辨明 僞裝 呻吟 혹은 眞實/部分

1987. 5

카지모도 2016. 6. 21.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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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93 1987. 5. 1 (금)


새벽 기도. 눈물이 콧물과 함께 흐르다.


"내세의 소망이 내게 주어졌을 때 비로소 나는 숨을 내쉬게 되었습니다. 이 때 나는 비로소 인간다운 인간이 되었습니다. 이 때부터 우주도, 세상사람도 내게는 즐겁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때 나는 시인 호이처의 시 한구절을 빌어 노래했습니다.

'나는 이미 두렵지 않다. 흐려진 자연의 모습도 지금은 웃음을 띄고 있다. 유한한 것, 썩는 것,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접촉되는 성령의 날개소리로써 소망의 찬가를 부른다'

나한테서 내세의 소망을 빼앗는 자는 나의 생명을 빼앗는 자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인생은 나에게 무의미한 것이 됩니다. 나의 '존재의 이유'는 확실히 '내세의 존재'에 있습니다."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


실로 그렇다. 내세가 없으면 아니된다. 만일 이 세상이 우리 생명의 유일한 세계라면 생명은 참으로 보잘것이 없다.

이 불완전한 생명을 완성시켜 주는 다른 차원이 없다면 생명이란 비참한 것이다.

이 세상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상에 맞는 곳은 분명히 아니다.

내세의 소망- 이것이 있기에 사는 사람들- 크리스찬, 시인.....


韓哲河의 '현대인과 신학사상'을 개관한다.

"현대인의 문제를 깊이 파악한 네사람의 신학사상가- 현대인에게 대화의 신학을 줌으로써 그를 고독으로부터 구출하는데 도움을 준 마르틴 부버, 진화의 신학을 제시함으로써 인류에게 우주적인 방향감각을 주었고 현대 神科學이 초래하는 비인간화 비정신화의 결정적인 결함으로부터 현대인을 구출하는 길을 마련한 떼이야르 드 샤르땡, 현대인의 실존문제에 대하여 신학적 용기를 해답으로 제시한 폴 틸리히, 실존주의가 현실의 역사 속에서는 아무런 희망도 안겨주지 못한채 자기 내부로 심화하여 들어간데 대하여 현대인에게 희망을 안겨주고 미래를 향하여 전진하도록 현대인의 눈을 역사의 지평으로 끌어들여 미래를 바라보도록 만들어준 유르겐 몰트만.

다시 말하여 부버는 대화와 교제를 주었고 떼이야르는 메마른 기계적 문명세계에 생명과 정신을 불어 넣었고 틸리히는 존재에 용기를 주었고 몰트만은 인류에게 미래와 소망을 고취하고 있다."


나는 우선 마르틴 부버의 '너와 나'부터 도전해 보려한다.


"현대인이란 누구인가? 그는 자유인이다. 자유인은 그 동기가 발동하여 모든 형식과 규정성을 타파하고 이상만을 추구하는 낭만인으로서 나타나기도 한다. 괴에테, 피히테, 히틀러등이 그러하다. 또는 모든 존재를 부인하고나서는 실존주의적 고독인으로서 나타나기도 한다. 니이체,키에르케고르,하이데거등이 그렇다. 혹은 합리인, 곧 과학인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 동기가 자유의 동기보다 더 지배적으로 움직일 때 볼테르, 디드로, 포이에르바하, 다윈, 마르크스등은 전형적인 현대 합리주의자들이다. 이 합리주의 사상이 자유의 정신 못지않게 혁명적 성격을 지닐수도 있다. 이를테면 공산혁명같이.

현대인의 실상은 '힘'앞에서 완전히 무력해진 인간상이다. 이것을 근원적으로 따져보면 결국 현대문명 그 자체속에 뿌리박고 있은 비인간적 '힘'의 요소에 직결되어 있다. 문명과 힘은 어떤 내적관계 속에 얽혀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대인은 때로는 힘의 노리개가 되기도하고 때로는 힘을 추구하여 정신성을 그르치기도 하고 때로는 힘앞에 완전히 무력한 상태에 빠져 그 인간성을 말살 당하기도 한다. 특히 한국과 같은 전통문화권의 경우 예기치 않고 도래한 이 서양문묭을 받아 들임으로써 옛 문화전통과의 갑작스런 단절로 인하여 문화적 무규율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어쩌면 서양인보다 더 비참한 현대인상을 나타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전통을 잃어버리고 새 문화의 형성은 아직 보지못한채 거의 동물적인 상태로 전락해 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익추구에 욕심의 한계를 모르고, 부정직과 기만 사기는 사회생활의 하나의 상식으로 되어 버렸고, 쾌락주의는 염치를 모르고 날뛰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서양문명이 가져온 온갖 병폐를 그대로 앓고 있으며 설상가상으로 전통으로부터 유리된 문화적 정신적인 천박함과 문화적 무규율상태에서 기인한 야수성이 지배하고 있다.

현대인은 자유를 추구하고 있으나 자유를 찾지 못하고 있으며 부를 추구하나 오히려 산업경제에 노예화되어 있으며 힘의 잘못으로 현대인은 비인간화하고 있으며 전통을 잃은 인간은 천박성에 빠져 있으며 문화적인 소외는 우리의 인간성을 박탈하여 버렸다.

고향을 잃어버리고 도시의 군중 속에서 외로이 방랑하고 있는 것이 곧 현대인의 모습이다."


내일 현대신학사사을 계속 개관하여 보고 그 다음에 마르틴 부버에 어프로치한다.


14694 1987. 5. 2 (토)


기도중 강하게 느끼는 지금 내가 우선 소망하는 것.

첫째, J가 신앙을 갖는 것. 둘째, 어머니의 기쁜 삶, 셋째, 가족 형제끼리의 신실한 교통.

J는 언젠가는 반드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 온다. 또 어머니의 기쁜 삶중의 하나는 셋째의 가족 형제끼리의 신실한 교통과도 연관이 있는 문제이다.

형제 자매의 진실한 교류는 당연한 관계의 열매가 아닌가? 이것이 어째서 힘이 든단 말인지... 여자들의 역할, 특히 형수의 역할은 중요하다.

그리하여 나의 간절한 간구중 하나는 형수와 J가 며느리들임을, 형수와 제수임을, 동서간임을 자각하고, 어머니의 기쁜 여생을 열망하여, 모든 어색한 관계들을 회복해 주기를...

아, 무엇보다 여자라는 性의 특성에서 나오는 속좁음,이기심, 샘등 모든 여성적 부정적인 부덕함이 우리 가족의 여성에게는 해당사항이 아니기를.

이 세가지만 이룬다면 나는 가장 행복한 사나이다.


<밤>

온종일 봄비 내리다.

마르틴 부버 읽다가 접어둔다. 상징어의 난해함, 진도가 극히 더디게 나간다.

펼치는 샤르땡 '신의 나라'.

한권의 책을 읽다가 중도하차한다는 것은 안타까움인데, 어쩌랴 줄줄 읽어나갈수 없다면 한 150페이지의 그 논문을 독파하는데 몇날 며칠 매달려야 하는데..


"서양의 신학사상은 그들의 생과 직결되어 발전하여 왔다. 그러므로 서양에서는 신학사상사가 곧 그들의 사상사이다. 현대 철학사상의 원조인 칸트에 있어서도 종교론의 신국사상을 빼버린다면 껍데기에 불과하다. 서양 철학사상에 있어서 '자아의식'이나 '정신'등은 언제나 마지막에 가서는 '절대자'에 대한 의식과 직결되는 것이다. 철학자들은 언제나 이성에 충실하였고 신학자들은 언제나 신앙에 충실하였지만 그 풍토는 같은 것이다.

그렇지만 종교와 사상은 반드시 동일하지는 않다. 종교는 자아와 자아의 궁극적 근원원자를 향한 인간정신의 움직임이다. 인간정신의 영역 조차도 넘어서는 하나의 영계의 움직임이다. 자아나 자기 정신의 힘에 의해서 움직인다기 보다 오히려 근원적인 힘에 의하여, 즉 자기를 초월하는 하나의 힘에 사로잡힐 때 종교는 생겨난다. 그러므로 종교가 사상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나 이 종교적 움직임이 인간정신에 의하여 파악되기 위해서는 사상의 길을 통하지 않을수 없다. 여기에서 종교사상의 분야가 시작된다.

종교는 또한 인간의 生 전체를 초월한다. 종교는 오히려 인간의 생을, 더욱이 오늘날의 생을, 그 형태를 부정하고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종교가 인간의 것이 되는 한에 있어서 또한 어떤 형태의 생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여기에서 종교는 하나의 문화로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사상면에 있어서 19세기 를 낙관주의의 시대라고 한다면 20세기 는 비관주의의 시대이다. 19세기 는 이성의 절대적 신봉으로 산업혁명등, 세계의 무한한 발전을 꿈꾸며 유토피아의 도래를 확신하였다. 초자연이라는 것까지 예지계라는 형식으로 이성의 범주에 넣으려고 하였다. 그것은 칸트, 헤겔의 세계정신으로서의 이성등이다.

프리드리히 쉴라이에르마하는 '절대의존의 감정'의 형식으로 종교를 찾았고, 리츨은 '도덕적연합'의 형식으로 종교를 찾았고, 이것이 나중에 라우션부시의 '사회주의'사상으로 발전하여 종교가치를 인간사회의 진보 완성으로 보고자 하였다. 칼 바르트가 19세기 신학을 '의식신학'이라고 했듯이 모두 인간의 知情意의 의식기능 속에서 그 출발점과 체계를 형성했던 것이다. 19세기 의 신학사상은 다같이 현대인과 종교인의 공존을 믿었던 것이다. 즉 교회와 사회의 일치, 역사와 천국의 일치를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1차대전 이후)에 들어와서 정신적 분위기는 완전히 일변하였다. 역사가 반드시 변증법적, 즉 직선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인간은 쉽게 박애인이 되기보다는 그안의 악마성이 더 농후하다는 것. 절대선으로 나타났던 과학도 절대악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현대인은 20세기 전반에서 역사와 인간과 사회과학과 이성등 모든 가치를 우선 비판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칼 바르트가 '위기신학'을 제창하여 변증법적 신학을 제안하였는데 여기서 위기라는 것은 인간이나 여사는 언제나 신 앞에 위기에 서있다는것이고 변증법적이라는 것은 인간이나 역사가 진리를 가졌다함은 곧 가지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즉 인간이나 역사의 발전이라는 것은 일차 방정식의 직선적인 것일수 없으며 긍정과 부정을 동시에 가지면서 새로운 차원의 개입만이 문제를 해결할수 있다는 것이다."

"20세기 에 자연인과 종교인의 결별, 교회와 사회의 결별이 있었다. 라인홀트 니버는 위기신학의 근본에서 미국사회를 예리하게 비판하였고, 천국의 도래와 사회의 진보와는 영원히 동일시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명백히 하였다."

"1952년 바르트의 '하나님의 인간성'에서 하나의 전환점을 맞는다. 20세기 후반에 있어서는 역사적 비관주의에서 역사적 낙관주의에로의 전환이라고 할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초월 에서의 내재에로의 전환'이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이후의 낙관은 19세기 의 낙관과는 전혀 다르다. 발트는 초월과 내재의 변증법적 통일을 제시하였다. 부르너, 몰트만, 고갈덴등은 현재와 인간 실존에 있어서 그 연결점을 찾았다. 그러나 이러한 현재주의나 실존주의 있어서는 역사적 연결성이 결여된다. 20세기 후반에 있어서의 각종 신학사상은 역사적지평을 잃었던 것을 되찾는 노력이었다고 할수 있다. 이제 이성은 신앙을 찾고 시앙은 이성을 찾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몰트만은 신앙과 역사를 예리하게 갈라 놓았으나 그의 후계자들은 '해석학'이라는 새 신학분야를 개척함으로써 신앙과 역사의 새로운 결합을 모색하였고 판넨베르크는 '역사로서의 계시'란 개념을 제시하여 계시를 역사의 거울 속에 보아야한다는 것을 지적하였고 유르겐 몰트만은 역사에 있어서의 미래 차원에 주목하여 미래의 지평을 열기 시작하였다."


이것을 다시 정리하면.

* 19세기 의식 내재주의 신학 :칸트, 쉴라이허마하, 리츨헤르

* 20세기 전반 :바르트, 몰트만, 몰트만의 후계자들

8 20세기 후반 :판넨베르크, 본 회퍼, 마르틴 부버, 폴 틸리히.


자, 개관하여 본 현대신학의 숲속을 내 신앙의 돈독함을 위하여, 흔들리지 않기 위하여, 이성으로 받아들여 내 신앙이 되기 위하여 섭렵코자 하는데 어디부터 들어가 봐야 할까?

19세기 와 20세기 후반의 신학은 마음에 들지 않을 듯... 역사 속에서 계시를 찾다니!

우선 샤르땡의 '신의 나라'.

틈틈이 팡세를 읽으면서.


주님, 언제나 깨어있는 이성으로 주님을 사랑하게 하소서. 그것이 주님께 옳은 것이라면.

그러나 주님의 은총으로 주님을 사랑하게 하소서. 그것이 주님께 옳은 것이라면.

다만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감정이나 의견이나 충동이나 심리현상이지 않게 하소서.

나의 전 존재가 받아 들이는 신앙이게 하소서.


14695 1987. 5. 3 (일)


나는 신경이 예민한 것인가? 아니면 겁쟁이인가?

어제의 회사일을 훌훌 털어버릴수가 없으니!

연구소의 용역비 8000만원의 처리문제- 차트를 만들어 사장과 전무에게 브리핑하여 설득시켜야 하나. 무식한 그들이 쉽게 도장을 찍어 주려나.... 예인선 건조에 따른 추산한 소요비용 처리에 대한 문제는 어떻거나....


<밤>

J를 모시고, 英 俊을 데리고 시내 나간다.

형네와 함께 영화보고 저녁먹고 하려 하였으나 형네는 여의치 않다고.

우리 네식구, 영화와 돼지갈비.

'레미제라블'.

로베르 옷셍, 나는 그를 안다. 예전 좋아했던 배우, 무슨 장군역과 갱역으로 나왔었지.

리노 벤추라가 장발장역. 성실한 화면, 18세기 프랑스 파리의 화면이다. 그리고 계몽주의의 화면, 루소와 볼테르의 화면인데 빅톨 위고의 화면은 아닌듯하다. 위고는 뵈지 않는다. 리노 벤추라는 그 커다란 등을 구부리고 장발장이 되어 어흥 어흥 꼬제트를 찾누나.

네식구, 산수갑산의 돼지불고기. 웃어서 사랑스런 내 마누라, 어이구 잘도 먹는 내새끼들.. 나는 소주를 마신다.

우리 俊이가 본 장발장은 어떤 사람으로 비춰졌을까?

俊이는 극장까지 가지고 가 녹음한 영화 토키를 들으면서 장발장 책을 읽고 있다.

난 오늘 俊이에게 조그만 것을 성공하였구나.


14696 1987. 5. 4 (월)


스리랑카 다싼아야케에게 Code Book과 몇가지 System에 관한 자료 넘겨주다. 고맙다고 선물하는 실론차 한통.


우리의 이상으로 어떤 좋은 미래를 상상할수 있다면 그것은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꿈꾸는 그 좋은 상황으로 개선되어 질수 있다. 관계와 관계를, 정신과 정신을, 물질과 물질을.

우선 꿈꾸는 것, 이상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꿈꾸기를 포기하는 것.

'난 안돼, 어쩔수 없어, 그건 해봤자 안될거야...' 이것이 문제이다.

기도의 힘이라는 것도 이 꿈꾸는 상황, 곧 가능의 확신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내 가정, 내 형제, 내 사회- 이에 대한 개선을 꿈꾸고 기도해야 한다.


내일은 어린이 날이고 석가탄신일이고 또한 장인어른의 생신이다.

J는 내 장인에 대한 소홀함이 많이 섭섭하다. 경제적인 능력의 문제가 아니고 마음씀의 능력부족, 반성하라. 사위짜리야.


경건이 많이 사라진 하루.

내일 새벽, 회복하리라.


14697 1987. 5. 5 (화)


엇저녁 어머니 다녀 가시다.

손주새끼들 어린이날- 英이 俊이.

어머니가 나나 J나 英이나 俊이를 만나보는 것이 기쁨이 되도록해야 한다.


장인어른 생신, J만 찾아가 뵙는다. 이것은 처가에 대한 부담스러움때문이라는 변명.


무위로 시간을 죽인다.

휴일 아침의 늦잠, 아이들에게 하는 쓰잘데 없는 잔소리, 전자오락, TV시청, 노란 공상...

내가 지금 이래서는 안되는데, 이런 무위의 시간죽임은 전혀 경건과는 배리되는 것인데 하는 안타까움은 게으른 일락의 탐닉을 깨뜨리지 못한다.

샤르땡은 말한다. "대부분의 크리스찬은 일상을 사랑하는데 대하여 어떤 열등의식을 갖고 있다."고.

그러나 나의 경우는 일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무위로움에 중독되는 전적으로 심리적인 어떤 것이다.

쉬바이처- 그에게 무위의 순간이 있었던가.


슈벨트의 리트- 피셔 디스카우.

"Am I Too Loud?" 내 피아노반주가 크지 않아요? 제랄드 무어.

결코 자기를 나타냄으로 바리톤과의 균형을 깨지 않는 그.

아름다운 것은 조화이다. 균형이다.

모든 미학의 본질은 이것이다.


고향을 오래 떠나 있는 느낌, 그 절대 순수의 경건의 고향을.


14698 1987. 5. 6 (수)


무척 곤비한 저녁.

결코 지지 않으려하는, 여성다움의 지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그녀.

아, 이 상황의 성품이 내 일생의 반려라면...

개선할 여지, 개선코자하는 의지가... 그 자그만 싻이라도 있다면..

솟구치는 파괴본능. 다 때려 없어버리고 싶은 충동.

그 쇠긁는 소음에는 그만 살의까지 느낀다.

아, 이러한 때 나의 기독교는 어디로 갔는가!

진흙밭 개싸움 속에서 나는 그녀에 대한 혐오의 염 전에 스스로 자기모멸, 자기혐오에 사로 잡힌다.

썩은 내음 풍기며 쇳소리 긁어대는 똥같은 성격 앞에 나도 똥이 되고, 부들부들 떨리는 심장의 고동.

아름다움, 여성다움은 소유해 보지도 못하는 내 불행은 그렇거니와 아이들은 또 어쩔거냐.

아이들 의식 속에 자리잡게 되는 부부라는 개념은 틀림없이 우스꽝스런 캐리커추어일 것. 세상에서 가장 천박한 관계가 남편과 아내의 관계라고 생각할 것이다.

퇴근 때까지 고이 유지해 오던 어떤 마음의 조화로움은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그녀가 크리스찬이 되기 전에 회복해야 할 것은 여성의 회복이다.


내일, 아 내일이면 무엇인가 회복하기를.

이 상처가 조금이라도 아물기를.


14699 1987. 5. 7 (목)


새벽

엎드려 기도, 눈물은 서러움인가 안타까움인가.

유치 천박한 아비 어미짜리의 품성으로 입는 아이들의 상처가 깊지 않기를.

부디 부디 똥같은 영혼들에게 깊은 사려와 고상 근처의 품성이 깃들어지기를.

성경의 구절을 그저 베껴 쓸 뿐이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의 증거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너희가 끝까지 알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너희가 대강 우리를 아는 것같이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

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 너희로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너희를 지나 마게도냐에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보내줌으로 유대로 가기를 경영하였으니 이렇게 경영할 때에 어찌 경홀히 하였으리요 혹 경영하기를 육체를 좇아 경영하여 예, 예 하고 아니,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었겠느냐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내가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니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내가 다시 근심으로 너희에게 나아가지 않기로 스스로 결단하였노니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하면 나의 근심하게 한 자밖에 나를 기쁘게 하는 자가 누구냐

내가 이같이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또 너희 무리를 대하여 나의 기쁨이 너희 무리의 기쁨인 줄 확신함이로라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무리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무 심하게 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이러한 사람이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은 것이 족하도다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저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저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저희에게 나타내라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너희가 무슨 일이든지 뉘게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치 못하여 저희를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


14700 1987. 5. 8 (금)


새벽.

내 하나님께 기도하는 행위를 행여 추호라도 J가 비웃음 띤 눈초리로 모욕하지 않도록 하옵소서. 英이와 俊이의 영혼에 주님의 손길을 펼치사 부모의 해독으로부터 보호하소서.

어버이날, 어머니의 신앙이 감정에 흔들리는 것이 아닌 어머니의 전 존재의 신앙이게 하소서. 주님의 뜻이 계시다면 J의 완고한 영혼을 흔들어 깨워 저 높은 곳에 계신 주님의 존재를 알게 하소서. 주님이 만드신 인간이란 피조물은 좀 더 고상해 질수 있는 성품이 숨어 있다는걸 알게 하소서.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 -벧전 3장-


세상에 순응하여 사는데 가장 용이한 상태는, 신에게 복종하여 사는데 가장 곤란한 상태이다. 이 세상에 순응하면 종교적 생활만큼 어려운 것은 없다.

신없는 인간의 비참함, 신과 함께있는 인간의 지복, 자연 본연에 대하여 자연이 부패해 있는 것, 그런데 그를 수리하는 존재가 있는 것, 성서에 의하여. -파스칼-


14701 1987. 5. 9 (토)


새벽 기도.

내가 간구하는 이것들이 어떻게 무엇이 되어 이루어질른지는 오직 주님만이 아신다.

'나는 내가 구하며 소망한 모든 것을 하나도 받지 못했지만 나의 기도는 응답되었네.'


로망 롤랑의 '톨스토이 전기'읽다.


톨스토이의 일기

" 도박에 대한 열정은 투쟁 가능하고, 육욕은 투쟁하기 대단히 어렵고, 허영심은 모든 것중에서 투쟁하기 가장 어렵다."

"신앙이란 생명의 힘이다. 사람은 신앙없이는 생활해 나가지를 못한다."

"신앙은 문학이 아니다. 신앙은 행동이다. 신앙은 체험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

"신앙과 자기생활을 일치시키고 있는 것은 그 소박하고 가난한 사람들 뿐이다."

" '그렇다면 무엇을 더 이상 찾겠는가?'하고 하나의 목소리가 내마음 속에서 외쳤다. 그것은 , 그 없이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그 분인 것이다. 신을 안다는 것과 산다는 것. 이 둘은 같은 것이다. 신이란 곧 삶이다."

톨스토이가 번민의 시기를 벗어났을 때 그는 본질적으로 理性의 신자가 되었다. 신자라기보다 이성의 신비론자가 되었다.

"다만 유일하고도 참된 생활이란 이성의 생활이다."

"사랑은 인간에게 있어서 유일의 이성적인 활동이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그 하나님은 나에게 있어서 성령이요, 사랑이요, 만물의 원리이다. 나는 내가 하나님의 내부에 있는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나의 내부에 있다고 믿는다. 나는 하나님의 의지가 인간 그리스도의 교리 속에 가장 분명히 나타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볼수는 없으며, 그리스도에게 기도를 드리는 것은 가장 큰 瀆聖이 된다."

톨스토이의 이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인정치 않게 하였다.

톨스토이의 '참회록'을 구해 읽어야겠다.


<밤>

종일 회사에서 뒷꽁무니가 뒷꽁무니가 쓰라려서 엉거주춤.

장모님이 俊이 보약 사다 주시다. 보시기에 俊이의 몰골이 너무 허약해 보이셨던 모양, 외할머니 눈에는 비친 허약이 아비 눈에는 비치지 않으니 무언가 부끄럽다. 넉넉치 못하신 형편이실텐데. 반면 어머니의 손주를 대하시는 포즈는 어딘가 외식적인 면이 있다. 어머니의 성격의 일단, 깊은 애정이 화려하고 충동적으로 나타남.


중,고교시절 어느때까지 나는 불후의 예술작품은 천재의 섬광과 같은 인스피레이션의 소산이다라는 믿음이 있었다. 모든 장르의 위대한 작품은 천재의 순간적인 영감이 있어야 한다고. 숙고를 하거나, 퇴고를 하거나, 구상에 골똘하거나, 교정하거나, 고민하는 것들- 이런 짓들은 범부인 주제에 몰래 숨어서 끙끙대면서도, 자신은 조금도 창작의 고통을 겪지 않고 이런 작품을 완성하였다는, 천재의 흉내를 내려고 하는 사이비 천재의 할 짓이라고.

천재의 하품까지도 천재의 방귀소리까지도 무슨 불후의 아포리즘인 것이라고.

하늘이 내려 준 재능 아니면 진정한 예술가는 결코 탄생할수 없다는.

아, 이 얼마나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였었던지!


14702 1987. 5. 10 (일)


일요일 오후부터 섬머타임제 실시,

제도에 의하여 흐르는 시간을 한시간 빠르게 늦게 할수 있다니 묘한 기분이 든다.

오전중 곤한 낮잠, 내가 낮잠을 잘수 있다니!


CBS를 들을수 있다는 것은 이 시대에 진정한 목소리에 귀를 열어 놓는 행운을 누리는 것이다. 지금 CBS는 현 정치상황에서 신앙과 참여의 갈등으로 고민하고 있고, 이 시대 어느 곳에 그런 진지한 시대적 고민을 하는 곳이 있단 말인가.

관제언론과 거짓언어로 점철된 모든 홍보매체들- 모든 입들을 집권자만이 독점하고 있은 이 세상에서 그 누가 어린아이같이 순치된 이성을 흔들어 깨워서 일깨워 줄수 있단 말인가.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보물인 인간의 오성과 양심으로 외치는 신앙인, 그들만이 외로운 횟불을 밝혀 들고 있는 것이다.

CBS의 교회의 적극적인 현실 참여에 관한 대담프로.

수많은 목사,신부,수녀의 단식과 수많은 학자,문인,예술인들의 성명이 있는데도 오불관언인 집권층. 목사중에는 참여파가 있는가 하면 비참여파도 있다.

예수님은 온유하라,회개하라,어린이를 무릎에 앉히는 따뜻함, 원수를 사랑하라는 소극적인 사랑의 모습이 있는가하면 성전의 장사꾼들을 채찍으로 몰아내는 적극적인 격렬함도 있는 것이다.


14703 1987. 5. 11 (월)


왼종일 비내리다.

'심령이 가난한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예수 그리스도는 자랑할것이 없는 사람에게는 한없이 사랑을 쏟지만 오만한 인간에게는 용서없이 엄숙함을 가지고 대하셨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인간이 자랑할수 있는 것이 무에 있을까? 이승에서의 돈,명예,지위,지식 이런 것들은 정말 한 푼의 값어치도 없다.

오직 하나님 앞에 통용되는 것은 마음의 가난함 뿐이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

이것은 삶의 아주 중요한 명제일 것.


"신을 아는 것과 신을 사랑하는 것 사이에는 그 얼마나 먼 거리가 있는가." -팡세-

"나는 기독교가 인간의 본성을 부패하고 신의 것으로부터 부패해 있다는 원리를 계시하자마자 내 눈을 뜨게 했고, 도처에 이 진리의 증거를 볼수 있었다는 것을 고백한다. 왜냐하면 자연이라는 것은, 인간의 안과 밖을 불문하고 도처에 잃어버린 신과 부패한 본성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팡세-


죽음- 도시에서의 죽음 또는 사회속의 죽음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육친이나 친지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도시인의 자세에서 나는 참 부러움을 느낀다. 그들은 매우 담담하게, 대담하게 죽음을 수렴한다. 마치 도통한 실존철학자처럼 '삶이란 그런거야'하듯이 초월한 자의 포즈를 취한다. 그래서 나는 '아! 나빼고는 모두가 너무나 굳건한 사람들이로구나.'하는 열등감에 사로잡히고는 한다.

그러난 실상 그 내면을 들여다 보면 그렇지 않음을 이내 알수 있다.

산자는 도시 죽음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죽음의 실존을 깨닫지 못하고 다만 문화적 분위기로서의 죽음만이 그들이 느끼고 있는 전부이다. 그들이 기억하고 슬픈 것은 죽은자의 문화적 분위기를 잃었기 때문이다. 죽은 자가 생전에 그의 영혼 혹은 본성, 본질이 아무리 크게 주위에 작용하였을지라도, 산자는 그것을 의식치 못하고 단지 기억되는건 그가 끼친 문화적 흔적일 뿐이다.

병원 영안실같은 곳에서 한 나흘간의 떠들썩함으로 진짜 죽음은 외면 당하고 문화적 흔적의 상처는 치유된다.

시골에서의 상여- 도시에서는 이럴수는 없더라도.

국가에서 죽음 준비기관, 또는 장의장같은 것을 운용할 필요가 있다.

반드시 종교적인 의미를 전제하지 않아도 좋다.

예상되는 죽음의 대기소, 어떤 임종의 프로그램...

이러면 아주 조금이라도 죽음의 본질이 살아나지 않을까?... 하는 단상.


14704 1987. 5. 12 (화)


새벽기도.

메마르다. 사무치는 기도의 기쁨이 없다.

내 마음이 완악하고 위선적인 탓일게다.

새벽의 순수- 이 깨끗함 속에서 하나님께 아뢰는 기쁨이 없는 이 영혼은 요즘 때묻어 더러울 것이다.


우찌무라 간조의 '기독교문답'

문) 그러면 무엇에 의해 당신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알수 있습니까?

답) 나의 전신 (Whole Being)에 의해섭니다. 즉 나의 실재자체에 의해 드디어 그를 나의 구주, 곧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을수 없게 되었습니다.

문) 그것은 어떤 것입니까? 나로서는 잘 알수 없습니다.

답) 그것은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면서부터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나의 이성마저도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죄는 인간의 몸과 마음을 더렆이는데 그치지 않고 그의 이성까지도 비뚤어지게 합니다. 태어난 그대로의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하나님을 볼수가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에 대해 알려고 한다면 자기를 완전히 버리고 하나님의 광명을 우러러 보아야 합니다.

문) 그것은 알겠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어떻게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습니까?

답) 자기 죄를 부끄럽게 여기고 양심의 평안을 우주에 구했으나 얻지 못하여 번민한 나머지 하늘에 도움을 구했을 때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가 마음의 눈에 비쳐 그 결과로 죄의 무거운 짐이 내 마음에서 완전히 제거되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자기다운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후로는 나의 전신에 조화가 이루어져 나는 그때 비로소 하나님의 구원이 어떤 것이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문) 그러니까 그리스도에 관한 당신의 신앙은 學理에 의하지 않고 실험에 의해 얻어진 것이란 말입니까?

답) 그렇습니다. 그러나 실험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화학이나 물리학의 실험과는 전혀 성질이 다릅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도덕적인 실험입니다. 즉 양심의 필연적인 명령에 의해 자기를 따져 본 결과 자기가 하나님을 거역하고 어두움을 좋아하는 자임을 발견하고 이 죄인을 구원하기에 족한 구주를 찾아 드디어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상한 양심을 능히 고칠수 있는 분을 찾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죄란 인간에 대해 저지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 저지른 것임을 알기 때문에 이 죄에서 오는 고뇌를 제거해 주실 분은 반드시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문) 설명으로 문제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죄의식이 당신을 그리스도에게로 몰아 세웠다고 말해도 좋을까요?

답) 그렇게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죄의 문제와 그리스도의 신성문제 사이에는 매우 긴밀한 관계가 있습니다. 실로 죄가 무엇인지 모르고는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도저히 알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 이제 조금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죄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라고 보십니까?

답) 그렇습니다. 그 가장 확실한 증거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기 전에는 죄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의하지 않고 죄를 덮을수도 있고, 죄를 숨길수도 장식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죽여서 뿌리뽑을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발견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되는 길입니다. 죄에 관한 천박한 사상은 그리스도에 관한 천박한 사상으로 인도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구원을 받으려면 하나님에 의해 자기 죄가 폭로되어 가장 심각한 치욕의 구렁텅이에 빠져야 합니다.

문) 그러므로 인간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들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자기 죄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몰수 있는 것입니까?

답) 그렇습니다. 그의 마음이 교만한 것입니다. 나는 올바른 사람, 깨끗한 사람이라고 보아 자기를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그대로 갖고 있는한, 그 사람의 지능이 아무리 발달되어도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알수 없습니다. 인간은 먼저 겸허한 어두움 속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빛나는 새벽별인 그리스도의 진정한 영광을 우러러 볼수 없습니다. 그 겸허의 우물 밑바닥까지 내려가 보십시오. 당신도 오늘 지금이라도 그를 주로 우러러 보고 도마처럼 '내 주여, 내 하나님이여!'하고 그의 발아래 엎드리게 될 것입니다."


14705 1987. 5. 13 (수)


새벽기도.

어머니의 애정과는 별개의 물질적인 의혹의 먹구름.

이것들을 없이하소서.

아, 인간이란 어차피 유물론적인 존재의 물건이다.


의식의 흐름.

그렇다.

나를 괴롭히고, 나의 기도를 방해하고, 나를 죄인이고자 하는 것은 끊임없이 분출되어 흐르는 의식의 흐름, 바로 그것이다.

온갖 기억, 상상, 무의식 심층의 현실과 육체의 생물학적 상태까지 난마처럼 엉킨채로 줄줄이 줄줄이 흐르고 있는 그것.

이런 종류는 다만 정신분석의 분야에서만 다루어저야 할 무엇인가.

그러나 나는 느낀다. 예전에 비하여 의식의 흐름 자체가 얼마나 단순하여졌는지. 또한 명료하여 졌는지.

그러므로 그것은 충분히 극복할수 있은 명제이다.

아니, 극복이라기보다는 도시 문제거리도 되지 못한채 소멸되어지는 무엇이다.

주님안에서 말하고 행위하는 모든 것은 결코 위선이 아니다.

의식의 흐름과 설령 반대되는 기도가 입술에 흐른다해도 그것은 결코 거짓이 아니다.

진정한 나의 자아는 의식의 흐름속에 있는 내가 아니다.


'토인비와의 대화' 완독.

20세기 가장 통찰력있는 석학이라는 아놀드 죠셉 토인비.

그의 미래에 대한 예측, 또는 인간이라는 존재 가치의 문제에 대한 견해- 그는 인격적인 신을 믿지않는 불가지론자일지라도 분명히 인류를 사랑하고 그 배후에 있는 무엇을 감지하고 있다.

"살아가는 보람, 그것은 사랑하고 예지를 활용하여 창조적인 생활을 하는데 있다. 사랑에는, 그것이 욕망 '탄하'하는 전제하에 두가지가 있는데 자기자신을 버리고 타인이나 세계 또는 우주의 배후에 개재되어 있는 것에 자신을 투입하려는 욕구, 또 하나는 우주를 침범하여 자기목적을 달성하는데 이용하려는 욕구."

그가 가장 존경하고 좋아했던 인물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간디, 석가, 예수...

그가 제일 두려워하면서도 확신에 가까운 미래를 예측한 것은 어떤 독재적인 세계국가의 등장.

그는 계속하여 외친다.

"인간인 이상 자기자신의 에고이즘과 의식적으로 싸울수있고 싸워서 이길수 있다" 고.

그리고.

"사랑- 인간에의 사랑과 다른 생물에의 사랑, 그밖에 초인적인 것에의 사랑- 또 우주의 배후에 있는 궁극적인 존재에 대한 사랑, 그 사랑으로 이기심을 극복하라" 고.


한조각 케익을 다투는 국제사회, 그 속에서의 한국.

빵과 서커스- 빵과 서커스면 모든 문제는 해결할수 있다는 원시인의 의식을 갖고 있는 집권층의 무식함. 그들은 고요히 인간에 대하여 사색해 본 경험이 한번이라도 있을까?


14706 1987. 5. 14 (목)


새벽기도.


오래동안 술을 끊고있는 요즘. 금단증상인가. 어떤 감흥을 잃어버린 느낌. 감성은 메마르고 술의 축제가 만들어 주는 풍부한 정서가 도망가 버린 느낌. 뼈다귀의 감성으로는 하나님께 대하여도 감동은 메마르다.

디오니소스적 하나님도 필요한 것 아닐까.

내 존재의 주인께서는 나의 서정을 기름지게 채워주시지 않는다.

아침녁 듣는 아랑페츠 협주곡, 기타도 오케스트라처럼 음률의 소나기를 쏟아낼줄 안다.


흐린날씨.

퇴근 길, 땅거미 지는 거리에는 소박한 생활의 냄새가 난다. 상상으로 감성을 일깨우면 저녁연기 오르는 초가집, 뛰노는데 정신을 빼앗긴 아이들을 부르는 어머니의 밥먹으라는 소리.


존 번연의 '천로역정'

차근차근 이솝우화를 들려주는듯한 하나님께 이르는 도정을 이야기하는 존 번연.


14707 1987. 5. 15 (금)


새벽 3시30분 기상, 화장실에서 읽는 구약 '열왕기'

불꽃같은 사나이 엘리야, 우직한 엘리사.

하나님께 대하는 엘리야는 코믹하기까지 하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로 죽게 하셨나이까"

엘리야는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에이 참, 여호와 그 양반 또 시작이로구만."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들을 조롱하는 엘리야.

"저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라, 혹 잠간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하는지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것인지.."

하나님에 대하여 말할수 없을 정도의 애정, 엘리야의 애정에 겨운 하나님 여호와.

의식의 흐름 자체가 하나님으로 일관된 사람. 엘리야.

손에 맞는 성경 구입하다.

성경의 문체는 옛글의 문어투가 좋을까? 현대문으로 개역된 것이 좋을까?


무심코 英이의 뒷모습을 보고있다가 문득 느낀다.

저와 같은 모습으로, 어찌 저토록 英이와 같은 모습으로 누가 저 아이를 만들었을까?

아비? 어미? 아니다.

부모의 무슨 저와 같은 모습으로 만들겠다는 의도가 있었는가? 무슨 의지가 있었겠는가?

있었다면 그저 정욕과 아이가 생길수 있다는 가능성의 의식나부랑이나 있었을지언정.

저와 같이, 저 모습, 저 목소리, 저 정신, 저 성격으로 만들어 지기를 원한 어떠한 뜻도 나에게도 J에게도 있었지 아니하였다.

이것은 누군가의 뜻이다. 누군가의 의지이다. 누군가의 지혜이다.

현상의 배후에 살아있는 의도가 숨어있다.

아, 이 단순한 진리를 여태 몰랐다는 것이 이상하다.

이렇게 아이의 뒷모습에서도 이내 느낄 수 있는 그것을!


이번 俊이 생일에는 지구의를 선물하기로 작정한다.

'지도나 판화를 좋아하는 소년에게는/ 우주란 왕성한 식욕과도 같은 것./ 아아! 램프불에 보는 세계는 얼마나 큰가!/ 추억의 눈에 비친 세계는 또 얼마나 작은가!' -보오들레르-

크거라. 俊아.

지구의를 혓바닥으로 핥아라. 세계를 두려워하지 말아라.

모든 문명의 현란함과 부요의 열락함과 지식의 심오함과 육체의 장려함을 우습게 여겨질때까지 지구의를 혓바닥으로 핥아라.

진정한 자유인이 되거라. 진리에 섰을 때 참된 진리만이 너를 자유케 할 것이다.

아빠는 너무나 늙었다.

자유롭고 싶지만 아빠 나이만큼이나 촘촘이 처놓은 그물에 걸려 자유로울 수가 없구나!


14708 1987. 5. 16 (토)


새벽기도.


죽음을 순종하는 아름다움, 장엄한 노을의 아름다움.

코끼리의 죽음, 죽음을 맞으러 죽음의 장소로 뚜벅뚜벅 어둔 숲길을 걸어가는 코끼리의 뒷모습... 주님께서 주신 이승의 연극을 다 마치고 다시 그 창조의 질서 속으로 사라저가는 장엄한 액션. 삶 속에 죽음이 있고, 또한 죽음이 바로 삶의 본질인 것을...

죽음의 형제여. 어서 오세요하면서 정다운 눈길로 죽음을 맞이하는 프란치스코,

그렇게 죽음을 맞는 사람은 훌륭할뿐 아니라 스스로도 말할수 없이 행복한 사람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복을 주시고 그 얼굴 빛으로 우리에게 비취사(셀라)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만방 중에 알리소서

하나님이여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

열방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판단하시며 땅 위에 열방을 치리하실 것임이니이다(셀라)

하나님이여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

땅이 그 소산을 내었도다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 -시편 67-


14710 1987. 5. 18 (월)


HB화 과장 모친상. 건강하다가 갑작스런 뇌출혈. 재송동 문상.

차타고 오면서 어머니를 줄곧 생각하다.

어머니 예순여덟. 아직은 정정하신 것 같지만, 주님 오라하시면 가셔야지.

어머니의 죽음을 예비하라.

어머니가 기쁘게 죽음을 맞이할수있도록 예비하라.

반드시.

내세의 소망을 간직하신채 예수 그리스도의 품 속에서 맞이하실 것.

기쁨으로 기쁨으로 그 순간을 맞이하실 것.

이것을 위하여 자식들은 무엇인가 무엇인가 힘을 기울일 것.


도시고속도로 부근의 산록은 푸르르다. 푸르른 수목의 냄새처럼 내세는 더욱 프르르다.

그곳은 영원한 복락이다.


14711 1987. 5. 19 (화)


더운 날씨.

책구입. 칸트 '순수이성비판' 프란츠 파농 '대지에 저주받은 자들' 마르틴 루터 킹 '자유의 대행진'


며칠째 경건을 잃고 있다. 그러나 사무실 책상 서랍속의 조그만 트란지스터 라디오.

CBS를 들을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송정기업 K사장. 경제기획원 공정거래위원회에 제소하다.

기획원 장관 명의의 소명자료제출 공문은 결국 내 책상위에 놓인다.

어떻게 그 자료를 만들어야 할까? 분명한 것은 회사가 외주업체에 대하여 일방적인 불이익을 주는 처사가 있다는 점인바 그를 교묘하게 위장하는 재주가 필요한데.

회사인으로서 녹을 먹는 일개 봉급장이의 비애..

김사장 그도 교묘하게 회사를 기만하여 등을 치는 교활한 구석 가득하지만 그렇다고 회사가 올바른 그야말로 공정한 처신을 했다고는 결코 말할수 없는 것이다.


우선 경건을 회복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간절하게 주님께 기도드릴수 있어야 한다.


내일 새벽.

그 새벽의 청정함 속에서 경건을 회복하리라.


14712 1987. 5. 20 (수)


청정한 새벽은 맞지 못하다.

난삽한 꿈 속을 헤매이다 일어난 시각은 이미 5시를 넘고 있다.

맑지 못한 머리속, 뒷꽁무니의 통증과 심한 가려움증. 앞 이빨의 부담. 육체적인 커디션도 썩 좋지 아니하다.


그러나 생각하여 보라.

과거에 비하여 얼마나 영육은 개선되었는지..

과거, 과거라지만 일년도 채 되지 아니한 작년 여름까지- 아티반에 의한 강박적인 수면, 삼일이면 이틀은 취해야 하는 마음가짐의 피폐함, 집안에 대한 신경질, 육신의 불편함에 치미는 절망감..

그즈음까지의 상황이란 한마디로 기쁨이 전혀 없는, 소망이 전혀 없는 그런 일상- 다만 어둠 속에서 허위적거리는 한 마리 벌레였을 뿐이었다.

그때를 상기하면 끔찍도 하거니와 지금은 어떠한가?

다소, 아니 아주 많이 일상적인, 육체적인 어떤 괴로움이 찾아오더라도 의지처가 있으며 또한 소망이 있지 아니한가.

지금의 명제는 오로지 영혼의 맑음이다. 그러함으로 은총에 대한 감사의 염을 늘 지녀야 한다.


그런데 인간처럼 간사한 동물은 없다. 그 동물은 감사할줄 모른다. 끝없는 욕망의 덩어리이다.

어쨌거나 나는 구렁텅이에서 벗어난 것이다.


14714 1987. 5. 22 (금)


새벽기도.

솟구치는 감동, 눈물.

남을 위한 기도가 아닌 오직 나의 기도.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지켜주소서. 경건의 유지를 감찰하여 주소거. 남의 탓이라는 의식자체를 도말하여주소서. 모든 것은 내 하기나름이라는 의식으로 살게 하소서. 이제 주님을 놓지면 나는 죽나이다. 죽음의 골짜기로 나를 버리지 마소서. 믿음의 굳건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잠기도록 하소서.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골로새서1장-


병원에 가야함을 느끼다.

뒷꽁무니를 이대로 방치하여 전전긍긍, 우왕좌왕할 계제가 아니다.

주님의 뜻은 병원에 가 원인을 제거하라는 것이다.

오늘 당장 틈을 내어 가리라.


14715 1987. 5. 23 (토)


새벽의 청정함.

기도. 어머니, 아내, 아이들, 형제들, 친지들, 회사, 사회.... 무엇보다 나라는 존재.


어제 병원갔으나 무슨 비엔나 의대 박사라는 의사, 당장 냉동수술하자고 덤벼든다. 높은 수술비도 그렇고 도무지 미덥지 못하여 내일 오겠다고 빠져나온다.

오늘 다른 병원 가려 한다. 주님께서 좋은 쪽으로 선택케 하시겠지.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군이 되었노라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내가 교회 일군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골로새서 1장-


<밤>

Y부장 에게서 소개받아 특수 수술법으로 치질만 전문으로 하는 곳이라는 보수동 동인의원 찾아 간다.

뒷꽁무니를 한참 진찰하고 무슨 사진같은 것도 찍고 하더니 아주 악성의 치질이라고 한다.

깊은 안도의 한숨- 아랫배의 아픔, 검붉은 피의 많은 하혈, 통증을 몇해째 겪으면서 미상불 겁이 났었다. 그런데 단지 치질뿐이란다. 이제 수술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주님께 감사한다. 나의 치질을.


거짓투성이의 권력.

그저 속여 넘기려고, 아니 속이고자하는 속샘도 아니다.

그저 속는 척 해라. 눈가리고 아웅이다.

이토록 독선적인 치들이 이 사회를 제멋대로 재단하고 있으니.

냄새가 지독하여 썩은 내가 난다.

전씨도 그렇고 노씨도 구역질난다.

그들은 벽돌만 쌓고 있다.

거짓언어로 민주와 양심과의 단절의 벽.


14716 1987. 5. 24 (일)


새벽기도.

과감한 육체의 치료의 용기를 주심에 감사. J가 변케 되기를, 친절하고 사랑스럽고 남의 기쁨과 슬픔을 헤아릴수 있는 여성, 말씨 고운 여성, 그것은 오로지 주님께 무릎꿇는 것임을 깨닫기를, 英이가 친절과 사랑으로 가족에 대하기를, 사춘기의 미묘한 감정을 주님의 사랑으로 승화시키기를, 俊이가 좀 더 적극적으로, 활발한 외향적인 성격으로 변화하기를, 어머니의 하루, 교회에서 큰 은혜받으시고, 기쁨의 오늘 하루 일상이 되시기를, 형네가 어머니를 모시고 화목과 봉사로서 어머니를 중심으로 온 가족들이 신실한 교통을 이루고, 어머니의 기쁨을 충만케 하기를.


"우리가 진리를 알게 되는 것은 이성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감성에 의해서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존재를 직감하는 것은 후자에 의한 것이다. 그것에 조금도 관여하지 않는 이성이 그러한 것과 싸우려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감성은 공간의 3차원에 있으며 수는 무한하다는 것을 직감한다. 그것에 조금도 관여하지 않은 이성은 2차적으로 한 쪽이 다른 쪽의 두배가 되는 두 넓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논증한다. 원리는 직감되고 명제는 결론에 도달한다. 방법은 다르지만 모두가 확실히 행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감성이 증명하려하거나 이성이 직감하려 하는 것은 무익하고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팡세-

타성적인 신앙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시종여일하게 일관된 감동을 유지하기는 불가능하지만 이성만은 그것을 연속적으로 인지하고 있을 것. 그것은 다른 측면에서의 감동이다.

조향록 목사의 아들 죽음장면을 묘사한 글을 읽고 눈물짓다.


14717 1987. 5. 25 (월)


俊이 열두번째 생일.

이른 아침, 어머니 손주 생일 축하하려 오시다.

저녁에는 S형 어머니 바나나 잔득 사오시다.

J의 생일서껀 챙겨주시는 그 분의 고마움.


김중배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이여' 읽다.

신문사 논설위원다운 낸철한 분석력으로 썼다기보다 어딘가 감상적으로 쓴 칼럼집.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울분, 답답함, 군사문화에 순치된 정신에 대한 분노...


이 시대. 민주도 없거니와 평등도 없다.

독재의 논리에 편승한 무리들이 부까지도 독점하고 있으니.

노동자가 어쩌면 시대의 아픔을 가장 직달적으로 느끼고 있을지 모른다.


"올 어린이날만은

안사람과 아들놈 손목 잡고

어린이 대공원에라도 가야겠다며

은하수를 빨며 웃던 정형의

손목이 날아갔다


작업복을 입었다고

사장님 그라나다 승용차도

공장장님 로얄살롱도

부장님 스텔라도 태워주지 않아

한참 피를 흘린 후에

타이탄 짐칸에 앉아 병원을 갔다


기계 사이에 끼여 아직 팔딱거리는 손을

기름먹은 장갑 속에서 꺼내어

36년 한많은 노동자의 손을 보며 말을 잊는다

비닐봉지에 싼 손을 품에 넣고

봉천동 산동네 정형 집을 찾아

서글한 눈매의 그의 아내와 초롱한 아들놈을 보며

차마 손만은 꺼내주질 못하였다

환한 대낮에 산동네 구멍가게 주저앉아 쇠주병을 비우고

정형이 부탁한 산재관계 책을 찾아

종로의 크다는 책방을 둘러봐도

엠병할, 산데미 같은 책들 중에

노동자가 읽을 책은 두눈 까뒤집어도 없고


화창한 봄날 오후의 종로거리엔

세련된 남녀들의 화사한 봄빛으로 흘러가고

영화에서 본 미국상가처럼

외국상표 찍힌 왼갖 좋은 것들이 휘황하여

작업화를 신은 내가

마치 탈출한 죄수처럼 쫄드만

고층 사우나빌딩 앞엔 자가용이 즐비하고

고급 요정 살롱 앞에도 승용차가 가득하고

거대한 백화점이 넘쳐흐르고

프로야구장엔 함성이 일고

노동자들이 칼처럼 곤두세워 좆빠져라 일할 시간에

느긋하게 즐기는 년놈들이 왜 이리 많은지

--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

선진조국의 종로거리엔

나는 ET가 된어

얼마간 미친놈처럼 헤매이다

일당 4,800원짜리 노동자로 돌아와

연장노동 도장을 찍는다


내 품속의 정형 손은

싸늘히 식어 푸르뎅뎅하고

우리는 손을 소주에 씻어들고

양지바른 공장 담벼락 밑에 묻는다

노동자의 피땀 위에서

번여의 조국을 향락하는 누런 착취의 손들을

일 안하고 놀고 먹는 하얀 손들을

묻는다

프레스로 싹둑싹둑 짓짤라

원한의 눈물로 묻는다

일하는 손들이

기쁨의 손짓으로 살아날 때까지

묻고 또 묻는다"


-박노해 '손무덤'-


14718 1987. 5. 26 (화)


다소 일찍 퇴근.

장기결근 문제, P이사에게 아직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신조선 공정은 숨가쁘게 바쁜데.

더욱이 홀로 북치고 장구치랴 정신없이 바쁜 그 양반에게.


俊이 손 모두어 잡고 기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이 아이와 영원히 함께 하시기를.

俊이는 믿음으로 키워야 한다.


힐끗 본 부산일보.

내각 개편된 듯.

칼자루 쥔 놈이 장땡.


14719 1987. 5. 27 (수)


새벽기도.

그러나 머리속은 그닥 맑지 못하다.

불만족한 수면 탓인가, 수술에 대한 겁먹음 탓인가.

꿈까지 어둡다. 고문, 박종철, 도살장의 소...


기도는 찬양과 감사와 참회와 간구함으로 하라.

응답의 확신, 감사하는 마음, 겸손한 마음, 낙심치 않는 마음,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천지만물을 경이에 가득찬 눈길로 바라모아 찬양하는 마음으로, 모든 사물을 금정적으로 포용할수 있는 마음가짐이 아니어서는 안된다. 이것이 크리스찬의 근본적인 기도의 자세다.

상헌이여. 부정적인 시선을 거두어라. 사물을 향한 자유로운 정신을 갖도록 힘쓰라. 중심을 하나님의 세계에 굳게 잡고 여하한 모욕이나, 여하한 불쾌감이나, 여하한 못마땅함이나 수렴할수 있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정신, 자유로운 정신, 풍부한 감성을 갖기를 힘쓰라.

하나님의 세계- 그 영원한 세계는 관용과 긍정과 사랑이다.


"우리의 종교는 그 진리를 납득시키는 방법이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이성의 힘에 의하는 것, 또 하나는 말하는 이의 권위에 의한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후자를 쓰지 않고 전자를 사용하여 이성에 접근코자 한다. '이것은 믿어야 한다. 그것을 기록한 성서는 신성하니까'라고는 말하지 않고, 그것은 이러이러한 이유로써 믿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실로 박약한 의론이다. 사실 이성이란 모든 것에 굽혀지지 않는가?' -팡세-


14720 1987. 5. 28 (목)


내일 수술받기로 한다.

미상불 겁이 나지 않은 것이 아니다.


P이사 언질. 다시 검사과 맡을 의향을 떠보는 듯.

하필이면 이러한 때, 그런 암시를 풍겨 부담을 지울게 무어람.

나는 은근히 나대로의 암시를 던저 놓는다. 차장 승진의 조건을.


어쨌거나 내일부터 한 열흘간 입원하고 있으면서 잘 쉬겠다.

그간 나는 책을 읽자.

마르틴 루터 킹 '자유에의 행진'

샤르땡 '신의 나라'

폴 틸리히 '조직신학'

미어즈 '성경핸드북'

엘리 위젤의 소설들.


이번 수술과 입원의 여가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쩍 발돋음을 할 수 있는 계기의 시간들이 되었으면.

내일 새벽 경건을 회복하여 기도하리라.


14721 1985. 5. 29 (금)


새벽.

주님께 굳건히 서서 모든 어려움, 이 세상 어떠한 거스름에도 요동치 않는 자유로운 정신과 오히려 그것들을 긍정하여 포옹할수 있는 풍성한 감성을 주소서. 주님이 지켜주사 오늘의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치도록 하여 주소서. 속히 아내를 구원하시어 내 가족이 주님의 자녀들로서 변화하여 이 가정에 화목한 빛이 넘쳐나게 하여 주소서.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俊이를 주님의 사람으로 부리소서. 그 아이에게서 때로 경건함과 신실한 소질이 엿보이며 때로는 영원을 바라보는 눈빛을 발견하곤 합니다. 어머니를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소서. 형과 형수를 용렬함에서 벗어나 사려깊게 하시고 어머니를 중심으로 형제들과 그 자손들이 진실하게 교통하여 핏줄끼리의 따뜻함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알게 하시고, 그로하여 어머니의 기쁨을 더욱 충만하게 하소서.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셀라)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이방이 훤화하며 왕국이 동하였더니 저가 소리를 발하시매 땅이 녹았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지어다 땅을 황무케 하셨도다

저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 -시편 46-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자기도 함께 갇힌 것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그 위에 있는 제물은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서 먹을 권이 없나니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를 위하여 너희 기도함을 더욱 원하노라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히브리서 13장-


<밤>

동인의원 3층 입원실.

고즈넉한 이 곳에 홀로 누워있다.

J도 가버리고.

수술- 무슨 약물을 주사하는 그것은 매우 간단하게 끝이 났다.

그러나 이 독특한 수술법은 이제부터가 진짜 수술과정이란다.

마취가 깬후의 아픔이 대단하지만 진통제로 잠재우고 있다.

주님께 감사기도.


신명기 읽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준 고별의 연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 책을 사랑하시고 신명기 말씀을 자주 인용하셨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의 생애와 험난한 길을 걸어가면서도 순종함으로써 신령하고 충만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받을 축복.

J가 어서 깨우치기를, 이 기쁜 세계에 푹 빠지기를 기원하다.

英아, 네게 하나님의 은혜 충만하여 예쁘고 착하게 자라다오.

俊이에게는 어딘가 하나님의 자녀다운 신령한 분위기가 있으니 이를 또한 감사한다.


이 육체의 통증- 희망이 있는 아픔이다. 치유되는 아픔이다.

크리스찬에게 소망이 있는 시련이란 이와 같으리라.


14722 1987. 5. 30 (토)


나란 인간은 이토록 나약한 존재인가?

프란치스코처럼 '아픔의 형제여, 하나님께서 만드신 아픔의 형제여' 할 수는 없는가.

보통 사람보다도 아픔을 참는 능력이 훨씬 못하다. 간호원이 짜증을 낼 정도로.

그 간헐적인 통증이 순간적으로 크라이막스를 이룰 때, 그 순간에 나를 온통 휩싸고 있는 것은 분노다. 단세포적인 분노, 短氣의 분노, 동물적인 분노.

나와 같은 인간이 과연 무슨 시련을 견뎌낼수 있으랴.

통증의 파도가 지나간 후에는 또 이런 자기모멸의 분노가 치솟는다.


낮, 통증이 소강상태일 때 J에게 기독교 얘기 들려준다.

입원기간중 이런 기회를 자주 만들어 그녀의 마음에 한 알 밀알이 심겨지기를.

좀 더 J가 쉽게 인지할수 있는 논리를 연구하여 효과적인 어프로치를 구사하여야 한다.


직원들 문병오다. 이원희, 정문교, 김태경, 김형준, 전현주.

꽃과 책.


오늘 밤.

살아 숨쉬는 것들이 모두 잠들어 버린 깊은 밤.

통증없어 홀로 엎드려 오래도록 기도드릴수 있어야 할터인데..


14723 1987. 5. 31 (일)


여자가 출산할 때 이와같은 고통일까.

아침의 화장실은 정말 끔찍한 고문이다.

의사는 참고 자주 변을 보라고 하는데, 차라리 이제 먹지를 말자.

진통제를 움켜 삼킨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이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 -요한복음 14장-


아침녁.

어머니 왔다가시다.

아파트의 형네 불러 함께 살기 위한 보생의원 대수리중.

그 곳에서 형네 어머니모시고 정말 화목, 행복, 기쁨의 보금자리 되었으면.

단순한 어머니, 귀여운 어머니, 사랑스런 어머니, 예쁘고 예뻤던 어머니, 지금도 예쁜 어머니, 천진한 어머니, 불쌍한 우리 어머니.


어머니 가시고 나서 11시경.

英이 앞세워 S형 어머니 문병와 주시다.

그가 우리 가족에게 이토록 마음 써 주심에 감사할 따름. 고마운 분. 늘 J와 가까이 있기를..

며칠만에 보는 준수한 俊이, 해맑은 英이 내 아이들.

누워 있는 아빠를 대하는 무덤덤함.

저희 엄마를 닮은 감정표현의 서투름이다.


옆에 누워있는 J에게 빌립보서와 요한복음 소리내어 읽어 주다.

짐짓 잠든척하는 그 영혼에 무언가 싻이 나기를.

J는 목하 남편의 수술보다는 집 때문에 걱정이 많다.

2층에 물이 새고, 수도꼭지는 썩고, 보일러는 고장나고, 장롱문짝은 삐걱거리고..

그 아파트는 도대체 얼마나 고처줘야 만족하겠다는 겐지.


나의 죄를 절실히 느껴서 주님께 통곡하며 나의 죄를 고백할수 있어야 한다.

나는 지금 죄를 자각하여 고백하는 그것이 다분히 어리광적이다.

'주님, 약해빠진 인간인데 뭐, 이 정도쯤이야 뭐, 그렇죠? 주님...'


엘리 위젤 '그날 밤' 읽는 중. 소름끼치는 전율로.


장을병교수의 CBS강연 '민주정치와 언론'

민주의 날은 멀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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