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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정허암이 물에 빠져 죽었다는 소문이 세상에 전파되었을때, 그생사를
의심하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순형 오주부만은 당대 이인인 정허
암이 그렇게 죽을리 만무하다고 당초에 의심할 생각까지 먹지 아니하였었다. 그
뒤 삼년만에 반정이 되어 세상이 변하매 오주부는 정허암이 다시 나오리라고 생
각하고 은근히 기다렸으나, 종내 아무, 소식이 없으므로 ‘허암은 살아 있고 나
오지 아니할 까닭이 없는데 아니 나오는것을 보면 혹시 죽은것이 아닌가.’하고
오주부도 혹시를 의심하게 되었으나 그래도 오주부는 십의팔구나 그럴리가 없으
리라고 생각하였다. 오주부가 그렇게 생각하기는 전에 들은 정허암의 말을 믿는
까닭이었다. 정허암이 한림을 다닐때 하루는 오주부가 찾아간즉 가기전에 궁한
선비 한사람이 먼저 와서 있었고 간 뒤에 옥당 문관 몇사람이 떼를 지어 왔었는데
옥당들이 일어서 나간 뒤에 정한림이 그 궁한 선비를 향하여 “여보게 이지, 지금
왔다간 사람들이 보기에 부러운가?”하고 물어서 그 선비가 “부럽다뿐이겠나,
지금 나의 궁한 품이 목미말을 먹는 사람이면 모두 치어다보이는데 옥당귀인이
야 더 말할 것이 무엇 있겠나.” 하고 대답한즉 정한림이 빙그레 웃으면서 “부
러울 것이 없어. 자네는 궁사십 달사십에 수한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이니.” 하고
말하는것을 오주부가 옆에서 듣고 있다가 그 선비를 보고 “궁사십 달사십이면
궁팔십 달팔십이라는 태공망의 절반이구려. 당세 소강절의 말씀이 틀릴리 없겠
지요.” 웃음의 말로 말하고 그 끝에 우연히 정한림에게 “노형 자신은 어떻겠
소?” 하고 물었더니 정한림이 “나 말이오? 욕스러운 수만은 남만 못지 않을
터이지요.” 하고 말한 일이 있었다. 궁사십 달사십이라던 그 선비는 조광조의 숙
부 되는 조원기인데 그 뒤에 과연 사십에 등과하여 갖은 청환을 다 지내고 벌써
직품이 아경에 이르렀다. 수만은 남만 못지않을 터이라던 정허암이 벌써 죽었을리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오주부는 신판사를 심방하였더니 신판사가 “여보, 오주
부. 정허엄이 살아서 묘향산에 있었다오. 이천년이라고 변성명하고 있었다오.”
하고 말하여 오주부가 반색하며 소식의 출처를 물은즉 신판사가 사주쟁이 김륜
에게 들은 것과, 김륜이가 허암의 제자로 사주 잘본다는것을 말하였다. 오주부가
원래 ‘혹시’를 의심할 뿐이었지만 죽었다는 소문이 난뒤 십오륙년 만에 살아있
다는 소식을 처음으로 들으니 김륜의 말을 친히 들어보고도 싶고 또 김륜이 말
한 이천년이가 진적한 허암인가 더 알아보고도 싶어서 김륜을 한번 만나게 하여
달라고 신판사에게 말하였더니 “어려울 것이 없소. 지금이라도 곧 만나게 해주
리다.” 하고 신판사가 하인을 보내어 김륜을 오라고 청하였다. 김륜이가 온 뒤에
오주부가 그 선생의 신장과 용모를 물어보고 거동과 음성까지를 물어보니 대개는
허암에 틀림이 없었다. 오주부가 김륜에게 “선생이 지금 어디 있소? 묘향산에
그저 있소?” 하고 물으니 김륜이가 “저 나올 때까지는 향산에 계셨으나 곧 떠
나신다고 하였는데 그 동안 육칠년이 지났으니까 지금은 어디가서 계신지를 모
릅니다.” 대답하고 그 뒤에는 선생의 술수 이야기를 시작하여 주문으로 여우 죽
이던, 본 이야기를 할 뿐만 아니라 대의 운명을 점친 들은 이야기까지 하였다. 대
이야기는 김륜의 말이 이러하였다. “선생님이 전에 전라도 땅에 가신 일이 있었
는데 어느날 친구의 집 사랑에 앉아셨자니까 사랑옆에 있는 대수풀에 긴 대 세
가지가 흔들흔들 하더랍니다. 다른 대는 가만히 있는데 세 가지만 흔들거리는 것
을 주인이 괴상히 생각하여 선생님께 무슨 까닭이겠냐고 묻더랍니다. 선생님이
오늘 오시에 그 대를 찍어가는 사람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는데 과연 오시때쯤
되어서 그 고을 원님이 쓸데가 있으니 대 서너 가지만 달라고 하인을 보냈더라지
요. 그래서 주인이 대숲에 가서 맘대로 찍어가라고 하고 내다본즉 그 하인의 골
라서 찍는 것이 꼭 그 흔들거리던 대 세 가지더랍니다.” 이야기를 듣던 오주부
가 김륜을 보고 말하였다. “그것은 허암이 전라도에 갔을때 일이오. 나도 들은
이야기요. 그대의 선생이 허암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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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허암이 살아서 술객 김륜의 선생 노릇을 하였다는 말이 한사람 두사람의 입
을 건너서 홍인문 밖 이판서의 귀에 들어왔다. 이판서는 그때 병조판서로서 판
의금부사를 겸하여 공사가 단단한 까닭에 며칠을 두고 별러서 간신히 틈을 만들
어 가지고 김륜을 불러다 놓고 그 선생의 일을 이말 저말 물어보았다. 이판서가
말을 물어보는 중에 장순손 장판서가 오고, 또 뒤처 남곤 남판서가 왔다. 다심한
남판서가 윗간에 있는 젊은 손을 보고 누구냐고 물어서 유명한 사주쟁이 김륜인
것을 알고 “잘 만났네. 내 사주 하나 보아주게.” 하고 말하니 장판서도 운에 딸
려서 “이왕이니 내 사주도 보아주소.” 하고 말하였다. 김륜이가 두 사람의 생년
월일을 적어들고 잠깐 생각하고서 “두분 대감이 다 일품 대신이십니다.”하고
말하니 남판서가 “듣기 좋으라고 하는말이 아닌가?”하고 좋아서 웃으며 “그래
와석종신들이나 하겠나?” 하고 묻고서 김륜이가 다시 잠깐 사주를 들여다보고
“와석종신 하시다 뿐이시겠읍니까?” 하고 말하는것을 듣더니 “일품대신으로
와석종신하면 고만이지 더 볼것이 없네.”하고 장판서를 돌아보고 장판서는 김
륜을 바라보며 “주인 대감의 사주는 어떠한고?” 하고 묻는데 김륜이가 대답하
기 전에 이판서가 “나는 아직 보지 아니하였소.”하고 말하니 장판서와 남판서
가 함께 어서 보라고 권하여 이판서가 자기의 생월일시를 일러준즉 김륜이가 “
주인 대감의 사주는 신판사댁에서 본 일이 있습니다. 시가 좀 좋지 못합니다. 대
신은 못되십니다.”하고 다시 말을 이어 “평생을 놓고 통히 말씀하면 초분은
산란하고 중분은 형통하고 후분은 안온합니다.”하고 말하니 남판서가 자기는
벌써 대신이 된듯이 “대신 귀찮지, 안온한 것이 제일이지.”하고 웃었다. 이날
남판서와 장판서의 사주 본 이야기를 다른날 최원정이 어디서 듣고 김대사성에게
와서 옮기는데 “홍문관 대제학, 예문학 대제학, 지성균관사, 예조판서, 원자보양
관 남곤이와 도야지 대가리 장순손이가 희강이에게서 유명한 사주쟁이에게 사주
를 보니까 둘이 다 장래에 정승을 하겠더라네.” 남곤의 말만은 축문 읽듯이 직
함을 주워 섬기고 말하더니 다시 아이의 이름을 부르듯이 ‘곤이가’하고 말을
시작하여 “만일 정승을 한다면 썩은 배는 하릴없이 파선이 될 모양이야.”하고
쩍쩍 소리가 나도록 입맛을 다시다가 “기생서방 장도야지로 말하면 고양이 급
제로 솟에 피리 정승까지 한다니 요절할 노릇이지.”하고 한바탕 너털웃음을 웃
었다. 그때 김덕순이가 그 부친을 모시고 있다가 최원정의 말을 듣고 그 형님의
사랑으로 내려와서 원정의 시늉을 내가며 형제가 웃다가 “앞일을 꿰어 뚫고 아
는 사주쟁이가 어디 있단 말이냐.” 하는 그 형님의 말에 유명한 사주쟁이가 오
리라던 갖바치의 말이 홀저에 생각이 나서 ‘그 사주쟁이가 갖바치 말하던 사람
인가?’하고 속으로 생각하였다. 그날 밤에 덕순이가 그 안해 이씨를 보고 “요
새 서울 안에 용한 사주쟁이 하나가 났답니다.”하고 말하였더니 이씨는 장님의
무자 사주 까닭으로 항상 속에 꺼림하여 하는 터라 대번에 “그 사주쟁이가 어
디 있데요?”하고 물었다. “어디 있는 것은 나도 몰라.”“이 댁에는 오는 사람
도 별로 없고 가는 사람도 별로 없고 하니까 꼭 두문동에 사는 셈이야요. 그러
니까 세상 소식을 알 수가 있어야지요. 연중이를 내일 우리 집에 보내서 좀 알
아보아 달래야겠어요.”“대체 이 댁은 뉘 댁이고 우리 집은 뉘 집이야?”“이
댁은 이 댁이고 우리 집은 우리 집이지요. 물을 것이 무어 있어요?” “시집 오기
전의 말이지. 시집 온 뒤에는 우리 집이 따로 없어. 친정을 우리 집이라면 내가
듣기 섭섭해. 그 ‘우리’란 말 속에 나는 빠지니 내가 섭섭지 않아? 가만히 생
각해 보지.” “잘못했사오니 용서합소서. 이후에는 ‘우리’란 말을 명심하여 쓰
겠삽네다.” “조런.” “낮잡아 말씀 마시오. 남이 들을까 겁납디다.” “그래 그
래. 그 사주쟁이 있는 데나 얼른 알아가지고 아들이나 얼른 낳을까 물어보자구.
” 덕순이 내외간에 수작이 이렇게 실없은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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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이 따뜻하니 복숭아꽃이 아리땁도다. 푸른 물이 고요하니 중경이 서로
부르도다. 도장 안에 눈썹을 그리어 주니 보는 이 웃음겨워 하도다. 모진 바람 일
어나며 밝은 달이 바다에 잠기도다. 촛불이 희미한데 붉은 깃발 무삼일꼬. 서리
찬 긴긴 밤에 외기러기 울고 가도다.”
이것이 덕순 내외의 팔자라 한다. 이씨의 친정에서 이씨의 청으로 유명한 사
주쟁이 김륜에게서 받아온 것이다. 이씨가 이 적은 것을 들여다보며 생각하였다.
첫 개구는 그저 그러하나 아래 세구가 좋지 못하니 선길후흉하단 말인가? 모진
바람, 잠기는 달도 시원치 못하거니와 서리 찬 밤, 외기러기가 대단히 맘에 좋지
못하였다. 촛불에 붉은 깃발은 무슨 소리인지 알지 못하나 역시 좋은 말은 아닌
것으로 생각하였다. 의심을 풀려다가 근심을 사게 되었다. 낮에는 그럭저럭 잊고
지내고 밤에 자기 방에 들어앉았을 때 이씨는 곰곰 생각하였다. 외기러기 울고
간다는 말이 자기가 죽는 것이 아니면 남편이 어떻겠다는 말이 아닐까? 자기가
혼자 이 세상에 남아 있게 되는 것을 말할 것도 없고 남편을 두고 자기가 죽는
것도 맘에 애달팠다. 생각이 이에 미치며 이씨는 하염없는 눈물이 옷깃을 적시
었다. 이씨의 유모가 자리를 깔아놓으려고 욧이불을 드다루다가 흘긋 이씨를 치
어다보고 놀라며 “여보, 아씨. 왜 우시오?”하고 이씨의 앞으로 가까이 오니 이
씨가 “아니야.”하고 얼른 눈물을 씻었다. 얼마 있다가 이씨가 “어멈.”하고
유모를 불러서 “어멈이 마음이 무딘 사람인 게야. 아범없이 어떻게 혼자 살아
있소?”하고 어두운 밤에 홍두깨 같은 말을 내니 그 유모는 무어라고 대답하여
야 좋을지 몰라하다가 “그렇기에 연중이를 데려왔지요.”하고 이씨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이씨는 실심한 모양을 하고 앉아서 “양자는 말고 친아들이 있기
로 정든 남편을 잊을 수가 있겠소? 나는 그러면 혼자 못 살 것 같아.”하고 또
눈에 눈물이 어리니 그 유모가 “사위스럽게 왜 그런 말씀을 하오. 허구 많은
말에.”하고 다시 무슨 말을 하려 하는데 이씨가 “아니야. 그렇단 말이야.”하
고 억지 웃음을 웃었다. 그 유모가 “아범 말은 말씀도 마시오. 그 술부대가 잘
죽었지, 만일 살아있으면 어멈은 지금만큼 편하게 지내지 못하지요.”하고 말을
그치었다가 “그렇지만요 아씨, 내외란 건 달라요. 가끔 불쌍한 생각이 나겠지
요.”하고 시름없이 웃었다. 방문 밖에서 신발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아이구,
서방님이 들어오시는군.”하고 유모가 일어서 나가자 덕순이가 들어왔다. 덕순이
가 이씨의 얼굴을 보더니 “무슨 걱정이 생겼소?”하고 물으니까 이씨는 천연덕
스럽게 “아니오.”하고 대답하였다. “거짓말 마오, 얼굴에 수심이 끼었는데.”
하고 덕순의 말에 이씨는 앞이마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얼굴빛을 고치려고 애를
썼다. 덕순이가 한동안 말이 없이 앉았다가 “사나이 대장부가 설마 안해의 걱
정을 못 풀어줄까. 걱정이 있거든 속이지 말고 말을 해.”하고 소매를 걷어치고
힘줄이 울끈불끈한 팔뚝을 내보이니까 이씨가 “팔뚝으로 걱정을 풀어주실 터이
에요?”하고 방긋 웃었다.
“팔뚝으로 풀 만한 걱정이면 팔뚝으로 풀어주지.”“아닌게아니라 사주팔자
가 눈이 있어서 그 팔뚝을 보면 무서워 내빼기라도 할 것이에요.” “오, 사주를
보아온 게로군. 그 사주에도 아들이 없다고 그랬어? 어디, 나 좀 봅시다.”하고
덕순이는 소매를 내리고 손을 이씨에게로 내미니 이씨는 상을 찡그리는듯 마는
듯하고 아무 말이 없이 여섯 구 적은 것을 덕순의 손 위에 놓았다. 덕순이가 펴
서 들고 입으로 ‘봄날이’하더니 눈을 벌써 ‘외기러기’에까지 갔는지 집어
내던지며 “그게 다 무슨 소리야. 부작 같군.”하고 “그래서 걱정을 하고 앉았
었소? 그런 걱정 하다가 지레 죽으리다. 살다 살다 사는 날까지 살고 마는 것이
지 쓸데없이 걱정 마오.”하고 이씨의 얼굴을 바라보니 이씨는 눈물이 글썽글썽
한 눈을 덕순에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한날 한시에 나지
는 못했지만 한날 한시에...”하고 말끝을 흐리는데 덕순이가 뒤를 대서 “죽었
으면 소원이 없겠다 말이오.”하고 말을 그치고 잠잠히 앉았다가 사름없이 말하
였다. “내가 먼저 죽으면 게서 다시 시집 안 갈 것은 정한 일이라 말할 것이 없
고 게서 먼저 죽더라도 내가 다시 장가들지 아니할 터이야. 그러면 한날 한시에
죽으나 다름이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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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의 일이다. 덕순이가 갖바치에게 놀러왔더니 갖바치가 어디 가고 없었
다. 한동안 문밖에서 서성거리다가 성균관 앞길로 내려오자니 갖바치가 박석고
개를 넘어오는데 그 뒤에 낯모르는 젊은 사람이 따라섰다. 덕순이는 길에 서서
기다리다가 갖바치가 가까이 와서 발을 멈춘 뒤에 “어디를 갖다 오우?”하고
물으니 갖바치가 어디를 갔다 온다고는 대답하지 아니하고 “내게를 가셨다가
내려오시는 길인가요?”하고 묻더니 덕순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서 “
내게로 도루 가십시다. 유명한 사람 하나를 보시게 하여 드릴터이니.”하고 뒤에
따라오던 젊은 사람을 돌아보았다. 갖바치가 두 사람과 같이 집으로 돌아와서
방에 들어앉은 뒤에 먼저 순덕을 보고 “저 사람은 강원도 사는 김서방인데 나
하고 형제같이 친한 사람이오.”하고 다음에 그 사람을 향하여“이 양반은 지금
대사성 영감의 둘째 자제일세.” 하고 말하여 덕순이는 그 사람과 말을 사귀게
되었다. “서울 온 지 얼마나 되시오?” “두어 달 되었어요.” “무엇을 하시
오?” 수작이 시원하게 나가지 아니하는데 갖바치가 웃으면서 덕순을 향하여 “
저 사람이 유명한 사주쟁이에요. 사주 하나 보아 달라시지요.” 하고 말하니 그
사람이 갖바치를 보며 “남에게 밀지 말고 형님이 보아 드리구려.” 하고 웃었
다. 덕순이가 말끝을 다라 “나는 사주를 새로 보느니보다 이왕 본 사주 하나를
물어볼 것이 있소.” 하고 자기 안해가 보아온 사주풀이를 외니 그 사람이 “그
것이 내가 푼 것 같습니다.” 하고 말하고 덕순이가 “촛불에 붉은 깃발이 무슨
소리요?” 하고 물으니 그 사람이 무어라고 대답하려고 하는데 갖바치가 “부작
같군.” 하고 허허 웃어서 그 사람의 말문이 막히었다. 덕순이가 다시 묻기 전에
갖바치가 그 사람과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삼원명경을 선생님이 주셨다고 했
지? 지금 어디다 두었나?” “얼마는 시골집에 두고 얼마는 가지고 왔는데 신판
사가 보고 지성으로 빌리라고 해서 할 수 없이 빌렸어요.” “선생님이 주시지
아니하는 것을 훔쳐가지고 오지나 아니하였나?” “형님도! 백여 권 책을 훔치
련들 무슨 수로 훔치오? 공연히 남을 도적놈 만들려고 그런 말을 하는구려.”
“나는 한 권도 아니 주시고 자네만 주신 것이 샘이 나네그려, 허허허.” “여보
형님, 선생님도 참말 인색하신 양반인 것이 주문 외이는 재주는 조금도 안 가르
쳐 주십디다. 형님이 나오신 뒤 오륙 년이나 더 뫼시고 지냈는데 그 동안 여러
번 가르쳐 주십사고 했건만 그건 배워 무엇하느냐고 영영 안 가르쳐 주십디다.
그것 못 배운 것은 참말 분해요.” “그런 재주는 배워 두는 것이 한편으로 생
각하면 좋을 것이 없어. 자네가 못 배웠으니까 분하니 무어니 하지 만일 배웠더
면 큰 걱정거리가 되었을 것일세. 조금만 미운 사람이 있어도 곧 주문을 외어서
여우 죽이듯 하고 싶을 터이니 그것 될 일인가. 생각해 보게, 재주 가지고 안 쓰
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야. 점치고 사주 볼 줄 아는 것도 지금 나에게는 걱
정거리일세.” “그렇지만 사람의 맘이 어디 그렇소.” “자네가 임신년에 집으
로 갔었다고 했지?” “그랬세요. 그때 서울을 지났었는데 형님이 서울 계신 줄
만 알았다면 찾아뵈입고 갔었지만 나는 형님이 함흥 가서 계신 줄로만 알았었구
려. 그래 집에 가 있는 동안 몇 번 함흥으로 찾아가려고 까지 했었어요.” “맘
만 먹은 것도 정분일세.” “선생님이 기해년 가을에 강서 구룡산으로 오라고
하셨는데 그때 형님이 같이 가실라오?” “나도 가려고 맘을 먹고 있네.” “형
님 나올 때도 선생님이 말씀하십디까?” “아니 그저 알았지.” “그저 알다니?
선생님 말씀도 못 듣고 어떻게 아셨단 말이오.” “지금 자네 말만 들어도 알지
못해?” “맘을 먹고 있었다니 말이지요.” “점을 안다면 그것쯤이야 모른단
말인가?” “점으로요? 그것이 점으로 알게 될까요?” “아따, 그것은 이 다음
이야기하세. 우리만 지껄여서 미안해.” 하고 갖바치가 덕순을 돌아보았다. 덕순
이는 옆에서 그 수작하는 말을 듣고 갖바치가 유명한 술객 김륜이와 동문수학한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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