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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감이 쑤시는 증세로 닷새안 밤에 눈을 붙여보지 못하다가 그날 밤에 잠이
들어 한숨을 지고 난 뒤로 그 증세가 거짓말같이 없어져서 이튿날부터 친히 대
비전에 문안 다닐 만큼 기동하게 되었다. 대전 환후가 평복되어서 이런 경사가
없다고 기뻐하는 소리가 궁중에 가득할 때 대비는 남몰래 입맛을 다시고, 전하
하는 말씀이 조반에 분분할 때 원로 형제는 집에서 이를 갈았다. 그러나 대군만
은 마마를 치른 뒤로 몸이 내리 깨끗치 못하여 누워 있던 아이가 대비의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일어나서 기쁨에 넘치는 낯으로 대전께 나와서 보입고 들어가는
길에 고전에 와서 진하하니 대전에서 차마 사랑함을 못이겨하는 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고, 곤전이하 여러 궁인들까지 모두 귀히 여기고 칭찬하였다. 상감이 환
후 평복된 뒤에 정사 다스리기를 힘쓰는데, 그 정사가 한 가지라도 인심에 어그
러지는 것이 없었다. 이때 태학 유생들이 사화에 죽은 조광조 등을 복직하여 달
라고 상소하였는데, 첫상소 비답에는 ‘상소 뜻은 잘 알았다. 이 사람들의 일을
선대왕이 어찌 우연히 생각하고 처치하셨으랴’ 하고 좇지 아니하고, 둘째 상소
비답에는 ‘좇지 아니하는 뜻은 이미 다 말하였다’ 하고 또 좇지 아니하여 유
생들이 모이어서 “학문을 좋아하시는 성주로서 어찌하여 이 일을 지난하실까?
괴상한 일일세. ” “우리의 정성이 천박한 모양이야. ” “우리가 이왕 발단을
한 바에는 위에서 좇으시기까지 연해 상소질해 보세. 하다하다 안 되거든 공관
하고 다들 나가버리세나. ” 하고 서로 공론들 한 뒤에 연거푸 셋째 소장을 올
리었더니 비답이 길게 내리었다. “너희들이 수선지지에 있어서 예를 좋아하고
때를 의론하여 소장을 세 번 올리는데 사의가 간곡하고 의리가 정당하니 배운
바의 바른 것이 이보다 더할 수 없을 것이라. 우리 선대왕의 교육의 여택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말을 좇지 않는 것은 뜻이 있는 일이고, 또 태학이 비록 공론을
가졌다 하나 시비를 정하는 것은 따로 조정이 있으니 너희들이 시비를 말하기까
지는 득당하였다 할 것이나 기어코 시비를 정하려는 것은 유생의 일이 아니라
아직 물러가 생각하라. ” 유생들이 이 비답에 감동이 되어 서로 돌아보며 눈물
을 흘리고 물러나갔었다. 상감이 몸이 약하고 병환이 잦으나, 그렇게 쉬이 상사
날 것은 아니었는데 유월 그믐날 밤에 홀저에 병환이 위중하여 삼정승을 내전으
로 불러들이어서 “나의 명이 심상치 않고 나에게 시속이 없는 터이라 경원대군
이 비록 나이 어리나 범정이 숙성하여 후사를 맡길 만하기로 이제 전위하는 것
이니 그대들은 도와주라. ” 하고 전교를 내리고 뒤미처 또 “조광조 등의 죄와
현량과 파과는 선대왕 때 일이라 장차 조용히 처리하려고 하였더니 지금 나의
병이 할 수 없이되어 더 기다릴 수 없으니 광조 등의 죄를 소석하여 직첩들을
도로 주게 하고 현량과를 복과하여 주라. ” 하고 전교를 내린 뒤에는 한참 동
안 정신이 흔흔하여 곧 운명하는것 같더니 다시 잠깐 정신을 돌리어서 대신과
경연관들을 불러 앞에 세우고 지필을 찾아 유교를 쓰려고 하다가 손이 떨리어
글자가 되지 아니하매 붓을 내던지며 한숨을 쉬고 “나의 평생 소회를 그대들
에게 알리려고 하였더니 인제 할 수 없다. 선대왕 삼년상을 마치지 못하니 망극
하다. 내가 죽은 뒤에 선대왕 능하에 묻어 주기를 바란다. 초종 절차를 간략히하
여 인민에게 폐가 되게 하지 마라. 육칠 년 동안 수재, 한재에 백성들이 불쌍하
다. ” 하고 동강동강 말씀하고 특별히 경연관들을 돌아보며 “내가 병이 이러
해서 삼년상을 마치지 못하니 원통하고 다시 그대들과 같이 경전을 토론하지 못
하니 한이야. ” 하고 똑똑하게 말씀하였다. 그 이튿날인 칠월 초하룻날 상감이
마침내 승하하여 조정 관원 여염 인민 할 것 없이 집마다 곡성이 들리는 중에
윤원형 형제와 그 당파들은 의기가 양양하였다. 윤원로가 저의 집 사랑에서 이
건양을 데리고 앉아 술을 먹으면서 “인제 내 심화가 꺼졌네. ” 하고 좋아하
는 것은 보는 사람이나 없었거니와 윤원형은 조찬성 이기와 함께 곡반에 들어와
서 벌써 서슬 있게 돌아다니기를 시작하니 이것을 보고 이를 가는 사람이 백관
중에 한둘이 아니었었다. 인종대왕이 삼십 년 동궁으로 있는 동안에 탁월한 덕
행은 산림처사들까지 칭송하고 기구한 처지는 여염 부녀들까지 가엾게 여기어서
만인의 맘을 일신에 모았던 까닭으로 임금 된 지 여덟 달에 덕화가 아직 깊이
미치지 못하였건만, 국상이 발포되던 날 그날로 서울서 의주까지 천리 동안 곡
성이 맞이었었고, 인산까지 달포 동안 시골서 양식을 싸서 지고 서울로 올라오
는 사람이 수가 없이 많았었다. 이것이 전번 국상 때 보지 못한 일일 뿐이 아니
라 실로 전고에 없는 일이었다. 옥과현감 김인후는 국상 기별을 받은 뒤로
친상을 당한 이나 다름없이 슬퍼하여 매일 통곡에 옆에서 보는 사람까지 경황이
없이 지내었다. 김현감이 수십 일 동안 술로만 살아온 까닭으로 마침내 술병이
나서 자리에 누워 있는 중에 장성고향에서 젊은 일가 사람이 왔었다. 김현감이
누워 있는 방으로 그 사람을 불러들이어 집안 문안과 고향 소식을 대강 물어본
뒤에 “자네 백씨가 서울을 갔다더니 언제 왔는가?” 하고 물으니 그 사람이
“네, 벌써 오셨습니다. 국휼반포된 뒤에 곧 내려오셨습니다. ” 하고 대답하였
다. “국휼 나시기 전에 서울을 떠났든가?” “아니요, 그 뒤에요. 이번에 대행
전하 승하하신것은 알고 보니 큰 변입니다. ” “무슨 변?” “저의 백씨가 궁
중 소식을 소상히 아는 사람에게서 친히 들으셨다는데 참말이라면 큰 변입디다.
” 하고 그 사람이 형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옮기기 시작하였다. “대행전하께서
등극하신 후에 원로, 원형의 형제가 전하께 해로울 일이라면 갖은 흉참한 일을
다하다가 나중에는 치독할 꾀를 내었든갑디다. 어느 날 원형이란 놈이 대비전에
들어와서 궁인들까지 물리치고 무슨 말씀을 여쭙고 나갔는데, 그것이 정녕 치독
할 꾀를 말씀한 것이라고 한답디다. 이 말씀을 대군이 엿들었던지 그날부터 대
군이 대전 옆을 떠나지 않고 붙어 있어서 물 한 대접, 미음 한 보시기라도 자기
가 먼저 맛보기 전에는 대전이 그릇에 입을 대시지 못하게 하더랍니다. 열두 살
먹은 아기로 지각이 갸륵하지 않습니까? 한번 대군이 뒤를 보러 나간 틈에 대전
잡수실 마음이 나왔는데 대전께서 잡수시려고 그릇을 받아드셨을 때, 대군이 들
어와서 깜짝 놀라며 그 미음 그릇을 줍시사고 하여 맛보려고 하니 대전께서는
그만두라고 주지 않으시더랍니다. 그래서 대군이 무엄한 것을 무릅쓰고 주시지
않는 그릇을 빼앗으려고 하는데 대비가 뒤에서 동정을 엿보고 있었던지 홀저에
들어와서 군부의 잡수실 음식을 신자 된 도리에 먼저 맛보는 것이 옳으나. 손에
잡으신 그릇을 빼앗다시피 하는 것은 무엄한 일이다 하고 대군을 꾸짖고 미음
그릇을 만져보며 미음이 다 식었다 다시 내오래라 하고 궁인을 불러서 미음 그
릇을 들여보냈답니다. 말들이 그 미음이 그저 미음이 아닌데 대군 없는 틈을 보
고 내왔던 것을 마침 대군이 들어와서 맛보려고 하니까 대비가 체면을 수습하는
체하고 도로 들여보낸 것이라고 한답니다. 유월 그믐날 저녁때 대군이 서체로
복통이 나서 따로 누워 있는 동안에 대전께서 무엇을 잡수셨던지 갑자기 오장이
쥐어뜯는 것같이 아프다고 쩔쩔매기 시작하셔서 그 날 밤에 대군에게 전위하시
고 그 이튿날 새벽에 승하하셨는데, 수시하던 사람의 말이 몸에 검푸른 점이 생
기고 이에 검은 피가 엉기고 승하하신 뒤 불과 몇 시각 못 되어서 살이 문정문
정 만지는 손에 묻어나더라니 치독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서울서는 이것을 아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지만, 대비가 중간에 끼인 까닭으로 수군수군할 뿐이더랍니
다. ” 김현감은 이야기를 듣는 중에 누웠던 자리에서 일어 앉았는데 이야기 끝
이 나도록 말마디 아니하고, 취한 듯이 어린 듯이 앉았더니 홀저에 “애구. ”
하고 소리를 지르며 입으로 피를 토하였다. “웬일이십니까?” 하고 일가 사람
이 놀라 일어나서 그 몸을 붙드니 김현감은 붙들린 채로 애고지고 하며 슬프게
통곡하였다. 김현감이 정신을 수습한 뒤에 곰곰 생각하였다. ‘대비가 족히 그런
일을 할 양반이지만, 이목이 번다한 궁중에서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을
까? 아무리 대비가 악하다 하더라도 못된 일을 드러내놓고는 할 수 없었을 터이
지. 아니 수랏간 나인 한둘만 끼면 하지 못하란 법도 없어. 원래 강건치 못하신
터이라도 갑자기 승하하시기는 반드시 곡절이 있는 일이야. 다른 궁으로 이어만
하셨더면 이런 일 저런 일이 없었을 것인데, 내가 미리 염려까지 하면서도 위에
서 들으시도록 정성껏 말씀을 아뢰지 못하였으니 이런 절통한 일이 또 어디 있
단 말이냐. 도대체 말하자면 우리 동방 인민이 복이 없어서 요순 같은 임금을
오래 뫼시지 못하게 된 것이다. ’ 김현감은 그 이튿날로 인궤를 봉하여 전라감
영으로 보내고 장성고향으로 돌아왔다. 김인후가 현감을 내버리고 집으로 돌아
온 뒤에는 문을 닫고 들어앉아 세상일을 묻지 아니하고 매년 육칠월 두 달 동안
은 매일 장취하다시피 술을 먹고 지내는데, 유월 그믐날만은 입에 술을 대지 아
니하고 종일 단정히 앉았다가 저녁때가 지난 뒤에는 앞산 속에 들어가서 북향하
고 통곡하며 그 밤을 새웠었다. 여러 해 뒤에 나라에서 특별히 홍문관 교리를
제수하고 김인후를 서울로 부른 일이 있었었다. 그때 상지를 전갈하는 장성현감
부터 김인후가 으레 사폐하려니 미리 짐작하고 “이번 교리 제수가 옆에서 아뢰
거나 품한 것이 아니고 특별하신위의 처분이랍니다. 아무쪼록 곧 응명하
시도록 하시고 사폐하실 생각은 잡숫지 말으십시오. ”하고 권하여 말하니 김인
후는 현감을 바라보며 “성주께서 민을 잘못 아시고 권하시기까지 하시는 것 같
습니다. 민 같은 용렬한 위인이 특별한 처분은 고사하고 심상한 제수라도 어찌
감히 사폐할 생각을 하오리까. ” 하고 천연스럽게 대답하였다. “이번에 상경하
신단 말씀이오니까?” “하고말고,다른 말씀이 어디 있겠습니까. ” “그러면 언
제쯤 발정하시겠습니까?” “행장을 다소 수습할 터인즉 이틀 말미는 주셔야 할
까 봅니다. ” 김인후가 현감에게 말한 것을 어기지 않고 과연 사흘 되던 날 서
울길을 떠나는데, 행장 차린 것이 예사와 달랐었다. 말 두 필에 한 필은 안장 지
어 탔거니와 다른 한필에는 오지 장군 두 개를 한바리 짐으로 실리었고, 하인
네 사람에 견마잡이는 찬합을 걸머졌거니와 나머지 세 사람에게는 항아리 한 개
씩을 지웠었다. 장군에 넘치는 것도 술이요, 항아리에서 출렁거리는 것도 술이
요, 찬합에 든 것은 안주였다. 대주객의 행장이다. 그 집에서 떠나 불과 오 리도
못 나와서 좋은 대밭이 있었다. “대밭 아래서 한잔 먹고 가자. ” 하고 김인후
는 말에서 내렸다. 한동안 지체한 뒤에 다시 길을 떠나 삼 마장도 채 못 나와
남의 집 담안에 좋은 꽃나무가 있었다. “꽃나무 밑에서 한잔 먹자. ” 하고 김
인후가 말에서 내리려고 하는데 마부가 “아까 대밭은 남의 집 울 밖이지만 지
금 꽃나무는 남의 집 담 안에 섰습니다. 술 잡수시려고 일부러 찾아들어가시렵
니까?” 하고 말리는 뜻으로 말하였더니 “아따, 이놈 잔소리 마라. ” 하고 마
침내 말에서 내렸다. 또다시 한동안 지체한 뒤에 길을 떠났다. “그 산 좋다. 산
밑에서 한잔 먹자. ” “그 물 좋다. 물가에서 한잔 먹고 가자. ” 한 잔 한 잔
또 한 잔에 지체하는 동안이 길 가는 동안보다도 더 많았다. “이렇게 가다가는
육백 리 서울길을 일 년 두고 가겠네. ” “늙어 죽도록 갈는지 모르지라오. ”
하고 하인들이 뒷공론할 만큼 길이 붇지 아니하여 십여 일 두고 온 것이 서울길
을 반도 채 못왔는데, 그 동안에 항아리들이 벌써 비고 장군들이 차차로 가벼워
졌다. “술이 남았느냐?” “이번 잡수시면 고만 마지막이올시다. ” 술이 없어
지자, 사람은 그날로 병이 났다. 김인후는 서울로 기별하여 병으로 중도부진하게
된 연유를 상달케 하고 장성으로 돌아와서 전과 같이 문 닫고 들어앉아 한많은
세월을 보내다가 겨우 요사를 면하여 죽었는데, 유언으로 옥과 이후관작은 명정
이나 신주에 못 쓰게 하였다. 여줄가리 뒷날 이야기는 고만두고 인종 국상 난
뒤로 당시 조정판국이 험악하던 것을 대강 이야기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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