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김정한]] (1,4,3,3,1)

카지모도 2020. 9. 26.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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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김정한]]

<사하촌> <모래톱 이야기>

 

 

<사하촌(寺下村)>

-김정한 作-

 

***동우***

2013.05.25 05:32

 

요산(樂山) 김정한(1908~1996)의 사하촌은 1936년에 발표한 데뷔작.(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김정한 교수님(당시 부산대학교)과는 예전 주탁(酒卓)의 말석에 끼어앉아 말씀 들은 적이 있었는데, 골기(骨氣)가 참 꼿꼿한 분이셨다.

 

가뭄과 착취로 고통받는 일제하(日帝下) 절아래 보광리 성동리 마을.

소작농, 그리고 지배계급에 빌붙어 호의호식하는 地主 보광사 중놈(마누라 거느린 대처승)들과 순사와 주사와 간평인 나부랑이들..

 

그리하여 또쭐이, 들깨, 철한이, 봉구는 일어섰는가.

그 모순을 불태워 버리려고.

 

피폐하고 궁핍한 농민의 삶의 애환과 해학, 또는 절박하고 처절한 저항은 노골적(김유정이나 최서해처럼)으로 드러나지 않고 다분히 은유적이다.

 

++++

 

<"아이고, 어느 도둑놈이 그 벼를 베어 갔을까? 생벼락을 맞아 죽을 놈! 그 벼를 먹고 제가 살 줄 알아… 창자가 터질꺼여 터져!"하며 봉구 어머니가 몽당치마 바람으로 이 골목 저 골목 외고 다니고, 호세 징수를 나온 면서기가 그녀를 찾아다니던 날, 성동리에서는 구장이외 고서방, 들깨, 또쭐이 들 사오 인이 대표가 되어 보광사 농사 조합으로 나갔다. 그들의 하소연은, 자기들이 봄에 빌어 쓴 소위 저리자금(低利資金) 의 -대부분은 비료 대금이지만-지불 기한을 조금 더 연기해 달라는 것이었다.

보광사 소작인들은 해마다 소작료와 또 소작료 매석에 대해서 너 되씩이나 되는 조합비와 비료 대금과 그것에 따른 이자를 바쳐야만 되었다. 그리고 비료 대금은 갚는 기한이 해마다 호세와 같았다.

의젓하게 교의에 기댄 채 인사도 받는 양 마는 양하는 이사(理事)님은 빌 듯이 늘어놓는 구장의 말일랑 귀 밖으로, 한참 '씨끼시마'껍데기에 낙서만 하고 있더니, 문득 정색을 하고는, "그런 귀치 않은 논은 부치지 않는 게 어때요?" 해 던졌다.

"……."

"해마다 이게 무슨 짓들이요? 나두 인젠 그런 우는소리는 듣기만이라도 귀찮소. 호세만 내고 버티겠거든 어디 한 번 버티어들 보시구려!"

"누가 어디 조합 돈은 안 내겠다는 겁니까. 조금만 연기를 해 달라는 거지요." 이번에는 또쭐이가 말을 받았다.

"내든 안 내든 당신들 입맛대로 해 보시오. 난 이 이상 더 당신들과는 이야기 않겠소." 이사님은 살결 좋은 얼굴에 적이 노기를 띄우더니, 그들 틈에 끼여 있는 곰보를 힐끗 보고는, "고서방 당신은 또 뭘 하러 왔소? 작년 것도 못 다 내고서 또 무슨 낯으로 여기 오우?" 매섭게 꼬집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장부를 뒤적거리면서, 하던 일을 계속했다. 일행은 허탕을 치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며칠 뒤, 저수지 밑 고서방의 논을 비롯하여 여기저기에, 그예 '입도차압(立稻差押)'의 팻말이 붙기 시작했다.

농민들은 알아보지도 못하는 그 차압 팻말을 몇 번이나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았다.-피땀을 흘려 가면서 지은 곡식에 손도 못 대다니? 그들은 억울하고 분하기보다, 꼼짝없이 인젠 목숨을 빼앗긴다는 생각이 앞섰다.

고서방은 드디어 야간 도주를 하고 말았다.

"이렇게 비가 오는데, 그 어린것들을 데리고 어디로 갔을까?" 이튿날 아침, 동네 사람들은 애터지는 말로써 그들의 뒤를 염려했다.

무심한 가을비는 진종일 고서방이 지어 두고 간 벼이삭과 차압 팻말을 휘두들겼다.

무슨 불길한 징조인지 새벽마다 당산 등에서 여우가 울어 대고, 외상 술도 먹을 곳이 없어진 농민들은 저녁마다 야학당이 터지게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하루 아침, 깨어진 징소리와 함께 성동리 농민들은 일제히 야학당 뜰로 모였다. 그들의 손에는 열음 못한 빈 짚단이며 콩대, 메밀대가 잡혀 있었다.

이윽고 그들은 긴 줄을 지어 가지고 차압 취소와 소작료 면제를 탄원해 보려고 묵묵히 마을을 떠났다. 아낙네들은 전장에나 보내는 듯이 돌담 너머로 고개를 내가지고 남정들을 보냈다. 만약 보광사에서 들어주지 않는다면… 하고 뒷일을 염려했다.

그러나 또쭐이, 들깨, 철한이, 봉구-이들 장정을 선두로 빈 짚단을 든 무리들은 어느새 벌써 동네 뒤 산길을 더위 잡았다. 철없는 아이들도 행렬의 꽁무니에 붙어서 절 태우러 간다고 부산히 떠들어댔다.>

 

++++

 

 

<모래톱 이야기>

-김정한 作-

 

***동우***

2016.03.23 04:12

 

나 젊었을 적,

요산 김정한 (樂山 金廷漢, 1908~1996)과 향파 이주홍 (向破 李周洪, 1906~1987)은 부산 문화계의 두 어른이었다.

요산은 부산대학교 향파는 수산대학교에서 봉직하였는데, 주석(酒席)에 끼어앉아 몇 번 두 분을 뵌 적이 있다.

 

'모래톱 이야기'는 1966 년(작가 59세 때) 발표되었다.

요산 개인적으로는 일제시기인 1943년 절필후 23년 만에 문단에 복귀하게 되는 첫 작품이었고, 문학사적으로도 기념비적인 소설로 평가되는 모양이다.

 

<"투박한 어투로 민중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증언하는 '모래톱 이야기'는 실존주의니 뭐니 하는 외국 문학의 영향에 사로잡힌 한국문단에 한방 먹이는 작품이었어요. 우리 의식 바깥에 있던 민중의 존재와 민족 현실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한 거죠. 박정희 정권의 압축적 산업화가 본격화되던 시기와 맞물리면서 민중 현실이 본격적인 문학의 주제로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70년대 비평계의 쟁점인 민족문학론 형성 과정에서 작품으로 뒷받침을 한 분이 요산이죠." -염무웅->

 

<"1966년에 '창비'가 창간되면서 문단이 활기를 띠었다고 하지만 민중문학이라 부를만한 작품이 없었던 시대예요. 김지하나 황석영 같은 이도 정식 등단하기 전이고, 이문구 같은 작가도 갓 등단했을 무렵이고. 이런 상황에서 '모래톱 이야기'가 나왔다는 것은 70년대 민족문학운동을 일으키는 문학적 근거를 제시한 매우 중요한 사건이죠." -백낙청->

 

조마이 섬, 대대로 터잡아 살아 온 사람의 것이 아니라 일본인 국회의원 유력자등으로 시대에 따라 땅의 임자가 바뀐다.

선비 가(家)의 면모가 서려있는 건우네... 아버지는 6·25 때 전사했고 삼촌은 삼치잡이를 나가 사모아에서 죽었고 어부인 할아버지 갈밭새 영감의 벌이로 생계를 유지한다.

어느 여름 낙동강에 홍수가 저서 물이 범람하여 어떤 유력자가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만든 둑을 허물지 않으면 섬 전체가 위험하다.

갈밭새 영감의 지휘로 둑을 허물려하자 유력자의 하수인들이 방해한다.

화가 치민 갈밭새 영감은 하수인 한명을 탁류에 집어던지고 살인죄로 투옥된다.

 

<"정말 우리 조마이섬을 지키다시피 해 온 영감인데…, 살인죄라니 우짜문 좋겠능기요?" 게까지 말하고 나를 쳐다보는 윤춘삼 씨의 벌건 눈에서는 어느덧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법과 유력자의 배짱과 선량한 다수의 목숨… 나는 이방인(異邦人)처럼 윤춘삼 씨의 컁컁한 얼굴을 건너다보았다.>

 

그 후 세대, 산업화와 도시화와 전태일과 유신과 광주와 5공 등을 겪으면서 엄청 걍퍅해진 민중의식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이 소설이 좀 유순하게 느껴질런지 모르겠다.

그러나 1960년대의 이 소설, 민초를 대하는 요산의 애정과 꼿꼿한 의심(義心)을 보라.

붉은 구호 마구 내지르지 않더라도 민중 속에 연연하게 흐르는, 저런 온온한 골기(骨氣)가 세상을 바꾸어나가는 것이다.

 

소설 속 조마이 섬은 바로 '을숙도'.

대티고개를 넘어 괴정지나 하단 이르러 갈대 숲 우거진 낙동강변의 에덴공원과 나룻배 타고 건너 갔던 을숙도.

물소리와 새소리와 음악과 막걸리... 데이트하러 술마시러 음악들으러 수박먹으러 나도 자주 들렀던 곳이다.

그런데 지금의 을숙도. 가보라 상전벽해일지니.

 

얼마나 바뀌었나, 세상은.

'모래톱 이야기'는 그러니까 고대소설(?)로 읽힐런지.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