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장용학]]
<요한시집> <현대의 野>
<요한시집>
-장용학 作-
***동우***
2015.08.13. 05:35
황석영 선정 한국명단편 101
장용학(張龍鶴,1921~1999)의 요한시집(1955년 발표)
내가 이 소설을 읽은 것은 1960년대 '청구문화사'에서 간행한 '세계전후문학전집'의 한국편에서였다.
'전후세계문학전집' 전질은 10권짜리였는데 거기 실린 작품들은 혼란을 동반한 경이로움이었다.
더불어 덜 여문 삼류짜리 젊은놈에게는 의식의 확장이었다. <너덜너덜해진 책 두어권 내게 남아있다>
요한시집, 이 관념적 소설을 그때 나는 어떻게 읽었고 어떻게 받아들였었을까.
필경 형편없는 독서량에다 얕은 사유의 깊이로는 겉만 핥다 말았을 터인데, 막걸리집 여학생 앞에서는 '실존'이 어쩌구하면서 오만 심각한 표정을 짓고서리 '척'하면서 떠들어댔을 것이다.
당시 지식인연 하는 사람들에게서 범람하였던 실존주의, 발가락의 때만큼도 이해하지 못하였으면서...
이 소설을 이해하지 못하는건 지금이라고 다르랴마는, 나잇값으로 문대면서 아전인수로 지껄일 뿐이다.
이 소설, 액추얼한 현장은 거제포로수용소 뿐이다.
거제포로수용소-
그곳은 절체적(絶體的) 상황속 이념이 독기를 품고 전장(戰場)보다도 더 극한의 끔찍한 현장이었다고 한다.
변소깐의 아래에서는 사람의 팔다리가 비죽이 솟아오르는...
그 현장을 겪은 작가 강용준의 자전적 소설 '철조망'이 떠오른다.
그렇지만 장용학은 거제포로수용소를 경험한 사람이 아니다.
타인의 경험을 관념으로 차용하여,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관념적 서술로 일관되어 있다.
그것도 체계와 순서와 논리를 갖춘 서사의 형식이 아니라 주인공이 1인칭으로 지껄이는 '의식의 흐름'으로.
요한이라면 세례요한을 말하는 모양인데, 어떤 실존적 자각으로서의 요한일까.
구원을 예언하고 기다리는, 그러나 오지않는 예수...
이를테면 요한은 '고도'인가.
느닷없이 등장하는 살로메의 관능은 또 무엇일까.
"살로메……알지? 요한의 모가지를 탐낸 그 여자 말이야. 그 계집이었어!"
인간이라는 존재는 영원한 에뜨랑제다.
자연에 안돈함을 거부하면서도 신께도 이르지 못하는.
아, 중간계를 떠도는 중음신(中陰身)이로다. 인간은.
그 놈의 정신이란 것 때문에 인간은 동물과 다른 우주의 기형아가 되어 버렸다.
애시당초 문 워처(moon watcher)는 달을 물끄러미 올려다 보면서 생각이라는걸 하지 말았어야 옳았다.
달을 향하여 늑대처럼 짖었으면 족하였을텐데, 자각과 이성과 상상력은 실존적 비극의 씨앗이었다.
자연의 한부분이면서 자연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인간.
자연에 내던져진 우연적인 시간과 우연적인 장소를 인식하고 또한 자연으로부터 우연적으로 쫓겨남을 인식하고 있는 인간.
아무리 진화하더라도 육체를 자연으로부터 벗어나게 할수도 없으며 마음을 자신의 육체 밖으로 쫓아낼수도 없는 인간.
인간의 자아(自我)는 영원히 안정에 이르지 못하고 아득한 이원론의 골짜기를 방황한다.
이 존재의 이분법으로부터 인간은 절대로 벗어날수가 없는 것이다.
패거리를 짓고 문명을 만들고 종교를 만들고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보지만 저 이분법에서 벗어난 새로운 자아는 생성될수 없다.
문명을 모독하는(쥐를 잡아먹는) 노파의 목을 조르면서 자연을 멸시하지만. 고향(자연)에 돌아가는 길을 잃을까봐 토끼는 구멍 앞에서 버섯이 된다.
자유(자연)를 꿈꾸는 개별적 자아는 그 자유가 불안하여 자유로부터 도피한다.
집단 속으로, 이데올로기 속으로, 관념 속으로, 정신 속으로.
이른바 군거적 순종의 원리이다.
자연이라는 고향을 잃은 인간은 관념과 도덕과 역사와 관습과 제도와 규범과 이데올로기로부터 결코 자유로울수 없다.
어쩌면 정신계가 만든 현실태(現實態)는 언제나 자연계보다 더욱 야만스러운 가능태(可能態)로서 존재한다.
전쟁은 밀림의 약육강식에 비할바가 아니다.
진리가 어디 있는가,
세계는 바윗돌같지만 달걀처럼 취약하다.
인간은 신이 되지 못하였다.
자유에 자유가 어디 있는가.
인간에게 한번도 순수자유가 허여(許與)된 적은 없다.
새로운 자유인은 또한 새로운 노예일 뿐이다.
"자유 아니면 죽음을!"은 한낱 감상적(感傷的) 포즈의 세리프에 불과하다.
요한은 영원히 독백한다.
"나의 열매는 익었다. 그러나 내가 나의 열매를 감당할 만큼 익지 못했다... 영원히 익지 못할 것이다! 내게는 날개가 없다……"
설익고 정돈되지도 못한, 비좁고 답답한 내 사유의 난삽(難澁)함이여.
아, 그만 쓰련다.
<현대의 野>
-장용학 作-
***동우***
2018.09.30 07:41
장용학의 ‘현대의 野’
관념적이고 철학적이다.
현대의 野라니.
野란 무엇을 말함인가?
집단으로부터 소외된 자아를 말함일까? 자의식인가? 공의인가? 근원적 윤리의식인가?
관념을 통해서 파악되는.
<"잘한다 잘한다 박수치며 춤추던 놈들이오! 폭격소리를 듣지 못하면 잠이 안 온다는 놈들이오!" "……." "그래 남한 동무는 그거 모른단 말이오?" "저들은 아직 진리를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에게 진리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보여 주어야 할 것은 조직이오! 조직이 곧 진리요. 알겠소? 남한 동무, 진리라는 것은 조직 밖에서 하는 잠꼬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단 말이오." "인민을 위한다는 진리두 말이오?" "나는 말이오, 예수쟁이를 잘 아는데 가장 모범적인 예수쟁이란 신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 있다고 믿는 자들이거든요. 이게 알짜 예수쟁이구 무서운 거거든. 왜냐하면 그들은 신이 없다는 것을 깨달을 날은 절대로 없으니까……." "……." "알겠소? 그들은 왼 손이 하는 일을 바른 손에 알리지 말게 되어 있단 말이오. 빤히 쳐다보면서 입으론 거짓말을 주고 받구 해두 좋단 말이오. 이것이 그들의 선민사상이라는 거요." "우리 소비에트도 교회와 같단 말입니까!" "아아니, 남한 동무는 곡해를 잘 하거든. 내가 언제 같다고 했소. 전연 다르다구 했지……." "좀더 말씀해 주십시오." "왜?" "알고 싶습니다.""그럼 교양을 한 가지 더 가르쳐 주겠는데 조직 속에서는 알고 싶은 것은 알려고 하지 말아야 하며 알고 싶지 않는 것은 이것을 알도록 힘써야 하오." "무슨 의밉니까? "조직 속에는 의미는 없고 사실 뿐이오. 무자비한 사실 뿐이오." "……." >
<“더구나 犯人은 그런 꿈조차 꾼 적이 없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당신이 그렇단 말이오?" "난 말입니다. 나는 犯人과 그 三者를 겸하고 있습니다." "……." "경찰이 나를 이렇게 만들어 놨습니다." "……." "이 일은 어디에 가서 재판 받으면 좋을까요?" "……." "나으리……." 주의를 살피면서 속삭이는 소리다. "여기는 두 사람 뿐입니다. 여기서 한 말은 법정에 가서두 절대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징역 같은 것은 지금 문제가 아닙니다. 정말 이 내가 그런 짓을 했을까요? 정말 이 내가 以北에 갔다 온 적이 있습니까? 사실을 말해 주시오. 마음 속에서 생각하고 있는 고대로를 말해 주시오! 이 짓을 한 것은 정말 이 냅니까? 이 짓이 정말 地上에 일어났던 일입니까?" "그러면 당신이 아니했다는 증거를 보이오." "증거?……" "이 조서에 씌어 있는 것을 반박할 만한 증거 말이오." "그건 말입니다. 式은 맞지만 答이 틀립니다." "式에 틀림이 없으면 答도 틀림이 없다는 것이 이 세상의 약속이오." "그 <이퀄>(=)이란 것은 정말 <이퀼>일까요?" "……." "거기에 무슨 중대한 착오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6.25,
이데올로기적 갈등.
개별적 실존을 여지없이 짓밟는.
그리하여 주인공의 관념에 접수되는 당시 한국적 리얼리즘은 카오스, 그것이로구나.
그려.
개나발, 정의가 어디있었는가.
무슨 개뼈다귀가 이데올로기였단 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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