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82 1988. 9. 1 (목)
무수한 체험의 현실적 경험의 기억과 그 기억을 변형시키는 예술적 상상력, 곧 데포르마숑-
그리고 꿈꾸는 이상과 자의식, 심층심리의 세께가 만들어 주는 그림들.
이러한 온갖 편린들이 믹서되어 꿈으로 나타날 것이다.
간 밤에도 여러 색감의 꿈을 꾸다.
화장실에서 읽는 한수산 '안개'
한수산 특유의 문체, 선하고 서정적이다. 70년대 암울한 정치적인 상황에서 신흥도시의 공해가 만들어 놓은 자욱한 안개, 그 불투명한 공간을 술이 취하여 고뇌하고 악을 써대는 젊은이들..
15183 1988. 9. 2 (금)
한결 선선해 지다.
어머니는 6일경쯤 대동아파트로 이사가실 듯.
피곤한 저녁.
9시가 이제는 어둡다.
英이는 아직 학원에서 돌아오지 않고 있다.
15184 1988. 9. 3 (토)
토요일, 민방위훈련.
간밤의 회색 수면.
그로 인해 작은 뇌곁에 붙어 다니는 두통.
이 두통을 다스리는 것은 참 아슬아슬한 줄타기이다.
오후 5시경.
미친 듯 퍼붓는 소나기.
잔업취소명령.
5시 조금 넘어 잔업취소명령하였다.
그런데 지광혁씨 '과장님 면회 좀 합시다'하고 찾아 와 신랄하게 따지고 든다.
노조 부위원장 사표냈다는 지광혁.
잔업시간중 잔업취소명령의 부당함을 어필하는 것인데...
노조 사무실도 시끄럽게 떠들어 대고.
이런 문제도 골치를 더 아프게 하누나.
15185 1988. 9. 4 (일)
교회가 한 눈에 내려다모이는 내 집 베란다.
믿는 사람들이 들고나는 교회의 앞마당이 빤히 내려다 보인다.
저 곳, 그리운 에클레시아. 그 안의 코이노니아의 세계는...
저 동삼교회를 나는 연모하는 것으로 그치려는가.
빗발 흩날리는 오후 한때.
바다는, 먼 바다는 그저 짙푸르다.
오후 J, 아이들 함께 나가 탕수육과 덴뿌라.
나는 소주 한병.
즐거워하는 아이들.
15186 1988. 9. 5 (월)
하루 종일 내리는 비. 부슬부슬.
가을을 재촉하는 비.
그 빗속에 현장은 현장답지 않게 이상하게도 안온한 풍경이다.
비 때문에 큰 집 이사는 순연.
15187 1988. 9. 6 (화)
새벽 일어나 화장실에서 1년전의 일기장 본다.
불과 1년 6개월전, 나의 신앙은 적어도 지금보다는 진지하였다.
갈등을 유발시키는 명제들과 떳떳이 맞서고자하는 열정은 있었다.
그 열정과 진지함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두려움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
한갖 불면이라는 놈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직장에서의 현장이라는 놈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그리하여 그것들에게 덜미가 잡혀서 질질 끌려 다니는 꼬락서니라니.
나의 하나님은 얼마나 웃으시겠는가.
참 형편없는 놈이로고.. 참 형편없는 놈이로고...
英이 방 불 끄고 어둠 속에 엎드려 기도.
15188 1988. 9. 7 (수)
어제 직반장들과 회식.
삼계탕먹고 동그라미홀.
장직장은 가장 고참직장으로서 역시 노숙하며 믿음직하다.
춤들은 언제 그렇게들 배웠는지.
음주후의 현장.
버텨내기는 역시 힘들다.
어느 때인가. 때가 오면 절주에 단호하리라.
절주라니! 금주라는 표현에는 감히 자신이 없는 상헌이라는 놈의 의지의 슬픔이여.
어제 어머니 이사.
어제에 이어 오늘도 J는 떡해들고 간다.
어머니 쓰시던 책상을 베란다 내 공간에 갔다 놓고 의자에 앉아서 밤 숲에서 우는 풀벌레 소리 듣는다.
가을이다.
계절은 여름의 오르가즘을 겪은 후의 조락함이 아니다.
새로운 자연의 어프로치이다.
가을도 역시 새로운 도전이다.
다만 약간 쓸쓸할 뿐이긴 하지만.
15189 1988. 9. 8 (목)
새벽.
화장실에서 한수산 '난중일기' 완독.
안개가 알레고리로서 작용하는 혼탁한 젊음의 의식 속에서 절실하게 생각하는 이순신장군의 자살. 젊을 때 진땀을 흘리며 인식하는 역사라는 것.
英방 불 밝혀 갈라디아서.
그리고 불 꺼 기도.
<밤>
영혼의 치열함이 없는 일상.
한 마리 갑각벌레처럼 그 표피에 느껴지는 냉온의 감각에만 반응하는 존재.
이 곳, 새로운 베란다의 공간에 앉아서 일년반 전의 기록을 읽으면, 니금의 나는 부끄러움이라기 보다 어떤 식의 참혹함이 앞선다.
오늘 한낮은 왜 그토록 무기력하였는지.
아랫도리에는 힘이 하나도 들어있지 않고 그저 가라앉고 가라앉아 푹 잠기고 싶은 마음 뿐,
하나님의 어떤 메시지일까?
이 나의 공간.
이 책상이 주탁이 되지 않도록.
이 곳이 경건의 장소로,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 곳으로.
15190 1988. 9. 9 (금)
아침의 바다.
일출.
온통 붉음으로 가득 차.
비스듬이 휘장처럼 동쪽 하늘에 드리워진 구름을 통하여 태양은 짙디 짙은 자주빛이다.
그 태양은 붉은 조명으로 하늘을 번지고 바다를 물들인다.
아름답다.
英이는 전번 우천으로 연기된 체력장 시험 보러 일찍 나섰다.
나가는 누나의 등위에 대고 혀를 차며 하시는 俊이의 말씀.
"연습이나 좀 하고 가는지.."
이 녀석은 우리집의 시어머니, 자상한 내숭쟁이이다.
요즘 기상할 때 이부자리를 벗어나는 일은 고역이다.
포근한 이부자리 속...
그러나 조금 후면 연이어 연휴가 있고, 일주일 후면 서울 올림픽, 또 그 일주일 후면 추석, 또 그 일주일 후면 공휴일의 연속.
어느 재벌은 아침이면 늘 설레이는 마음으로 문을 나선다는데.
15191 1988. 9. 10 (토)
혼미한 수면.
무엇이 나를 강박하는가!
꿈. 꿈.
우리 집 안방에 누워 서서히 운명르 맞으시는 어머니, 명료하게 당신의 죽음을 인식하시는 모습. 나는 만학의 대학생. 거리는 온통 학생시위. 그런 상황에서 어머니의 임종을 맞는데 우왕좌왕. 애순이. 함안댁. 간호원 김양도 등장.
무슨 이따위 꿈을 꾼단 말인가.
베란다 내 책상에 회사에서 가져 온 초록색 당구지 깔고 그 위에 英방 책장의 유리 떼어 와 덮는다.
훌륭한 내 책상 탄생.
英이 어제 체력장.
99점 특급이란다. 120점 만점인데..
체육에 대한 소질이 안보이는 푼수로는 제법이다.
<밤>
회색수면을 겪고 난 후의 하루 현장일과는 커다란 고통이다.
무겁게, 아니 장엄하게 아픈 두통.
혹 신경성이 아닐까하고 육체의 리듬감으로 시험하였으나, 그것은 역시 악질적인 불면으로 인한 증후임이 분명하다.
SB-340 예비시운전, SB-346, 347 BLOCK조립 본격 착수.
직 반장들의 노고가 고맙다.
대선조선의 등뼈는 바로 그들이다.
나는 단지 그 등뼈에다 대고 잔소리나 해대는 시어머니다.
빗방울 흩뿌리고, 이제 여름은 소멸하는가.
퇴근하여 어머니께.
그런대로 이삿짐이 정리된 아파트 8층의 공간.
그곳의 외로운 노파. 음전한 조선의 할머니가 아닌 다소 현란한 현대의 할머니.
어느 정도의 위상을 유지하여야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느끼는 불쌍한 내 엄마.
이제 얼마나 가지고 계실지 모르는 경제력으로 자신의 여생을 계획해야 하는 엄마. 그것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셔서 당신의 위상을 정립코자 하는 엄마.
엄마의 신앙은 엄마의 존재가치를 변케 할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괴로웁다.
허지만 엄마의 신앙은 어딘가 수사적인 이미지임을 인정하지 않을수는 없다.
엄마의 예수는 나의 예수와는 분명히 다른 이미지일 것이다.
형수의,媛이의,장로님의 예수는 그러면 나의 예수와 같은 이미지일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존재, 그 실존으로서 예수를 느끼는 신앙이냐 아니냐하는 것.
나의 어머니가 어머니의 전존재, 참존재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이룰때까지... 아!
내 경제의 문제, J의 가게문제는 입도 떨어지지 않는다.
15192 1988. 9. 11 (일)
토요일 밤. 신방에 들어가는 설레임으로 책상위 내 애독하는 책들이 가득한 베란다 내 공간 속에, 그 아늑한 공간 속에 잠겨서 소주 마시며 책을 뒤적인다.
행복. 일락.
교회대신 회사 나가야 하는 일요일.
그러나 일요일의 느긋함은 얼마나 좋은지.
4시경 돌아 오다.
마지막 황제 보고 있는데 돌연 전화.
PS곤 , KH근 찾아오다. 함께 맥주. 취하도록 마신다.
15193 1988. 9. 12 (월)
또다시 찾아 온 월요일. 낯익은 월요일의 착잡한 기분이란.
완연한 초가을의 날씨이지만 한낮의 햇볕은 아직 매서운 따가움이 있다.
하늘은 옥색, 흰 뭉게구름... 참 평화로운 하늘이다.
참 온유한 하늘인데 그 가을 하늘 저편으로 달려가는 상념은 무엇?
그리움.. 애잔한 슬픔.. 산다는 건 서럽다는...
현장은 비교적 순조롭다.
간헐적으로 미친년 널 뛰듯 튀어나오는 윗친구들의 무례한 ORDER 말고는.
가을 풀벌레 소리 들리는 나의 방. 밤.
먼데 바다는 어둠 속에서 뒤척이고.
짧은 기도. 나의 하나님.
15194 1988. 9. 13 (화)
'마지막 황제'비디오 보느라 어제밤 늦은 잠자리.
열국의 각축장이 된 중국대륙, 허수아비 황제, 황제라는 절대적인 권위의 남아있는 근성과 프로레타리아트로 개조되어 가는 과정이 애절하게 묘사되고, 라스트씬은 멋지다.
그러나 J가 지적했듯이 스토리 전체에 대한 어떤 설명성이 부족하다.
내가 좋아하는 이 영화의 요소는 자금성, 그 깊은 신비함등의 동화적인 공상을 일으키는 요소,,,
새벽.
룻기와 에스더.
기도.
'죽으면 죽으리라'
에스더 그 여인.
아름답고 중심이 굳으며 단호하다.
룻도 역시 얼마나 매력적인 여성인가.
<밤>
여러 가지 사건으로 점철된 하루 일과.
선대의 수문을 이용하여 바다를 통한 BLOCK이동. 이 아이디어는 P대리 것.
신전무에게 불려 올라가 고임금에 걸맞게 근로자를 부려먹어야 한다는 닥달.
이제 잔업시간을 일일이 체크하면서 일을 진행해야 한다.
윤직장의 독선적 통솔에 반발하는 반원들.
공기, 공정, 작업, 인사, 관리라는 것...
현장의 땀을 벗기는 세수도 못한채 돌아온 집.
멋진 커텐으로 화려하게 옷입은 방,방들.
베란다 나의 공간은 그대로 나의 궁전이로다.
어머니, 어머니의 도움, 조금의 경제적원조.
이것을 애타게 꿈꾸는 J의 가슴은 곧 나의 가슴.
왜 어머니는 공정함을 외면하는가?
어떤 공정의 마음이 들다가도 그만, 무슨 작용이 있으면 감각적인 충동에 생각을 맡겨 버리시는...
15195 1988. 9. 14 (수)
의도적인 오늘 결근.
오늘 俊이 운동회. 차전놀이의 꼭지 역할은 50만원이라나?
英. 엇저녁 누리단의 일본 견학문제, 65만원의 비용. 포기해야 할 듯.
참 못난 부모짜리들.
英이 TV보면서 중얼거리는 말.
"모든게 숫자야. 정말 모든게 숫자야."
그때 TV에 비췬 장면은 수영장 요트 가격에 대하여 방영되던중.
무슨 급이 500만원, 무슨급은 2천만원 이상, 또 무슨 급은 1억.
이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모든 가치가 돈으로, 숫자로 계산된단다. 딸아.
15196 1988. 9. 15 (목)
어제 결근의 후유증은 대단하다.
선각반 어제 작업 거부, 그로 인한 모 고위직의 심통은 내게 부어진다.
참으로 어렵고 어렵고 깜깜한 직책이다. 선각과장이라는 위치는.
내 공간의 책상 앞에 앉아 기도드리는 밤.
다스려 주소서.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도록 이 마음을 다스려 주소서.
하나님, 나의 아버지 기쁨만이 내게 기쁨이게 하시고, 그 슬픔만이 나의 슬픔이게 하시고, 그 두려움만이 나의 두려움이게 하시고, 그 걱정만이 나의 걱정이게 하소서.
이 세상이 내게 주는 모든 것에 흔들리지 않는 감정이게 하소서.
둔중하고 온유하여, 요동치 않는 하나님의 마음이게 하소서.
아, 지금 내 바라는바 그 핵심은 무엇인가.
상황의 변화일 뿐인가, 어머니의 경제적 배려에 대한 욕구는?
라디오. 루드밀라 남의 소프라노 들린다.
참 잘도 부른다.
15198 1988. 9. 17 (토)
잡다한 꿈.
아마 이 두뇌 속에는 극심한 걱정이나 고뇌가 있은 듯.
직장, 어머니, 경제... 신앙.
4시 기상.
내 공간에 불켜고 단정하게 책상 앞에 앉는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을 다시 펴들고 1장부터 소리내어 읽는다.
잔잔한 감동은 여전한데.
다시 성서를 펴들고 마태복음의 산상수흔을 소리내어 읽는다.
다시 에베소서를 소리내어 읽는다.
불끈다.
기도드린다.
뜨거운 눈물이 후두둑 무릎을 적신다.
<밤>
올림픽 개회식.
TV로 봐서 그런지 장엄 현란한 느낌을 현장감있게 만끽할 수는 없으나 때로 콧잔등 시큰해지는 감동이 있다.
15199 1988. 9. 18 (일)
회사 잠시 다녀오는 사이 어머니 오셔 J에게 200만원 던져주고 가셨다고.
섭섭함과 울분같은게 가슴을 치는데.
일전의 약속은 그저 식언,식언...
치미는 울음같은 분노, 어찌 이토록 무배려 한가, 어찌 이리 불공정한가.
저 푸른 바다도 회색빛인 듯.
지금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멀리 있다.
한낮, 소주 한병.
이를 악물고 라흐마니노프를 흐르게 한다.
'잔악하게
대낮에 벌거벗고 싶다.
점잖게 얼굴 붉히면
웃음이라도 갈기고
뒤로 돌아 설라치면
개처럼 뒷다리라도 물어 뜯고 싶다. '
15200 1988. 9. 19 (월)
왼종일 아프고 쓰린 가슴.
현장의 업무는 말할수 없이 역겹고.
암담함이 가슴을 짓누른다.
무언가 희망적인 변화는 일어날 기미가 없다.
용기도 없고, 운명에 대한 자신감도 없고.
내가 지금 의지하고 매달려 도움을 청해야 하는 대상은 누구인가.
오직 한분. 그 분.
도움을 주소서. 내 하나님이시여.
견디기에 이토록 약해 빠진 영혼은 이제 지쳤나이다.
내게는 이 곳 지상에서의 권리라는 것은 없는 것이옵니까?
하늘의 권리는 네게 있다고 말씀하소서.
15201 1988. 9. 20 (화)
어제 아티반.
덕분의 숙면인가.
새벽.
요한3서.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불꺼 기도.
눈물.
15202 1988. 9. 21 (수)
TV 루드밀라남의 독창회.
풍부한 메조의 성량, 노숙한 기교.
그녀는 고도의 경지에 이른 매우 훌륭한 드라마틱 소프라노이다.
5시 기상.
시편.....
새벽별.
저 너머.
내 주님.
그 분만 생각하자.
15203 1988. 9. 22 (목)
어제 밤 어머니만나다.
몇백만원...간곡한 도움요청.
단 한푼도 여유가 없다는 어머니의 그 냉정함.
헛됨과 헛됨의 충돌.
나는 이기적이었는가?
고통이여. 벗어남의 고통이여.
정녕 예리한 면도날로 폐부를 베는 그 고통이여. 아픔이여.
울다.
늦도록 홀로 취한다.
15204 1988. 9. 23 (금)
J는 나보다 훨씬 더 사려깊다.
간곡하게 나를 타이르는 J, 어머니께 아무 것도 바라지 말라고.
그것은 원망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라, 모자의 관계를 염려한 간곡한 타이름이다.
제주도 임야 얘기도 들려준다.
나는 아내에 비하여 유아적 집착에 허덕이는 갓난쟁이.
별하나 빛나는 새벽 하늘.
동편에서 저토록 빛나는 저 별의 이름은 무엇인가.
어둠 저 편에 누워있을 바다.
아내로 인하여 마음은 다소 온유하나, 상처받은 영혼은 아릿한 아픔으로 남고.
올림픽으로 온 세상은 축제이지만 그것은 나의 세상이 아니다.
아, 나는 확대될수 있을까?
뛰어 넘을수 있을까?
스스로를 이길수 있을까?
하나님, 내 아버지.
15205 1988. 9. 24 (토)
어머니가 주신 상처는 시나브로 아물고 있는가.
볼쇼이 합창단 공연 녹화보다.
러시아 합창- 장중한 슬픔, 비감과 웅장함, 어느 덩치 큰 남자가 내는 깊은 울음소리.
중앙아시아, 시베리아의 삼림...
음울하고 장대한 러시아소설...
내 마음 속 장중한 비극의 눈물을 그들은 대신 노래한다.
소리내어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 캠피스 읽는 내 방의 새벽.
기도.
빗소리, 내일은 추석.
사념 하나.
폐쇄된 공간에서의 공포, 밀실 공포. 구속됨의 공포, 갇힌 공포.
높은 곳에서의 공포, 고소공포, 추락의 공포, 자유함의 공포.
어머니는 나로 하여금 폐쇄공포와 고소공포를 번갈아 맛보게 하고 있다.
15206 1988. 9. 25 (일)
추석.
취하여 돌아 온 추석 날.
때때옷 입고.
그래, 때때 옷입고
소리 높여 어리광부리고.
그래, 어리광부리고.
그리고 떼를 쓰는 거다.
그자, 떼를 쓰는 거다.
그러면
팽이도 생기고 딱지도 생기고 또 사금파리보다 고운 유리다마도 생기고.
안녕.
15208 1988. 9. 27 (화)
동녘 유리창너머 뿌연 바다가 누워있다.
바다에 안개가 잔득 끼었구나하고 손바닥으로 유리창을 흠치자, 바다의 안개가 아니고 창에 서린 김 때문이었구나.
돌연 흠친 부분에 나타나는 선연한 아름다움.
창문을 연다.
아, 새벽의 바다는 그렇게 처연한 아름다움으로 펼처져 있었던 것이다.
아직 여명이라 아치섬의 검은 윤곽, 잔잔한 물결, 음영짙은 해변의 산자락.
그리고 하늘, 형용못할 구름의 저 이상한 드리움, 엷게 번지기 시작하는 아침 놀.
정지된 수묵화랄까, 붉음과 푸름과 검음의 수채화랄까, 일출의 끼끗함과 고즈넉함.
슬프도록 선연한 한 폭의 깨끗함이, 태초가 눈을 뜨는 순간의 처연하도록 엄숙한 공간의 숨결이 여기 있다.
감동- 내 집 창 밖으로 느끼는 이 감동. 가을의 새벽바다.
부쩍 투명해진 대기에, 가을 공간에 그려 놓은, 새벽을 틈타 그려놓은 이 작품은, 정녕 아름답다.
아름다워 슬플 지경이다. 나의 형편없는 화필이, 나의 카메라가, 어떤 데포르마숑된 형상으로라도 이 포름과 색감과 컨트라스트의 형상화가 가능할는지...
이 대기의 냄새와 이 리얼리즘의 숨결과, 하모니는 오직 현장에서만 느낄수 있는 것..
내 집, 새벽의 이 공간을 나는 정말로 사랑한다.
15209 1988. 9. 28 (수)
英이 성적 떨어진다.
상위권은 그런대로 유지하고 있으나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
J의 말대로 이기고자하는 악바리 근성의 부족, 의지가 부족한 면英이에게는 있다.
제 아비가 그러한데, 이런 근성을 부어 줄 방법은 알지 못하고..
15210 1988. 9. 29 (목)
온통 올림픽 열기.
어제 인사과 문상봉과 마셔서 취하다.
15211 1988. 9. 30 (금)
꿈.
소외된 자로서의 상황, 월남전, 정글 헤매인다.
겨우 5시쯤 깨어 일어난다.
띵한 머릿속.
새벽.
우리나라 핸드볼, 구기종목 최초 금메달땄다고 야단들이다.
J와 아이들, 나도 덩달아 열광.
내일부터 연휴.
이것이 나를 안위케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