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장 사화
1
해가 다 저녁때가 된 뒤에 덕순이가 집으로 돌아온즉 그 어머니가 “너 어디
갔었니? 아까 너의 처가에서 사람이 와서 너의 장인이 갑자기 병환이 나셨다고
기별하는데 온 사람이 호들갑스러워서 곧 시각대변중이라는 것같이 말하여 네
댁이 그 말을 듣고 초설해하기에 너의 아버지께 말씀을 여쭙고 네 댁을 보냈다.
그런데 갔다 온 하인의 말을 들은즉 병환이 대단치도 않은가 보더라. 어제 낮에
도야지고기라나 무슨 고기라나 자신 것이 눌려서 어젯밤부터 좀 편치 못하시다
가 오늘 낮에 일시 고통이 심하여서 집안에서 황황히 지냈다는데 네 댁이 갔을
때는 그저 그만하시다고 하더란다.” 하고 며느리 근친 보낸 것을 말하니 덕순
이는 자기가 집에 없는 동안 안해의 간 것이 불만하여 “체증이 났다고 데려가
고 고뿔 들렸다고 데려가고 딸을 데려가다가 볼일 못 보겠네요. 체증쯤으로 편
치 못한데 기별은 무슨 기별이에요.” 하고 상을 찌푸리었다. 이튿날 덕순이는
하루 동안 그린 아내를 보기 겸 장인 문병하려고 처가에를 가게 되었다. 덕순의
장인은 숭선부정이니 종친 중에 현명한 사람이라 같은 종친에도 성심으로 나랏
일을 걱정하는 파성군과 자별한 친분이 있었다. 덕순이 간 때에 마침 파성군이
문병 왔다는 까닭에 덕순이는 바로 안으로 들어갔었다. 덕순의 안해 이씨는 속
으로 십년 그리던 남편을 만난 것같이 반가왔으나 겉으로 시침을 떼고서 말이
없이 잠깐 웃는 것으로 알은 체하고 덕순이도 역시 끄덕이는 듯 마는 듯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덕순이가 한동안 안방에 앉았었는데, 섰다 앉았다 하여도 별로
안방을 떠나지 아니하는 이씨가 그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다락에 올라가는 길에
덕순의 옆을 지나가며 나직이 “저녁때 가겠세요. 할 이야기가 많아요.” 하고
한번 덕순을 돌아보니 덕순이는 넌지시 “무슨 이야기? 병환 구원한 이야기?”
하고 소리없이 웃었다. 파성군이 갔다고 한 뒤에 덕순이가 장인 사랑으로 나가
니 누비처네를 덮고 누워 있는 그 장인이 반갑게 “너 왔느냐?” 하고 덕순이가
가까이 앞으로 나가서 “좀 어떠십니까?” 하고 병환을 물은즉 그 장인이 “오
늘은 그만하다.” 하고 덕순이더러 일으켜 달라고 하여 처네로 앞을 두르고 뒤
에 의지하여 앉은 뒤에 “거기 앉아라. 내가 이야기 할 것이 있다.” 하고 덕순
이가 쪼그리고 앉는 것을 보고 조용히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너의 아버지 친구 몇 분들이 성심으로 나랏일을 바로잡으려는 것은 누가 모
르겠느냐만, 소인들의 원망이 나날이 심해서 여러 가지 간계가 있는 모양이니
뒤가 걱정이다. 지금 화천군 심정이와 남양군 홍경주가 예조판서 남곤 집에서
거의 하루돌이로 모이다시피 한단다. 님곤이가 간특하기 짝이 없는데다가 꾀주
머니라는 심정이가 합했으니 무슨 간계가 안 나오겠느냐. 심정이는 경빈 박씨에
게 소식을 통하여 홍경주는 그 딸 희빈에게 말을 들여보내서 갖은 참소를 다하
게 하는데 제일 조대헌을 몹시 몰아 말하는 모양이란다.
일전에 위에서 내전에 듭셨을 때 곤전도 계시고 희빈과 경빈도 뫼시었었는데
희빈이 조광조가 길거리에 나서면 늙은 것이나 젊은 것이나 모두 우리 상전 우
리 상전 하고 절들을 한답니다 말씀하고. 경빈이 뒤를 이어서 지금 조정에는 조
광조의 당이 아니면 간신으로 몰려서 쫓겨나지 않을 수 없답지요 말씀하고, 그
뒤에 경빈과 희빈이 번갈아가면서 조광조가 인심 수습을 잘한다는 등 조광조가
당파를 잘 세운다는 등 갖은 말씀을 다하니까 위에서 듣기 싫어하시는 빛을 보
이시며 아무리 하기로 조광조가 역적이야 되랴 꾸중하다시피 말씀하셔서 희빈과
경빈은 입을 다물게 되었고, 그때 곤전께서 그렇게만 하실 말씀도 아닙니다. 조
광조야 그런 맘이 없겠지요만 조광조에게 붙쫓는 것들이 추대를 한다면 조광조
인들 어떻게 하겠습니까? 강헌대왕께옵서도 개국공신들 까닭에 맘에 없으신 왕
위를 받으시더란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자세히 모르나 조대헌이나 너의 아버지
나 좌우간 조심들 하여야 할 것이니 너의 아버지께 가서 조용히 말씀을 여쭈어
라. 지금 파성군도 한걱정을 하다 갔다.
2
숭선부정은 얼굴에 피로한 기색이 보이며 말을 그치었다가 다시 동강동강 하
는 말이 “심정이로 말하면 이판으로 논박을 당해서 떨어진 일이 있지. 또 형
판으로 탄핵을 당해서 쫓겨난 일이 있지. 심지어 한성판윤까지 다니지 못하게
되었었구나. 그러니 독이 여간 났겠느냐?” “남곤이는 글자 하는 것을 믿고 이
편에 붙으려고 애를 쓰나 남상인으로 고변할 때부터 소인놈이니까 누가 그걸 붙
이겠니? 신의정이 대제학을 물려준 까닭에 신의정은 고맙게 생각하는가 보더라.
” “홍경주는 남곤의 글도 없고 심정의 꾀도 없는 위인이 찬성으로 논박맞은
것을 분하게 생각해서 둘에게 섭쓸리는 모양이야.” “궁흉극악한 것들이 별짓
을 다 생각해 내는 모양이다. 주초위왕이란 비결 비슷한 말까지 지어냈단다.”
“정암의 일도 걱정이지만 일 불행하면 장기 튀김이구나. 너의 집이 걱정이다.”
덕순이가 장인의 하는 말만 듣고 앉았다가 “가친이 조대헌장과 같이 양근으로
낙향하실 생각이 계신 모양이니 가친을 만나시거든 낙향하시라고 권하십시오.”
하고 말한즉 그 장인은 “나더러 권하라느니 네가 말씀을 여쭈려무나.” 말하고
덕순이가 “저는 어린아이로 아시니까 말씀을 여쭈어야 들으실 것 같지 않습니
다.”하고 말한즉 그 장인은 “뛰엄질 같은 어린아이 장난을 너무 하지 말지.”
말하고 웃는데 아이종이 미음상을 들고 나와서 한번 방을 들여다 보고 뒤를 돌
아보며 무어라고 말하더니 덕순의 안해가 뒤를 따라 나와서 곧 방으로 들어오며
“아버지 속미음 좀 잡수시지요.” 하고 미음상을 받아서 그 아버지 앞에 갖다
놓았다. 덕순의 안해는 더 있다가 저녁때가 다 된 뒤에 돌아왔다.
그날 밤에 덕순이가 안해 방에 들어가서 자리에 앉으며 곧 “아무리 친환이
있다기로 나도 보지 않고 가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이오.” 하고 논죄하듯 말하니
그 안해는 “그러지 않아도 오시거든 보입고 가고 싶었지만 어머님이 곧 가라고
하인들 지휘까지 하시는데 유난스럽게 보입고 가겠다고 할 수가 있어요? 할 수
없이 그대로 갔지요.” 하고 진정 반 웃음 반으로 발명하다가 덕순이가 “여러
가지로 생각해서 십분 용서하지.”하고 거짓 점잔빼는 것을 보고는 “황송무지
하외다.” 하고 순전히 장난조로 사과하였다. 그다음에 덕순이가 “아까 낮에 할
이야기가 많다고 했지. 무슨 이야기야?” 하고 물어서 이씨가 친정에서 들은 이
야기를 옮기는데 그 이야기는 대개 이러하였다.
“경복궁 안 함원전 뒤에 배나무가 한 주 섰는데 그 배나무에 글자 쓰인 잎
새가 생기었다. 희빈 홍씨가 그 잎새를 따서 상감께 보시게까지 하였는데 이 글
자는 조씨가 임금 된다는 뜻이라 한다. 이것이 실상은 희빈이 만들어낸 것인데
희빈이 일찍이 익은 배를 따서 즙을 내고 거기다거 꿀물을 타서 배나무 잎새에
글자를 써놓았더니 벌레가 즙이 묻은 자리를 갉아먹어서 글자 모양이 된 것이라
한다. 어느 어스름 달밤에 희빈이 남몰래 배나무 밑에 가서 높은 발판 위에 올
라서서 여러 잎새에 글자를 썼는데 벌레가 먹기는 한 잎새뿐이었다고 한다. 이
것을 눈으로 본 사람이 둘이 있으니 하나는 희빈의 심복 나인이고 하나는 그 나
인 아래 있는 무수리다. 그 무수리는 숭선부정의 집에서 자라난 사람이라 일전
에 다니러 왔다가 이씨의 어머니를 보고 이야기한 것이다.” 이씨가 이야기를
대강 끝내고 “그 무수리가 글자 쓸때 발판을 들고 따라가기까지 했더라니 그
말이 믿을 만하겠지요.?” 하고 말하니 덕순이는 그 장인이 말하던 주초위왕이
란 말을 생각하고 “희빈이 글자를 쓰다니 진서를 알든가?” 하고 얼굴에 걱정
스러운 빛을 보이었다.
3
덕순이는 그의 부친이 사랑에 혼자 있는 때에 조용히 들어가서 전후에 들은
이야기를 말하여 드리고 그 끝에 속히 양근으로 낙향할 것을 말하니 그의 부친
은 잠자코 듣고 있다가 “응, 알았다.” 하고 저으기 고개를 끄덕이는 외에 별로
말이 없었다. 덕순이가 맘이 초조하여 “조대헌장을 청하셔서 조용히 의론해 보
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하고 다시 말씀한즉 그의 부친은 “알았다니까
그러는구나.”하고 섰는 덕순을 치어다보는데 말을 더하면 꾸지람이 내릴 눈치
가 보이었다.
덕순이가 한동안 우두커니 섰다가 방 밖으로 나오자 그의 부친의 한숨짓는 소
리가 귀에 들리었다. 덕순이는 그 한숨 소리에 맘이 더욱 초조하여 ‘조대헌장
을 가보입고 말씀이나 해보겠다.’생각하고 사헌부에서 나올 만한 때를 헤아려
서 조대헌에게 와서 본즉 조대헌 사랑에 여러 손님이 모이어서 무슨 공론이 있
는 모양이었다.
덕순이가 그 사랑에 바로 들어가기를 주저하여 청지기를 시켜 조용히 뵙고 싶
다는 뜻을 통하니 청지기가 들어갔다 나와서 말이 잠깐 기다리라신다고 하여 덕
순이는 한동안 다섯 살 먹은 조대헌의 아들 정이를 데리고 실없는 말을 물었었
다. “너 지금도 젖 먹니?” “동생이 있는데.” “네 동생 이름이 무어냐?” “
아기” 옆에 있던 상노가 “애기가 이름이야? 용이올시다 그러지.” 하고 가르
치니 정이는 고분고분하게 말을 듣고 “용이올시다.” 하고 따듬따듬 옮기었다.
“아버지가 이쁘냐? 어머니가 이쁘냐?”“어머니는 때려주어.” “그러면 아버
지가 이쁘냐?” 아이는 말이 없이 고개를 끄덕이었다.
“너 글 배우니?” “그럼. 하늘 천, 따지, 아비 부, 어미 모, 다 아는데 무어.”
“잘 아는구나.”하고 덕순이가 칭찬하는 바람에 아이는 까불기 시작하여 상노
더러 이놈아, 저놈아 하며 장난을 치는 중에 큰사랑에서 “이리 오너라.” 하는
조대헌의 목소리가 나니 상노가 “아이구 장난한다고 아버지가 걱정하시어.”하
고 공동을 시키어서 아이는 장난을 그치었다.
조대헌이 혼자 앉아서 덕순을 불러들이었다. 덕순이가 절하고 꿇어앉은 뒤에
궐내 이야기를 말씀한즉 조대헌은 웃으면서 “위에서 간계에 속으실 리가 없네.
또 신자 된 도리는 성심을 다할 뿐이니.” 하고 다시 말이 없으므로 덕순이가
“어르신네시나 시생의 가친이나 지금쯤 조정에서 물러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
다. 가친과 의론하시고 속히 양근 미원으로 낙향하시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
고 조대헌의 의향을 물으니 “자네 말이 옳아. 그렇지만 조정에서 물러가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닐세. 자네 어르신네나 내나 작록을 탐해서 사로에 나선 것
같으면 벌써 물러가게 되었을 것일세.” 하고 조대헌이 대답하는데 그 말소리부
터 간곡하게 들리었다. “자네 어르신네 말씀은 무어라시다?” “별 말씀이 없
으셔요.” “내가 이따가 자네 어르신네를 보이러 갈 터일세. 먼저 가게.” 하고
조대헌이 말하는데 덕순이 더 앉았기가 어려워서 일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때가 다 된 뒤에 조대헌이 김사성을 찾아와서 이야기하다가 저녁밥을 같
이 지시게 되었는데, 덕순의 형제가 뫼시고 서서 시중을 들자니 조대헌이 덕순
을 돌아보며 “내년 봄쯤 두 집에서 같이 낙향하자고 지금 어르신네와 의론했
네.” 하고 말하여서 덧순의 초조하던 맘은 너누룩하여졌다. 저녁상이 끝나고 덕
순의 형제가 나온 뒤에 조대헌과 김사성 사이에는 아들들의 이야기가 났었다.
“덕순이가 기골만 든든한 줄 알았더니 식견도 제법 있는 모양이야.” “무어,
공부를 해야지 사람이 되지.” “자네는 맏자제가 청수하고도 그릇 같아 보이니
까 뒷걱정이 없네. 집의 정이는 아직 어린 것이지만 원대한 기상이 보이지 아니
하는 것이 수를 못할 것 같아.” “정이는 좀 약해서 걱정이지만 둘째 자제 용
이는 튼튼하더군.” “덕순의 아우 어린아이의 이름을 무어라고 지었어?” “덕
무라고 지었지. 덕무나 용이나 한 이십 되어서 사람 노릇하게 될 때에는 우리가
육칠십 노인이 될 모양이지.” 하고 김사성이 웃으니 조대헌은 “우리가 그때까
지 살까?”하고 저으기 한숨을 지었다.
4
그날 낮에 조대헌의 사랑에 모이었던 사람들은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원인데
병인년 반정공신들 중에 아무 공로도 없이 외람히 참예한 사람이 많으니 이것을
골라서 처치하도록 하자고 그들이 공론하였었다.
이튿날부터 사헌부,사간원 양사에서 무공한 사람들의 공신 칭호를 깍아버리자
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대사헌, 대사간 이하 여러 간관들이 복합까지
하였으나 임금이 좇지 아니하였고 그 뒤에 옥당에서 양사의 주장을 따라서 상소
를 아뢰고 대신과 각조 판서가 양사의 주장을 좇아서 말씀을 아뢰었으나 임금이
종시 좇지 아니하였다. 이때 좌의정 신용개는 병으로 수유하고 집에 누워 있던
중이라 예조판서 남곤이가 문병하러 왔다가 “근래 조정 의론이 과격하여 걱정
입디다.” 하고 말하니 병이 중하여 기신을 잘 못하는 신정승이 벌떡 일어 앉으
며 “과격하다니? 소인들이 옳은 일을 주장하는 사람이 미워서 모함하려고나 할
말이지 대감이 할 말이오? 대감이 어째 그런 말을 하오? 나는 병이 좀 나아서
등연하게 되면 힘껏 말씀을 아뢸 작정이오.” 하고 얼굴빛을 붉히며 나무라서
남판서는 무료하게 앉았다가 돌아갔다.
그 뒤 얼마동안 지나지 아니하여 신정승의 병이 더치어서 다시 등연하지 못하
고 마침내 돌아가니 대신의 초상이라 임금님이 별전에서 망곡하려고 하교까지
있었는데, 예조판서 남곤 이외 몇 신하가 중난한 일이니 중지하시라고 밀막았다.
조대헌이 입궐하여 임금께 알현하고 “신용개 초상에 망곡하옵시려다가 중지합
시는 것은 무슨 일이오니까? 신은 듣사오니 세종대왕께옵서는 대신 상사 백관을
거느리시고 친림까지 하옵시고 곡하실 때 곡성이 밖에까지 들리었다하오니 일전
에 망곡하옵신다는 하교를 봉행하지 아니한 것은 도로써 임금을 섬기는 신자의
할 바이 아니외다.” 하고 말씀을 아뢰니 임금도 무안하였거니와 남곤 이외 몇
사람은 무안이 지나서 양사 간관들이 공신 문제로 일제히 시작하게 되었는데 임
금이 조대헌을 인견하고 “이미 봉한 공신을 깎아 없이 하는 것이 국가의 중대
한 일이라 이때껏 지난한 것인데 경들이 사직까지 하는 것은 너무 과하지 아니
한가?” 하고 말씀하니 조대헌은 외람한 공신은 삭훈함이 마땅하다고 누누이 아
뢰고 그 끝에 예조판서 남곤이가 조정의 중대한 의론이 있을때 영릉에 진향 간
다고 서울을 떠나서 위론에 참예치 아니하였으니 이것이 조정 중신의 도리가 아
니라고 논박하여 그때 같이 입시하였던 남곤이는 등에 찬땀이 흘렀었다. 나중에
임금도 할 수 없이 하고 삼등공신은 추리어 없이 하여 화천군 심정이와 남양군
홍경주도 군 칭호를 빼앗기게 되어서 분심이 더욱이 돋히었다.
공신 문제가 낙착난 뒤 어느 날 밤에 혜화문 안 갖바치가 조대헌을 찾아왔다.
이때까지 조대헌에게 한번도 온 일이 없는 사람이 졸지에 찾아오니 조대헌은 반
갑게 맞아들이면서 괴상히 생각하여 “오늘은 웬일인가?” 하고 물으니 갖바치
는 첫마디에 “조상 왔소이다.”하고 슬픈 기색이 얼굴에 가득하였다. 조대헌이
“조상이라니?”하고 놀라니 갖바치는 “영감께서는 가실 길을 가시는 것이나
옆에서 보입는 사람은 개연한 맘이 없지 않습니다. 이 다음날 동소문 밖에서 하
직할 틈은 있을 듯하나 말씀까지는 여쭙게 될지 모르는 까닭에 오늘밤에 일부러
왔습니다.” 하고 화가 박두하였으니 집일을 미리 정돈하여 두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말한 뒤에 “이목이 번다하여 오래 있지 못하고 갑니다.” 하고 일어서 나
가는데 조대헌은 무슨 셈인지를 몰라서 별로 붙잡지도 아니하였다.
5
갖바치가 왔다 가던 이튿날 조대헌은 심신이 불쾌하여 종일 집에 누워 있었는
데, 이른 저녁때 김사성이 찾아와서 외조부 제사 참사를 가는 길에 잠깐 들리었
노라고 말하고 수어하다가 바로 일어서려고 하니 조대헌이 조금 더 앉았다 가라
고 붙들어서 나중에 저녁밥까지 같이 먹게 되었었다. 저녁상을 치운 뒤에 조대
헌이 김사성을 돌아보며 “오늘은 종일 신기가 불편하여 밥 생각이 별로 없더니
자네와 같이 먹는 덕에 저녁을 잘 먹었네.” 하고 치사하듯 말하는데 김사성이
“우리가 이 다음날은 같이 밥 먹기도 어려울 것일세.” 하고 한숨을 쉬니 “갑
자기 앞 짧은 소리가 웬일인가? 자네가 몹시 심약해졌네그려.” 하고 조대헌이
도리어 위로하는 어조로 말하다가 “벌써 함정의 고동을 밟았으니 천장만장 빠
질 것은 눈앞에 닥친 일이지.” 하는 김사성의 말을 듣고 맘이 따라 약하여졌든
지 “글쎄, 그렇다고 하겠지.” 하고 역시 한숨을 쉬었다.
이리하여 주객이 근심스러운 얼굴로 한동안 서로 대하고 앉았다가 나중에 김
사성이 “제사나 지내러 가겠네.” 하고 일어서려고 하니 조대헌이 “이리 오너
라.” 하고 상노를 불러서 “대사성댁 하인에게 등불을 켜라고 일러라.” 하고
분부하고서 곧바로 “아니 달이 밝겠구나. 등불은 그만두고 나오라구나 일러라.
” 하고 고쳐 분부한 뒤 일어서는 김사성을 보고 “내일 만나겠지.” 하고 작별
인사까지 하더니 김사성이 마당에 내려서서 몇 걸음도 걷기 전에 영창을 열고
“노천 외조 제사에 꼭 참사하여야 하겠나?” 하고 묻지 않을 듯한 말을 물은
까닭에 김사성은 괴상히 생각하여 “그것은 왜 묻나?” 하고 고개를 돌이켜 바
라보니 작은 촛불이 찬바람에 후리어서 방안이 밝지 못한 중에 조대헌이 손으로
문틀을 짚고 구부슴하고 서있는데, 그 머리에 짐승의 발톱 같은 손이 내려와서
관 속에 있는 상투를 꿰어들려는 것같이 보이었다. 김사성이 속으로 놀랍게 여
기어 다시 뜰 위로 올라와서 가까이 서서 본즉 짐승의 발톱 같은 손이 아니라
문방장을 걷어 다는 갈고리의 끝이 나온 것이었다.
조대헌은 김사성이 다시 올라오는 것을 가까이서 말하려는 것인 줄로 알고 마
루로 마주 나와서 달빛이 들기 시작한 뜰 위에 섰는 김사성을 내려다보며 “닭
이 밝으네그려. 오늘밤은 공연히 맘이 소란하니 자네와 이야기나 하고 지냈으면
좋겠으나 자네가 제사지내러 간다니 붙들 수가 있어야지.” 하고 은근히 붙들었
으면 좋은 눈치로 말하나 김사성은 “간다고 기별까지 하였으니까 아니 갈 수가
없어. 자네는 일찍이 자게. 내일 만나지.” 하고 다시 마당으로 내려와서 중문
밖으로 나오는데 공연히 맘에 섭섭한 것 같았다. 김사성이 외가에 와서 보니 주
인 되는 외사촌이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 외사촌이 김사성을 분주히 맞아
들이며 “형님댁에서는 일찍 나서셨다는데 어디서 늦으셨습니까?” 하고 물으니
김사성이 “효직이에게서 늦었네.” 하고 대답한 뒤 “집에서 일찍이 나선 것은
어떻게 알았나?” 하고 도리어 물은즉 그 외사촌은 “덕순이가 석후에 와서 다
녀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김사성이 외사촌 이외 여러 사람과 같이 앉아서
이야기하는 중에 그의 외척 되는 사람 하나가 “근래에 조정일이 어떠합니까?”
하고 물으니 김사성이 손을 내저으며 “오래간만이니 서로 서회들이나 하지 조
정일은 물어 무엇하나.” 하고 말하기를 즐겨 아니하는데 그 사람이 굳이 듣고
자 하여 나중에 김사성은 눈살을 찌푸리며 “나로 말하면 공명이 분수에 넘치는
까닭으로 어느 때 화를 받을지 모르는 사람이라 다음날은 이렇게 모이기도 어려
울 것이니 이런 때 서로 서회나 하세나.” 하고 말하여 그 사람은 더 말하지 못
하고 김사성의 외사촌이 “형님, 화 받으실 줄 알면서 왜 진작 피하지 아니하십
니까?”하고 말하니 김사성은 “지금 와서는 진퇴유곡이야.” 하고 한숨을 지었
다.
김사성의 외가는 닭 운 뒤에라야 비로소 행사하는 예문가가 아닌 까닭에 제사
를 일찍 지냈다. 그러나 제사를 파하고 음복을 시작할 때 밤이 벌써 삼경이 가
까웠다. 음복상이 채 다 끝나기 전에 덕순이가 도적에게 쫓긴 것같이 장달음을
쳐 뛰어들어오며 바로 사랑으로 들어와서 양치하는 김사성을 보고 “아버지 큰
일 났습니다.” 하고 벅찬 숨을 돌리려고 할 때 벌써 중문 밖이 술렁술렁하며
여러 사람의 발짝 소리가 들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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