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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3권 (3)

카지모도 2022. 10. 31. 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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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윤가 형제가 점을 친다는 것이 헛말이 아니었다. 그 형제는 새상감이 등극한

뒤로 상감의 수명을 점치고 상감을 두고 방자하는 것을 성사로 여기었다. 주부

이건양이란 자가 숙덕거리었다. 어느 날 원형이 대비전에 승후하러 들어갔다가

한동안 밀담하는 중에 대비가 말하였다. "수십 년 전에 소격서 안에 와서 있던

유명한 술객은 일생의 길흉화복을 눈으로 내다보는 것같이 알아맞히더니 그런

술객이 다시는 없는 게야. 내가 그 술객에게 유년을 낸 것이 있었는데 어디로

갔는지 대전 환후 중에 우연히 생각이 나서 찾아볼랬더니 아무리 찾아야 찾을

수가 있어야지. 정녕 없어진 게야. 그 유년 속에 종사지경은 일왕사주란 귀가 있

었는데,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니 일찍 죽은 인순공주까지 수에 치면 공

부 넷, 대군 하나 오남매 맞지 않았어?" "일군사주가 아니고 일왕사주이었습니

까?" "일왕사주로 생각나는군. " "녜. " 하고 대답하는 윤원형은 왕 한 자에 맘

이 가득하였다. 원형이 궐내에서 나오는 길로 곧 이건양을 보고 수십 년 전 소

격서에 와서 있던 술객이 누구인 것은 아느냐고 물은즉 이건양의 말이 "저는

알지 못하나 저의 아는 소격서 늙은 도사는 혹시 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하고

이건양이가 늙은 도사에게 가서 그 술객의 성명이 김륜인 것 외에 신판사 따라

광주로 간 것까지 알아왔었다. 다시 사람을 놓아 알아본 결과로 김륜이가 아직

죽지 않고 광주읍 근처에서 산다는 말을 듣고, 원형이가 그 형과 공론하고 이건

양을 시켜 폐백을 가지고 가서 김륜을 서울로 맞아오게 하였다. 원로, 원형이 먼

저 자기들과 집안식구들의 사주를 김륜에게 보이고 길흉을 물으니 원로와 원형

의 안해는 대체가 불길한 중에 정명을 다 누리지 못하리라 하고, 원형은 이십

년 부귀가 앞에 있다고 말하였다. "내가 부귀한다면 형님과 실인이 불길할 까닭

이 있소? 두 말중에 하나는 틀릴 것이 아니오?" 하고 물으니 "그건 나도 모르

지요. 내 말이 틀릴 리는 없을 걸요. " 하고 김륜이가 두동지게 대답하였다. 원로

가 "아따, 우리 사주는 어떠하든지 그만두고 이 사주나 하나 보아주오. " 하고

올해생 사주를 적어 주며 "다른 것은 물을 것도 없으니 사주 임자의 수한만 알

아내시오. " 하고 말이 떨어지기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모양으로 김륜이의 입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명은 육십이 세요. " 원로는 입을 벌리고 그 아우를 돌아보

았다. "그렇지만 금년 육칠월 어름에 횡사수를 면하기가 어렵소. " 원로의 벌리

었던 입은 다물어지고 원형의 눈동자는 움직이는데 형제의 얼굴에 다같이 은근

히 좋아하는 빛이 보였다. 김륜이는 나이가 육십줄이나 위인이 젊었을 때나 다

름없이 부삽하여 언어 동작에 체신머리가 없었다. "이 사주 임자는 지금 상감이

신데 상감의 수한은 알아 무어하실라요?" 하고 원로 형제의 얼굴을 바라보니 그

형제가 다같이 놀라는 빛이 있으며 "상감 사주는 무슨 상감 사주. " "아니요, 잘

못 알았소. " 하고 우물쭈물들 대답하였다. 원형이가 김륜의 위인이 꾀기 쉬운

것을 보고 밀실로 데리고 들어가서 자기 형제의 처지와 소망을 대강대강 이야기

하고, 자기 집에 와 있어서 자기들과 의논을 같이 하면 다음날 부귀를 같이 누

리겠다고 말하였더니, 속이 얕은 김륜이가 원형의 꾐에 넘어가서 원형의 사람

노릇할 것을 맹세하다시피 말하여 그 뒤로는 김륜이가 원형 집 손이 되어 주인

형제와 이건양과 네 사람이 함께 쑥덕 공론을 하게 되었다. 김륜이가 사람 방자

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 있어서 원형에게 말하였더니 원형 형제가 좋아하여 곧

그 방법을 시행하기로 작정하였다. 그 방법은 산골 조용한 곳에 들어가서 제웅

을 만들어놓고 제웅등에 사람의 사주를 써서 붙이고 매일 바늘 하나씩을 박으면

칠일 만에 사주 임자의 목숨이 끊어진다는 것이다. 원형의 형제가 남산 으슥한

구석에 초막을 짓고 김륜이의 가르치는 방법대로 제웅을 만들고 그 등에 상감의

사주를 써붙이고 매일 바늘 하나씩 박아 가는데, 괴상한 일은 제웅 발에 바늘을

박는 날부터 상감은 발이 쑤시어 못견디어 하고, 또 제웅 팔에 바늘을 막는 날

부터 상감은 팔이 쑤시어 못견디어 하여 이삼 일 지난 뒤에 상감은 온몸이 쑤시

지 않는 곳이 없었다. 원형의 형제는 궐내의 소식을 듣고 방자가 영험 있는 줄

을 알고 좋아하여 닷새 되던 날부터 원형이는 어느 시공을 갔다 온다고 핑계하

고 남산 초막 속에 가서 파묻혀있게 되었다.

 

6

원형의 형제가 남산에서 시작하기 전에 상감이 특별한 처분으로 전에 몰수하

였던 김식의 가택과 재산을 도로 내어 주게 하여 김덕수는 그의 늙은 어머니를

뫼시고 전날 아버지의 집으로 이사하고 김덕무는 맏형의 글방 차렸던 집으로 이

사하고 혜화문 안 갖바치 살던 집에는 김덕순이 홀아비 살림으로 밥해 줄 사람

만 두고 지내게 되었다. 덕순이가 아우 내외에게 얹히어 있을때와 달라 가끔 놀

러 올라오는 양주 꺽정이도 며칠씩 묵다 가기가 편하였다. 꺽정이가 혜화문 안

에 와서 묵고 있을 때다. 어느 날 젊은 중 하나가 찾아와서 덕순을 보고 “김서

방님, 소승 문안드입니다. ” 하고 인사하니 덕순은 처음 보는 중이라 인사 대답

으로 “어느 절에 있는가?” 하고 물었다. “죽산 칠장사에 있습니다. ” “시주

얻으러 다니는가?” “아니올시다. 스님의 편지를 가지고 왔습니다. ” “스님은

누구야?” “병해대사올시다. ” 덕순이와 꺽정이는 다같이 놀라며 반가워하였

다. 꺽정이가 창녕서 떠날 때 대사는 늦더위 지나거든 온다고 뒤떨어지더니 그

뒤에 창녕서는 서울로 올라갔다는 기별이 있었는데, 서울은 온 일이 없고 중간

에서 자취가 없어져서 삼사 년 동안 생사 존몰을 모르던 터에 뜻밖에 소식을 듣

게 된 것이었다. “편지 어디 있나? 어서 이리 내어. ” 덕순이는 편지 보기를

급하여 하는데 꺽정이는 중을 보고 말을 물었다. “병해대사가 죽산 가 계신 지

몇 해나 되었소?” “올해 사 년째인가요. ” “창녕서 오시는 길에 곧 가셨군.

” 편지봉을 뜯어보던 덕순이가 “여기 네게 오는 편지도 있다. ” 하고 꺽정이

를 돌아보았다. “뜯어보시오. ” “그래라. ” 덕순에게 온 편지도 사연이 간단

하나 칠장에 연분이 있어 와 있게 되었다는 말과 소식 끊어 미안하다는 말이나

있지만 꺽정에게 온 것은 다른 말이 없이 “제웅을 사를 때 바늘들을 뽑아라.

나의 낯을 보아서 목숨만은 살리고 이 쪽지를 주어라. ”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는 말만 적히고 륜개견이라고 쓰인 작은 봉지가 편지 속에 들었었다. “그게

무슨 소리오? ” “나도 모르지. ” “편지 줄 때 무슨 말씀이 있습디까?” 하

고 꺽정이가 중에게 물으니 “별말씀 없어요. 혜화문 안 오는 길을 가르쳐 주

실 뿐입디다. ” 하고 중이 꺽정의 말을 대답한 뒤에 덕순을 바라보며 “심선생

님이란 이의 댁이 여기서 가깝다지요?” 하고 물었다. “심선생님이 돌아가서

대상이 쉬었는데 심선생에게 편지를 한 게로군. ” “선생님이 심선생 죽은 것

을 아실 까닭이 없지요. ” 덕순이와 꺽정이가 서로 보고 말하는 것을 중이 듣

고 있다가 한번 하하 웃고서 “우리 스님이 어떠신 분인지 잘들 모르시는구려.

그만 일을 모르시고 생불 말씀을 들으시겠소. 스님이 향을 피우고 눈만 감으시

면 천리 만리 밖 일도 환하게 눈으로 보시는 것같이 알으십니다. 지금 편지들

보고 말씀하시는 것도 스님은 알고 기실 것입니다. ” 하고 말하고서 손가락을

꼽아보더니 “심선생님이란 이의 대상이 인제 사흘 남았구먼요. ” 하고 말하였

다. “가만 있거라. 참말 한 사흘밖에 아니 남았는가 보다. ” “글쎄요, 하여튼

지 일간일 것이오. ” “그것 보시지요. 내가 떠나기 전날 밤에 스님 말씀이 대

상이 엿새 남았다고 하십디다. 그리고 향 한 쪽을 종이에 싸주시며 대상때 쓰도

록 갖다 드리라고 하십디다. ” 하고 향쪽 산 것을 바랑 속에서 찾아내어 덕순

이와 꺽정이를 보이었다. 칠장사에서 온 중이 심선생 집에 가는 향을 전하고 도

로 혜화문 안에 와서 하룻밤을 묵어가는데, 덕순이와 꺽정이는 대사의 범절을

자세히 물어보았다. “날마다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불경 보시지요. ” “

상좌는 몇 사람인가?” “온 절 중이 모다 스님의 상좌 셈이지요. 그중에 스님

방에서 스님을 뫼시고 지내는 사람이 소승 외에 두 사람이 있습니다. ” “훌륭

한 대접을 받는군. ” “그러면요. 대접 여부가 있습니까. 중들은 말씀할 것도

없지만, 근처 속인들도 모두 대접합니다. ” “그건 어째서?” “병 있는 사람이

절 한 번에 병이 낫지요, 자손 없는 사람이 스님 불공 한 번에 자손을 보지요.

아무리 무식한 사람이라도 눈앞에 영검을 보고야 대접 아니할 수 있습니까? 죽

산, 안성, 용인 근방 사람들에게 칠장사 생불님이라고 물으면 거의 모를 사람이

없습니다. ”

 

7

이튿날 덕순이가 답장을 써주어 중을 떠나보낸 뒤다. 꺽정이가 부작 같은 편

지를 돌쳐 생각하고 “제웅은 무어고 낯 보아 살릴 사람은 누구이람?” 하고 혼

잣말같이 중얼거리더니 덕순이 말이 “평소에 말 한마디 지망지망히 아니하던

사람이 종작없는 말을 편지로 적어 보낼 리 없으니 두고 보아라. ” 하고 대사

의 사람된 것으로 그 말이 곡절이 있을 것을 믿어서 꺽정이도 “글쎄요. ” 하

고 그 쪽지 편지를 줌치 속에 집어넣었다. 그날 저녁때 덕순이는 큰집에 가고

꺽정이 혼자 방에 들어앉았다가 갑갑하여 행길가에 나섰더니, 길 건너편에 동리

여편네가 네 다섯이 함께 모여 서서 참새같이 지껄이는데 꺽정이가 들으려는 맘

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새된 목소리로 지껄이는 말이 저절로 귀에 들리었다. “

내일 모레 남산 국사당에 밤굿이 있답디다. 구경들 가십시다. ” “아이구, 나도

가야지. ” “입고 나설 옷이 있어야지 가지. ” “굿구경도 좋지만 밤에 남산

꼭대기를 어떻게 올라가오. ” 꺽정이는 서울이 고향이나 진배없지마는, 남산 국

사당은 한번도 올라가 본 일이 없는 터이라 여편네들의 지껄이는 소리를 듣고

‘갑갑한 김에 국사당에나 올라가 보겠다.‘ 하고 생각하였다. 일이 일부러 만든

것같이 공교히 되느라고 처음으로 남산에를 올라오는 꺽정이가 어디를 어떻게

돌아서 왔던지 조그마한 초막 앞에를 왔다. ‘국사당이 산꼭대기에 있다더니 어

째 이런 구석에 와 있을까?’ 하고 꺽정이는 국사당인가 의심하며 그 안을 들여

다보니 뒤편으로 다가서 젯상 하나가 놓여 있고, 젯상 안침에 제웅 하나가 세워

있다. 대사 편지에 있던 말이 꺽정이 머리속에 번개같이 생각났다. ‘하하, 저것

을 사르란 말이구나. 대체 저것이 무엇일까?’ 하고 혼잣말하며 자세히 살펴보

니 제웅 앞에는 불을 켜지 아니한 등잔 세 개가 놓여 있고, 젯상 아래는 깔아놓

은 방석 두 개가 놓여 있다. 이것이 원형의 방자하는 초막인 것은 다시 말할 것

도 없지마는, 이때 원형이가 김륜이와 같이 앉았다가 목이 말라서 부엉바위로

물 먹으로 나간 동안이라 초막이 비었던 것이다. 꺽정이가 처음에 대사 편지의

말대로 곧 제웅을 사르려고 하였으나 불씨가 없을 분 아니라, 까닭도 모르고 사

르기가 우스워서 국사당에 올라 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다시 와서 보리라고 생각

을 고치어 먹고 남산 꼭대기로 길을 찾아올라갔다. 해가 서산에 넘어간 뒤에 꺽

정이가 국사당을 돌아 내려오는데 길을 잃고 초막 있는 곳을 지나 내려갔다가

다시 찾아올라왔다. 근처에 와서 보니 아까 없던 불빛이 초막에서 새어나오고

도란도란하는 사람의 말소리까지 들리었다. 꺽정이가 동정을 살피려고 발소리를

내지 않고 초막 옆에 있는 소나무 뒤에 와서 숨어 섰으니 초막 안에서 나오는

말소리가 속살거리는 말 이외에는 모두 똑똑히 들리었다. “여보, 바늘을 어디

두었소?” “아까 영감이 두셨지오. ” “내가 언제 어디다 두어?” “영감, 정

신이 없으시구려. 나는 보니 아까 물 먹으러 나갈때 영감이 방석 밑에 넣으시는

갑디다. ” “그러면 진작 방석 밑에 있다고 하지 기다랗게 말씀할 것이 무어

있소?” “내가 두지 않은 것이니까 말씀 아니할 수 있습니까. ” “내가 정신

이 없어. 옳지, 여기 있군. ” “인제 이것 한 개면 소원 성취로구려. ” “오늘

밤 자시만 지나면 만사여의할 터이지만, 술시를 잘 지날는지 염려가 됩니다. ”

“술시, 염려 마시오. 조금 있으면 술시가 될 터이오. ” “글쎄요. ” “자시에

바늘 하나만 더 꽂으면 내일 아침에는 전하 상소리를 듣게 될 모양인데, 지금쯤

궁중에서야 야단 여부가 있겠소. ” "임금 노릇을 반 년도 못하고 죽기는 원통할

걸. “ 그 수작하는 이야기로 임금 방자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새 임금의

처지는 꺽정이가 전부터 불쌍하게 생각하던 데다가 뒤에서 방자하는 것들의 미

운 생각이 복받쳐올라왔다. 뚜벅뚜벅 걸어서 초막 앞으로 나가서 드나드는 문을

막고 서서 ”이놈들!“ 하고 한 번 호령에 안에 있던 두 사람은 자지러지도록

놀라서 어찌할 줄을 모르고 쩔쩔매었다. 꺽정이가 안으로 들어가서 한 손에 한

사람씩 두 사람을 한꺼번에 잡아들고 나왔다. ”이놈들, 못된 놈들 같으니, 방자

잘한다. 버릇을 좀 배워라!“ 하고 호령한즉 그중에 늙은 자가 ”잘못했습니다.

살려 줍시오. “ 하고 비는데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그 늙은 자의 얼굴을 불빛

에 치켜들고 들여다보니 낯이 익었다. 김륜이었다. 김륜이는 호되게 겁이 나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므로 양편 손으로 사람 하나씩 치켜드는 장사가 꺽정인 줄을

모르고 장수님이라고 부르면서 “죽을 때라 잘못했으니 제발 용서하십시오. ”

하고 빌기를 마지 아니하였다. 꺽정이가 속으로 그 못생긴 것을 웃으면서 “못

된 짓 하는 군이 거센 체하면 혹시 용서할 수 있지만, 애걸

복걸해서는 용서하지 못하겠다. ” 하고 얼굴에 침을 배앝으니 김륜이는 침을

씻을 생각도 못하고 “네, 거센 체합니다. ” 하고 고개를 겨우 목 늘이듯 하여

꺽정이는 한번 허허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하늘에 반달이 있어서 산구석

솔빛 속에도 희미한 빛이 비치었다. 꺽정이가 두 사람을 땅 위에 주저앉히고 고

양이가 쥐 놀리듯 졸리었다. “ 이놈의 자식은 귀 뒤에 옥관자를 붙였구나. 네

성명이 무엇이냐?” “대답 못하겠느냐?” 하고 꺽정이가 발끝으로 구부리고 있

는 사람의 어깨를 작신하니 애구애구 하고 죽는 소리가 나왔다. “성명이 무어

냐?” “윤가올시다. ” “이름은 없느냐?” “원로올시다. ” “윤원로, 잘 알

았다. 너의 놈 형제가 누이를 자세하고 못된 짓 잘한다더라. ” 윤원형이가 초막

안에서 들려나올 때 벌써 기색하다시피 되어 살려 달라는 말 한마디 못하고 땅

에 주저앉힐 때까지도 이승인지 저승인지를 모르다가 어깨를 맞았는지 차였는지

뼈가 부서지는 것 같이 아픈 데서 정신이 반짝 났었다. 그리하여 죄를 형에게

밀어 붙이려는 꾀로 이름을 외대는 것이었다. ‘윤원로 잘 알았다’ 하는 말에

꾀 쓴 것을 다행히 여기면서 “이런 일은 처음이올시다. ” 하고 죽어가는 목소

리로 대답하였다. “처음은 죄가 아니랴? 너 같은 쇠새끼는 손 대일 것도 없다.

죽거나 살거나 네 명이다. ” 하고 꺽정이가 발로 떠내던져 아래로 굴리었다. 원

형이는 이십 년 부귀가 앞에 있는 까닭으로 운수가 뻗치었던지 바윗돌에도 닥치

지않고 몇 번 구르다가 큰 소나무 밑둥에 걸치었었다. 어깨가 부어오르고 가슴

이 멍이 들고 몸에 생체기가 날 뿐이었다. 이것은 뒷이야기라 그만두고 꺽정이

가 그 다음에 김륜이를 내려다보며 “한어미의 자식도 오롱이조롱이다. 같은 선

생의 제자가 어째서 저 모양이람. ” 김륜이가 선생 들추는 말에 갖바치인가 의

심하였던지 “동문수학한 정분으로 보더라도 너무 몹시 하십니다.” 하고 고개

를 치어들고 이윽히 바라보다가 “나는 누구라고? 양주 백정의 아들이로군. ”

무심결에 백정 아들이라고 말한 것을 꺽정이는 업수이 여기는 말로 듣고 “이

늙은 것이 참말로 고만 살고 싶은 게다!” 하고 눈망울을 굴리었다. “선생의 낯

을 보더라도 내게 그렇게 하는 법이 어디 있어?” “이것 보아라, 점점. ” “그

리 말아. ” "말란다고 말 듯하냐?” 하고 꺽정이가 발로 턱을 치받치니 김륜이

는 한참 입을 움켜쥐고 쩔쩔매다가 나중에 침을 뱉는데 시커먼 피에 하얀 이들

이 섞이어 나왔다. “애구 애구 죽여라. ” “죽이라면 못 죽이랴. ” 하고 꺽정

이가 두 손으로 김륜의 목을 움켜쥐며 곧 비틀어 죽이려고 하다가 별안간에 대

사의 편지가 생각이 나서 맘을 돌려먹고 손을 놓았다. 꺽정이가 김륜이를 잡아

일으키어 앞세우고 다시 초막안으로 들어와서 줌치에 들었던 편지봉을 꺼내어

주었다. 김륜이가 ‘륜개전’ 이란 글씨를 한참 동안 정신없이 들여다보고 있다

가 꺽정이의 재촉을 받고서 겉봉을 뜯었다. 김륜이가 다시 한참 동안 편지를 들

여다보더니 눈에 눈물이 어리며 “형님, 감사합니다. ” 하고 절하듯이 고개를

수그렸다. 꺽정이가 “감사한 생각이 나거든 죽산이나 가지. ” 하고 웃으니 “

그러지 않아도 광주 집에 다녀서 곧 죽산으로 갈 터일세. 목숨살려 준 덕은 잊

지 않겠네. ” 하고 김륜이는 꺽정이에게까지 치사하고 산 아래고 내려갔다. 꺽

정이가 김륜을 보낸 뒤에 젯상 위에 있는 제웅을 집어내려서 묶은 짚을 풀고 박

히었던 바늘을 찾아 모으니 바늘이 모두 여섯 개였다. 꺽정이가 바늘이 다시 더

없는 것을 보고야 등잔불을 옮겨 당기어 제웅 푼 짚을 태우고 그 다음에 그 초

막까지 불을 질러버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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