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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3권 (31)

카지모도 2022. 12. 1.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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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봉학이는 외조모를 따라서 교하 낙하원 근처로 낙향한 뒤에 이삼 년 동안 이

웃 동리 글방에를 다니었으나 부지런한 활장난에 글공부가 뒷전 가서 책한권을

배우자면 예사로 일 년이 걸리었다. 나중에 그 외조모가 외손의 공부가 다른 아

이들만 못한데 애성이 나서 쓸데없이 강미만 없애지 말고 집에서 상일이나 배우

라고 글방에를 보내지 아니하여 봉학이는 한동안 등에 지게도 져보고 손에 호미

도 쥐어보았다. 그러나 상일은 글공부만큼도 성실치 못하였다. 그 외조모가 일시

애성으로 상일을 시키었지 원래 시키고 싶어 한 것이 아닌 까닭으로 봉학이의

싫어하는 것을 억지로 시키지 아니하였다. 그 외조모는 남의 전장이나마 농권을

가진 까닭에 울력농사로 농사를 지어서 양식하고 남는 것으로 연년이 밭뙈기를

장만하게 되어 사는 것이 태평이었다. 봉학이 나이 이십이 가까워지며 그 외조

모가 봉학의 흔처를 이리저리 구하던 중에 마침 근처 가난한 토반의 집에 과년

한 색시가 있는 것을 알고 통혼하여 근본이 이러니저러니 처음에는 말썽이 있다

가 마침내 의논이 맞아서 혼인을 하게 되었다. 봉학이가 장가든 뒤에 그 외조모

는 자기 집 옆에 초가 오륙 간을 새로 세우고 딴살림을 차려 주었는데 명색만

딴살림이지 일동일정을 돌보아 주지 않는 것이 없었다. 봉학이의 외조모가 환진

갑을 다 지내고 노병으로 죽을 때에 양자한 아들 내외와 외손 내외를 앞에 모아

놓고 유언하는데 특별히 봉학이의 손을 잡고 “돌 전에 부모를 여윈 너를 길러

서 성취까지 시키고 죽으니 저생에 가서 네 어미에게 원망 받을 것은 없다마는

네가 선달 출신이라도 하는 것을 못 보고 죽는 것이 이생에 남기고 가는 한이

다. 이 다음에 벼슬하거든 외할미 무덤에 소분 올 것을 잊지 마라.” 하고 그 다

음에 그 아들을 돌아보며 “아무리 의로 모였다 하더라도 외숙이고 생질인데 너

의 생질이 농사에 이력나지 못한 사람이니 나 죽은 뒤에는 네가 그 뒤를 돌보아

주어라.” 하고 역시 봉학이의 일을 부탁하였다. 봉학이의 외숙 되는 사람이 사

람이 진실한 까닭에 그 양모의 임종 부탁을 저버리지 아니하여 봉학이는 이때껏

살림 걱정을 모르고 지내는 터이었다. 봉학이가 그 외조모의 유언을 이야기할

때 눈에 눈물까지 글썽글썽아니 덕순이가 “이번 전장에 나가서 성공만 하고 오

면 돌아간 너의 외조모의 한풀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전장

에 나갈 생각도 그래서 났습니다.” “그렇겠다.” “전장에 나가는데 저 형님

과 같이 가면 저도 든든하거니와 저 형님도 해롭지 않겠기에 일껀 와서 말하니

까 싫다고 머리를 흔듭니다그려.” “그것은 공연한 고집이야.” 하고 덕순이가

꺽정이를 바라보며 “봉학이와 같이 나가도록 해보지.” 하고 권하고 꺽정이가

덕순의 권하는 말은 들은 체 아니하고 봉학이에게 “너는 외조모의 원풀인지 한

풀인지 하러 가지마는 나야 무어하러 가겠느냐?” 하고 말하는 것을 덕순이가

다시 “신명풀이로 가려무나.” 하고 말한즉 꺽정이는 “신명이 나지 않는데 풀

이가 어디 있겠고.” 하고 한마디 대답하였다. 대사가 꺽정이를 보고 “자네 칼

이름이 무엇이든가?” 하고 동에 닿지 않는 말을 물어서 꺽정이가 대답히기 전

에 덕순이가 “칼 이름은 갑자기 왜 묻소?” 하고 물으니 대사는 덕순의 묻는

말을 빙그레 웃는 것으로 대답하고 꺽정이보고 말하였다. “그 칼 이름이 있지

않은가?” “장광도랍디다.” “자네의 검술 선생이 삼포왜변에 얻은 칼이라지?

” “그렇답디다.” “자네가 그 칼을 얻은 뒤에 한번이라도 맘껏 써본 일이 있

는가?” “맘껏 쓸 데가 어디 있었나요?” “왜도로 왜의 목을 베는 것 그것도

역시 한 재미려니.” 하고 대사가 말하는데 꺽정이는 장광도를 한번 써볼 생각

이 나서 “제기 한번....” 하고 말 뒤가 없으나 들리는 눈썹에 맘 동하는 것이

보이었다.

 

8

허담이 꺽정이의 떠나고 안 떠나는 것을 알려고 대사 방으로 찾아왔다. 허담

이 대사와 덕순에게 저녁 인사를 말하고, 그 다음에 봉학이를 향하여 합장하고

꺽정이 옆에 가까이 앉으며 “ 내일 아침에 떠날 터인가?” 하고 물으니 꺽정이

가 “떠날까 하지요.” 하고 대답하며 봉학이를 돌아보았다. “형님, 내일 떠날

터이오? 잘 되었소. 나하고 같이 떠납시다.” 하고 봉학이가 꺽정이를 보고 말하

는데 덕순이가 봉학이에게 “아무리 꺽정이를 찾아왔다기로서니 오늘 왔다 내일

가는 수야 있느냐?” 하고 말하였다. “일이 급합니다. 이 형님 보고 의논하고

같이 가든 혼자 가든 곧 가려고 작정하고 왔습니다. 양주 갔다 여기 왔다 하는

데 날짜가 의외에 천추되어서 인제는 한만히 지체할 수가 없습니다.”“아무리

급하더라도 하루쯤은 더 묵어갈 수 있겠지.” “군총을 뽑는 기한이 있으니까

하루라도 일찍이 서울 가 있어야 낭패가 없겠습니다.” 하고 봉학이가 급히 갈

사정을 말하는데, 꺽정이가 아래위를 툭 자른 듯한 말소리로 “아따, 내일 가자꾸

나.” 하고 곧 허담을 가리키며 “이 대사와 인사나 해라.” 하고 봉학이에게 인

사를 붙이었다. 허담은 앉기 전 입장할 때 봉학이가 머리 한번 굽신한 것을 인

사로 치고 “인사는 아까 다 마치었는데 또 무슨 인사를 하란 말이야.” 하고

말하니 꺽정이가 머리를 굽신하여 보이며 “초면에 이런 인사가 어디 있소?”

하고 허담의 말을 대답하고 나서 곧 봉학이를 돌아보며 “이 대사는 말 타는 법

을 가르쳐 주신 내 선생님이다.” 하고 일러 주었다. 봉학이가 공손한 말씨로 허

담과 인사를 마친 뒤에 꺽정이를 보고 “형님은 선생님도 많소.” 하고 웃으니

“선생님이 많아도 못쓸 선생님은 하나도 없다.” 하고 꺽정이도 역시 웃었다.

덕순이가 “너의 검술 선생은 아직 그저 운달산에 있다더냐?” 하고 물으니 꺽

정이가 “벌서 돌아가셨소.” 하고 대답하며 손가락을 꼽아보더니 “돌아간 지

가 올해 벌써 칠 년이나 되었소. 소상 지나간 뒤에 내가 기별을 듣고 평산을 갔

다 왔지요.”하고 말하였다. “그럼 그때 연중이를 만났겠구나?” “만났지요.”

“그런 말을 이때껏 나보고 아니하는 사람이 있단 말이냐?” “언제 말이 날 계

제가 있었을새 말이지요.” “너의 선생님들은 못쓸 사람이 없는가 보다마는 정

작 너는 못쓸 사람이다.” 하고 덕순이가 한번 허허 웃고 나서 다시 말하였다.

“연중이가 나보다도 두 살이 손위니까 많이 늙었겠다.” “육 년 전에 볼때 사

십 안팎 사람 같습디다. 걱정이 없으니까 그렇게 쉬이 늙지 않을 것이오.” “걱

정이 없다니? 연중이 신세에 걱정이 없어?” “무슨 걱정이 있어요? 평산부사

따위로는 연중이만큼 호강 못할걸요 보기에는 신세만 막상 좋습디다.” “종없

는 소리 작작해라. 그 호강이란 것이 오죽한 호강이냐?” “그러면 댁에서 유모

의 아들로 천대를 받는 것이 호강이란 말씀이오?” “너하고는 말을 할 수가 없

다.” 하고 덕순이가 말을 그치었다. 얼마 뒤에 봉학이가 대사를 보고 “제가 전

장에 나가면 성공하겠습니까?” 하고 물으니 대사는 “내가 성공 못한다고 말하

면 안 나갈 터인가?” 하고 웃고 꺽정이는 “한번 나가기로 작정했으면 그대로

나갈 것이지, 성공 여부를 인제 물어 무엇하느냐.” 하고 책망하였다. “형님만

같이 나간다면 맘이 든든하겠소.” 하고 봉학이가 말하는 것을 허담이 듣고 “

그건 참 좋겠군. 한번 전장에 나가서 천하 장사의 솜씨를 보여 보지.” 하고 역

시 꺽정이를 권하여 “전장에 나가시기로 작정되면 내가 말을 드리지.” 하고

사랑하는 말을 주겠다고까지 말하였다.

 

9

이튿날 꺽정이는 허담의 주는 말을 받아가지고 봉학이와 같이 칠장사를 떠나

서 서울로 올라왔다. 꺽정이나 봉학이가 다같이 서울에 일가친척이 없는 터이라

객주를 잡고 들게 되었는데, 객주에 들며 곧 봉학이가 주인 늙은이를 불러가지

고 “군총 뽑는다는 것이 어떻게 되었소?” 하고 물은즉 늙은 주인이 “뽑기는

뽑는답디다만 전장에 나가기를 자원할 사람이 어디 있나요. 억지러 조발할 터이

랍디다.” 하고 대답하고 “그래서 아들 있는 사람은 아들을 피접 보내고 아우

있는 사람은 아우를 피접 보내느라고 집집마다 야단들이오. 나도 아들놈을 시골

저의 외가로 보내 버렸소.” 하고 묻지도 않는 말을 수다스럽게 지껄이었다. “

난리는 어떻게 되어 간답디까? ”요새 거의 날마다 접전이 있는 모양인데 우리

나라 군사가 형편이 없는갑디다.“ ”서울서 출진하기가 급했구려.“ “방어사

하나는 일전에 동소 군사를 거느리고 선발로 떠났소” 동소가 어디요?” “오위

도총부 전위를 동소라고들 말합니다” “방어사가 둘이 났다지요?” “방어사가

나면 좌우방어사 둘이 나는 법입니다. 방어사 하나는 일간 마저 떠난답디다”

“도순찰사는” “도순찰사도 물론 출진할 터이지만 여러 가지 미비한 것이 있

는지 아직 떠난다는 말이 없습디다” “군기가 미비한가요?” “개를 보고 올무

맺는 셈이니까 미비한 것이 군기뿐이 아니겠지요만, 군기시에서도 요새는 야로

소, 조갑소 할것 없이 일을 밤 도와 하는 모양이랍디다” “미리미리 준비를 못

해 두고. 제기, 나랏일도” “미리 준비해 둔 것을 없애지만 않아도 무던하지요.

이번에도 군자감에 저축한 군수물품이 물목과 많이 틀리는 것을 발각하고 군자

감의 정첨정 이하 봉사, 참봉까지 잡아가고 옭아가고 야단이 났습디다. ” 꺽정

이는 말참예 아니하고 바깥을 내다보고 앉았다가 남산위에서 검은 연기가 솟는

것을 바라보고 “이애, 남산에 연기가 난다” 하거 말하여 봉학이가 머리를

돌리려 할때 주인이 “봉화둑에서 올리는 연기구려. 연기 번수 수를 좀 헤어

보시오. 다섯 번 아닌가. 요지막은 늘 다섯 번씩이오. ” 하고 말하였다.

“다섯번이면 어떻단 말이오?” 하고 봉학이가 물으니 “봉화 드는 법이 평시에

한 번 들고, 도적이 현형할 때 두번 들고, 도적이 근경에 들어올 때 세 번

들고, 도적이 지경에 침범할 때 네번 들고, 다섯 번 들면 접전하는 것입니다.”

하고 아는 체하며 대담하였다. 이때 서울에는 남산 봉화둑의 다섯째 봉화가

밤낮 그치지 아니하여 밤이면 봉화가 번쩍번쩍 빛나고 낮이면 낭연이

물씬물씬 올라왔었다. 남산 다섯째 봉화는 양천 개화산으로 들어오는 것이

니 이것이 곧 충청,전라에서 오는 해로봉화 이었다. 꺽정이와 봉학이가 군총으로

뽑히러 갔을 때 군총 뽑는 일을 맡아보던 병조 무비사 관원들이 전장에 나가기

자원하는 것을 기특히 생각하여 두 사람을 즉시로 불러들이게 되었다. 봉학이가

먼저 불리게 되었는데 관원이 봉학이에게 말 몇마디 물어보고는 곧 거주 성명을

군적에 올리고 어느 날 어디로 와서 군기를 타가라고 말을 일러서 내보내고 다

음 차례에 꺽정이가 불리었다. 대상에 앉았던 관원들이 대하에 와서 섰는 꺽정

이의 신수를 내려다보고 서로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 관원이 입을 열어

말을 물었다. “너 어디 사느냐 ?” “양주읍내 삽니다” “나이 몇살이냐?”

“서른 다섯 살입니다” “부모와 처자가 있느냐?” “아버지가 있고 처자도 있

습니다” “네 집에서는 농사하느냐?”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 하고 놉니다

“ ”아무것도 아니하고 놀아 ? 네아버지는 무얼하는 사람이냐?” “소백정입니

다” “소백정” 하고 그 관원이 말 묻는 것을 그치고 옆에 앉았는 관원과 서로

돌아보며 되느니 안 되느니 하고 몇 마디 말을 지껄이고 나서 다른 말이 없이

“고만 물러나가거라” 하고 분부하였다. 봉학이가 먼저 나와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꺽정이의 나오는 것을 보고 그 앞으로 와서 싱글벙글 웃으면서 “형님

은 나보다 더 쉽게 끝냈구려. 아이구 시원하오” 하고 꺽정이의 얼굴을 치어다

보니 아랫입술이 윗입술을 치밀어서 윗수염이 콧구멍을 막고 눈동자가 아래로

내려와서 검은자위 위로 흰자위가 보이었다. 걱정이가 심사가 틀리거나 골이 날

때에 눈동자를 아래로 처뜨리는 것은 아이 적부터 있던 버릇이라, 봉학이가 그

것을 잘 아는 까닭으로 얼른 웃음을 거두고 말을 물었다. “형님 무엇에 화가

났소?” “객주로 가자” 하고 꺽정이가 다른 말이 없이 앞서 걸어나가니 봉학

이는 뒤를 따라어며 고개를 갸우뚱거리었다. 얼마를 오다가 꺽정이가 뒤를 돌아

보며 “나는 오늘 집으로 내려가겠다”하고 말하니 봉학이가 “대체 어찌된 일

이오? 사람이 갑갑치 않게 말이나 좀 자세히 해주시오” 하고

꺽정이의 옆으로 나섰다. “나는 틀렸다” “틀리다니? 형님이 뽑히지 못했단

말이오? 대상에 앉았던 놈들이 눈깔이 멀었던 게구려” “내가 백정의 아들이라

고 그것들이 되느니 안 되는니 하고 수군거리더니 그대로 나가라는구나” “백

정의 아들은 군사 노릇도 못 한단 말이오? 별 망한 놈의 일을 다 보겠소” 하고

봉학이가 분이 올라서 얼굴이 새 빨개졌다. 꺽정이와 봉학이가 객주에 돌아왔을

때, 꺽정이는 먼저 방으로 들어가고, 봉학이는 물을 얻어먹기가 급해서 밖에 남

아 있다가 주인 늙은이가 떠다 주는 냉수 한 그릇을 한숨에 들이켜고 나서 손바

닥으로 입을 씻고 “여보, 노인께 물어볼 말씀이 있소” 하고 말하니 늙은 주인

이 손에 빈 그릇을 받아들고 서서 “무슨 말씀이오?” 하고 봉학이의 얼굴을 들

여다보았다. “군총을 뽑는데 보는것이 무엇무엇이오?” “무과를 보이는 것이

아니니까 보는 것이 무어 있겠소. 병신이 아니면 다 뽑겠지” “문벌이나 지체

를 보아서 뽑나요?” “별소리를 다하시오. 막이군사로 뽑는데 문벌이란 다 무

어고 지체란 다 무어요” “그러면 백정의 아들도 뽑겠구려?” “백정의 아들이

라고 뽑지 말란 법은 없겠지요. 그렇지만 군사들이 백정이 섞여 있는 줄 알면

같은 군사들이 좋아 안할 터이니까 백정은 백정대로 따로 뽑으면 모를까 섰어

뽑지는 않을는지 모르지요” “좋아 안할 건 무어요?” “아무리 진중에서라도

백정 같은 천인과 같이 뒹굴기를 누가 좋아하겠소” “제기, 망한 놈의 세상 다

보겠다” 하거 봉학이가 혼잣말하며 돌아서서 방으로 들어왔다. 꺽정이가 무엇

을 생각하는 모양으로 머리를 숙이고 앉았는데, 봉학이가 그 옆에 나가 앉으며

“형님, 오늘 나하고 같이 떠납시다” 하고 풀기 없이 말하니 꺽정이가 “너는

왜?” 하고 머리를 치어들었다. “이런 놈의 세상에 난리는 치러 나가 무어하겠

소. 시골 구석에 가서 농사나 지어먹고 엎드려 있을라오” “너의 외조모의 한

풀이는 어떻게 할라느냐?” “한을 풀어준다고 죽은 이가 알 터이오. 고만두겠

소” “내가 지금 생각한 일이 있다. 너는 너대로 전장에를 나가거라” “나 싫

소” “군총에 뽑히는 것은 나의 본래 소원도 아니니깐 뽑히지 못해서 낭패될

것이 없다. 내가 어째 맘이 쏠렸는지 한번 나가기로 작정 한 것을 지금 와서 아

니 나간다기가 싫으니까 나는 나대로 전장에를 나갈 터이다” “어떻게 나간단

말이오?” “혼자 나가면 못쓰느냐?” “그러면 나도 형님과 같이 갑시다” “

너는 그렇게 할 것이 없다. 네가 날 따라가서는 외조모의 한을 풀어 줄 도리가

없으니까 너는 잔말말고 군총에를 들어가거라” 하고 꺽정이가 봉학이에게 말을

일렀다. 꺽정이는 봉학이의 성공을 도와줄 겸 왜전을 한번 구경하려고 출전할

맘을 먹게 된 터이라, 전장에서 전공을 세우더라도 공이 세상에 드러나기를 바

라지 아니하므로 항오에 끼여서 군율에 얽매이느니보다 필마 단기로 맘대로 진

상에서 출몰하는 것이 수단을 다하기에 도리어 낫다고 생각하였다. “내가 내

풀로 따로 가는 것이 군사로 각 떼에 매이어 가는 것보다 조금도 못할 것이 없

다. 내가 너의 뒤를 밟아 내려가면 중로에서든지 진상에서든지 서로 만나 볼 수

도 있을 것이다” 하고 꺽정이가 봉학이에게 말하는데, 봉학이가 “형님, 꼭 뒤

에 오실 테요?” 하고 뒤를 다지다가 “ 내 말을 믿지 않는 것이 네가 사람이

냐?” 하고 꺽정이가 꾸짖으니 봉학이는 다시 두말하지 못하였다. 그 뒤에 봉학

이는 도순찰사 휘하의 아병이 되어 도순찰사 행진에 따라가게 되었는데, 꺽정이

는 그 동안에 양주 집에 내려가서 병신 아버지의 시중을 잘 들라고 집안 식구에

게 당부하고 너무 상없이 장난치지 말라고 백손에게 말을 이르고 집을 떠나 다

시 서울로 올라와서 며칠동안 두류하며 행장을 차리었다. 도순찰사의 진이 떠난

뒤에 꺽정이는 전립 한 닢과 군복 한 벌을 장광도와 같이 보에 싸서 안장 뒤에

붙이고 칠장마를 채질하여 행진 뒤를 따라갔다. 칠장마는 허담의 준 말이니 꺽

정이가 그 말을 받아 가지고 칠장사에서 떠닐 때에 덕순이가 좋은 말은 이름이

있는 법이라고 절 이름을 떼어서 이름지어 준 것인데 꺽정이는 칠장이 절 이름

보다도 말이름으로 더 좋다고 좋아하였었다. 이때 왜변은 어떠하였던가? 처음에

와선 육십여 척이 도적질 하러 들어올 때, 장흥부사 한온이 수하 군병을 거느리

고 강진 가리포로 왜를 막으러 나가다가 길에서 전라도 병사 원적을 만났었다.

원적은 친히 왜를 막으려고 병영 군마와 영암 군졸을 통솔하고 나온 길인데, 장

흥 군병의 정예한 것을 보고 한온을 자기 좌우에 붙들어 둘 맘이 나서 가리포로

가지 말고 자기를 따라서 영암 달량영 작은 성으로 함께 몰려들어가는 것이 득

책이 아닌 줄까지 알았으니 병사의 말을 거역할 길이 없어서 영암군수 이덕견과

같이 병사의 뒤를 따라 왔었다. 왜가 달량성을 에워쌌을 때 원적은 성 북문을

지키고 한온은 성 남문을 지키었는데, 원적이 왜의 강한 것을 보고 겁이 나서

남문으로 와서 “왜적이 북문으로 많이 덤비어 내가 북문을 지탱할 수 없으니

어찌하면 좋은가?” 하고 한온에게 말하니 한온이 성을 내며 “주장의 맘이 한

번 흔들리면 군심이 와해될 것 아닙니까. 내가 죽기를 다하여 북문을 지킬 것이

니 지금부터 남문을 지키십시오” 하고 남북문을 바꾸어 지키게 되었다. 원적이

남문에 있어 본즉 왜적이 북문에는 가지 않고 모두 남문으로 모여드는 것 같아

서 끝끝내 지킬 용기가 없어서 자기 머리에 썼던 전립을 벗고 자기 몸에 입었던

군복을 벗어서 성 아래로 내려뜨리어 항복 비는 뜻을 보이었다. 왜는 이것을 보

고 남문을 지키는 장수가 하잘것이 없는 위인인 줄을 알고 힘을 다하여 남문을

들이쳤다. 왜의 아우성 소리 속에 남문이 마침내 깨어지니 원적은 머리를 싸안

고 벌벌 떨다가 왜의 칼에 맞아 죽고, 이덕견은 목숨을 빌어 보전하여 왜에게

사로 잡히었다. 북문을 지키던 한온이 남문이 깨어진 것을 알고 손에 잡았던 활

을 땅에 동댕이치며 “인제는 죽었다” 하고 소리를 지르고 곧 장흥사수들에게

“너희들은 할 수 있는대로 각기 도망해 나가거라” 하고 눈물 섞어 말을 일렀

다. 그러나 장흥 사람들이 거지반 다 도망하지 아니하고 그 부사와 같이 목숨을

버린 까닭으로 달량에서 죽은 군사 중에 장흥 사람이 제일 많않었다. 달량성이

함락된 뒤에 해남 어란포 수군영과 강진 마도 수군영, 장흥읍내 장녕성과 강진

병영과 강진 가리포 수군영이 모두 왜에게 함락되었는데, 강진현감 홍언성은 가

뭇없이 고을에서 빠져나가고, 전도군수 최린은 슬그머니 몸을 피하고, 전라우도

수사 김빈은 변변히 싸워보지도 아니하고 달아나고, 전라좌도 수사 조안국은 구

원 오는 체하고 중로에서 지체하고, 광주목사 이희효는 광주를 떠날 수 없다고

핑계하고 장흥 청병을 거절하고 해남 현감 변협은 장흥 구원 왔다가 볼꼴 사납

게 패군하고 목숨을 도망하여 해남으로 돌아갔다. 이리하여 왜는 이 고을 저 고

을을 무인지경같이 돌아다니는데 지나는 곳마다 빼앗느니 재물이요, 죽이느니

사람이었다. 전라감사 김주가 약간 군병을 거느리고 영암으로 달려왔는데, 오기

만 왔지 어찌할 방략을 몰라서 다만 뻔질나게 장계질만 하고 앉았었다. 전라감

영 비장 하나가 김주를 보고 말하기를 왜적이 장흥을 깨친 뒤에 기세가 더욱 강

성하여 북으로 영암을 범할 일이 눈앞에 있는데, 영암이 만일 위태하면 나주 이

상이 모두 동요되어 원수군의 대군이 서울서 내려오더라도 주둔 할 곳이 없을

것인즉 영암은 반드시 지켜야 할 터이나 그러나 감사는 일도의 주장이나 뒤로

퇴진하는 것이 좋고, 전주부윤 이윤경이 지략이 있어 대사를 감당할 만하니 영

암을 와서 지키게 하는 것이 좋다는 뜻으로 말하여 김주는 나주로 퇴진하고 이

윤경을 불러서 가수성장으로 정하여 영암을 지키게 하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호

반의 김경석, 남치금 두 사람을 좌우방어사로 뽑고 호조판서 이준경을 도순찰사

로 정하여 선후로 출진하게 하였는데, 도순찰사 이준경은 곧 가수성장 이윤경의

아우이었다. 이준경이 나주에 와서 주둔할 때 영암은 벌써 왜에게 에워싸이어

있었으므로 공사에 맘이 다같이 급하여 곧 두 방어사에게 영암으로 진군할 것을

명하였다. 방어사 남치근이 나주에서 떠날 때에 도순찰사 앞에 나와서 “왜적과

접전하는 데는 사수가 제일 요긴하온데 소인 수하에 사수가 극히 부족하오니 사

오십 명쯤만 휘하에서 뽑아 주시기를 바랍니다”하고 품하여 이준경이 허락하고

즉시 중군을 불러 명하였다. 중군이 밖으로 나와 별장을 불러 세우고 “사수 사

십명만 뽑아서 대령해라” 하고 명령하여 순찰사 휘하 군병 중에서 남치근에게

로 갈 사수를 뽑게 되었다. 군중 물계를 짐작하는 사수들은 남치근의 위인이 혹

독하여 군사의 목슴을 초개같이 여기는 줄 알고서 각각 모피하려고 오장에게 청

하고 또 단장에게 청하는데, 왜와 접전하게 되기를 고대하던 봉학이는 도리어

지원하고 나섰다. 봉학이가 뽑히기를 자원할때 물계 아는 사수는 “저 자식은

천둥벌거숭이로군” 하고 손가락질을 하며 웃었다. 영암군은 소읍이 아니요, 또

요해처이므로 성이 토성이 아니고 당당한 석축이다. 장흥부의 장녕성은 주가 천

척안에 드는 작은 성이니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전라도 병마 절도사가 좌정하고

있는 곳인 병영성이 삼천 척이 못 되고, 광 나주 목사라고 광주와 어울러 치는

목사 치하의 나주성이 삼천 척에 얼마 넘지 못하는데, 영암성은 주가 고가 십오

척이다. 영암성은 이와 같이 상당히 크고 동뜨게 높을 뿐 아니라 성 안의 물도

장녕성과 같은 못이 없고 나주성과 같은 시내가 없을망정 대한불갈의 샘들이

있어서 아무리 바깥통로가 막히더라도 조만하여서는 물걱정을 할 곳이 아니다.

이윤경이 처음 성을 지키러 왔을 때 왜의 선성에 경겁한 백성과 군사들이 밤이

면 왜가 왔다고 헛놀라서 동요될 때가 많았는데 이런 때에 이윤경은 넓은 대청

에 촛불을 밝히고 앉아서 한가한 태도로 책을 보고 동요된 것이 가라앉기를 기

다려 조용히 전령 군졸 몇 사람을 보내서 순성하는 군사들을 신칙하였다. 이윤

경은 군사들보다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서 군사들이 먹는 음식으로 조석을 먹고

아침부터 밤까지 군무에 분주하였다. 군량 준비와 군기 수선을 모두 게을리 아

니하고 군사를 단속하는 일면에 그 기운 돋우기를 아울러 힘쓰고 자리에 앉았을

사이가 적도록 친히 성을 순시하고, 군사 중에 병나는 자가 있으면 몸소 의약을

보살펴 주고 틈틈이 백성들을 효유하여 인심 진정하기에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

였다. 비단 군무가 다단할 뿐 아니라 군무 이외에도 여러 가지 일이 날로 생기

어서 이윤경은 눈코 뜰 사이가 없건만는, 일을 처리할 때에 민첩할 대로 민첩하

고서도 안상한 구석이 있어서 일의 선후 도착되는 것이 없었다. 불과 얼마동안

지나지 아니하여 군사,백성 할 것 없이 모두 맘들이 일변하여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함께 죽기를 기약하니 인심이 성이되어 옛성 안에 새 성이 나타나며부터

영암성은 굳은 품이 금성탕시로도 견주어 말하기 어려웠다. 처음에는 오지도 아

니한 왜에게 헛놀라던 사람들이 성 아래에 나타난 왜를 보고도 놀라지 아니하였

다. 그러나 왜들이 사람의 목을 칼끝 창끝에 꿰어들고 가로 뛰고 세로 뛰는 것

을 성 위에서 내려다볼 때 군사들도 얼굴에 황황한 빛이 없지 않았는데 이윤경

이 격려함을 마지 아니하여 나중에 군사는 고사하고 예사 백성들까지 성 밖에

왜를 향하여 아이들 장난하듯이 손가락으로 욕질하였다. 영암성을 사방으로 둘

러싸서 물 부어 샐 틈이 없도록 하자면 만 명 사람도 부족할 것인데, 많게 보아

서 천 명이 넘을까말까한 왜에게 성을 에워쌀 힘이 있을 까닭이 없다. 왜가 한

떼로 몰리어 성의 한편을 깨쳐 보려고도 하고 여러 떼로 나뉘어 성의 이 문 저

문을 함께 들이치려고도 하였다. 이윤경은 장졸을 신칙하여 왜가 멀리 있을 때

는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가 가까이 들어온 뒤에 활로 쏘아서 화살을 많이 허비

하지 아니하고, 왜가 성에 사다리를 놓고 올라오려고 할 때에는 불끄럼지를 내

어 던지거나 끊는 물을 내려부었다. 왜가 할 수 없으면 성 위를 바라보고 주먹

질하며 뒤로 물러갔다. 왜가 하루도 몇 번씩 밀물같이 들어왔다 썰물같이 나가

는데 성 안에서는 이것을 소일거리 쇠임직이 알게 되어서 조금도 겁내지 아니하

였다. 왜가 어두운 밤을 타서 성을 치기도 한두 번이 아니지마는, 이윤경이 낮번

군사보다도 밤번 군사를 일층 더 신칙하는 까닭에 번번이 낭패 보고 물러갔다.

왜가 성을 침범한 뒤로 이윤경은 성문을 굳이 닫고 나가지 아니하여 장졸들이

한번 나가 접전하기를 청하니 이윤경이 “가만히들 있거라. ” 하고 눌러 두었

다가 어느 날 저녁때 왜들이 맘이 해이하여 대오가 산란하여진 것을 성 위에서

바라보고, 성문을 열고 군사를 풍우같이 몰고 나가서 왜의 목 삼십여 개를 베어

가지고 들어왔다. 며칠 뒤에 왜의 대오가 전날보다도 더 산란한 것을 성 위의

장졸들이 바라보고 또 한번 나가기를 청하니 이윤경이 “이것은 우리를 꾀이려

는 것이다. ” 하고 허락하지 아니하였더니 저녁때가 다 되어 왜가 물러갈 때에

양편 길 옆에서 난데없는 왜들이 꾸역꾸역 나오는 것을 보고 성위의 장졸들은

이윤경을 귀신같이 여기었다. 이윤경이 자기의 가진 병력이 영암성을 지키기에

는 넉넉하나, 멀리 쫓아 버리기에는 부족한 까닭으로 초조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에 원수가 나주에 유진하고 방어사가 영암으로 출진하는 기별을 듣고 날마다

기다리는데 어느 날 저녁때 성 밖에 왔던 왜가 창황히 뒤로 물러나가며 왜의 앞

에 멀리 진토가 일어나는 것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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