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장 살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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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어린 경원대군이 임금의 위에 오르게 되매 대신들이 빈청에 앉아서 백관
을 모아놓고 대비 수렴할 일을 의론하였다. 영의정 윤인경이 먼저 입을 열어 "지
금 대왕대비전과 왕대비전이 계입시니 어느 전에서 정사를 들으셔야 하겠소?"
하고 좌우를 돌아보니 좌의정 유관이부터 말이 없이 잠자코 앉았는데, 우찬성
이언적이 자리에 나앉으며 "모자분이 같이 정사를 듣는 것은 옛 전례가 있지마
는 어디 수숙간에 자리를 같이 하는 법이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여 마침내 다른
의론이 없이 대왕대비가 수렴청정할 것을 작정하고 대신들이 서계를 올리었다.
대왕대비가 권세자루를 쥐게 되니 원로, 원형 형제가 드날릴 판을 만났으나, 다
같이 간사스럽고 또 다같이 방사스러운 중에 원로는 원형이만큼 조심성이 부족
하여 보는 사람에게마다 대군이 임금 노릇하게 된 것이 저의 공이라고 자랑하니
그 자랑은 곧 대역부도한 짓을 하였다고 자수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일이라, 그
리하지 않아도 대행왕이 갑자기 승하한 데 대하여 원로의 형제를 치의하는 사람
이 많던 터에 원로의 자랑을 이 사람 저 사람이 알게 되자, 원로의 살점을 어여
서 먹고자 하는 사람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대신 이하 백관이 빈청에 모이어서
원로를 박살하자고 공론하게 되었는데, "전교를 물어 가지고 죽이려다가는 일이
덧거치기 쉬우니 먼저 잡아들여 죽이고 뒤에 품하도록 합시다. " 하고 의론이 나
서 여러 조신들이 차례로 정승 앞에 나가서 가부를 말하여 가는 중에 공조참판
이준경이 차례에 나아가서 "오늘은 전날과 다릅니다. 대왕대비께서 위에 계신데
그 동기를 함부로 죽일 수가 있습니까?" 하고 부타는 의견을 말하니 좌의정 유
관이 "원로를 살려 두면 다른 날은 영감의 걱정거리가 되리다. " 하고 미타하게
여기는 기색을 보이었다. 이준경이 의견을 말하고 돌아나올 때, 여러 사람들의
노려보는 눈이 몸 위에 모이었으나 그는 본체만체하고 천천히 걸어서 문밖으로
나가니 도승지 송인수가 뒤따라나오며 "원길이?" 하고 자를 불러 이준경이 발을
멈추고 돌아다본즉 송인수는 얼굴에 핏대를 올리고 "자네 의론이 사람의 의론인
가?" 하고 볼메인 말소리로 힐책하였다. 이준경이 당시 벼슬은 비록 아경이나 재
보의 물망이 높던 사람이라, 그 의론에 무게가 있을 뿐이 아니라 또 그 의론이
난 뒤에는 대왕대비에게 화 받을 것을 생각하고 굳세게 주장하고 나서는 사람이
없어서 원로를 당장에 박살하려던 공론이 중지되고 영의정 윤인경 이하 대신이
원로를 논계하되 "군기시 첨저 윤원로는 종사의 대적이요, 국가의 화태이오며, 이
사람이 비록 자전의 지친이오나 실상은 자전의 원수이오니 속히 원방에 내치시
어 신민의 울분한 정을 풀게 하옵소서. 그리하오면 종사의 다행일까 하옵니다. "
하고 원로 귀양 보내기를 청하였으니, 대왕대비는 즐겨 좇지 아니하여 정부와
삼사가 논집할 뿐 아니라 육조 낭관들까지 각각 상소를 올리게 되니 대왕대비도
마침내 하릴없이 "내가 어찌 원로를 아끼어 조종 공론을 무시할까 보냐. 그러나
틈 있는 사람의 소위인가 하여 좇지 아니하였더니 지금 온 조정신하가 다 함께
논죄하는 바에 구태여 고집할 생각이 없으므로 원로의 자원을 좇아 중도부처케
하노라. " 하고 비답을 내리었다. 비답 중에 틈 있는 사람이란 말은 형조판서 윤
임을 가리킨 것이다. 윤가 형제가 윤임을 눈에 가시로 미워하는 외에 좌의정 유
관과 이조판서 유인숙을 꺼리고 두려워하였으니, 유의정은 대행왕의 지우에 감
격하여 진충보국하려던 사람이고 유판서는 천품이 강직하여 소인 미워하기를 원
수같이 하던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조정에 있고는 윤가형제가 드날려 볼 희망
이 적었다. 원로가 공론에 용납되지 못하여 조정에서 내쫓긴 뒤에 원형은 겉으
로 가장 근신하는 모양을 보이나 속으로는 권세 잡을 욕심이 불 일듯 하여 이
기, 임백령, 정순붕, 허자와 같은 소인들과 합심이 되어 미워하는 사람이며 두려
워하는 사람들을 일망타진하려고 꾀하였다.
2
이기는 병조판서 망에 올랐을 때 유정승이 훼방하였다고 원수치부를 하는 터
이요, 임백령은 옥매향이를 차지 못하여 윤판서에게 숙감을 품은 터이요, 정순붕
은 사림에 화를 못끼쳐 성화하는 위인이요, 허자는 주심이 부족하여 남에게 끌
리기 잘하는 인물이라 이래저래 원형의 심복이 되어 꾀를 모아 가지고 허무한
말과 맹랑한 일로 모함하기를 시작하였다. 대행왕 상사 나던 날, 윤임이가 대군
대신에 계림군을 추대하려고 하는데, 유관, 유인숙이 찬조하였다고 말을 지어내
고, 또 윤임이가 왕대비 박씨께 상서하는 것으로 편지 한 장을 위조하여 원형이
가 저의 첩 난정이를 시켜서 대왕대비의 눈에 보이도록 일을 꾸미었다. 난정이
가 대왕대비전에 문안 들어오는 길에 보는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 그 편지를 내
전 마당에 떨어뜨리고 얼마 뒤에 대왕대비전 궁인들과 같이 나오다가 편지 떨어
뜨린곳에 가까이 와서 눈이 밝은 체하고 "저것이 무슨 편지 아닙니까?" 하고 손
가락으로 가리키니 체신 없는 젊은 궁인 하나가 "글쎄, 편지인가 보오. " 하고
대답하며 쪼르르 가서 그 편지를 집어들고 왔다. "어디 좀 봅시다. " "상서라고
쓴 글씨가 남필이로구려. " "누가 떨어뜨렸던지 편지 심부름시킬 만한 사람이군.
" 하고 궁인들이 지껄일 때 난정이가 시침을 떼고 “상서라고 썼을 때는 대왕대
비전이나 왕대비전에 올리는 편지가 아니겠어요?" 하고 편지를 들고 섰던 궁인
의 얼굴을 들여다보니 그 궁인이 우리는 상서라고 쓴 편지를 받지 못할 사람이
오?" 하고 하하 웃었다. "우리 공론하고 뜯어봅시다. " "그까짓 것은 뜯어보아
무엇하니? 잘못 뜯어보고 말썽스러울라. " 하고 나이 지긋한 궁인이 뜯어보자는
젊은 궁인을 나무라니 "떨어뜨린 편지 뜯어보면 어떻습니까? 말썽스러울 것 같
으면 없애 버리지요. " 하고 난정이가 가로막고 나섰다. 그 편지 사연이 수상스
러웠다. "무슨 까닭 있는 편지로구려. " "글쎄 말이오. " 난정이가 편지를 들여다
보는 체하다가 놀라는 모양으로 "여간 까닭 있는 편지가 아닙니다. 대왕대비전에
보시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 같이 들어가십시다. " 하고 편지 가진 궁인의
팔을 이끌었다. 대왕대비가 궁인이 드리는 편지를 펼쳐보더니 사연도 채 읽기
전에 "윤임의 필적이구나. " 하고 말하니 난정이가 앞으로 나서며 "마마께옵서
필적을 아시면 다시 더 의심할 것이 없는 일이외다. " "편지 사연만 보더라도 십
중팔구가 그런 듯 하옵니다. " 하고 요신을 부려가며 말하였다. "왕대비전께 윤
판서의 편지가 가끔 들어오는 모양이니까 그런지도 모르지요. " "사연이 그런 것
같지요? 그러나 사연 중에는 모를 말이 있습디다. " 하고 편지 들고 들어온 궁인
과 난정이가 서로 이야기하는 것을 대왕대비가 듣고서 "가만히들 있거라. 사연을
보면 알지. " 하고 편지를 읽기 시작하였다. "근래에 국사가 점점 수상하여지오
니 죽을 바를 알지 못하와 주소 눈물로 지내오며 판서도 역시 민망한 생각을 가
지옵고 대위를 공우에게 옮기려 하와 정승에게까지 통정하였삽나이까. 이처럼
지류하옵시면 애매히 죽을 사람이 많사올 듯하외다. 전자에 원로를 내쫓을 때,
원형까지 함께 죄주게 하였든들 인심이 분기되와도 이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을
줄로 아옵나이다. " 대왕대비가 편지를 접으며 "괴악한 것들, 어디 보자. " 하고
혼잣말로 벼르는데 노기가 얼굴에 가득하였다. 난정이가 대왕대비의 기색을 할
깃 엿보며 "기막히는 일도 다 많아. 대체 판서는 누구고 정승은 누구이람?" 하고
혼잣말로 말하는 거을 대왕대비가 탄하여 말하듯이 "누구가 다 무어냐? 물을 것
도 없이 유인숙이와 유관이겠지. " 난정이가 "네. " 하고 대왕대비의 말을 대답
하고 난 뒤에 다시 옆에 섰던 궁인을 돌아보며 "공우는 누구요? 아시오?" 하고
물어서 "봉성군 대감의 자함이 그렇답디다. " 하고 궁인이 대답한즉 "공연히 나
불나불 지껄이지들 마라. " 하고 대왕대비는 역증을 내어 꾸짖었다
3
대왕대비의 밀지가 예조참의 윤원형에게 내리니 그 밀지는 윤임, 유관, 유인숙
을 죄주게 하라는 것이었다. 윤원형이 즉시로 이기, 임백령, 정순봉, 허자 등과
의논한 후, 대사헌 민제인과 대사간 김광준에게 밀지를 보이고 그속에 이름 적
힌 세 사람을 양사에서 논핵케 하라고 부탁하였다. 민제인과 김광준이 분주히
주선하여 양사 간관들이 중학에서 제좌하기로 되었는데, 제좌하던 전날 허자가
사간원 헌납 백인걸을 청하여 저녁밥을 대접하였다. 허자는 백헌납과 격린하여
살고 교분이 있던 까닭으로 별미가 한가지만 생겨도 나눠 보내거나 청하거나 하
는 터이었다. "오늘은 무슨 별미가 생겼소?" 하고 백헌납이 웃으며 물은즉 "별미
는 없지만 좀 이야기할 것이 있어서 청하였네. " 하고 허자도 따라 웃으며 말하
였다. "무슨 이야기요?" "저녁밥이나 같이 먹고 차차 이야기하세. " 저녁상을 물
린 뒤에 허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일은 대간이 밀지를 의론할 터이라지?" "
그런답디다. " "그래 자네는 어떻게 할 의향인가?" "대간 명색이 밀지를 가지고
대신을 논핵할 리야 있겠소. " "허허, 자네가 그럴 줄 알았지. 만일에 이번 밀지
를 봉행아니하다가는 대화를 면하기가 어려울 것일세, 자네가 편모시하만 아니
라도 또 다르지만 노인을 어떻게 하려고 그렇게 맘을 먹는단 말인가?" "몸을 나
라에 바친 바에야 어떻게 사정을 다 돌아보겠소. " "맘 한번 고쳐먹기에 화복이
갈리는 판이니까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줄 아네. " "다시 생각해 볼 것이
무어 있소. 화복이 갈리는 판이니까 맘을 고쳐먹어 못쓰지요. " "그러면 자네는
죽는 사람일세. " " 죽을 때 죽는 것이 사람 노릇하는 것인 줄 모르시오?" "죽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 사람의 상정일걸. " "상정으로 말하면 자고로 충신 열사란
것이 날 까닭이 없지요. " "그렇기에 사람이 저마다 충신열사가 되기야 어디 그
리 쉬운가. " "'충신 열사가 쉽지 못하다고 개도야지만도 못하게 살 작정하는 법
이 어디 있겠소?" 허자가 길이 한숨만 쉬며 말이 없으니 백헌납은 "나는 가겠소.
" 하고 일어섰다. 허자가 문밖까지 따라나와서 백헌납의 손을 잡고 “내일이 자
네는 군자되고 나는 소인 되는 날일세. ” 하고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었다. 그
이튿날이다. 중학 앞에 흑의 전배가 뜨며 간관이 와서 대간들이 중학으로 모이
었다. 번잡한 제좌 절차를 마치고 원의석을 차리고서 앉았을 때, 대사헌 민제인
과 대사간 김광준이 밀지에 대하여 말을 꺼내서 “지금 대신 몇 사람이 자전의
치의를 받아서 밀지가 모모 재상에게 내리었는데, 유언비어에 궁중이 흉흉한 모
양이니 우리가 먼저 발론하여 경하게 처치하여야지 만일 일이 다른 길로 나오게
되면 국가의 대화를 일으킬 것이 걱정인즉, 그 대신들의 죄상이 애매한 것을 우
리가 비록 모르는 것이 아니지만 목전의 사태로 보아서 우리는 보고만 있을 일
이 아니다. ” 하는 뜻을 둘이 번갈아 설명한즉, 여러 사람의 얼굴에 발발한 노
기가 나타나더니 일어섰다 앉았다 하기들을 시작하였다. 사헌부지평 김저가 “
이것이 윤임이 하나 까닭으로 나는 일이 아니고 속에는 일대 충현을 어육낼 조
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묘년 사화를 말만 하더라도 피가 끓지 않을 수가 없
는데, 금세 군자로서 남곤, 심정의 짓을 본받는단 말씀이오니까?” 하고 강개한
어조로 말한 뒤에 사헌부 집의 송희규는 작은 몸을 꼿꼿이 세우면서 “나는 온
몸의 뼈를 바으는 한이 있더라도 좇을 수 없습니다. ” 하고 민제인의 얼굴을
치어다보고, 사헌부 장령 정희등은 흰 얼굴에 핏대를 올리면서 “조정의 대사를
논핵하는데 밀지를 가지고 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하고 민제인의 거동을
흘겨보았다. 사간원 사간 박광우는 소매를 걷어치며 언성을 높이고 사간원 정언
유희춘은 때묻은 버선 바닥을 한 손으로 문지르며 도끼눈으로 김광준을 노려보
고, 그 외에 김난상, 이언침, 민기문 같은 대관 간관들이 혹 소리도 지르고 한숨
도 쉬는 중에 헌납 백인걸이 “간세배가 화단을 일으키려고 꾀하는 모양인즉 우
리가 이 일을 발단하는 것은 그 꾀에 빠지는 것이오. ” 하고 김광준의 얼굴을
바라보며 잘라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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