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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경은 왜가 꾀어내려고 꾀쓰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여 군관 이삼 인과 같이
성 위에 서서 진토 일어나는 곳을 멀리 바라보고 있는 중에 석양 햇빛에 기치가
어렴풋이 보이었다. 군관 중에 눈 밝은 사람 하나가 이윤경의 옆으로 가까이 와
서 “방어사진의 선봉대가 분명합니다. ” 하고 아뢰자 다른 군관이 곧 그 뒤를
이어 “우리가 지금 왜적의 뒤를 엄습하면 성공할 것이 아니오이까? 곧 출전하
도록 지휘합시지요. ” 하고 품하니 이윤경이 고개를 가로 흔들며 “왜적이 물
러갈 때 뒤에 매복을 남겼기가 쉬우니 아직 동정을 보지. ” 하고 군관의 말을
좇지 아니하였다. “적병이 창황히 물러가는 것을 보면 그런 생각을 못했을 것
같습니다. ” “교활하기 짝이 없는 왜적이 우리가 뒤에 있는 것을 알면서 그만
생각을 못할 리가 없어. 아직 가만히들 있게. ” 하고 이윤경이 말하여 군관들은
다시 다른 말을 하지 못하였다. 이때 왜는 그 앞에 나타난 진을 향하여 한숨에
덮칠 것 같은 기세를 보이더니 득리하지 못한 모양인지 분분히 뒤로 물러났다.
왜가 성을 칠 때 진 쳤던 곳에는 길 옆에 작은 수림이 있었다. 왜가 되쳐들어와
서 수림을 의지하고 진을 치며 앞에 있던 진이 왜의 뒤를 쫓아들어와서 기호와
복색이 성 위에서 보이는데 그 진이 다른 진이 아니라 곧 방어사 남치근의
진이었다. 선봉대에는 사수들 외에 돌팔매질꾼 한 패가 있어서 빗발같이 쏟아
지는 화살과 돌팔매에 왜가 앞으로 덮치지 못하고 뒤로 밀린 것 같았다.
이윤경의 옆에 있는 군관들이 나가 싸우고 싶은 맘이 탱중하여 주먹을
문지르고 손바닥을 비비면서 이윤경의 눈치를 살피는데, 이윤경이 이것은 본체
만체하고 성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군관 중 한사람이 참다 못하여 “왜적이 먼
저 복병을 했었더라도 지금쯤은 다 거두었을 것 아닙니까?” 하고 물으니 이윤
경은 말이 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 이었다. “인제 앞뒤로 치면 좋지 않겠읍니
까?” “가만히 있어. ” “가만히 있다가 때를 놓치면 어찌합니까?” “우리의
나서는 것을 방어사가 공 다툼하는 줄로 알아서는 못쓰니까 형편 보아서 우리는
방어사가 첫진에 공 세우는 것을 구경이나 하세.” 군관들이 이윤경의 말을 듣
고 모두 얼굴에 낙심하는 빛이 보이니 이윤경이 적이 웃으며 군관들을 돌아보고
“오늘 싸움에 왜적을 함몰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라 정작 대공을 세울 날이 앞에
있을 터인즉 공 못 세울까 보아 걱정들 할 것이 없네.” 하고 말하여 군관들의
얼굴빛이 곧 풀리었다. 이때 남치근이 왜진을 향하여 진을 벌리고 선봉장 소달
을 시켜서 싸움을 돋우게 하였다. 소달은 갑옷 투구로 몸을 단단히 단속하고 절
따마를 타고 진전에 나서서 큰칼을 휘두르며 “나는 방어사 장하의 소별장이다.
내 칼을 대적할 놈이 있거든 앞으로 나서거라!” 하고 큰소리로 외치었다. 왜들
이 그 외치는 소리는 알아듣지 못하나, 싸움 돋우는 것인 줄을 알고 갑옷 투구
를 갖추고 말을 탄 장수 한 사람이 진전으로 나서서 무어라고 알아듣지 못할 소
리를 지르더니 곧 말을 몰아 소달에게 대들었다. 소달이 맞아 싸워 수합이 못
되어서 왜장의 투구를 칼로 쳐서 깨치니 왜진에서 다른 장수가 급히 말을 재쳐
내달아서 투구 깨어진 사람을 구하여 진으로 돌려 보내고 대신 소달과 칼을 어
우르려고 할 때, 남치근이 소달을 잠시 쉬게 하려고 천총 한 사람을 보내어 소
달과 바꾸게 하였다. 소달이 본진에 돌아와서 말에서 내리기 전에 왜장이 그 천
총의 목을 베어 칼 끝에 꿰어들고 진전에서 횡행하니 소달이 이것을 보고 분기
를 참지 못하여 말을 몰아 다시 진전으로 나가서 왜장과 어우러져 싸우게 되었
다. 소달은 남치근의 수하에 제일로 치는 군관이니만큼 원력이 장사이고 칼 쓰
는 법이 능란하건마는 왜장을 당치 못하여 오는 칼을 막아내기에 죽을 힘을 다
하였다. 소달이 심겁이 나서 급히 말머리를 돌리어 본진으로 도망하려고 할 즈
음에 왜장의 날랜 칼이 소달의 머리 뒤를 범하였다.
15
소달이 안장 위에 엎드려서 겨우 왜장의 칼을 피하고 황망히 본진으로 달려오
는데, 왜장이 큰소리를 지르며 뒤를 쫓았다. 남치근이 이것을 보고 급히 사수 십
여 명을 보내어 사수들이 진전에 벌려서서 왜장을 쏘았으나 그 왜장이 머리에
투구, 목에 호황, 몸에 갑옷을 갖춘 외에 낯에 면갑까지 써서 화살을 겁내지 아
니하였다. 왜장이 소달을 버리고 사수들에게로 달려오는데, 기세가 십여 명을 한
칼에 무찌를 것 같으니 사수들이 도리어 겁이나서 제각기 뒷걸음을 쳤다. 진문
안에서 내다보고 있던 사수 한 사람이 분연히 앞으로 나서서 곧 활을 그어 대더
니 첫번에 날아가는 살이 왜장 탄 말의 한편 눈을 꿰어뚫었다. 그 말이 갑자기
들뛰어서 왜장이 억제하려고 할 즈음에 둘쨋번 살이 말의 성한 눈을 마저 꿰어
소경말이 발광치며 왜장은 마침내 말께서 떨어졌다. 남치근이 이것을 보고 왜장
을 잡으라고 호령하며 패전에 분이 난 소달이 다시 말을 타고 진전으로 내달았
다. 말을 버리고 도망하는데 소달이 말을 재쳐 쫓아가서 큰칼로 한번 내려치니
왜장의 투구에서 불이 번쩍 나며 왜장이 앞으로 꼬꾸라졌다. 소달이 말께서 뛰
어내려서 왜장의 머리를 버히려고 할 때에 왜진이 풀리며 여러 왜들이 함께 몰
려나왔다. 왜들이 일변으로 그 왜장을 구하고 일변으로 소달을 에워쌌다. 남치근
이 이것을 바라보고 급급히 장졸을 휘둥하여 풍우같이 쫓아나가서 왜들과 싸움
이 어우러질 판에 요란한 북소리가 성 안에서 울려나왔다. 왜의 괴수가 뒤에서
나는 북소리를 듣고 성 안 군사가 나오는 줄 알고 황황히 군사를 거두려고 하였
다. 그러나 앞에 있는 남치근이 왜의 거동을 보고 더욱이 싸움을 동독하여 왜는
다신 진을 뭉칠 사이가 없이 패진하게 되었다. 왜가 흩어져 도망할 때에 가까운
곳에서는 칼과 창에 찔리고 먼 곳에서는 화살과 돌팔매에 맞아서 꺼꾸러진 것이
적지 아니하였다.
성 위에서 바라보던 이윤경이 접전이 시작되려는 것을 보고 군관들에게 말을
일러서 군사를 시켜 북만 울리게 하고 여전히 성 위에서 구경하고 있었는데, 말
탄 군관 하나가 큰칼을 휘두르며 왜들을 짓치고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손가락으
로 카리키며 “저기 저 군관이 범같이 날뛰는군.” 하고 옆에 있는 군관을 돌아
보니 “그 군관이 아까 적장에게 쫓기던 사람입니다.” 하고 군관이 대답하였다.
“그 사람일까? 글쎄 그 사람 같군. 아까는 어째서 쫓겼는지 모르나 범 같은 무
서운 사람일세. 왜적이 그 칼앞에 얼씬 못하는 것을 보게.” “아까 패한 분풀이
로 죽을 힘을 다 내는가 보오이다.” “글쎄.” “왜적이 다시 진을 뭉치려는 것
같습니다.” “저판에 진이 뭉치어지나. 저거 보게, 도망질치기 시작하네.” “저
기 먼저 도망하는 것이 괴수인가 봅니다.” “괴수 명색이 설마 먼저 도망하겠
나.” 이윤경은 왜가 다 도망질 친 뒤에 방어사가 군사 거두는 것을 보고 비로
서 성 위에서 내려와서 성문을 열고 방어사의 진을 맞아들이었다.
남치근이 이날 접전에 왜의 머리 칠십여 급을 얻었는데, 그 중에 이십여 급은
소달이 혼자서 베어온 것이었다. 남치근이 소달을 불러서 “먼저 적장에게 패한
것은 죄주어 마땅하되 뒤에 역전한 공이 있어 용서하니 그리 알아라.” 하고 이
르니 말 눈을 쏘아 맞힌 사수를 불러들이라 하여 한 사람이 대령하니 남치근이
친히 말을 물었다. “너의 성명이 무엇이니?” “이봉학이올시다.” “네가 전소
에서 왔느냐?” “아니올시다. 이번에 새로 군총에 뽑히여 왔소이다.” “그러면
도순찰사 휘하에 있다가 왔느냐?” “그렇소이다.” “너 같은 사수는 희한하다.
” 하고 칭찬한 뒤에 곧 옆에 있는 중군을 돌아보며 “저 이봉학이란 아이를 단
장을 시키라고.” 하고 분부하는데 중군이 “먼저 오장을 시키지 않아도 좋소이
까?” 하고 품하니 남치근이 화를 내며 “단장은 고사하고 대번에 초관이라도
좋고 파총이라도 좋아.” 하고 호령하여 중군은 다시 두말 못하고 물러갔다. 남
치근이 이봉학의 공을 기록에 올리게 한 뒤에 곧 뒤걸음치던 사수 십여 명은 모
두 쇠도리깨로 때려 죽이게 하였다.
16
남치근이 입성한 뒤에 이삼 일 지나서 방어사 김경석의 진이 접전이 없이 입
성하였다. 좌우방어사가 한데 모이고 보니 군사도 많고 장수도 많아서 영암성은
방비가 더욱 든든하여 아무리 강한 도적이라도 감히 넘보지 못할 만하였다. 그
러나 이것은 외양뿐이고 내평은 실상 이윤경이 혼자 지킬 때만 같지 못한 것이
남치근과 김경석과 이윤경이 주장이 각각 달라서 군사들까지도 합심이 잘 되지
못하였다. 그중에 남치근이 성정이 불 같아서 군사고 백성이고 죄가 있으면 용
서없이 벌을 주되, 회술레와 매질은 말할 것도 없고 박살과 효수도 대수롭지 않
게 여기니 이윤경이 보다가 못하여 남치근과 한 자리에 모이어 앉았을 때 “이
런 때 군민의 죄를 이심하게 밝히시면 인심이 도리어 동요되기 쉽습니다.” 하
고 충곡으로 말하였더니 남치근은 “방어사가 수성장에게 절제받는 사람이 아니
오.” 하고 거드름으로 대답하여 재미없게 자리를 파한 일까지 있었다. 이윤경의
말과 같이 남치근이 너무 혹독한 탓으로 인심이 적이 동요되던 중에 나주에 있
는 도순찰사에게서 “방어사가 이미 입성한 바에 가수성장은 본부로 돌아가라.
” 하고 전령이 내려와서 소문이 밖으로 퍼지며 인심이 그시로 발끈 뒤집히었
다. 성안 백성들은 “수성장이 떠나는 날이면 이 성은 고만이니 우리도 수성장
뒤를 따라 떠나감세.” “집이고 재물이고 첫째 목숨이 살아야 하지 않나? 두말
말고 그리 합세.” 하고 수선수선하였다. 그때 도순찰사 이준경이 전령 외에 형
제간의 사찰로 “형님은 이미 소임을 다하였으니 인제 속히 왜적을 피하시라.
” 하고 그 형을 권하였는데, 이윤경이 역시 사찰로 “왜적의 진퇴가 무상하여
성 지키는 소임을 아직 다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평소에 항상 나라를 위하여
죽기를 원하던 나로서 지금 이 성을 버리고 갈 수는 없노라.” 하고 거절하였다.
그 뒤에 나주에서 또 사람이 왔었는데, 이윤경이 문 지키는 군사를 신칙하여 성
안에 들이지 아니하고 온 사람이 잘 돌아서지 아니하는 것을 활로 쏘아 쫓아버
리게 하였다. 나주서 온 사람을 활로 쏘아 쫓았단 말이 성안에 퍼진 뒤에야 수
선수선하던 것이 비로소 가라앉아서 돌로 쌓은 성안에 인심으로 쌓았던 성이 다
행히 무너지지 않게 되었다.
이윤경과 이준경은 당시에 난형난제라고 일컫던 형제라 인품이 서로 비등하나
형만한 아우가 없다는 말대로 아우가 형만 못한 것이 많았다. 그중에도 지모방
략은 아우가 형을 따를 가망이 없었다. 어렸을 때 이야기로 형제의 지략이 현격
한 것을 볼 수 있으니 그 이야기는 이러하다. 그의 조부 되는 이세좌와 그의 부
친 되는 이수정이 연산조 때 사화에 죽은 까닭에 이윤경, 이준경이 육칠 세밖에
아니 된 어린아이로 멀리 귀양가게 되었었는데, 형제 같이 귀양살이하는 중에
옷이 이주머니가 되어서 어느날 준경이 온몸을 끄적거리며 울고 앉았는 것을 보
고 “너 새 옷이 입고 싶으냐?” 하고 웃으며 물으니 준경이 눈물을 가로 씻고
세로 씻으며 “새 옷이 어디서 나오?” 하고 물었다. “가만히 있거라. 내가 새
옷을 입게 하마.” 하고 꾀를 내어 점고받는 전날 저녁에 형제가 같이 입은 옷
을 벗어서 군불 아궁에 넣어서 태워버리었다. 이튿날 보수인이 두 벌거숭이가
앉았는 것을 보고 관가에 아뢰어서 원이 급히 새옷들을 지어 주게 하였다. 그때
윤경이 나이가 조금 많아서 꾀가 나았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윤경, 준경의
형제가 자치동갑인 까닭에 꾀가 더 나고 덜 날 것이 없었고 윤경이 특히 천생이
지모가 많았던 것이다. 이준경이 그 형이 영암을 떠나지 아니할 줄을 안 뒤에는
좌우방어사에게 영을 내리어 수성 일절에는 방어사라도 수성장의 의견을 좇으라
하여 남치근과 김경석은 “원수가 공에도 사를 본다." 하고 불쾌한 맘이 없지 않
았으나, 원수의 영을 거역할 길이 없어서 매사를 이윤경과 의논하게 된 까닭으
로 영암성의 방비가 다시 안전하게 되었다. 왜가 다시 나타나기 전에 좌우방어
사의 부하들은 별로 일이 없었다. 어느 날 식전에 남치근이 군관 한둘을 데리고
부하 군사들의 숙소를 돌아보는데, 한 곳에 이르니 군사들의 손뼉치고 웃는 소
리가 밖에까지 들리었다. 남치근이 미간을 찌푸리고 안에를 들어선즉 군사 한
떼가 죽 둘러서서 무엇을 들여다보다가 쉿소리에들 놀라서 일시에 좌우로 갈라
섰다. 군사들이 둘러섰던 곳에 유엽전이 쥐눈을 꿰어뚫고 나가서 땅바닥에 들이
박히었었다. 방어사를 따라온 군관 한 사람이 그 쥐를 들여다보고 가까이 섰던
군가에게 “누가 이것을 쏘았느냐?” 하고 물은즉 그 군사가 말이 없이 손을 들
어 한 사람을 가리키는데, 그 사람이 곧 왜장의 말눈을 쏘던 사람이었다. 그 군
관은 “몹시도 활을 쏘고 싶든가 보다”하고 혀를 차고 돌아섰다. 남치근이
미간의 주름을 펴고 그 사람을 바라보며 “네가 이봉학이라지?”하고 물어서 이
봉학이가 “네”하고 대답한 뒤에 살 맞은 쥐를 가리키며 “저것이 무슨 장난이
냐? 재주 자랑이냐?” 하고 가볍게 꾸짖으니 봉학이가 “아니올시다” 하고 허
리를 굽신하였다. 군사에게 말 묻던 군관이 봉학이 옆에 와서 가만히 “쥐고기
가 먹고 싶던가?” 하고 조롱하여 봉학이가 “내가 감질난 어린아이요?”하고
말대꾸를 하는데 부지중에 목소리가 좀 커서 그 군관이 나직한 목소리로 “존전
에서 방자스럽게 무슨 큰소리야!”하고 꾸짖었다. 남치근이 다시 미간을 찌푸리
고 “왜 쥐를 쏘았느냐?”하고 봉학이가 물으니 “쥐가 참새와 싸우는 것을 여
럿이 구경하옵다가 소인더러 쥐와 참새의 눈을 쏘아보라고 말들 하옵기에 장난
삼아서 쏘았습니다. 쥐고기를 먹으려고 한 것이 아니 올시다” 하고 봉학이가
하지 아니하여 좋을 발명까지 하였다. 남치근이 봉학이의 발명을 듣고 찌푸렷던
눈살을 펴고 “그래, 쥐만 잡았지 참새는 놓쳤구나”하고 말하여 봉학이는 싱글
싱글 웃고 있는데 오장 하나가 눈께 살을 맞아 대가리가 바숴진 참새를 방어사
앞에 잦다 놓으며 “참새는 날아가다가 살을 맞고 떨어졌소이다”하고 말을 아
뢰니 남치근이 빙그레 웃으며 한번 유심히 봉학이를 바라보는데, 그 눈치가 신
통히 여기는 모양이었다. 남치근이 군사의 숙소를 돌아 들어간 뒤에 봉학이를
대에서 뽑아올려서 자기 신변에 두게 되었는데, 봉학이의 위인이 영리하여 뜻을
잘 받드는 까닭으로 불과 며칠 안 지난 뒤부터 남치근이 봉학이를 다시 없이 신
임하게 되었다. 어느 날 이윤경이 좌우방어사를 동헌으로 청하여 점심을 대접하
는 자리에 남치근이 봉학이를 불러오게 하였다. 점심이 끝난 뒤에 수정장이 좌
우방어사와 같이 앉아서 봉학이의 활재주를 구경하게 되었는데, 김경석이 자랑
하는 남치근을 무안 보이려고 아무쪼록 쏘지 못할 것을 생각하고 있다가 마침
동헌 앞마당에 있는 느티나무에 까치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네가 참
새 눈을 쏘았다니 저기 느티나무에 앉은 까치의 왼쪽 눈을 쏘아보아라”하고 봉
학이에게 분부하였다. 봉학이가 고개를 비틀고 “왼쪽 눈만 맞추기는 어렵소이
다” 하고 대답하니 김경석이 다시 말하기 전에 남치근이 “참새 눈을 쏘는
놈이 까치 눈을 못 쏜단 말이냐?”하고 화증을 내었다. 김경석은 남치근의 얼굴
을 보며 빙글 웃고 이윤경은 “왼쪽 눈 할 것 없이 그대로 까치를 쏘아보아라.
까치만 쏘아 맞혀도 날 쏘는 활이다” 하고 말한즉 봉학이가 싱끗 웃으며 “외
눈 하나만 쏘아 맞히려면 까치가 죽지 않고 날아갈 듯하여 쏘기가 어렵다고 말
씀을 아뢰었습니다. 만일 왼눈에서 오른눈까지 꿰어뚫어도 좋다시면 한번 쏘아
보겠습니다”하고 말을 아뢰는데, 남치근이 “잔소리 말고 어서 쏘아라” 하고
호령기 있는 말로 분부하였다. 봉학이가 만일 실수하여 까치눈을 쏘아 맞히지
못하면 자기의 주장인 남방어사가 무색을 볼 뿐 아니라 남방어사 솜씨에 자기의
목숨까지 위태할는지 모르는 까닭으로 까치 눈을 쏘기 좋은 자리로 골라 가 서
서 일심정력을 다 들이어 활을 잡아당기었다. 봉학이가 깍지 손을 떼고 활을 내
리기 전에 까치가 깍 하며 펄쩍 뛰었다. 남치근이 자리에 들어서서 뜰 아래에
섰는 군사들을 내려다보며 “까치가 떨어졌지야?”하고 묻고 곧 “어서 나가 집
어오너라”하고 분부하였다. 군사 한 사람이 쫓아나가서 살 맞아 떨어진 까치를
살째 집어들고 들어오는데, 다른 군사들을 보이느라고 걸음이 재지 못하니 남치
근이 조급하게 “빨리 이리 가져오지 못하느냐!”하고 호령하였다. 마루 위에 섰
던 군관이 군사들에게 까치를 받은 뒤에 이윤경이 “그래, 왼편 눈이 맞았는가?
”하고 물으니 군관이 “네” 하고 대답하며 화살이 두 눈에 가로질린 까치를
내어 들어 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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