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33 1987. 3. 1. (일)
조양그룹의 어느 높으신 분의 따님께서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을 택한 진수일.
휴일인데 한사람 부자의 허영을 위하여 현장의 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한다. 단지 Launching Ceremony 때문에.
할아버지 기일.
서울서 숙모,고모님들 내려 오시다.
어머니의 극진한 접대.
아랫방에 둘러 앉아 대훈고모의 주재로 예배드린다.
순복음교회 조용기목사님의 어투를 그대로 빼닮은 기도.
된발음으로 "..쓉니다."하는.
코메디프로에도 등장한다. 거부감...
오순절감동, 성령의 은사를 간구하는 그 절절함이 나쁠 것은 없으나 무당이 신내림을 바라는 그런것들과 연상되는 기분은 어쩔수 없다.
얼음짱같은 이지적인 신앙 역시 감동이 없듯이 신비한 감동주의의 신앙 역시 좀 조야하다.
그러나 아무려면 어떠랴? 오직 한분 하나님께 향하는 나름대로의 형식인 것을.
동은이,주은이,가야숙모.
그들이 약하고 작고 가엾어 보인다.
원인이야 동기야 어떠하였건 그 아이들은 작은아버지의 자식들이다. 가야 숙모의 꼿꼿한 의연함이 돋보인다.
동은이,주은이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나는 그들의 형이며 오라비이다.
14634 1987. 3. 2 (월)
꽃샘 추위 오래 가다.
오늘을 고비로 예년 기온을 되찾는다는 일기예보.
만나는 중역마다 일전의 심사분석보고회의 브리핑을 칭찬한다. 물론 나쁜 기분은 아니다.
에리히 프롬의 '정신분석과 종교'걔속 정독중.
그 책에서 정신분석학이 종교에 대한 입장은.
'영혼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종교의 독점물이 아니다. 영혼의 문제는 정신분석의 영역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프로이트는 종교 자체는 부정하는 듯 하지만 윤리라는 좁은 의미에서 그것을 긍정한다. 융은 어느 절대적인 존재에 의한 무의식의 작용, 집단무의식의 작용으로서 종교는 인정한다. 그러나 종교를 낮은 차원으로 끌어 내리는 것이다.'
정신분석과 종교는 진정한 의미에서 같은 목적을 추구하지는 못할 것이다. 인간의 무의식- 저 깊은 잠재의식의 세계, 리비도, 이드등 모든 것까지도 피조된 개념일진데. 정신분석은 종교를 보완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러나 미상불 이 책은 굉장한 흡인력으로 빨아 들인다.
기독교를 비롯하여 읽기 시작한 책들, 기독교,종교,철학,역사, 문학서적등을 통하여 나는 지식의 확대를 느낀다.
참으로 기독교의 기초없이 서구 사상,역사,문화를 이해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사망후의 안구 기증 증서에 서명하여 제출한다.
근시 난시의 불량품인 내 안구도 아무 상관이 없단다.
J는 근친자의 동의란에 날인하며 다소 기분나빠 한다.
아, 그녀와 나를 뿌리째 뽑아서 거듭 나게 하소서.
그녀는 나 보다 더 인생에 헌신적이다.
내 아내에게 나보다 더욱 강한 믿음의 은총을 주소서.
14635 1987. 3. 3. (화)
새벽.
찌뿌드드한 기분. 회색수면.
아티반은 먹지 않는다.
그러나 술을 마시니까 신경안정제대신 술인가.
뒷꽁무니의 하혈.
육체의 피폐함.
그 분의 몸뚱이 또한 사랑하여야 한다.
아이들 어제부터 새학년 등교.
좋은 친구를 사귀고, 명랑하고, 선하고, 건강하게 자라주는 내 아이들.
나는 감사할 것이 얼마나 많은가.
*기도에 대하여.
기도는 자백하는 것.
Profession(고백)과 Admission(인정).
고백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인정는 자기 죄의 인정.
그리하여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잊어버리신다. 아피에미:용서.
그러나 죄의 상처와 흔적은 남는다.
타인의 죄에 대한 용서. 주님의 기도.
대부분의 사람은 용서하는 일과 용서받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고통스러운지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데 너무나 인색하다.
내가 용서를 구하는데 있어서 가장 어렵고 힘든 사람이 누구인가. 먼저 그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라. 그러면 다른 사람은 더욱 쉬워지리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유와 기쁨과 정결한 양심과 용서를 체험하라.
14636 1987. 3. 4 (수)
에리히 프롬 'Psychoanalysis & Religion'
정신분석학이란 참으로 어두운 영역을 밝히 드러 낸다.
불투명한 느낌, 막연한 느낌으로만 실재함이 감지되던 그 관념들을 확연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아, 또 이것은 얼마나 비기독교적인가.
교의라는 것은 여지없이 무지한 인간의 심리현상으로 여지없이 부숴져 버리고 교리는 자의적인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
읽어 나간다는 것이 일종의 고통. 예수 그리스도의 신음이 들리는 듯 하다.
나는 정신분석학적 논제에 대응하는 수십개의 반대 감정을 느낄수 있다. 이 조그만 책을 독파한후 나의 또다른 실존철학으로서, 이 1800원짜리 조그만 책의 아성을 부수어 버리겠다. 일개 학문적 논리 따위를.
정신분석이라는 괴물은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연단이다.
완강한 유혹의 시련이다.
그의 '종교체험의 몇가지 유형분석'이라는 대목에서 이토록 전율을 경험하는데, 앞으로 '인간자체' '인간본성'을 접하거나 프로이트학파의 제반 저술들, 칼 융의 저술들, 그리고 그외 현대 정신분석철학의 숱한 논증을 내 두뇌가 받아 들일 때 내 신앙은 과연 온전할수 있을 것인가?
그들의 초월자 절대자의 개념은 큰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나의 하나님여, 내게 말씀하소서.
계몽주의의 오만이 기승하여 오늘 날 모든 것을 과학이란 이름으로 난도질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소서.
진화론자의 오류와 같이 인간정신의 분석 또한 오만의 변증론자들의 자의적 날뜀이라고.
나의 하나님이여.
신은 도그마의 화장품으로 진실을 위장하고 있는 모습은 아닙니다.
진면목을 보여 주소서.
내세와 창조와 성서를 믿사옵니다.
예수의 보혈을 믿사옵니다.
그 분의 기적을 믿사옵니다.
나의 주님.
오직 당신께만 나를 향하도록 하소서.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빌 3장-
지금 하나님께서는 여태껏 좁아 빠진 나의 지식의 한계를 넓혀주고 계시는 것이다.
그 지식들을 배설물로 여기게 되도록.
14638 1987. 3. 5 (금)
SB-310 진수.
직반장들과 회식.
직반장들과 헤어져 P이사,Y부장,H부장과 넷이서 늦도록 2차. 12시 넘어 들어오다.
디스코 걸의 율동, 여체의 성적인 면만을 의도적으로 강조하여 추는 춤. 그러나 아름답다. 미끈한 여체의 꿈틀거림은. 이 또한 하나님이 주신 육체의 찬미.
누군가 내 안에서
기침을 하고 있다.
겨울나무처럼 쓸쓸하고
정직한 한 사람이 서 있다.
그는 목쉰 채로
나를 부르지만
나는 선뜻 대답을 못해
하늘만 보는 막막함이여.
내가 그를
외롭게 한 것일까
그가 나를
아프게 한 것일까.
겸허한 그 사람은
내 안에서
기침을 계속하고
나는 더욱 할 말이 없어지는
막막함이여.
-이해인 '누군가 내안에서'-
14638 1987. 3. 6. (금)
프로이트의 종교관.
- 인간의 외부에 있는 자연력과 인간내부의 본능적인 힘에 직면했을 때 느끼는 무력함이 그 기원이다.
- 어린 시절경험의 반복.
- 어린애들에게서 발견되는 강박관념적인 신경증세와 유사.
- 소아기 신경증세를 유발시키는 것과 유사한 조건에 의해 야기되는 집단적인 노이로제.
- 하나의 위험물.
- 지성의 빈곤을 초래한 책임자.
- 유신론적 개념이란 인간의 소망에 근거한 환상에 불과.
- 도덕성의 기초 위협 내지는 도덕적 가치 몰락.
- 이성의 감소, 인간 고통의 감소로 인한 발전적 윤리관의 퇴조.
- 유아적 집착.
에리히 프롬 '인간 자체'의 요약.
"인간이 지니고있는자각(Self-Awareness)과이성(Reason), 상상력(Imagination)은 동물의 생존을 특징짓고 있는 조화 (Harmony)를 붕괴시켰다. 이 자각,이성,상상력이 나타남으로서 인간은 비정상적이 되고 동물과 다른 우주의 기형아가 되었다. 그래서 인간은 자연의 일부분이어서 자연의 물리적 법칙에 순응하고 그 법칙은 바꿀수 없지만, 그러나 그는 자연의 다른 모든 것보다 우월하다. 그는 자연의 한부분이면서 독립된 존재다. 인간은 고향을 지니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는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 더불어 그 고향에 묶여 있는 것이다. 인간은 우연적인 시간에, 우연적인 장소에 이 세계 속으로 던저졌고, 또한 다시 한번 우연적으로 거기에서 쫓겨난다.
그는 자의식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의 무력함과 존재의 한계성을 깨닫고 있다. 그는 자기 인생의 결말, 즉 죽음을 눈 앞에 그려 본다. 그는 결코 자기 존재의 이분법에서 벗어 날수 없다. 자기가 아무리 원하고 있다 하더라도 자기 마음을 쫓아 낼수 없으며 또한 살아있는 한 자기 육체의 자연법칙에서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그의 육체는 그를 살고 싶게 만드는 것이다.
이성은 인간의 축복이기도 하면서 그의 저주이기도 하다. 이성은 영원히 해결할수 없는 이분법의 과제를 해결하도록 그를 몰아댄다. 이 사실 때문에 인간존재는 다른 모든 유기체적 존재와는 다르다. 인간은 회피할수 없는 불균형의 상태에 끊임없이 놓인다. 인간의 생활은 자기 종족의 생활양식을 단지 되풀이하는 것으로는 살수 없다. 자신이 스스로 살아야 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권태를 느끼고 불만스러워 하며 낙원에서 추방되었다고 느낄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 자체가, 해결해야만 하는 하나의 문제, 회피할수 없는 문제로 부각되는 유일한 동물인 것이다. 그는 이제는 자연과의 조화상태를 유지하던 인간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 갈수도 없다. 그는 스스로가 자연의 주인이 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될 때까지 이성을 발전시켜야 하는 숙명을 지닌 존재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창세기 와는 얼마나 배리되는가!
이성,상상력따위는 여호와 하나님에게는 도외시의 문제이다. 다만 자각이라는 문제는 에리히 프롬과는 다르게 피조물이라는 자각이 있을 뿐이고.
도시 진화론에서 비롯된 모든 계몽주의의 모더니즘은 애시당초 창조론과는 아귀가 맞을수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성서의 해석에 있어서 방법론적인 어떤?
자연과학자, 심리학자의 논증의 명쾌하기는 가히 신학자의 계시,성서,역사적 논증과는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기도 하고.
새벽 무릎 꿓고 엎드려 기도. 많이 울다.
아우구스티누스를 그리워 한다.
'주여 당신은 만물의 공의로운 통치자이십니다.
당신은 질문자나 피질문자가 알지 못하게 신비로운 영감을 통하여, 당신의 심판의 심오함으로 역사하셔서 각인의 질문시에 영혼의 숨겨진 공과에 따라,
그가 들을만한 것을 듣도록 하셨습니다.
아무도 당신께
그것이 무엇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라고 물어 볼수 없습니다.
그는 질문 해서는 안됩니다.
결코, 안됩니다.
그는 다만 인간일 뿐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나의 하나님. 나를 두려워 말게 하소서.온갖 철학의 명제와 논증을, 과학의 기적을.땅의 일들을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일상의 거치름과 빵에 대한 것들과 J와의 사랑과 어머니를 향한 소망들을.나의 하나님.땅의 것들, 눈에 보이는 것들을 이기도록 은총 주소서.
아, 신비주의여.
이 새벽 지금.
내려 와서 나를 휩쌓어라.
14639 1987. 3. 7. (토)
회색수면.
의도적인 냄새나는 P이사의 심통스런 Order.
우울한 회사의 일상.
J의 비여성스러움. 무감각함, 아이들에게까지 대하는 몸짓과 말투는 정말 어머니스러운 쪽의 것은 아니다.
일상을 향한 혐오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다.
자포적인 감정. 치사한 일상에 대한. 이대로 견디는 내가 싫기도. 흙탕물에 엎치락 뒤치락. 이전투구. 진흙밭 개싸움. 직장이나 가정이나...
지금 경건은 사라지고. 일상의 절망감이 영혼을 짓누르지만.
신앙은, 나의 종교는, 나의 기독교는.
결코 도피주의가 아니다. 안일한 수동적인 것이 아니다. 약한 자가 도망 가 숨어버리는 그런 것이 아니다.
내일 회복하리라.
경건.
14641 1987. 3. 9. (월)
다시, 에리히 프롬 '인간자체'-
"인간의 숙명인 끊임없는 이분법의 상태, 인간의 내부에서 그 양면성을 창출시킨 이성은 그 어느 성치단계에서나 불만족과 당혹을 느낀다. 완전이 아니기 때문에 또다시 새로운 해결의 명제로 몰아 세우는 이성- 그것이 인간 역사의 다이나미즘의 요소일수도 있다.
인간자체 속에 진보를 향한 추구가 본질적으로 내재된 것이 아니라 그러한 추구, 역사의 발전이라는 것은 결국 자기 존재의 모순 때문이다. 그는 영원한 방랑자이다. 그는 자기 존재의 이러한 모순적인 존재의 해명을 위하여 내적 분열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곧 자신을 자연과 자신의 동료와 심지어 그 자신에게서까지 분열시켰던 그 저주 '이성'을 지울수 있는 다른 종류의 조화, 곧 절대자를 향한 열망을 갖게되는 것이다.
인간존재의 부조화는 애초 동물적인 욕구를 훨씬 능가하는 욕구를 창출하였다. 그것은 자연과 자신 사이에 통일과 균형을 회복키 위한 절박한 추구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 결과 그는 자신의 위치, 해야 할 일등, 문제 해답의 준거틀(Moulding)로써 모든 세계에 대한 포괄적이고 정신적인 영상(Imagine)을 창출하였다.
자, 이제 그의 목적은 완성되었다. 그러나 그는 전적으로 지적인 존재는 아닌 것이다. 그는 또한 육체를 지닌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思考 속에서만 아니라 생존 과정중에서도, 자신의 행동중에서도 자기 존재의 양면성에 저항해야 한다. 따라서 새로운 균형을 발견키 위하여 존재의 모든 영역에서 통일성과 일치감을 경험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의 목적, 하나의 관념, 神과 같이 인간을 초월하는 힘에 대한 헌신은 이러한 완전성을 추구하는 욕구의 표현이다.
인간에 있어서 이보다 더 강렬한 에너지는 없다. 인간은 이상(IDEA)을 소유하느냐 않느냐하는 문제에 있어서 자유롭지 못하다. 모든 인간은 '이상주의자'이다.
다만 이상의 성격 자체에 있어서만 자유롭다. 그러므로 인간 정신의 最善의 표현도, 또한 악마적인 표현도, 그것은 육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이상주의'적인 마음의 표현이다. 따라서 이상을 갖고 있으면 '가치있다'라는 것은 틀렸다. 진리성의 정도, 인간능력 발전에 공헌하는 정도, 세계속의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는 인간 욕구에 얼마나 진실한 해답이 될 수 있는가하는 그러한 가치가 온당 할 것이다.'
'현대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그 거죽을 벗겨보면 다음과 같은 원시 종교의 형태를 발견할수 있다. 그것은 신경증(Complex, Compulsion, Impulse) 으로서 발견된다. 이를테면 - 조상숭배 (Encestor Worship), -물신숭배 (Fetishism), - 의례주의 (Totemism, Ritualisn), 청결예배 (The Cult of Cleanliness, Washing Compulsion)
등이다.
종교는 집단적 노이로제 증세라고 한다는 반대 명제로서 노이로제는 종교의 개인적인 형태일수도 있다. 성숙성과 통합성을 이루는데 실패한 사람은 누구나 어떤 종류의 노이로제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를 인간이 지닌 종교적 욕구를 대변하는 것으로 신뢰할수 있을까? 아니면 조직된 전통적 종교와 이 욕구는 분리시켜 생각해야 하는가?'
여기서 그는 두가지로 구분한다. 그것은 물론 그의 성숙한 인간신뢰, 이성의 종교에 기인하는 것이지만, 계시, 영감으로서 이루어진 나의 기독교는 물론 이에 반발한다. 권위주의적인 종교와 인도주의적인 종교가 이른바 그것이다.
'권위주의적 종교- 대표적인 것이 칼빈신학이다. 여기에서는 불복종이 가장 큰 죄이다. 신의 모습이 완벽하면 할수록 그만큼 인간은 불완전하게 된다. 인간은 자신이 지닌 최상의 것을 신에 대해 투사해야 하며 그에 따라 그 자신은 더욱 빈곤해 진다.
이제 신은 모든 사랑과 모든 지혜와 모든 정의를 소유하게 된다. 인간은 자신이 추구할수 있는 모든 완전한 것을 신에게 투사해야 하므로 그는 이러한 미덕을 박탈 당하고 공허하고 빈곤하게 된다. 그는 애초에 왜소함의 감정에서 시작하였지만 이제는 완전히 무력한 상태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가 지니고 있는 모든 힘은 신에게 투사되어 버림으로.
이제는 인간이 지닌 모든 것이 신의 것이 되며 그에게 남겨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가 자기자신에게 접근할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신을 통해서이다.> 그는 자기 것을 약간 돌려받기 위하여 신의 자비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된다. 모든 것이 신의 자비나 은총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선한 그 어떤 것도 지니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자신을 죄인처럼 느끼게 되며 자기를 인간적으로 만들어 줄수 있는 유일한 것을 되찾기 위해서는 신의 자비나 은총을 통하여야 한다.
신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얼마나 철저하게 사랑을, 지혜를 잃어 버렸는가를 보여 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자신에 대한 신뢰,사랑,이성의 힘에 대한 체험을 갖지 못한다. 그는 구별한다. <세속적인 것>과 <신성한 것>으로. 그러므로 더욱 세속적인 인간의 행위는 사랑이 없어지고 인간 본성은 부정적이 되며, 신성한 것은 자신의 무기력, 무가치성을 강조하여 죄인임을 거듭 의식하여 용서를 간구하게 되는 것이다.
용서의 간구가 거듭됨으로 그는 고통스러운 딜레마에 더욱 빠지게 되고 더욱 죄악감을 촉발하여 자기의 신을 찬양하고 드디어 자신을 되찾을 가망은 더욱 적어지는 것이다.'
'반면 인도주의적 종교는 초기불교, 유교, 이사야, 예수, 소크라테스, 스피노자의 교리, 기독교의 신비주의, 프랑스 혁명전 이성종교등을 들수 있다.
원시 기독교는 인도주의적 종교였으나 권력에 의한 Authoritarianism화 되어 버렸다.'
아, 에리히 프롬의 이런 얘기들을 모두 부정만 할수 있을까?
불교도 중에 가장 기독교적인 사람이 있을수 있고, 기독교도중에 가장 불교도적인 사람이 있을수 있다. 정신분석적 측면에서는 히틀러의 나치즘도 종교이고, 스탈린니즘도 종교이다. 대상에 헌신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투사한다면 그것이 곧 종교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이것은 피조물자체의 견지에서만 생각하는 것이다. 계시와 나타냄이라는 그 분의 견지에서의 그것이 신앙의 본질일진데..
그러나 혼돈과 반발과...
그는 계속한다.
'인간은 자신을 초월하는 어떤 힘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어떻게 그것을 강조하는 종교를 비판할수 있을까? 맞다. 인간은 확실히 의존해야 하는 존재이다. 인간과 지구라는 것은 우주의 한 점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의존성과 한계성을 인정한다는 사실과 이 의존성에 함몰되어 의존한다는 그 자체를 숭배한다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이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현실적인 냉철한 이해이며 지혜와 성숙의 근본, 곧 겸손이고 이것을 숭배한다는 것은 매저키즘적이며 자기파괴적이며, 곧 권위주의적 종교의 근본교리이며, 이것은 곧 자기혐오이다. 精神分析醫의 임상실험상 매저키즘적 특수성격을 구분하는데에도 현실주의적인식과 무의식적 욕구에 내몰아치며, 또한 권위주의적 성격도 나타나고 있으며, 이것은 결국 자유로부터의 도피인 복종과 무력감의 체험으로 그 구분은 명확하다.
인간은 자신을 넘어선 어떤 것에 자신을 연결시켜 버리려는 지워 버릴수 없는 갈망이 있는데, 그것을 보더라도 인간의 외부에 어떤 존재, 어떤 힘이 실재하는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그렇다. 건전한 인간의 정신은 타자와 연결되고자 하는 욕구가 있어야 당연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광인이다. 신을 사랑하려는 인간 욕구의 상징, 그것이 신이라는 주장은 타당하다. 그러나 이 욕구에 상응하는 외부적 존재의 실재라는 사실은 이 인간욕구의 현실성과 강렬성에서 곧바로 도출되어 나올수 있는 결론은 아니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을 강렬하게 사랑하려는 열망 자체가 곧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될 수 없다. 오직 인간의 욕구, 그 욕구할수 있다는 인간의 능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일 뿐이다."
에리히 프롬은 신이라는 존재의 실재함이나 종교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종교적인 태도의 진실성에 관하여 논하고 있는 것인데, 여기에 내 신앙의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내 신앙의 태도가 정신분석적으로 설명되어 지는 무엇일 뿐이지, 그것이 절대자로부터 온 어떤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너는 논증할수 있느냐?라고 누가 묻는다면 나는 할 말을 잃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지 말기로 하자!
하나님께서는 지금 나의 한계를 넓혀주고 계시는 것이다.
낮에 사무실에서 CBS의 '교육행정 이대로 좋은가?'라는 강연 듣다. 이 시대의 양심적 목소리 기독교방송.
어찌하여 크리스찬은 용감할까? 칼빈, 마치 온유한 예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려는 것처럼, 땅의 일에 그토록 적극적이고 용감할수 있을까?
이 시대의 양심적이고 용감하며 또한 가난한 교사를 위하여 기도하자. 내 英이, 俊이가 배워야 할 그들. 가정교육이라고는 염두에 없는 나와 J로서는 오직 학교의 교육이 전부인데 말이다.
14642. 1987. 3. 10 (화)
근로자의 날.
잔득 흐린 하늘, 비라도 와 주면 좋으련만.
J, 그 단순한 품성의 근본은 지극히 선량한 것이다.
내가 끓여준 라면에 그토록 즐거워 하는 모습은 참 아름답지 아니한가.
에리히 프롬의 계속.
"정신분석학의 가장 중요한 발견은 사고와 관념의 타당성 여부 문제라고 할수 있다.
인간은 본래 군거적 동물이다. 그리고 그에게는 고립,소외의 공포감이 가장 큰 것이다. 羊(무리)와 人間(개인),
양의 본성과 인간의 본성 사이의 괴리, 즉 무리에 가까워 지려는 경향과 이성에 의한 지향이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合理化가 나타난다. 합리화는 이 양으로서의 본성과 사고할수 있는 인간적 능력과의 타협이다. 이 때의 사고할수 있는 인간적 능력은 그가 행하는 모든 것이 이성의 비판을 견딜수 있다고 억지로 믿게 만들며 그 때문에 비합리적인 의견이나 결정까지도 합리적인 것으로 보이게 한다. 그러나 그가 양인 이상은 참다운 지도원리에 의할 수가 없다. 그는 완전히 다른 원리, 즉 群居的 順從 (Herd Allegiance)의 원리에 지배받는 것이다.
이성과 합리화하는 지성의 양면성을 가진 사고의 모호성은 곧 이간의 기본적인 양면성, 곧 속박을 향한 욕구와 자유를 향한 욕구의 공존함을 표현하는 것이다.
Homo Sapience의 길은 얼마나 험난한 것인가. 이같은 합리화 과정에 대한 엄밀한 연구는 정신분석학이 진리에 대한 새로운 차원을 열었다. 어떤 사람이 하나의 진술을 진지하게 믿고 있는 사실만으로, 곧 관념 사고 사상으로서의 그의 진실성 여부를 결정하기에는 충분치 않다. 인간 내부에 진행되어 가고 있는 무의식 과정을 이해했을 때만이 비로소 그가 지금 합리화를 행하고 있는 것인지 진실을 얘기하고 있는 것인지 밝힐수 있다.
또 한편, 정신분석학은 진실하지 않은 사고방식, 즉 그 생각을 표명하는 당사자 자신이 부여하는 만큼의 중요성이나 의미를 지니지 않은 사고들에게 관심을 갖는다.
Thoughr과 Opinion- 진실된 사상이냐, 아니면 하나의 의견에 불과할 뿐이냐?
인간의 현실(의식의 심층)을 응시하여 그것이 인간성 전체 속에 뿌리박힌 것이며 감정모체(Emotional Matrix)를 가지고 있느냐의 여부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다. 즉, 관념이란 그 사람의 성격구조에 바탕을 두고 있을 때라야만 강력하다. 어떤 관념도 그 감정모체보다는 강하지 않다. 그러므로 종교에 대한 정신분석적 접근은 '사고체계의 너머에 있은 인간현실을 이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것은 하나의 사고체계(Thought System)가 그것이 그려내는 감정의 표출인가 혹 그 반대 태도를 숨기려는 합리화에 불과한가 하는 것의 규명이다. 그것이 감정모체에 의해 이루어진 것인가, 아니면 공허한 의견에 불과한 것인가를 묻는 것이다.
고로 캘빈의 '예정설'은 신의 사랑에 대한 관념과는 전적으로 모순된다. 종교교리의 배후에 있는 인간현실의 관심은 서로 다른 종교의 배후에 있는 동일한 인간현실을 발견할수 있으며, 같은 종교의 배후에 있는 반대되는 인간현실을 발견할수 있다. 불타,이사야,그리스도,소크라테스,스피노자의 인간현실은 사랑,진리,정의의 추구로서 동일하다. 캘빈신학,나치즘,스탈린니즘의 인간현실은 권력에의 복종, 개인에 대한 사랑에의 결핍등으로 또한 동일한 것이다."
나의 Emotional Matrix는 무엇일까?
헌신하여 나를 부정하여 도피코자하는, 스스로의 균형을 찾고자하는 갈망, 그 갈망은 합리화인가.
그러나 내 믿고자하는 근거는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는 것이다. 태초에 반드시 무언가 의미있는 의지가 있었다. 그리하여 그 의지가 여일하게 역사하고 있으며, 그 의지는 어떤 계획하에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과학과 마찬가지로 성서에 의하여 첫째로 사실이며, 그 후에 논리가 있다. 지극히 귀납적인 종교이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한이 없느냐." -롬 9장-
아이들 묵은 성적표, 상장들 꺼내놓고 혼자서 키득거리며 흡족해 한다.
백여장이 넘는... 늘 1등, 의견란에는 내성적이다,침착하다,목소리가 곱다,통솔력이 있다, 뛰어난 지능이다...
고마운 J, 그리고 나의아이들.
14643 1987. 3. 11 (수)
엎드려 오래 기도드린다.
J가 한시바삐 주님께 인도되기를, 어머니 남은 여생의 순간순간이 주님에서 비롯한 기쁨에 넘치는 것이기를, 형네의 화목과 믿음의 행복이 있기를, 媛네의 화목과 행복을, 모든 친척 친지들 모든 사람들 서로서로 진실한 교통을 통아여 숨김없는 진실한 코이노니아가 아루어지고, 함께 모여 주님을 찬양하며 노래하고, 고상한 덕을 나누며, 묵상하여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행복이 회복되기를, 이 나라에 온전한 민주화가 이루어져 모든 사람이 인간으로서의 가치와 자유와 평등을 누리며, 즐겁게 일할수 있는 풍토와, 핍박받는자 핍박하는자 열등함을 느끼는자 아픈자 우는자를 없이 하시고 폭력과 거짓과 우월의식에 사로잡힌 자를 없이 하시기를.
그리하여 나의 직장도 경영주가 마음으로 종업원을 사랑하여 보람되고 일할수 있는 풍토가 조성되기를....
흐르는 눈물.
이 눈물은 평안이다, 소망이다. 기쁨이다.
주님께 무엇이든 아뢸수 있는 이러한 특권을 과연 누가 가지고 있나.
안정되는 마음밭.
마음이여. 너 인간의 마음이여. 너 불완전한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이여.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여 주신다.
누구든지 죄의 지배하에 있으면 죄의 노예이다.
오직 현명한 사람은 자유하는 사람이요, 우둔한 사람은 노예이다.
너희가 향락과 열락을 추구하면서 어떻게 자유하는 사람이라고 불려지기를 원하느냐>
너희가 참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죄의 사슬로부터 자유하다는 사실이다.'
나는 죄를 미워하지만 동시에 죄를 사랑한다는 세네카의 고백을 묵상하라.
스스로를 사랑하여 이웃을 사랑하자.
헤르만 하아게든의 '쉬바이처 전기'
19세기 말의 유럽 알사스에서 태어난 고귀한 인간.
슈바이처.
우리 동양에 비하여, 특히 우리 한국에 비하여 계몽주의적인 뛰어나게 효율적이고 논리적이고 건실한 이성을 사랑하는 유럽의 지성들의 보편적인 특성- 기독교에서 비롯된 확고한 윤리관, 가치관은 가정에서 마을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국가에서의 보편적 덕목이었다.
그 중 더욱 빼어난 천재적이며 고아한 인격의 슈바이처.
행복한 환경 속의 그는 스물한살 때, 마음 속에 울리는 영혼의 소리를 거역하지 않고 들었던 것이다.
"인생에 대한 忘我的인 기쁨이 그의 마음을 저절로 환희에 차게 하였기 때문에 그가 회피하려고 꾀했고 침묵하기를 바랐던 소리가 이제까지 지껄였던 적이 없는 것 처럼 힘주어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때마다 그것을 거역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던 것이다.
뛰어난 경력, 세상이 알아주는 성공, 명성...
그에게 있어서는 낯익으면서도 매우 막연했던 성경귀절이 그의 의식 속으로 뛰어 들어 왔다.
<목숨을 잃은 자는 그것을 찾으리라><너는 갚음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그는 반드시 누군가에게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다. 그러나 이렇게 아낌없이 주어진 행복을 그는 도대체 어떻게 해서 갚을수 있을까?
서른 살- 예수의 서른 살. 그렇다면 아직 9년이 남아있는 것이다. 9년이 지나면 무엇이 그의 과제가 될 것인가?
그 방법이야 때가 되면 알게 되겠지, 다만 그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것이 문제다. 잊지 않을 것. 다만 약해지지 않을 것. 마음의 불을 꺼뜨리지 않을 일이다. 그 외의 것은 모름지기 하나님의 손에 맡겨저 있다."
그 9년이 거의 되어 갈 무렵, 그동안 그는 철학, 신학, 음악의 박사였다.
그 때 우연히 잡지에서 본 하나의 논문- 불령 콩고에서의 의료의 부족에 관한 것, 흑인들의 미신과 고통과 공포로부터의 구원, 백인으로부터 야기된 그들의 불행-
조용히 그는 결심한다.
다시 의학공부.
그동안 그가 이룩한 신학적인 작품들의 완성, 음악가로서의 높은 수준, 의학의 연구등, 그것은 가히 초인적인 것이었다. 끊임없는 그의 노력에 있어서 가장 큰 것은 수면시간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그는 머지않아 강의도,연구도,설교도,오르간도 없는 아프리카로 가려 한다.
그러나 그곳에는 자연의 미와 자연의 깨끗함이 있을 것이다.
어쩌다가 쉬는 날이면 귄스바하의 목사관으로 달려가 몇시간이고 숲속에 앉아 있거나 포도산의 바위 위에서 새소리,나뭇잎 사이로 부는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이곤 하면서 새로운 에너지로서 일에 임하곤 하였다.
또는 가끔 틈이 나면 성 니콜라이 교회의 어두컴컴한 가운데로 들어가 오르간단에 앉아 전신을 바쳐 행복에 젖은채 바하의 물결에 몸을 잠기는 것이다.
그 와중에서도 헬레네브레스라우와 사랑이 있고.
이것으로 충분하지 아니한가. 그의 위대함은.
아프리카에서의 고난, 업적, 포로로써의 귀환, 재도전, 람바레네의 성자, 노벨평화상, 예수전에 대한 이단적 논문, 바하전기, 문화철학등 그 후의 역정은 오히려 진부하다.
아프리카에 가기전 하나님으로부터 하나의 사명감을 획득하고 그를 위하여 기울이는 그의 정신과 행동은 그것만으로도 이미 나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는 또 한사람의 성 프란시스코였다.
14644 1987. 3. 12 (목)
아티반을 먹지 아니하는 나날.
그로 인한 회색수면따위는 나의 그 분께서 반드시 치유하여 주신다.
꿈- 김지하와 수감된 감옥, 강도, 비밀집회, 정보원들, 어둔 새벽 골목길로 도주하는 발소리들....
새벽기도.
J와 아이들, 어머니, 형네, 媛네, 처가네, 큰처제의 신앙이 올바른 것이기를, 가야숙모네, 마산 풍이형의 직장, 친척 친지들, 이 시대의 이 나라, 인류...
한시간여 엎드려 중언부언 중얼거리면 어느새 홍건한 눈물.
<밤>
지금 우리나라의 민중은 불감증에 걸려 있다.
하도 천연덕스럽게 횡행하는 거짓언어, 거짓행동, 거짓가치관에.
언론은 제 역할을 도무지 수행할수 없는 덫에 걸려 허위적거린다.
진실은 어디 숨어있는지, 언론기본법이란 악법은 가장 먼저 폐지되어야 한다.
변증론적인 역사관에의한 인간의해석은?
인간 이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감과 낙관적인 태도. 미래 언젠가는 이성은 유토피아를 창출해 낼것이라는 믿음.
역사가 오직 그것을 위한 발전과정이라면 그 과정에서 생존하여 명멸했던 사람들은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들의 존재 목적은 목적론을 정당화 해주는 소모적인 도구인가?
지금의 나는 무엇인가? 역사과정의 낭비인가?
그럴수는 없다.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 숨쉬고 있는 나의 소망이!
나의 소망은 집단적으로 도래 할 현세의 유토피아가 아니다.
지극히 개인적이며 실존적인 나의 유토피아.
그것은 내세, 영원한 생명.
바로 그것이다. 이승의 모든 불완전한 것들이 충족되는 그 곳. 그런 곳이 있기에 나의 소망은 언제나 신선하다.
나의 어머니를 위하여서도 그러해야 한다.
한낱 인간이 신이 창조한 질서의 발끝을 더듬고서는 그 논리로서는 도무지 파악될수 없는 무엇이 있는데.
성서의 기록이 주는 진리. 초현실적인 사실을 믿게끔하는 그것이 바로 기독교이고 그것을 온 존재로 믿는 것이 바로 신앙이다.
어떤 인간이 실존의 생을 살아가면서 예수를 본받고자 끊임없이 자신의 본능, 이기심과 싸우면서 베푸는 희생적인 사랑,아가페의 사랑으로 일생을 바치고자 하였을 때, 실증적으로 내세라던가 하나님의 심판같은 아무런 보상이 없다는 확신에 이르러 자각을 하여도, 그는 그 베푸는 행위를 멈출수 없다는 것. 이것이 기독교적 윤리의 조건일 것이다.
파스칼이 말하였던가? 기독교를 믿어 손해될것이 없다고.하나님이 존재하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고, 만일 존재하지 않더라도 덕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가치관을 얻으니까.
기독교적 사고는 인류를 발전시킨다.
서구문명, 특히 청교도에 의하여 정립된 자본주의의 발달이 그것을 여실히 증명한다.
비록 역사 속의 기독교가 세속화되고, 권력과 결탁하여 권력지향이 되고, 샤먼화 되고, 세계대전중 그토록 무력한 기독교였고, 또한 예수를 이리 뜯고 저리 뜯고, 요래 저래 화장시키고, 그 분의 죽음을 이래 저래 두드려 맞춰도 역사 속에 일관되게 흐르는 것은 오소독스한 예수의 정신이다. 과연 현재의 기독교의 근본 정신이 원시 기독교에서 얼마나 벗어 나 있는가? 그 훼손됨은 지극히 미약하다.
서구문화에 나타난 무릇 모든 형태의 것들은 예수의 변형이다.
나는 이제 오토의 '종교입문', 부루너의 '종교철학'을 참된 이해의 욕구를 가지고 독파하리라. 독파하리라.
그리하여 나를 극복하리라.
그리하여 나의 예수 그리스도를 뵈리라.
그리하여 그 푯대를 향하여 옛것은 잊어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그것을 잡으려 쫓아 가리라.
예수께서 설령 메시아가 아니면 어떠랴.
그 분께서 메시아 의식을 갖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면 그 분은 메시아다.
주여, 당신의 종에게 음성을 내리소서.
14645 1987. 3. 13 (금)
왼종일 쉬바이처에 휩싸이다.
그는 자신의 이상을 향하여 결코 쉬지 않았다.
자신의 육체적 욕망을 만족하기 위하여 조금도 휴식하지 않았다.
멈추지 않고 매 순간순간마다 최대의 이상으로만 살았다.
쉬바이처.
독일인도 프랑스인도 아닌 아프리카에 살았던 진정한 코스모폴리탄.
알사스의 프란치스코.
세계는 정신의 지배하에 있어야 한다고 온 영육을 다하여 호소했던 스승이여.
주님.
나도 그 언저리의 정신으로 살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렇게 아내와 살아내어서 "그리하여 우리는 견뎌 냈단다."하고 늙은 얼굴을 마주 보면서 감회롭게 수린이와 俊이에게 그 정신의 얘기를 들려 줄수 있다면...
국가가 아니고, 사회가 아니고 인간이다.
특히 이 시대의 인간은 모두 내면화하여야 한다.
14646 1987. 3. 14 (토)
이도형의 대일 외교사의 이면을 다룬 책 '흑막'.
두나라의 입장에서 객관적인 데이터를 기초로하여 날카롭게 썼다. 대일 외교를 다루는 관료는 필히 읽어야겠다.
의욕과잉이 되어 성급하기만 했던 젊은 5.16 주체들과 노회한 일본의 정객들.
그 사이에 지극히 냉정하게 독립된 주체로서 한국을 인정치 않으려는 편파적인 미국의 정책.
국가적으로 일본과의 외교에서 우리는 얻은 것이 매우 적었으나 박정권은 정치자금의 조달 때문에 조급하게 한일국교 정상화 성립.
당시 나는 대학1년생,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애로써 그 소요의 와중을 경험하였지 않은가.
일용이와 중부서에서의 하룻밤도 겪었고.
몹시 피곤하다.
쉬바이처는 일생을 게으름과 싸우며 일하였는데 요만한 피로함에도 내 몸은 맥이 없으니.
14647 1987. 3. 15 (일)
빛나는 아침, 봄이다.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축복의 계절.
쉬바이처의 뚜렷하고 드높은 목적의식, 현실적인 의미에서도 참된 이상주의자, 그의 철학은 행동이 따르지 않고 사변에만 치우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내가 기독교의 정신없이 쉬바이처를 읽었다면 진실로 그를 이해할수 있었을까? 아마 피상적이고 감상적으로만 그를 느낄수 있었을 것이다.
기독교는 이것 하나로도 나를 깨우처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넓혀지고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오직 나의 그 분께 감사할 따름이다.
쉬바이처의 '예수전 연구사'
"예수- 그는 알려지지 않은 자, 이름도 없는 자로서 우리한테로 찾아 온다. 마치 바닷가에서 그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다가 간것처럼. 그는 그 때와 똑같은 말을 한다. '그대 나를 따르라.'고.
그리고는 그가 우리 시대에 해결하지 않으면 안될 과제 앞에 우리를 가져다 놓는다. 그는 명령한다. 현인에게도, 현인이 아닌 자에게도.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와 함께 자유,활동,투쟁,고뇌를 체험케한다. 사람들은 말할수 없는 비밀가운데서 그가 누구인가를 알게 된다."
"生에의 畏敬! 덤불을 가로지른 오솔길이 그의 앞에 열리었다. 철문이 마침내 열린 것이다!
이제 그는 세계 및 인생의 긍정과 윤리를 포함한 이데(이념)에로 들어 선 것이다. 이제 그는 윤리적인 세계 및 인생의 긍정에 대한 세계관은, 그 문화이상과 함께 이 생에의 외경이라는 사상 속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이성적인 思考로부터의 도피, 아니 사고하는 것 자체로부터의 도피는 당시 이미 인간의 양심에 재앙을 품고 있었는데, 이제는 전에 볼수 없었던 사회적 정치적인 단체들, 심지어는 종교적인 단체까지도 개인 사고의 가치는 하락되고 있었고, 인간으로 하여금 그 독자적인 사고를 집단의 권위에 일체화시키고 있었다.
그리하여 思考의 힘을 이데로 부터가 아니라 강제적인 일치로부터 도출해 내려고 하고 있었다."
이것은 아마 쉬바이처의 그 시대뿐 아니라 현대에 있어서 더욱 두드러진 특성이다.
일종의 프로이트가 말한 Herd Allegiance의 원리-
그 시대에 쉬바이처는 자신에게 주어진 세계에 대한 인류에 대한 사명을 자각한다. 그것은 인간의 잠자고 있는 영혼을 깨우고 思考를 유발케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生에의 畏敬으로 사고한다는 요구와 능력을 재발견케 하는 것이다.
쉬바이처는 참된 계몽주의 철학자이다.
"나는 살기를 원하는 생명의 한복판에 있는 살고자 하는 생명이다."
이 말은 얼마나 신랄한 통찰인지.
"인간은 생명을 부정할수 있고, 그 부정이 투철하다면 자살을 범할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생명을 긍정한다면, 만일 생명이 그에게 있어 의미와 타당성을 갖는다고 생각한다면 그 생의 의지를 심화하고 내면화하여, 다른 모든 생의 의지에 대하여 자신의 생에 대한 것과 같은 외경의 念을 표시하고자하는 충동을 자신의 내부에서 느끼게 된다.
그는 또다른 생명을 자기의 생명가운데서 체험하는 것이다."
"세계는 事象일뿐만 아니라 또한 생명이기도 하다. 세계의 생명에 대해서는, 그것이 내가 접촉하는 범위 안으로 들어오는 한에 있어서 나는 수동적으로 그 생명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능동적으로 그에 대하여 행하는 바가 있어야 한다. 생명있는 모든 것에 봉사함으로써 나는 나의 지향하는 그 이상에 도달할수 있다."
"생에의 윤리는 삼라만상에게 확충된 사랑의 윤리이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필연적으로 인정되는 예수의 윤리이다."
"인류가 스스로의 뜻에 의해 만드는 것 이외에 인류의 운명이라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나는 인류가 몰락의 길을 더듬어 간다는 것은 믿지 않는다.
나는 진리와 정신의 힘을 믿기 때문에 인류의 미래를 믿는다. 나의 스승 괴테는 말하였다. 인간최고의 노력은 자기자신의 길을 인식하고 그 인식 밑에 윤리적인 심성과 행위에 의하여 자기를 초월해 성장해 간다는 목표에 종사하는 것이어야한다. 고.""
"세계사 속에 일어나고 있는 지금의 모든 것은 정신적인 그 무엇위에 올라타고 있다는 사실이다. 만일 정신적인 것이 강하다면 그것은 세계사 속에 반드시 창조적인 힘을 나타낼 것이다."
"생명을 유지시키는 것은 선이며, 생명을 방해하거나 파괴하는 것은 악이다."
"인간은 생명을 파괴하지 않을수 없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생명을 보다 높은 형태에서 유지시키거나 발전시키기 위해서만 그러하다."
"만사가 잘되어 가고 있다고 너의 양심이 너에게 속삭일때에는 경계하라. 만족한 양심이란 악마가 발견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단순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모든 것은 무엇인가를 위하여 살고있다는 사실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날엔 무엇인가에 반대하며 살고 있습니다."
"인생이란 필연적으로 행복한게 아니다. 본질적인 것은 봉사하고 성장하는 것이다. 성장이야 말로 결정적인 것이다. 즉 사랑하는 능력과, 가치가 적은 것을 가치가 많은 것을 위하여 희생으로 바치는 능력에서 성장하는 것이다."
"사색을 포기하는 것은 정신적인 파산선고와 같다. 자신의 사색에 의하여 진리를 인식할수 있다는 확신이 없어진 곳에서 회의주의는 시작된다.
기독교는 사색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자기인식에 이르기 위하여 불가결한 것이었다.
수세기 동안 기독교는 사랑과 자비의 명령을 전통적인 진리로서 신봉해 오면서도 그 때문에 노예제도,분살,고문 그 밖에 숱한 고대 중세적 비인도행위를 배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것은 겨우 계몽시대의 사색의 영향을 받고부터야 인도주의를 위한 투쟁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 과거의 기억이야말로 어떠한 사색불필요론으로부터 기독교를 영원히 수호하는 것이다."
"생에의 외경 윤리는 나의 권리조차도 나에게 속하지 않게 한다. 생에의 외경 윤리는 나의 행복조차도 나에게 함부로 주지 않는다. 내가 무애의 기쁨에 젖고 싶은 순간에 내가 보았거나 미루어 헤아렸거나 하는 모든 비참한 생명을 마음 속에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생에의 외경 윤리는 모든 사람에게 그 생활 사정여하를 불문하고 자기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인간과 인생의 운명에 관심을 갖고, 인간을 필요로하는 사람이 있으면 인간으로서 봉사하기를 강요하는 것이다.
이 윤리는 학자가 설령 그 학문에 의해 세상에 크게 유익한바가 있다손 처도 오직 학문의 길에서만 살기를 허용하지 않는다. 예술가가 설령 그럴지라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이다. 모든 것을 우선하여 그 생명의 일단을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바칠 것을 강요하는 것이다."
1875년에 알사스에서 태어나 1965년 람바레네에서 죽은 또 한분의 프란시스코.
나와 동시대를 잠시 사셨던 성자 쉬바이처여.
남을 미워하는 생각, 다른 생명을 도외시하는 생각, 무위의 일락을 추구하고자 하는 생각, 스승 쉬바이처여. 내게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부어 넣어 주십시오.
당신 생명의 빛을!
14648 1987. 3. 16 (월)
새벽.
며칠만에 무릎꿇어 오래동안 기도하다.
J를 주님께 인도하여 부디 빛속의 여자가되어 고상한 품성의 어머니와 아내가 되기를, 건강한 육체로서 건강한 정신의 여성이 되기를, 俊이가 좀 더 어린이다운 활달한 성격이 되기를, 英이 자기의 얘기들을 부모에게 터 놓을수 있기를, 부모와 자식간에 마음을 터놓고 진실하고 진지한 교류가 이루어지기를, 고상한 관계의 사랑의 가족으로서 英이 피아노반주 俊의 리코오더반주로 나와 J는 이중창의 찬송을 부를 그 날이 도래하기를..
어머니를, 형제들을, 친지들을, 지기들을, 회사를, 사회를, 국가를, 인류를...
그러나 일요일 한낮의 내 집은 무기력으로 가득 찬 분위기. 대화, 교류가 없는 무기력한 가정.
무능함에서 오는 나의 무력감.
좀 더 적극적인 어프로치가 필요하다.
요한1서 소리내어 읽는다.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밤>
이원희대리 한달간 휴직. 만성간염.
어떤 유아적인 집착이 엿보이는 친구.
김형준이 나의 기대에 부응하였으면. 그에게 동기를 부여하자.
지금 이 사회에 참된 논쟁이 존재할까?
내 주위에서도 참된 논쟁이란 없다.
자신의 진지한 떳떳함으로 상대를 설복시키고자 하는 대결의식은 없다.
상대의 진지함은 조금의 아랑곳없이 그저 자신의 일개 의견만 냅다 떠들어대는 독선.
또는 상대의 진지함에 대한 경멸섞인 우월감, 의도적인 무관심의 가장, 무시...
진지할 것 없고 진실되지 않은 거짓 언어들이 난무한다.
참된 논쟁이 없다. 정치판이 그러하고,예술계가 그러하고, 모든 구성조직이 그러하고, 심지어는 벗이라는 관계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이 사회의 풍토는 비극이다.
18세기 유럽이나 서구, 계몽정신에 입각한 그 진지한 풍토와 동양 특히 한국이라는 풍토는 얼마나 다른가?
나는 단언할수 있겠다.
우리는 절대로 일등민족은 되지 못한다.
결코 이웃 일본을 따라갈수도 없을 것이다.
열등 국민이다. 이제 경제가 발달하고 다소 잘살게 되더라도 우리는 열등국민이다.
진지한 사고와 논쟁이 경멸 당하는 사회로서는!
그것은 역사 탓인가? 유교적 덕목으로 길들어 온 겉치레문화 때문일까?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던 몇몇 지도자무리때문인가? 결집된 민중의 힘이 스스로 각성하여 발전하고 상승하여 무슨 위대한 사상을 창출한 적이 있었는가?
왜 진지함이 없고 참된 논쟁이 없는가.
왜 진지함끼리의 진지한 부딪침으로 새로운 진지한 가치를 만들어내지 못하는가?
무조건 굴종이나 승복, 경멸, 무관심 혹은 너털웃음으로 얼버무리기....
이것은 윤리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진실을 진지하게 얘기하고 그것을 진지하게 들을줄 알아야 한다.
진실한 진지함에 대하여 그에 대한 반응으로 무관심, 경멸, 굴종이 있어서는 안된다.
나의 감정모체에서 우러나온, 인간현실에 굳건히 선 나의 이성으로서 받아들이던가 논쟁하여야 한다.
무리 속의 양이 아닌 인간으로서 사고하여야 한다.
모든 인생은 귀한 것이다. 하나님이 찬조하신 생명들이다.
인생은 진지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진지함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그를 사랑하는 것이다.
나는 이제 이것을 안다.
14649 1987. 3. 17 (화)
새벽 기도.
이것은 일상의 혼탁함을 벗어나는 경건의 회복이고, 영혼의 고양이다.
* 기도에 대하여.
감사하는 것.
-하나님의 모든것과 그분이 하시는 모든 역사에 대하여.
-다른 사람과 하나님이 다른 사람의 생애에 행하신 역사에 대하여.
-나의 모든 삶의 환경에 대하여.
어제 저녁.
J는 심각하게 걱정한다. 나의 수입만으로는 앞으로 아이들 교육비등 감당하기 힘들 것이라는.
사실이다.
J는 실제적인 해결책을 강구한다기보다 함께 걱정을 하고 싶은 것이다
무슨 대비가 있어야 하는데, J가 운영할수 있는 조그만 가게...이를테면 동네 책방같은.
그 밑천, 나는 알고 있다. 지금 내 마음 속 믿는 곳은 바로 어머니임을.
내 의식 속에서 이미 나는 알고 있다.
지금 이 상황 조금의 경제의 보탬이 얼마나 큰 것임을.
그러나 J야.
이 작은 아들을 향한 어머니의 무심함, 혹은 경원.혹은 그런 어떤 것.
그런 어떤 것을 짓는 그 표정의 미묘함은 너는 물론이려니와 나라서 알수 있으랴. 하는 그런 얘기란다.
이것을. 이것은 굉장한 통증이지.
이것에 대하여 늘 나의 하나님 그 분께 아뢰지만.
내 생각이 이에 한번 머물기 시작하면 마음의 고통은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나는 아직 멀고도 멀었다.
고재봉의 전기 '죄인오라실 때 나를 부르소서'
도끼로 일가족을 살해하였던 살인마. 그가 감옥에서 기독교에 귀의하고 거듭 태어나 1964년 3월 10일 부평근처 골짜기에서 총살당할 때 마지막 광경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수 없었다.
입회한 목사가 '내가 저 경우라면 저렇게 죽을수 있을까?'하고 자문하였을만큼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면서 그토록 기쁘게 죽었다.
14649 1987. 3. 18 (수)
평소보다 조금 늦은 새벽.
기도. 나의 기도에 Priority가 있다면.
J의 회심, 어머니의 건강과 기쁨, 아이들의 성장, 형네와 媛네의 건강 화목, 처가식구들의 평안...
신변의 사람들에게 더욱 절실한 성숙치 못한 기도일시 분명하다.
오늘은 서울 미아리 살고 있을 젖엄마를 생각하며 기도.
늙고 병들었으면 누가 돌보아 줄까? 저번에 뵌즉 영감님이 훨씬 건강하시니까.
부디 젖엄마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희락을 찾기를.
그리고 어머니...
넓고 썰렁한 보생의원의 아랫방. 그곳에서 옆구리 시려 주무실 노의사.
늘 무엇을 생각하고 계실까?
추억일까? 어떤 회한일까? 무능해 빠진데다가 마음 활짝 열어 마음으로나마 기쁨도 드리지 못하는 자식에 대한 슬픔일까?
아, 관계들이여.
핏줄의 관계,윤리의관계,약속의 관계,관계, 관계들이여.
단지 관계의 어떤 이름뿐인 허울 속에 그 고정관념에만 명맥을 유지하는 슬픈 관계들이여.
쌓아 놓은 마음의 성벽들을 허물라.
진실로 사랑하고 사랑하고, 아파하고 아파하고, 기뻐하고 기뻐하여..
주님.
어머니와 나 사이를, 비옵나니 어머니가 나로 하여금 기쁘도록 하소서. J와 나 사이를 애정과 신뢰로서 회복시켜 주소서. 형과 나사이를 공통의 문제를 도출하여 같이 머리를 맛대게 하소서. 媛이와 나 사이를 허영과 과장을 벗어버리고 진실한 이해가 가능케 하소서.
모든 관계, 실존과 실존 사이.
예수 그리스도로서 사랑을 회복하도록 하소서.
俊 24표 얻어 학급 운영위원. 英이 반장 임명장.
이 정도는 이제 자랑거리도 아닌데 이 아이들이 얼마나 큰 기쁨이고 감사하는 대상인지.
14650 1987. 3. 19 (목)
다시 궁구하는 에리히 프롬.
그는 정신분석의의 목표를 두가지로 분류한다.
곧 그 목표를 '사회적 적응'에 두는 정신분석과 '영혼의 치유'에 두는 정신분석이다.
물론 종교의 영역에 침입한 정신분석은 후자이다.
"환자의 정신병리적인 일반적인 증상은 -의례신경증 (Ritualistic Copulsion), -강박관념 (Obsessional Thuought), -공포증 (Phobia), -망상적 사고체계 (Paranoid Thought System)등이다.
정신분석적 치료의 목표는 일반의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증상을 제거'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 증상이라는 것은 가장 분명히 드러난 것, 즉 신경증세의 가장 극단적인 표현일 뿐이므로 그 증상만 제거한다고 해서 완전한 치유라고는 볼수 없다.
그것은 환자의 성격을 분석하고 성격을 재조정하는 과정에서 환자를 보조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의 정신분석을 찾는 환자는 일반적인 표현으로 '생활에 있어서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다.
정신분석은 그 주안점을 신경증적 증세의 치료에서 신경증적 성격에서 연유한 쪽의 치료로 점점 옮겨간다.
치료목표를 어디에 둘것인가의 어려움이 여기애 있다.
원인이 스스로 내린 결정을 인정할수 없는 그의 무능력이 요소인가? 어린시절의 죄악감,곧 Oedipus Complex나 자위행위, 도둑질이 그 원인인가? 자기처벌(Self Punish)의 경향인가? 또는 그것이 습관성 음주에 대한 것이라면 의미있는 생활을 꾸려가지 못한 것에 대한 단순한 증후에 불과한 것인가?
그러므로 이러한 생활에 있어서의 어려움에 대한 치료는 그 사회와 문화가 시인하고 있는 기존의 행동유형이 정신적인 건강도를 측정하는 기준을 제공한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적 상대주의의 시각으로는 환자를 '평균적인 차원의 고통'으로 환원시킬 뿐이다. 이것이 바로 정신분석의의 '적음상담자 (Adjustment Counselor)의 역할이다."
반면 그가 얘기하는 영혼의 의사 (Physician Of The Soul)의 개념은 이렇다.
"이 관점은 인간의 천성과 인간의 기능중에는 어느 문화에서나 공통으로 작용하는 불변의 법칙이 있다는 전제 위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이 법칙은 개성에 대해 어떤 심각한 위기를 가져오지 않고서는 침해될수 없다. 만일 누군가가 그의 도덕적이며 지적인 통합성을 침해한다면 그의 인간성 전체는 약화되거나 혹은 마비되어 버리기조차 할 것이다. 정신적 건강의 문제는 근본적인 인간적 문제, 즉 인생의 목표가 되는 독립성과 성실성, 사랑할수 있는 능력을 성치한다라고 하는 문제와 분리될수 없다.
여기서, 종교라는 것을 인도주의적 종교의 근본적인 교리에 공통된 태도를 가르키는 것으로 의미한다면 영혼의 의사로서의 정신분석은 아주 명백한 종교적기능을 갖고 있다. 인도주의적 종교는 인간은 진실을 알려고 노력해야하며 이 과업에 성공하는 경우에 있어서야 충분히 인간적일수 있다는 것이다.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존재, 그 자신이 목적이며 다른 어떤 타인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지 않는 것.
이웃과 사랑으로 관계 맺어야하며, 만일 사랑을 소유하지 않는다면 설사 모든 권력과 부와 지성을 소유하고 있다 할지라도 빈껍질에 불과하다는 것.
선과 악을 구별할줄 알아야 하며 자기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따를수 있는 능력을 깨우쳐야 한다는 것."
그러므로 에리히 프롬은 종교의 기능을 영혼의 치료로서의 정신분석이 담당할수 있다는 것인데.
정신분석이 간과하고 있는 기독교적 특성은 어찌할 것인가?
프로이트의 기본이론.
프로이트는 Oedipus Complex가 모든 신경증의 중심이 된다고 주장한다. 곧 어린애는 자기와 반대되는 성을 가진 부모에게 애착심을 가지며 어린애가 이와 같은 소아기 집착 (Infantile Fixation)을 그복하지 못한다면 정신적 질환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근친상간적 충동 (Incestuous Impulses)이 인간에게 깊게 뿌리박힌 충동이라는 것이다. 근친상간의 본질은 같은 가족구성원에 대한 성적갈망이 아니라 실제로 현실에서 나타나는 것은 자신을 보호해주는 사람에게 집착해서 여원히 어린애로 남아있고 싶어하는 월씬 더 근본적이며 뿌리깊은 욕망을 표현하는 것이다.
"유아적 집착에서의 탈출- 육체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정신적인 의미에서 탯줄을 잘라낸다는 것은 인간 발달에의 위대한 도전이며 또한 가장 어려운 과제이다.
자신을 독립된 실체로 보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며 자기자신이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는 임무, 즉 '자기 손안에 자기 이성을 받아 들인다'라고 하는 불안한 체험을 회피하려 든다.
귀속감이 주는 만족을 향유코저 하는 것이다.
완전한 인간존재가 되는 것. 자신이 지닌 이성과 사랑의 힘을 발전시키는 것에 실패하고 계속 의존하는 상태로 남아 있으며 이런 원초적인 유대가 위협을 받는 순간에 표출되는 불안감을 지닌다.
정신적이며 정서적인 모든 행동은 자기의 원초적 집단의 권위와 결부되어 있고 따라서 자신의 신념과 통찰력도 그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는 애정을 느낄수도 있지만 그 애정은 동물적인 따스함의 애정일뿐 자유와 독립성을 전제로 하는 인간적인 것은 아니다.
근친상간 지향성의 인간은 자기와 비슷한 사람에게서 친밀감을 느낀다. 그는 알지 못하는 사람, 즉 참다운 인간으로서는 타인과 친밀하게 사귀지 못한다. 선과 악, 진실과 허위에서 감정과 관념이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낯선 것인가 익숙한 것인가에 따라 판단된다.
예수의 말씀 '내가 온 것은 아들을 그 아비에게서, 딸을 그 어미에게서 갈라서게 하기 위해서다'는 것은 근친상간적 유대에서 벗어나 자유로와 지라는 말씀이다.
사회진화의 과정중에서 그 소아적 집착, 근친상간적 집착은 또 다른 집착으로 그 자리를 대신한다. 종족,국가, 인종, 민족, 사회계급, 정당, 제도, 조직등...
진정한 인류의 발달은 근친상간으로부터 자유로의 발전이다.
자신의 아내에 대한 참된 사랑은 근친상간적 추구를 극복했을 때만이 달성될수 있다.
이성의 성장과 일체의 합리적 가치판단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친근도를 근거로 한 선,악,정,불의 판단기준을 내세우는 근친상간적 집착을 극복해야만 한다."
결국 프로이트는 종교에의 집착 역시 근친상간적 집착으로 보고있는 듯 하다.
그의 반종교론은 그러니까 종교가 인간을 구속과 의존 속에 갇히게 하고 따라서 인간실존의 지상 과제인 자유와 독립성을 획득하지 못하도록 하고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확실히 종교에는 그러한 측면이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아, 하나님....
14651 1987. 3. 20 (금)
새벽 기도.
이것을 경계하기를.
지적 허영에 빠져 드는 것. 그리고 그 지식의 풍성함을 느끼는 그것이 바로 허영이라는 사실인지를 멈추지 말 것.
정신분석가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
그들은 이성으로 획득하는 궁극적인 목적, 독립. 사랑에 대해서만 얘기하고 있으나 이성이 아닌 영혼으로 획득하는 그 무엇을 도외시하고 있다.
신비주의로 매도할테지만.
<밤>
회사의 비상.
기본설계의 계산착오. 무게중심 계산의 실수다.
약 500톤의 선체가 선대에서 내려가다 멈추었다. 선대경사 1/17, 모든 모멘트는 선대의 B구간에 걸려있고, 만조 때의 Draft는 선미 약 1.5M. 이것을 부양시켜라하는 과제로 현장은 비상이다.
그리고 모든 기술진의 연구와 노력으로 결국 부양에 성공.
조선소의 현장, 긴장, 씨발.좆도!의 연속 발음.
다시 에리히 프롬.
그는 종교적 체험을 세가지 측면에서 생각한다.
"첫째, 경이의 감정이다. 삶과 자신의 존재 및 자신과 우주가 맺고있는 관계의 수수께끼같은 문제에 경탄하고 놀라며 그것을 인식하는 것.
둘째, 궁극적인 관심이다. 삶의 의미와 인간의 자기실현 및 인생이 우리에게 부과하는 과제를 달성하는데 대한 궁극적인 관심.
셋째, 우주와의 일체감을 느끼는 태도이다. 예리하면서도 고통스럽기도 한, 분리되고 독특한 실체로서의 자아에 대한 인식과 이런 개별적인 유기체의 한계를 부수고 전체와 일체가 되려는 갈망."
여기서 에리히 프롬은 명백한 과오를 범하고 있다.
어찌 종교적 체험의 감정이 경이,관심,일체감 뿐이랴.
영혼의 눈이 열려 체험하는 온갖 것들- 바울이 갈파하는 성령이 주는 은사들의 감정 경험들은 무어란 말인가.
또 오토가 종교입문에서 얘기하는 '누미노제'라는 개념은?
어쨌거나 에리히 프롬의 논의는 계속된다.
"경이의 문제- 환자가 지금까지는 결코 의식하지 못했던 자기존재의 한부분을 발견하고 경이에 차게 된다는 것.
또한 한사람의 꽉 닫혀진 자아구조 (Ego)를 부수고 자금까지 자아중에서 배제되고 분리되었던 부분, 즉 무의식과 접촉하게 된다는 것은 한 개체를 벗어나 전체와 동일감을 느끼는 종교적체험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무의식을 마치 신이라던가 악마라던가 하는 태도로 접근해서는 안되며 겸손하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다른 부분을 볼수있을만한 깊은 유모어감각을 지니고, 공포나 외경의 생각없이 접근해야 한다.
무의식은 인간내부중에 있는 모든 잠재적 가능성중 오직 한정된 부분만을 실현시키고 있다. 우리의 짧고 한정된 삶만큼의 것만을, 무의식이라는 이 분리되었던 세계와의 접촉을 통하여 인간은 억압의 원리대신에 침투 (Penetration)과 통합 (Intergration)의 원리를 깨닫게 된다. 억압은 힘의 행위, 자르는 행위, 법과 질서의 행위이다.
자아와 자아가 발생하는 비조직화된 생명사이의 연관관계를 끊어버리고 우리의 자아를 완결된 것, 더 이상 성장하지 않고 죽어버리는 것으로 만든다. 억압을 해소하는 과정중에서 자기자신에게서 살아가는 과정을 느끼고 질서에 대한 신념이 아니라 인생에 대한 생명에 대한 신념을 지닐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 알겠구나. 그들은 이제 정체를 드러낸다.
신은 환상이고 신의 실체는 바로 무의식을 포괄하는 인간 내부에 잠재된 그 무엇이다라는.
다시 그가 논하는 종교의 특정적측면과 그에 대응하는 정신분석학적 측면.
" * 체험적 측면-
이것은 종교적 감정과 헌신이다. 종교적태도에 대한 위협은 과학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배적인 일상생활의 현실 속에 있다. 이를테면 기계의 노예, 효율성과 성공만의 추구, 소위 시장지향형의 인간군, 개성시장 (Personal Market)에로의 상품화.
이러한 환경안에서 인간자신에 대한 가치관념이 극심하게 침해 당한다. 그는 타인으로부터 동조를 얻기 위하여 끊임없이 그것을 필요로 한다. 여기서 나타나는 불가피한 결과는 무력감과 불안감이다. 시장지향 속에서 인간은 자기정체성을 상실하며 마침내는 스스로에게서 소외되는 것이다. 최고 가치가 성공이기 때문에 사랑,진리,정의,온유,자비등의 덕목은 그에게 아무 소용이 없고 이런 이상을 스스로 숭배한다고 생각하거나 공언할지라도 내부의 진실로서 그것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시장지향적인 목적들을 이상화시키는 것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다. 내면적인 공허가 교회나 종교라는 피난처를 구하도록한다.
* 과학적,주술적 측면(Scientific, Magical)-
과학과 기술의 발달, dll 기도하지 않았던 소원들은 그의 힘으로 만족시킬수 있는 것들이다. 과학과 기술이 진보할수록 종교가 지니고 있는 과업(종교적 체험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단지 역사적 의미에서의 종교적 과업) 은 더욱 줄어 들었다. 서양의 종교는 과학적 주술적측면을 종교체계의 본질적인 부분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지식의 진보적 발전에 따라 서로 대립된다. 세계는 유한한가? 우주는 영원한가? 지구는 둥근가? 하는 따위의 과학적 규명.
현대에 있어서 종교와 과학의 갈등은 더욱 예리하여 젔다. 그러므로 창조론이 과학적 가설로 수용된다고 하여도 그것은 종교의 과학적 측면이지 종교적측면은 아닌 것이다.
* 의례적인 측면-
의례는 모든 종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중 하나이다. 비합리적인 의레는 세척강박(죄악감을 씻어냄), 자기처벌의식,강박의례등으로서 종교의 의례적인 측면의 중요한 부분을 이룬다.
반면 합리적인 의례는 억압된 충동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그 개인에 의해서 바람직한 것으로 인식되는 추구의 표현으로서 사람의 인사,칭찬의 박수, 경의의 표명등이 있다.
* 어의론적(Semantic) cmruas-
교회의 상징언어들... 꿈의 언어, 곧 신화의 언어등..."
에리히 프롬의 이러한 논의는 대부분 사실이고 전적으로 공감하는바가 있다. 그러나 그는 종교를 매우 지엽적으로 편협한 눈으로 바라본다는데 문제가 있다. 정신을 분석하다보면 필경 그렇게 도달하게 되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계몽주의 시대 이후로 종교를 주제로 삼았던 토론은 주로 신에 대한 신앙을 긍정할 것인가 부정할 것인가에 두어젔지, 특정한 인간적 태도를 긍정할 것인가 부정할 것인가에 두어지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신을 믿습니까?'가 아니고 그의 종교적 태도의 배후인 것이다."
"I am that I am = I am being that I am being.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다.
일신교의 논리적 귀결에서는 신의 성질에 대한 논의가 생겨 날수 없다."
"우상숭배의 본질은 어떤 특정 우상의 숭배가 아니라 특정의 인간 태도이다. 이를테면 국가와 권력의 신성화, 물질의 최고가치화, 기계와 성공의 신성화."
"인간이 종교가이든 아니든 간에, 새로운 종교를 믿거나 혹은 무종교라는 종교를 믿거나간에, 유태교,그리스도교,불교를 믿거나간에 중요한 것은 껍데기가 아닌 종교의 본질에, 언어가 아니라 체험에, 교리가 아닌 인간에 관심을 두는 한, 인간은 서로 함께 우상숭배를 부정하기 위해 뭉칠수 있으며 신에 대한 어떤 긍정적 진술에서보다 이와 같은 부정에서 더 커다란 공동의 신앙을 발견하게 되고 보다 깊은 겸손과 인간애를 찾을수 있게 될 것이다."
이로써 그의 논의는 끝났구나.
14652 1987. 3. 21 (토)
어머니 잔득 감기에 걸리셨다.
오전 찾아가다.
또 무슨 의료사고에 노심초사하시다 감기 걸리신 듯.
언제쯤 은퇴생활을 하시게 될까?
그러나 병원일마저 손을 놓으신다면 갑자기 더 늙어버리실지도 모른다.
보생의원 그 자리에 건물을 짓고 어머니는 일층 병원, 형네와 우리는 위층에서 오손도손 함께 사는 공상을 하여 보는데 그 그림은 공상만으로도 여간 즐거운게 아니다.
어머니의 고민은 무엇일까? 어머니의 행복한 느낌은 어느때에 오는걸까? 어머니의 보람은 어디에 있을까?
어머니의 실존의 색깔에 전혀 문외한 이것이 형아, 비극인줄 알자꾸나.
뵌 큰고모님은 꼬부랑 파파할머니...
14653 1987. 3. 22 (일)
찌푸린 날씨.
회색빛 바다 풍경.
J 배가 몹시 결리는 듯.
내일 복음병원 가 보겠단다.
장년이면 배가 나오는 법이라고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은 했지만 미상불 걱정이 된다.
J가 건강하여야 한다.
그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안색이 썩 좋지 아니하고 요즘들어 부쩍 늙은 티가 난다.
뭉쿨 솟는 연민은 그러나 언어가 되어 나오지 아니한다.
J의 건강, J의 회심을 기도하자. 끊임없이.
베토벤의 현악사중주 F장조. 라잘 사중주단.
참 좋다.
처음 들었을 때 현대음악처럼 난해하다고 생각하며 들었는데 몇번 듣는 사이 이렇게 단순하고 아름다운 곡이라니.
하나님을 찬양하는 음악은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이지만 또한 인간에게 들려주려고 만든 위대한 음악가의 예술도 고귀하고 아름답다.
모든 예술 장르중 특히 음악은 역사를 여일하게 관통하고, 공간을 꿰뚫는다.
어느 매니아는 한 장의 음반을 구하기 위하여 피를 뽑아 판다고 하는데 음악행위는 수동적인 감상인가 능동적인 행위인가. 청중의 귀인가 연주가의 귀인가...
어리석은 질문이다.
14654 1987. 3. 23 (월)
새벽기도.
밖에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다.
펜테코스트 계통의 초현실적인 체험들.
성령의 강림, 방언, 기적...
기독교는 이성과 논리를 뛰어넘은 곳에 있다.
오순절 계통의 신앙은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물이 이른바 불세례, 획득하여 얻는 상이 아니다.
요즘 한창 놀랍도록 부흥하는 순복음교회. 원시교회때의 성령의 역사가 중세를 잠자고 계셨다가 근래에 저토록 뜨겁게 역사하심에는 어떤 이유가 계신가.
오순절 교회의 그것들이 정서적인 거부감이 있더라도 그것은 진실이다.
'나의 눈물이 나의 노래가 되어'읽다.
일본 목사의 아내, 남편이 쓴 수기. 암투병후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
그 훌륭한 믿음의 모습은 나를 흐느껴 울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14655 1987. 3. 24 (화)
불면의 괴로움에 겹친 혔바늘의 괴로움.
꼭두 새벽 일어나 오래동안 엎드려 기도.
-골로새서 3장-
-에베소서 5장-
기도원이라는 데를 가보았으면.. J와 함께.
그곳에서 하나님과 직거래를 하고 싶다.
14656 1987. 3. 25 (수)
새벽 기도.
세상 일을 위하여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가족을 비롯한 땅의 모든 일들을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주님이 내게 주신 것이 있다면 주님의 그 소명을 가르처 주소서.
주님께서 내게 생존의 뜻을 주셨으니 그 뜻을 계시하사 그 뜻데로 살게 하소서.
지금 나는 세상 것들로 부터벗어나고 싶습니다.
주님의 빛, 그 기이한 빛속에서 살고 싶습니다.
아, 주님은 어디 계신가? 내 기도 언저리에 계셨을까?
어제 J 병원 다녀오다.
3개월 후에 다시 검사.
* 기도에 대하여.
-간구하라. 원하는 것을 솔직하게 구하라.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오 (약4)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오 (마7)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26)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 못 구함이니라(약4)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고전10)
-성급한 태도를 버려라.
-저는 주님의 뜻을 원하지만 주님의 뜻을 잘 모릅니다라는 마음가짐.
-지속적으로 경건하게 성경을 읽어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느껴라.
-100% 주님의 뜻, 0% 나의 뜻.
-내가 나의 전체를 드린다면 그 분도 내 전체를 돌려 주실 것이다. 그 분이 돌려주실 때에는 향상된 인격과 향상된 삶으로 하여 주신다.
-나는 내가 성취할수 있는 능력을 구했으나
주님은 내가 순종하도록 약함을 주셨네.
-나는 내가 더 위대한 일을 할수 있은 건강을 구했으나
주님은 내가 더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은혜를 주었네.
-나는 내가 행복해질수 있는 부귀를 구했으나
주님은 내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도록 가난을 주셨네.
-나는 내가 찬양의 사람이 되도록 능력을 구했으나
주님은 내가 하나님의 필요를 느끼도록 약함을 주셨네.
-나는 내가 삶을 즐길수 있는 모든 것을 구했으나 주님은 내가 모든 것을 즐길수 있는 영생을 주셨네.
-나는 내가 구하며 소망한 모든 것을 하나도 받지 못했지만
나의 기도는 응답되었네.
"사랑하는 아버지여. 나는 당신의 수중에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징계의 채찍아래서 몸을 구부립니다. 나의 등과 목을 때리시어 나의 사악함을 당신 뜬대로 바로 잡아 주소서.
당신께 나 자신과 나의 전부를 맡기오니 바로 잡아 주소서. 당신은 만사를 전체적으로 모두 아실뿐아니라 개별적으로도 아시므로 사람의 마음속에는 당신에게 숨길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신은 내가 영적으로 발전하는데 있어 무엇이 긴요한지 아시고 아무리 가혹한 환난일지라도 내 죄의 녹을 뻣겨 내는데는 도움이 된다는 것도 아십니다. 당신은 누구보다도 나를 잘 아시므로 당신께서 원하시는바 뜻대로 나를 처리하시고 나의 죄많은 삶 때문에 나를 경멸하지는 마소서." -토마스 아 캠피스-
14657 1987. 3. 26(목)
어제 이원희대리 문병후 과원들, 설계팀과 마시다.
문을 열어 주십시오.
너무도 가혹하게 사무쳐 오던
고난의 멍든 세월을
다시는 기억치 않으렵니다.
죽음보다 갑갑하고 어둡던 시간
당신의 不在로 인하여
아픔이 피와 같던 시간을 탄식하며
무덤 밖에서 절절히
목메어 울었었거니
굳게 닫힌 뭠의 문
훌훌히 죽음의 옷 벗으시고
이렇게 찬란히
빛속으로 살아 오셨습니다.
아아 스승이여.
슬프던 노래를 땅 속에 묻고
승리의 흰 깃발 흔들며
매양 떨리던 가슴으로
다시 살은
나의 기쁨.
당신의 부활로
해맑게 트인 영광의 새벽
내 부끄러운 길을
빛부신 사랑으로 씻어주신 님.
이제는 결코
놓지 않으렵니다.
내 모습
길이
당신 보며 살으리니
유일한 나의 삶은
사랑하는 것
죽는 것
주여.
오십시오.
열어 주십시오.
-이해인 '부활의 아침(막달레나의 노래)'-
14658 1987. 3. 27 (금)
출근 전 듣는 슈벨트의 리트.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노래가 무어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치않고 슈벨트의 리트- 그 중에서도 연가곡 '겨울나그네'라고 말할 것이다.
제랄드 무어의 그 겸손한 반주로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가 부르는 이 노래들은 영혼을 따뜻하게 울린다.
모처럼 찬송가 테잎대신 듣는 아침의 슈베르트.
<밤>
회사에서의 일상을 지내고 나면 새벽의 경건은 휘발유처럼 증발하고 만다.
무엇인가 전혀 다른 무엇이 찾아 와 줄것같은 마음- 막연히 기다리는 전혀 다른 색깔의 삶.
그것을 기다리느라 현실은 나태하다.
치열하게 주어진 현실을 살아가지는 못한단 말이냐?
나태함. 나태함.안일함. 안일함.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귀중한줄 모르는 너 게을러 빠진 정신의 서글픔이여.
영혼아 깨어 있으라. 정신아 너 잠들지 말라.
행위야 너라도 먼저 나서려므나.
쉬바이처를 생각하라.
네게는 신비주의의 다른 차원의 무엇도 도래치 않는다.
그것은 네 영혼이 깨어있고 정신이 명징함으로 하여 너의 주님께서 주시는 신비주의이다.
게으른 너여. 상헌이여. 게으른 짐승이여, 원숭이여.
14659 1987. 3. 28 (토)
새벽기도.
엎드려 줄줄 흐르는 눈물.
지적 허영심에서 유발한 교만으로 주님께 기도드리는 경우가 있음을 기도중 문득 깨닫는다.
가히 벌레와 같은 지식으로 주님과 대화하려 하다니!
자꾸 조율하여야 한다. 나의 영혼과 정신이 교만해지지 않도록. 자만에 빠지지 않도록, 안일하지 않도록, 나태하지 않도록, 감사의 마음이 사라지지 않도록, 주님의 기쁨이 기쁨이 아닌것처럼 느껴지지 않도록.
오직 진리만이 자유케 한다.
나는 이제 그 진리의 맛을 조금쯤 보지 않았는가.
사랑이다. 온유다. 가난이다. 성경에 통일되고 일관되게 흐르는 그 덕목의 분위기에서 벗어 나서는 안된다.
그것은 우주와 자연계와 역사속에서 제시될수 있는 모든 명제에 우선하는 진리의 빛이다.
다른 종교에서나 역사속 어떤 윤리룰 속에서도 때로 그 빛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온통 그 기이한 빛으로 이루어진 것은 바로 주님의 말씀 뿐이다.
아, 기도는 나를 정화시키고, 나를 정리케하고, 스스로를 깨닫도록 하고, 나를 고양하여 상승케하여 나를 기쁨 속에 떨게 한다.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요한1서 1장-
<밤>
엘리 위젤 '신의 약속'
러시아의 유태시인 팔티엘 코소버의 방황. 2차대전 전야, 혼돈의 역상의 場, 유럽의 황혼, 나치즘,공산주의자,무정부주의자,레니즘,트로츠키즘,스탈린니즘..온갖 주의의 난무.
처음 팔테엘 코소버는 주의를 신오 오인, 그러나 그는 유태인, 베낭속 유태교 부적의 중압감, 유태민족의 기억, 형이상학적인 신과 형이하학적인 유물변증법과의 갈등과 투쟁.
"<기억해야 할거요. 민족의 언어는 기억이며 기억은....> 총알이 내 옆을 스처지나가고 시인은 쓰러졌다."
엘리 위젤의 18번째의 작품.
그의 초기작품인 '밤'을 일어 보고 싶다.
'신의 약속'에서는 그 초기의 분노를 사랑과 화해의 정신으로 승화시키고 있다는데, 그 참혹한 끝없는 절망을 분노로 표현한 '밤'은 어떤 소설일까?
그런데 엘리 위젤은 문학상이 아닌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는데 무슨 공로로 받은 것인지?
교회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본다.
무교회주의- 김교신, 우찌무라 간조,함석헌 혹은 조성기의 집회등...
의식있는 개인으로서의 신앙, 이상적인 교회의 형태, 원시기독교의 순결함.
생각컨데 교회라는 집단체제가 하나의 표준화된 신앙적 인격체의 양산이 되어서는 안되리라.
Personality는 하나님께서 주신 개인적 특권이고 달란트이기도 할 것이다.
이 개성이라는 개념이 원죄라는 개념과 연계시킬수는 없다. 하나님은 그것을 의미를 가지고 주신 것이다.
예정의 교의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결코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하여, 죄 속에서 진화하여 생겨난 것이 Personality는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타락전의 인간, 혹은 내세 하나님의 나라에서 지복을 누리는 인간이라는 것은, 즉 지고지순한 인간의 본질은 개성이 없는 표준화된 동일체로서의 그것은 아닐 것이다.
단지 개성의 성질이 다를 뿐이다.
사람마다 하나님께 이르는 길은 그 개성만큼 다를 것이다.
진실로 나는 나의 지적 허영심이 아닌 순정한 마음으로 아무런 갈등없이 행복한 교회인이 되는 것이 가능할까?
이 문제에 대하여 토로하고 의논할 상대가 없구나.
책 속의, 문자 속을 헤매이는 것 말고 순결한 크리스찬끼리 모여서 아주 민주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고 순결한 코이노니아를 이루고 그러하였으면...
J여, 어서 주님께 회심하고 우리 가정교회를 만들자꾸나.
14660 1987. 3. 29 (일)
사랑이라는 것에 대하여 생각한다.
육체적으로 서로 끌리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지 말 것. 육체는 유한하고, 그 아름다움은 극히 일시적이고, 다시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곧 스러지게 마련이다.
이성간 외모에 끌려 매력을 느껴서 도취의 감정에 휩싸이는 것, 그리하여 사모와 애정의 염을 스스로에게서 도출해 내어서, 스스로 그것을 화려하게 치장하고 자신이 자신에게 속아서 드디어는 그 거짓 속으로 함몰해 버리는 것.
예전 나는 얼마나 어리석었던지.
아름다움은 절대이고 내가 느끼는 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은 여자라면 무조건 사랑할수 있다는 착각속에 있었었지. 소설 속의 온갖 로맨스, 비련에 눈물짓고 한숨지며 그것이 사랑이고 그 사랑의 열정 속에 함몰한다는 것이상 순수한 감정은 없을 거라고..
게다가 내가 느끼는 아름다움이란 또 얼마나 거짓가면을 쓰고 있던 것인지.
교양, 말씨, 감각, 부유함, 하다못해 세련된 미각에까지 아름다움으로 착각하게 만들곤 하였는데 스스로 그것을 의식치 않으려 하였고.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결코 그런 것이 아닌데.
14661 1987. 3. 30 (월)
형에게서 얻은 티켓으로 김철수와 함께 대우합창단 음악회.
윤학원씨의 대우합창단은 그 음악만으로 가히 나를 상승케 하였다.
대우전자의 브라스 밴드는 사족이었고.
전번 연주에 비하여 레파토리는 다소 안일하게 잡은듯한데 그것은 대우창립 20주년 경축의 기념으로 대우 근로자의 취향을 고려하여 그럴 것으로 이해한다.
첫 번째 G장조 미사곡- (현대음악.불협화음.화음의 갈등과 충돌.리듬의 불균형 云云하는 지휘자의 설명이 있었는데) 나는 충분히 감동적으로 들었다.
오직 빼어난 순수한 기교만으로.
가히 윤학원이 만들어내는 목소리의 앙상블은 신선들의 목소리였다.
英이에게 들려주고 싶은 것이 바로 이런 합창곡이다.
합창이란- 절제이다. 개성의 희생과 절제로서 더욱 화사한 생명이다. ...앙상블이란 불어 단어의 적절함.
음악은 하나의 공간. 공간의 앙상블은 아름답고도 아름답다.
시간의 앙상블은 어떠할까?
이것은 하나님의 앙상블. 하나님이 연주하시는 원대한 역사의 앙상블. 그 하나님의 음악 속에 나는 단지 하나의 음표일 뿐이지만 그 아름다운 하나님의 연주는 나의 차원이 아니지 않는가?
내가 행복해하는 앙상블은 오늘 합창의 음악이었다.
누구인가. 사람의 목소리를 만드시고, 그 목소리들을 합하여 고함이 아니고 음악이게 하신 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