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신경숙]] -7- (1,4,3,3,1)

카지모도 2020. 5. 3. 07:18
728x90

 

-독서 리뷰-

 

<그가 모르는 장소>

-신경숙 作-

 

***동우***

2015. 6. 26

 

신경숙의 '그가 모르는 장소'

호숫가.

늙은 어머니와 아들이 함께 한 낚시터.

그곳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장소이고, 달빛 교교하게 비추이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그러나 삶을 반추하여 확인하는, 슬픔이 고요하게 넘실거리는 곳이기도 합니다.

 

삶의 슬픔.

그리고 관계의 슬픔.

 

아무도 모르는 장소,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우물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깊은 우물 속에 두레박을 드리워 슬픔을 길어올립니다.

그 슬픔으로 우리의 삶을 적십니다.

 

결코 공유할수 없는 저마다의 우물을 간직하고 있어서 존재란 그렇게 슬픈 것인가 봅니다.  

 

신경숙의 문체는 몹시 정일(靜逸)합니다.

자칫 지루할듯 싶지만, 감추어진 이야기들은 우리 삶속에서 익히 만져지는 것들.. 지루하지 않습니다. 

 

'그가 모르는 장소'

두번으로 나누어 올립니다.

 

연재물(連載物)의 댓글란은 일단 살려 놓겠습니다.

끝부분 마저 마친후 댓글과 답글은 모두 복사하여 한꺼번에 따로 포스팅한 후 닫지요.

 

***동우***

2015.06.27. 04:50

 

<처음에는 어린 너를 데리고 이 호수에 올 적에는 마음이 슬프고 서럽고 그런 때만였단다. 다 지난 얘기지만 고만 죽고 자플 때면 너를 데리고 여기에 왔구나. 세상이 어디 만만한 게 한 대목이나 있더냐? 그냥 지나가는 일이 없는 게 인생사지마는 유독 나한테만 그래 보이더라. 한 가지도 그냥 지나가지 않았어야. 에누리가 없었어야. 그때마다…… 여기에 와서 마음을 달래보고 달래보고 그랬구나. 내 마음을 달래기에는 여기가 가장 알맞은 장소였어야. 너를 데리고 이 세상을 사는 일이 쉽지 않았더니라. 온통 마음을 달래며 보낸 평생이었지 싶어야. 달래고 또 달래고…… 또 달래고 그랬구나.>

 

호숫가 낚시터.

물가에 낚시대를 드리워 놓고 텐트를 처 야영하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늙은 어머니와 아들.

주위에 흔치 않은 그림이지만 저런 모자(母子)의 모습은 보기에 참 아름답습니다.

저 장소는 모자에게는 슬픔을 고백하고 슬픔을 나누어 슬픔을 치유하는 자리였던가 봅니다.

 

<난 그런 바다를 두고 집을 버리고 와버맀다. 견딜 수가 없었어야. 헌번은 그가 물었다. 무엇을요, 어머니? 무엇을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쯤 되면 어머니는 입을 다물었다. 그때는 그랬어, 견딜 수가 없었어. 한번 말끝을 흐리고 나면 어머니는 더 이상 그 바다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호수의 물살에 눈길을 주고는 내내 잠잠히 있다가는 그의 목덜미를 쓰다듬어주거나 어깨를 쓸어주며 그냥 그렇단다. 괜히 그렇게 견딜 수 없는 때가 있는 법이란다, 하였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유년의 바다를, 난쟁이 딸과 함께 바다에 빠져죽은 언니를, 아버지를, 그리고 자신의 깊은 곳 감추었던 詩를 고백합니다.

 

<수의사를 만나러 가려고 준비하는 그 사람을 안에다 두고 밖에서 문에다 대못을 질렀어요. 저도 회사에 나가지 않은 채 그 문 밖에서 지냈습니다. 사흘 동안 서로 문을 사이에 두고 말 한마디 없이 지냈습니다. 나흘째 되던 날 안쪽 문에 바짝 붙어서서 그 사람이 여보, 여보 나를 부르더군요. 울면서 말했어요. 자신을 놓아달라고. 우리는 서로 너무 상처를 입혀서 이제 도저히 함께 살 수가 없다고…… 이혼을 해달라고, 이혼. 그때껏 아내가 이혼이라는 말을 꺼낸 적은 없었습니다.>

 

아들은 어머니에게 아내와의 결별을, 그리고 어린 딸과의 결별을 고백합니다.

 

<“안 된다, 승희는. 승희는 안 돼.” “아이는 생모 밑에서 자라는 것이 좋다는 게… 그렇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아들에게, 저토록 간절하게 사랑하는 어머니는 친모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한번은 친구 집에 갔는데 친구 형이 맞고 들어왔어요. 그랬는데 친구 어머니가 친구 형의 등짝을 마구 때리는 거였어요. 맞고 들어오려면 집에 들어오지 말라면서… 마구 야단을 쳤어요. 그리고는 곧 씻겨주고 입맞춰주고 약 발라주고… 그러는 거였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참 동물적인 풍경이었어요. 쩝,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춰주고 어루만져주더군요. 소가 새끼를 낳아놓고 일일이 다 핥아주듯이 말이에요. 그 순간 어머니가 그렇게 잘해주시는데도 제 마음에 옹송거리고 있던 결핍이 무엇이었는지가 느껴졌어요. 무엇이 그렇게 불안했는지도요. 어머니는 제게 야단도 안 치고 손바닥으로 등짝을 때리는 일 같은 건 전혀 하지 않으셨던 거예요. 일부러 안한게 아니라 그렇게 할 수가 없으셨던 거예요… 승희를 저와 같은 결핍감 속에서 자라게 하고 싶지 않을 뿐이에요, 어머니. 그뿐이에요.”>

 

아무리 완벽한듯 보이는 관계 속에도 반드시 어떤 결핍은 도사리고 있는 법입니다.

제가끔 깊은 '우물'을 지니고 있는 실존의 슬픔이고 관계의 슬픔입니다.

관계는 관계끼리 뒤섞이되 우물은 우물끼리 뒤섞일수 없으니까요.

 

<아내는 당신은 상처받기 싫은 거예요. 쏘아붙였다. 상처. 상처받기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까만 아내의 말이 왜 그렇게 가슴에 맺혔는지, 당신은 상처받기 싫어서 누구하고도 깊은 관계를 안 맺어요. 심지어 아내인 나하고도. 깊은 관계를 안 맺으니 화낼 일도 없고 싸울 일도 없죠. 사람들은 그런 당신을 부드럽고 대인 관계가 완만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막상 당신이 위험에 처했을 때 누가 적극적으로 당신을 변호해줄까요?>

 

우물이 깊기 때문에, 우리는 관계에 상처받기 싫어 관계에 소홀한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은 괜찮아, 아직은 괜찮다"하면서 관계를 미봉(彌縫)하는 삶에 너무나 익숙하게 길들여졌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우물쭈물하다가 관계는 흔히 무참(無慘)해 지고는 하지만 그게 또한 인생인게지요.

 

<“더는 견딜 수가 없었어야… 견딜 수가 없었어.” 그의 두 손이 저절로 얼굴을 향했다. 말없이 그는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너를 거둬줘서 고맙다고 했냐… 네가 있어서 내가 살았는데? 나는 네가 없었으면 네 아버지하고 살도 안 했다아… 네 아버지가 살어 계실 적엔 아버질 사랑도 안 했다아. 네 아버지가 남아 있는 너와 나를 위해 실낱 같은 아홉 달이나 간신히 붙들고 있는 것을 봄서야 그때야 사랑을 느꼈지야. 이미 늦은 마음이었어야… 해도 내내 그 힘으로 살은 것도 사실이네… 너를 키우면서 마음 아펐던 것은 네게 동생도 하나 못 만들어주는 내 처지였어야…”

“…” “얘야… 너는 내 호수였어야 내 호수였어.”>

 

아들은 깃털처럼 가벼운 어머니를 업고 호숫가를 서성이다 말라붙은 눈물인채로 잠이든 어머니를 텐트 안에 눕혀 드립니다.

 

파멸된 관계로 인한 절망에 대한 미봉(彌縫)의 치유일지라도, 관계의 결별을 지긋이 수렴하려는 고통스러움 또한 삶의 또다른 모습일겁니다.

 

<물속의 흙이 자갈이 둥둥거리는 수초가 편안하고 부드럽다. 그는 여기에 오래도록 머물러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여기가 머물기에 가장 알맞은 장소 같다고. 하지만 혀에 상처를 입은 향어가 그를 콱, 물었다. 향어는 강렬하게 그를 낚아채어 물 밖으로 밀어낸다. 그는 눈꺼풀 위에 앉아 있는 새우들을 털어내며 눈을 번쩍 떴다. 새벽인가. 초저녁부터 하늘의 잔별들 속에 승희처럼 앉아 있던 초승달이 까닥까닥 이울고 있다. 아름다운 호수다. 옛날에는 향어가 살았고 이제는 누치, 붕어, 모래무지가 살고 있는 호수다.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호수다. 어쩌면 그의 카메라 가방에 넣어가지고 다니는 필름 속에서나 존재하는 호수다.>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호수.

그가 모르는, 그녀가 모르는, 어머니가 모르는, 아들이 모르는 제가끔의 장소..

 

소설 속에도 등장하는 로버트 레드포드가 만든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

몬타나 계곡의 급류에 하반신을 담그고 플라이 낚시하는 부자, 기억나시나요?

 

<“참말 햇빛이 찬란했지야. 화면인데도 눈이 부셨어야. 그 송어 낚시가?”

“플라이 낚시.”

“으으, 그래 플라이 낚시… 참 멋있었어. 콸콸거리며 끝없이 흘러가는 그 여울물이라니 … 그 위에 쏟아지는 햇빛이라니… 이제사 말이지만 그때 그 영화를 보면서 장로교 그 목사 아버지 말이다.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말이다. 나도 그런 아버지로 한번 살고 잪드라. 다 늙은 나이에 주책이냐? 어린 아들들에게 물결 읽는 법이며 침묵 읽는 법을 가르치는 그 목사가 참 부러웠어야. 너그럽고 단아하고 때로는 엄숙한 아버지로서 삶을 살아보면 좋겠구나 그런 엉뚱한 생각을 했더란다.”>

 

존재는 슬플지라도 인생은 아름답습니다.

글라시아스알라비다. 

 

***eunbee***    

2015.06.27 23:10

 

동우님의 댓글 읽으면서 내 눈가에는 이슬이 맺혔어요.

전번 올리신 신경숙의 새야새야가 불현듯 떠올라...

 

***동우***    

2015.06.28 05:00

 

말씀듣고 새야새야, 다시 들여다 보았습니다.

은비님 취향, 그 식성에 맞는 그 색감을 반추하면서 더듬어 보았지요.

거기서도 은비님은 신경숙에 대하여 '요란떨지 않는'이라는 표현을 하셨더군요.             

흐르는 강물처럼.

은비님 말씀처럼 정말 신경숙은 격하지 않아요.

 

근자에 가장 잘 나간다는 두 작가.

공지영과 신경숙은 아주 다른 기질의 작가이지요.

공지영에게서 '새야 새야'같은 소설을 기대할수 없듯이. 신경숙에게서 경향적 소설을 바랄수는 없을겁니다.

 

신경숙의 표절 건.

이번 사안은 벌써 10 여년전에 이미 어떤 평자에 의하여 지적 받았던 것이라는군요.

당시 신경숙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가벼운 어조로 '우국'은 읽어본적 없다고 말하였답니다.

그런데 이번 한 소설가가 다시 어필하여 동일한 문제가 불거졌을때 어떻게 예전 읽어보지 않았다고 한 말을 부정하고 우국을 읽어보았다고 하겠어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러지 않겠어요?

표절도 표절이지만, 그걸 가지고 일부 사람들은 개떼처럼 물고늘어지는 겁니다.

그 사람들 만일 신경숙이 우국에서 가져다 쓴 것이라고 인정한다면 가만있겠어요?

표절에다가 예전 거짓말을 하였다고 또 야단일텐데.

마치 신경숙이 무슨 문단의 부당한 권력인것처럼(동인문학상 심사위원인 것이 권력이었던가), 타도하자 신경숙이라는 폼들을 잡고서.

 

은비님.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두 사람 모두 참으로 건강하고 젊은 육체의 소유자들이었으므로, 그들의 정교(情交)는 격렬하였다. 밤에는 말할 것도 없었고 훈련에서 돌아온 흙먼지 투성이의 군복을 벗을 틈새도 아까운 나머지 집에 돌아오자마자 신부를 그 자리에 밀어 눕힌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레이코 또한 이에 잘 응하였다. 첫날밤을 지내고 한 달이 지났을까 말까 한 때에 레이코는 기쁨을 알게 되었고, 그 사실을 안 중위도 기뻐하였다.>

 

우국의 이 문장이 전제되지 않고서 신경숙의 아래 문장이 전혀 새롭게 창작될수 없는 것인지.

 

<두 사람 다 건강한 육체의 주인들이었다. 그들의 밤은 격렬하였다. 남자는 바깥에서 돌아와 흙먼지 묻은 얼굴을 씻다가도 뭔가를 안타까워하며 서둘러 여자를 쓰러뜨리는 일이 매번이었다. 첫날밤을 가진 뒤 두 달 남짓, 여자는 벌써 기쁨을 아는 몸이 되어 있었다.>

 

참으로 유사하지만 정서적 동일성의 우연적 일치가 절대적인 확률로서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전설'이라는 소설의 그 대목에서 이런 문장의 묘사는 아주 적실한 것이었습니다.

두 선남선녀의 완벽한 사랑, 정신적인 결합 위에서 이루어지는 혼인을 통한 부부간 정애의 완성..

여자는 저 사랑의 낙인을 보듬어 안고서 일생동안 남자를 기다립니다.

 

레이코와 여자의 기쁨은 두 작가가 추구하는 그 의미는 다른 것이었지만 부부간 사랑의 완결성이란 면에서 저 문장은 아주 적실한 것이었습니다.

 

창작이 아니었지만 내 작품에 그 문장이 적실하여 그래서 가져다 썼다...

신경숙이 그렇게 고백하였더라면 괜찮았을까요?

또한 그런 고백을 어쩔수없이 하지 못하였다고 하여 후안무치로 매도 한다는 것은..

 

설령 저 몇 단락의 표절이 있었다고 하여 저 '새야새야'나 '그가 모르는 장소' 등 신경숙의 문학을 싸잡아 매도할 권리가 누구에게 있습니까?

왜 그녀가 절필을 해야 하는지요?

몇문장 가져다 쓴게 문학인으로서 모든걸 접어버려야 할 치명적인 만고대죄라도 되는겁니까.

 

나는 은비님.

우리나라에 팽배한 어떤 진영적 코드를 봅니다.

반대 대상을 향한 사안과는 별도의 증오가 내재된.

 

하하, 은비님.

내가 시방 무언가를 향하여 '빌어먹을!'하고 내뱉는 모양입니다.

 

오늘, 이상문학상 수상작 신경숙의 '부석사'를 올리려고 하였습니다만 그만두기로 하였습니다.

나같은 장삼이사까지 자꾸 신경숙을 뇌까리기에 심사가 피곤하여... ㅎ

대신 가벼운 추리소설을 올렸어요.

 

장황하게 지껄였습니다.

 

100 년도 더 된 아파트의 큰 따님댁 일실에서 지금 잠 잘 준비를 하실 은비님께 굿나잇

 

'내 것 > 잡설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용학]] (1,4,3,3,1)  (0) 2020.05.03
[[신데렐라, 숙제, 진주, 파리]] (4)  (0) 2020.05.03
[[신경숙]] -6- (1,4,3,3,1)  (0) 2020.05.03
[[신경숙]] -5- (1,4,3,3,1)  (0) 2020.04.29
[[신경숙]] -4- (1,4,3,3,1)  (0) 2020.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