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김동민]] (1,4,3,3,1)

카지모도 2020. 10. 2. 0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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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민]]

 

 

<<<비익조와 대숲>>>

-김동민-

 

***동우***

2014.01.12 05:21

김동민(1955~ )의 ‘비익조와 대숲’

제목에 끌려서 읽었는데 주제는 다소 오리무중입니다.

짝재기, 우애, 결혼, 짝짓기....

하나의 존재가 가진 불완전함에 대한 이야기인지.

 

좌절된 (날개가 꺾인) 어느 형제의 얘기인데, 비익조는 그렇다치고 대숲은 또 무엇을 은유하는걸까요.

이야기의 얼개도 서사의 당위도 난삽합니다만 무언가 절절한 느낌 하나 있습니다.

근원적 사랑의 모습.

어느 형제의 우애(友愛)에 관한.

 

<짝짓기를 하던 그 날의 비익조 두 쌍은 지금쯤 어디를 날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다 올라간 생활관은, 바람에 고통스러운 소리를 질러대던 샤시 문짝마저도 달아나고 없다. 지난 날의 기억 가닥을 잡아가며 길고도 긴 여행에서 막 고향으로 돌아온 순례자의 안식을. 아버지, 어머니의 체취가 묻어나는 곳. 무엇보다 옛날의 형이 거기 숨쉬고 있다. 나는 지금 갈망하는 것이다. 형이 찢겨진 날개 같은 저 목발을 버리고, 그 날의 아이들처럼 아름답고 힘차게 비상하기를.

봄이면 대숲에서 죽순을 빼어주곤 했는데, 살짝 데쳐 먹는 죽순은 향긋하니 참 맛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내가 저 대숲을 남달리 많이 찾았던 건 그 죽순 때문은 아니었다. 든든한 배경 때문에 비록 친구들의 그럴 때 내가 가는 곳이 저 대숲이었다

그리하여 부드러움을 거부하고 단단해지기만을 고집하는 대나무처럼, 마음속에서 온유함은 사라지고 오직 세상을 향한 저주와 분노만이 꽁꽁 언 겨울 돌멩이처럼 굳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흘러갈 강 또한, 그 성장을 멎어버린 대나무나 나처럼, 키 자라기를 포기해 버렸을 줄이야.

우리 형제가 같이 도망칠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가지뿐. 비익조가 되는 것.

형을 두고 혼자만 살겠다고 달아날 순 없어. 형도 함께 데리고 가야 해. 저 자유로운 허공 위로 훨훠얼.

그러자 지난 날 저 대숲 속에서 느끼던 불목의 뜨뜻한 기운이 우리 형제를 포옥 싸안는 듯했다. 그들을 모두 보게 되리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태로, 그러나 처절하게 비상하고 있는 비익조들을.>

 

비익연리(比翼連理)라는 말이 있다더군요.

비익조(比翼鳥)와 연리지(連理枝)를 합쳐서 만든 어휘라는데, 비익조는 눈과 날개가 하나뿐이어서 한 쌍이 합쳐저야만 제대로 볼수도 날수도 있는 새이고, 연리지는 뿌리는 다르지만 가지가 서로 엉켜 분리할수 없는 나무를 말한답니다.

주로, 서로 지극히 사랑하는 남녀사이를 비유해서 쓰는 말이라지요.

 

부모형제.

관계의 끈.

남녀의 관계도 그러할진데 하늘의 뜻 천륜의 관계야 더 말해 무엇하리오.

관계의 합일로 이루는 善 (사랑,행복...)

 

관계의 끈.

어제 모처럼 척박한 우애의 두 늙은 형제 마주 앉아 술 한잔 하였지요.ㅎ

 

아, 늙을수록 '제망매가(祭亡妹歌)’는 더 서럽게 가슴을 적십니다.

 

생사의 길은

여기 있으매 두려워지고,

너는 간다는 말도

못다 이르고 갔느냐.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한 가지에 나고서도

가는 곳을 모르는구나

 

***eunbee***

2014.01.12 22:16

동우님은 형제에 대해서도 매우 애틋하신가 봐요.

 

자식도 크면 타인인 것을, 형제란 한 가지에 나고서도 가는 곳을 모르는 건 당연지사.ㅎㅎ

형제, 부모슬하 벗어나 각자의 식솔 거느리고, 각자의 가정이라는 울타리 있으면

남과 별반 다를바 없는 것이 당연한 것 같아요.

우애 좋다는 우리집도 남의 식구 들이고 하니, 다른집과 다르지 않더라구요.ㅠ

 

나는 고향 내 오두막에서 일년쯤 적을 두고 살던 때, 서럽도록 느꼈답니다.

비워두고 다니니 더욱 나쁜 상황으로 발전되어 가고 있었고요.

그래서 삐쳐서 고향에 가지도 않아요.ㅎㅎㅎ

 

동우님,

자식도 형제도, 그러려니.....하고 살아야 해요.

이런저런... 정 많은 사람들은 신세 고달프다우.

 

곁에 있어주는 영감, 마눌님이 그래서 최고라고 하는 거래요.ㅋ

 

동우님의 제망매가가 괜시리 아련케 서러워, 그냥 '알지도 못하면서'(유행어라지요?ㅋ)

내 설움에 겨워 넉두리 부려놨어욤~ 살펴 읽으소서.

 

***동우***

2014.01.13 05:01

흐음, 형제에 대한 애틋함..

 

나도 은비님께 넋두리.

실직과 실패, 그 와중 어머니 돌아가시고.

慾과 冷과...

궁핍한 곤경의 나날... 형제들... 많이 아프고 쓰라렸다오. ㅎㅎ

 

이제 나이들어..

애틋함이란 원망이 복합된 연민,

핫핫, 은비님께 이렇게 함축하여 말해버릴렵니다.

 

참, 은비님.

영화 '그녀에게' 보았어요. (은비님 좋게 본 영화는 어떻거든 구해 본다고 했지요..ㅎㅎ)

음악과 무용. (은비님 여러 말씀으로 무용이라는 장르에 대하여 까막눈이 좀 떠지는 느낌)

참으로 슬프게 아름다운 영화였습니다.

착함의 덩어리 베니노,

코마의 알리샤를 보살피는 그 손길은 그대로 예술이었어요.

 

의문 하나.

알리샤가 사산한 아기의 아버지는 베니뇨가 맞겠지요?

여자의 자궁 속으로 들어가는 무성영화의 은유가 그러한듯 하였는데...

무슨 강간이니 어쩌니하여 좀 찜찜한바 없지 않지만.

 

영화얘기는 차츰...

은비님의 한주일, 여전히 반짝이시기를.

 

***eunbee***

2014.01.13 22:41

<그녀에게>

나는 베니노가 임신시켰다고 단정짓는 것이, 무성영화의 은유도 그렇고, 그바로 뒷 장면이 노란바탕에 붉은 액체가 흐르다가 둘로 갈라지잖아요. 처음엔 그 붉은 것이 "맛있는 장어닮은 페니스"(동우님 포스팅 댓글에서 인용 ㅎㅎㅎ)를 연상했더랬는데, 잠시 후엔 그 액체가 갈라져요. 그걸 보며 베니노가 임신시킨 것이구나 했어요.

틀려도 할 수 없지요. 뭐~ 감상은 내맘이니깐.ㅋ

 

베니노. 나는 그 영화를 볼적마다 울어요. 베니노의 슬픈 사랑을.

베니노는 사랑하는 여인만을 그토록 사랑한 것뿐만아니라, 사람 모두를 진실로 사랑하잖아요.

 

머리핀, 이불깃의 이니셜 A y B(베니노가 직접 수놓은 알리샤와 베니노의 이니셜)

그리고 알리샤의 사진. 베니노의 외로운 짝사랑이 너무 슬퍼요.ㅠㅠㅠㅠㅠㅠㅠ

 

마르코는 나중에 마주르카 포고(극장에서 무용관람 하는 장면)를 보며, 처음 장면 카페뮐러에서처럼 또 눈물을 훔치고, 그걸 알리샤가 보게 되지요?

베니노와 그랬던 것처럼. 감독의 그런 섬세한 설정이 좋아요.ㅋ

 

수다 또....ㅎㅎㅎ

 

동우님, 따스한 밤 되세요. 밖은 춥습니다.

 

***동우***

2014.01.14 05:51

<그녀에게>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대단한 영화작가.

미장센도, 화면에 흐르는 그 분위기도 참 인상적이었어요.

 

투우의 형식미와 비장미.

리디아에게 투우사의 아름다운 의상입히는 그 쇼트도 썩 좋았잖아요?

그리고 우리에 갇힌 소가 튀어나오기를 기다리는 리디아.

양 무릎을 벌리고 꿇어앉은 리디아의 유난히 우뚝한 코와 굳게 다문 입술.

그 긴장감에서는 어떤 승화된 비장미가 느껴지더군요.

투우라는 잔인한 경기가 예술적 아름다음으로 느껴지는 장면이었어요.

 

잘생기지도 이쁘지도 않은 배우들, 그래서 오히려 가슴에 젖어드는 연기....

정말 좋은 영화였습니다.

아, 그리고 영화속 나오는 휴대전화는 LG제품이더군요.

씨잘데없는데 눈길이 가는 속물...ㅎ

미술관 옆 동물원, 나는 은비님처럼의 감성적 기억이 없는 점도...

다시 보아야겠어요, 그 영화도.

 

 

 

<<<양 강둑에 서다>>>

-김동민-

 

***동우***

2017.08.03 04:15

신분제를 해방한 갑오개혁으로도 씻어지지 않은 인습, 백정신분에 대한 차별.

그래서 결사된(結社)된 형평사(衡平社)의 본원지가 진주였지요.

인간 평등을 주창하고 계급 타파를 부르짖는 그 운동에 저항하다 몰락한 어떤 가문.

작가는 아마 진주 사람일 것이고 어쩌면 자기 先代의 이야기가 녹아 있을듯도 싶습니다.

느끼건대, 소설적으로 빼어나다고는 할수 없지만 작가의 시각(視角)이 독특합니다.

 

김동민 (1955~ )의 '양 강둑에 서다'

두번으로 나누어 올립니다.

 

객설은 내일.

 

***동우***

2017.08.04 04:47

극렬하게 백정과의 교회동석을 거부하다가 결국 백정에게 죽임을 당한 증조부, 횡사하고 객사한 증조모와 조부, 그 恨으로 고통받다 죽는 아버지.

 

이 소설의 모티프는 지난 시대 형평사(衡平社) 운동일 것입니다.

백정의 사위 송관수가 떠오릅니다. (박경리의 토지)

 

인간평등이라는 역사의 도도한 흐름에 저항하다 몰락하는, 反動 집안의 비극. (구시대의 인습에 젖어 역사적 거센 물줄기를 거스르는 것이 바로 反動일 테지요.)

 

인간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짓.

시간을 관통하여 유효한 가치관이라는게 있을겁니다.

사람의 목숨에 관한 것이 필경 그러할듯 싶습니다.

그러나 한 시대를 휩쓴 사회적 명제에 대하여 일도양단으로 가치를 재단(裁斷)한다는 것은 위험한 독선입니다.

 

<이리 몹쓸 죄를 짓고도 살아야 하는기 인간이라니…>

 

생각건대, 혹여 당대의 사람으로서는 이런 말을 할수 있을런지 모르겠지만, 당시의 삶의 자리를 아지 못하는 후대의 사람들은 쉽사리 그런 말을 하여서는 아니됩니다.

승자의 시각, 주류의 시각으로 형성된 가치관에 입각하여서는 말입니다.

시대에 따라, 집단에 따라 그 생각과 삶의 자리는 다른 것입니다.

 

망딸리떼.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의 행동과 원인을 꿰뚫어 볼수있는.

 

당자의 선대를 향한 다른 이들의 힐난(詰難)도, 당자의 저 죄의식도 지나칩니다.

나는, 내 조부의 창씨개명이 마냥 부끄럽지만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