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43 1988. 11. 1 (화)
俊이는 어제 경주로 수학여행.
새벽 경건.
마가복음, 빌립보서.
기도.
英이의 영혼을 지켜주소서.
그아이의 반항을, 부모를 미워하고자 하는 그 영혼을 지켜주소서.
이 형편없는 아비 어미짜리, 나무이게 하소서.
아이들 드리우는 나무를 닮게 이 형편없는 품성들을 변케 하소서.
俊이를...
아, 가정. 목숨의 숨결보다 더 따뜻한 가정.
내 실존보다 더 의미있는 가정..
뜨거운 눈물.
15244 1988. 11. 2 (수)
어제 아들 오다.
경주 불국사, 석굴암거처서 법주사, 속리산에서 일박하고, 독립기념관을 휘돌아 온 1박2일의 강행군.
이 녀석은 英이 때와는 달리 의젓한 표정으로 집을 들어섰다고.
5000원 남짓 가져간 돈으로 엄마의 방향제,제 누나의 인형, 아빠의 라이타를 꼭꼭 사들고서는.
라이타를 살적에, 상점주인에게 1500원짜리를 1200원으로 깎자고 하였단다. 그런데 주인이 안된다고 하여 주인앞에서 이렇게 중얼거렸다나?
"에이! 이럴줄 알았으면 친구놈에게 돈을 빌려주지 않는건데, 돈이 없어 못사겠구나."
그랬더니 상점주인이 그냥 1200원에 주더란다.
그리하여 이 라이타는 300원 깎은 1200원에 내게 온 것이다.
녀석의 느닷없이 발휘된 교활함이 얼마나 우습고 재미있던지.
여행은, 돌아올 기약을 하고 집을 떠나 낯선 곳을 느끼는 것이다.
얼마나 귀중한 인생의 체험인가?
자식을 사랑하면 여행을 보내라는 말.
英이, 내 딸.
지금 사춘기의 고민을 겪고있는 아이에게 여행이 필요한 것인지 모른다.
집을 떠나 어디 시골에라도 지내다 오게 하였으면...
그런데 딸을 믿고 보낼만한 지기라도 있다는겐가?
이 부모짜리의 주변머리없음은 또한 英이의 불행인 것을.
15245 1988. 11. 3 (목)
어제의 음주로 무척 곤비한 하루 일과.
오후 한때는 그저 아무 바닥에나 쓰러져 눞고만 싶다.
서늘한 날씨, 가을은 무르익었다.
퇴근길- 집으로 올라오는 언덕길, 호젓한 내 동네 들어서니 밤하늘 별이 빛난다.
그것은 도심의 별이 아니라 자연의 별이다.
15247 1988. 11. 5 (토)
어제 베란다 내 방 책상위에 소주병 놓아두고 가끔 홀짝이며 俊이와 이 얘기 저 얘기 나눈다.
부쩍 어른스러워 진 아들.
누나가 학교의 체육선생을 향한 풋사랑의 감정까지 아빠에게 들려준다.
俊이, 내 후계자, 내 분신, 아니 나의 영혼.
새벽.
기도.
英이의 지금 무질서한 감정의 것들이 사춘기 한때 겪어야 할 홍역뿐이기를.
우리 부모가 좀 더 현명하여 지기를.
英이가 이 터털을 무사히 지나기를.
15250 1988. 11. 8 (화)
새벽.
칼 라너의 논문.
'죽음이 내포하고 있는 두가지 신학적 명제'
아담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죽음.
죄의 결과로서의 죽음과 구원으로서의 죽음.
아담이 죄를 범하기 전의 상태에서도 어떤 의미의 죽음은 있었다(?)
마가복음 12장.
기도.
장세동씨 청문회.
난공불락의 요새, 사내다운 면이 질문하는 국회의원이 있어 오히려 돋보일 정도이다.
그는 크리스찬이란다.
15251 1988. 11. 9 (수)
청문회 보느라 어제 늦잠.
참 국회의원들이란, 그토록 논리적으로 몰고 들어갈수 없단 말인가.
논리적인 전개는커녕 질문과 답변의 핵심 자체를 잃어버리고 허둥대는 꼴이라니.
몇몇을 제외하고는 한심할 정도이다.
장세동씨만 돋보이게 만들고 있다.
15252 1988. 11. 10 (목)
어제 모처럼 J,아이들 함께 나가 돼지불고기, 나는 소주.
가난한 가족의 외식은 돼지고기가 제격이다.
돌아와 늦도록 정주영씨의 청문회 보다.
재벌 총수를 대하는 국회의원들의 사뭇 정중함이라니.
15253 1988. 11. 11 (금)
술 마셔 취하여 돌아 온 밤.
삼계탕 한그릇과 맥주 맥주.
그리고 종장에는 필갑이 집에까지가서 포도주.
취하여 올라 오는 술기운.
그옛날 나는 살았다. 가쁘게 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만 죽어 버렸다.
그 곳, 기억 속 컴컴한 무대, 그곳에서 들려오는 노래 한 곡.
헤브티도 가야마야 고자토야 가야마야 아자젠트리 추야토야 다시벨라 다아벨라.
이리갈까 저리갈까 호랑나비 부르다가 야자수 그늘 밑에서 갈 곳이 없구나.
그 시절, 내게는 원칙적으로 야망이라는 것은 없엇다. 또한 소시민으로 살고자하는 무야망도 아니었다. 나의 비극, 내 하나님의 비극.
15254 1988. 11. 12 (토)
겨우 눈 뜬 아침.
하혈.
음주, 분별없는 타성의 몸짓.
하염없는 정신의 나태.
드높은 하늘에 저 밝은 불을 마시라고 보오들레르는 노래 하였다.
하늘, 밝은 불...
보오들레르는 이데아를 그린 걸까.
아침 해는 떴습니다.
15255 1988. 11. 13 (일)
온화한 가을 날씨.
휴일의 여유로움은 축복.
에리히 프롬.
'소유와 존재' 와 '사랑의 기술'에서 일관되게 흐르는 그의 이상.
인간에의 신뢰,사랑, 동포애,형제애.
그에게 있어서 신이란 인간이 추구하는 이데아의 세계로서의 오브젝트이다.
지적인 성숙.
이 개성시장-퍼스날리티가 충돌하는 이 현대의 개성시장에서 깨달아야 한다.
사랑이라는 의미를. 존재를 자각하고 실존을 깨닫고 이성을 믿어 깨뜨리고 나아가 도달하는 그것은 사랑.
15257 1988. 11. 15 (화)
어제부터 목이 잠기고 골치가 쑤셔온다.
전형적인 감기몸살 증세.
모처럼 찾아오는 병이라는 친구이다.
아,작년 수술후 그토록 육체가 고통스러웠는데 이제 그 아픔이 시나브로 사라지고 없지 않은가?
나는 그걸 당연한 귀결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한번이라도 하나님의 치유의 손길로 인식한 적이 있었던가? 그리고 감사의 기도를 한 적이 있었던가?
당시 간절한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사실을 어찌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하나님은 내게 작용하시고 내게 끊이지 않고 감사거리를 던져 주신다!
15260 1988. 11. 18 (금)
어제 오후부터 기온 뚝 떨어지다.
정수환 직장 승진 턱으로 한잔 사다.
저녁을 좀 거하게 먹고 술은 쬐끔만 하고 완곡하게 사양하여 돌아온다.
서울 媛이에게서 담요,쉐타 소포 도착.
J는 어머니와 통화.
오늘부터 광주사태 특위의 청문회.
얼마나 큰 파문을 일으킬까?
15261 1988. 11. 19 (토)
베란다의 내 공간.
이제 제법 싸늘한데, 오히려 그 차가움에 잠겨있는 새벽이 경건을 일깨운다.
기도.
英을 위하여 절실하게 간구하는데 돌연 터지는 울음.
책상에 머리박고 들먹이며 울다.
못난 부모, 그 여린 사춘기의 내 딸.
그 아이의 반항은 이따위 못난 부모탓임을 너무나 절절히 깨닫다.
아, 따뜻하고 화목한 고향, 가정.
광주 청문회.
무언가 부도덕하고 잔인하고 야욕에 찬 더러운 냄새.
밝혀지려나?
15262 1988. 11. 20 (일)
일요일.
俊이 다음 일요일부터 교회나가기로 마음 먹은 듯.
나도 英이와 나가고자 한다.
15263 1988. 11. 21 (월)
어제 시내나가 책구입.
크리스천 아카데미 논문집 '교회와 국가'
언론 청문회.
허문도라는 사나이, 사시의 눈동자굴림이 좀 이상해 보이는 사나이인데 역시 후안무치한 답변일색이다. 정서불안까지 엿보인다.
15265 1988. 11. 23 (수)
손사장, 고등학교 몇해 후배라고 형님 형님하고 부르는 호칭이 영 껄끄럽지만 함께 좀 마시다.
5시 기상.
경건은 맞지 못하다.
밤새 비가 온 듯.
창문을 여니까 눅눅한 젖은 대기의 냄새.
오늘 전두환씨 대국민사과 한다고.
권력은 무엇이고 역사란 무엇일까?
15266 1988. 11. 24 (목)
어제 전두환씨 대국민사죄.
참담한 모습, 나처럼 마음 여린 놈들에겐 연민까지 자아내게 한다.
부쩍 추워진 아침.
15267 1988. 11. 25 (금)
노조창립일, 휴일이다.
추운 날씨.
조선공사는 또다시 난리다. 도로를 차단하고 주민에게 까지 큰 피해를 주고 있다.
잡다한 꿈.
그러나 새벽의 경건.
새벽을 깨워라.
흔들어 깨워라.
새벽을 불러 일으켜라.
새롭게 하라. 새롭게 하라.
때묻은 관계들이여. 이제 새롭게 하라.
더러운 실존의 역정이여. 이제 새롭게 하라.
나의 하나님.
피흘리며 고통스러워하는 나 때문에, 나 때문의.
나의 하나님.
15268 1988. 11. 26 (토)
어제 왼종일 누운채 VTR과 씨름.
맺힌 한 풀어재끼듯, 맺힌 리비도의 노오란 색깔과 싸운다.
추운 날.
아침, 등교하는 英이, 俊이와 함께 나서는 현관.
이 조그맣게 행복한 내 일상의 편린.
DELIVERY 무렵의 분주함. HATCH COVER는 늘 말썽이다.
내일 俊이 교회가기로 하였는데.
英이는 나와 함께 가기로 하였는데.
첫 예배시간이 9시 이전이어야 좋은데.
15269 1988. 11. 27 (일)
英이 학교로.
나는 인도무렵의 현장 출근.
교회나가기 무산이다.
그러나 俊이는 교회나가다.
내 아들이 기쁘다.
어두운 새벽 하늘에 빛나는 별.
기도.
주소서. 주소서. 하소서. 하소서....
15271 1988. 11. 29 (화)
꿈.
성규,JN영 ,PS곤 등장.
쓸쓸한 분위기지만 무슨 정같은게 있는 친교의 세계.
이제 수면제의 힘은 완전히 빌리지 않게 되었는가?
아직 큰소리치지 말라.
그러나 꿈따위는 무섭지 않다.
다시 읽는 우찌무라 간죠 '기독교 문답'
언제 읽어도 소박하고 성실한 그 분의 체취.
자리에 엎드린채 고린도전서 15장 부활의 장을 읽다.
기도.
어제의 회사처럼 오늘의 회사도 참 싫을거라고 단정치 발자.
15272 1988. 11. 30 (수)
5시 눈뜨다.
俊이 깨운다.
英이에 비하여 俊이의 기상하는 태도는 좋다.
英이의 기상 솜씨는 다소 절차가 필요한 편.
고린도 전서, 요한복음.
기도.
하나님과의 교제.
하나님과 친하여 지는 것.
그래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지내는 것.
내세를 꿈꾸는 것.
현세는 우리의 소망을 이루기에는 너무나 불완전한 곳.
내세에 대한 소망이 내게 참 소망이 되었을 때 비로소 나는 인간다운 인간이 되리라.
오늘 하루 '만세반석 열린 곳에'찬송가를 흥얼거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