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보바리 부인>>> (1,4,3,3,1)

카지모도 2020. 10. 2.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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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보바리 부인>

-플로베르 作-

 

***동우***

2017.07.13 04:25

 

사실주의 (realism)는 고전주의나 낭만주의적인, 이를테면 이상적 인위적 상상적인 것을 거부하고 밖으로 드러난 겉모습을 자세히 관찰하고 묘사하려는 문예사조라고 하지요.

사실주의 소설의 걸작이라는 '귀스타브 플로베르 (Gustave Flaubert, 1821~1880)'의 '보바리 부인'

문예사조 따위 차치(且置)하고라도. 우리나라 TV 아침 드라마처럼 매우 재미있습니다.

물론 막장 드라마와는 다른 고전적 품격으로.

 

그리고 생각하게 합니다.

범상함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것에 관하여.

무모(無謀)함에 대하여

파멸에 대하여.

 

年前 은비님과 모파상(플로베르의 제자)의 '여자의 일생'을 포스팅하여 재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만, 이 소설의 배경 역시 노르망디입니다.

더불어 플로베르가 보여주는 소설의 미장센(? ㅎㅎ)도 빼어납니다.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대략 10회 남짓 나누게 될듯 합니다.

함께 읽어요.

 

***동우***

2017.07.25 04:08

 

아래는 인터넷에서 주어 온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 연보(年譜)입니다.

 

++++

1821년 12월12일 프랑스의 서북부 루앙의 시립 병원에서 태어남. 아버지 아시르 크레오파스 플로베르 박사는 샹파뉴 태생으로 이 병원의 외과 부장이었으며, 고결하고 근엄한 인격의 소유자였다. 어머니 카롤린느 플로베르는 노르망디의 오랜 부르주아 집안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 역시 의사였다.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병원의 실험실이 놀이터였던 플로베르에게는 부모를 통해 받은 당시의 영향은 매우 컸다고 할 수 있다. 부모의 무신론에 영향을 받아 평생 종교와는 무관했고, 병원에 오는 불우한 환자들을 통해 항상 느낀 연민의 정은 그의 감수성과 호기심을 키웠다.

1830년(9세) 네르발 번역의 파우스트를 읽고 크게 감명받음. 후에 제일 친한 친구가 된 어네스트 슈발리에에게 편지를 씀.

1832년(11세) 루앙 시의 중학교에 입학.

1834년(13세) 훗날 문학 동지로 맺어진 루이 부이예가 10월에 전학해 옴. 이때부터 문학에 열을 올려, 몇년동안 30여편의 습작을 시도함. 이 시기의 습작들은 사후에 출판된 전집에 초기작품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됨.

1837년(16세) 8월, 투르빌르 해수욕장에서 악보 출판인 사업가 슈레셍제와 서로 알게 되고 그 부인인 에리자에게 격렬한 연모의 정을 품음. 그 부인은 훗날 감정교육의 아르누 부인의 모델로 등장함.

1838년(17세) 라블레, 몽테뉴, 위고, 바이런, 루소 드의 문학작품을 애독. 이 시기에 광인일기 등의 습작들이 많음.

1840년(19세) 중학을 퇴학하고 그해 8월 '대학입학자격시험'에 합격. 그 상 으로 피레네 코르시카로 여행함.

8141년(20세) 11월에 파리 대학 법학부에 입학했으나 학과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함. 대학에는 학적만 두고 루앙에서 삶.

1842년(21세) 2월, 병역에서 면제됨. 대학의 학년 시험을 내버려둔채 초기 작품 중 걸작이라는 평을 듣는 11월을 씀. 11월 파리고 나와 막심 뒤 캉 등의 문학 그룹에 접근함. 고티에와 교제.

1843년(22세) 1월, 조각가 프라제의 공방에 출입하다가 이곳에서 위고를 만남. 제1원고인 같은 해 3월, 슈레셍제의 야회에 초대받음.

1844년(23세) 1월, 최초의 신경증 박작을 일으킴. 이때부터 정상인의 생활을 일체 단념하고생애를 크루아세에서 보냄.

1946년(25세) 1월, 아버지 플로베르 박사가 병으로 죽음. 카롤린느와 함께 아버지가 남긴 루앙 근교의 크루아세 별장으로 옮겨지냄. 7월, 파리에서 열살 연상의 여류 작가 루이즈 콜레와 깊은 관계를 맺음.

1847년(26세) 5월부터 8월까지 친구인 막심 뒤 캉과 브루타뉴로 여행함.

1848년(27세) 파리에서 2월혁명이 일어나서 국민군으로 복무함. 8월에는 루이즈 콜레와 잠시 불편한 관계가 됨.

1849년(28세) 성 앙투안의 유혹의 초고를 완성, 크루아세에서 친구 루이 부이예와 막심 뒤 캉에게 낭독해 주었으나 형편없다는 평을 들음. 그 두 친구는 플로베르에게 그 원고를 태워 버리라고 하면서 '리'거리의 개업의인 드라마르 사건을 소재로 글을 써 볼것을 권고함. 11월에는 뒤 캉과 함께 마르세유를 출발해서 동양으로 여행을 떠남.

1850년(29세) 이집트, 시리아, 팔에스타인, 그리스, 터키 등지를 1년반 정도에 걸쳐 여행함.

1851년(30세) 4월에 루앙으로 돌아오고, 6월에는 콜레와 다시 우정을 되찾음. 그즈음 크루아세에서 보바리부인을 쓰기 시작함.

1852년(31세) 6월, 친구였던 막심 뒤 캉과 절교함.

1854년(33세) 여배우인 베아트릭스 페르송, 줄리에트 에르베르와 친분을 갖음. 10월 루이스 콜레와도 결별. 남편과 사별한 콜레는 플로베르의 부인이 되려고 하나 불화 끝에 이별함.

1856년(35세) 다시 막심 뒤 캉에게 접근함. 이 해 4월에 5년 여에 걸친 대작 보바리부인을 완성 7월에는 다시 성 앙투안의 유혹에 착수. 파리평론지 10월호에 보바리부인이 실림. 12월까지 두 달간 6회에 걸쳐 일부분이 연재됨.

1857년(36세) 부도덕하고 반종교적이라는 이유로 보바리부인의 작자, 잡지 주필, 인쇄자 세 사람이 기소됨. 이에 플로베르의 형과 루앙의 정치인들까지 동원하여 수십차례 동분서주했으나 1월30일 재판이 열려, 변호인 덕분으로 2월에 무죄판결을 받음. 소송사건이 저마다의 호기심을 자극했기 때문에 4월에 간행된 보바리부인의 단행본을 날개돋힌 듯 팔림. 플로베르는 위고, 생트뵈르, 보들레르 등으로부터 찬사를 받고 '다른 사람들이 전 생애를 걸고 구한 것을 단번에 획득했다'고 보들레르가 평할 만큼 성공을 함.

1958년(37세) 지난 해 말부터 파리에서 문단의 주류들과 깊이 사귀고 살랑보의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4월부터 2개월동안 북아프리카으 튀니지로 여행함. 이때부터 3년동안 이 작품에 몰두함.

1861년(40세) 역사가 미슐레가 바다를 보냈는데 그것을 읽고 크게 감동함.

1862년(41세) 4월, 3년에 걸친 살랑보를 탈고하고, 그 해 11월에 출판함.

1863년(42세) 조르주 상드와의 편지 왕래가 시작됨. 투르게네프와 알게됨.

1864년(43세) 제2고 감정교육에 착수함. 이후 몇년 동안 이 작품에 몰두함.

1868년(47세) 조르주 상드가 크루아세를 찾아옴.

1869년(48세) 5월, 두번째 쓴 감정교육을 탈고하고 11월에 출판함 친구인 루이 부이예가 이 해에 죽음. 노앙으로 상드를 찾아감.

1870년(49세) 7월, 세번째로 성 앙투안의 유혹을 시작함. 보블전쟁이 일어나고 크루아세의 서재는 프로시아 군에게 점령됨. 어머니와 함께 루앙시의 임시 숙소로 피난함.

1871년(50세) 3월, 프랑스의 패배로 전쟁이 끝나자 4월에 쿠루아세로 돌아옴.

1972년(51세) 어머니가 병으로 4월에 세상을 떠남. 6월에 제3고인 성 앙투안의 유혹을 완성함.

1873년(52세) 부바르와 페퀴셰를 쓰기 시작함.

1874년(53세) 4월, 오랜 숙원이던 성 앙투안의 유혹을 출판함.

1875년(54세) 사랑하는 조카 카롤린느의 남편 코망빌르의 파산을 구하기 위해 전 재산을 내던짐. 10월, 성 줄리앙전을 쓰기 시작함. 이때부터 건강이 좋지 않음.

1876년(55세) 2월 성 줄리앙전을 완성하고 이어서 소박한 마음에 착수하여 8월에 탈고 11월 헤로데아스를 시작함.

1877년(56세) 2월, 헤로데아스를 완성함. 성 줄리앙전, 소박한 마음과 헤로데아스의 세편을 신문에 게재한 뒤 4월 세가지 이야기로 제목을 붙여 출판함. 11월, 모파상에게 명해서 부바르와 페퀴셰를 위해 에트르타 해안의 실지 경치를 조사케 함.

1879년(58세) 1월, 빙판길에서 넘어져 다리가 골절됨.

1880년(59세) 부바르와 페귀셰 제10장을 착수함. 마음의 성을 근대생활지에 부분적으로 발표함. 4월, 메당의 저녁이 샤르팡티 사에서 출판됨. 오랫동안 살아왔던 크루아세에서 5월8일 뇌일혈로 세상을 떠남.

++++

 

盛夏의 길목, 토요일입니다.

좋은 주말을.

 

***동우***

2017.07.16 00:40

 

<그녀가 고개를 돌리니 바로 뒤에 샤를르가 있었다. 챙 달린 모자를 눈썹까지 깊숙이 눌러쓰고, 추위에 떨고 있는 두꺼운 입술이 그 얼굴에 무언가 우둔한 느낌을 덧붙여 주었다. 그의 등까지도, 그 태연한 등까지도 보고 있으니 짜증이 났다. 그 프록코트 위에 이 사람의 평범함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것같이 느껴졌다. 그녀가 이렇듯 짜증스러움 속에서 일종의 변태적인 쾌감을 느끼며 남편을 바라보고 있을 때, 레옹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추위로 새파랗게 질린 것이 얼굴에 한층 더 감미로운 우수를 띠게 하는 것 같았다. 깃장식과 목 사이의 속셔츠 깃이 약간 구겨져 있고, 머리카락 밑으로 한쪽 귓밥이 드러나 있었다. 가만히 구름을 쳐다보는 큼직한 푸른 눈이, 엠마에게는 하늘을 비추는 산 속의 호수보다도 더 맑고 아름다워 보였다.>

 

외간 남자와 사랑에 빠진 여인의 눈에 비추이는 남편의 모습.

이 대목 어쩜 그렇게 똑 같은지요.

그동안 멀쩡하게 보이던 남편의 귀까지도 이상스럽게 보였던, 브론스키와 사랑에 빠진 안나 카레니나와...

 

평생 빅토르 위고를 숭배하였으면서도 낭만주의에 반발하여 사실주의를 주창하고 천착하였던 플로베르.

 

그러나 문학이론 따위 내게는 무위롭습니다.

환경과 상황의 치밀하고 정교한 묘사, 더불어 저와 같은 여성의 심리적 사실성에도 나는 감동합니다.

여성...

테스, 제인 에어, 안나 카레니나가 그러하듯이.

 

아, 나를 데리고 가 줘.

회색빛 땅에서.

이 범상함으로부터.

 

파국을 예견하더라도 자신을 던지고자 하는 저 요상한 심리의 로맨티시즘

그건 여자라는 존재가 지닌 비극성 반짝임, 파토스의 에스프리...

 

좋은 휴일을

 

***동우***

2017.07.19 01:01

 

어느 분이 쓴 것인지 모르겠는데, 아래는 인터넷에서 주어 온 '보바리 부인 論' 입니다.

 

++++

<보바리 부인의 탄생>

‘보바리부인은 무엇보다도 그 구성에 있어서 엄밀하다. 이 작품의 모든 요소는 서로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어, 어느 것 하나 작가의 붓에 내맡겨진 것은 없다. 이 예술가는 한결같이 자기가 바라는 그대로를 만들어냈다.’

1857년 5월4일 '월요한담'에는 보바리부인에 대해 이와같은 찬사의 서평이 실렸다. 일개 무명작가에게 이러한 최대의 호의를 마다하지 않았던 비평가는 생 트뵈브였는데, 그 당시 그는 프랑스 비평계의 최고봉으로 그의 의견은 문학계의 공기 전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상당한 부분을 주도할 만한 비중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월요한담'에 실린 생트뵈브의 비평이 이시기의 플로베르와 같은 이름없는 소설가에 대해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라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그의 이름만 들어도 보바리 부인이 머리에 떠으를만큼 우리에게는 널리 알려진 19세기 프랑스 문학의 사실주의의 대가이다.

그를 그러한 위치에까지 오르게 한 보바리 부인의 탄생은 실제의 단순한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평범한 도시와 시골의 사건을 소재로 예술작품으로써 나무랄 데 없는 완벽한 구성 속에 결합시켜놓은 점을 지적하는 것은 '보바리 부인론'의 한 전형이다.

보잘것없는 시골 의사의 아내이며,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여자가 두 남자와 불륜의 사랑에 빠진 끝에 빚에 쫓기어 자살하는 줄거리 자체에는 어떤 심원하고 고매한 내용도 없고, 또한 저속하다면 참으로 저속한 제재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제재는 실제로 있었던 사건에서 가져온 것임은 잘 알려진 일이다.

1848년 루앙에서 20킬로미터쯤 떨어진 '리'라는 마을에서 우젠 드라마르라는 개업의의 아내 델핀느가 간통과 낭비의 어지러운 생활 끝에 음독자할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 남편도 다음해에 죽었다.

사회면의 기사거리임직한 이러한 추문은 지루한 생활에 찌들어 있는 지방 사람들에게는 이목을 끄는 큰 사건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당시 루앙 주변에서 이 사건은 자주 소문에 올랐던 모양이다.

더군다나 그 사건의 주인공인 드라마르라는 시골 의사는 루앙에서 명의로 덕망이 높았던 플로베르의 아버지 아시르 크레오파스 박사의 제자였고, 또 그의 어머니 드라마르 노부인은 플로베르의 어머니 카롤린느의 친구이기도 했으므로, 플로베르는 그 사건의 내막을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소설 보바리 부인에는 이 사건의 경위가 큰 줄거리로서 거의 그대로 이용되고 있다.

그런데 플로베르는 어째서 이러한 시골의 평범하고 하찮은 사건을 굳이 고른 것일까?

플로베르의 문학 친구였던 막심 뒤 캉의 문학적 회상(1882년)에 의하면 그 이유는 그가 심혈을 기울여 쓴 소설 성 안투안의 유혹 초고가 참담한 실패로 끝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문제의 성안투안의 유혹은 플로베르의 기록에 의하면 1849년 9월12일 '개었으나 바람이 강한 오후 세시 이십분'에 완성되었다.

그 즉시 플로베르는 문학동지였던 루이부이예와 막심 뒤 캉을 불러 낭독해 들려주고는 작품에 대한 기탄없는 평을 구했다. 두 친구의 판정은 엄했다. 플로베르의 과도한 공상과 지나치게 엄숙한 서정이 앞을 가려 정작 중요한 성 앙투안의 상이 모호해졌다고 혹평했다. 비록 그 속에는 미사여구가 가득히 나열되어 있기는 하지만 공상이 지나친 나머지 너무나 망연하며 전체적으로 보아 통일성이 결여되었을 뿐 아니라 소재가 너무 분방해서 오히려 작가를 끌고 나가 작가의 자제심이 흔적도 없이 빠져버린, 너무나 환상적이요 낭만적인 작품이라는 것이었다.

플로베르는 완전히 낙담해 버렸다. 루이부이예는 실의에 빠진 그에게 한동안 서정주의를 버리고 완전히 사실적인 소설, 예를 들어 발자크의 종형 퐁스, 사촌누이 베트와 같은 소설을 쓰도록 권고 하면서 과감하게도 평범한 드라마르 사건을 제재로 할 것을 제안했다 (뒤캉의 문학적 회상에서는 실명을 피해 드로네 사건이라고 기술했다).

그래서 결국 플로베르는 보바리부인을 쓰려고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직후 플로베르는 뒤캉과 함께 중동지방으로 여행을 떠났는데 나일 강 둘째 폭포 앞에서 소설의 주인공에 걸맞는 보바리라는 이름을 생각해냈다며, 뒤 캉을 향해 감격한 얼굴로 외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뒤 캉의 이러한 회상은 단순한 기억의 잘못인지, 의도적인 것인지는 차치하고라도 현재 대부분의 플로베르 연구가들은 이 회상의 신빙성은 의심스러운 것으로 판정한다.

아무튼 풀로베르는 1851년 가을, 이집트에서 돌아오는 길로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後略-

++++

 

***野草 박정호***

2017.07.20 18:32

 

몇 회분 가져갑니다.

동우님! 야초가 아이디 1개월 정지 받았습니다. 저작권문제로 ㅎ

해서 다른 아이디로 야초입니다.

친구신청합니다. 수락해주시길~~

 

***┗동우***

2017.07.21 04:19

 

하, 야초님도 1개월 아이디 정지라는 징벌을.

조심하셔야지요.

작년의 나처럼 자칫 아이디 영구추방이라는 치명적 선고를 받으면 어쩌실려구... ㅎ

 

친구신청, 당근 수락.

무더운 날씨, 건강하게 나시기를.

 

***┗野草 박정호***

2017.07.21 07:54

 

고맙습니다.

더운 날들 건강 잘 지키세요~~

 

***동우***

2017.07.22 04:06

 

보바리 부인은 늘 헛헛합니다.

허영과 사치와 애정과 욕정의 목마름으로.

델리케이트한 감성 하나만 보듬고 현실을 몽상으로 사는 여인.

 

보바리 부인.

그녀도 그러려니와 세상 물정 너무 모르고 우둔한, 오쟁이 진 남편 샤를르도 좀 비현실적입니다.

어쩌면 그 역시 몽상가인지도 모르지요.

부부 둘 다 현실에 굳건한 뿌리를 내린 사람들이 아닌듯 내겐 느껴집니다.

 

그리하여 저들의 파멸은 어쩌면 초장부터 예견된 바 별로 놀랄것도 없습니다만.

종장의 긴 대목, 작가가 냉정한 문체로 묘사한 주변인물(시대적 분위기..환경이나 상황...)들의 차가움에 등골이 서늘합니다그려.

엠마를 흠모하였던 소년 쥐스탱에 대한 것은 이 소설에서 드물게 낭만적인 대목이었지만.

 

<전나무 숲에 둘러싸인 무덤 앞에서 한 소년이 꿇어 앉아 울고 있었다. 흐느낌으로 터질 것만 같은 소년의 가슴은, 달빛보다도 달콤하고 밤의 어둠보다도 한량없는 회한의 무게에 짓눌려 어둠 속에서 헐떡이고 있었다.>

 

엠마의 자살, 그리고 샤를르와 더불어 파국을 맞는 보바리家.

보바리 부인에게도 남편 샤를르에게도, 가엾지만 강하게 동정이 가지는 않는군요.

그렇다고 그들을 손가락질 하며 욕할수 있으리까.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삶과 관계의 결핍.

인간이 근원적으로 지니고 있는, 그 목마름과 그 헛됨으로부터 파생되는 우리의 가능태인지도 모르니까요.

 

<그런데도 그녀는 행복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 인생의 이 아쉬움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뜻했던 모든 것들이 눈 깜짝할 사리에 썩어 문드러지는 것을 왜일까?... 하지만, 만일 어딘가에 아름답고 씩씩한 사람이 있다면. 열정적이고 품위 있는 성격, 천사와 같은 시인의 마음, 이런 것들을 지닌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과 우연한 기회에 만나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은가?>

 

<아! 다 틀렸다! 게다가 일부러 애쓰며 그런 것을 찾아봐야 무슨 소용 있는가! 모두 거짓이다! 어떠한 미소에도 권태의 하품이 숨어 있고, 어떤 환희에도 저주가 어떤 쾌락에도 혐오가 숨어 있다. 황홀한 키스조차 충족되지 못한 더 큰 쾌락의 욕망을 입술에 남긴다.>

 

플로베르도 말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보바리 부인, 그것은 나다'라고.

 

'보바리 부인'

이 소설 연재하던중 영화 한편을 다운받아 보았습니다.

(영화로 여러번 만들어진 줄 아는데 나는 처음 보았습니다) 소피 바데스가 감독하고, 미아 와시코브스카가 주연한 '보바리 부인'

그 시대 노르망디를 배경으로 화면은 제법 낭만적인 미장센이었습니다만, 소설과는 사뭇 다른 내용과 분위기의 영화였습니다,

 

긴 소설, 함께 읽어주어 고맙습니다.

 

익어가는 여름.

좋은 주말을.

 

***野草 박정호***

2017.07.22 08:26

 

수고하셨습니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