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모범경작생. 후처기]] (1,4,3,3,1)

카지모도 2020. 11. 8.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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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모범경작생> <후처기>

 

 

<모범경작생>

-박영준 作-

 

***동우***

2017.11.02 04:19

 

1934년에 발표한 박영준(朴榮濬,1911~1976)의 '모범경작생'

당시 농촌현실이 저러했던가봅니다.

 

농촌 마을의 지도자 격인 길서.

그는 일제식민정책에 앞장 서서, 관리에게 아부하고 현실적 실리를 좇는 이기적 청년입니다.

 

반면 지주에게 수탈 당하고 관료주의에 신음하는 무지랭이 농투산이들.

북간도나 만주로 바가지 차고 떠날 생각들을 합니다.

 

<벼는 누릇누릇해서 이삭들이 뭉친 것이 황금덩이 같았다. 그러나 얼굴의 주름살을 편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강충이(벼 줄기를 깎아 먹어 벼를 마르게 하는 벌레)가 먹어 예년에 비해서 절반도 곡식을 거둘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길서만이 평양 가서 북어 기름을 통으로 사다가 쳤기 때문에 그의 논만은 작년보다도 더 잘 되었으나 다른 논들은 털 빠진 황소 가죽같이 민숭민숭해졌다.

이(蝨)새끼만한 작은 벌레까지가 못 살게 하는 것이 가슴 원통했으나 여름내 땀을 빼고도 제 입으로 들어올 것이 없을 것을 생각하니 눈물이 솟아 오를 지경이었다.

그들은 할 수 없으므로 성두의 말대로 길서를 시켜 읍내 지주 서 재당에게 가서 금년만 도지(小作料)를 조금 감해 달래 보자고 했다.

그러나 길서는 자기와 관계가 없을 뿐 아니라 정해 놓은 도지를 곡식이 안 되었다고 감해 달라는 것은 흔히 일어나는 소작쟁의와 같은 당치 않은 짓이라고 해서 거절했다. 그리고는 며칠 있다가 일본 시찰단으로 뽑히어 떠나가 버렸다.

동네 사람들은 어찌 할 줄을 몰랐다. 더구나 금년 겨울에는 기어이 잔치를 하려고 하던 성두는 가끔 우는 얼굴을 하곤 했다.

그들은 할 수 없이 큰마음을 먹고 떼를 지어 읍내로 들어가서 재당에게 사정을 말해 보았으나 물론 들어 주질 않았다. 오히려 아들을 분가시킨 관계로 돈이 몰린다는 근심까지를 들었다.

『너희들 마음대로 그렇게 하려거든 명년부터는 논을 내놓아라.』

하는 말에는 더 할 말이 없이, 갈 때보다도 더 기운 없이 돌아왔다. 그들은 돌아가는 길에 길서의 논 앞에 서서 「모범경작」이라고 쓴 말뚝을 부럽게 내려다 보았다.

볏대가 훨씬 큰데 이싹이 한 길만치 늘어선 것이 여간 부럽지 않았다. 그러나 말도 잘 하고 신망도 있다고 해서 대신 교섭을 해 달라고 부탁했음에도 불구하고 못 들은 척 들어 주지 않은 길서가 미웠다.

『나도 내 땅이 있어 비료만 많이 하면 이삼곱을 내겠다. 그까짓거---.』

기억이가 침을 탁 뱉으며 말했다. 며칠 뒤 그들이 다시 놀란 것은 값도 모르는 뽕나무값이 엄청나게 비싸진 것과, 십삼 등 하던 호세가 십일 등으로 올라간 것이다.

그것보다도 십등이던 길서네만은 그대로 십등에 있는 것이 너무도 이상했다. 길서네는 그래도 작년에 돈을 모아 빚을 주었으나, 다른 사람들은 흉년까지 만나 먹고 살 수도 없는데 호세만 올랐다는 것이 우스우면서도 기막힌 일이었다.

무엇을 보고 호세를 정하는지 알 수 없었다.

흉년, 그러면서도 도지를 그대로 바쳐야 하는 데다가 호세까지 오른 그들의 세상은 캄캄했다.

「아마 북간도나 만주로 바가지를 차고 떠나야 하는가보다.」

성두는 혼자 생각했다. 그들은 마을에 대한 애착심도 잊었고, 제 고장이라는 것도 생각하기 싫었다. 다만 못 살 놈의 땅만 같았다.

마을 사람들은 길서의 장난으로 호세까지 올랐다는 것을 다음에야 알고 누구 하나 그를 곱게 이야기하는 이가 없게 되었다. 길서 때문에 동네를 떠나야겠다는 오빠의 말을 들은 의숙이도 눈물을 흘리며 길서가 그렇지 않기를 속으로 바랐다.

 

길서는 일본서 돌아올 때 우선 자기 논두렁에서 가슴이 서늘함을 느겼다.

논에 박은,「김 길서」라고 쓴 말패는 간 곳도 없고,「모범경작생」이라고 쓴 말뚝은 쪼개져서 흐트러져 있었다.

심술궂은 애들이 장난을 했는가 하고 생각하려 했으나 그 한 짓으로 보아서 반드시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동네에 들어섰을 때 동네에는 어른이라고 한 사람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읍내 서 재당 집엘 가서 저녁 때가 되도록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을 듣자, 서울 갔다 돌아왔을 때보다도 더 의기양양해 온 길서의 마음은 쪼박쪼박 깨어지고 말았다.

보지도 못했고, 이름조차 들어 보지 못하던 바나나를 가지고 밤이 이슥했을 무렵 의숙이를 찾아 갔건만 그를 본 의숙이도 얼굴을 돌리고 울기만 했다. 길서의 마음은 터지는 듯 했다.

뒤에서 몽둥이를 들고 따라오던 사람의 숨소리를 듣는 듯 가슴이 떨리었다. 불길한 징조가 눈에 보이는 듯했다.

성두가 충혈된 얼굴로 아랫문으로 뛰어 들었을 때 길서는 들고왔던 바나나를 들고 뒷문으로 도망쳤다.>

 

모범경작생 길서.

마을에서 배척받는 이기적 배신자.

그를 사랑하는 의숙이가 가엾군요.

 

 

<후처기(後妻記)>

-임옥인 作-

 

***동우***

2018.10.07 23:56

 

한 세대 전의 여류작가 '임옥인(林玉仁,1915~1995)의 출세작 '후처기(後妻記)'

임옥인은 여덟살 연하의 작가 '방기환(方基煥,1923~1993)'과 금슬 좋은 부부이기도 하였답니다.

 

조혼(早婚)으로 애정없는 첫부인과 헤어지고 사랑하는 둘째부인과는 사별(死別)한 의사(醫師).

그에게 재취로 시집간 인텔리 노처녀 주인공.

죽은 전처를 그저도 잊지 못하는 남편 곁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찾으려는 여자.

 

그 심리가 참으로 정치(精緻)하고 리얼합니다그려.

내 어머니 세대 사람들의 생각이라던가 풍속과 더불어.

 

<그는 첫 인상과 같이, 무뚝뚝하고 말이 없을 줄 짐작은 했었지만, 또 그러므로 해서 믿음성이 있어 보이는 까닭에 결혼까지의 과정을 밟은 것이지만, 일평생 저렇게 재미 없는 사람과 함께 늙으려니 하면 내 가슴엔 벌써 알지 못할 불안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아니다 후회한 내게 당치 아니한 약한 짓이다 하고 나는 자칫하면 흐려지는 눈을 끔벅여 가며 손을 모으고 단정히 앉아 있었다. 나는 속으로 내 친한 동무가, 『생이별 자리엔 가두 죽은 후취론 안 갈 일야』 하던 말을 생각하곤 혼자 고소했다.>

 

<내 욕망도 그러했거니와 아무리 서른 살 먹은 신부이기로 여학교 교원이요, 전문학교를 나온 소위 재원인 나를 이규철 즉 남편이 세째번 후취로 요구한다며 나도 어떤 무리한 주문이라도 하고야 결혼을 승낙할 용기가 난 것이다.

돈에 굳기로 유명하다는 이규철이가 신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수천원을 들여 피아노를 사다니 꽤 반한 상대이리라는 평판이 돌았다지만, 그가 내게 대해 애정을 가졌는진 모르나 나는 그에게서 정다운 공기와 전적인 열정을 느낄 수는 없었다. 이런 일이 내게 있어선 오히려 다행한 일일는지도 모른다.>

 

<독신으로 지낼 테야. 남편은 이렇게 중얼거리고 아내의 대상과 소상 등 범절을 다 했다 한다. 나와 결혼한 이후론 가끔 자리를 가지고 병원 진찰실 옆방에서 자는데 친한 동무와 얘기하는 걸 들으면, 그런 밤이면 못견디게 복희 어미의 생각이 나는 때라 한다. 또 가끔 우는 때도 있고,

그것은 나와 결혼한 까닭에 더 생각난다고 하고 모든 조건이 나보다 남편의 마음을 글게 생겼던 그 여자, 그 우직스레 생긴 남편의 순박한 마음을 독점하고 죽어도 그 마음에 깊이 자리잡은 채 있는 그 여자…. 그 환영은 곧 복희에게 있을 것이다. 그 애에게 그 애 어머니를 느끼고 남편은 그것으로 낙을 삼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세상과 더불어 사귀기를 그만 두고 완전히 고립해 버렸다. 나는 일함으로 즐거울 수 있엇고, 재산 많은 이 의사의 부인이란 간판 때문에 다른 사람을 경멸할 수가 있었고 교제를 아니함으로 번거로움에서 떠날 수가 있었다.

나는 내 악기들과 재봉틀과 옷들과 기타 내 세간들에게 깊이 애착한다. 그것들을 거울같이 닦아놓고 나는 만족히 빙그레 웃는 것이다. 나는 살아 있는 것만으로 기쁘고 일하는 것만으로 자랑스럽다. 나는 나 이외의 모든것을 충분히 경멸할 수가 있다. 남편의 마음도 경멸하고, 나를 비평하는 모든 사람을 경멸할 수가 있는 것이다.>

 

<전처의 두 아이 영수와 복희의 학교성적은 다 좋았다. 통신표를 바라볼 때의 만족한 남편의 얼굴은 우습기까지 했다.

『고것들 꽤 잘 했네』

남편은 세번째라고 쓴 영수의 것과 다섯번째라고 쓴 복희의 통신표를 언제까지나 놓을 줄 몰랐다. 나는 속으로

『저희들이 잘나서 그런가 뭐? 다 내 덕이지』중얼거렸다. 그리고 내 속에 움직이는 내 유일한『고 것』은 나서, 커서, 저 애들보다는 몇 배나 더 잘 할 것만 같았다.

덕순이를 절교해 버린 내 주위에는, 집 식구 이외엔 강아지 새끼하나 어른거리는 것이 없었다. 이런 외부의 사교에서 멀리멀리 떠나도 털끝만치도 고독과 허전함을 느끼잖는다. 내 속에 커가는 한 생명이 내 유일한 벗이요, 가장 소중한 존재이다. 나는 『내 것』이라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 가슴이 터질 듯이 기쁘다.

내 주위는 점점 제한되어 가나 그러나 내 마음은 무한정으로 확대되어 가는 것 같다.

나는 이런 새 세계에서 내 뱃속에 커가는 아이의 태동을 빙그레 웃으며 느끼는 것이다.>

 

저 시대, 여자의 정체성의 자각이나 실존적 위치를 확고하게 하여 주는건 무어겠습니까?

오로지 ‘내 것’일 자신의 핏줄밖에는 없을테지요.

 

시나브로 좁아질 수밖에 없는 여성의 의식세계.

지금 세상이라고 썩 다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