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백석 (1,4,3,3,1)

카지모도 2020. 9. 28.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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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백석]]

<편지> <그 母와 아들>

 

 

<편지>

-백석 作-

 

++++

이 밤 이제 조금만 있으면 닭이 울어서 귀신이 제 집으로 가고 육보름날이 오겠습니다. 이 좋은 밤에 시꺼먼 잠을 자면 하이얗게 눈썹이 센다는 말은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육보름이면 옛사람의 인정 같은 고사리의 반가운 맛이 나를 울려도 좋듯이, 허연 영감 귀신의 호통 같은 이 무서운 말이 이 밤에 내 잠을 쫓아버려도 나는 좋습니다.

고요하니 즐거운 이 밤 초롱초롱 맑게 괸 수선화 한 폭을 들여다봅니다. 들여다보노라니 그윽한 향기와 새파란 꿈이 안개 같이 오르고 또 노란 슬픔이 냇내 같이 오릅니다. 나는 이제 이 긴긴 밤을 당신께 이 노란 슬픔의 이야기나 해서 보내도 좋겠습니까.

남쪽 바닷가 어떤 낡은 항구의 처녀 하나를 나는 좋아하였습니다. 머리가 까맣고 눈이 크고 코가 높고 목이 패고 키가 호리낭창하였습니다. 그가 열 살이 못되어 젊디젊은 그 아버지는 가슴을 앓아 죽고, 그는 아름다운 젊은 홀어머니와 둘이 동지섣달에도 눈이 오지 않는 따뜻한 이 낡은 항구의 크나큰 기와집에서 그늘진 풀같이 살아왔습니다. 

어느 해 유월이 저물게 실비 오는 무더운 밤에 처음으로 그를 안 나는 여러 아름다운 것에 그를 견주어 보았습니다. 당신께서 좋아하시는 산새에도 해오라비에도 또 진달래에도 그리고 산호에도.... 그러나 나는 어리석어서 아름다움이 닮은 것을 골라낼 수 없었습니다.

총명한 내 친구 하나가 그를 비겨서 수선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제는 나도 기뻐서 그를 비겨 수선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나의 수선이 시들어갑니다. 그는 스물을 넘지 못하고 또 가슴의 병을 얻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만하고, 나의 노란 슬픔이 더 떠오르지 않게 나는 당신의 보내주신 맑고 고운 수선화의 폭을 치워놓아야 하겠습니다. 

밤이 아직 샐 때가 멀고 또 복밥을 먹을 때도 아직 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나는 어머니의 바느질그릇이 있는 데로 가서 무새헝겊이나 얻어다가 알록달록한 각시나 만들면서 이 남은 밤을 당신께서 좋아하실 내 시골 육보름밤의 이야기나 해서 보내도 좋겠습니까.

육보름으로 넘어서는 밤은 집집이 안간으로 사랑으로 웃간에도 맏웃간에도 누방에도 허청에도 고방(註:광)에도 부엌에도 대문간에도 외양간에도 모두 째긋하니(註:남에게 눈치를 채게 하려고 조금 찌그리다) 불을 켜놓고 복을 맞이하는 밤입니다. 달 밝은 마을의 행길 어디로는 복덩이가 돌아다닐 것도 같은 밤입니다. 닭이 수잠을 자고 개가 밥물을 먹고 도야지 깃을 들썩이는 밤입니다.

새악시 처녀들은 새옷을 입고 복물을 긷는다고 벌을 건너기도 하고 고개를 넘기도 하여 부잣집 우물로 가서 반동이에 옹패기에 찰락찰락 물을 길어오며 별 같은 이야기를 재깔재깔하는 밤입니다.

새악시 처녀들은 또 복을 가져오느라고 달을 보고 웃어가며 살기같이 여우같이 부자집으로 가서는 날쌔기도 하게 기왓골의 기왓장을 벗겨오고 부엌의 솥뚜껑을 들어오고 곱새담의 짚날을 뽑아오고.... 이렇게 허물없는 즐거움 속에 끼득깨득 (註:키득키득,웃음을 참다못하여 입속에서 실없이 자꾸 새어 나오는 소리를 나타내는 말)하는 그들은 산에서 내린 무슨 암짐승들이 되어버리는 밤입니다.

그러다는 집으로 들어가서 마음 고요히 세 마디 달린 수숫대에 마디마다 콩 한 알씩을 박아 물독 안에 넣는 밤인데, 밝은 날 산끝이라는 웃마디, 중산이라는 가운데 마디, 해변이라는 밑마디의 그 어느 마디의 콩이 붇는가를 보고 그 어느 고장에 풍년이 들 것을 점칠 것입니다.  

그러다는 닭이 울어서 새날이 되면 아홉 가지 나물에 아홉 그릇 밥을 먹으며, 먹으면 몸 쏠쐐기가 쏜다는 김치와, 먹으면 김 맬 때 비가 온다는 물을 자꾸 먹고 싶어하는 밤입니다.

이렇게 해서 육보름의 아침이 됩니다. 새악시 처녀들은 해뜨기 전에 동리 국수당의 스무 나무가지를 쪄오래서 가시가시에 하이얀 솜을 피우고, 그 솜밭 속에 며칠 앞서부터 스물이고 서른이고 만들어놓은 울긋불긋한 각시와 새하얀 할미를 세워서는 굴통담에 곱새담에 장독담에 꽂아놓는데, 이렇게 하면 이 해에는 하루같이 목화밭에서 천근 목화가 난다고 믿는 그들의 새옷 스척이는 소리도 좋게 의좋은 짝패들끼리 끼리끼리 밀려다니며 담장마다 머물러서는 목화 따는 할미며 각시와 무슨 이야기나 하는 듯이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닭이 우나?) 아 닭이 웁니다. 나는 이만 이야기를 그치고 복밥을 기다리는 얼마 아닌 동안 신선과 고사리와 수선화와 병든 내 사람이나 생각하겠습니다.  

<朝鮮日報>1936. 2. 22

++++

 

***동우***

2016.09.13 00:46

 

엊저녁 땅이 흔들렸습니다.

진도 5.8, 내 겪은바 가장 큰 흔들림이었습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까 전전긍긍하던 중국 기나라 사람의 걱정(杞憂)이 현실이 되는 공포.

교통사고와 같은 개별적 사고(事故)야, 나는 괜찮겠지 하는 운명적 특혜의식이거나 팔자소관이거니 하는 심리적 방어기제로 불안감을 도피시킬수 있겠으나, 우리의 물리적 존재가 딛고 있는 기반 전체가 요동치는데야 나남없이 가공할 공포가 아닐수 없습니다.

내 아들놈, 일본에 있을적 도호쿠 대지진때 겪었던 수년전의 그 트라우마를 아직도 가지고 있습니다.

방송으로 들으니 할머니 두분이 다쳤다던가.. 현재까지 보고된바 인적물적 피해는 그다지 큰 것 같지 않아 다행입니다.

가장 걱정스러웠던 원전도 무사하고.

전문가의 말을 들으니 여진의 가능성은 있으나 큰 진동은 없을거라 하여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그렇지만 연연하게 이어오는 한반도 고유의 카니발이야 변함 있으리까.

모레가 추석.

시인 '백석' (1912~1996)의 짤막한 수필 한편 올립니다.

 

'육보름'은 매달 음력으로 열엿새날을 이르는 말이랍니다.

기망(旣望)이라고도 한다지요.

휘영청 둥근달.

달밝은 어디로든 복덩이가 돌아다닙니다.

그날 밤은 누구나 복을 맞이하는 밤입니다.

아홉가지 나물에 아홉그릇 밥을 차려놓고 달님에게 소원을 빌기도 한다는군요.

그러다 닭이 울어서 새날이 되면 모두들 둘러앉아 그 음식을 먹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밥'인가 봅니다.

멀리 있는 이들, 떠난 이들을 생각하는 노란 슬픔도 있을테지요.

 

한가위

모쪼록 넉넉하고 복된 명절 쇠십시오.

오늘 집 떠나, 며칠 리딩북은 쉬겠습니다.

 

***eunbee***

2016.09.13 07:58

 

백석의 편지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초롱초롱 맑게 괸 수선화 한 폭

냇내 같이 피어오르는 노오란 슬픔

사랑하게 된 여인에 대한 묘사가 참으로 마음에 와닿습니다.

백석의 시는 늘 그렇게 구체적이고, 서늘하게 아름답고, 절절하게 슬프지요.

어느해 보았던, 길상사 담장의 붉은 능소화가 떠오르네요.

백석을 사랑했던 여인의 넋처럼 붉디붉게 너울대던 꽃 그림자...

 

오늘 집떠나 며칠의 리딩북이 비어있게 되는군요.

또...허전하네요.

안녕히 다녀오세욤~^^

 

아참,

블로그에 올려주신 비니미니의 사진과 동영상이 고마웠다는 말씀 드린다는 것이 딴소리만(ㅋㅋㅋ) 하였네요.

어느 사진에서의 비니양은 이제 여자스러운 어떤 분위기도 번져옵니다.ㅎ

사랑스럽게 자라고 있는 모습, 반가웠습니다.

 

***┗동우***

2016.09.18 04:23

 

인적 드문 한적한 시골.

아기들 데리고 가족들, 소백산 골짜기에서 한 나흘 도 닦다 내려왔습니다.ㅎ

명절 즈음인데 어디에도 길 막히지 않아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아드님 며느님 함께 하신 은비님의 한가위도 생각하였지요.

 

붉은 능소화... 지금은 다 졌겠지요.

어제 몹시 비도 내렸으니.

 

늘 사랑스럽게 보아주시는 비니미니.

늘 정겹고 늘 고맙습니다, 은비님.

 

***momo***

2016.09.13 18:30

 

백석 시집을 두 권이나 갖고 있는데, 수필은 처음입니다.

통영의 그 처자를 말하는 것 같네요? (백석의 친구와 결혼한...)

귀한 글을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동우님.

추석 잘 쇠세요!^^

 

***┗동우***

2016.09.18 04:27

 

추석 명절 잘 쇠셨어요?

모모님께서도.

 

통영의 그 처자가 바로 '자야'일테지요.

자야와 나타샤..

오버랩되어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 ㅎ

 

***┗momo***

2016.09.18 10:31

 

통영의 처자는 이름에 '난'이 들어갔던 것 같은데

백석의 슬픈 첫사랑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야는 김영한 여사의 애칭이니, 두 여인은 다른 인물!^^;

 

제 방에 '백석과 형도'라는 카테고리가 있는데

백석과 기형도 시인에 대해 모은 자료방이랍니다.

동우님 읽어주시면... 영광이지요. ^^;

 

이 게시글... 스크랩 가능한지 모르겠어요?

다음에 컴퓨터로 들어올 때 확인해 보겠습니다.

 

지진 때문에 명절이 사뭇 다르게 느껴졌을 것 같아요.

 

***┗동우***

2016.09.19 04:31

 

자야....

그렇군요, 난 몰랐습니다.

그럼, 나타샤는 누구였을까요?

 

백석과 기형도..

문향님 댁 들여다보겠습니다.

 

***┗momo***

2016.09.20 19:38

 

동우 님, 나타샤는 김영한 여사(자야)를 가리키는 것 같아요. (길상사를 법정스님에게 기증한 김영한 여사)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서 여주인공 나타샤를 상징한다고 하더군요.

백석이 러시아어에 능통했으니까요...

(백석은 또 최정희에게도 연서를 썼다고 합니다...)

 

이 게시글 제가 복사해 가서 새로 올려도 괜찮을까요?

스크랩하면 출처가 남아서 좋은데

제 블로그 글씨체가 한양수호체라 긴 글이 올라오면 가독성이 뚝 떨어져서요ㅠㅠ

스크랩 글은 글씨체를 수정할 수 없더라고요.

동우 님 블로그 출처는 기록하겠습니다!^^

 

***┗동우***

2016.09.21 04:35

 

문향님

아하, 나타샤가 바로 자야였군요.

탱큐.

 

리딩북, 복사를 하시던지 스크랩을 하시던지.

얼마든지 뜻대로.. ㅎ

 

***송현***

2016.09.14 17:48

 

동우님

백석 시인의 그리움이네요

송편에 전부치고 ... 잠시허리펴는 동안 귀한글을 봅니다 ~^^

지진으로 놀란 가슴 가라앉히시며

온가족 즐거운 한가위 빌어봅니다

아무일 없는 듯이 .....

 

***┗동우***

2016.09.18 04:29

 

송현님꼐서도 한가위 명절 즐겁게 보내셨겠지요.

천재지변이나 전쟁의 회색빛 일지라도 우리의 명절은 알록달록할겁니다. ㅎ

 

 

<그 母와 아들>

-백석 作-

 

***동우***

2016.10.12 04:29

 

'그 母와 아들'

백석이 18살 때(1930년) 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소설로, 백석의 문단 데뷔작입니다.

 

시어머니와 열여덟된 큰아들을 비롯한 사남매를 슬하에 둔 설흔 다섯의 늙은(당시의 기준으로) 과부.

쌀장사와 바람이 나서 놀아나다가 (딸까지 낳고서) 후회하여 다시 시모와 자식들 곁으로 돌아와 자족하는 삶을 누린다는 이야기입니다.

 

백석은 십대 적에 벌써 인간의 오욕칠정에 대하여 생각이 깊었나 봅니다만 (나도향의 뽕도 떠올려 집니다) 그 배후에는 뿌리깊은 윤리관이 만져집니다.

천륜에 대한, 또는 공동체의 삶에 대한.

샛서방 양고새 까지도 욕정이거나 아들얻기에 혈안이 된, 그리 철면피한 간부(奸夫)의 모습은 아닌듯 합니다.

박경리가 말했지요. 

한살이를 의지(意志)로 사는 생명은 아름답습니다. 욕망(慾望)으로만 산다면 그 생명은 추합니다.

 

생각건대, 난만(爛漫)한 욕망의 시대이지만 퇴영(退嬰)된 것이 아닙니다.

의지(意志)는.

 

***┗momo***

2016.10.12 20:01

 

여기에서는 댓글을 읽을 때도 진지하게 됩니다.

소설로 등단한지는 알았는데 이런 내용인지 몰랐어요.

백석의 나이를 생각하면 정말 놀랍습니다......

 

***┗동우***

2016.10.13 04:22

 

하하, 문향님.

얼마든지 가볍게 읽으셔도...

어쩌면 백석의 고향에 저와 같은 실제 에피소드가 있었는지도.

그렇다해도 노숙한 십대였던건 분명할테지요만.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