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돼지 빚을 갚다>
-마저리 키넌 롤링스 作-
***동우***
2019.02.27 05:08
'마저리 키넌 롤링스(Marjorie Kinnan Rawlings,1896-1953)'의 '돼지 빚을 갚다 (A pig is paid for)'
작가는 '아기사슴 플래그'로 풀리처 상을 받은 여성 작가입니다. (아기사슴 플래그는 애니메이션으로도 잘 알려진 꽤 유명한 명작동화지요. 유튜브로 볼수 있어요.)
'돼지 빚을 갚다.'
작가의 경험에서 우러난 수필인듯 합니다.
20세기 중반 미국남부(플로리다) 시골의 모습.
반지빠르지 않고, 소박하고 수더분한 시골 풍습은 동서가 다르지 않습니다.
남녀불문 총을 예사로 다루는 저 아메리칸 기질은 낯섭니다만.
히겐보섬씨의 암퇘지와 마틴씨의 수퇘지.
그 암수의 교미가 성공하면 롤링스 양의 빚은 갚아지는겁니다.
아, 암수 두 짐승의 짝짓기는 성공하였습니다.
그로써 롤링스양의 빚은 청산되었군요.
적나라한 암컷과 수컷의의 코이터스,..
그걸 차마 숙녀의 입으로 묻기도 그렇고 신사의 입장에서 세세히 설명하기도 그렇고,
<분명 문제가 해결된 듯했다. 필시 달이 제대로 떴나 보다.
그러나 사람 많은 가게에서 그 회색 암퇘지와 마틴 씨네 수퇘지의 은밀한 관계를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 암퇘지가 받아들였나요? 당신과 히겐보섬 씨, 저 사이의 빚은 다 해결됐나요?" 라고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저, 제가 빚진 돼지요. 제가 다른 돼지로 갚으려 했던-"
마틴 씨가 큼직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롤링스 양, 돼지 빚은 갚으셨소.">
“돼지 빚은 갚으셨소."
이 한마디면 족하지요. ㅎ
본문에 나오는 '찰스 램'의 에세이 '돼지구이'.
부록으로 올립지요.
새끼 돼지구이 요리, 그 맛에 대한 찬가랍니다. (전에 한번 올린적이 있을겁니다)
근데 그토록 맛있나?
구운 새끼돼지 껍데기가.
나도 쏘주안주로 돼지껍데기를 좋아하는데, 새끼돼지가 아니라서 그 맛이 안나는걸까.
살아생전, 찰스 램이 이토록 찬미하는 '크래클링'이라는 요리를 먹어볼수 있으려나?
++++
<돼지구이에 관한 이야기>
-찰스 램-
내 친구 M (토머스 머닝 Thomas Manning, 1774~840): 영국의 동방 여행가. 언어학자)이 어느 중국 문한을 읽고 내게 친절하게도 설명해준 일이 있었다.
그 문헌에 의하면 인류는 처음 7만년 동안, 오늘까지도 아비시니아(Abyssinia: 에티오피아에 있는 동아프리카의 왕국)에서 볼 수 있듯이, 살아 있는 짐승의 날고기를 할퀴고 물어뜯어내어 생으로 먹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위대한 공자께서도 '세속의 변화'(원문 mundane mutation: 주역을 말한다는 설이 있으나 가공적으로 지어낸 책이름이란 설도 있다)하는 책의 2장에서 문자대로 옮기면 '요리사의 휴일'이란 뜻을 지닌 '초팡'(chofan: 부엌을 회화적으로 '요리사의 휴일'로 쓰고 있다)이란 말로 일종의 문화적 황금기를 표현하고 있으며, 이로 미루어 보면, 이런 시기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나아가서 그 문헌은 고기를 불에 굽는 요리법, 혹은 불에 그슬리는 요리법이 아래와 같은 방법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돼지를 기르는 호티라는 사람이 어느 날 아침 여느 때처럼 돼지에게 먹일 도토리를 주우려고 숲으로 들어가면서 움막집을 맏아들인 보보에게 맡겼다. 보보는 몸집은 컸지만, 동작이 서툴고 둔한 소년이었다.
그는,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이 그러하듯이, 불을 가지고 놀기를 좋아했던 것인데, 그날은 불똥이 짚단에 튀겨 순식간에 불이 붙게 되었고, 가련한 그들의 저택은 온통 불길에 휩싸였고, 결국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타버린 집이야 짐작할 수 있듯이 노아의 홍수 이전의 보잘것없는 임시변통의 움막이었을 것이지만, 그보다 휠씬 아까운 것은 갓 태어난 돼지 새끼 한배였다. 족히 아홉 마리나 그 집과 함께 불에 타 죽은 것이다.
돼지 모양의 도자기가 동양 곳곳에서 귀중한 집안 장식품으로 존중되어온 것은 아주 멀고먼 옛날부터였음을 우리는 책을 통해 알고 있다.
독자께서 짐작하시겠지만 보보는 몹시 놀란 나머지 정신을 잃은 상태가 되고 말았다. 집도 집이었지만 돼지들을 잃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집은 나뭇가지 몇 개를 주워 몇 시간 일을 하면 아버지와 함께 어느 때나 다시 쉽게 지을 수 있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무어라 말을 해야 할까 궁리를 하며 불시에 죽음을 당한 돼지 새끼들의 잔해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바라보며 두 손을 맞비비고 있었는데 전에 경험한 냄새와는 다른 어떤 냄새가 코를 찌르는 것이었다.
어디서 나는 냄새일까? 불탄 움막에서 나는 냄새는 아니었다. 그런 냄새는 전에도 맡아본 경험이 있었다. 사실은 이번의 사고가 결코 처음은 아니었다. 이 불행한 불장난꾼의 부주의 때문에 전에도 불이 난 적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냄새가 알려진 어느 약초나 잡초라거나 꽃이 타는 냄새는 더 더욱 아니었다.
그때 마침 무엇인가를 예시해주듯 그의 아랫입술에 침이 흘러내렸다. 그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는 허리를 굽혀 혹시 살아 있는 기미가 있나 해서 돼지를 만져보았다. 손가락이 뜨거웠다. 그는 이를 식히기 위해서 얼간이처럼 입에다 대었다. 그때 불에 탄 껍질 부스러기가 손가락에서 묻어나왔다.
그리하여 그는 평생 처음으로(아니 그 사람 이전에는 맛본 사람이 없었을 테니 이 세상 처음으로) 그 바삭거리는 구운 돼지 껍질을 맛보게 된 것이 아니던가!
그는 다시 돼지에 손을 대보기도 하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그렇게 뜨겁지도 않았지만 일종의 버릇으로 손가락을 핥았다.
무척이나 무딘 녀석이었지만 이윽고 그는 서서히 진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 냄새와 그 훌륭한 맛이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돼지였다는 것을.
그는 새로 얻은 기쁨에 휩싸여 불에 탄 껍질을 뜯어내어 이제 살점이 붙은 채 한움큼씩 짐승처럼 입에 몰아넣어 삼키고 있었다.
이 때 숲에서 돌아온 그의 아버지는 징벌의 매를 들고 아직도 연기를 내뿜고 있는 서까래들을 헤집고 들어와서 눈앞에 벌어진 광경을 보고서 그 어린 악동의 어깨를 무수히 매질하기 시작했다.
우박같이 쏟아지는 매질이었지만 보보는 마치 파리떼가 덤비는 것만 큼 개의치 않았다. 깊은 부분에서 느껴지는 간지러운 쾌감 때문에 그와 멀리 떨어진 다른 신체 부위에서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는 고통 따위에는 완전히 무감각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아무리 매질을 했지만, 그를 돼지에서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가 돼지를 거의 다 먹어치웠을 때에야 그의 아버지는 비로소 심상치 않은 사정을 어느 정도 눈치채게 되었고, 그러고 나서야 다음과 같은 대화가 부자간에 오고 가게 되었다.
"이 못된 녀석, 저기서 무엇을 우적우적 처먹고 있는 거냐? 그 못된 장난으로 집을 세 채씩이나 태워먹고도 모자라는 거냐! 이 망할 녀석! 한데 그건 무어냐? 불을 먹고 있는 게 아니냐? 먹고 있는 것이 무언지를 말해봐!"
"아버지, 돼지예요, 돼지. 불에 탄 돼지가 얼마나 맛이 있는 건지, 와서 먹어보세요."
끔찍한 소리에 호티는 귀가 멍멍했다. 아들을 저주했음은 물론, 불에 탄 돼지를 긁어내더니 쭉 찢어서 작은 토막을 아버지의 손에 억지로 쥐어주며 "잡숴보세요, 잡숴보시라구요, 아버지. 그저 맛만 보세요. 얼마나 기막히다고요!"하고, 짐승처럼 계속 소리를 질러대면서 숨이 막힐 듯이 돼지고기를 입안으로 줄곧 몰아넣는 것이었다.
호티는 그 끔찍한 고기 토막을 쥐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이 망칙한 어린 괴물을 그만 죽여버릴까 말까 머뭇거리고 있었던 것인데, 그때 손가락이 뜨거운 돼지 껍질에 닿았다.
그의 아들이 했듯이 손가락을 식히기 위해 입으로 가져갔고, 그 결과 이번에는 그가 그 돼지고기 맛을 보게 된 것이다.
아들 앞에서는 맛이 고약한 척 했지만 결코 싫지 않았던 것만은 분명했다.
결론으로(이 대목을 그 문헌은 좀 지루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두 부자는 아예 차분히 앉아 돼지를 먹기 시작했고, 이 한배의 돼지새끼들을 다 먹어치울 때까지 자리를 떠날줄 몰랐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보보에게 이 비밀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엄히 당부를 했다. 이 두 부자는 하늘이 내리신 훌륭한 고기를 감히 개량할 생각을 했으니 이웃 사람들은 그들을 고약한 놈으로 몰아 돌로 쳐죽이려 들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상한 소문이 나돌았다. 호티의 움막은 전보다 자주 불이 났다는 것이었다. 이때부터는 걸핏하면 불이 났다는 것이었다. 대낮에 나는 경우도 있었고 한밤중에 나기도 했다.
돼지가 새끼를 낳을 때는 호티의 움막은 으레 불길에 싸였고, 더욱 이상한 것은 호티 자신이었다.
그는 불을 낸 아들을 징벌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오히려 전보다 더욱 좋아하는 것 같았다.
결국 두 부자는 감시를 받게 되었고 그 가공스런 비밀은 탄로되고 말았다.
그 아버지와 아들은 당시에는 보잘것없는 소읍에 불과했던 북경으로 소환되어 재판을 받았다. 배심원들의 판결이 내릴 참이었다.
그때 수석 배심원이 기소이유인 불에 탄 돼지고기를 배심원석으로 보내주기를 요청했다. 그가 그 고깃덩어리를 만져보자 다른 무든 배심원들도 따라 만졌다.
그들도 보보 부자처럼 손가락을 데었고 자연은 그들 모두에게 똑같은(손가락을 식히기 위해 입으로 가져가는) 처방을 촉구했다.
모든 정황과 재판장의 분명한 문책도 아랑곳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거나 무슨 협의 같은 것도 없이 동시에 일제히 '무죄'를 선고했다.
온 법정의 사람들, 읍내에서 사는 사람들이며 객지 사람들이며, 입회 서기 할 것 없이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놀라운 일이었다.
판사는 눈치 빠른 사람인지라 명백히 잘못된 이 판결을 슬쩍 넘겨버리고 법정을 해산한 뒤, 슬그머니 빠져나가 얻을 수 있거나 돈을 수고 사들일 수 있는 돼지란 돼지는 모조리 모아들였다.
그 후 며칠 뒤 사람들은 그 판사의 관저에 불이 난 것을 보았다.
소문은 날개돋힌 듯 퍼지게 되었고, 이젠 사방 곳곳에서 불이 났다.
온 고을의 땔감과 돼지의 값이 엄청나게 폭등했다. 화재 보험회사는 하나같이 모두 문을 닫았다.
하루가 다르게 사람들이 짓는 집은 점점 빈약해졌고, 이윽고 이러다가는 모든 건축물이 머지않아 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일게 되었다.
그 문헌에 따르면 이런 식으로 집에 불을 지르는 풍습이 계속되다가 우리나라(영국)로 치면 위대한 철인 로크 (John Lodke(1632~1704): 영국의 철학자)같은 현인이 나와서 집을 통째로 태워 없애지 않고서도 돼지고기나 그 이와의 다른 짐승의 고기를 요리(그들의 말로는 불태우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알아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처음으로 조잡한 형태의 석쇠가 나오게 되었다.
철사나 쇠꼬챙이에 끼워 굽는 법은 1,2세기 지나서 나왔다는데 어느 왕조 때였는지는 잊었다.
가장 유용하고 또 외견상 뻔해 보이는 기술이랄 수 있는 이 돼지구이 기술도 이처럼 서서히 우리 인류 속에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이 그 문헌의 결론이었다.
위의 이야기를 완전히 믿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만일 어떤 요리의 목적을 위해서 집에 불을 지르는 것과 같은 위험스런 실험을(특히 오늘에도) 해야 한다는 그럴싸한 구실이 주어진다면, 아마 그런 핑계나 구실은 이 돼지구이에나 가능할 것이라는 데 동의할 것이다.
모든 맛 중에서도 나는 구운 돼지야말로 진미 중의 진미라고 주장하련다.
내가 말하는 돼지는 독자들께서 알고 있는 포크감이 될 정도로 다 자란 돼지 크지도 작지도 않은 것들만의, 다시 말해서 풋내기 중돼지가 아니라 한달 미만의 어리고 부드러운 젖먹이로 아직 아무런 때가 묻지 않은, 조상의 유전적인 결함인 '오물애호'의 원죄를 찾아볼 수 없는 (울음 소리를 겨우 벗어난) 꿀꿀대는 울음 소리의 부드러운 전조랄까, 서곡이라 할까 하는 울음 소리를 내는 돼지를 말하는 거다.
이런 돼지는 구워야 제맛이 난다.
우리 선조들은 이를 찌거나 삶아서 먹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요리를 하면 그 바삭바삭한 껍직의 맛은 얼마나 희생되어 버리는가!
나는 감히 주장하려니와, 알맞게 정성들여 구워낸 그 누르스름하고 사각사각한 구운 돼지 껍질, 이름도 그럴싸하게 붙여진 '크래클링'(crackling: 바삭바삭하다는 뜻으로 구운 돼지 껍질 요리를 말함)에 견줄 만한 맛은 이 세상에는 없다.
이 음식을 먹을 때에는 그 쉽게 부서지면서도 좀은 딱딱한 성질에서 오는 그 수줍은 항거를 정복하기 위해 이빨들이 동원되고, 그로 인해 씹히는 마술을 즐기는 기쁨까지 더해준다.
달라붙는 유질성, 어찌 그것을 기름덩이라 하랴! 아니 형언할 수 없는 감미가 피어나는 기름이라 할까, 부드럽게 꽃피어 나는 꽃망울에서, 새순에서, 천진무구에서 생겨난 기름이요, 순수한 새끼 돼지의 먹이가 응축된 진수요, 살은 살인데 살코기가 아닌 일종의 고기 만나(animal manna: 성경 출애굽기 16장 14, 15절에 나오는 하늘 나라의 음식. 원래 곡식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곡식이 아니고 고기로 되어 있는 만나라는 뜻)다.
아니 그 보다는 기름과 살코기(이런 속된 말 밖에 없으니)가 서로 섞이고 어우러졌기에 그 두 물질은 하나의 천신(天神)이 먹는 음식이 되는 결과(one ambrosian result: ambrosia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만나와 같은 신의 음식)가 된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흔한 물질에 불과한 것이 되었을 거라고 하는 게 옳겠다.
불에 굽고 있는 새끼 돼지를 보라.
작열하는 열기를 다소곳이 받고 있으니 몸을 불태우는 열기를 받고 있다기보다 오히려 상쾌한 훈기를 받고 있는 것만 같다.
꼬챙이를 중심으로 빙글빙글 돌아가는 모습은 또 얼마나 균형이 잡혀 있는가! 이제 다 익었다. 그 어린 나이에 어쩌면 그렇게도 감수성이 있단 말인가! 그 귀여운 눈은 울어서 눈물마저 말라버리고 유성이 남기는 운석 같은 젤리가 되었다.(원문 radian jellies: 별이 떨어지면 그 자리에 젤리를 남긴다는.) 그의 두번째의 요람인 접시 위에 얹혀 있는 모습을 보라.
그 얼마나 양순한가! 이처럼 천진한 것을 큰 돼지에서 우리가 너무나도 흔히 보아온 그 천박하고 거친 성질이 되게 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도 자라면 십중팔구 탐욕스럽고, 게으르고, 고집세고 불쾌한 짐승이 되어 추잡한 행동을 하며 오물 속에서 빈둥댈 것이다. 이런 죄들을 짓지 않도록 다행스럽게도 그는 그 위험에서 간신히 구제가 된 것이리라. 죄악에 시달리고 슬픔에 시들기 전에, 죽음이 때맞추어 찾아와 돌보아 주나니(시무얼 테일러 코울리지의 '갓난 아기의 묘비명(epitaph on an infant)'에서 인용) 그에 대한 추억 또한 향기롭다.
기름진 베이컨을 과식하고 욕하는 시골뜨기도 없고, 석탄광부조차도 그를 냄새나는 소시지에 넣어 게걸스럽게 먹어치워버리는 일도 없다.
그는 고마워할 줄 아는 현명한 미식가의 위장속에 자신의 아름다운 무덤을 가지게 되며, 그런 무덤이라면 족히 죽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는 진미 중에서도 최상의 진미다. 파인애플의 맛도 대단하다. 그러나 그 맛은 거의 세상을 초월하는 듯한 것이어서 이를 먹는 즐거움은 비록 죄악이랄 수는 없어도 마치 죄를 짓고 있는 듯한 기분이어서 정말로 민감한 양심을 지닌 사람은 좀은 망설일지도 모를 정도고, 인간의 미각에는 지나치게 황홀하여 이를 먹으려 드는 사람의 입술에 상처를 낼 정도로 여인과의 키스처럼 강렬하다. 그 풍미는 광기랄 수 있을 정도로 신랄하여 그것을 먹는 맛은 고통에 가까운 기쁨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입에서 그치는 맛이요, 결코 식욕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몹시 배가 고픈 사람은 언제라도 그 맛을 버리고 양고기 토막 따위를 취하려 들 것이다.
그런데 돼지구이는 (나는 이에 찬사를 보내련다) 까다로운 미각을 지닌 사람의 예리한 입맛을 만족시킬 뿐만 아니라 식욕을 돋우어준다. 몸이 튼튼한 사람들이 양껏 먹고, 허약한 사람들도 입안에 도는 그 부드러운 즙액을 사양하지 않는다.
인간의 성미란 복잡하여 선과 악이 몹시도 뒤엉켜서 쉽사리 풀리지 않지만, 그는 선으로 일관되어 있다. 그의 어느 부분도 더 낫다든가 못하다든가 하는 일이 없다.
얼마 되지 않는 양이 허용하는 한 그는 두루 맛좋은 부분을 제공해준다. 모든 부분이 한결같이 좋으니 연석의 어느 손님으로부터도 불만을 사는 일이 결코 없다. 그는 실로 모든 이웃에 우애를 돋우어주는 음식인 것이다.
세상에는 살아가는 중에 자기 몫으로 떨어진 좋은 물건을 아낌없이 친구에게 나누어주는 욕심 없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럴 만한 행운을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나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다.
친구들의 즐거움이며, 그들의 기호며, 적절히 만족해하고 그들의 모습을 내 자신의 것이나 다름없이 흥미있게 지켜보는 사람이라는거다.
나는 '선물은 자리에 없는 사람을 그립게 한다'(원문 presents endear absents: presents는 '선물'이란 뜻과 '참석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어 '참석한 친구는 자리에 없는 친구를 그립게 한다'는 뜻도 되어 언어의 익살이 들어 있음)는 말을 애용한다.
토끼니, 꿩이니, 자고새니, 도요새니, '길들인 농촌의 새'(원문 tame villatic fowl: 밀턴의 'samson agonistes'에서 'tame villatic fowl'이라고 쓴 말을 인용)인 시골닭, 거세된 수탉이니, 물떼새니,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니 몇 통의 굴 따위들은 손에 들어오는 대로 선선히 나누어 먹는다.
말하자면 이것들을 친구들의 혀를 빌려서 맛보기를 나는 즐기는 셈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어디선가는 제동을 걸어야만 한다.
사람이 리어왕처럼 '이것 저것 다 주어버릴 수는'(셰익스피어의 '리어왕(king lear)', 2 막 4장 246 행 '그대에게 모든 것을 다주었다.'에서 인용) 없는 것이다.
나의 경우는 돼지구이에서 그 제동이 걸릴 것이다. 내 개인의 입맛에 각별히 알맛게 운명지어졌다고 할 수 있다. 축복을 우정이니 뭐니 하는 구실을 붙여 경솔하게 집 밖으로 내보낸다는 것은 모든 진미를 하사해 주신 신에 대한 배은으로 생각되기도 하고 또 불감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나는 학교에 다니던 시절에 일종의 그와 비슷한 양심의 가책을 느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나이 지긋하시고 선량하셨던 내 숙모님께서는 내가 휴일이 끝나 작별 인사를 드릴 때에는 언제나 호주머니에 초콜릿 과자나 그 외의 맛좋은 것들을 채워넣어 주시고서야 나를 보내 주시곤 하셨다.
어느 날 저녁에는 오븐에서 갓 구워내어 김이 무럭무럭 나는 건포도를 넣은 과자를 주셨었다. 이것을 가지고 런던브릿지 건너에 있는 학교로 가는 중에 백발이 성성한 늙은 거지 한 사람이 내게 절을 하며 구걸을 했었다(지금 생각하니 그가 거짓으로 내게 절을 하며 구걸을 했음이 분명하다).
나는 그를 위로할 돈이 없었고, 이타라는 허영심, 어린 학생들이 흔히 그러하듯 자선심을 베풀어보겠다는 허세가 동하여 그대로 지나칠 수가 없어서 그만 그 과자를 그에게 모두 주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사뭇 흐뭇한 자기 만족감에 젖어, 이런 경우 누구나 흔히 그러하듯이, 들뜬 기분으로 얼마 동안을 걸어갔었다.
그러나 다리를 다 건너기도 전에 나는 좀 제 정신을 차렸고, 선량한 내 아주머니께 배은망덕한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 갑자기 눈물이 났었다.
그 훌륭한 선물을 한 번도 본 일이 없고 더욱이 악당일지도 모르는 거지에게 몽땅 내주어버리다니!
그녀는 자기가 준 선물을 다른 사람이 아니고 내가 먹는 것을 상상하시며 얼마나 기뻐하셨을 것인가? 다음에 뵐 때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하나? 그 좋은 선물을 그렇게 없애 버리다니 내가 얼마나 무모한 녀석인가!
게다가 그 향기로운 과자 냄새가 떠오르고, 아주머니가 과자를 만드시는 광경을 지켜보며 느꼈던 즐거움과 호기심이며 과자를 오븐에 넣으시며 기뻐하시던 아주머니의 모습, 그런 과자를 결국 한 점도 내 입에 넣지 않았으니 이를 아시고 실망하시는 모습이 눈에 떠올라 나는 나의 주제넘은 자선정신, 격에 맞지 않는 위선을 책하지 않을 수 없었고, 더욱이는 그 음흉하고 아무짝에도 못쓸 노회한 사기꾼을 두 번 다시 만날까 싶었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 여린 새끼돼지를 잡는 방법에서도 퍽 괴팍스러웠다.
없어져버린 낡은 풍습에 괸한 아야기는 어느 것이건 다소 충격적이듯이 돼지를 몽둥이질로 잡는다는 이야기도 좀은 놀라운 것이다.
몽둥이질로 단련을 하는 시대는 사라졌지만, 어린 돼지처럼 본래 연하고 맛좋은 고기에 이 방법이 어떤 효과를 지닐 수 있는가(오직 철학적인 견지에서) 탐구해 보는 것은 흥미있을지도 모르겠다.
이건 오랑캐꽃에 향수를 뿌리는 격이다.(refine violet: 셰익스피어의 '존 왕(king john)', IV, 2, 11: "to gild refine gold, to throw a perfume on the violet,"에서 줄여 인용)
하지만 우리가 그 비정함을 책한다 하더라도 그 실용적인 슬기는 함부로 비난할 일이 아니다. 그것이 어떤 맛을 추가해주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성 오메르 학교(st. Omers: 프랑스 카레 동남부에 있는 예수회 학교(jesuit college). 램이 이 학교에 다녔던 적은 없음)에 있을 때 젊은 학생들 간에 토론이 벌어졌던 논제가 생각난다.
"몽둥이질로 죽임을 당한 돼지의 맛이 사람의 미각에 강렬한 기쁨을 주고, 또 그 기쁨이 그 동물이 당하는 수난을 사람이 생각하며 느낄 수도 있는 괴로움을 능가한다 치더라도 그와 같은 방법으로 돼지를 죽이는 것이 옳은가?" 하는 토론이었다. 찬반 양쪽에서 온겆 지식과 익살이 동원되었던 것인데 그때의 결론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돼지를 요리하는 데에는 양념도 고려되어야 한다. 약간의 빵 부스러기에 돼지의 간과 골을 바싹 굽고, 약간의 연한 샐비어를 곁들이면 그만이다.
하지만 친애하는 쿡(cook: 요리사란 뜻을 지닌 고유명사) 부인, 제발 양파 족속은 모두 추방해 주시라.
당신의 입맛에 맞는다면야 돼지를 있는대로 몽땅 구어라. 골파 속에 푹 파묻고, 냄새 독하고 고약한 마늘을 가득 채워라.
하지만 어린 돼지에 독을 드리거나 원래의 맛보다 진하게 하지 말고, 그는 여린 짐승이요, 오묘한 향기를 풍기는 하나의 꽃이라는 점을 유념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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