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노인의 소년 (0,0,3.3)

카지모도 2021. 2. 8. 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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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설-

 

<노인의 소년>

 

***동우***

2013. 12. 23

 

해와 달은 어찌도 그리 서둘러 이우는지, 어느 새 한해가 저문다.

나는 동창회같은 모임에는 좀처럼 참석하지 않는 놈이지만, 엊저녁 고교동창 여섯의 친구들 둘러앉았다.

강기탁, 강일용, 고광명, 신무성, 옥영재 그리고 나.(가나다順)

 

호접몽(胡蝶夢)

꿈 속의 나비는 꿈꾸는 장자(莊子)와 본디 하나라는데, 꿈결같은 소년들은 간곳없고 노인(老人)들만 완연하고나.

주름진 얼굴들, 옛 소년의 흔적 사라졌다.

바야흐로 늙음은 사유(思惟)가 아니라 현실이 되어 우리 삶에 엄습하였구나.

대화는 대부분 건강의 문제로 흘러간다.

아, 우리를 쇠퇴케 하여 스스로 자신의 육체를 불신케 하는 너 늙음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가.

의학적 이력과 정보교환이 어느새 우리 주탁(酒卓)의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되어버렸나니.

우리는 한치 벗어날수 없는 노인들인 것이다.

그러나 주탁(酒卓)에서 소년은 가뭇 사라졌으나, 늙은 악동(惡童)들의 언사는 여일하게 질펀하였다.

괜히 도사 폼을 잡고 인생 노회한척 해 보아야 그것은 어릴적 벗들 둘러앉은 주석(酒席)에 대한 모독이고 추레하고 구질하고 못난 감상(感想)의 노추(老醜)함일 뿐이로다.

이자식 저새끼 육두문자와 시발새발 성적농담들, 짐짓 위악적(僞惡的) 포즈들 서로간 가장 만만하고 편한 고교적 친구들.

 

강기탁.

기탁아. 인후(咽喉)에 문제가 있다고 푸념하던데, 그건 네가 술을 즐겨하지 않았던 까닭이란다.

진작부터 나 따라 알콜로 목구멍 적시는 습관을 들였더라면.

지구촌 누비며 기계 팔아먹어 벌어 논 돈 써가면서 늙마를 즐기는 너는 부럽지만, 술맛 모르는 너는 부럽지 않노라. ㅎ

송정, 행사. 상곤, 사진, 길선, 길만, 월남...

너와 얽힌 그 많은 추억들 참으로 아련하게 새로웠다.

어쨌거나 건강 유의해라. 기탁아.

길선이는 나도 소식을 모르지만 상곤이는 언제 함께 만나자꾸나.

 

강일용.

대신동 자취방, 서울과 대천, 내 중학 동창들과의 여행,.. 데모... 중부경찰서..

너와는 참 많은 추억이 있지.

과장이 아니라, 이 세상 착한 사람 상위 1%에 속하는 녀석이야, 너는.

그런데 저보다 한참 나이 어린 미인 마누라를 차지하였으니 그건 도둑놈이렷다. ㅎ

딸딸이 아빠, 손주가 하나라지?

그리고 일용아, 네 눈가 자글자글한 주름이 왠지 나는 좀 슬펐단다.

그렇게 늙었구나, 너는.

 

고광명.

산청 김해 고성 거제 촌놈들 틈바구니에서 너하고 나는 도회출신 젠또르맨.

머리칼은 백발삼천장이지만 너는 이목구비 뚜렷한 용모의 로맨스그레이.

친구녀석들 너를 빨리 새장가 보내야 한다고 왁자하였을때 너는 쓴웃음을 지었던가.

2차 주석에서의 네 얘기, 지아비 자식들의 정성 속에서도 그렇게 황망하게 사랑하는 아내를 여의었구나.

그래도 광명아, 건강하고 꿋꿋한 네 모습은 참으로 보기 좋았단다.

너와는 주석이 더 흐드러지게 질펀하였을텐데.

정길채 부산오면 함께 만나, 우리 목사님 술 좀 먹이자꾸나.

 

신무성.

동창이지만 연배의 형같기도 한 친구 무성아.

나는 고성 너희 집에도 대신동 네 삼촌댁에도 며칠씩 묵은적 있지.

노력과 성실과 정성. 너의 부(富)가 호리라도 세습(世襲)으로 이룬게 아니라는걸 나는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어.

늘 노가다 운운하지만, 철강사업으로 이룬 너의 부(富)는 내게는 딴 나라의 드라마같은 얘기야.

'빽이 없으면 돈으로 빽을 산다'는 기개와 배짱의 처세철학.

나같은 쫌팽이가 그에 이르도록 네가 겪은 세상사와 그 역정을 어찌 더듬을수나 있겠나.

암이라는 오진 벗어났으니, 이제 안정된 마음으로 건강을 다스려라.

모쪼록 건강해라, 무성아.

 

옥영재.

너는 다복한 사람이야.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수신과 제가에 성공하고 치국에 이르려는 너.

연전 출마한 선출직 공직에 당선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나는 네 기사 딸린 승용차는 부럽지 않지만 너의 제가(齊家)가 진정 부러워.

옥씨 대가문(大家門)을 이끌며, 파파 노모를 지극정성 섬기고, 아내를 알뜰하게 챙기는 반듯함, 슬하의 아들과 딸과 사위와 며느리와 네명의 손주들을 화목함으로 거두는 살뜰함.

1년에 두번씩 열명의 식구 전부(와병중의 노모를 빼고) 단체 모임의 해외 여행이라니.

너는 다복할뿐더러 행복을 가꿀줄 아는 사람이야.

나로서는 두루 아득하지만 행복의 네 그림을 진정 본받고자 한단다, 영재야.

 

기탁아 일용아 광명아 무성아 영재야.

노인의 소년.

모쪼록 이렇게들 살자.

무력감 의존감 고립감 두려움 따위의 늙다리 모습은 오늘 우리 것이 아니노라고.

 

엊그제 분명하게 확인하였던바, 우리에게는 아직 소년이 남아있었단다.

 

 

***eunbee***

2013.12.24 09:04

 

아름답습니다

동우님

메리 크리스마스♡^^

 

***┗동우***

2013.12.25 09:11

 

하하, 아름답다니, 내가 너무 폼을 잡았나요?

어쨌거나 늙다리들의 히히덕거림에 대한 상찬으로 알아듣고 감사.

 

크리스마스.

예전 척박하였던 환경 속에서도 고삐리 녀석들에게 크리스마스는 가장 반짝이던 날이었을 겁니다.

크리스마스이브, 저 녀석들 영재의 하숙집에 모여 술한잔들 걸치고 대신동 일원을 싸돌아 다녔지요.

 

은비님께도 하트와 눈웃음 날립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은비님. ♡^^

 

***홍애(虹厓)***

2013.12.25 16:49

 

동우님을 여직껏 문학소년으로 알고 사귀어왔는데요 ㅎㅎ년말 친구들 모임하셨군요.

추억이 있고 이제 만나도 서로 말할 게 있는 친구들, 가정 잘 가꾸고 친구와 사이좋게 우정의 꽃밭 이제도록 기꾸시고 계시니 고독한 노인 아닙니다 동우님은요.

크리스마스되고 년말이 되고... 한 해의 아쉬움, 한 세상살이의 고단함 밀려오지만 또 새해 곧 바로 앞이네요.

우리, 내년엔 어떻게 사귈까요? ㅎㅎ

 

***┗동우***

2013.12.26 10:44

 

홍애님.

동경서 해후한 따님, 얼마나 설레이게 기쁘셨을까.

엄마 아빠에게 머플러 선물, 홍애님의 자랑질(? ㅎㅎ 실례) 예까지 요란하였습니다그려.

 

홍애님과는 벌써 10년 가차운 지기.

어느새 함께 늙어 가고(ㅎㅎ 이 또한 실례지만) 있어요.

 

정말 홍애님.

알아주시는바, 그렇게 문학소년의 센티멘탈리즘으로 살수만 있다면 내 수명 1,2년쯤 떼어주어도 좋으련만. ㅎㅎㅎ

 

***melon***

2014.01.03 20:04

 

친구분들을 바라보고 계시는 동우님의 시선이 느껴집니다.

우리 모두들 같은 느낌느로 그시절 소년소녀 였던 친구들과 재회 합니다.

그 여여쁜 모습은 어델가고.... 중년을 넘어 초로로 접어든 그네들이 거기 있네요.

그래도 그 자리에서 얼굴을 볼수 있는 친구들은 복받은 사람들 입니다.

 

볼수 없는 이들을 떠 올리며....

 

***┗동우***

2014.01.04 05:19

 

떠나보낸 옛것들에 연연하는 내 연배에 비하면 멜론님의 새로움은 늘 신선합니다.

왕년의 탑가수 이현, 그를 좋아하였던 사람들의 모임을 이끄시는 멜론님의 마음밭은 소녀와 같은 뮤즈. ㅎㅎ

정말 아도니스처럼 잘생겼던 이현, 그 이도 지금은 많이 늙었겠지요. (내 또레일껄요)

 

가끔 그곳 카페에서 듣는 간드러진 음색과 기교의 노래들, 내게도 사무치는 바 없지 않아요.

 

지금은 볼수없는 이들, 나를 잊은 혹은 나에게 잊혀진 이들.. 죽는 순간 파노라마처럼 죄 떠오른답니다.

결국 사람은 옛 것들 속에 묻혀, 그 정서로 세상을 떠나는게 아닌가 나는 자주 생각하지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