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63 1987. 4. 1 (수)
새벽 기도.
나의 성격적 결함- 급한 성격, 곧잘 들뜨는 마음, 술마시기등 쾌락적 유혹에 약함, J에 대한 이기심 발호등.
주님 이것들을 고처 주소서. 주님의 품성을 닮지 못한 모난 것들을 깎아 주시어 주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성품을 가지고 인생길을 걸어가도록 도와 주소서.
J를 속히 주님의 품 속으로 불러 주소서.
그리하여 우리 가정이 화목과 평화 속에 믿음의 소망을 가지고 사는 곳으로 변하게 하소서.
어머니의 진실한 신앙의 기쁨과 내세의 굳은 소망을 가지고 순간순간의 일상을 기쁘게 하소서.
캐서린 마샬 '나는 하나님을 보았다.(Meeting God At Every Turn)'
"하나님은 우리가 이성과 감정과 의지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당신이 무력감에 사로잡힌 그 순간부터 하나님은 들어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남과 사귀며 살아가도록 만드셨다. 고독 속에서 지내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는 아니다."
"남편과 아내는 각각 다른 인간이다. 부모와 자식도 각각 독립된 인간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각각 다른 모습으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가정은 완숙한 인간을 만들기 위한 교실'이라고 생각하고 계신다."
<밤>
궂은 날씨.
일요일 녹음해 놓았던 CBS의 이문영교수 강의 듣는다.
강의 제목은 '대학과 사회'
"민족,민주,평등,평화,다시 수정된 민주주의- 이런 것이 이른바 시대정신의 순환이라면 현금의 한국에 있어서의 시대정신은 민주주의일 것이다. 민족자결없는 민주주의가 무의미한 것 처럼 민주주의없는 평등,평화 역시 무의미하다. 미국의 경우 워싱턴에의해 민족주의, 곧 독립이 구현되었고 링컨에 의하여 민주주의, 루즈벨트에 의하여 부의 공정한 분배, 곧 복지주의 평등이 구현되고, 케네디 카터등의 평화주의가 때로 나타났지만 대부분의 지도자는 평화주의를 구현하지 못하고 있다고 볼수 있다.
모든 것이 안보제일주의에 의한 군비경쟁으로 미,소 양대블록의 긴장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데땅뜨는 정략일 뿐이다.
한국에 있어서- 정치 정당성을 확보치 못한 지도자는 항용 민족을 표방하고 국가주의를 표방한다. 선진조국,민족중흥등 민족,국가개념을 정권개념으로 도치시킨다. 또는 역사적 윤리의 측면을 강조한다. 미래를 강조하며 은근히 현실에서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민주주의를 안보보다 하위개념으로 종속시킨다. 이런 통치자의 오류가 현정권의 실체라면 국민들의 비민주적 발상 역시 문제이다. 이를테면 민주주의가 전제되지 않은 민족통일론, 민주적기반없는 경제적 배분요구, 우방을 도외시한 독자적 평화주의등. 혁명가는 원칙에 뿌리를 두고 있으므로 이해관계에 흔들리지 않지만 반항아는 이해관계에 흔들린다. 이래서 현금 시대 상황에서의 지식인의 품격은 혁명가의 품격이어야 한다. 먼저 수신후 평천하하라. 첫째, 중간조정자의 능력이 요구된다. 어느 사회나 극좌,극우,온건좌파,온건우파,중도파는 있게 마련이다. 민주사회에서 정권을 잡는 쪽은 언제나 온건파이거나 중도파이다. 그런데 이 3파의 조정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곧 극단과의 합의에서 도출된 약속의 창출능력이 필요하다.
둘째, 비폭력의 믿음이 요구된다. 문자적 의미에 있어서의 비폭력 뿐 아니라 어떤 억압 속에서도 비폭력으로 말할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셋째, 독재자에 의해 억압받는 편에 설 수 있는 덕목을 지녀야 한다. 즉 사회적인 윤리의식에 투철해야 한다.
넷째, 이웃을 사랑하는 덕을 지녀야 한다. 기독교의 윤리는 현시대가 요구하는 가장 훌륭한 덕목이다. 기독교인의 궁극적인 목적은 물질이 아니며 지상의 행복이 아니기 때문에 유물론적 사상과는 근본적으로 배치되어서 교조적 공산주의를 선택할수 없다. 또한 이웃을 사랑하라는 제1의 계율로서 독재자를 결코 사랑할수 없는 것이다. 자기를 희생하여 이웃을 사랑하는 덕목이 꼭 필요하다.
현시대, 과격한 진보세력이 존재하는 입장은 이해할수 있으나 현시점에서 전술전략적인 과격한 몸짓의 체제거부는 오히려 저들을 더욱 유리하게 할 뿐이다. 현금은 너무 과격한 몸짓을 요구하지 않는다."
유신때부터 줄곧 저항의 몸짓을 멈추지 않고 숱하게 옥살이 했던 이문영씨.
이러한 그의 중도적입장이 지금 저 거센 물결속에서 어떻게 먹혀 들것인지, 혹 그의 정신은 오손되었는가?
S형 누나 J온 이가 설악산 수학여행 선물로 사다 준 산머루엑기스, 소주에 타 마시니 너무 좋구나.
英의 반항 몸짓, 사춘기-
14664 1987. 4. 2 (목)
새벽기도.
S형 어머니가 J와 신실한 믿음의 동지가 되었으면. 英이 부모를 향한 반항의 몸짓이 그저 사춘기의 통과의례에 지나지 않기를, J의 온유한과 고상함으로 이 가정이 지배되기를..
캐서린 마셜.
"모든 것 속에 하나님이 계시다라는 구절을 읽으니 왈칵 화가 치밀어 올랐다. 세 살짜리 아기가 도로로 아장아장 걸어 나와 트럭에 치어 죽었다. 그 죽음 속에 어째서 하나님이 계시단 말인가? 나는 자신에게 계속 질문을 던졌다. 전쟁 속에 하나님이 계신가? 불치의 암 가운데 하나님이 계신가? 내 마음 속에서 울려 나온 대답은 아니야 절대 그런 곳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아!였다. 목사는 이와 같은 슬픈 일을 당한 사람에게 '이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하고 야박스런 성경구절을 인용하여 '주께서 주셨던 것 주께서 도로 가저 가시니 다만 주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고 말한다. 이런 순종은 잘못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그러나 한나 스미스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부딪친 악에 대한 하나님의 근본적인 대답이 있다. 구약과 신약 속에 몇차례나 되풀이 말하고 있는 그 경고, 그 대담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어떤 일에서든지 감사하라.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이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입니다하고 한나 스미스는 강조했다. '어떤 처지- 즉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말입니다' 한나는 우리들이 세상 모든 만사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어떤 만족도 알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당신은 자기연민에 빠져 있어요. 캐서린. 자기연민(상처입은 프라이드인지도 모른다)에 빠져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한다는 것은 당신과 하나님의 사이를 가로 막는 겁니다. 만일 지금 당신이 다만 자신의 자기연민과 하나님에 대한 반항을 시인하면 하나님은 어두운 구름을 제거해 주실거야. 나는 그것을 확실히 알고 있어요.'
'주여 나는 당신을 이해하기보다는 지금 여기 이렇게 있고 싶어 합니다. 나는 당신을 원하고 있습니다' '때로 우리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높은 곳으로 눈을 향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기다려야 한다. 우리 세속적인 인간들이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여태까지의 인생을 되돌아 보는 이때 나는 이 말만은 분명히 할수 있다. '나는 하나님을 만났다'고.
나 역시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 내 인생에 섭리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수 있을까?
<밤>
회사의 일상중 뒷골을 지근거리는 고통, 어제 밤 은빛 수면 탓이다.
그리고 한없이 빠져드는 이상스런 무력감.
이 무력감이 근거하고 있는 내 내면의 현실은 어떨까?
아마 그것은 고독감일 것이다. 스스로 쌓아놓은 성에 갇혀 타인의 접근을 혐오하는 기피의식 같은...
나는 인생의 진실을 너무 모르고 있음을 시인해야 한다.
부딪치며 싸우고 울고 웃는 삶 자체의 진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부정할수 없다.
피상적으로 현실을 몽상하는 어릿광대. 저자거리의 욕지거리, 왁자한 싸움의 의미를 너는 안다고 생각하는가? 어릿광대.
몽상가여. 무기력하게 자기연민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개구리여.
자가당착속에 잠겨 마스터베이션에 함몰되는 어리석은 시인이여.
살아서, 이 세상의 아름답고 추한 것들을 튼튼하고 뚜렷하게 사랑하고 싶지 않은 미이라된 수도승이여.
상헌이 너 벌레여.
네가 신의 사랑을 빙자하여 네 성속에서만 박혀 사랑을 감히 운위할수 있는가?
나아가라. 너의 성에서, 그 칩거하는 곳으로부터 나아가라.
회사에 부딪처 싸우라. 어머니에 부딪처 피를 흘려라. J에게 부딪처 싸우라. 英이, 俊이에게 부딪처 싸우라. 모든 것에 부딪처 투쟁하라.
그리하여 피흘리고 상처받은 연후에 사랑과 신뢰라는 것을 터득하라.
기독교는 운명론자의 장난감이 아니다.
아 하나님.
내게 처절함을 주소서.
이 밤, 기도는 나를 구원하지 못한다.
14665 1987. 4. 3 (금)
나는 조울증 환자. 그것도 굉장한 중증일 것.
어제는 그토록 암울하더니 오늘은 또 이토록 환한 기분이다.
엇 저녁의 숙면? J의 사근사근한 언행? 회사에서 P이사와의 조근조근한 대화? 날씨 탓?
바이오 리듬- 사람에게는 주기적인 기분의 사이클이 있다던데 사실인 것 같다.
여자의 월경처럼 내게는 어떤 사이클이 작용하는 겔까?
또는 건강문제일까? 항문으로 피가 쏟아지는 그것이 심장을 통해서 모세혈돤을 통해서 척추를 자극하여 작은 골에 어떤 영향을 행사하는 것일까?
나는 나란 의사에 의한 임상실험의 대상, 모르모트가 되야 한다.
이토록 훌륭한 진화 원숭이로서의 교재가 어디 있을까?
통계적으로 기분의 주기를 분석하여 원인을 밝혀낸다?
Tokyo Keiki 제품의 Thickness Gauge 구입하다. 비공식적으로.
1981년도 수입면장 첨부된 첨단제품- 일반 철강뿐 아니라 알미늄,황동,스테인레스,구리,아크릴까지 측정 가능, 종합해사(주)의 김정효부장으로부터 구입. 이런 것도 회사에 대한 기여가 아닌가?
술마시다. 술마시기는 나를 역시 고양시킨다.
요즘 읽고 있는 책. 하나하나 끝마치자.
-요네가와 마사오 '도스토예브스키 연구'
-줄리앙 골드만 '계몽사상의 철학'
-김광식 '기독교 사상'
-로망 롤랑 '톨스토이'
14666 1987. 4. 4 (토)
화창한 봄날.
그러나 이 나라는 온화하지 않다.
독선과 저항- 참된 지성들은 숨이 막힌다.
그렇지만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봄'은 얼마나 행복한가.
'살아있은 힘의 동결. 살아있은 민중의 거센 힘의 동결.
전진하는 싸움의 동결. 빛나는 근육의 파도와 쏟아저 흐르는 땀의 눈부심과 외침과 쇳소리들의 동결.
뜨거운 대낮의 햇빛 아래서의 동결.표정과 노여움과 용기의 사랑의 동결.不在, 꽉찬. 不在.그러나 동결은 나이를 먹는다.기마상에 금이 가듯이 동결은 늙어 어린이처럼 부드러워진다.다시금 움직이려 한다.굳게 다문 입술에 미소가 번진다.육체의 이 살아있는 육체의 기쁨이 샘 솟는다.소리가 시작되려고 한다. 말은 울려고 한다.발굽이 움직인다. 말갈기가 움직인다.아아 그러나 햇빛 탓인가. 더욱 강렬한 저 햇빛 탓인가.훈훈한 4월의 바람 탓인가? 착각이었던가?'
-김지하 '기마상'-
14667 1987. 4. 5 (일)
J의 독기에 쏘이면 견뎌 낼 도리가 없다.
자기계발, 자기교정, 품성에 대한 각성 이런 마음가짐은 전혀 없이 그저 소리 칠 뿐이다.
엎치락 뒷치락- 진흙 밭에 뒹굴면서 서로의 얼굴에 흙탕칠하기 시합이다. 개싸움이다.
좀 상승하여 맑은 대기를 마셨다가도 그 독기를 쐬이면 여지없이 곤두박질하여 똥물 속에 허위적거리는 것이다.
자기모멸, 자기혐오.
생활한다는게 무어냐고 묻는다면?
낭비다. 마모다.
누가 나를 똥으로 취급하면 나는 똥이 될뿐이다.
英아, 俊아. 그런데 아빠는 똥이 아니란다.
14668 1987. 4. 6 (월)
H철네 고모부 돌아가셨다.
그제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뜨시다.
H철이도 귀국하고, 장지는 창원.
낮에 장지에 가려하나 주소를 알길이 없단다.
삼오제가 모레, 그 때 가기로 한다.
죽음- 내 주위 친척들의 죽음.
고모부는 어떻게 운명하셨을까? 자신의 생애에 대하여 만족하게, 최선의 죽음을 맞이하셨을까.
그 분 역시 물질주의자, 이를테면 속물이셨을 것.
내 친척들중 유물론자 아닌자 있는가. 속물 아닌 사람 뉘 있을까? 배금주의자들, 현실론자들. 예술가류라고 하여 속물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외척을 포함하여 그 많은 친척들의 숫자들중 정신적인 장르에 종사하는 사람들, 하다 못해 단역배우, 삼류 유행가수 하나라도 나온 적이 있는가.모두 유물론자들의 잔치판...어쨌거나 고모부, 무척 잘 생기셨던 고모부 돌아 가시다.
돌아가실적 고모부는 진짜로 돌아가신 것읻. 이것은 아무도 모른다. 고무부의 실존을 뉘라서 알까.
주검을 보는 자들. 머리를 숙여라...
온종일 내리는 비.
어제 숙직이지만 늦은 밤 집으로 도망처 와서 집에서 자다.
J, 이전투구는 오늘 다소 상냥해젔는가...
며칠간 경건을 잃고 있다.
그러나 주님의 역사는 실존적으로 느끼고 있다.
주님께 아부하지 말라.
14669 1987. 4. 7 (화)
요네가와 마사오(米川正夫)의 '도스토예프스키 연구'
도스토예프스키- 한쪽 무릎에 두 손을 깍지지고 앉아서 무슨 생각에 잠겨있는 초상화, 19세기 러시아 화가 페로프가 그린 그의 모습이다.
잘생긴 것과는 거리가 멀고 풍모도 초라하다.
발자끄, 푸시킨, 고골리의 숭배 과정- 19세기 러시아의 서구파와 슬라브파의 갈등- 그의 토지주의-철저한 민족주의자-당시의 보수파.
그의 소설 속에 흐르는 심리적인 묘사의 신선함은 혁명이었고...
성격적으로 도스토예프스키는 나와 비슷한 점이 많은 것 같다.
특히 '감동하기 쉬운 성격'은.
시베리아 유형선고를 받고 형에게 쓴 편지.
"형님, 저는 투덜거리지도 않으려니와 낙심도 하지 않습니다. 생활, 생활이란 어디를 가나 있는 것입니다. 생활은 우리 자신 속에 있는 것이며 우리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사람들 사이의 인간이어야 하며 영원히 인간으로서 남고 어떠한 불행에 빠지더라도 기가 죽거나 낙심하거나 하지 않을 것, 이것이 생활인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이념은 저의 피가 되고 살이 될것입니다."
"저는 오늘 죽음의 직전에 정다운 사람들과 작별을 고하면서 그것을 맛보았습니다. 노여움도 증오도 없는 것을 말입니다. 과거를 돌아보아 얼마나 시간이 낭비되고, 미망과 과실과 안일과 무능한 생활상 가운데 지나갔는가. 자기가 얼마나 시간을 귀히 여길줄 몰랐나, 몇번이나 자신의 심정과 정신에 어그러지는 짓을 했을까. 그런 것을 생각하니 스스로 심장에 피가 배어나는 것 같았습니다.
이제 생활을 일변함에 있어서 저는 새로운 모습으로 되살아 나가겠습니다. 형님! 맹세코 저는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자신의 정신과 심정을 순수하게 보전하겠습니다. 저는 좋은 방향으로 갱생합니다. 이것이 저의 희망의 전부이며 저의 위안의 모두입니다."
그가 감옥으로 가기 직전 그에게 성경을 선물했던 폰비지나 부인에게 쓴 편지.
"부인께서는 아주 종교심이 깊어 뵙니다. 그것은 부인이 종교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제 자신이 그것을 체험하고 그것을 통감했으니까 감히 말씀드리는 것입니다만, 그러한 순간에는 '시들어 가는 잎'처럼 신앙을 갈망하고, 또 그것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즉 불행 속에서만 진리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저는 세기 의 아들입니다. 오늘날까지, 아니 관 뚜껑이 덮일때까지 불신과 회의의 자식입니다. 이 불신과 회의는 신앙에 대한 갈망이고 그것은 얼마나 무서운 고민에 값했던 것인지, 또 현실로 지금 값하고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그렇기는 하나 하나님은 떄떄로 완전히 평안한 순간을 내려 주시기도 합니다. 그럴 때 저는 자신의 내부에 신앙의 심볼을 쌓아 올리는 것입니다만 거기서는 일체의 것이 저로서는 명료하고도 신성합니다. 이 심볼은 극히 간단한 것인데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보다도 더 아름답고, 깊고 인정이 있으며, 이성적이고, 씩씩하고 완벽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만약 누가 저를 보고 '예수는 진리 밖에 있다. 진짜 진리는 예수 밖에 있다'하더라도 저는 오히려 진리보다는 예수와 함께 있기를 원할 것입니다."
믿음과 불신, 겸양과 반역, 이 양극 사이를 쉴새없이 동요했던 그는 유형중에 깊은 자기 침잠에 의해서, 그 모순 자체를 무기로 삼아 심각한 변증법을 터득하였다.
인생을 보는 눈이 달라진 것이다.
또한 그는 아름다움은 존재의 궁극적인 목적이며, 어떠한 실제적인 이익보다도 유익하다는 이념으로 '아름다움은 세계를 구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첫 아내가 죽었을 때의 메모.
"예수처럼 남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기는 불가능한 것이다. 지상에 있어서의 개성의 법칙이 제어하여 '나'가 방해한다. 다만 예수만이 그것을 할수 있었다. 예수는 영원에서 영원으로 전하는 이상이다. 사람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 그를 향해 노력할 뿐이며 또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개성의 최고의 발달은 인간이 스스로의 '나'를 죽이고 그것을 완전히 평등하게, 무제한으로, 만인에게 바칠수 있을때까지 도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 최대의 행복이다. 그것이야 말로 곧 예수의 낙원이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은 지상에서, 그 자연성에 반하는 이상을 향하여 정진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이상으로 향하는 정진의 법칙을 이행하지 않았다면 (나와 마샤) 인간은 고통을 느끼고 그 상태를 죄라고 이름지었을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도박에 미치기도 했다.
도박- 그 천함, 그 공포, 그 감미로운 고통, 막다른 골목까지 쫒긴듯한 감각, 운명과의 투쟁, 파멸에 대한 예감 이런 것들은 그의 천성과도 닮은 점이 많다.
"무엇보다도 나쁜 것은 나의 성질이 비천하고 너무나도 격하기 쉬운 점입니다. 어디를 가나 무엇을 하나 마지막 한계점까지 끌고 가다가 언제나 최후의 일선을 넘겨버리고 맙니다."
간질의 발작, 경제적인 고통.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의 말년은 영광이었다. 푸시킨 축제 때의 영웅, 그 6개월후 그가 죽었을 때 그의 죽음에 대한 각계의 장엄한 반응들-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나쁜 점에 있어서 참으로 그를 닮았다.
14670 1987. 4. 8 (수)
'어린 아이와 같은 단순함을 주소서"
이러한 간구의 의미를 묵상한다.
무애무구- 어린아이의 믿음은 거짓없이 순수하다. 그저 엄마의 젖을 갈망하듯이 온 존재를 다하여 신앙할 뿐이다. 자신의 모든 사고와 이성과 상상력과 자각을 기울여 신앙할수 있는게 어린아이다.
마태복음 18장의 말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하신 말씀은 이런 의미일 것이다.
어른의 신앙을 생각하여 보자. 그는 성장한 어린 아이이다. 그 자라는 동안 그는 자각을 배운다. 자신의 실존적인 고독을 끊임없이 자각하는 것이다. 그러함으로 그는 이성을 발전시켜 무언가 자기합리화를 꾀하여 그가 믿는 지혜를 습득해 나간다. 그것은 이기주의로의 과정이다. 지혜를 얻음으로 논리를 배운다. 개체인 자신의 존재의미를 인식하기 위하여 합리적인 것이 아니면 도무지 믿을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어느 때 초현실적인 은혜에 의하여 신앙을 갖게 되더라도 그는 끊임없이 갈등한다. 그는 이미 논리로서 설명할수 없는 종교적인 체험을 한다. 그래서 신앙을 부정할 수는 도저히 없게 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경의 모든 말씀을 감성과 이성과 상상력을 합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존재를 다하여 신앙할수도 또한 없다.
여기서 종교적인 의지가 생겨날 것이다.
믿어야 한다. 믿어야 한다. 종교적 체험만을 인식하고 믿어야 한다.
자기최면과도 같은 그 의지에 의하여 그는 신앙인이 되어가지만 갈등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 종교적 의지를 날로 강화하여 자기최면에 성공하라는 말씀이고 한 '어린 아이와 같은 단순함을 주소서'라는 간구 속에는 처절한 애원의 간구함이 있다.
그것은 '주님 나는 내가 배워 왔던 지식과 배워왔던 생존에 대한 지혜와 나의 상상력등 세속적인 이성은 주님의 말씀을 믿는 것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나는 분명히 모든 말씀이 진리임을 알고 있는데 또한 이 방해하는 악마의 속삭임을 완전히 떨처 버릴수가 없습니다. 나의 영혼은 당신을 신앙하며 그 신앙의 진실됨을 조금도 의심치 않습니다. 내게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함을 주시어 이 악마와의 갈등을 없이하여 주소서. 그리하여 온전하게 기쁘게 행복하게 주님을 신앙하게 하소서.'하고 부르짖는 것이 아닐까?
결국 자신의 의지와 그 분의 능력으로서 신앙하는 것.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뇨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며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막 6장-
이 말씀에서 느껴지는 것.
익히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도 실은 전혀 모른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직 그 사람의 현상적인 것일 뿐이다. 차라리 그를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이 그의 진면목을 바로 꿰뚫어 볼수 있다. 그 안다고 하는 그것이 오히려 진실을 오도케 할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선입견이 심안을 방해한다.
예수는 자신의 고향에서 자신의 진면목에 눈이 어두운 고향사람들에게 왜 아무 권능을 행하시지 않았을까?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이신 성자께서도 도무지 어찌할수 없었을까? 오직 믿음의 대상이 되셨을 때만 그 능력이 계시는 걸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믿음이 없는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의 권능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마 그것은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는 말씀에 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And He Marveled Because Of Their Unbelief." 어떨 떄는 영문의 신약이 그 구절이 더 분명하다.
왜 이상히 여기셨을까? 앞서 말씀에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존경받지 못한다고 긍정까지 하셨으면서.
아무 생각없이 들추어 낸 한 구절의 성경 말씀도 이토록 미묘하거늘 어찌 한편의 드라마로서 성경을 이해할수 있을까?
어느 무신론자, (무신론자란 대부분 궁구하여 확신한 무신론자가 아니라 신에 대하여 한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가 성서에 대하여 말하기를 '한편의 장엄한 비극, 또는 기승전결이 있어 참 일목요연한 책으로서 참 감동적이다.'라고 말한다면 글쎄, 유구무언일뿐 무슨 할말이 있으랴. 과거 내가 그러하였으니까.
에밀 브루너 '종교철학'
쉽게 덤볐다가 큰 코떼다.
나같은 수준이 쉽게 덤빌 책이 아니다.
14671 1987. 4. 9 (목)
새벽 기도.
'내가 간구하는 중보의 기도가 그들에게 알게 하소서'라는 마음의 속삭임이 듣긴다.
상헌이란 사람이 나를 위해 기도하여 주었구나하고 고맙게 생각했으면 하는 외식하는 마음이다. 기도중에도 쑈를 부리다니, 나의 위선은 가히 이 정도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하는 말씀. 내면의 기도... 결코 바리새인처럼 외식하는 기도가 되어서는 아니된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는다. 이것은 횡적인 모든 Communication, 횡적으로 작용되는 허영과 꾸밈의 단절을 의미한다.
오로지 종적인 Communication만이 존재할 뿐이다.
어린 아이와 같은 단순함이 여기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기도는 전능하신 주님을 믿고 그 능력의 행하심을 간구하는 것이지만, 그 행하심이 나의 뜻이 아니고 주님의 뜻이기를 또한 비는 것이지만, 나의 뜻이라는 걸 완전히 무시해 버릴수 있을까?
자기만족, 최선을 다 하였다는 어떤 충일감의 기쁨... 조금쯤의 불순함이 있더라도 이를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즉, 살아계신 하나님의 현실적인 역사, 곧 인간의 일상으로서 최선을 다하게 하여 주신 주님께 감사하고 그 시점에서 주님께 간구하여, 그 뜻에 맡기는, 그런 간구 후의 자기만족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나의 기도에 대한 문제는 그런 최선후의 간구로서의 자기만족이 아니고, 일종의 고백, 뱉어 냄만의 행위에서 얻어지는 자기 만족이니 탈이다.
한 인간,가장,남편,아비,아들,조직인으로서 최선을 다하고 나서의 기도에서 얻는 자기만족이어야 한다.
이것은 곧 生의 빛나는 긍정을 의미한다.
그 생을 사랑하여야만 최선이 있은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기도는 이런 것이어야 한다.
세상을 가치있게 여기도록 하소서. 세상을 두려워 말게 하소서. 세상을 사랑하게 하소서. 나로 하여금 주님의 말씀 속에 살게 하듯이 이 세상에서도 살게 하소서.
<밤>
창세기 를 묵상한다.
창세기 1장.
이 숨가쁜 천지창조의 역사.
아마 종교적인 입자이라는 것은 이 창세기 1장으로부터 성서를 대하는, 나아가서 기독교를 대하는 입장과 태도가 결정될 것이다.
성서를 해석하는 네가지 입장이라는 것, 이른바 신앙적인 해석, 합리적인 해석, 역사적인 해석, 실존적 해석이 있다고 하고 이 방법론은 주로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사인 신약에 적용한다지만 근본적인 입장에서는 구약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신앙적 해석의 입장- 축자영감설, 무오설로서 완벽한 하나님의 계시이므로 한자 한획이 틀림없어야 할터인데 타당하게 받아들일수 있는 현대인으로서의 신앙인은 드물 것이다.
빛은 무엇이고 해와 달과 별이 의미하는 광명은 무엇이고, 지구는 광대한 우주의 파편일뿐이라는 지구의 왜소함이 실증적으로 증명이 된 이 시대에 어떻게 지구를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어 나가는 이 논리를 긍정할수 있을까?
또 창조의 하루 하루라는 그 거창한 역사의 귀중한 하루가 어떤 날은 새와 물고기의 창조라는 지극히 지엽적인 내용에 그처버리고 만 것 같은 전후 논리의 이상함은? 다스린다라는 의미와 먹을 것이라는 의미의 혼동은? 성서무오설을 주창한 이러한 신앙적 해석은 끝없는 모순과 자가당착속에 헤합리적인 해석의 입장- 이 또한 현대인의 상식과 지식으로는 합리가 끼어들 여지가 없는 것이다.
매일 수밖에 없다.
역사적인 해석의 입장- 이 창세기 가 모세 이후에 쓰여졌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역사적 해석의 입장이란 창세기 의 경우 해당사항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지막 실존적 입장에서 창세기 를 접근해야만 한다는 명제만 남을 뿐이다.
이것은 겨우 걸음마에 불과한 나의 신학적 철학적 사고의 능력으로서는 어떤 논리의 표명은 불가능한 것. 지금의 나로서는 창세기 를 그 기록한 사람의 속뜻을 문맥의 느낌으로서 헤아릴수 밖에는 없다.
가장 기본이 되는 전제는 만물은 어떤 뜻에 의하여 창조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전제는 모든 것에 우선하는 신앙의 원리이다.
어떤 해설서를 읽어보니까 창조와 만들어진다라는 개념은 틀리다고 한다.
즉 만들어 진것에 하나님이 숨을 불어넣어 생명이 있게하는, 곧 생명을 부여하는 그것이 창조라는 것이다.
그것이 태초의 의지, 즉 로고스, 말씀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생물학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생명이라는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사상인 것이다.
아, 이를 명증하게 이해할수 있다면. 나의 온 존재가 희열로서 혹은 두려움으로서 창세기 1장을 완벽하게 받아들일수 있다면.
14672 1987. 4. 10 (금)
신기하고 이상스런 꿈의 세계.
간밤의 꿈은 더욱 이상하다.
시골의 어는 가정을 방문, 회사의 누구 집인데 유교적 가풍이 가득한 집이다.
귀가 길의바다. 영도의 뒷편의 바위비탈의 해변, 바다가 소용돌이 치며 강처럼 흐른다. '이곳은 환락과 번화의 도시 영도입니다'라고 쓰여진 팻말, 높게 바라뵈는 고갈산- 성문을 향해 뻗어있은 높고 좁고 구불구불한 바위계단, 많은 사람들이 그 바위산을 넘나들며 성문을 출입하는데, 그곳이 바다에서 육지로 통하는 유일한 관문인 듯. 나는 클레멘타인의 곡에 맞추어 이상한 가사의 노래를 부르며 걷는다. 생생하게 기억하는 그 가사는 왈, "큰 손잡고 비디오 찍고 달을 보러 가리라."
새벽기도.
창세기 2장.
창세기 1장이 장엄한 서주라면 2장은 말하자면 디테일한 창조의 묘사이다.
여기서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나타나고 최초의 인간 아담이라는 이름도 나타난다.
지리적인 묘사와 그 명칭까지도 등장한다.
중요한 또하나의 사실,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오직 흙으로빚은 사람에게만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었다는 것은 외형적인 형상만을 뜻하는 것은 아닐게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그 정신과 또한 그 만드신 객체에게 개성으로서의 Personality를 포괄하고 있을 것이다.
자, 여기서부터 인간의 역사는 시작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생명의 박동에다 자 이제 다이나믹한 너의 삶을 시작하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그 이후의 하나님의 역할은 무엇일까? 관중이셨을까? 심판이셨을까? 코치이셨을까?
육상경기에서의 트랙과 같은 역할이셨을까?
아니면 순전한 자유의지를 임상하는 실험가셨을까?
선악과는 무슨 목적인가? 왜 금지사항을 두신 것일까?
하나님이 만드신 무애무구의 인간 상태라는 것은 어떤 상태였을까?
자아를 버리는 것에서 신앙이 시작되는 것은 아닐것인데..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한다.
"'주여 당신은 만물의 공의로운 통치자이십니다.
당신은 질문자나 피질문자가 알지 못하게 신비로운 영감을 통하여, 당신의 심판의 심오함으로 역사하셔서 각인의 질문시에 영혼의 숨겨진 공과에 따라,그가 들을만한 것을 듣도록 하셨습니다.아무도 당신께 그것이 무엇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라고 물어 볼수 없습니다.그는 질문 해서는 안됩니다.결코, 안됩니다.그는 다만 인간일 뿐입니다."
"갈망하던 마음으로 봉사하던 것을 상실하고 슬퍼하다가 포기하는 일이 있습니다. 당신에게서와 같이 그 마음에도 아무런 손실이 일어나지 않을수 있게 되어야한다고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영혼들이 당신께로 돌아가기만 하면 순전하고 흐리지 않은채로 찾을수 있으련만, 당신을 떠나 당신 밖에서 찾아보려고 애쓰고 헤맵니다. 당신을 피하여 멀리 달아나듯이 gd하는 모든 자들이 사악하게 당신을 모방하고 급기야 당신을 거스려 대역을 도모합니다.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원숭이처럼 당신을 모방하려 할지라도 당신께서 모든 실체있는 것들의 창조주가 되신다는 것과 어떤 사람이라도 전적으로 당신없이 존재해 보려고 할지라도, 그러한 곳은 결국 아무데서도 찾아볼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가 깨닫지는 못하더라도 그 존재의 방식에서 누설하고야 맙니다."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아, 어거스틴이 도달한 거기까지 한번만 가 보았으면, 창세기 를 기쁨으로, 나의 전 존재로서 읽을수 있다면.
내일 새벽.
어린아이의 단순함을 주소서하고 기도해야 한다.
14673 1987. 4. 11 (토)
새벽.
엎드려 기도.
나의 주님께서 내게 주시는 것은 갈등이 아니다.
그것은 무한한 단순함의 부드러움과 평안이다.
지고한 균형감각이다.
자연과 그 자연의 모순과, 인간과 그 인간과의 모순과, 신과 인간의 모순을, 모든 부조리함을 완벽한 긍정으로 포용할수 있는... 지속적이며 완벽한 발란스이다.
이것은 계몽주의적인 오성의 추구함으로 얻을수 있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변증이 획득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오직 저 높은 곳에서 내려 온, 결코 내가 추구하여 도달할수 있은 것이 아니라는 이 깨달음이 가장 중요하다.
영원을 사랑하는 것.
단일회적이며 회복불능한 것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밤>
오래, 불과 나흘정도이지만 술을 마시지 않는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린도전서 13장-
참으로 아름다운 문장, 바울은 시로서 신학을 한다.
바울은 위대한 서정시인이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은사, 즉 방언 신유 예언등의 능력도 결코 사랑이 없으면 아무 뜻이 없다는 말씀.
사랑을 제외한 다른 은사들은 하나님이 그 속에 숨기신 뜻을 지금은 알지 못한다. 하나님의 때가 이르러야 지난날 하나님이 주셨던 은사의 비밀을 알수 있는 것이지만 사랑만은 지금 그곳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금새 파악할수 있는 종류의 은사이다. 이것은 현재에서의 지각할수 있는 은사이며 조건이다. 내세에 대한 기독교인의 조건인 것이다. 사랑은 성숙한 것. 성숙하기를 요구하는 것. 마태복음의 산상수훈과 같이 성숙한 인격만이 영위할수 있은 그 분의 윤리훈이다. 하나님의 질서이다.
이 신새벽, 나는 느낀다.
사랑이라는 것에, 오직 사랑 속에 하나님의 오의가 담겨저 있고 신학적 명제는 이 열쇄로 풀어야 한다.
유물론적인 논증, 과학적인 논증이 아닌 사랑의 논증으로 진리에 도달할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왜 사랑의 질서를 수립하셨는가를.
"프란치스코, 프란치스코. 하나님이 예정하신 질서는 파괴하지 말아요."
14674 1987. 4. 12 (일)
일요일, CBS 강의 듣는다.
C.C.A (아시아 기독교 협의회)의 박상준 목사.
제목은 '아시아 애큐매니칼 운동의 과제'
나로서도 늘 궁금한 것이 교회 종파 문제의 어떤 절대성 여부와 그 의미이다.
내가 알고 있기로는 도그마, 교의, 교리는 서로 차이가 없다. 단지 성찬식, 성례, 성서주의의 입장, 교회 조직의문제등 지엽적인 문제로 교회늬 교파는 무수히 갈린다.
모든 교파의 신앙고백은 동일한데 어째서 분리되어야 하는건지...
창조주이시고 전능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앙한다는 것은 똑 같지 아니한가?
개개 교파의 생성과정, 역사적인 당위성등의 문제를 완전히 거세하고 무조건 교파 분열은 있어서는 안된다하는 것도 좀 무리는 있어보이지만, 각 교파가 절대적인 완고함으로 배타적인 입장을 고집한다는 것은 있을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무교회주의'는 얼마나 순정한 것인가. 원시 기독교 교단이 그러했을 것이고,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 몇이 모이는 곳, 바로 그곳이 진정한 에크레시아의 세계가 아닐까?
박상준 목사의 강연요지.
"아시아의 기독교는 지배자의 종교로서 도입되었다. 자본주의의 형성과정에서 제국주의의 식민 정책의 한 도구로서 기독교는 아시아에 상륙하였다. 15세기 , 세계를 이등분하여 스페인과 폴투갈은 교황의 조정에 의해 나누어 먹은 것이고, 그 후 18세기 에는 영국 네델란드등의 신교 국가가 가톨릭과의 투쟁을 통해서 아시아에 프로테스탄티즘은 상륙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아시아에서의 기독교는 지배자의 종교, 통치자의 종교의 내용으로 성립한 것이다. 선교사, 선교회등 모든 것이 제국주의에 의하여 결정되었고, 그것이 지상의 교리로서 선포 시행되고, 혹은 예수님까지도 그렇게 이해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2차대전후 아시아는 독립하였고 이제 민족의 진정한 실존에 부딪친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는 자신들을 지배 억압하였던 지배자의 종교로서 배척을 받던지 아니면 민중의 종교로서 존재하던지 하는 숙명에 봉착한 것이다. 그런데 현재 아시아의 인구는 세계의 1/3, 그 중 기독교인은 3% 미만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3%가 세께 기독교인의 거의 50%에 육박하고 있는 것이다. ........
아시아의 애큐매니칼 운동이 자각해야 할 문제.
첫째, 교회론이다. 아시아 제 종파의 기독교는 칼빈, 쯔빙글리, 루터, 웨슬리등의 변형없는 이식이다. 이것은 서구에 있어서 역사적, 의식발전적인 필연적으로 대두된 종파였다면 이의 변형없이 이식된 아시아는 나름대로의 역사적, 발전적인 당위에의하여 아시아적 장로교,성결교호;,감리교,성공회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舶來된 선교사의 종교가 아닌 우리 민중의 교회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아시아에서는 진정한 종파개념은 없고 교회자체가 없는 것이다.
둘째, 기독론의 문제다.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지 않으면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수 없다는 독선적, 배타적인 면을 갖고 있으며 또한 구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에 이르리라하는 무한대로 확대된 은총과 약속의 정신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타종교나 무신자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문제이다. 민주화나 내일의 이상적인 사회의 건설이 어찌 기독교인들만의 특권적 소명의식일수 있는가? 민주화를 향한 독선적 소명의식에 의한 폭력적 접근은 기독교정신에 위배된다. 마태복음의 '사람들은 나를 무어라 하느냐?'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명백한 내적의미를 상기하라. 이 시대에 기독교인은 독백하여서는 안되고, 교육하려 해서도 안되고, 다만 함께 얘기하고 귀기울이면서 상호 애정을 갖고 나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셋째, 정치적인 환상의 문제다. 2차 대전후 민족의 주권은 찾았다지만 또다시 동족간의 군사적지배나 절대권력적인 형태의 개인 주권 상실 시대의 도래로 인하여 진정한 인권 평등 평화에의 꿈이 잉태되었다. 또한 새로운 의미의 식민지, 선진자본의 횡포의 심각함은 모든 아시아 제3국의 위기이다. 자, 여기서 우리의 신앙고백, 또는 묵시록의 하나님의 정의가 다스리는 사회에 대한 갈망은 어찌하는가? 우리의 그러한 갈망은 과연 어떻게 이러한 현실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이와 같은 아시아의 현실에서 교파 분열의 문제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내세주의,성서 생활주의, 신비주의, 펜테코스트를 다시 점검하자."
애큐매니칼의 본질적인 문제를 한참 벗어나고 있지만 박상준 목사의 지적에는 신랄한 바가 있다.
지금 이 시대 한사람의 기독교인은 어디에 서야 하는가?
14675 1987. 4. 13 (월)
대통령 중대 발표.
그것은 호헌하겠다고.
다시 민중은 벌떼처럼 일어날 것이다.
국민을 우롱하는 집권층. 아무리 사심없는 척, 성실한 척 낮고 엄숙한 목소리로 지껄여 봤자 믿을줄 아느냐?
아무리 거짓언어에 길들여저 언어의 불감증에 걸려있는 우중일지라도.
집권층은 뭔가 커다란 열등감에 사로 잡혀 있던지 무슨 커다란 죄의식에 신음하고 있는건지도 모른다.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통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국 소리 호르락 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 소리
신음 소리 통곡 소리 탄식 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김지하 '타는 목마름으로'-
14676 1987. 4. 14 (화)
새벽기도.
오늘 기도는 자꾸 공허한 의례문의 나열이 되곤 한다.
하나님과 대화한다는 감동을 수반하지 않은 건조한 기도.
왜 그럴까?
시종여일하게 하나님을 향한 절절한 그리움으로 일관하기에는 나는 너무나 속물인 까닭이다.
신앙인으로서 나는 너무나 속물이다.
너무나 프란치스코와는 배리되는 영혼이다.
교회의 필요성.
실제적으로 나를 인도하고 지도하고 고무시킬 교회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의식있는 개인으로서의 신앙이 유지되는 무교회주의의 에크레시아, 이에 대한 연모의 정은 애틋하게 아름다운 것이지만 말이다.
그것은 나처럼 속되고 약한 인간에게는 무리한 연모일 것이다.
때로 CBS에서 듣는 목사님의 설교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아닌 자신의 세속적인 느낌을 얘기하는 것으로 들릴지라도, 그러면서도 그 근거를 기가 막히게도 성경에서 제시하고 있다고 느낄지라도. 교회의 맘몬化가 다소 아니꼽더라도.
어머니에게 들러 약 받는다.
아파트 건이랑 말씀을 좀 드리려 하였으나 어머니의 표정에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휑뎅그레한 진찰실, 김선생님도 환자없어 무기력하게 앉아 있고. 꼬부랑 할머니 큰고모님. 그 곳에 몰락한 영주처럼 멍하니 앉아계신 어머니.
벌써 70을 바라보는 문턱을 넘으려 하는 어머니. 여태껏 어머니를 여기까지 굳건히 버티어 오게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결코 자식들의 애정과 신뢰 속에 둘러 쌓인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걸 생각하면 아련하게 찔러오는 회오의 아픔.....
그것은 눈물 흘리며 참아내며 살아내신 어머니의 고독한 실존이다.
그 실존을 버텨내게 한 것은 다만 타인과의 관계-어머니, 형수, 맏며느리, 의사라는 이름의, 그 이름 속에 담겨 있어야 할 풍성한 내용은 빼어 버린 형해화된 이름의 관계 뿐이었을 것이다. 형해화 된 그 이름들이 때로는 조금의 보람으로 수렴되기도 하고, 다소의 고무케 함도 있었을 것이고, 혹은 부담으로, 혹은 슬픔으로 어머니를 서게 한 것일게다.
이제 의사라는 뼈다귀의 이름마저 떼어 버린다면 어머니는 쓰러지실 것이다.
아, 나는 어머니에 대하여 무엇인가?
어머니는 나에 대하여 하나의 생명이듯이 나는 어머니에 대하여 그러한가.
형해화된 아들이라는 이름만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기호일까.
기호라면 상징이 되어 여기에 살을 찌워야 한다.
찬바람이는 어머니의 가슴 속, 그 황량한 실존의 벌판에 사랑과 신뢰의 꽃을 피우지 못한다면 나는 하나의 인간으로서 실패자일 뿐이다.
'나는 어머니께 들어갈수 없다' '어머니는 내게 들어오려 하지 않는다' 는 넋두리는 이제 그치지 않으면 안된다.
어머니께는 시간이 없다. 시간이 없는 어머니다.
내가 그 분께 기도할 때에는 오로지 어머니 편에서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
효를 가장한 허영, 값싼 감상주의, 음험한 이기심으로 위장된 기도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
이런 거짓은 주님께 가증한 것이다.
어머니를 가슴 저려 할 때마다 솟는 건 바보같은 눈물.. 그 눈물 넘어 숨어있은 내 심층의 감정모체는 아마도 오이디푸스컴플렉스의 유아적집착,질투, 소유욕, 배신감, 카인의 분노같은 것일 게다.
14677 1987. 4. 15 (수)
새벽.
무릎꿇어 기도.
어머니의 기쁨을 간구하면서 눈물이 치솟아 흐른다.
기도할 때 어떤 사무치는 느낌의 눈물이 흐르면 주님께서 들으신줄 믿고 싶은 것은 한낱 감상주의의 느낌만은 아닐 것이다.
87년 창작과 비평 신작소설집의 소설경향을 쓴 것에서.
'모든 단편소설 속에 흐르는 것은 인간의 권리문제, 그리고 그것으로 인한 현실적 상황 (주로 운동권 학생,노동자,농민..)에 대한 페이소스로 넘처 난다.'
그 중 소설의 일절.
"맴 모질게 가지라이. 고추보다 독허고 마늘보다 맵게 가지라이. 넘이 내 돈 백원 묵을라꼬 뎀비문 이백원 뜯어 내뿔고 넘이 이녁눈에 눈물나게 허문 그 누깔에 핏물 내겠다는 각오로 살아야 한다이."
14768 1987. 4. 16 (목)
어제밤 형과 술하다.
어머니... 그러나 진솔한 대화는 되지 아니하다.
고마운 것은 형수가 새벽마다 교회에 기도 나가면서 예수를 사랑한다는 사실이다.
따뜻하고 화창한 날씨.
오랜만에 회사 빼먹고 아침에 듣는 찬송가
'만세반석 열린 곳에'
영화 '미션'
남미 밀림 속 폭포의 장관, 야만인들에게 선교를 위하여 그 폭포를 기어 오르는 예수회의 신부 제레미 아이언스, 그리고 치정으로 동생을 죽인 노예상 멘도사 로버트 드 니로, 절제 된 연출, 인디안들의 표정과 연기도 좋다, 폭력, 그리고 운명에의 순종, 신앙이라는 것...
"폭력이 정의라면 사랑의 자리는 없어 저. 나는 그런 세상에서 살수 없네."
책 사다.
폴 틸리히, 몰트만, 마르틴 부버가 쓴 신학서적.
그림같은 무라노 시로의 시.
"사슴은 숲가의 석양 속에 조용히 서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작은 이마에 총이 겨누어 진 것을.
그러나 그에게 무슨 수가 있었겠는가.
그는 단아한 자세로 서서 마을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는 시간이 황금처럼 빛나는 그의 집.
커다란 숲의 밤을 배경으로 하여."
14679 1987. 4. 17 (금)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처 단풍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 하리야,
봄이 또오면 어이 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서정주 '그리운 날'-
어제 오늘 경건을 잃고 있다.
이 봄, 속세의 하늘이 너무 푸르르기 때문인가.
내일 새벽 회복하자.
14680 1987. 4. 18 (토)
새벽 기도.
어머니, J, 아이들, 형제 친척....
오직 주님의 은총만을 간구하기만 하는 나의 간절함.
진실성- 그것은 믈흐듯이 자연스런 품성에서 가능할 것이다.
진실이라는 단어를 의식한 시점에서는 이미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자연스런 솔직함. 이러한 것은 희귀한 장점이다.
고백하기 어려운 것, 말할수 없이 부끄러운 것을 자연스럽게 고할 수 있는 자연스러움.
나는 이 기록에서 그것을 추구하여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표현할수 있는 경지에 이르지 않으면 이 일기는 한낱 낙서에 불과할 뿐이다.
14681 1987. 4. 19 (일)
어제 토요일 오후의 바둑은, 더구나 호승심에 사로잡힌 바둑은 영혼을 상처입힌다.
격하게 되며 비천한 품성이 노출된다.
그 천함, 그 공포, 그 감미로운 고통, 막다른 골목에 쫓긴듯한 감각, 파멸에의 예감- 도스토예프스키처럼.
도박은 나처럼 천박한 인간에게는 모든 더러운 성질을 확인하게 되는 무대이다.
고양된 정신의 상태, 그 고상함을 유지하면서 도박이라는 일종의 우연에 의지한 승부짓기에 함몰할수 있는 사람은 신사이다. 그런 사람이 프로일 것이다.
고스톱, 바둑등을 할 때 그 균형감각을 유지시킬 자신이 없다는 예감이 들거나, 비천환 감정상태가 느껴지걸랑 즉각 중단하여야 한다. 그를 감지하여 오른쪽 뇌가 명령할때는 지체없이 그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어제밤, 아티반 2알 먹다.
잠은 좀 잔것같으나 마음은 쓰라리다.
불면과의 피나는 투쟁이 무서워 어제밤은 그만 항복해 버린 꼴이다.
오늘 부활절.
성탄절 다음으로 중요한 교회의 축일.
기쁨의 메시지, 부활. 교회력에 의한 부활의 의미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를 생각해야 한다.
부활로서 예수는 메시아, 곧 그리스도가 되셨다.
부활로 인하여 모든 성서의 말씀은 이루어진 것이며, 사람이 침묵하면 길가의 돌들이 소리높이 할렐루야를 외치는 영광이 도래한 것이다.
예수의 죽음은 나의 죽음이며, 예수의 죽으심은 나의 죽음이며, 예수의 부활은 나의 부활이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를.
그리하여 언젠가 죽음에 승리하는 생명이 되기를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오늘 사일구. 그러나 사일구는 오늘에 이르러 그 빛을 잃다.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인 박권상씨의 강연.
"조지 오웰의 '1984년'. 그 소설에 나오는 이중사고(Double Thinking)의 개념.
그것은 다음과 같은 구호에 익숙해 져야만 그 사회의 엘리트인 것이다. 즉 '평화는 전쟁이다' '자유는 노예이다' '고문은 애정이다' '선전은 진리이다'...
지금 우리는 어쩌면 이러한 이중사고 속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이를테면 '민주주의를 제한하는 것은 민족주의이다' '지옥원은 복지원이다' '소값파동은 농민복지정책이다' '노동삼권을 보장하는 것은 노동자 천시주의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민주주의 국가인데 무슨 민주화를 한단 말인가라는 이중사고에 이르면 유구무언일 뿐이다.
민주주의는 어느 국가, 사회, 단체, 운동에 모두 붙일수 있는 일종의 사기술이 아니다. 인민민주주의, 민족적 민주주의, 한국적 민주주의, 혹은 정치적 민주화, 경제 민주화, 학원 민주화, 경찰 민주화, 등산회 민주화..등 아무데나 민주를 갖다 붙이면 그게 민주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절대적이며 다음 사항의 보장이 있어야만 민주주의다.
첫째, 명실상부한 국민의 기본권 보장 여부.
둘째, 법 앞에는 만인이 평등하다는 법치주의의 실현 여부
셋째, 국민이 자신의 정부 선택권에 관한 제도의 확립 여부
이것의 보장을 위한 필요조건은,
첫째, 같은 뜻과 목적과 추구이익을 갖는 집단을 만들어 국민의 뜻이 형성 조직될수 있는 집회 결사의 자유.
둘째, 개인 집단의 생각 의견 사상을 나타낼수 있는 언론 출판 시위등 표현의 자유
셋째, 투표권 피선거권등 투표에 대한 권리 보장
넷째, 정치인등이 어떠한 생각이라도 발표할수 있는 보장
다섯째, 상반되는 여러 정보에 접근 가능한 상황의 보장.
그리하여 누구나 공직에 나갈수 있고,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실시의 보장이 되어 있다면 그 나라는 민주주의 국가라 할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 나라에 우리는 이중 몇가지나 향유할수 있을까?
우리가 일상 속에 안주하여 나는 민주화에 관심없다고 말하는 것은 자유이다. 그러나 그 자유 이전에 그 사람은 자신의 권리에 대하여 다만 자각하지 못할 뿐이고, 자각한다면 그는 이 사회를 방기하고 있는 것이다. 어린아이와 같은 사고로 이 사회를 살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개헌. 개헌- 작금 이 나라에 난무하는 개헌.
헌법만 개정하면 민주화가 보장된다고 생각하는가? 한번 헌법의 실질적 가치문제를 생각하여 보자. 헌법의 어디에 국민기본권,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가 구속받고 있는가? 여야는 지금 다만 권력구조 문제 하나만 가지고 박이 터저라 싸우고 있은 것이다. 무슨 꿍꿍이 속인가. 민주화에 있어서 권력구조의 문제- 이것이 당리당략의 차원이라면 누구나 관심 밖이다. 진정한 민주화는 헌법의 실제적인 가치의 문제- 즉 헌법이 국민의 자유 보장에 대한 방패 역할을 하여 주느냐하는 문제이다.
소련의 스탈린 헌법은 국민의 자유보장 권리보장에 있어서 완벽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실은 유명무실일 뿐이었다. 영국은 헌법 자체가 없다. 그러나 700년의 전통이 이루어 놓은 관행으로서 국회에 의하여 철저하게 국민의 권리 자유가 보장되고 있다. 미국의 헌법은 모든 국민의 일상생활의 기준이다. 모든 논란은 대법원의 헌법해석으로 종지부를 찍는다. 가히 신앙적인 헌법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헌법의 유명무실한 것을 유명유실의 것으로 바꾸어야 하는게 급선무다. 과연 지금의 언론기본법, 노동삼권, 성고문, 고문치사사건, 기독교 방송건 이런 것들이 우리의 헌법에 근거하고 있는 점이 있는가 말이다. 현재 헌법에 명시된 권리를 누리고 있은 사람은 몇몇에 불과하다. 오직 집권자의 판단기준에 의하여 너라면 좋다 너라면 믿을만하다 라는 식의 특허법인 것이다.
그러므로 헌법만 고치면 곧 민주화가 된다는 논리는 현실적으로 어불성설이다.
언젠가 도래할 통일을 위하여도 민주화는 이 시대 역사적 책무이다. 필연적으로 닥칠 이념과 체제의 갈등에서 자유가 독재보다 우월하다는 것이 입증되어야 한다.
국민의 자각이 급선무이다. 국민의 자각이 강하면 집권세력은 어쩔수 없이 타협한다. 국민의 자각이 넓을 때 집권자의 도덕적 용기, 덕성이 참되게 나타날수도 있을 것이다. 조직없는 대중처럼 무력한 것이 없고 조직있은 대중처럼 무서운 것이 없다. 교회, 노조, 교원노조,언론인노조등 모든 단체를 조직화 하여 민주화에 대한 압력 구실을 제대로하자. 그래야 우리의 민주화는 이루어 진다."
구구절절 옳으신 말씀의 강연.
오직 기독교방송만이 방송할수 있은 강연.
곧 거센 민중의 꿈틀거림이 있을 것이다.
14682 1987. 4. 20 (월)
세상에서 제일 듣기 좋은 소리.
모차르트, 슈베르트, 베토벤..
내 아들내미 俊이의즐거워 하하 웃는 웃음소리.
내 딸내미 英이가 깔깔 웃을 때의 그 영롱한 소리.
제일 듣기 싫은 소리.
쇠끼리 비벼대는 마찰음.
음악이 아닌 온갖 불협화음.
내 가슴속 똥물 가득할 때 나는 목소리.
J의 머리속에 쓰레기 가득할 때 나는 목소리.
오늘 회사에서는 쇠끼리 비벼대는 마찰음 속에 있었고 집에서는 J의 그 목소리에 잠겨 있었다. 내 천한 소리는 영혼에 가득하고.
"빈 산
아무도 더는
오르지 않는 저 빈 산
해와 바람이
부딪쳐 우는 외로운 벌거숭이 산
아아 빈 산
이제는 우리가 죽어
없어져도 상여로도 떠나지 못할 저 아득한 산
빈 산
너무 길어라
대낮 몸부림이 너무 고달퍼라
지금은 숨어
깊고 깊은 저 흙 속에 저 침묵한 산맥 속에
숨어 타는 숯이야 내일은 아무도
불꽃일 줄도 몰라라
한 줌 흙을 쥐고 울부짖는 사람아
네가 죽을 저 산에 죽어
끝없이 죽어
산에
저 빈 산에 아아
불꽃일 줄도 몰라라
내일은 한 그루 새푸른
솔일 줄도 몰라라.
-김지하 '빈 산'-
14683 1987. 4. 21 (화)
기도.
밖의 어둔 새벽을 몹시 바람이 우짖는다.
요즘 나의 독서는 대개 화장실에서 이루어 진다.
미우라 아야꼬의 책.
"두 사람의 인격 차, 말하자면 거인에게 오륙명의 어린이가 달려들고 있는듯한 느낌.
아무리 가시 돋힌 모욕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정신.
그것은 악의가 침범할수 없는 자유로운 정신과 풍부한 감성이다."
얼마나 도달하고 싶은 인격이며 정신인지.
타인의 시선, 악의의 대응에 결코 상처받지 않은 독립된 영혼, 자신만만한 정신.
그러나 이런 경우는 다르다.
상대에 대한 은연중의 경멸이나 멸시에 기인한 것, 자신의 굳건한 정신에 의한 것이 아닌 허영의 자의식, 무시....
가까운 사람에게서 악의의 대응을 받고 아주 조금의 상처도 입지 않는 정신이라면 그것은 상대를 조금도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증명일수도 있을 것이다.
미우라 아야꼬는 이런 경우까지를 상정한 것은 아니겠지만.
훈련소 조선재료학 강의중.
전문교사보다 낫다, 강의가 고상하다, 목소리가 좋다는 훈련생들의 상찬.
나쁘지 않은 기분이고, 비교적 불우하다고 할수 있은 그들에게 교육의 열정을 다짐케 하지만.
그렇지만 나는 교활한걸.
14684 1987. 4. 22 (수)
아티반을 향한 유혹을 필사적으로 물리친다.
며칠째 은빛 수면.
안개가 낀 듯 뇌세포 사이사이에 모래가 낀것처럼 욱신거리는 머리, 오른 팔의 근육통.
게다가 어젯밤의 꿈은 어처구니가 없다.
J는 형편없는 색정광이고 나는 오쟁이진 남편, 극단적으로 도치된 묘사로 꾼 꿈의 내용에 치솟아 오르는 새벽의 욕정.
욱신거리는 머리를 다스려 엎드려 기도하다.
이러한 불건강한 컨디션. 이것은 확실히 경건을 잃은 탓이다.
순수하게 아름다운, 저 높은 곳에서 주신 건강함의 세계에서 나는 지금 벗어나 있는 것이다.
분명히 느낄수 있는 어떤 악한 세력의 끌어당김.
주님의 세계와 악한 세력에서 나온 느낌이 이토록 확연하게 구분될수 있다는 것.
전에는 마귀니 악마니 하는 단어가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유치한 造語로서 받아 들였는지.
지금 나는 명백하게 그 존재를 느끼고 있음이여.
그것은 선의 어떤 Deformation된 것도 아니며, 심리적인 환상도 아니며, 귀납적 추론도 아니다.
분명 악의 세력은 존재하고 나는 지금 그것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오직 나의 하나님이여. 주신 그 순수하고 아름답고 건강한 세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나의 영혼을 지켜 주소서.
그리고 나는 이러한 악의 세력이 틈입한 원인을 숙고해 보아야 하리라.
은연중 싻트고 있는 나의 교만함- 몇 권의 독서가 만들어 준 신학적 지식의 교만, CBS 목사님 설교를 들으면서 느끼는 경멸의 교만, 신앙의 간절함을 남보다 더 보유하고 있다는 교만, 선을 추구하는 것이 남다르다는 교만...
나는 지적 허영심에서 흘러 나온 교만과 신앙의 자부심에서 흘러 나온 교만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너의 무엇을 보신다고 생각하는가. 상헌아.
지식도, 학력도, 재산도, 명예도, 인간성도, 이상도 아니라는 걸, 그 분은 다만 겸손함과 온유와 사랑과 끝없는 애통함을 보시는 것이 아니던가?
그리고 또하나. 스스로 합리화하려는 재주가 뛰어나구나 상헌아.
자기변명에 지나지 않은 그것들이 사람에게는 모를까 그 분께는 어림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너는 그 재주넘기에 여념이 없구나.
아, 너는 컴컴한 쥐구멍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서 쥐새끼처럼 요리조리 눈알만 반짝이고 있구나.
그리고는 합리화해 버린다.
먹고 살려니까, 아프니까, 불면에 시달리니까, 시끄러운게 싫으니까, 좋은게 좋은거지 뭐, 그런데도 이 정도면 할만큼 하는거지 뭐, 이만하면 최선이지....
또 쾌락을 향한 도취경향.
어제 점심시간에도 바둑을 두며 그 호승심에 얼마나 천한 감정을 노정했는가, 엇저녁에는 또 제믹스 게임에 몸이 후끈 달았지?
네 그 지독한 성적 환상을, 또 그 마스터베이션은 어찌 할거냐?
이러한 모든 것들이 주께서 주신 그 빛의 세계를 억압하여, 심리적인 죄의식에 잠겨서 악한 어떤 세력에게 자리를 내주고 그 따위 것들이 불면과 불건강한 정신 육체의 상태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죄의식은 악의 세력이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에베소서 2장-
14685 1987. 4. 23 (목)
새벽기도.
아이들의 교우관계에 대하여 생각한다.
어렸을 적 사귀는 친구의 영향은 크다.
내 경우를 회고해 보면 내 친구를 사귀고자하는 취향은 다소 Abnormal하지 않았나 싶다.
두뇌,가정환경등 우수한 그룹에 가까워 지고 싶은 욕심과 어둡고 난폭하고 어딘가 반골적인 그룹에 가까워지고 싶은 경향이 공존하고 있었다.
전자의 경우, 완전히 그런 우수 그룹의 확고한 일원이 되었던 적이 없었는데, 그것은 어린시절부터 내게 주어진, 환경 탓이었는지 천성 탓이었는지는 모르나 내게 내재되어 있는 열등의식이 늘 추춤거리게 하였다.
후자의 경우도 마찬가지, 그들에게 선망의 추파는 던젔을지언정 한번도 제대로 된 깡패 흉내를 내어 본적도 없고 그런 무리들이 날 온전히 받아 준 적도 없었다.
이를테면 나는 아웃사이더, 회색분자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런 것들이 축적되어, 소속된 안정감,자신감같은 긍정적인 성격이 배양되기 보다는 늘 자신감이 결여된 상태, 소외의식- 똥누기 전의 엉거주춤 상태의 의식으로 굳어져 버린 듯 하다.
그래서 나는 겉으로는 돈독한 결집력으로 무리를 이룬 그룹들을 경멸하는듯한 폼을 잡지만 속으로는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친구들 또는 동류들끼리 아무런 흉허물없고, 서로 진정 속속들이 알고있는듯한 대화투, 몸짓, 서로의 무한한 신뢰를 과시하는 말없는 행동들이 정말 얼마나 부러웠던지!
조금 시근이 드니까 그런 Format따위도 결국 하나의 폼에 지나지 않는다는걸 깨닫게 되었지만 어린시절,소년시절에는 정말 그런 것들이 너무나 부러웠다.
그 부러움이 소외감을 창출하고 좀 Abnormal한 쪽의 성격을 배양하는 것이다.
俊이와 英에게는 그러한 아웃사이더적인 교우관계가 되어서는 안된다.
가정이 아이들에게 만들어 줄수 가장 중요한 것중 하나는 바로 이런 심리적인 정서적인 안정감이다.
아이들이 어떤 집단에 어프로치할 때 스스럼없이 자연스럽게 그곳의 일원이 될 수 있은 근거는 바로 이런 심리적 안정감, 즉 조금도 꿀린다는 의식이 작용하지 않음이다.
이런 면에서 英이는 썩 훌륭하다.
그러나 俊이에게는 그런 요소가 엿보여 미상불 걱정인데, J나 나나 진정 아들내미의 성격에 좋은 쪽의 영향을 주어야 할텐데...
'애큐매니칼적 분위기'라는 말이 있다.
이 뜻은 애큐매니칼 운동이 극대화 해버리면 기독교의 교의는 희석되어 버린다는 말로서, 애큐매니칼 운동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입장이다. 현대 과학과 합리적인 사고의 팽배와 역사해석의 변증이 난무하는 시대에서 오소독스한 크리스찬의 우려함이다.
메릴.F 운거의 말.
"많은 성직자들은, 진리는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성 구석구석까지 뿌려진 것이며 그것을 가장 먼저 표현한 문화 구석구석까지 전파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다원론의 제안자들은 성령이 주신 계시, 곧 성서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 전해진 진리를 부인한다. 그 대신에 그들은 삶에 대한 대화 속에서 인간에게서 인간에게로 전해지는 진리를 추구한다. 그러한 운동은 어떤 진리를 '신앙과 실행의 유일무이한 법칙으로서' 제시한 어떤 진리에 의해 부과된 속박을 벗어 버리려는 오늘날의 세계 속에 있은 어떤 한정된 노력을 보여준다."
오소독스한 기독교란 현실부정, 내세주의의 경향을 갖고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긴역사동안 그것이 옳기 때문에 오소독스하며, 성서의 '계시'라는 진실을 가장 잘 옹호하고 있기 때문에 오소독스한 것이다.
그러므로 크리스찬은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과 현실을 헤쳐나가는 행위의 방식은 어찌해야 할까?
나에게는 이 쉬운듯하지만 어려운 명제가 큰 부담이 아닐수 없다.
성경을 이현령 비현령식으로 현실에 뚜드려 맞추어 버리면 일단 합리화로서 편하기야 하겠지만, 근본적인 것은 그런 신앙의 자세가 아니다. 신앙고백.. 실존의식...
<밤>
오랜만에 참은 술 마시다.
지금 술마시고 이렇게 쓰노라. 정신을 가다듬어, 하나의, 네 잠 속에 작용할 하나의 아포리즘을 베껴 써라. '예컨데 돈은 사람을 위해 있다. 그런데 돈의 노예가 되어 돈 때문에 인간이 가져야 할 모습을 잃고 있은 예가 너무나 많다.' 아, 진부하고 진부한 얘기지만 썼다. 우리는, 특히 나는 간단한 논리의 것을 일부러 복잡하게 만든다. .. 죄의식은 너무나 안좋다. 중세의, 토마스아캠피스의 세계는 너무나 여지가 없구나. 여지? 여유?란 무엇인가. 그것은 쬐끔쯤 죄를 사랑하는 마음이다. 그 달콤함.이상스런 신비감. 반대되는 개념이면서 동질의 감정을 자극하는 악한 세력의 침략. 분명한 것은, 그것이 똑같은 감성을 자극할지라도 나의 이성이 상상하여 인지할수 있은 그 세계와 괴리를 보일때는 서슴없이 그것을 버릴 것. 그리고 죄의식을 버릴 것. 나의 주님을 디오니소스적으로 상상한다면 이것은 독신인가....
14686 1987. 4. 24
화창한 봄날.
어제의 음주로 인한 뒤꽁무니 하혈.
미우라 아야꼬.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다.' -데모데후서 1장- 당신의 공포는 이 성구에 의해 고쳐질지도 모른다.
이 성구는 첫째로 공포는 능력에 의해 극복된다는 점이다. 어떤 능력인가. 공포보다 강한 오직 하나의 능력은 신앙이다. 공포심에 사로잡힐 때 신앙을 굳게 가지고 이에 대한다.
둘째로는 사랑이 공포를 이긴다는 것이다. 사랑에 의해서라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신뢰를 의미한다. 이 태도를 가지고 있으면 공포는 사라진다.
셋째로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는 건전한 정신을 가지는 일이다. 하나님의 생각에 순종해서 살면 건전한 정신을 당신은 가질수 있다. 그것에는 어두운 공포의 그림자는 없다. 어떤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을 때 이 성구를 읊조리며 당신의 공포에 맞서라."
칼 힐티 '인간이란 무엇인가'
英이는 월요일 수학여행 간다고 들떠 있다.
俊이는 요즘 한창 전자게임에 미쳐있는 상태이고.
J는 요즘 친절하고.
어머니는 어떻게 지내실까?
14687 1987. 4. 25 (토)
교회의 분위기, 이것은 초신자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기독교의 오의를 전혀 알지 못한 상태에서 접할수 있은 기독교의 첫인상은 다만 교회의 분위기일 것이다. 그 첫인상은 시종 그의 종교문화적 분위기로 각인 될 것인데 교회가 너무 세속적인 분위기로 가득차 있거나하면 아주 나쁜 인상으로 남아있게 된다.
이런 면에서 캐토릭의 분위기는 매우 바람직스럽지 않을까? 캐토릭은 그 내용은 매우 세속화되어 있지만 외형의 분위기는 거룩하다. 수녀,신부의 복장,은은한 빛이 감도는 내부, 성수, 엄숙한 미사의식...
그러나 개신교는 어떤가? 특히 오순절계통에서 더한 것이지만 TV에서 보거나 글에서 읽는 그 분위기는 거룩함과 거리가 있다. 통곡의 분위기, 웅변의 분위기, 부르짖음의 분위기, 비지성적인 분위기, 사람의 메시지가 넘처나는 분위기... 이런 것들은 분명 초신자들에게 거부반응을 일으킬 것이다.
교회에 끌리는 것은 일단은 그 색깔이다. 저자거리와는 다른 색깔이다. 사람은 감성적 동물이기도 하므로 일단 그 문화적 색깔에 끌리기 마련이다.
개신교도 모든 종파가 통일된 하나의 색깔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칼빈은 어째서 예배의식이나 제의 형식적인 측면에서는 카리스마를 행치 않았나? 하기는 종교개혁의 중요한 이유중의 하나가 그런 것들이지만 칼빈이 좀더 선견지명이 있었더라면 이런 형식적 제의적인 측면을 간과하지 않았을 것이다. 교회가 그립다. 아름답고 거룩한 교회의 문화가 그립다.
최신해의 수필집.
"인생, 생활에 필요한 것은 단지 無知와 厚顔이다. 이 두가지만 갖추면 반드시 출세한다."-마크 트웨인-
"자기의 열등의식을 커버하여 자기의 유지를 좀 더 연장시켜 보겠다는 메카니즘이 눈치라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열등의식,경쟁의식,불안의식이 곧 눈치의 매카니즘이다."
"사람을 早老시키는 가장 큰 원인은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의무감 상실이다. 오래 살아갈수록 남에게 무슨 도움이 되고,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감정만이 사람의 생명을 연장시킨다."-프랑클 박사-
어머니가 의사라는 직업에서 손을 놓았을 때 그 날이 어머니가 노파가 되는 날이다.
어머니한테 자식들이 해야 할 것은 '어머니가 계심으로 하여 어머니의 자손들은 너무나 행복하다는 사실을 어머니가 진정으로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어머니가 깊이 깊이 인지하셔서 어머니의 건강한 생존에 무한한 가치를 부여해 드리는 것이다. 주님은 내 엄마의 가치를 내게, 무한히 내 온 존재를 흔들어 속삭여 주신다. 주님, 어머니.
14688 1987. 4. 26 (일)
바람이 몹시 수런거리는 아침, 검은 구름이 하늘을 가득 덮었다.
간밤 꿈.
농땡이 대학시절..보생의원집.. 만원의 변소.. 똥이 넘친다...시험치러 가는 길..대신동 학교까지 도달할 수가 없어 초조.. 가는 길 택시의 소매치기.. 겨우 언덕어귀에 이르렀으나 언덕을 오르기 싫은 게으름..게으름을 피울동안 그 윗길.. 학교로 가는 윗길은 섬이 되어 배처럼 서서히 떠나간다..탈 수 없는 나는 듬성한 소나무밭 해안에서 구성지게 판소리 가락을 뽑는다...
기록된 꿈을 분류해 보면 내꿈의 뚜렷한 패턴 몇가지.
똥에 관련 된 것- 똥은 마려운데 변소를 찾을수 없다. 변소에 똥이 차서 흘러 넘친다. 이불 속에 누운채 똥을 누고 그 똥덩이를 조금씩 몰래 꼼지락대며 치운다. 대중환시리에 똥을 눈다. 아마 이런 똥에 관련된 것은 위장과 관련있는 육체적인 컨디션에 기인하는바가 큰 것같다. 술을 짬뽕하거나 막걸리를 마셨거나 저녁후 속이 거북하거나 변비가 심하거나 한 경우. 소화기계통,배설계통의 컨디션이 원인일 것.
시험 강박- 시험인데 교실에는 들어갈수 없는 상황. 공부는 하나도 하지 않은채 임하는 시험. 연습 한번없이 하는 연극공연. 종료종이 곧 울릴텐데 답안지는 하나도 적어놓지 못한다. 이런 경우 일상중의 불만요소, J이건 식구 누구이건 혹은 회사의 누구이건, 또는 업무의 어떤 것들이 매우 나를 불편하게 했을 때 이런 꿈을 꾼다.
군대 강박- 흔한 것은 아니지만 유격훈련장, 예비군 훈련장, 제대하였는데 또 영장이 나오고 하는 종류는 아마 어떤 영화에 연관된 것같고.
나는 확실히 어떤 노이로제의 요소를 많이 갖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 바라이어티한 꿈의 세계란 깬 후의 기억할수 있는 것만 스토리화하여도 백과사전이 됨직 할 정도이다.
내게는 분명히 조울증, 일종의 Ritualism, 유아적집착 (Infantile Fixation), 강박 (Obsessional Thought), Phobia, 세척강박 (Washing Compusion)등이 있다.
그러나 이런 심층심리의 문제는 이제 나를 만든 절대자의 존재를 알았으므로 두려움은 없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 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 말씀은 무한한 평정의 암시이다. 그 분께서 주시는 것은 육체적,세상적,정신적,심리적인 것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런 신경증적 현상은 그 분께로부터 멀리 벗어났을 때 나타나는 경향임을 나는 내 통계에 의해서도 알수 있는 것이다.
다시 다짐하거니와 내 하나님에 대한, 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나의 신앙은 약한 자의 비명소리가 아니다. 도피주의가 아니다. 음울한 골방이 아니다. 음습한 패배주의가 아니다. 음흉한 내세를 향한 이기주의가 아니다.죄의식에 잠겨 전전긍긍하여 참회하는 것이 아니다.낡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긍정이다. 빛이다. 밝음이다. 희망이다. 행복이다. 사랑이다.새로운 것이다.늘 새로운 것이다. 높은 차원에서의 철저한 자기긍정이다.
14689 1987. 4. 27 (월)
새벽기도.
수학여행에 들뜬 英이는 벌써 일어나고, J는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며 김밥을 말고 있다. 누나가 어디를 갈적마다 별로 기분이 좋지않은 아드님은 엄마에게 칭얼대고.
이 새벽, 기도하는 내 방밖의 이 작은 소란스러움이 참으로 행복하다.
고맙습니다. 주님.
英이 해맑게 이쁜 얼굴로 떠나다.
14690 1987. 4. 28 (화)
英이 없는 집안은 어딘가 허전하다.
특히 俊이 누나를 그리는 포즈는 쓸쓸함이다.
英아. 잘자고, 잘먹고, 잘놀고 정말 즐거운 수학여행이어라.
나는 어린 시절 어떤 상황을 공상하곤 혼자서 행복해 하였다.
철벽요새-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원자탄할애비라도 뚫지 못하는 요새, 그 안에는 우리 가족만이 살고 있다. 공기도 청량하게 공급되고, 물론 먹을 것도 무진장 생산가능하다. 그 요새 안에는 또 없는 것이 없다. 그야 말로 밀폐된 낙원- 그 속에서 어머니,형,媛 그리고 우리들의 배우자들이 영원히 행복하게 산다는. 그즈음 나는 자하문밖에서 형과 하숙을 하고 있었고 媛이는 길우삼촌댁 엄마는 부산에 흩어진 이산가족- 나는 얼마나 가족을 사랑하였는지 모른다. 함께 모여 살며... 그 지독한 시절 나는 이런 공상속으로 도망가 숨곤 하였다.
또하나는 영화 '그날이 오면'같은 상황- 핵전쟁으로 인류의 최후, 온 세상에 생존자는 나 혼자다. 모든 문명의 이기들은 그대로 남은채 인간만이 이 지구상에서 사라저버리고 없다. 신비로운 정적의 거리에 나는 걷고 있는데... 아름다운 여자 하나는 있어야겠다. 그래서 또 한명의 아주 어여쁜 여인을 만들어 내고는 또한 행복해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인류의 조상이 된다.
무슨 피해의식이, 무슨 도피주의가 작용하였는지...
또는 이 세상에 아무런 흔적도 없이, 나의 삶이 그누구에게도 눈꼽만큼의 영향도 끼치지 않고, 주어진 생명을 살다가 그냥 바람처럼 훌쩍 떠나 버리고 싶은 욕망. 신선같이...
이런 류의 우화를 꿈꾸는 몽상가는 의외로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실존이라는게 그걸 어느 구석 가능케할 여지가 있는가.
주님의 세계는 신선이 되라는 세계가 아니라 영향을 끼치고 영향을 받으라는 적극적인 관계의 세계이다.
14691 1987. 4. 29 (수)
英이는 지금쯤 무얼하고 있을까?
여관방에서 제 동무들과 까르르 까르르
그 영롱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고작 하루이틀 지났을 뿐인데 이토록 보고싶다니.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가정의 이미지.
'아버지가 있고 어머니가 있고 그 사이에 아이들이 있고, 머리 숙여 함께 기도할 신앙이 있고.'
어머니라는 이미지는 모든 것이 아름답지만 신앙을 갖는 어머니라는 이미지는 말할수 없이 아름다울뿐더러 고귀하기까지 하다.
14692 1987. 4. 30 (목)
새벽기도.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 -고린도전서 1장-
오직 마음 속에 끓어오르는 열망은 J와 함께 참된 신앙으로서 인생을 함께 웃으며 걷고 싶은 것이다. '피곤하면 내 어깨에 기대" 아릿사에 대한 제롬의 열망처럼.
여중생의 씽씽한 수다를 몰고 英이 돌아오다.
속리산, 용인 자연공원, 온양을 거처 돌아온 3박4일.
며칠 새 부쩍 커버렸나? 중학2학년짜리 꼬마소녀가 아니고 여성이라고 불러야 할까보다.
주님. 英이를 감사합니다.
장마처럼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