 존경과 사랑 모르는바 아니지만. 저 부분에 대한 은비님의 못마땅함은 다시 한번 생각하시기요.

법정스님의 저 삼엄한 수행자적 자기관리도 그렇지만 무릇 요강이라는 삶의 디테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아니겠수? 핫핫핫.

 

은비님.

요즘이라고 도회지의 오밤중에 무슨 기계음이 대기에 그리 많이 섞여있을라구요.

느끼건대 공기의 밀도가 달라진 것. 아니면 요즘 사람들(나를 포함하여)의 감성의 밀도가 성글어서 그런 것..ㅎ

 

요즘 우리 은비님 살맛나게 하는 소치.

승패에 대한 호승심도 그러시겟지만, 육체의 다이나믹한 아름다움을 찾아 느끼시는 분이시니..

 

차츰 얘기 나누어요.

 

 

<까치소리>

-김동리 作-

 

***동우***

2014.12.27 04:18

 

김동리의 까치소리 (1966년 작)

 

목숨이 풀잎같이 스러지는 전장(戰場).

내일을 기약할수 없는 병사에게 고향의 여인은 삶에 대한 원형상징입니다.

그것만이 그를 살게하여 자해함으로 죽음으로부터 벗어납니다.

죄책감을 안고 돌아 온 고향, 그러나 그를 기다리는 것은 좌절과 절망뿐입니다.

 

“아침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오고, 저녁 까치가 울면 초상이 난다."

까작 까작 까작 까치소리는 희(喜)와 애(哀)를 가르는 복불복(福不福)의 팔자가름인가 보지요.

쏘나 태종대의 까끄매는 흉조(凶鳥)가 아니라 철학자같은 새라는데, 오히려 까치가 길조(吉鳥)는 아닌가 봅니다.

 

까치소리와 오버랩되는 어머니의 기침소리.

좌절된 영육에 스며드는 파괴적 주술인가요.

어머니의 목을 조르고 싶은 광포한 충동.

 

까작 까작 까치소리, 쿨룩 쿨룩 쿨룩 기침소리....

귀와 가슴 속, 안팎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무엇을 강박하는 주문인가요.

그는 친구(애인을 빼앗아간)의 누이를 능욕하고 그녀의 목을 조릅니다.

 

<까작 까작 까작 까작, 그것은 그대로 나의 가슴 속에서 울려오는 소리였다. 나는 실신한 것같이 누워 있는 영숙을 안아 일으키기라도 하려는 듯 천천히 그녀의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그리하여 다음 순간 내 손은 그녀의 가느다란 목을 누르고 있었었던 것이다.>

 

 

<화랑의 후예>

-김동리 作-

 

***동우***

2015.01.24 04:59

 

저 황진사란 양반뼈다귀, 처사(處士)다운 풍모는 비추어지지 않는군요.

제 말마따나마 천량이 없어 그렇기도 하겠지만, 비루하고 몰염치하여 천품이 양반짜리는 못되지 싶습니다.

 

아비투스.

가끔 생각합니다.

두뇌도 보잘 것 없고 의지도 강인하지 못한 품성, 거기다 내 구조주의(?ㅎ)마저 천비하고 용렬한 것이었으니 올바른 신언서판은 언감생심.

골기삼엄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더라면, 나는 좀 다른 인간이었을수도 있지 않았을까.. ㅎㅎ

하하, 잘되면 제 탓 안되면 조상 탓이올시다.

 

땅콩회항등 돈쟁이들의 저 천박한 천민자본주의에 '댄디'는 없습니다.

뼈대의식없이 '노블레스 오블리쥬'는 요원할 뿐이지요.

 

좋은 주말을.

 

***송명숙***

2015.01.26 17:46

 

게으른 양반

양반이라해도 맞는 말인지. 게으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제성격으로는 밥 한끼도 아깝습니다

노력하지않는 배고픔은 마땅하지 않을까요

결국 사기꾼 역활하다 붙잡혀 가는 신세 ㅎ

씁쓸한 결말입니다.

다시한번 성실과 부지런함을 생각해봅니다

 

***동우***

2015.01.28 04:45

 

하하, 송명숙님.

밥한끼 정도는..

너무 야박하게 굴지 마십시다.ㅎ

 

작가의 눈이 그러하듯 저 황진사. 연민스러운 면도 없지 않아요.

 

 

<늪>

-김동리 作-

 

***동우***

2015.02.07 04:32

 

숲 그리고 늪.

원초적 자아(自我)가 지향하는 곳은 어디인가.

 

숲속에는 웃는 어머니가 있고 색색의 꽃과 싱싱한 과일들과 아름다운 새들이 산다.

그리고 거머리 지렁이 두꺼비가 서식하고 거품 부글거리는 늪.

숲은 삶, 늪은 죽음의 메타포인가.

 

그러나 알 수 없는 야릇한 기대와 호기심으로 늪은 손짓한다.

검푸른 늪 속에 잠겨 죽는 소년과 의붓누나 그리고 무당 모화(무녀도).

 

<'어머니. 열어 주세요.' '작은놈이에요. 사, 삼켜 주세요. 조금, 조금 무덤의 아가리가 벌어진다. 그들의 몸은 이미 안에 들어와 있다. 밑으로 밑으로 한없이 아늑한 웅덩이다. 어딜 그렇게 헤매고 다녔던 것인지. (신경숙 '새야 새야')>

 

무덤.

원초적 따뜻함, 어머니의 자궁.

정신분석.

문학적인 인식방법으로 천착(穿鑿)하는 무의식...

 

2월 7일 새벽.

어머니가 그립다.

참혹한 관계의 기억들 촛불 하나하나 꺼뜨려.

이윽고 도달하는 양수(羊水)속 부유하던 기억.

관계의 원형질(原形質), 기억너머 그 어머니.

 

***설레임***

2015.02.11 04:21

 

김동리의 까치소리를 희미하게 기억합니다

그 속에도 서민의 삶이 묻어 있었는데.

참 안타까운 심정이 됩니다

정말 그곳은 따뜻한 곳이 되었을까요? 돌아갈 수 없는 어머니의 품속같이 저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늘 가슴 아리는 부지런한 그리고 절약이 몸이 밴 제주어로 조냥정신이 강한? 그 시절의 엄마의 모습이었을거예요

가난해서 아껴야 하루하루 살아갈 수 있는 너무나 처절한 삶.

석은 늘 그리움의 대상이 숲속의 늪

그곳은 어머니와의 추억이 있는 유일한 장소 그래서 늘 그리워 정겹게 발이 갔던 아늑한 곳에서의 마지막 그리고 나를 염려해주는 한사람 의붓누나 외롭지 않은.

그것으로 위로를 삼아 봅니다

 

***동우***

2015.02.11 04:34

 

설레임님의 가슴 속에 남아있을 어머님의 이미지.

근면과 절약이 몸에 배인 어머니 삶의 모습.

 

조냥정신.

제주말은 어딘지 신선하게 감각적이라는 느낌입니다.

 

"제 에미를 따라 뒈질려고 그런다."

숲이 따뜻하고 밝은 상승하는 삶 쪽이라면 늪은 어둡게 가라앉는 하강하는 이미지의 메타포..

필경 소년의 어머니가 투신하여 죽었을...

 

그러나 숲과 늪은 오버랩됩니다.

그것으로 설레임님처럼 위로를 삼아봅니다. ㅎ

 

"울 엄만 어쩜 할아버지한테 가 있을 거야. 늪에 가면 수풀이 보여...... 할아버지가 사시는....... 울 엄마 중질 갔다는 건 거짓말야."

 

 

<산화>

-김동리 作-

 

***동우***

2016.09.02 04:26

 

1936년 발표된 김동리(金東里,1913~1995)의 초기작, 산화(山火)

두번으로 나누어 올립니다.

 

김동리의 소설적 경향(관념적 운명론적 순수문학적..대충 그런 쪽..)과는 사뭇 다른 소설입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색채 농후합니다.

 

이 소설, 몇년전 미국산쇠고기 광우병 난리때 사람들 입에 회자되기도 하였었지요.

마저 올리고 나서..

 

***동우***

2016.09.03 09:00

 

["홍하산에 산불이 나면 난리가 난다지요?"

하고 물었다.

"난리가 안 나면 큰 병이 온다지."

그러자, 또 한 사람이,

"그보다 이 몇 해 동안 통이 산제를 안 지냈거든요."

이렇게 말하자 또 다른 사람이 이에 덩달아,

"옛날 당산제를 꼭꼭 지낼 땐 이런 변이 없었거든."]

 

사람에 의한 난리나 자연이 주는 돌림병이나 무지렁이들에게는 모두 하늘이 주는 재앙(天災)입니다.

궁핍도 굶주림도.

있는 자의 착취와 행패까지도.

두 손 싹싹 비비면서 천지신명에게 빌 따름입니다.

 

"산신님네, 이 고음국을 먹고 나거든 부디 병과 화는 이 집에서 다 물러나고 복과 재수만 들어와 주옵소서. 부디부디 산신님네 태산 같은 은혜만 믿삽내다."

 

불소리와 바람소리, 그리고 마을 골목마다 육독(肉毒)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의 비명소리..

 

나도 올라보았던 참 아름다운 경북 청도의 운문산.

하늘 한쪽을 아주 녹여낼 듯한 벌건 산불이 그 산을 태우고 있습니다.

산불.

이글이글 익어가는 분노... 혁명의 기운.

 

그런 은유를 내포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암담한 그 시대의 어떤 부조리에 대한 불타는 작가의 분노는 분명 있었으리라.

 

MB 정권 때의 광우병 파동.

실체적 육독(肉毒)이 아니라 허공에 떠도는 괴담의 산화(山火)가 세상을 벌겋게 물들였었지요.

그러하니, 작금 누구나 손바닥에 쥐고 있는 SNS의 프로파간다는 더욱 가공할 것입니다.

 

하늘은 진실을 압니다.

필경은 순천자흥(順天者興)이고 역천자망(逆天者亡)이올시다.

 

좋은 주말을.

 

 

<저승새>

-김동리 作-

 

***동우***

2017.03.03 04:41

 

'저승새'

샤먼과 불교적인 것이 어울어진, 김동리적 색채가 짙은 소설입니다.

무언가 아름답고 왠지 서럽습니다.

 

<남이는 숨을 두어번 내쉬고 나서 다시 보릿짚가리 위에 드러누웠다. 그도 그 곁에 나란히 누웠다. 가쁜 숨을 몇 차례 내쉬고 나서야 그네들의 눈에 별빛이 들어왔다. 삼태성, 좀생이별, 수수떡할머니별.... 늘 보아오던 별들이건만 왠지 이때따라 유독 아름답게 보였다. 뿐만 아니라, 그 별들이 모두 각각 자기들의 이야기를 속삭이고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스테파네트와 목동을 감싸안은 하늘 가득한 별들은 그레고리안 성가를 합창합니다.

별떨기 아래의 사랑은 얼마나 청결한지요.

 

사랑을 잃은 경술이는 중이 돼버립니다.

 

"어머니 나 엿판 하나만 마춰 주."

김동리의 다른 소설 '역마'에서도 '성기'는 사랑을 잃고(윤리상 이룰수 없는) 엿판을 메고 정처없는 나그네 길을 떠나지요.

 

그러나 만허스님(경술)은 여든나이가 되도록까지 남이를 잊을수가 없습니다.

매년 기다리지요.

저승새가 되어 찾아오는 남이를.

다그르르 저승새의 울음소리를 듣는 만허스님의 얼굴은 법열에 취한듯 지팡이를 찾아들고 길을 떠납니다.

 

만허스님의 손자일까요? (소설 속 암시는 없지만)

어린 사미 혜인도 저승새를 보면 왠지 서럽고 아득하기만 합니다.

 

올해도 저승새가 울어 길을 나선 만허스님.

이제 돌아오지 않는군요.

 

"그럼 이 도령도 마음 변치 말아줘. 나 먼저 저승 가서 기다릴게."

남이 따라 저승으로 가 버린 모양입니다.

 

만허스님, 그 사랑 얼마나 절절하길래 俗緣에 저리도,

쯧쯧, 큰스님 되시기는 영 글렀습니다그려.

 

날짐승에게는 어떤 기원이 담겨있는듯 합니다.

솟대가 그렇고 일본의 토리이(鳥居)가 그렇듯,

하늘을 가차이 하는 짐승이라 그런가 보지요.

 

우리 정서에는 분명 샤먼적인게 있습니다.

운명론적 비극성, 허무주의.... 恨이라는게 그런 색채가 아닐까요.

 

요즘 회자되는, 박근혜의 탄핵을 강렬하게 비판하는 김평우 변호사.

김동리의 아들이라지요. (김동리의 두번째 부인이었던 작가 손소희의 아들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용모를 보니 아버지와 많이 닮았습디다.

그의 보수주의, 한때 우익문단의 전위였던 부친과는 다른 성격일테지요만.

 

 

<형제>

-김동리 作-

 

***동우***

2019.03.06 07:07

 

김동리(金東里,1913~1995)의 '형제'

 

1948년 10월 19일, 국군 제14연대에 의하여 일어난 여순사건.

여수 순천 지역의 좌익세상은 고작 사나흘.

이를 빌미로 이승만 정권은 강력한 반공국가를 구축하였고, 2년후 6.25가 터졌지요.

 

대통령의 3.1절 기념사, '빨갱이'란 표현의 논란.

아, 우리 근세사는 저토록 참혹한 골육상잔(骨肉相殘)의 세월을 겪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